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말하지 않게 된 것
입시 경쟁이 외면하는 약함과 실패
난다 n23podo@gmail.com
투명가방끈,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의, 입학 첫날부터 야간 자율 학습이 의무였던 학교였다. 교사에게 압수당한 휴대전화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게 자퇴의 계기였다. 하지만 그 일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삼아 돌아가는 학교, 사교육과 선행 학습을 장려하고 성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교사들, 숨 막히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점점 커져 왔다.
학교에 다니는 중에는 늘상 어딘가 아팠다. 특히 고등학교 때 심했다. 나는 아침 잠이 많은 편인데, 아침마다 지각할까 봐 서둘러야 했고 지각으로 혼나는 게 다반사이다 보니 학교 가는 길이 스트레스였다. 등교를 할 때면 배가 아픈 적이 많았고 아주 심한 날에는 위 경련도 일어났다. 하루에 열몇 시간을 학교에 있다 보면 만성적인 두통이 생겼고,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아프거나 변비가 생겼다는 친구들도 많았다. 시험 기간이면 위염이나 소화 불량, 두통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신기한 점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는 이런 증상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들끼리 가끔은 “학교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이야길 나누며 웃곤 한다.
우리 사회에서 입시 제도의 공정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때면 고등학교 생활이 떠오른다. 수능에 나오는 범위가 어떻고 난도가 어떻고, 어떤 제도가 공정하고 아니고, 특목고·자사고에 유리한지 어떤지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 내가 겪은 복통과 두통은 없는 것 같다. 나와 내 친구들, 지금 학교에 있는 학생들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일각에 그친다.
학원을 보낼 수 있는 가정이 대학 입시에 유리하다고들 하지만, 학교와 학원을 다 더해서 주 60시간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의 삶이 과연 행복한지는 그리 중요치 않은가 보다. ‘스펙’과 그럴듯한 경력을 꾸며 주는 사례들이 문제가 되곤 하지만,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해 안 한 것을 한 척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청소년들은 과연 떳떳하고 행복할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입시 경쟁 자체의 폭력성이나 부당함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입시 경쟁과 그 속의 모습에 대해 이제 익숙해지기도 했고, 경제 불황이 이어지고 신자유주의가 당연시되자 교육에서의 경쟁과 청소년들의 고통도 어쩔 수 없는 것, 이 사회의 당연한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원래 고3/입시/수험은 다 그런 것’이라고 하던 것에 이어서 요즘은 ‘취업이나 사회생활은 더 힘들다’, ‘세상은 원래 경쟁이고 정글이다’라며 버티라는 말들이 더 많아진 느낌이 든다.
학생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
이런 사회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게 학생들의 자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다. 입시 경쟁이 원인으로 보이는 학생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감정도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내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떤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이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라는 내용의 학생의 유서가 이슈가 되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사회적 표어, 경구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20여 년 동안 ‘교육 관련 학생 자살’은 사회 문제였다. 특히 매년 수능 직후에는 ‘성적 비관 자살’ 같은 기사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2005년에는 학생들의 자살이 연이어 보도되면서 5월 ‘내신 등급제 반대’ 촛불 추모 행사가 열리는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이 청소년(10대)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말은 잘못된 정보[ref] 한국의 10대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중상위권에 있고, 10대보다 20대 이상, 특히 노인의 자살률이 더 높다. 다만 10대 사망 원인 1위가 ‘고의적 자해(자살)’이다.[/ref]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이런 소식이 뉴스에서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졌다.
