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호[특집] 입시에서의 성취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까 | 황세원

20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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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에서의 성취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할까

‘고3 때 공부 잘한 순서’로 평생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문제


황세원 sehwon.hwang@workinlab.org

일in연구소 대표, 독립연구자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음 두 질문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관심이 있을까? 첫 질문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인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교육이 불평등을 완화시키는가?”이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데이터와 방법론을 사용해서 논문을 내놓고 있는 주제는 두 번째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훨씬 더 친숙한 것은 앞의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두 질문은 같은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육적 성취를 통해서 경제적 계층의 상층부로 이동하려는 개인이 있다고 할 때, 공교육을 비롯한 이 사회의 제도가 이를 도와주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를 묻는 내용이라고 본다면 그렇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질문 속의 ‘개인’은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다. 성적으로만 본다면 최상위권 대학에 너끈히 들어갈 만한 학생, 말하자면 ‘소년 급제’를 할 만한 학생이다. 이런 학생들이 그 성적에 걸맞은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닌가, 한국 사회는 이 점에 각별히 큰 관심을 가진다.

두 번째 질문의 초점은 조금 다르다. 성적이 높은지 낮은지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위치한 경제적 계층이다. 비교적 낮은 계층에 속한 학생들이 교육적 성취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는지, 이때 교육 제도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지가 질문의 포인트다. 달리 설명하면, 사회 전반에 경제적 계층 간 차이가 줄어들고 사회 이동성이 활발히 일어나게 하는 데 교육 제도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이 두 질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클 수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라 하더라도 불평등은 심화될 수 있고, 전반적인 사회 이동성은 낮은 수준일 수 있다. 또는, 개천에서 ‘용’이 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불평등이 완화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가 경제적으로 너무 평평하다면 탁월한 교육적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너무 작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9년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대학 입시 제도의 불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을 때, “정시를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학력고사 시절이 제일 공정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때의 ‘공정’이란, 고등학교 3학년 시점에 공부 잘한 순서 그대로 최상위권 대학부터 일렬로 착착 들어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기준을 놓고서 토론하고 실험한다면 실제로 ‘학력고사’가 가장 우수한 시험 제도라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교육 당국은 왜 굳이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가며 입시 제도를 바꿔 왔던 것일까?

학력고사를 수학능력시험으로 바꾸고, 정시보다 수시 전형의 비중을 높이려 해 온 노력들에는 목적이 있었다. 시험 문제 한 개 더 맞고 틀리는 결과로 대학이 결정되는 방식의 입시 제도가 잘못됐다는 반성을 토대로, 학생의 수학 능력을 종합적으로 그리고 다각도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표하에 제도를 고쳐 온 것이다. 이 맥락에서 본다면 시험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대학에 들어가게 하는 것은 ‘공정’이 아니다.

물론 ‘조국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렇게 바꾼 제도의 허점 때문에 돈 많은 부모, 사회적인 지위와 네트워크를 가진 부모를 둔 학생들이 더 큰 성취를 이루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이전 시대의 ‘공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고쳐 가면 될 일이다.

진짜 문제는, 제도를 어떻게 바꿔 왔든 입시에 관해서 한국인의 기저에 깔린 근본적 가치관이 변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 즉 가장 공부 잘한 사람이 최고의 성취를 이루고, 이른바 ‘출세’를 하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가치관 말이다. 


수능 만점자가 왜 중요한가?


2023년 12월, 수능 만점자가 언론에 공개되고 며칠 후, “수능 만점자를 알아야 할까?”라는 칼럼을 썼다(〈경향신문〉, 2023년 12월 12일). 수능 만점자의 신상이 대중에 공개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때 언론의 반응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 국가 기간 통신사 〈연합뉴스〉에서 이 학생을 카페로 불러내서 인터뷰를 했고, 며칠 후에는 ‘수능 표준 점수 수석’이라며 다른 학생의 인터뷰도 했다. 이후로 이 두 학생 모두 의대를 목표로 재수한 학생이고, 같은 학원을 다녔으며, 그 학원의 월 학원비가 얼마인지까지 수많은 언론에 도배되다시피 했다. 

이런 관심이 과연 정상인가? 이런 사안이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가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십을 전문으로 다루는 황색 언론도 아니고, 평소에는 공적 보도 가치를 지향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언론사들까지도 이 사안을 무비판적으로 다루는 행태를 지적하고 싶었다.

