연재 | 완성된 체크리스트 – 성공한 진보교육의 자화상 ②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민주도, 시민도, 교육도 없다
문호진 mh29@naver.com
의사, 《수능 해킹》 공동 저자
연재를 시작하며체크리스트는 교육을 대체해 버렸다. 이 연재는 이 한 문장을 풀어 읽기 위한 시도다. 관료제가 공통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이 프로토콜은 교육이라는 분야에서 특별하게 작동한다. 세무서나 병원에서는 기록이 아무리 완벽해도 세금이 실제로 걷혔는지, 환자가 나았는지가 따로 검증된다. 반면 교육의 결과는 한 사람의 성장과 함께 오랜 시간에 걸쳐 드러나는 것이어서 오늘의 교실에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지금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교육에서는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일 자체만으로 곧 업무가 이루어진 것처럼 간주하기 쉽다. 그런데 교육의 가장 깊은 층은 애초에 목록화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발달이란 무엇인가, 배움은 어떤 순간에 일어나는가, 교실에서 한 아이를 학교에 붙잡아 두는 관계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가장 중요한 변화들은 평가지로 옮기는 순간 의미가 증발하고, 수치로 환산하려 하면 이미 다른 무엇이 되어 있다. 기록하는 순간 왜곡되는 것, 측정할수록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는 것들이 교육의 가장 깊은 층을 이루고 있다. 결국 체크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 체크리스트가 교육의 전부가 되어 버린 상황이 문제다. 그리고 그 전환은 진보 교육감의 시대에 가장 조용히, 가장 완전하게 완성되었다.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라는 성과는 그 진영의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과 아래에서 교실을 떠받치는 구조는 그대로, 혹은 더 촘촘해졌다. 이들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성공했기 때문에, 그 성공이 자기 안에서 완결되어 버렸기 때문에, 바깥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각이 닫혀 버렸다는 이야기다. 연재 순서① 어떤 교육감의, 완벽한 학교생활기록부 ②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민주도, 시민도, 교육도 없다 ③ 젠틀한 진보교육, 언젠틀한 연대의 목소리 ④ 쉼표를 찍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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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체크리스트로 움직인다. 항목을 채우는 것이 곧 교육이 되고, 그 틀 밖의 무언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체크리스트는 누군가가 그것을 교실로 가져와 학생 앞에 펼쳤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 글에서는 통치가 교실에 도착하는 한 사례를 이야기하려 한다.
누군가는 이 통치를 서울시교육청의 간판 사업인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한 기사에 묘사된, 이 수업의 모습을 따라가 보자.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미담이다. 학생과 교사가 한 팀을 이뤄 찬성과 반대 입장을 모두 경험해 보고,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고, 끝에는 합의점을 찾는다. 경쟁이 아니라 공존을 배우고, 승패가 아니라 시민의 태도를 익힌다고 한다. 공존, 역지사지, 합의, 경청, 존중, 민주 시민, 보이텔스바흐 협약. 행정 문서나 연수 자료, 기사나 선거 슬로건에 그대로 옮겨도어색하지 않다.
이것은 어느 매체의 고발 기사가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자기 간판 사업을 가장 잘 정리해 바깥에 내보인 쇼케이스다. 교사 연수 시연이라는 통제된 환경에서, 보여 주고 싶은 사례를 직접 골랐다. 운영이 서툴러 새어 나온 사고가 아니라, 미담으로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고른 표본이다.
그런데 그 표본이 이상하다. 토론 주제로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하는가’가 올라와 있다. 바로 그 첫 줄에서 수업은 무너진다. 민주시민교육을 한다면서 학생의 정치적 권리를 찬반 안건으로 올린다. 학생은 헌법이 보장한 자기 권리를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토론 끝에 인정받거나 미뤄질 수 있는 것으로 배운다. 교사는 그 토론을 멈추는 대신, 매끄럽게 진행한다.
민주시민교육은 학생을 권리의 주체로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학생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그 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안내서가 이 수업의 학습 목표로 적은 것은 경청과 존중과 시민적 예의다. 학생이 무슨 권리의 주체인지는 한 줄도 없다. 이것을 다루지 않고 토론과 합의와 공존부터 가르치면, 그것은 민주시민교육이 아니다. 이름만 빌린 다른 무언가다.
‘학생의 정치 참여 금지’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누리는 주체는, 모든 국민이다. 우리 헌법 제21조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24조는 선거권을, 제25조는 공무담임권을, 제26조는 청원권을 보장한다. 헌법에 성숙한 국민, 성인 국민, 학교 밖 국민이라는 말은 없다. 미성년자는 국민이 아니라는 조항도 없다. 학생도 국민이다.
권리의 유무와 그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은, 애초에 다른 문제다. 선거권을 언제부터 행사하는지는 법률이 정한다. 어떤 공직을 맡을 권리는, 그 직위와 자격에 따라 요건이 갈린다. 학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과 교사들이 모인 공간이기에, 여러 권리와 요구가 서로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중 어떤 것은 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권리를 언제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일이다. 학생이니까 정치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그 전제를 부정한다. 권리의 행사 방식을 조정하는 일과 권리 자체를 거두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하는가’는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정치철학 수업이라면 권리 주체의 경계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을 권리의 주체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주시민교육에서 이를 논제로 삼는 것은, 그 전제를 자체를 다시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과 교사라면 이 논제가 올라오는 순간 멈춰 세웠어야 한다.
이는 바깥에서 들이댄 기준이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2023년에 낸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안내서에 이미 들어 있다. 2022년 정책 연구 보고서 〈사회 현안 숙의형 토론수업 모델〉을 바탕으로 집필된 이 책은, ‘정당한가’,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가급적 논제로 삼지 말라고 하고, 헌법에서 정한 기본권과 인권을 침해하는 논제도 피하라고 한다. 그런 논제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며 ‘사회 통합과 유지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서울시교육청은 ‘사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은 혐오이고 폭력’이라며 그 첫 예시로 ‘나이’를 들며, 헌법이 ‘나이를 비롯한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를 차별할 수 없음을 명시’함을 토론 중에 꼭 기억하도록 학생에게 일러두라고 안내한다. 이 기준을 적용했다면,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자는 논제는 첫 단계에서 걸러졌어야 한다. 그러나 시연 수업에서는 바로 그 논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2025년 2월, 서울시교육청은 서울교대에서 ‘인공지능 시대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심화교재 활용 직무연수’를 열었다. 교사와 학생이 한 팀을 이뤄 동등한 토론자로 참여하고, 1차 토론을 마치면 2차 토론에서 양측이 찬반을 서로 바꾼다. 학생의 정치 참여 금지에 찬성하는 쪽에 선 한 교사는 독일 총선을 근거로 든다. 직전 총선보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11% 올랐고, 그 표의 상당수가 16~17세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특정 정당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특정 연령의 시민이 ‘위험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자는 것이 문제다. 청소년이 극우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니 정치 참여를 제한하자는 말은, 노년층이 권위주의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니 선거권을 제한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교사가 돌발적으로 선을 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안내서는 교사 역할을 다루는 대목에서 켈리의 네 유형을 가져와, 교사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며, 문제 해결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신념을 가진 공정형’을 권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교사가 판단을 가지고 수업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 개입의 성격이 공적 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 무언가였는지를 먼저 살폈어야 했다. 이 시연에서는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논제는 세우지 말라는 기준은 사라지고, 어느 한쪽의 입장을 신념 있게 제시하는 교사만 남았다. 그렇게 해서 ‘완전한 가치관이 정착되지 않은 나이대의 이른 정치 참여는 교육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문제는 ‘가치관이 완성된 사람’이라는 기준 자체가 허구라는 점이다. 성인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고, 민주주의는 판단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함께 권리를 행사하며 공적 판단을 만들어 가는 제도다. 학생이 아직 미숙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학교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가르치라는 뜻이다. 결국 나이를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할 수 없다는 원칙마저, 이 시연에서는 교사에 의해 토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
사회과 수업에서 다뤘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어떤 청소년은 그 세력에 끌리는가. 그 뒤에 어떤 불안, 어떤 지역 격차, 어떤 미디어 환경, 기성 정치에 대한 어떤 불신, 학교의 어떤 실패가 있는가. 민주주의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학교는 어떤 교육으로 답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 대신, 특정 집단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잠시 거두자는 논리만이 토론에 등장한다.