언론 보도가 줄었다고 해서 그만큼 자살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청소년 자살률은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의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10대 자살자 수는 2020년 315명, 2021년 338명에 이른다.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 등에 나타나는 자살 시도율도 높은 편이다. 학생 자살 문제가 주목받던 시대와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더 증가한 것이다. 2023년 국정 감사를 통해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에 집계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초·중·고 학생 자살자 수는 822명, 연 평균 164명이다. 그 원인은 교육부 통계상 분류로는 가정 문제 248명, 원인 미상 246명, 학업 진로 문제 167명, 정신과적 문제 161명, 대인 관계 문제 134명 등이다.[ref] 김원이 국회의원 보도 자료, “[2023년 국정 감사 보도 자료 ①] 코로나19 이후 우울증 겪는 아동 청소년 급증 5년간 극단적 선택한 초중고교생 822명 달해”, 2023년 9월 7일.[/ref]
물론 자살 관련 언론 보도가 줄어든 것이 단순히 사회적 관심도가 떨어져서라고만 볼 순 없다. 언론 윤리가 발달하고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이 확립되면서 상세히 보도하지 않게 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내밀한 사정을 묘사하고 유서 내용을 전하던 과거 사례가 개인의 비극을 상품 삼는 또 다른 언론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입시 경쟁 속의 스트레스, 우울감, 과로, 번아웃 등이 원인이 된 죽음을 섣불리 ‘성적 비관’이라고, 공부를 기대만큼 못해서 비관한 것이라고 규정하던 언어는 폭력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보도를 반성했다면 언론들은 대안적인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을 논의할 방도를 찾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자극적인 보도를 지양하기만 하면서 사회적 관심 자체가 낮아진 모습이다. 게다가 자살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는 언론 및 정부 기관의 문제가 제대로 해소된 것도 아니다. 사회적 이슈가 된다 싶으면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예를 찾을 수 있다.
사실 교육부가 앞서 소개한 통계와 같이 학생 자살의 원인을 분류하는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자살 발생 후 며칠 만에 학교로부터 보고서를 제출받아 통계를 만든다고 하는데, 학교가 과연 원인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인력 및 전문성을 갖췄는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자살의 원인은 대개 복합적인데, 이를 ‘가정 문제’, ‘학업 진로 문제’, ‘정신과적 문제’와 같이 라벨링할 수 있을까. 가령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라고 쓴 유서에서도 공부하라는 압박을 가하는 엄마에 대한 감정과 ‘친구와 사귀지 말고 혼자 다니라면서 두들겨 맞은’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학생의 자살은 가정 문제 때문이었을까, 학업 문제 때문이었을까.
결국 언론이든 정부 기관이든 우리 사회는 학생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학생 자살’이라는 돌출된 사건만을 소비해 왔으니 당연한 일일까. 학생들이 경쟁적이고 차별적인 교육 제도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고통을 겪는지, 거기에 순응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어떻게 배제되고 아프게 되는지, 전 국민이 하게 되는 학교에서의 경험이 어떤 상흔과 병리 현상을 낳는지 등을 더 깊고 넓게 다루어야 마땅하다. ‘학생 자살’이 아니라, 입시 제도가 낳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을 사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야말로 입시 경쟁과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약함과 실패를 이야기하기
언론과 정부가 학생들의 고통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교육 제도와 학교부터가 학생들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적인 교육 제도 속에서 경쟁으로 인한 고통은 감당해야 할 것이며, 이를 견디지 못한 약함은 미뤄 두거나 눈감아야 할 개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투명가방끈을 비롯해 청소년인권운동은 입시 제도를 청소년인권의 문제로,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로 해석하고자 고민하고 활동해 왔다. 예를 들어 ‘학습 시간 줄이기 운동’은 입시를 비롯한 교육 제도를 청소년의 구체적 생활의 문제로 논의하려는 접근법이었다. 청소년인권단체 등이 함께 목소리를 모은 선언에도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엇보다 입시 경쟁은 청소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 한국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두통이나 복통,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청소년도 많다. 우리의 건강과 행복이 파괴되고 있지만, 이 사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의 삶은 청소년기에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우리를 끊임없이 경쟁의 전장으로 내몰고 있다.
- 〈2021 입시 경쟁 반대 청소년 선언〉
또 하나의 시도로 2023년 11월, 투명가방끈은 ‘우리들의 실패, 실패자들의 연대’라는 제목으로 수능 시험일에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입시 경쟁 위주의 학교교육 속에서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조명하자는, 그럼으로써 교육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쫓기는지를 드러내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행사 현장에서는 트랜스젠더, 발달장애인 등 소수자들이 학교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했던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직업계고 학생이 대학에 가지 않는 고등학생이란 이유로 받게 되는 시선에 대해 쓴 글도 전시했다.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학력 차별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담도 나누었다. 임신과 출산을 겪게 되어 학교를 자퇴한 청소년이 결혼 계획을 발표하고 축하를 받기도 했다. 이 행사에 연대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한 사람들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담임이 이번 시험 1등은 내가, 2등은 A가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담임이 반 학생들 앞에서 나와 A의 사적인 정보를 동의 없이 까발린 건데, 성적이 나쁜 건 수치라 숨겨야 하지만 좋은 건 널리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담임이 나가고, 내 친구들은 나에게 와서 축하의 말을 건넸다. (……)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 승리가 다른 사람의 실패와 절망을 통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겠는가? 그 후 한동안 내 기분과는 별개로 축하의 말들을 계속 받았다.