이 칼럼이 나가고 얼마 후, 유명 TV 토크쇼인 〈유퀴즈 온 더 블록〉에 1999년도 수능 만점자였던 오승은 씨가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언론 인터뷰에서 아이돌 그룹 H.O.T.를 모른다고 답했던 에피소드는 워낙 잘 알려졌기에 나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 사회가 ‘가장 공부 잘하는 사람’에 대해 각별히 관심을 가져 온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다시 언론에 출연하는지, 특별한 계기가 있어 보이지는 않기에 궁금해서 내용을 챙겨 봤다. 역시 별다른 이유는 없고 ‘수능 만점자는 어떻게 살아갈까?’와 같은 가십 차원의 관심이 섭외 이유인 듯했다.

다만 이 방송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었다. 당시에는 수능 만점자 발표가 나자마자 언론사들이 학생 집으로 몰려갔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온 가족을 다 카메라에 담으며 장시간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20여 년 동안 언론의 태도가 어느 정도 달라지기는 한 것이다. 그리고 오승은 씨가 당시 한 친구가 써 준 편지에서 “너처럼 공부 잘하는 사람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순수 학문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고 서울대 물리학과로 진학했다는 내용은 새삼스러운 신선함을 줬다. 오 씨는 어린 시절부터 물리학, 화학 등 순수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까지도 대학에서 물리와 생물 분야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옳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그런 학생이 있다 하더라도 ‘의대 진학’이라는 진로를 포기하려 할 것 같지는 않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공부 잘한 순서’대로 대학에 가야 하며 특히 ‘의대’라는 독보적이고 희소한 자원은 당연히 ‘가장 공부 잘한 사람’이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규범 수준으로 강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 기억과 달리 오승은 씨가 실제로 “H.O.T.를 모른다”라고 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이 방송으로 알았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강해졌을지 짐작할 수 있는 힌트가 사회학자 오찬호가 2013년에 펴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책에 들어 있다. 이 책을 통해 풀 수 있었던 의문 하나는, 왜 많은 대학생들이 ‘과잠’(학교 및 학과 로고가 들어간 단체 점퍼)을 입고 다니는지에 대한 것이다. 중고생들은 교복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왜 대학생들은 그렇게 자기 소속을 옷으로 드러내고자 하는지, 이런 경향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 늘 궁금했었다. 오찬호는 그 주된 이유를, 학생들이 자신들보다 성적 커트라인(요즘 말로 ‘입결’)이 낮은 학교 및 학과 학생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돌아보면 1990년대만 하더라도 대학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대략의 그룹 단위로 이야기됐다면 2000년대 이후로는 어느 대학 위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 밑에 어느 학과라는 식으로 서열이 세세하게 매겨졌다. 초등학생에게 물어봐도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식의 서열을 줄줄 읊을 정도다. 그런 서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내세워야 하기 때문에 ‘과잠’이 유행하게 됐고, 또 이런 유행에 따라서 다시 서열화가 공고해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대학 서열화가 강해진 이유에 대해서도 하나의 설명을 제시한다.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KTX 여승무원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를 주제로 한 대학 강의에서 한 학생이 “지금 대학생들이 왜 이렇게 고생을 합니까? 정규직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주장한 장면을 통해서다. 자신들은 대학 입시를 통해서 확보한 대학 서열이라는 자원 위에 대학 재학 중 쌓은 각종 ‘스펙’을 더해서 ‘정규직’이라는 자원을 획득해야 하는데 이 과정을 벗어난 사람의 ‘정규직 전환 요구’는 부당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대학 서열화는 아주 밀접하게 ‘일자리의 서열화’와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대학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과정의 효과적인 통로라면, ‘용’을 완성하는 것은 직업 세계일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 그토록 입시가 중요한 것은 대학 서열 자원이 ‘일자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성적에 따라서 대학만이 아니라 전공까지도 좌우되고, 단지 직업만이 아니라 대기업이냐 아니냐, 정규직이냐 아니냐까지 정해진다. ‘대기업 정규직’ 또는 그에 준하는 최상위권의 일자리에 들어가면 엘리트 네트워크에도 더 단단하게 소속될 수 있다. 재직하는 동안의 소득 및 안정성만이 아니라 각종 사회 자원들을 획득할 기회, 그리고 노후의 안정성까지도 이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곧, 10대 후반의 나이에 ‘공부를 잘한 정도’가 일생을 좌우하게 된다는 의미다.


