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호[기고] 인권과 교육의 문법 다시 쓰기 | 배경내

2024-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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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교육의 문법 다시 쓰기

- 존엄의 상호의존 관점에서 본 교사와 학생

 


배경내

hregang@hanmail.net

인권교육센터 들, 《우리는 청소년-시민입니다》 공동 저자



 

‘균형 잃은 인권’ vs. ‘균형 잃은 책임’

 

“현행 학생인권조례에는 (학생의) 책임과 의무에 관한 조항이 제외돼 있어 완전한 형태의 인권조례라고 볼 수 없다.”

- 이주호 교육부 장관, ‘교육부-경기도교육청 학생인권조례 개정을 위한 간담회’에서(〈한겨레〉, 2023년 8월 4일)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균형 잃은 인권’이라는 비난의 강풍이 2023년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이른바 ‘진보 교육감 정책’으로 분류된 학생인권조례가 대표적인 표적이 됐다.[ref]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제정되기 시작한 학생인권조례는 진보 교육감의 정책이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이 아래로부터 만들어 낸 결실이었다.[/ref] 지난해 7월 발생한 S초 교사 사망 사건이 기폭제였다. 균형 잃은 인권에 대처할 강력한 통제권 회복을 주장하는 흐름이 그 뒤를 이었다.

S초 교사 사망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진 핵심적인 질문은 크게 다섯 가지였다. ① 왜 저연차 교사에게 힘든 업무가 떠넘겨졌는가(교직 사회의 평등과 비민주적 업무 분담 문제). ② 왜 교사는 업무 스트레스나 민원으로 인한 고통을 주위에 말하기 힘들었나(엄격한 가부장의 얼굴을 한 ‘교권’의 족쇄 문제). ③ 교사의 고통을 나눠 질 동료와 시스템, 그리고 교사와 함께 학생의 어려움을 보살피고 지원할 시스템은 왜 부재했나(독박 교실에 갇힌 노동과 돌봄 공백의 문제). ④ 왜 보호자들은 담임 교사와의 대화나 학교 내 해결을 시도하기보다 민원이나 아동학대 신고를 택하게 되나(학교에 대한 불신과 정당한 이의 제기 절차의 문제). ⑤ 아동학대의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악의적이거나 잘못된 신고로 피해를 겪는 교사를 보호할 방법은 무엇인가(피해자 보호 문제). 그러나 정부와 여당, 보수 언론은 엉뚱하게도 ‘책임을 외면한 학생인권’을 핵심 문제로 지목하면서 정치 공세를 이어 갔다. 그사이 한 교사의 죽음이 던진 질문들에 사회적 해답을 찾는 과정은 실종돼 버렸다. 학생에게는 책임을 강하게 물으면서 구조의 책임은 뒤로 숨어 버렸다. ‘균형 잃은 인권’이 아니라 ‘균형 잃은 책임’이 현재 교육의 위기를 더욱 키우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균형 잃은 인권’과 ‘교권 회복’ 프레임은 만만치 않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지난해 7월 28일 자, 초등 교사 사망 사건에 대한 국가인권위원장의 성명에는 이런 문장이 포함돼 있다. “교사의 교권과 학생의 인권은 결코 모순·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따라서 택일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교사와 학생의 인권은 왜 택일적 관계가 아닌가. 학생인권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그 ‘교권’이 교사의 권위나 권력을 뜻할 때 학생인권과 대립할 수도 있지 않은가. 이때의 교권이 교사의 인권이나 직권(職權)으로서의 교육 권한을 뜻하는 것이라 해도 왜 대립하지 않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권리 vs. 책임’에서 ‘책임질 권리’로!

 

책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 사전(事前)적 또는 동행하는 책임 : 맡아서 해야 할 임무나 의무.

② 사후(事後)적 책임 : 어떤 일에 관련되어 그 결과에 대하여 지는 의무나 부담. 또는 그 결과로 받는 제재(制裁).

