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호[특집] ‘2028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의 본질적인 일탈 | 강태중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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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의 본질적인 일탈


강태중 tjgahng@cau.ac.kr

중앙대학교 교육학과 명예교수


‘2028 대학 입시 제도 개편안’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학교교육에 대한 대입 제도의 악영향은 더욱 깊어지기만 할 것이다. 교육부는 대입 제도를 좋게 고친다고 안을 내놓았지만, 문제부터 잘못 짚었다. 그래서 계속 방치될 교육 문제는 고질(痼疾)로 더욱 굳어질 것이다.


‘통합형·융합형’ 수능과 ‘내신 5등급제’로 충실한 개편?


교육부는 대입 제도에서 고쳐야 할 게 무엇이라고 보았는가? 개편 시안 문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2028학년도 대학 입시 제도 개편의 열쇠는 수능과 내신.” 즉, “대입의 핵심은 수능 시험과 고교 내신(학생부)”이라고 전제하며, 이 “두 개의 큰 축”을 손보는 게 개편의 요체라고 규정했다.

두 축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것인가? 수능에 대해서는 “통합형·융합형 과목 체계로 개편”하고, 내신에 대해서는 “5등급 체제로 선진화”하겠다고 했다. 2028 개편에서는 이 두 방향이 주조인 셈이다. “이권 카르텔 근절”이니 “교사의 평가 전문성 향상 연수”니 하는 다른 대안에 대한 언급들이 정책 문서에 없지 않으나, 주변적이고 실속도 없다.

교육부는 개편에서 무엇을 표방하는가? 확정안의 문구를 옮기면 이렇다. “통합적·융합적 교육을 유도하는 공정한 수능”과 “선진화된 내신 평가”. 이 말들이 무슨 뜻인지, 보도 자료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대강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수능에 대해서 보자. 현재 수능에서는 국어, 수학, 탐구(사회, 과학, 직업) 영역에서 시험 과목 선택의 여지를 준다. 2028학년도부터 개편될 수능에서는 이 여지가 사라진다. 모든 수험생이 ‘같은’ 수능을 치게 된다. ‘통합형’이라는 조어는 이 점을 가리킨다. 교육부는 또 통합형을 채택함으로써 수능이 공정해진다고도 주장한다. ‘문·이과 유불리’나 ‘탐구’에서의 선택 유불리 문제를 논란하는 현실을 염두에 둔 주장이다. 과목 선택에 따라 유불리가 갈리는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을 테니 공정해진다는 논리이다.

다른 한편, 개편되는 수능이 어떻게 ‘융합형’이 되는지 설명하는 데서는 모호한데, 시험 과목들이 좀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구성된다는 뜻이라 짐작된다. 모든 수험생에게 ‘공통’인 시험이 되게 하려면 수능 과목을 현재처럼(언어와매체, 기하, 동아시아사 등과 같이) ‘특화’되게 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교육과정에서 ‘선택 과목’들로 갈리기 전에 이수하게 되는 ‘공통 과목’ 수준에서 구성해야 할 것이다. 탐구 영역의 경우, 시험 과목을 ‘통합사회’와 ‘통합과학’(또는, ‘성공적인 직업생활’)으로 획일화하는 식이다. 이런 개편을 두고, 교육부는 “교과 간 벽을 허물고” 있다며, “미래 사회에 필요한 융합형 인재를 기르기 위해”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내신의 경우, “5등급 체제로 선진화”한다는 점에 대해서, 교육부는 이렇게 부연하고 있다. “학생 간 과잉 경쟁을 유발하는 9등급제를 해외 주요국 추세에 맞춰 5등급제로 개편”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상대 평가’ 양식은 유지한다. 원점수를 기준으로 5등급을 나누는 ‘절대 평가’ 기록과 석차 백분율을 기준으로 역시 5등급을 가르는 ‘상대 평가’ 기록을 나란히 전형 자료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런 체제가 과연 ‘해외 주요국 추세’를 따르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병기 체제로도 과잉 경쟁을 완화할 수 있는지 석연치 않지만, 교육부는 그렇다는 주장에 주저함이 없다.