기사에 따르면, 참여자들은 끝에 ‘나이와 상관없이 고등학생의 정치 참여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문장에는 뜻을 모았다. 다만 정치 활동의 방법이나 참여에 필요한 성숙도의 기준에서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기본권 자체가 이미 쟁점이 된 이상, 결론의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찬반 양측 입장을 번갈아 옹호해야 한다. 참여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입으로 두 입장을 모두 말해야 한다. 학생도 교사도 예외가 없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 보자. 어떤 학생이 먼저 학생의 정치 참여를 옹호한다. 이제 금지 측으로 입장을 바꾼 그 학생은, 미국 대선 무렵 온라인 커뮤니티 글을 그대로 믿은 친구들이 교실을 돌며 특정 후보를 선전하더라는 경험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렇게 그 학생의 경험은 스스로의 권리를 제한하는 근거가 된다. 역지사지라는 토론 형식 그 자체가 그 학생에게 그런 일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는 공론장에서 안건이 될 수 있는 주장부터 먼저 가려내야 한다. 교실 내 선거운동을 제한하자는 논의에서는, 학생의 기본권 자체는 인정하고 대신 그 제한 범위를 따졌다. 이런 주장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학생 정치 참여를 금지하자는 주장에서는, 그 권리 자체가 찬반의 대상이 된다.
안내서를 집필하고 기준을 만든 것이 교육청이라면, 그들이 운영한 시연에서야말로 그 기준을 작동시켰어야 한다. 그런데 그 흔적이 이 시연에는 없다. 학생의 정치 참여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안건으로 올라왔을 때도, 교사가 학생의 극우 정당 지지를 그 근거로 들었을 때도, 학생들이 각자의 입장을 바꾸어 토론한 뒤 합의문을 적어 가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안건 자체의 자격을 문제 삼거나 이를 참여자에게 알린 흔적이 없다. 논제를 선정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말은 안내서에는 적혀 있지만, 체크리스트에는 없기에 토론이 시작된 뒤에는 사라진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은, 안건에 집중하기에 그 형식 자체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 자료를 더 모으고, 각자의 입장을 더 정교하게 옹호하고, 합의문을 더 다듬을수록, 안건 자체의 문제는 보이지 않게 된다. 학생이 미숙해서도, 교사가 게을러서도 아니다. 토론이라는 형식을 더 열심히 수행할수록, 체크리스트를 더 열심히 채울수록, 그 형식 자체는 모두에게 당연한 무언가가 되기 때문이다.
다수결보다 편리한, 만장일치의 미학
이 안내서는 토론 절차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세밀하게 규정한다. 주제 파악, 자료 분석, 1차 토론, 2차 토론, 모둠 합의안 작성이 기본이다. 여기에 입론과 반론, 최종 발언의 순서와 시간, 찬반 근거의 균형, 자료의 신뢰성과 정확성, 상대 의견 존중, 만장일치 합의안 작성까지 더해진다. 진행 순서와 토론 예절, 자료를 찾는 방법에 관한 체크리스트도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되는지, 어떤 주장은 애초에 논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기준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한 학생이 ‘학생은 미성숙하므로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맡았다고 하자. 그는 자료를 모으고, 입론과 반론과 최종 발언의 형식을 갖추고, 자료의 출처를 단다. 자기 성찰지에서 확인하는 것은 찬성과 반대 양쪽을 살폈는지, 자료를 충실히 이해했는지, 합의안과 실천 계획을 성실히 작성했는지다. 이 기준으로 보면 그 학생은 수업을 잘 수행한 셈이 된다.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을 거두자는 주장도 자료와 균형과 형식을 갖추면 모범적인 토론 활동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러나 성찰지는 그 발언이 상대를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어떤 집단을 권리 없는 사람으로 밀어내는지, 사적인 불안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도 묻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자기 존엄을 부정하는 말을 직접 하라고 시키는지도 묻지 않는다. 자기 성찰지 어디에도 그 물음은 없다.
말투가 점잖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학생은 안내된 방식대로 상대를 먼저 칭찬하고 정중한 표현으로 자기 입장을 밝힐 수 있다. 말하는 순서를 지키고, 자료가 충실하다 해도, 그 자체로 토론 상대를 존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절차를 여러 번 거치고 나면, 학생은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예절을 지키고, 자료를 붙여 체크리스트를 채우면 어떤 주장이든 토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정해 보이는 모양새다. 합의문이 나오면 수업은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회의를 무사히 마무리하기 위한 행정 절차일 뿐이다.
2023년 당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학생들의 결론이 반드시 만장일치하거나 한 가지일 필요도 없습니다”고 이 수업 모형을 설명한다. 안내서에는 ‘결론이 나지 않은 토론을 실패로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러나 구체적 절차로 들어가면 ‘모둠 내에서 합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류하여 만장일치를 이루도록 의견을 조정’한다는 말이 나온다.
교실은 덕담 문구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이 활동지에 남는지, 무엇이 발표되는지, 무엇이 교사의 관찰 기록이 되는지, 무엇이 우수 사례가 되는지, 무엇이 생활기록부에 들어갈 수 있는지로 작동한다. 이 모형에서 가장 잘 남는 것은 합의문이다. 설명하기도 쉽고, 사진으로 남기기도 쉽고, 교육청 보고서에 붙이기도 쉽다.
다수결에서는 적어도 ‘나는 반대했지만 졌다’는 흔적이 남는다. 만장일치는 그 흔적을 지운다. 모두가 같은 문장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누가 어디까지 반대했는지는 흐려진다. 그 문장에 끝내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된다. 결론을 늦추는 사람이 되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결론을 막는 사람이 된다.
4명이 한 모둠이라고 해 보자. 의견이 2 대 2로 갈리면 갈등이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3 대 1이 되는 순간 1명은 더 이상 동등한 토론자로 남기 어렵다. 그 1명이 버틸 자원이 적은 학생이라면, 자기 의견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논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친구 관계, 마음의 부담, 수행평가 점수, 교사의 시선까지 함께 감당해야 한다. 강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뿐, 강제다.
고등학교에서는 이 압력이 더 노골적이다. 합의문과 발표와 관찰 기록은 생활기록부에 적기 좋은 문장이 된다. ‘찬반 양측의 근거를 균형 있게 분석하고, 모둠원과 협력하여 합의안을 도출함.’ ‘상대 의견을 경청하며 공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함.’ 이런 문장은 쉽게 남는다. 반면 ‘자기 권리를 찬반 논제로 다루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보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음’이라는 문장은 남기 어렵다. 생활기록부에 옮겨 적기 쉬운 학생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이 아니라, 합의안을 만들어 낸 학생이다.
합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의 판단도 그대로 남아야 한다. 그 학생이 왜 동의하지 않았는지, 그 거부가 어떤 권리와 원칙에 닿아 있었는지, 모둠은 그 이견을 어떻게 견뎠는지가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형의 결과물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일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볼 일이 된다. 학생은 왜 합의가 어려웠는지 성찰해야 한다. 성찰의 대상이 되는 순간, 거부는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가 된다.
이 강제는 폭력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친구 의견도 들어 보자’, ‘우리 모둠 합의안을 만들어 보자’, ‘서로 조금씩 조정해 보자’, ‘공존을 위해 노력하자’. 강제는 이런 말로 온다. 그래서 소수자는 자기가 억눌린다고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비협조적이고 미성숙한 사람이 된다. 밀어붙이는 쪽은 그것을 예절이라 부르고, 배제를 성숙이라 부른다. 버티는 쪽은 자기가 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설명할 말조차 갖지 못한다.
이 수업을 시연한 교사가 서울시교육청 간행물 《서울교육》에 쓴 글에는 이끄미, 기록이, 칭찬이, 섬김이 같은 모둠 역할이 등장한다. 이름만 보면 부드럽고 선의에 차 있지만, 실제로는 활동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지, 기록이 남는지, 서로 격려하는지를 관리하는 역할에 가깝다. 말하기 어려운 학생이 있는지, 어떤 발언이 다른 학생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지금 토론을 멈춰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공적 발언에서 중요한 것은 분위기가 좋은지가 아닌데, 이 구조에서 한 학생의 불편함, 거부감, 화, 침묵은 권리 침해를 감지한 신호가 아니라 모둠의 흐름을 끊는 일로 처리되기 쉽다.
모둠을 짤 때도 성별, 성적, 교우 관계 같은 것을 고려해 서로 다른 학생끼리 섞는다고 한다. 서로 다른 학생을 한데 묶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배움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업에서 다양성은 지켜야 할 조건이라기보다 수업을 운영하기 위한 재료에 가깝다. 안내서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을 ‘창의적 융합’의 조건으로 들고, 다양성이 사회를 건강하고 민주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더 힘이 센가, 약한 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는 거기에 없다. 자기 정체성이나 권리가 논제에 직접 얽힌 학생이 있다면, 이 학생은 여럿 앞에서 자기 권리를 제한하자는 논리를 펴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위험을 다루는 절차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만장일치로 합의한 모둠은 사회적 프로젝트를 정하고, 합의하지 못한 모둠은 그 이유를 성찰하고 발표한 뒤에 자신의 의견에 따른 개인적 사회 참여 계획을 만든다. 군대 훈련소에서 첫 주말을 맞은 신병들에게 조교가 종교 행사를 안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가톨릭, 개신교, 불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생활관에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에게는 화장실 청소가 기다리고 있다.