며칠간 계속 고민한 끝에, 나는 내가 느낀 찝찝함의 이유를 알아냈다. 기괴했다. 내가 성적을 올리려면 다른 누군가를 끌어내려야 하고, 때로는 ‘노력이 최고’라면서 때로는 ‘그래도 재능은 못 이긴다’며 찬양하기도 하고, 교사가 학생의, 학생이 학생의, 사람이 사람의 삶을 평가하고, 사회가 정한 기준에 맞춰 자신을 끼워 맞추고 또 그렇지 못하면 낙오되고, 생존과 계급을 얻어 내기 위해 그야말로 모든 걸 갈아 넣어야 하는 학교의 모든 광경이, 그 모든 싸움에서 사회적 힘을 동원해서 많은 실패를 짓밟고 올라선 이들을 보고 ‘성공’했다고 하는 사회가 기괴했다. 나는 이런 세상에서는 도무지, 정말 도무지 성공할 수 없었다.
- 이름(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열아홉 살 청소년), 〈1등과 2등에서 벗어나기〉
저는 대학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대학 입시가 개같이 망했습니다. 수능에서 두 과목을 밀려 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죠? 저도 어떻게 그랬을 수 있나 싶습니다…….
두 과목을 밀려 쓰고도 대학에 갔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첫째로는 재수를 할 돈이 없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그렇게 밀려 쓰고도 그럭저럭 장학금을 받고 지방 국립대에 갈 정도는 되었기 때문입니다. (……)
망한 입시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던 부친의 파산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와 함께 제가 따로 계획하던 유학도 완전히 망했습니다. 어떻게든 나갈 수야 있었겠지만, 코로나 시대의 유럽을 아시아 여성으로서 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도박보다도 위험한 행위일 테니 말입니다. (……)
한 번의 시험을 답안지를 밀려 썼다는 이유로, 그 이후로 이렇게까지 인생이 꼬이고 망하게 되는 것이 좋은 제도이고 좋은 사회일까요.
- 치리(어쩌다 보니 해외에 내던져진 슬픈 ADHD인), 〈운 나쁜 애들 중에 제일 운 좋은 애〉
투명가방끈의 이번 행사는 처음 해 본 형태의 시도로 그 메시지를 아주 명확하게 담아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지금의 경쟁 교육이 외면하고 추방하는, 때로는 탄압하고 추방하는 존재들을 드러내고 그런 사람들의 연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가령 대학 입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일정 속에서, 크게 다치거나 병이 들어 아픈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공부를 잘 따라올 수 없는 학생들, 다른 학생들을 앞서야만 하는 경쟁의 규칙을 소화할 수 없는 학생들은 어떨까.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누군가는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라는 이야길 해 왔는데, 그 ‘꼴찌성’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고난은 그 자체로 학생들의 삶을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만들고 기회를 박탈한다. 소수자로서 차별과 상처를 겪고 이질적인 조건 속에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여러모로 경쟁은 ‘공정’할 수 없다. 경쟁적인 교육 제도는 이러한 실수, 실패, 고통, 소수자성, 약함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입시 경쟁 교육이 비인간적이라고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다.