대입 개편의 열쇠는 수능과 내신이다?


글머리에 적었듯이, 교육부는 문제부터 잘못 짚었다. 대입 제도 “개편의 열쇠는 수능과 내신”에 있다고 전제했는데, 바꾸어 말하면, 교육부로서는 수능과 내신이 없는 대입 제도는 상상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수능과 내신을 핵심 기둥으로 삼아야만 대입 제도가 지탱되는가? 말이 안 된다. 수능과 내신이 대입 제도를 떠받치고 있다는 구도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어쩔 텐가? 수능과 내신을 버리든지, 아니면 환골탈태시켜야 하지 않을까? 교육부는 이런 가능성을 애초에 덮어 버렸다. 수능과 내신이라는 구도 자체가 초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룰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수능과 내신이 대입 제도의 주축이어서 생기는 문제는 없는가? 그럴 리 없다. 문제는 막대하고 심각하다. 하나만 짚어 보아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테다. 흔히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말로 지적되어 온 문제이다.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듯하다. 이것은 100년을 넘게 우리 근대 교육을 괴롭혀 온 고질이다.

문제가 만연하고 고질적인데도, 언젠가부터 정부는 정책으로 대처하길 피하기 시작했다. 고질적이었던 만큼, 정책 효과를 과시하기에 그른 것이라 여겨 아예 다루길 기피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에 정부는 ‘대입 준비 부담’(특히, ‘사교육비 부담’)이란 의제를 띄웠다. 입시 위주로 흐르는 학교교육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과외비’ 등의 가계 지출이 커지는 사태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과외 금지가 위헌이란 결정이 나기 전(2000년)까지는 정부가 과외와 같은 입시 준비 교습을 막아야 할 폐단으로 규정했다. 그런 교습이 학교에서 이루어지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과외 금지를 강제할 수 없게 되면서 이야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사교육비 부담에 대한 성토는 사회적으로 팽배해지는데 정부는 마땅한 대책을 찾지 못했다. 대응해서 동원할 수단으로 남은 것은 학교밖에 없었다(나중에 EBS도 동원됐다). 결국 ‘공교육 내실화’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학생들이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학교가 책임지고 ‘서비스’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학교교육이 내실화되면 사교육 수요도 사라질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런 논리는 급기야 ‘사교육 없는 학교 정책’과 ‘EBS-수능 연계 방침’과 같은 ‘개혁’으로 이어졌다.

‘사교육 없는 학교’란 역설적이게도 사교육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는 학교를 뜻했다. 재학생들이 사교육을 받으러 ‘밖’으로 나갈 필요 없게,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안’에 갖춘 학교라는 뜻이었다. ‘EBS-수능 연계 방침’도 본질상 같았다. 발표에 나선 장관은 “EBS만 보면 달리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학교에서도 EBS 수능 교재로 문제 풀이 교습을 반복하도록 장려했다. 학교가 ‘학원’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기에 이른 것이다. 학교의 사명이 이렇게 뒤집히는 데 수능이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수능만의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내신’은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라는 이름으로 ‘종합화’되고 포괄적인 대입 전형 자료로 부상했다. “학교에서의 학습과 생활만으로 대입 준비가 충분해지도록” 만들기 위한 정책의 성과였다. 그렇게 내신은 대입 제도에 코 꿰였다. 학교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입 전형에 반영되게 됐다. 학생들에게 이제 학교교육은 ‘스펙’을 갖추는 과정으로 둔갑했다.

내신 정책이 어떤 사태를 초래했는지 최근의 한 뉴스가 잘 드러내 준다. 보도인즉슨, 학생부 조작 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수시 전형에서 스펙 반영을 제한하게 되자, 봉사 커뮤니티에 학생 봉사자들이 현격히 줄었고 심지어 헌혈자도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봉사나 헌혈은 학생부 기록을 위한 ‘전략적인 아이템’일 뿐이었다. 내신이 대입 제도의 핵심 축이 되면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위선의 버릇을 들였다.