교육감은 “합의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는 화장실 청소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만장일치로 합의되면, 그 결과는 발표와 활동지와 생활기록부와 우수 사례, 나아가 참여한 학생들의 진학 결과로 남을 수 있다. 합의되지 않는다면 모둠의 지연, 교사의 부담, 친구들의 눈치, 그리고 추가 성찰과 개인 과제가 남는다. 보상과 비용을 배치하는 방식 자체가 의도이고, 통치다. 그 배치가 정해지는 순간, 자유는 서류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만장일치를 명시적으로 강제했느냐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이 수업의 실제 작동 방식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절차와 결과물과 기록 구조가 모두 합의를 향해 기울어져 있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학생의 판단을 그대로 남겨 두는 절차가 없다는 데 있다. 합의하지 못한 채 남는 일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다. 때로는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분명한 흔적이다. 이 수업은 그 흔적을 남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합의할 수 있는 문장으로 다시 다듬는 법을 가르칠 뿐이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의 하청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에서 교사의 역할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모둠을 짜고, 시간을 재고, 자료를 나눠 주고, 입론과 반론과 최종 발언을 끊어 주고 합의안 쓰는 법을 안내한다. 이 목록을 끝까지 읽어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자리는 나오지 않는다. 협동 학습의 진행은 남아 있지만, 사회과 교사가 감당해야 할 판단은 뒤로 밀린다.
정치 참여 금지론처럼 헌법상 권리가 걸린 논제가 올라왔다면, 사회과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절차를 차질 없이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절차를 멈춰 세우고, 헌법 제21조부터 제26조까지의 내용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지 못하면 이 토론은 사회과 수업으로 남기 어렵다. 그러나 시연 토론을 진행한 교사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안건을 처리하기 위한 절차는 정교하게 진행되지만, 기본권과 헌법 정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를 교사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이 모형이 교사에게 요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 자체가 절차에 있을 가능성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해법은 늘 절차를 더 다듬는 쪽에서 나온다. 그러는 동안 그 절차가 학생의 권리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묻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서울교육》 글은 이 점을 더 분명히 보여 준다. 이 글을 쓴 교사는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안내서〉의 연구와 수업 사례 개발, 보완 집필에 참여했다. 모형을 잘못 가져다 쓴 외부 사례가 아니라, 모형을 만든 쪽이 그 모형을 실제 교실에서 어떻게 운영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에 가깝다. 이 교사는 자신이 20여 년간 협동 학습을 해 왔고,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이 자신에게 안성맞춤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 모형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여기서 전문성은 협동 학습이라는 방법론에서 온다. 따라서 어떤 논제가 오더라도 협동 학습을 매끄럽게 운영하기 위한 재료가 된다.
또 체크리스트를 더 정교하게 구현하는 일이 사회과학의 비판의식 앞에 오게 된다. 이 글에 설명된 모둠원의 역할도, 수업 절차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에서 몇몇 학생은 2차 토론이 1차 토론의 되풀이 같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입장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글을 쓴 교사는 이것을 절차 자체의 문제로는 읽지 않는다. 두 토론 사이에 하루이틀 간격을 두거나, 2차 토론을 다른 활동으로 바꾸거나, 인공지능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안이 된다. 수업의 방향이 아닌, 운영 방식만이 질문의 대상이 된다.
이제 무엇이 남는지를 보자. 교사는 이러한 일련의 수업 과정에서 관찰했던 학생들의 활동을 교과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에 그대로 기록했다. 학생의 배움이나 기본권 감각보다, 관찰 가능한 활동의 체크리스트가 남는다. 본 것이 적히고, 적힌 것은 각자의 생활기록부에 기록된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무언가를 놓쳤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모형 구축에 참여한 사람이 남긴 기록이고, 이 모형은 성공적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교사 개인이 하청이라는 뜻이 아니다. 모형이 교사의 전문성을 하청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는 뜻이다. 교육청과 연구자가 모형을 만들고, 교사는 그 모형을 받아 교실에서 운영한다. 학생이 쓴 합의문은 교육청 체크리스트의 한 칸이 된다. 교사는 교육을 판단하는 대신, 절차를 운영하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전문성이라는 말은 그대로 붙어 있지만, 그 전문성은 위에서 내려온 모형을 더 부드럽고 빠르고 보기 좋게 굴리는 능력으로 바뀐다.
연수가 열리고, 우수 수업 사례로 표창되고, 컨퍼런스에서 발표되고, 교육청 간행물에 실린다. 정교한 활동지, 매끄러운 모둠 운영, 학생이 잘 써낸 결과물, 잘 정리된 수업 후기. 학교가 상을 주는 전문성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더 좋아진다고 교사의 본질적 권한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체크리스트를 운영하는 능력이 정교해질수록, 멈출 수 있는 길은 더 보이지 않게 된다.
끝에 남는 것도 비슷하다. 생활기록부 몇 줄이 연수 보고서, 우수 사례집, 정책 성과로 이어진다. 학생이 이 수업에서 무엇을 얻어가는지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맞는 칸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이 대학 진학의 근거가 되면, 합의를 끝까지 거부하는 학생은 자기 의견을 지키는 시민이 아닌, 반 친구들의 생활기록부 기록을 막는 사람이 된다. 그 손해는 합의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바뀐다. 그 사이 교육감과 교육청은 학생들이 활발하게 토론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학생에게 남는 것은 따로 있다. 자신의 권리를 합의 가능한 문장으로 다듬는 법. 자기 거부를 친구의 생활기록부에 끼치는 손해로 셈하는 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적극적 참여라고 부르는 법.
이 구조는 교사에게도 나쁘다. 겉으로는 교사를 전문가로 존중해도, 실제로는 교사가 교육적으로 부적절한 요구를 거절하고, 헌법과 기본권에 대해 고민하고, 수업의 방향을 판단할 본질적 권한을 빼앗는다. 교사가 멈추면, 이 모형은 그것을 수업 진행의 실패로 처리할 뿐이다. 교사가 어려움을 겪을수록 교육의 외주화는 빨라진다. 다른 학교의 모범 사례가 비교 대상으로 따라붙고, 외부 컨설팅이 붙고, 연수가 열린다. 그 연수가 알려 주는 것은 멈추는 법이 아니라, 더 부드럽게 수업을 진행하고 결과를 만드는 법이다.
좋은 교사는 절차의 끝까지 학생을 데려가는 사람이 아니다. 절차가, 가르침이 학생의 권리를 침범할 때 그 절차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다. 본령을 잊은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지 못한다. 통치를 교실에서 집행하는 역할만 맡게 될 뿐이다.
이 수업은 어떤 ‘민주 시민’을 길러 내는가
누군가는 체크리스트를 채운다. 합의문, 보고서, 성찰문, 발표 자료, 그리고 정책 성과로 보고할 수 있는 그럴듯한 숫자와 사진으로. 누군가는 체크리스트를 채우지 못한다. 끝까지 “예”라고 하지 않은 학생에게 붙는 말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건설적이지 않다. 공동체의 화합을 깬다. 회의를 다음으로 넘기지 못하게 한다. 함께 낼 문서를 만들지 못하게 한다. 분위기를 무겁게 한다. 대안 없이 반대만 한다. 감정적이다. 끝까지 버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눈으로 보면, 바로 그런 사람이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 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을 살펴보면, 타협은 생각보다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기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어떤 요구는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 권리나 존엄을 내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기본권이 걸린 일에서는 그렇다. 그 앞에서 이루어진 건설적 합의란, 실제로는 누군가가 더 버티지 못하고 침묵한 결과일 때가 많다. 끝까지 “아니오”라고 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만큼은 지켜 낸 것이다. 결과물이 없어도 괜찮다. 그는 공동체의 자랑거리로 동원되기를 거부하는 대신, 한 사람의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 문장에 서명하도록 만드는 절차를 민주주의라 부르지 않는다. 끝내 의견이 갈려도 서로를 견뎌 내는 일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본질에 가깝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않기로 한 선만 함께 지킨 채, 일단 정하고 다음에 다시 다툰다. 그럴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공존도 그렇다. 공존은 모두가 같은 문장에 이름을 적은 상태가 아니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남아, 다음 논의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 수업에서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지 못한다. 안내서는 교실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라고 말하지만,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을 안전하게 남겨 두는 절차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공동체의 기준에 아직 미치지 못했기에 더 배워야 하는 학생이 된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은 이름과 달리 공존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수업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정이 알아볼 수 있는 ‘민주 시민’은 꽤 성공적으로 길러 낸다. 차례를 지키고, 상대 입장을 말해 보고,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끝에는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문장을 찾아내는 사람. 정해진 장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말하고 참여하지만, 그 장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 사람. 갈등을 권리의 충돌로 남겨 두지 않고, 조정 가능한 입장 차이로 바꾸는 사람. 자기 판단을 끝까지 지키기보다, 합의문에 들어갈 수 있는 말로 고치는 사람. 이 절차 안에서 학생이 익히는 것은 갈등을 견디는 시민의 태도가 아니라, 갈등을 관리자가 처리하기 쉬운 형태로 바꾸고 통치 가능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이처럼 끝까지 합의점을 찾는 사람이 좋은 시민이라는 말이 상식이 되면, 힘과 자원을 가진 누군가 대신 합의하지 않는 누군가가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사회적 소수자들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선다. 다수에게는 별것 아닌 조정안이지만, 소수자에게는 자기 존엄, 안전, 권리의 후퇴가 남는다.