 

전자가 권리를 보장해야 할 수임자의 책임과 인권 주체들이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행위 규범과 관련되어 있다면, 후자는 잘못이나 허물을 따지는 방식과 감당해야 할 부담의 무게를 정하는 기준과 관련되어 있다. 대개 사회나 국가의 책임을 규명하려는 논쟁보다 인권 주체들의 권리를 얼마나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책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와 같은 논쟁에서 책임은 언제나 권리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권리의 전제 또는 인권을 누릴 자격으로서 책임을 말하는 문법이 대표적이다.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책임부터 다해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권리는 위험하다”라는 말은 오랜 기간 인권의 가능성을 축소하거나 소수자에게 존엄을 빼앗은 통제의 문법이었다. “권리를 줬으니 책임도 다해라”라는 말처럼 권리의 사후적 제한을 위한 의도로 책임을 말하는 문법도 있다. 권리를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책임의 무게로 권리의 행사를 축소하거나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는 문법이다. 책임이란 자발적으로 수행될 수 없고, 오직 외부에서 강제되는 제재만을 뜻한다고 오해하는 문법도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살펴보면 국가, 교사, 학생의 책임이 고루 언급되고 있음에도 “학생인권조례에는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다”라는 주장이 통하는 이유는 학생에 대한 제재 방안이 조례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의 인권 내용을 구체화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학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학교 규칙과 상위 법률에 따른 행정적, 민·형사적 제재 방안이 별도로 존재한다. 학생인권조례에 왜 사후적 제재 조항이 없느냐는 말은 「근로기준법」에 왜 노동자의 권리만 있느냐고 힐난하는 것과 같다.

책임은 권리의 ‘전제’나 ‘자격’이 아니라 권리의 ‘과정’이자 ‘결과’다. 코로나19 유증상자가 전파 위험을 피하고 타인의 안녕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안전한 공간에서 자기 돌봄에 집중할 조건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돌봄을 받을 권리가 있어야 돌볼 권리, 다른 말로 타인을 책임질 권리도 실현될 수 있다. 참여권은 공동체에 몫을 요구하는 권리일 뿐 아니라 공동체를 함께 책임질 기회와 자원을 공유할 권리, 곧 책임질 권리도 뜻한다. 이렇듯 책임은 언제나 권리에 내재해 있고, 권리를 통해서만 책임도 이행될 수 있다. 책임질 역량이란 개인이 소유한 능력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사회의 뒷받침을 만나 도달하는 상태, 달리 말해 ‘사회적 역량’이다.


인권의 상호의존성 : ‘연결’에서 ‘존엄의 상호의존’으로

 

권리에 내재한 책임이 자발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나의 존엄과 타인의 존엄이 어떻게 의존하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필요하다. 먼저 상호의존의 개념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상호의존성 원칙은 ‘사람은 사회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 기대어 살아가기 때문에 인권도 서로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흔히 설명되곤 한다. 인간의 존재 양식 가운데 어떤 부분도 타인이나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의 취약성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떤 공동체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인권 또는 존엄이 상호의존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연결’과 ‘의존’은 다른 말이다.

먼저 인간의 삶 자체에 ‘의존’ 또는 ‘빚짐’이 내재해 있기에 존엄의 상호의존은 이미 자명한 진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권이나 민주화와 같은 사회적 결실들은 이전 세대가 남겨 준 유산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안전법은 유가족들이 만든 것’이란 말처럼, 삶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도 유가족이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조금은 더 안전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내가 지금 누리는 이동 편의는 장애인들이 앞서 투쟁한 덕분이다. 이 역사적·사회적 의존은 직접적 관계나 얼굴을 가지지 않기에 ‘간접적인 상호의존’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타인의 인권이 무너질 때 결국 나의 인권도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존엄의 상호의존을 발견할 수도 있다. 장애인의 인권이 함부로 침해되고 방치되는 사회는 비장애인 누군가도 ‘장애화’되어 차별받을 수 있는 사회다. ‘고.다.자’(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쉽다는 뜻) 노동의 참혹함은 노년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많은 이들의 삶을 가로지르며 확산하고 있는 차별이다. 성, 인종, 장애, 나이, 계급 등에 따른 억압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교차성 이론이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다중 전선에서 함께 싸우지 않는 한, 하나의 억압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없다. 그런데 나에게 피해가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우리는 서로의 존엄을 묶어 세울 수 없는 것일까.