학교교육은 전략적인 대입 준비 과정과 다름없는 것이고, ‘계층 사다리’ 오르기 경쟁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했다. 교과 수업에서는 문제 풀이 연습이 기조를 이루고, 비교과 활동(‘창의적 체험 활동’)은 ‘자동봉진’(자율, 동아리, 봉사, 진로 활동)의 미화 작업으로 치환되었다. 이런 교육 현실을 교육부는 문제가 없다고 본 셈이다. 적어도 2028 대입 제도 개편에서는 그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교육부 눈에 수능과 내신은 대입 제도의 불가침 ‘상수(常數)’이다. 그것을 근본적으로 건드리는 개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개편은 두 상수의 내부 ‘변수’들을(과목 구성이나 등급의 수 같은 것들을) 손보는 수준에서 그쳐야 마땅한 것이었다.


공정한 수능, 선진적인 내신 평가면 된다?


결국 2028 대입 제도 개편은 수능과 내신에 대해 거론되는 눈앞의 ‘쟁점’들에 대응하는 데 그쳤다. 수능 과목 선택에 따르는 유불리 문제를 해결하고, 고교 학점제에 따라올 내신 평가의 혼란을 막는다는 등의 취지를 표방하며, ‘통합형·융합형 수능’을 만들고 ‘내신 5등급제’를 채택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홍보에서의 과장은 여전했다. 수능을 공정하게 만들고 평가를 선진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능과 내신이 학교교육을 총체적으로 비틀고 부패시키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둔 채 공정한 수능이니 선진화된 평가니 내세우는 것은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

흔한 비판의 말마따나, ‘단순 암기’와 ‘반복 연습’은 시험 준비의 핵심 전략이다. 수능의 시험 과목을 개편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이 전략을 버릴 리 만무하다. 문제 풀이 위주인 학교 수업이 창의적이고 심층적인 사고력을 키우는 수업으로 바뀔 리도 만무하다. 내신 9등급제를 5등급제로 줄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사실상 없을 것이다. 학교 성적의 상대적 순위가 그대로 대입 전형 자료가 되는 현실에서 등급의 개수를 줄인다고 달라질 게 없다. 9개이든 5개이든, 경쟁자를 앞서야 한다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등급이 줄어 설사 내신의 당락 결정력이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결정력을 지니게 되는 자료를 향해 전략을 틀어야 할 뿐이다. ‘풍선 효과’는 거듭 입증될 것이다.

교육부는 이번 개편에 큰 기대를 걸라고 소리 높인다. 수능은 더 공정해질 것이고 내신 평가는 선진국다워질 것이라 떠벌린다. ‘문·이과 유불리’ 문제 같은 것이 해소되고 ‘교실 내 소모적 경쟁’도 사라질 것이며, 학생들의 ‘협업 능력’과 ‘공동체 의식’이 더 키워질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매우 안이하고 공허한 낙관론이다.

수능 자체가 학교교육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더욱이, 그 훼손은 수능 자체의 성질로 인해 일어나는 점이 없지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 구조적인’ 원인으로 조장되는 것이다. 대입 자체에 걸려 있는 막대한 ‘대가(代價, stakes)’가 수능과 학교교육의 부패를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수능을 지금 자리에 그대로 두는 한, 수능의 내부 체계를 어떻게 개편하든, 학교교육이 더 나아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개인의 교육 성취를 수능 점수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점수에 어마어마한 사회적 포상을 걸고 있다. 수능 점수에 생애가 걸려 있다. 자연스럽게 교육을 받는 목적은 그 점수가 된다. 이 상황에서 수능과 학교교육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수능은 더 이상 ‘정상적인’ 공부 성과를 표시하는 시험이 되지 못하고, 학교는 더 이상 ‘정상적으로’ 교육할 수 없다. 수능 점수는 득점 전략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얼마나 되느냐에 달리게 되고, 학교는 그렇게 동원되는 여러 자원 가운데 하나인 궁색한(누구나 가진)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수능은 이미 정의로울 수 없는 자리에 있다. 스스로 부패하며 학교교육과 사회 공익을 해치게 되어 있다. 정의롭지 못한 수능이 공정해진다는 말은 모순이다. 적어도 공공 제도가 공정해지려면 그에 앞서 정의로워져야 한다.