약함을 돌보는 교육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개념 중 하나가 ‘돌봄’이다. 그런데 돌봄은 가사 노동이나 양육과 같은 특정한 유형의 활동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돌봄과 인권》에서는 “타자의 필요와 고통의 호소에 반응을 보이는 것, 그런 상호반응을 통해 사회를 지속시키고 재생산하기 위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이 돌봄”이라고 말하며, “인간은 누구나 의존 속에 살아간다는 것”, 곧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이 돌봄이 인권인 근거라고 이야기한다.[ref] 김영옥·류은숙(2022), 《돌봄과 인권》, 코난북스, 13, 30~31쪽.[/ref]
오늘날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열쇳말도 이러한 의미의 돌봄에 있지 않을까. 지금 학생들을 경쟁시키는 교육의 가장 큰 폐해도 돌보지 않는 것, 곧 약함과 고통을 외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입시 경쟁 아래의 학교는 학생들의 죽음과 그에 이르게 된 과정을 묻어 두는 곳, 빈곤이나 소수자성이나 질병 등을 모두 학생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곳, 심지어 그 구성원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장소이다. 이런 학교는 고통과 질병을 만들어 내고 더 깊어지게 만든다. 여러 사람이 가진 ‘약함’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를 시키면 다치거나 아플 수밖에 없으며, 돌보지 않는 상처와 병은 만성화되고 곪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입시 교육 등의 문제가 이미 수십 년 이야기해 온 익숙한, 식상한 이야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해야만 한다.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든다거나, 돈이 많은 가정이나 특정 학교에 유리하다는 등의 이야기 말고, 교육에서 외면받고 배제되는 것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발견하자. 학생들의 고통과 상처와 질병과 죽음을 우리 사회와 학교가 돌봐야 하는 ‘교육 문제’로 위치시켜야 한다. 학생들이 아프고 괴롭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학교, 그런 호소가 응답받고 돌봄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입시 교육을 바꿀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언젠가부터 말하지 않게 된 것
입시 경쟁이 외면하는 약함과 실패
난다 n23podo@gmail.com
투명가방끈,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이른바 ‘교육열’이 높은 지역의, 입학 첫날부터 야간 자율 학습이 의무였던 학교였다. 교사에게 압수당한 휴대전화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던 게 자퇴의 계기였다. 하지만 그 일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대학 입시만을 목표로 삼아 돌아가는 학교, 사교육과 선행 학습을 장려하고 성적으로 학생들을 평가하고 분류하는 교사들, 숨 막히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점점 커져 왔다.
학교에 다니는 중에는 늘상 어딘가 아팠다. 특히 고등학교 때 심했다. 나는 아침 잠이 많은 편인데, 아침마다 지각할까 봐 서둘러야 했고 지각으로 혼나는 게 다반사이다 보니 학교 가는 길이 스트레스였다. 등교를 할 때면 배가 아픈 적이 많았고 아주 심한 날에는 위 경련도 일어났다. 하루에 열몇 시간을 학교에 있다 보면 만성적인 두통이 생겼고, 앉아 있다 보니 허리가 아프거나 변비가 생겼다는 친구들도 많았다. 시험 기간이면 위염이나 소화 불량, 두통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신기한 점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는 이런 증상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것이다.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들끼리 가끔은 “학교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이야길 나누며 웃곤 한다.
우리 사회에서 입시 제도의 공정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때면 고등학교 생활이 떠오른다. 수능에 나오는 범위가 어떻고 난도가 어떻고, 어떤 제도가 공정하고 아니고, 특목고·자사고에 유리한지 어떤지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간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 내가 겪은 복통과 두통은 없는 것 같다. 나와 내 친구들, 지금 학교에 있는 학생들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일각에 그친다.
학원을 보낼 수 있는 가정이 대학 입시에 유리하다고들 하지만, 학교와 학원을 다 더해서 주 60시간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의 삶이 과연 행복한지는 그리 중요치 않은가 보다. ‘스펙’과 그럴듯한 경력을 꾸며 주는 사례들이 문제가 되곤 하지만,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해 안 한 것을 한 척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청소년들은 과연 떳떳하고 행복할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우리 사회는 언젠가부터 입시 경쟁 자체의 폭력성이나 부당함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입시 경쟁과 그 속의 모습에 대해 이제 익숙해지기도 했고, 경제 불황이 이어지고 신자유주의가 당연시되자 교육에서의 경쟁과 청소년들의 고통도 어쩔 수 없는 것, 이 사회의 당연한 풍경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원래 고3/입시/수험은 다 그런 것’이라고 하던 것에 이어서 요즘은 ‘취업이나 사회생활은 더 힘들다’, ‘세상은 원래 경쟁이고 정글이다’라며 버티라는 말들이 더 많아진 느낌이 든다.