셋째, 존엄의 상호의존을 ‘증명이 필요한 원칙’이 아니라 ‘지향해야 할 가치’로서 받아들이는 입장도 있다.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의존하기를 소망한다는 쪽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의지적 상호의존’으로 부를 수 있다. 먼 나라에서 온 낯선 난민을 우리는 왜 환대해야 하는가. 국제 사회의 일원이기에, 난민을 발생시킨 국제 상황에 우리도 책임이 있기에, 또는 나도 난민이었거나 난민이 될 수 있기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난민을 환대하는 세상을 원하기에, 내쫓기는 난민을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럽기에, 난민을 내쫓는 사회라는 비참을 견디기 힘들기에 난민의 존엄과 나의 존엄, 그리고 내가 사는 사회의 존엄을 ‘결연’하기로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타자의 통곡에 소매가 붙들린” 두 번째 사람들[ref]노들장애학궁리소 고병권 연구원의 표현에서 따온 말이다. 고병권은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라고 말한다. “고병권의 묵묵 : 두 번째 사람, 홍은전”, 〈경향신문〉, 2020년 10월 12일.[/ref], ‘속박받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나의 자유는 특권이자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을 특권의 자리에서 해방하여, 자신의 가해자성을 인정하면서 모두의 평등한 존엄을 구한다.[ref]후지이 다케시는 “‘인간’은 항상 가해자 속에서 생겨난다. 피해자 속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최종적으로 가해자로 승인하는 장소는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하나의 위기로서 인식하기 시작하는 장소”라는 이시하라 요시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를 만들어 간다고 말한다. 후지이 다케시(2018), 《무명의 말들》, 포도밭출판사, 59~60쪽.[/ref]

인권의 역사는 당사자들의 저항뿐 아니라 바로 이 두 번째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발전해 왔다. 그들은 상호의존의 믿음을 현실에 밀어 넣어 상호의존의 사회를 만들어 간다. 이때 존엄의 상호의존은 의지와 선택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 내는 결과적 규범이다.

마지막으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발견되는 직접적 상호의존이 있다. 부모와 자녀, 교사와 학생, 사회복지사와 이용 시민,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와 같은 관계에서 ‘실재하는 상호의존’이다. 2023년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는 ‘액팅 아웃(acting out)’[ref]무의식 속에 있는 욕구를 행동으로 직접 드러내는 것. 흔히 정신질환자의 ‘난동’이나 발달장애인의 ‘도전 행동’으로 불리는 행동인데, 규범적 판단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표현을 쓰기 위해 영어 발음 그대로 ‘액팅 아웃’으로 표기한다.[/ref]하는 환자를 진정시키는 과정에서 보호사가 상해를 입는 장면이 나온다. 환자의 진정을 돕고자 하는 행동이지만 동시에 필요 이상의 완력을 사용하거나 환자를 모욕할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보호사는 숙련된 자세로 환자를 침대에 눕히고 그가 진정될 때까지 손을 잡아 준다. 이 장면이 주는 감동은 보호사가 위기 상황에 놓인 환자를 적대하지 않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환자를 정성껏 돌봄으로써 자기 노동을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보호사’의 노동은 그 직업의 명칭처럼 환자를 자해나 타해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전하게 환자를 진정시킬 수 있는 기술 훈련, 액팅 아웃 전조(前兆)를 잘 파악할 수 있을 업무 조건(담당 환자 수의 축소와 같은), 산재 발생 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치유권과 같은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환자 개개인의 병력(病歷)이나 생애사, 개별 욕구, 핫 버튼(hot button) 등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좋은 돌봄’이란 불가능하고 보호사 자신의 안전도 보장받기 힘들다. 보호사의 노동권이 환자에게는 보호받을 권리의 바탕이 되고, 보호사에게도 환자를 책임질 권리로 이어지는 셈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존엄의 상호의존, 교사와 학생 관계를 중심으로