이득을 보는 쪽은 시민이 아니라 통치자와 관리자다. 통치자는 질서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관리자는 갈등의 해결보다, 갈등이 끝났다는 보고를 더 좋아한다. 통치자는 학생들이 질서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합의하는 장면을 얻고, 관리자는 갈등이 처리되었다는 문서와 사진을 얻는다. 이 수업은 둘 모두에게 유익하다.
학생은 그 질서 안에서 충분히 주체적으로 보인다. 다만 그 주체성은, 통치를 하는 이들이 규정한 절차와 권한을 겨누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누가 어떤 권리를 침해당했는지, 왜 그 사람은 동의할 수 없는지, 어떤 분위기에서 그 사람이 침묵하게 되었는지를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품이 많이 든다. 서로 입장을 이해하고 합의점을 찾아보자는 말은 그 품을 줄인다. 갈등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문제가 된다. 관리자는 판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재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흩어진다.
누가 작정하고 꾸민 일이 아니다. 회의록에 학생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자고 적어 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육 행정이 표창장에 적기 좋은 결과, 연구자가 논문으로 쓰기 좋은 모형, 교사가 시간표 안에서 다루기 좋은 차시, 기자가 미담으로 받아쓰기 좋은 장면, 장학사가 보고서에 붙이기 좋은 사진. 이것들이 맞물리면 이런 수업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므로 합의가 나왔다는 말은 단지 깔끔하고 안전하고 셀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그 질서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표시가 된다. 끝내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거부는 정당했다는 말은 행정 문서에 담기 어렵다.
그러면 소수자는 무엇을 얻는가. 자기가 하려던 말을 잃거나,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미성숙한 시민이 된다. 결과물은 통치의 성과로 남고, 그 값은 끝까지 버틸 형편이 못 되는 학생이 치른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사람들은 제도권에서 들려오는 공존, 합의, 성숙, 민주 시민 같은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 말들이 자신들을 길들이는 언어였다고 느낀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분노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말을 건넨다. ‘그들이 너를 무시했다. 그들이 말한 공존은 너를 침묵시키는 장치였다. 그들의 합의는 네 권리를 지우는 의식이었다. 우리는 네 분노를 그대로 받는다.’ 이 말은 위험하다. 그러면서 힘이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수업을 설계한 이들은 그것이 극단화를 막고 시민적 합의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상상한 질서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문제는 그 질서 안에서 학생의 거부가 시민의 판단으로 남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모든 학생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그 위험을 다룰 절차를 적을 칸이 없다. 어떤 거부는 침해될 수 없는 권리에 닿아 있고, 어떤 거부는 그저 고집이다. 이 수업은 그 둘을 가르지 않는다. 학생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거부는 다시 합의 가능한 문장으로 고쳐 써야 할 미완성 초안이 된다. 동의가 기본값이고, 그 외의 무언가는 성찰해야 할 무언가가 된다.
남는 것도, 남길 것도 없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에는 민주도, 시민도, 교육도 없다. 그렇기에 이 사업은 고쳐서 쓸 수 없고, 폐기할 수밖에 없다.
주제 선정이 조금 부적절했다거나, 자료가 부족했다거나, 교사의 수업 진행이 미숙했다는 정도에서 잘못이 끝났다면 보완하자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의 간판 사업, 교육과정 개발자의 모형, 교사 연수와 쇼케이스 수업, 기획 기사로 홍보된 장면에서 이 결과가 나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장 잘 정리된 말, 가장 잘 통제된 장면, 가장 보여 주기 좋은 사례에서 그들이 말해 온 질서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언론에 보여 주기 위한 수업 시연에서조차,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한 참정권을 제한하자는 주장 앞에서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수업 모형 안내서에서조차 피하라고 한 주장인데도 그랬다. 그저 늘 해 왔듯 무작위로 찬반을 나누고, 입장을 바꾸고, 만장일치 합의를 요구했다. 그러면 청소년의 참정권은 침해될 수 없는 기본권이 아니라 그날 모둠에서 정한 행정 절차가 된다.
헌법을 모르고서 무슨 토론을 하며, 무슨 민주시민교육을 한다는 것인가. 토대가 처음부터 없었다. 교육감도, 교육청 조직도, 모형을 설계한 연구자도, 그 토론을 진행한 교사도, 그것을 미담으로 받아쓴 언론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런 채로 간판 정책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업은 그만두어야만 한다.
헌법상 권리의 주체와 기본권 제한의 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민주시민교육을 맡겠다는 것은, 면허 없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액셀과 브레이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자격의 문제다. 이들은 학생 앞에서 민주시민교육을 말하기 전에, 스스로의 헌정 감각부터 만들어야 한다.
이를 주입식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매로 교과서를 외우게 하고, 시험에 빈칸을 내던 시절의 교실에 비해 무언가는 분명 나아졌다. 그러나 학생을 시민으로 세우려 한 적이 없던 그 교육이, 학생에게서 무엇을 끝내 빼앗지 못했는지는 분명히 해 두자.
헌법 조항이 학생의 머릿속에 남았다. ‘모든 국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선거권’, ‘공무담임권’, ‘청원권’. 교육이 의도한 결과도, 학생이 의도한 결과도 아니었지만, 문구는 새겨졌다. 그리고 그 문구가 언젠가 현실과 부딪혔을 때, 시민이 깨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헌법이 현실과 부딪히기 전에, ‘서로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학교 안에서 조정할 수 있다’, ‘합의 가능한 방안을 찾아보자’는 부드러운 말의 체크리스트가 먼저 도착한다. 권리 침해가 갈등으로, 부정의가 입장 차이로, 거부가 합의 실패로 옮겨 적힌다.
낡은 교육은 바깥에서 학생을 억압했기에, 학생은 그 억압을 억압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새 교육은 겉으로는 억압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학생을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더 정교하다. 그래서 더 알아채기 어렵다. 주입식 교육 시절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 세련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한때 학교는 학생에게 교련이라는 명칭으로 군사 훈련을 시키고, 줄 세워 사열하고, 배움이 아니라 동원을 가르쳤다. 진보교육은 한때 이를 비판했다. 그 비판은 옳았고, 지금도 옳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오늘도 학생은 동원된다. 카메라 앞의 피사체가 된다. 그들의 학교생활은 기록으로 남아 누군가의 실적이 된다. 그들이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혐오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보고서에 붙고, 생활기록부에 남고, 교육감의 실적이 된다.
학생들이 억압을 느끼고, 교육이 요구하는 질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교련이 있던 시절이 더 나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때와 견주어 분명히 나아진 것이 하나 있다. 학생을 직접 때리진 않는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이 교육을 하는 이들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때 자신들이 비판하던 그 행태를, 지금 자신들이 상당 부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그 시절 학생들이 교육을 싫어했듯, 지금의 학생들도 교육을 싫어한다. 입시 때문이라거나 극우 유튜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학생이 싫어한다는 사실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학생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교육은, 다른 무엇을 더 따지기 전에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교육이다.
전문성이란 활동지를 더 정교하게 다듬고, 모둠 운영을 더 깔끔하게 진행하며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능력이 아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수업이 학생에게 헌법 정신이 말하는 무언가를 남기고 있는지, 아니면 그 정신을 그럴듯한 절차 속에 녹이고 있는지, 이 차이를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교사의 전문성이어야 한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직시하는 대신 그럴듯한 겉모습만을 기리는 이들은, 권력의 교실 통치를 더 세련된 도구로 더 정교하게 거들 뿐이다.
한때 무엇을 비판했는지조차 잊은 이들은 이름만 바뀐 채로 과거 교실을 통치했던 권력자들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권리의 주체라는 한 줄의 헌법 정신조차도 학생에게 남기지 못하는 교육을,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이라 부를 수 있는가.
참고 문헌
“토론엔 승패 없어… 찬반 입장 모두 서본 후 합의점 찾아요”, 〈동아일보〉, 2025년 3월 13일.
“교사-학생 한 팀 이뤄 역지사지 토론… 이해 깊어져 민주적 합의 도출”, 〈동아일보〉, 2025년 3월 20일.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서울시교육청.