학생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
이런 사회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게 학생들의 자살 문제에 대한 관심이다. 입시 경쟁이 원인으로 보이는 학생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난 로봇도 아니고 인형도 아니고, 감정도 없는 물건도 아니다. 밟히다 밟히다 내 소중한 내 삶의 인생관이나 가치관까지 밟혀 버릴 땐, 난 그 이상 참지 못하고 떤다.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 난 그 성적순이라는 올가미에 들어가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삶에 경멸을 느낀다”라는 내용의 학생의 유서가 이슈가 되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사회적 표어, 경구가 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20여 년 동안 ‘교육 관련 학생 자살’은 사회 문제였다. 특히 매년 수능 직후에는 ‘성적 비관 자살’ 같은 기사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2005년에는 학생들의 자살이 연이어 보도되면서 5월 ‘내신 등급제 반대’ 촛불 추모 행사가 열리는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국이 청소년(10대)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말은 잘못된 정보[ref] 한국의 10대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중상위권에 있고, 10대보다 20대 이상, 특히 노인의 자살률이 더 높다. 다만 10대 사망 원인 1위가 ‘고의적 자해(자살)’이다.[/ref]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점차 이런 소식이 뉴스에서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졌다.
언론 보도가 줄었다고 해서 그만큼 자살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 청소년 자살률은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의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10대 자살자 수는 2020년 315명, 2021년 338명에 이른다. 〈청소년 건강 행태 조사〉 등에 나타나는 자살 시도율도 높은 편이다. 학생 자살 문제가 주목받던 시대와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더 증가한 것이다. 2023년 국정 감사를 통해 알려진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에 집계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초·중·고 학생 자살자 수는 822명, 연 평균 164명이다. 그 원인은 교육부 통계상 분류로는 가정 문제 248명, 원인 미상 246명, 학업 진로 문제 167명, 정신과적 문제 161명, 대인 관계 문제 134명 등이다.[ref] 김원이 국회의원 보도 자료, “[2023년 국정 감사 보도 자료 ①] 코로나19 이후 우울증 겪는 아동 청소년 급증 5년간 극단적 선택한 초중고교생 822명 달해”, 2023년 9월 7일.[/ref]
물론 자살 관련 언론 보도가 줄어든 것이 단순히 사회적 관심도가 떨어져서라고만 볼 순 없다. 언론 윤리가 발달하고 〈자살 보도 권고 기준〉이 확립되면서 상세히 보도하지 않게 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내밀한 사정을 묘사하고 유서 내용을 전하던 과거 사례가 개인의 비극을 상품 삼는 또 다른 언론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입시 경쟁 속의 스트레스, 우울감, 과로, 번아웃 등이 원인이 된 죽음을 섣불리 ‘성적 비관’이라고, 공부를 기대만큼 못해서 비관한 것이라고 규정하던 언어는 폭력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보도를 반성했다면 언론들은 대안적인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이 겪는 고통과 죽음을 논의할 방도를 찾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자극적인 보도를 지양하기만 하면서 사회적 관심 자체가 낮아진 모습이다. 게다가 자살을 부적절한 방식으로 다루는 언론 및 정부 기관의 문제가 제대로 해소된 것도 아니다. 사회적 이슈가 된다 싶으면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예를 찾을 수 있다.
사실 교육부가 앞서 소개한 통계와 같이 학생 자살의 원인을 분류하는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 자살 발생 후 며칠 만에 학교로부터 보고서를 제출받아 통계를 만든다고 하는데, 학교가 과연 원인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인력 및 전문성을 갖췄는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자살의 원인은 대개 복합적인데, 이를 ‘가정 문제’, ‘학업 진로 문제’, ‘정신과적 문제’와 같이 라벨링할 수 있을까. 가령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라고 쓴 유서에서도 공부하라는 압박을 가하는 엄마에 대한 감정과 ‘친구와 사귀지 말고 혼자 다니라면서 두들겨 맞은’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이 학생의 자살은 가정 문제 때문이었을까, 학업 문제 때문이었을까.
결국 언론이든 정부 기관이든 우리 사회는 학생들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학생 자살’이라는 돌출된 사건만을 소비해 왔으니 당연한 일일까. 학생들이 경쟁적이고 차별적인 교육 제도 속에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고통을 겪는지, 거기에 순응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어떻게 배제되고 아프게 되는지, 전 국민이 하게 되는 학교에서의 경험이 어떤 상흔과 병리 현상을 낳는지 등을 더 깊고 넓게 다루어야 마땅하다. ‘학생 자살’이 아니라, 입시 제도가 낳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을 사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있는 것이야말로 입시 경쟁과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약함과 실패를 이야기하기
언론과 정부가 학생들의 고통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교육 제도와 학교부터가 학생들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적인 교육 제도 속에서 경쟁으로 인한 고통은 감당해야 할 것이며, 이를 견디지 못한 약함은 미뤄 두거나 눈감아야 할 개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투명가방끈을 비롯해 청소년인권운동은 입시 제도를 청소년인권의 문제로,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로 해석하고자 고민하고 활동해 왔다. 예를 들어 ‘학습 시간 줄이기 운동’은 입시를 비롯한 교육 제도를 청소년의 구체적 생활의 문제로 논의하려는 접근법이었다. 청소년인권단체 등이 함께 목소리를 모은 선언에도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 하나의 시도로 2023년 11월, 투명가방끈은 ‘우리들의 실패, 실패자들의 연대’라는 제목으로 수능 시험일에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입시 경쟁 위주의 학교교육 속에서 실수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조명하자는, 그럼으로써 교육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쫓기는지를 드러내자는 취지를 갖고 있었다.