내신 개편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학교생활기록부는 학교에서의 수업과 활동을 통째로 전형 자료 생산에 바치기 위해 고안된 도구이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 진학을 소홀히 준비해도 되는 학생은 없을 터이다. 결국 모든 학생이 학교(적어도 고등학교)에 재학하는 내내 진학에 유리한 기록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 지내야 하는 형편에 처하게 된다. 이 상황을 그대로 둔 채, 학생들에게 대입 걱정을 잊고 순수하게 학습하고 활동하라고만 하면 곧이 여기겠는가? 등급 수를 5개로 줄이니 경쟁하지 말고 협력하라면 곧이 여기겠는가? 평가 선진화니 경쟁 완화니 하는 교육부의 큰소리가 수긍될 여지는 없다.


점수를 목표로 둔갑시키는 대입 제도, 교육 부패의 원흉


우리 대입 제도의 역사는 정책 실패사이다. 대체로 편년체인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대책’들을 내놓았으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남거나 새로운 ‘문제’들로 묻혔다. 이 실패의 연속에서 틀이 미시적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제도의 거시적인 성질에서 변한 것은 없다. 진학 경쟁은 늘 치열해서 ‘문제’였고, 경쟁을 뚫으려는 전략들은 시험과 학교교육을 뒤틀고 부패시켰다. 나라 경제가 성장하자 가정마다 전략을 사는 데 돈을 너무 쏟아붓는 것도 ‘문제’로 합류했다. 이제까지 수많았던 대입 제도 개편은 어떤 문제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시행착오의 전철에서 벗어날 길을 궁리해야 했을 때는 한참 지났으리라. 학문에 진전이 있으려면 ‘패러다임’을 깨야 하듯이, 제도도 답보를 거듭하고 있다면 그 기본 틀을 의심해야 한다. 지금의 틀을 ‘정상’이라 믿고 그 믿음 위에서 미시적인 손질만 반복해서는 나아지는 게 있을 수 없다.

대입 제도의 현재 틀은 어떤 속성을 핵심으로 품고 있는가? 틀을 깨야 한다면 어느 맥점을 두드려야 할까? 이제라도 이런 질문을 파고들어야 할 터이다. 새로운 논의의 빌미가 되도록 성긴 제안을 내놓는다.

우리 대입 제도는 학교교육과 대입 전형을 기계적으로 조밀하게 꿰맞춰 놓고 있다. 그리고 그런 꿰맞춤은 학교와 교사에 대한 불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말하자면 ‘객관적인’ 점수를 통해서만 학교에서의 성취와 대입 성공이 ‘매칭’되도록 제도가 조직되어 있다. 거듭 얘기하거니와, 이런 제도에서 점수 자체와 점수를 만들어 내는 과정(장치)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 점을 지적하는 ‘법칙’이 나온 지는 50년이 넘어가고,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된 지도 30년이 되어 가고 있다. “어떤 점수가 목표가 되어 버리면 그 점수는 더 이상 좋은 점수일 수 없다(When a measure becomes a target, it ceases to be a good measure).” 수능 점수와 내신 평가 점수는 모두 이 간명한 경고의 대상이다. 우리 대입 제도는 모든 학생과 학교에 그 불순한 점수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

이 굴레를 벗기기 위해서는 학교를 전형 제도에서 독립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학교에 내신이라는 전형 자료 생산을 강제하는 학생부 제도를 폐기해야 하고, 학교에서 EBS 수능 교재 같은 ‘경전’을 가지고 외고 풀고 반복하도록 구속하는 ‘연계 방침’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이런 항변이 곧 날아들 것이다. ‘전형 자료는 어디서 구하며, 사교육비 부담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물론 심각하다. 대책 또한 시급히 그리고 실효 있게 강구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학교가 감당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대학이 고심하고, 정부 전체가 고심해야 할 문제이다.