〈[중학교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 경쟁이 아닌 공존을 위한 토론!〉, 《서울교육》, 2024년 여름호,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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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완성된 체크리스트 – 성공한 진보교육의 자화상 ②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민주도, 시민도, 교육도 없다
문호진 mh29@naver.com
의사, 《수능 해킹》 공동 저자
학교는 체크리스트로 움직인다. 항목을 채우는 것이 곧 교육이 되고, 그 틀 밖의 무언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체크리스트는 누군가가 그것을 교실로 가져와 학생 앞에 펼쳤을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 글에서는 통치가 교실에 도착하는 한 사례를 이야기하려 한다.
누군가는 이 통치를 서울시교육청의 간판 사업인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한 기사에 묘사된, 이 수업의 모습을 따라가 보자.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미담이다. 학생과 교사가 한 팀을 이뤄 찬성과 반대 입장을 모두 경험해 보고,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고, 끝에는 합의점을 찾는다. 경쟁이 아니라 공존을 배우고, 승패가 아니라 시민의 태도를 익힌다고 한다. 공존, 역지사지, 합의, 경청, 존중, 민주 시민, 보이텔스바흐 협약. 행정 문서나 연수 자료, 기사나 선거 슬로건에 그대로 옮겨도어색하지 않다.
이것은 어느 매체의 고발 기사가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자기 간판 사업을 가장 잘 정리해 바깥에 내보인 쇼케이스다. 교사 연수 시연이라는 통제된 환경에서, 보여 주고 싶은 사례를 직접 골랐다. 운영이 서툴러 새어 나온 사고가 아니라, 미담으로 만들기 위해 작정하고 고른 표본이다.
그런데 그 표본이 이상하다. 토론 주제로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하는가’가 올라와 있다. 바로 그 첫 줄에서 수업은 무너진다. 민주시민교육을 한다면서 학생의 정치적 권리를 찬반 안건으로 올린다. 학생은 헌법이 보장한 자기 권리를 이미 가진 것이 아니라, 토론 끝에 인정받거나 미뤄질 수 있는 것으로 배운다. 교사는 그 토론을 멈추는 대신, 매끄럽게 진행한다.
민주시민교육은 학생을 권리의 주체로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학생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그 권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부터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안내서가 이 수업의 학습 목표로 적은 것은 경청과 존중과 시민적 예의다. 학생이 무슨 권리의 주체인지는 한 줄도 없다. 이것을 다루지 않고 토론과 합의와 공존부터 가르치면, 그것은 민주시민교육이 아니다. 이름만 빌린 다른 무언가다.
‘학생의 정치 참여 금지’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누리는 주체는, 모든 국민이다. 우리 헌법 제21조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24조는 선거권을, 제25조는 공무담임권을, 제26조는 청원권을 보장한다. 헌법에 성숙한 국민, 성인 국민, 학교 밖 국민이라는 말은 없다. 미성년자는 국민이 아니라는 조항도 없다. 학생도 국민이다.
권리의 유무와 그 권리를 행사하는 방식은, 애초에 다른 문제다. 선거권을 언제부터 행사하는지는 법률이 정한다. 어떤 공직을 맡을 권리는, 그 직위와 자격에 따라 요건이 갈린다. 학교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과 교사들이 모인 공간이기에, 여러 권리와 요구가 서로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중 어떤 것은 조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에게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그 권리를 언제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일이다. 학생이니까 정치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그 전제를 부정한다. 권리의 행사 방식을 조정하는 일과 권리 자체를 거두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하는가’는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다. 정치철학 수업이라면 권리 주체의 경계를 논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을 권리의 주체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주시민교육에서 이를 논제로 삼는 것은, 그 전제를 자체를 다시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과 교사라면 이 논제가 올라오는 순간 멈춰 세웠어야 한다.
이는 바깥에서 들이댄 기준이 아니다. 서울시교육청이 2023년에 낸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안내서에 이미 들어 있다. 2022년 정책 연구 보고서 〈사회 현안 숙의형 토론수업 모델〉을 바탕으로 집필된 이 책은, ‘정당한가’,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가급적 논제로 삼지 말라고 하고, 헌법에서 정한 기본권과 인권을 침해하는 논제도 피하라고 한다. 그런 논제는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며 ‘사회 통합과 유지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서울시교육청은 ‘사람의 본질적인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은 혐오이고 폭력’이라며 그 첫 예시로 ‘나이’를 들며, 헌법이 ‘나이를 비롯한 어떤 이유로도 누군가를 차별할 수 없음을 명시’함을 토론 중에 꼭 기억하도록 학생에게 일러두라고 안내한다. 이 기준을 적용했다면,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자는 논제는 첫 단계에서 걸러졌어야 한다. 그러나 시연 수업에서는 바로 그 논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2025년 2월, 서울시교육청은 서울교대에서 ‘인공지능 시대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심화교재 활용 직무연수’를 열었다. 교사와 학생이 한 팀을 이뤄 동등한 토론자로 참여하고, 1차 토론을 마치면 2차 토론에서 양측이 찬반을 서로 바꾼다. 학생의 정치 참여 금지에 찬성하는 쪽에 선 한 교사는 독일 총선을 근거로 든다. 직전 총선보다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지지율이 11% 올랐고, 그 표의 상당수가 16~17세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특정 정당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특정 연령의 시민이 ‘위험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자는 것이 문제다. 청소년이 극우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니 정치 참여를 제한하자는 말은, 노년층이 권위주의 정당을 지지할 수 있으니 선거권을 제한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교사가 돌발적으로 선을 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안내서는 교사 역할을 다루는 대목에서 켈리의 네 유형을 가져와, 교사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며, 문제 해결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신념을 가진 공정형’을 권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교사가 판단을 가지고 수업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 개입의 성격이 공적 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 무언가였는지를 먼저 살폈어야 했다. 이 시연에서는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는 논제는 세우지 말라는 기준은 사라지고, 어느 한쪽의 입장을 신념 있게 제시하는 교사만 남았다. 그렇게 해서 ‘완전한 가치관이 정착되지 않은 나이대의 이른 정치 참여는 교육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이 토론의 쟁점이 되었다. 문제는 ‘가치관이 완성된 사람’이라는 기준 자체가 허구라는 점이다. 성인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고, 민주주의는 판단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함께 권리를 행사하며 공적 판단을 만들어 가는 제도다. 학생이 아직 미숙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라는 뜻이 아니라, 학교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가르치라는 뜻이다. 결국 나이를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할 수 없다는 원칙마저, 이 시연에서는 교사에 의해 토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었다.
사회과 수업에서 다뤘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어떤 청소년은 그 세력에 끌리는가. 그 뒤에 어떤 불안, 어떤 지역 격차, 어떤 미디어 환경, 기성 정치에 대한 어떤 불신, 학교의 어떤 실패가 있는가. 민주주의는 그 가능성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 학교는 어떤 교육으로 답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 대신, 특정 집단에게서 정치적 권리를 잠시 거두자는 논리만이 토론에 등장한다.
기사에 따르면, 참여자들은 끝에 ‘나이와 상관없이 고등학생의 정치 참여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문장에는 뜻을 모았다. 다만 정치 활동의 방법이나 참여에 필요한 성숙도의 기준에서는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기본권 자체가 이미 쟁점이 된 이상, 결론의 내용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찬반 양측 입장을 번갈아 옹호해야 한다. 참여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입으로 두 입장을 모두 말해야 한다. 학생도 교사도 예외가 없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 보자. 어떤 학생이 먼저 학생의 정치 참여를 옹호한다. 이제 금지 측으로 입장을 바꾼 그 학생은, 미국 대선 무렵 온라인 커뮤니티 글을 그대로 믿은 친구들이 교실을 돌며 특정 후보를 선전하더라는 경험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렇게 그 학생의 경험은 스스로의 권리를 제한하는 근거가 된다. 역지사지라는 토론 형식 그 자체가 그 학생에게 그런 일을 요구한 것이다.
우리는 공론장에서 안건이 될 수 있는 주장부터 먼저 가려내야 한다. 교실 내 선거운동을 제한하자는 논의에서는, 학생의 기본권 자체는 인정하고 대신 그 제한 범위를 따졌다. 이런 주장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학생 정치 참여를 금지하자는 주장에서는, 그 권리 자체가 찬반의 대상이 된다.