행사 현장에서는 트랜스젠더, 발달장애인 등 소수자들이 학교에서 차별받고 배제당했던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직업계고 학생이 대학에 가지 않는 고등학생이란 이유로 받게 되는 시선에 대해 쓴 글도 전시했다.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거나 일상에서 학력 차별을 겪은 사람들의 경험담도 나누었다. 임신과 출산을 겪게 되어 학교를 자퇴한 청소년이 결혼 계획을 발표하고 축하를 받기도 했다. 이 행사에 연대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한 사람들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투명가방끈의 이번 행사는 처음 해 본 형태의 시도로 그 메시지를 아주 명확하게 담아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우리가 이야기하려고 한 것은 지금의 경쟁 교육이 외면하고 추방하는, 때로는 탄압하고 추방하는 존재들을 드러내고 그런 사람들의 연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가령 대학 입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는 일정 속에서, 크게 다치거나 병이 들어 아픈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공부를 잘 따라올 수 없는 학생들, 다른 학생들을 앞서야만 하는 경쟁의 규칙을 소화할 수 없는 학생들은 어떨까.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누군가는 꼴찌가 될 수밖에 없다’라는 이야길 해 왔는데, 그 ‘꼴찌성’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고난은 그 자체로 학생들의 삶을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만들고 기회를 박탈한다. 소수자로서 차별과 상처를 겪고 이질적인 조건 속에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여러모로 경쟁은 ‘공정’할 수 없다. 경쟁적인 교육 제도는 이러한 실수, 실패, 고통, 소수자성, 약함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입시 경쟁 교육이 비인간적이라고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다.
약함을 돌보는 교육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개념 중 하나가 ‘돌봄’이다. 그런데 돌봄은 가사 노동이나 양육과 같은 특정한 유형의 활동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돌봄과 인권》에서는 “타자의 필요와 고통의 호소에 반응을 보이는 것, 그런 상호반응을 통해 사회를 지속시키고 재생산하기 위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이 돌봄”이라고 말하며, “인간은 누구나 의존 속에 살아간다는 것”, 곧 인간의 보편적인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이 돌봄이 인권인 근거라고 이야기한다.[ref] 김영옥·류은숙(2022), 《돌봄과 인권》, 코난북스, 13, 30~31쪽.[/ref]
오늘날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열쇳말도 이러한 의미의 돌봄에 있지 않을까. 지금 학생들을 경쟁시키는 교육의 가장 큰 폐해도 돌보지 않는 것, 곧 약함과 고통을 외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입시 경쟁 아래의 학교는 학생들의 죽음과 그에 이르게 된 과정을 묻어 두는 곳, 빈곤이나 소수자성이나 질병 등을 모두 학생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곳, 심지어 그 구성원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장소이다. 이런 학교는 고통과 질병을 만들어 내고 더 깊어지게 만든다. 여러 사람이 가진 ‘약함’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를 시키면 다치거나 아플 수밖에 없으며, 돌보지 않는 상처와 병은 만성화되고 곪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입시 교육 등의 문제가 이미 수십 년 이야기해 온 익숙한, 식상한 이야기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해야만 한다.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든다거나, 돈이 많은 가정이나 특정 학교에 유리하다는 등의 이야기 말고, 교육에서 외면받고 배제되는 것이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발견하자. 학생들의 고통과 상처와 질병과 죽음을 우리 사회와 학교가 돌봐야 하는 ‘교육 문제’로 위치시켜야 한다. 학생들이 아프고 괴롭고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학교, 그런 호소가 응답받고 돌봄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입시 교육을 바꿀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