학교는 학교가 갈 길을 묵묵히 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목표를 진정으로 추구할 수 있게 놓아주어야 하고, 교사들은 기본 역량과 꾸준한 노력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성공과 실패를 전문적으로 진단하며 수업과 활동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어떻게 학교와 교사를 믿을 수 있느냐 다시 항변할 것이다. 믿지 않으면 이제까지의 실패사를 거듭 반복해야 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교육 선진국이라는 나라들과 우리의 대입 제도가 다른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가 사회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닐까? 객관적인 점수를 요구하고, 그것만이 공정을 확보하는 수단이라는 우리 통념은 사회적 불신이 만들고 키운다. 사람을 믿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누구나 마음을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한에서만 믿겠다고 우기기 마련이다. 점수만을 따져야 하는 행태가 공정이고 정의의 길이라고 우긴다. 점수 맹신은 불신이란 우리 사회의 독소를 먹고 자라 왔다.

사회적 신뢰는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도를 바꾼다고 당장 없던 신뢰가 솟아나지 않는다. 신뢰를 쌓아 가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것이며, 또한 숱한 반동의 여론을 거슬러 가야 할 것이다. 소위 선진국의 역사를 요약한다면 바로 그런 과정을 겪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교육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학교와 교사를 믿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개천의 용’ 신화 깨고, 사회 불평등을 문제 삼아야


대입 제도로부터 학교를 독립시키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충분히 이루어 냈다고 내세울 수 없을 터이다. 그리고 그 과제는 그저 학교와 교사를 믿는다고 저절로 이루어질 수도 없을 테지만, 그 전에, 믿음이 충분히 구축되기도 어렵다. 사회 속에 믿음을 쌓기 위해서는 토대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사회 안의 격차와 차별이 누그러지는 토대가 필요하리라 여긴다. 민주적인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계속 심해지고 있고, 약자에 대한 혐오도 더 만연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신은 타오를 수밖에 없다. 누가 왜 그 돈과 자리를 차지하는가에 대한 날 선 불만과 감시가 사회에 편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회적 긴장은 대체로 ‘능력주의’로 정당화된다. 불평등은 능력 차이일 뿐이라 강변되고, 혐오는 무능력한 약자가 감수해 마땅한 벌로 간주된다. 학교교육은 바로 이런 현실, 즉 능력주의를 지탱시키는 데 동원된다. 격차와 차별이 정당화되지 않으면 사회는 붕괴할 것이다. 그 붕괴를 막는 데 학교만큼 유효한 수단은 아직 인류에게 없다.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에 대한 비판이 오늘날 부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그에 따른 인류 다수의 불행은 능력 탓으로 은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교육)는 바로 그런 메리토크라시의 중추로 기능한다. 우리에게도 사태는 예외가 아니다. 격차와 차별이 심해질수록 불신에 근거한 불평과 쟁의는 살벌해지고, 학교는 인격을 배양하기보다 객관적인 점수를 생산하는 데 몰두해야 한다. 점수의 ‘객관성’을 들어 불평등의 사태를 공정하다며 무마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입 제도는 바로 그런 필요에 부응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대입 제도의 문제는 교육 너머에 있으며, 교육부에 그 해결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이다. 진정한 대입 제도 개편은 범국가의 과제이며, 우리 사회의 굳은 믿음을 깨야 하는 일이다. 불평등을 줄이고, ‘개천의 용’ 신화를 깨야 한다. 학교를 새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해야 한다. 불평등의 ‘구조적 폭력’이 모진 한, 교육은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기 마련이며, 그 정당화 논리에서는 개천의 용 이야기가 불가결하다. 학교는 등용문(登龍門)으로만 뜻을 지니게 된다. 이런 신화가 살아 있는 한, 대입 제도에 식민(植民)된 학교가 독립되기는 어렵다. 이 신화의 틀을 해체할 때 비로소 대입 제도가 제대로 개편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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