안내서를 집필하고 기준을 만든 것이 교육청이라면, 그들이 운영한 시연에서야말로 그 기준을 작동시켰어야 한다. 그런데 그 흔적이 이 시연에는 없다. 학생의 정치 참여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안건으로 올라왔을 때도, 교사가 학생의 극우 정당 지지를 그 근거로 들었을 때도, 학생들이 각자의 입장을 바꾸어 토론한 뒤 합의문을 적어 가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안건 자체의 자격을 문제 삼거나 이를 참여자에게 알린 흔적이 없다. 논제를 선정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말은 안내서에는 적혀 있지만, 체크리스트에는 없기에 토론이 시작된 뒤에는 사라진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은, 안건에 집중하기에 그 형식 자체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 자료를 더 모으고, 각자의 입장을 더 정교하게 옹호하고, 합의문을 더 다듬을수록, 안건 자체의 문제는 보이지 않게 된다. 학생이 미숙해서도, 교사가 게을러서도 아니다. 토론이라는 형식을 더 열심히 수행할수록, 체크리스트를 더 열심히 채울수록, 그 형식 자체는 모두에게 당연한 무언가가 되기 때문이다.
다수결보다 편리한, 만장일치의 미학
이 안내서는 토론 절차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세밀하게 규정한다. 주제 파악, 자료 분석, 1차 토론, 2차 토론, 모둠 합의안 작성이 기본이다. 여기에 입론과 반론, 최종 발언의 순서와 시간, 찬반 근거의 균형, 자료의 신뢰성과 정확성, 상대 의견 존중, 만장일치 합의안 작성까지 더해진다. 진행 순서와 토론 예절, 자료를 찾는 방법에 관한 체크리스트도 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도 되는지, 어떤 주장은 애초에 논제가 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기준은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한 학생이 ‘학생은 미성숙하므로 정치 참여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맡았다고 하자. 그는 자료를 모으고, 입론과 반론과 최종 발언의 형식을 갖추고, 자료의 출처를 단다. 자기 성찰지에서 확인하는 것은 찬성과 반대 양쪽을 살폈는지, 자료를 충실히 이해했는지, 합의안과 실천 계획을 성실히 작성했는지다. 이 기준으로 보면 그 학생은 수업을 잘 수행한 셈이 된다.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을 거두자는 주장도 자료와 균형과 형식을 갖추면 모범적인 토론 활동으로 기록될 수 있다.
그러나 성찰지는 그 발언이 상대를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어떤 집단을 권리 없는 사람으로 밀어내는지, 사적인 불안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도 묻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자기 존엄을 부정하는 말을 직접 하라고 시키는지도 묻지 않는다. 자기 성찰지 어디에도 그 물음은 없다.
말투가 점잖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학생은 안내된 방식대로 상대를 먼저 칭찬하고 정중한 표현으로 자기 입장을 밝힐 수 있다. 말하는 순서를 지키고, 자료가 충실하다 해도, 그 자체로 토론 상대를 존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절차를 여러 번 거치고 나면, 학생은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예절을 지키고, 자료를 붙여 체크리스트를 채우면 어떤 주장이든 토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공정해 보이는 모양새다. 합의문이 나오면 수업은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회의를 무사히 마무리하기 위한 행정 절차일 뿐이다.
2023년 당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학생들의 결론이 반드시 만장일치하거나 한 가지일 필요도 없습니다”고 이 수업 모형을 설명한다. 안내서에는 ‘결론이 나지 않은 토론을 실패로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러나 구체적 절차로 들어가면 ‘모둠 내에서 합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류하여 만장일치를 이루도록 의견을 조정’한다는 말이 나온다.
교실은 덕담 문구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이 활동지에 남는지, 무엇이 발표되는지, 무엇이 교사의 관찰 기록이 되는지, 무엇이 우수 사례가 되는지, 무엇이 생활기록부에 들어갈 수 있는지로 작동한다. 이 모형에서 가장 잘 남는 것은 합의문이다. 설명하기도 쉽고, 사진으로 남기기도 쉽고, 교육청 보고서에 붙이기도 쉽다.
다수결에서는 적어도 ‘나는 반대했지만 졌다’는 흔적이 남는다. 만장일치는 그 흔적을 지운다. 모두가 같은 문장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누가 어디까지 반대했는지는 흐려진다. 그 문장에 끝내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된다. 결론을 늦추는 사람이 되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결론을 막는 사람이 된다.
4명이 한 모둠이라고 해 보자. 의견이 2 대 2로 갈리면 갈등이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3 대 1이 되는 순간 1명은 더 이상 동등한 토론자로 남기 어렵다. 그 1명이 버틸 자원이 적은 학생이라면, 자기 의견을 끝까지 지키는 일은 논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친구 관계, 마음의 부담, 수행평가 점수, 교사의 시선까지 함께 감당해야 한다. 강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뿐, 강제다.
고등학교에서는 이 압력이 더 노골적이다. 합의문과 발표와 관찰 기록은 생활기록부에 적기 좋은 문장이 된다. ‘찬반 양측의 근거를 균형 있게 분석하고, 모둠원과 협력하여 합의안을 도출함.’ ‘상대 의견을 경청하며 공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함.’ 이런 문장은 쉽게 남는다. 반면 ‘자기 권리를 찬반 논제로 다루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보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음’이라는 문장은 남기 어렵다. 생활기록부에 옮겨 적기 쉬운 학생은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이 아니라, 합의안을 만들어 낸 학생이다.
합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의 판단도 그대로 남아야 한다. 그 학생이 왜 동의하지 않았는지, 그 거부가 어떤 권리와 원칙에 닿아 있었는지, 모둠은 그 이견을 어떻게 견뎠는지가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형의 결과물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일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돌아볼 일이 된다. 학생은 왜 합의가 어려웠는지 성찰해야 한다. 성찰의 대상이 되는 순간, 거부는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가 된다.
이 강제는 폭력의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친구 의견도 들어 보자’, ‘우리 모둠 합의안을 만들어 보자’, ‘서로 조금씩 조정해 보자’, ‘공존을 위해 노력하자’. 강제는 이런 말로 온다. 그래서 소수자는 자기가 억눌린다고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비협조적이고 미성숙한 사람이 된다. 밀어붙이는 쪽은 그것을 예절이라 부르고, 배제를 성숙이라 부른다. 버티는 쪽은 자기가 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설명할 말조차 갖지 못한다.
이 수업을 시연한 교사가 서울시교육청 간행물 《서울교육》에 쓴 글에는 이끄미, 기록이, 칭찬이, 섬김이 같은 모둠 역할이 등장한다. 이름만 보면 부드럽고 선의에 차 있지만, 실제로는 활동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지, 기록이 남는지, 서로 격려하는지를 관리하는 역할에 가깝다. 말하기 어려운 학생이 있는지, 어떤 발언이 다른 학생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지금 토론을 멈춰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공적 발언에서 중요한 것은 분위기가 좋은지가 아닌데, 이 구조에서 한 학생의 불편함, 거부감, 화, 침묵은 권리 침해를 감지한 신호가 아니라 모둠의 흐름을 끊는 일로 처리되기 쉽다.
모둠을 짤 때도 성별, 성적, 교우 관계 같은 것을 고려해 서로 다른 학생끼리 섞는다고 한다. 서로 다른 학생을 한데 묶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배움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업에서 다양성은 지켜야 할 조건이라기보다 수업을 운영하기 위한 재료에 가깝다. 안내서는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을 ‘창의적 융합’의 조건으로 들고, 다양성이 사회를 건강하고 민주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더 힘이 센가, 약한 쪽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는 거기에 없다. 자기 정체성이나 권리가 논제에 직접 얽힌 학생이 있다면, 이 학생은 여럿 앞에서 자기 권리를 제한하자는 논리를 펴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 위험을 다루는 절차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만장일치로 합의한 모둠은 사회적 프로젝트를 정하고, 합의하지 못한 모둠은 그 이유를 성찰하고 발표한 뒤에 자신의 의견에 따른 개인적 사회 참여 계획을 만든다. 군대 훈련소에서 첫 주말을 맞은 신병들에게 조교가 종교 행사를 안내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가톨릭, 개신교, 불교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않고 생활관에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에게는 화장실 청소가 기다리고 있다.
교육감은 “합의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는 화장실 청소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만장일치로 합의되면, 그 결과는 발표와 활동지와 생활기록부와 우수 사례, 나아가 참여한 학생들의 진학 결과로 남을 수 있다. 합의되지 않는다면 모둠의 지연, 교사의 부담, 친구들의 눈치, 그리고 추가 성찰과 개인 과제가 남는다. 보상과 비용을 배치하는 방식 자체가 의도이고, 통치다. 그 배치가 정해지는 순간, 자유는 서류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된다.
문제는 만장일치를 명시적으로 강제했느냐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이 수업의 실제 작동 방식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절차와 결과물과 기록 구조가 모두 합의를 향해 기울어져 있고,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학생의 판단을 그대로 남겨 두는 절차가 없다는 데 있다. 합의하지 못한 채 남는 일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다. 때로는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가장 분명한 흔적이다. 이 수업은 그 흔적을 남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직 합의할 수 있는 문장으로 다시 다듬는 법을 가르칠 뿐이다.