희소해진 ‘일자리 자원’과 ‘변별력’


이 시점에서 돌아보자.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 잘한 순서, 그것도 대체로는 단 하루인 수능 시험에서 문제 많이 맞힌 순서로 일생 누릴 수 있는 자원의 차이가 이렇게 커지는 것이 당연한가? 사실상 입시에 활용되는 교과 내용 중 어디에도, 수능 문제 중 어디에도 이 사람이 추후에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물론 시험 성적은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간접적 자료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날 하루의 컨디션의 차이, 가정 환경의 차이, 시험장 환경의 차이 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는 완전히 밝혀진 바가 없다. 때문에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입시 제도를 ‘단 하루 시험에 좌우되지 않는’ 형태로 바꾸려는 시도가 계속 있어 왔던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입시로 얻을 수 있는 결과의 최대치는 ‘다음 단계의 교육을 수준 높은 기관에서 받을 수 있는 권리’ 정도여야 한다. 즉, 공부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하고 잘한 학생일수록 다음 단계에서 더 깊은 수준의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공부’ 자체로 성과를 내도록 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상 ‘수월성 교육’이라는 목표가 뜻하는 전부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를 잘한 학생이면 일자리 자원을 비롯한 각종 사회 자원들을 차지해야 한다고, 즉 ‘출세’해야 한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그 논리 사이에 비약이 있다는 것을 대체로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입시 제도를 개편해 온 교육 당국과 전문가들도 이 점까지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매번 입시 제도 개편안이 나올 때마다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이 ‘변별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대학의 서열과 일자리의 서열을 일치시키려는 노골적인 시도도 있다. 대학의 ‘계약 학과’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세대학교 시스템반도체학과에 입학하면 졸업 후 삼성전자 채용을 보장한다는 식의 제도다. 이는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 때문에 등장한 제도이므로, 대학 서열과 일자리 서열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증거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소위 ‘명문대’를 나왔다고 해서 대기업에 쉽게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지, 취업 시장에서 대학의 서열이 뒤바뀐 것은 아니다. 즉, 대학 서열 자원의 수는 대체로 유지된 데 비해서 일자리 자원의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뿐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들이 계약 학과를 두려고 하는 것은 대학 서열과 일자리 서열의 연관성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입시 교육 문제를 지적하고, 대학 서열화를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이 계약 학과에 대해서는 긍정적 시각을 가진 경우가 많다. 어쨌든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제도이고, 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도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대학’의 역할이다. 이 ‘계약 학과’ 제도에서 대학의 역할은 그저 서열의 맥락 위에 위치하는 것밖에 없다. 이 제도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학이 학생의 직업관과 가치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등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전제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하는 나이인 10대 후반과 기업에 입사하는 20~

30대 사이의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지, 이 시간 동안의 경험은 한 사람의 생각과 관점,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자.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고교 3학년 때의 나와 대학 4학년 때의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이다.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어떤 직장에서 일하고 싶은지 상이 그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는 관점에도 상당한 차이가 생겨 있었다. 

직원을 채용하는 기업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고교 3학년 때 성적을 기준으로 사람을 뽑아도 별 문제가 없다면 왜 그렇게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다양한 도구를 개발하면서까지 직원 채용을 열심히 하겠는가? 그냥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한 가지만 보면 될 텐데 말이다. 

물론 노동 시장에서 학력 자원이 일종의 신호(signal)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동 시장에서 기업은 구직자의 정보를 다 알 수 없는 ‘정보 비대칭’ 상황에 있기 때문에 여러 정보 중에서 가장 명확한 ‘학력 자원’, 즉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의 정보를 중심으로 구직자를 판단하게 된다는 시그널링 효과(Signaling Effect) 이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신호가 유일한 정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들은 구직자의 여러 정보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 개발해 왔고, 이 정보들을 조합해서(conjointing) 채용 대상자를 결정한다. 이런 과정들을 생각할 때 계약 학과란 시대에 역행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0대 후반에 취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4~5년 후에도 그 기업에 근속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 됐다. 정부가 ‘청년내일채움공제’와 같은 제도를 만들면서까지 독려해도 한국 사람들의 단기 근속 경향은 점점 강해져 왔을 뿐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1년 이내 단기 근속 비율은 가장 높고, 10년 이상 장기 근속 비율은 가장 낮은 ‘초단기 근속 국가’가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고교 3학년 때 공부 잘한 순서’를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야 할까?