전문성이라는 이름의 하청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에서 교사의 역할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모둠을 짜고, 시간을 재고, 자료를 나눠 주고, 입론과 반론과 최종 발언을 끊어 주고 합의안 쓰는 법을 안내한다. 이 목록을 끝까지 읽어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자리는 나오지 않는다. 협동 학습의 진행은 남아 있지만, 사회과 교사가 감당해야 할 판단은 뒤로 밀린다.
정치 참여 금지론처럼 헌법상 권리가 걸린 논제가 올라왔다면, 사회과 교사가 해야 할 일은 절차를 차질 없이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절차를 멈춰 세우고, 헌법 제21조부터 제26조까지의 내용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을 하지 못하면 이 토론은 사회과 수업으로 남기 어렵다. 그러나 시연 토론을 진행한 교사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안건을 처리하기 위한 절차는 정교하게 진행되지만, 기본권과 헌법 정신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를 교사 개인의 문제로만 돌리기는 어렵다. 이 모형이 교사에게 요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 자체가 절차에 있을 가능성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해법은 늘 절차를 더 다듬는 쪽에서 나온다. 그러는 동안 그 절차가 학생의 권리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묻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서울교육》 글은 이 점을 더 분명히 보여 준다. 이 글을 쓴 교사는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안내서〉의 연구와 수업 사례 개발, 보완 집필에 참여했다. 모형을 잘못 가져다 쓴 외부 사례가 아니라, 모형을 만든 쪽이 그 모형을 실제 교실에서 어떻게 운영했는지 보여 주는 사례에 가깝다. 이 교사는 자신이 20여 년간 협동 학습을 해 왔고,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이 자신에게 안성맞춤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이 모형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여기서 전문성은 협동 학습이라는 방법론에서 온다. 따라서 어떤 논제가 오더라도 협동 학습을 매끄럽게 운영하기 위한 재료가 된다.
또 체크리스트를 더 정교하게 구현하는 일이 사회과학의 비판의식 앞에 오게 된다. 이 글에 설명된 모둠원의 역할도, 수업 절차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에서 몇몇 학생은 2차 토론이 1차 토론의 되풀이 같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입장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글을 쓴 교사는 이것을 절차 자체의 문제로는 읽지 않는다. 두 토론 사이에 하루이틀 간격을 두거나, 2차 토론을 다른 활동으로 바꾸거나, 인공지능 플랫폼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안이 된다. 수업의 방향이 아닌, 운영 방식만이 질문의 대상이 된다.
이제 무엇이 남는지를 보자. 교사는 이러한 일련의 수업 과정에서 관찰했던 학생들의 활동을 교과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에 그대로 기록했다. 학생의 배움이나 기본권 감각보다, 관찰 가능한 활동의 체크리스트가 남는다. 본 것이 적히고, 적힌 것은 각자의 생활기록부에 기록된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무언가를 놓쳤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모형 구축에 참여한 사람이 남긴 기록이고, 이 모형은 성공적으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교사 개인이 하청이라는 뜻이 아니다. 모형이 교사의 전문성을 하청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는 뜻이다. 교육청과 연구자가 모형을 만들고, 교사는 그 모형을 받아 교실에서 운영한다. 학생이 쓴 합의문은 교육청 체크리스트의 한 칸이 된다. 교사는 교육을 판단하는 대신, 절차를 운영하는 사람에 가까워진다. 전문성이라는 말은 그대로 붙어 있지만, 그 전문성은 위에서 내려온 모형을 더 부드럽고 빠르고 보기 좋게 굴리는 능력으로 바뀐다.
연수가 열리고, 우수 수업 사례로 표창되고, 컨퍼런스에서 발표되고, 교육청 간행물에 실린다. 정교한 활동지, 매끄러운 모둠 운영, 학생이 잘 써낸 결과물, 잘 정리된 수업 후기. 학교가 상을 주는 전문성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더 좋아진다고 교사의 본질적 권한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체크리스트를 운영하는 능력이 정교해질수록, 멈출 수 있는 길은 더 보이지 않게 된다.
끝에 남는 것도 비슷하다. 생활기록부 몇 줄이 연수 보고서, 우수 사례집, 정책 성과로 이어진다. 학생이 이 수업에서 무엇을 얻어가는지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맞는 칸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학교생활기록부 기록이 대학 진학의 근거가 되면, 합의를 끝까지 거부하는 학생은 자기 의견을 지키는 시민이 아닌, 반 친구들의 생활기록부 기록을 막는 사람이 된다. 그 손해는 합의를 요구하는 압력으로 바뀐다. 그 사이 교육감과 교육청은 학생들이 활발하게 토론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학생에게 남는 것은 따로 있다. 자신의 권리를 합의 가능한 문장으로 다듬는 법. 자기 거부를 친구의 생활기록부에 끼치는 손해로 셈하는 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적극적 참여라고 부르는 법.
이 구조는 교사에게도 나쁘다. 겉으로는 교사를 전문가로 존중해도, 실제로는 교사가 교육적으로 부적절한 요구를 거절하고, 헌법과 기본권에 대해 고민하고, 수업의 방향을 판단할 본질적 권한을 빼앗는다. 교사가 멈추면, 이 모형은 그것을 수업 진행의 실패로 처리할 뿐이다. 교사가 어려움을 겪을수록 교육의 외주화는 빨라진다. 다른 학교의 모범 사례가 비교 대상으로 따라붙고, 외부 컨설팅이 붙고, 연수가 열린다. 그 연수가 알려 주는 것은 멈추는 법이 아니라, 더 부드럽게 수업을 진행하고 결과를 만드는 법이다.
좋은 교사는 절차의 끝까지 학생을 데려가는 사람이 아니다. 절차가, 가르침이 학생의 권리를 침범할 때 그 절차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이다. 본령을 잊은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으로 남지 못한다. 통치를 교실에서 집행하는 역할만 맡게 될 뿐이다.
이 수업은 어떤 ‘민주 시민’을 길러 내는가
누군가는 체크리스트를 채운다. 합의문, 보고서, 성찰문, 발표 자료, 그리고 정책 성과로 보고할 수 있는 그럴듯한 숫자와 사진으로. 누군가는 체크리스트를 채우지 못한다. 끝까지 “예”라고 하지 않은 학생에게 붙는 말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건설적이지 않다. 공동체의 화합을 깬다. 회의를 다음으로 넘기지 못하게 한다. 함께 낼 문서를 만들지 못하게 한다. 분위기를 무겁게 한다. 대안 없이 반대만 한다. 감정적이다. 끝까지 버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눈으로 보면, 바로 그런 사람이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 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을 살펴보면, 타협은 생각보다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이기적이어서만은 아니다. 어떤 요구는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 권리나 존엄을 내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기본권이 걸린 일에서는 그렇다. 그 앞에서 이루어진 건설적 합의란, 실제로는 누군가가 더 버티지 못하고 침묵한 결과일 때가 많다. 끝까지 “아니오”라고 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만큼은 지켜 낸 것이다. 결과물이 없어도 괜찮다. 그는 공동체의 자랑거리로 동원되기를 거부하는 대신, 한 사람의 시민으로 남은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 문장에 서명하도록 만드는 절차를 민주주의라 부르지 않는다. 끝내 의견이 갈려도 서로를 견뎌 내는 일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본질에 가깝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않기로 한 선만 함께 지킨 채, 일단 정하고 다음에 다시 다툰다. 그럴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공존도 그렇다. 공존은 모두가 같은 문장에 이름을 적은 상태가 아니다. 서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남아, 다음 논의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 수업에서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지 못한다. 안내서는 교실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라고 말하지만,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학생을 안전하게 남겨 두는 절차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는 공동체의 기준에 아직 미치지 못했기에 더 배워야 하는 학생이 된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은 이름과 달리 공존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수업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행정이 알아볼 수 있는 ‘민주 시민’은 꽤 성공적으로 길러 낸다. 차례를 지키고, 상대 입장을 말해 보고,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끝에는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문장을 찾아내는 사람. 정해진 장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말하고 참여하지만, 그 장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 사람. 갈등을 권리의 충돌로 남겨 두지 않고, 조정 가능한 입장 차이로 바꾸는 사람. 자기 판단을 끝까지 지키기보다, 합의문에 들어갈 수 있는 말로 고치는 사람. 이 절차 안에서 학생이 익히는 것은 갈등을 견디는 시민의 태도가 아니라, 갈등을 관리자가 처리하기 쉬운 형태로 바꾸고 통치 가능한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법이다.
이처럼 끝까지 합의점을 찾는 사람이 좋은 시민이라는 말이 상식이 되면, 힘과 자원을 가진 누군가 대신 합의하지 않는 누군가가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되기 마련이다. 그러면 사회적 소수자들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선다. 다수에게는 별것 아닌 조정안이지만, 소수자에게는 자기 존엄, 안전, 권리의 후퇴가 남는다.
이득을 보는 쪽은 시민이 아니라 통치자와 관리자다. 통치자는 질서가 구현되기를 바란다. 관리자는 갈등의 해결보다, 갈등이 끝났다는 보고를 더 좋아한다. 통치자는 학생들이 질서 안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합의하는 장면을 얻고, 관리자는 갈등이 처리되었다는 문서와 사진을 얻는다. 이 수업은 둘 모두에게 유익하다.
학생은 그 질서 안에서 충분히 주체적으로 보인다. 다만 그 주체성은, 통치를 하는 이들이 규정한 절차와 권한을 겨누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된다. 누가 어떤 권리를 침해당했는지, 왜 그 사람은 동의할 수 없는지, 어떤 분위기에서 그 사람이 침묵하게 되었는지를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은 품이 많이 든다. 서로 입장을 이해하고 합의점을 찾아보자는 말은 그 품을 줄인다. 갈등은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문제가 된다. 관리자는 판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중재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책임은 당사자들에게 흩어진다.
누가 작정하고 꾸민 일이 아니다. 회의록에 학생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자고 적어 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교육 행정이 표창장에 적기 좋은 결과, 연구자가 논문으로 쓰기 좋은 모형, 교사가 시간표 안에서 다루기 좋은 차시, 기자가 미담으로 받아쓰기 좋은 장면, 장학사가 보고서에 붙이기 좋은 사진. 이것들이 맞물리면 이런 수업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므로 합의가 나왔다는 말은 단지 깔끔하고 안전하고 셀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그 질서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표시가 된다. 끝내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거부는 정당했다는 말은 행정 문서에 담기 어렵다.
그러면 소수자는 무엇을 얻는가. 자기가 하려던 말을 잃거나, 끝까지 동의하지 않는 미성숙한 시민이 된다. 결과물은 통치의 성과로 남고, 그 값은 끝까지 버틸 형편이 못 되는 학생이 치른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사람들은 제도권에서 들려오는 공존, 합의, 성숙, 민주 시민 같은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 말들이 자신들을 길들이는 언어였다고 느낀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 분노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말을 건넨다. ‘그들이 너를 무시했다. 그들이 말한 공존은 너를 침묵시키는 장치였다. 그들의 합의는 네 권리를 지우는 의식이었다. 우리는 네 분노를 그대로 받는다.’ 이 말은 위험하다. 그러면서 힘이 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수업을 설계한 이들은 그것이 극단화를 막고 시민적 합의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상상한 질서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문제는 그 질서 안에서 학생의 거부가 시민의 판단으로 남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모든 학생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구조에는 그 위험을 다룰 절차를 적을 칸이 없다. 어떤 거부는 침해될 수 없는 권리에 닿아 있고, 어떤 거부는 그저 고집이다. 이 수업은 그 둘을 가르지 않는다. 학생이 끝까지 동의하지 않으면,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 거부는 다시 합의 가능한 문장으로 고쳐 써야 할 미완성 초안이 된다. 동의가 기본값이고, 그 외의 무언가는 성찰해야 할 무언가가 된다.
남는 것도, 남길 것도 없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에는 민주도, 시민도, 교육도 없다. 그렇기에 이 사업은 고쳐서 쓸 수 없고, 폐기할 수밖에 없다.
주제 선정이 조금 부적절했다거나, 자료가 부족했다거나, 교사의 수업 진행이 미숙했다는 정도에서 잘못이 끝났다면 보완하자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의 간판 사업, 교육과정 개발자의 모형, 교사 연수와 쇼케이스 수업, 기획 기사로 홍보된 장면에서 이 결과가 나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장 잘 정리된 말, 가장 잘 통제된 장면, 가장 보여 주기 좋은 사례에서 그들이 말해 온 질서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언론에 보여 주기 위한 수업 시연에서조차,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한 참정권을 제한하자는 주장 앞에서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수업 모형 안내서에서조차 피하라고 한 주장인데도 그랬다. 그저 늘 해 왔듯 무작위로 찬반을 나누고, 입장을 바꾸고, 만장일치 합의를 요구했다. 그러면 청소년의 참정권은 침해될 수 없는 기본권이 아니라 그날 모둠에서 정한 행정 절차가 된다.
헌법을 모르고서 무슨 토론을 하며, 무슨 민주시민교육을 한다는 것인가. 토대가 처음부터 없었다. 교육감도, 교육청 조직도, 모형을 설계한 연구자도, 그 토론을 진행한 교사도, 그것을 미담으로 받아쓴 언론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그런 채로 간판 정책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업은 그만두어야만 한다.
헌법상 권리의 주체와 기본권 제한의 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민주시민교육을 맡겠다는 것은, 면허 없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액셀과 브레이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수사적 과장이 아니라 자격의 문제다. 이들은 학생 앞에서 민주시민교육을 말하기 전에, 스스로의 헌정 감각부터 만들어야 한다.
이를 주입식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매로 교과서를 외우게 하고, 시험에 빈칸을 내던 시절의 교실에 비해 무언가는 분명 나아졌다. 그러나 학생을 시민으로 세우려 한 적이 없던 그 교육이, 학생에게서 무엇을 끝내 빼앗지 못했는지는 분명히 해 두자.
헌법 조항이 학생의 머릿속에 남았다. ‘모든 국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선거권’, ‘공무담임권’, ‘청원권’. 교육이 의도한 결과도, 학생이 의도한 결과도 아니었지만, 문구는 새겨졌다. 그리고 그 문구가 언젠가 현실과 부딪혔을 때, 시민이 깨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헌법이 현실과 부딪히기 전에, ‘서로 입장이 다를 수 있다’, ‘학교 안에서 조정할 수 있다’, ‘합의 가능한 방안을 찾아보자’는 부드러운 말의 체크리스트가 먼저 도착한다. 권리 침해가 갈등으로, 부정의가 입장 차이로, 거부가 합의 실패로 옮겨 적힌다.
낡은 교육은 바깥에서 학생을 억압했기에, 학생은 그 억압을 억압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새 교육은 겉으로는 억압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학생을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더 정교하다. 그래서 더 알아채기 어렵다. 주입식 교육 시절의 병폐는 사라지지 않았다. 더 세련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한때 학교는 학생에게 교련이라는 명칭으로 군사 훈련을 시키고, 줄 세워 사열하고, 배움이 아니라 동원을 가르쳤다. 진보교육은 한때 이를 비판했다. 그 비판은 옳았고, 지금도 옳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오늘도 학생은 동원된다. 카메라 앞의 피사체가 된다. 그들의 학교생활은 기록으로 남아 누군가의 실적이 된다. 그들이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혐오 반대 캠페인’을 벌이는 장면은 사진으로 남아 보고서에 붙고, 생활기록부에 남고, 교육감의 실적이 된다.
학생들이 억압을 느끼고, 교육이 요구하는 질서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교련이 있던 시절이 더 나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때와 견주어 분명히 나아진 것이 하나 있다. 학생을 직접 때리진 않는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이 교육을 하는 이들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한때 자신들이 비판하던 그 행태를, 지금 자신들이 상당 부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그 시절 학생들이 교육을 싫어했듯, 지금의 학생들도 교육을 싫어한다. 입시 때문이라거나 극우 유튜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학생이 싫어한다는 사실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학생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교육은, 다른 무엇을 더 따지기 전에 그 자체로 이미 실패한 교육이다.
전문성이란 활동지를 더 정교하게 다듬고, 모둠 운영을 더 깔끔하게 진행하며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능력이 아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수업이 학생에게 헌법 정신이 말하는 무언가를 남기고 있는지, 아니면 그 정신을 그럴듯한 절차 속에 녹이고 있는지, 이 차이를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교사의 전문성이어야 한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직시하는 대신 그럴듯한 겉모습만을 기리는 이들은, 권력의 교실 통치를 더 세련된 도구로 더 정교하게 거들 뿐이다.
한때 무엇을 비판했는지조차 잊은 이들은 이름만 바뀐 채로 과거 교실을 통치했던 권력자들과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모든 국민이 권리의 주체라는 한 줄의 헌법 정신조차도 학생에게 남기지 못하는 교육을, 어떻게 민주시민교육이라 부를 수 있는가.
참고 문헌
“토론엔 승패 없어… 찬반 입장 모두 서본 후 합의점 찾아요”, 〈동아일보〉, 2025년 3월 13일.
“교사-학생 한 팀 이뤄 역지사지 토론… 이해 깊어져 민주적 합의 도출”, 〈동아일보〉, 2025년 3월 20일.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수업〉, 서울시교육청.
〈[중학교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 경쟁이 아닌 공존을 위한 토론!〉, 《서울교육》, 2024년 여름호,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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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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