중위값 학생의 삶을 입시 제도의 목표로 삼자


“그렇다면 입시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대해서 대안이 있느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사실 답하기 어렵다. 내가 교육 제도 전문가는 아니라는 변명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다만, 입시와 관련해서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하나 있다. 입시 성적에서 중위값(median)에 해당하는 학생들에게로 언론의 관심을 돌려 보자는 것이다. 중위값이라는 개념 자체가 대상자를 ‘일렬로 세웠을 때 정중앙에 위치한 값’이라는 뜻이므로, “어쨌든 일렬로 세우자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입시와 관련한 가장 큰 관심을 최상위권 학생에게 두어 온 관성을 깬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의의가 있다. 입시 제도를 설계하고 보완하는 데 있어서의 목표를 ‘중위값의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공교육에서의 성취를 바탕으로 괜찮은 일자리를 얻고,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으로 정한다면 어떨까? 지금까지 ‘변별력’을 목표로 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꼭 중위값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최빈값(mode), 또는 정규 분포상의 일정한 범위 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도 무방하기는 하다. 단, 중위값이나 최빈값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괜찮은 일과 삶을 영위하게 하려면 입시 제도만 바꿔서는 안 된다. 사회 구조 전체를 바꿔 나가야 한다. 앞에서 어느 대학생이 말한 것처럼 ‘정규직’이라는 자리가 최고의 스펙을 쌓은 사람만 차지할 수 있는 희소한 자원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정규직’이 고용의 안정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고, 차별받지 않고, 조직의 성과에 기여한 만큼 정당한 몫을 임금으로 배분받을 수 있고, 부당한 일이 있으면 문제를 제기할 통로가 존재하는 일자리라고 전제한다면 말이다. 어찌 보면 이는 대단히 특별한 조건은 아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차원에서 권고하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 수준의 조건이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고 비판의 대상이 됐던 데에는 비정규직이었던 보안 요원 등이 ‘정규직’이 되면 무조건 공사 내 최고 수준의 연봉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된다는 오해가 작용했었다. 여기서 ‘정규직화’란 간접 고용을 직접 고용으로 바꿈으로써 그동안 2년 단위로 해고되거나 재계약을 하는 형태였던 고용 불안정성을 없애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 ‘고연봉자가 되는 것’이라는 오해가 생겼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은 그 법적, 제도적 정의와 상관없이 ‘대기업 또는 공공기관에 공채 등 공식적인 과정을 통해 입사해서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엘리트 직군’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5인 미만 기업에서도 정규직으로 고용 계약을 맺을 수 있고, 최저임금을 받는 정규직도 있을 수 있으나 언젠가부터 통용되는 ‘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이런 혼란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맥락이 있다. 한국에서는 유독 대기업이나 공공 기관과 같이 규모가 큰 일터의 공채 직원들에게만 좋은 일자리 조건들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고임금과 각종 사내 복지, 수평적인 조직 문화, 시차 출퇴근제나 재택 근무제 등 유연한 근무 제도 등이다. 게다가 2021년 기준으로 노동조합 조직률이 14%대에 불과한 현실에서 노동조합조차 이런 대규모 일터들에 주로 존재하며, 공채 출신의 주요 직무 직원들만 가입이 허용된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한국 사람들에게는 ‘정규직’만이 좋은 일자리이고, 이는 학력 자원으로나 스펙으로나 최고 수준을 갖춘 사람들만 가져야 마땅한 희소한 자원으로 여겨지게 됐다. 그리고 서울 및 수도권의 대기업부터 지방의 영세 사업장까지, 정규직부터 비정규직까지, 원청 기업 직원부터 하청 업체 직원 또는 하청의 재하청 업체 파견직까지 일자리 조건이 한 줄로 쭉 낮아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통념은 현실의 억압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방 중소 업체들이 서울 대기업만큼 연봉은 많이 주지 못하더라도 주 4일 근무제, 재택 근무 병행제, 안식월 제도, 수평적인 조직 문화 등을 도입하지 말란 법은 없다. 거기까지 아니더라도 근로기준법 잘 지키고 칼퇴근 보장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은 수도권 대기업 정도 일터에서만 찾아볼 수 있고 지역 일자리들은 1980년대 수준의 제도와 문화에 머물러 있다. 이런 점을 고쳐 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면 “그런 게 좋으면 서울 대기업에 취직할 일이지 왜 여기서 그런 걸 찾느냐?”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다름 아니라 이런 현실이 지역 청년들을 수도권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동안 입시에서 중위값, 최빈값 성적을 받는 사람들이 무리 없이 ‘괜찮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고,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왔다면 한국이 이토록 입시 지옥이 됐을까? 지역 소멸이 이렇게 심각해졌을까? 출생률이 이 정도로 떨어졌을까? 이제라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입시 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면, 실상은 입시 제도를 아무리 바꾸고 또 바꾼들, 아무리 좋은 방법을 찾아내서 적용한들 학생들을 ‘제대로’ 한 줄로 세운다는 그 목표를 버리지 않으면 무엇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입시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인 대학을 ‘희소한 일자리 자원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학력 자원’으로만 보는 관점을 버리지 않고서는 어떤 현실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 제도를 지금까지 소수 엘리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서 설계하고 운영해 왔다는 점을 정부는 이제라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31조, 그리고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32조에 부합하도록 입시를, 교육을, 일자리를, 제도 전반을 바꿔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을 떼게 만들 수 있는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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