 

존엄의 상호의존을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 비춰 보자. ‘교사의 존엄한 노동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가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다. 두 교사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다가갈 길을 찾았다. 교사의 존엄한 노동을 뒷받침하는 ‘교육 노동권’이란 자신의 신념과 노동인권, 자기 정체성 등을 보장받으면서(한마디로 인간이자 노동자로서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학생의 교육권을 위해 교육 노동을 수행할 권리라 할 수 있다. 교육 노동자로서 학생 개개인을 온전히 바라보고 교육, 돌봄, 특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 교사의 노동을 존엄하게 만든다. 학생의 존엄을 고려할 수 없는 교사의 교육 활동은 일의 세계에서 존재해야 할 노동의 의미를 빼앗고[ref]존중(노동 기준을 포함), (어떤 의미에서든) 보상, 노동의 의미, 전망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갖추어야 있을 때 일의 세계는 일하는 사람에게 존엄을 보장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ref] 교사와 학생 모두를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부당한 외압으로부터 교육의 자율성을 방어할 권리는 교사의 인권(양심의 자유)과 직권(職權, 특히 교육과정 편성권)뿐만 아니라 학생의 인권(교육권)을 위해서도 요청되는 권리다. 학생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의 폭력은 학생과 교사의 존엄을 동시에 위협한다.

 

“교사의 교육권이란 장애라 명명된 학생의 삶과 교육을 위해서 온전히 고민할 수 있는 권리 아닌가.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같이 만날 수 있는 그 지점을 침해하는 핵심이 바로 학교 사회가 교사에게 부여하는 불법적인 행정 업무다. (……) 학교 행정 업무를 거부해야 애들이 보인다. 학교 행정 업무를 하다 보면 애들이, 애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안 보인다.”(특수 교사 윤상원)[ref]배경내(2023), 〈‘교사인권 vs. 학생인권’ 대항 구도를 넘어서기 위하여〉, 《2023년 제3차 인권교육단체 인권교육가 과정》 자료집, 70쪽.[/ref] 

 

둘째, 교사와 학생 안의 소수성 또는 차별의 교차성을 중심에 놓으면 다른 내용의 상호의존이 출현한다. 교사도, 학생도 단일 집단이 아니다. ‘교권’은 엄한 가부장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저연차 여성 교사나 인권을 섬세하게 고려하려는 교사의 존엄은 관리자, 동료 교사, 학생들에게서조차 쉽게 위협받는다. 능력주의가 점령한 장소에서는 미숙함, 실수, 취약함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 관용이나 지원의 이유가 되기보다 차별받아 마땅한 이유가 된다. 저연차 교사에게 차별적인 학교는 ‘미숙함’이나 ‘어림’, ‘저경력’ 등을 이유로 존재 가치를 평가절하당하는 모든 존재에게 위협적인 학교다. 여학생에게 안전하지 않은 학교는 여교사에게도, 성소수자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장소다. ‘특수 교사는 장애인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라는 말처럼, 소수자 학생의 곁에 선 교사는 소수자 학생이 겪는 차별을 함께 겪는다.[ref]《별별 교사들》(이윤승 외(2023), 교육공동체 벗)은 ADHD 교사가 ADHD 학생을,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이혼녀’인 교사가 다양한 가족 형태를 가진 학생을, 성소수자인 교사가 성소수자 학생을 어떻게 응원하고 교육적 영향을 주고받는지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ref]

 

“학생들은 제 수업을 듣지 않았고 절반은 돌아다니며, 특히나 반 3분의 1의 학생들은 성적인 농담을 일삼으며 낄낄거리는 등 제가 어쨌거나 거기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관리자분께 처음으로 어렵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관리자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배 교사께서는 저를 위로한답시고 ‘이래서 애들을 때릴 수 있어야 하는데’라고도 하셨고,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애들을 못 잡아서 그래요’라고도 하셨습니다. (……) 사실 그 힘든 학생들 때문에 제가 고통받고 그 힘든 학생들을 정말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방식으로 지원을 받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교감 선생님께서 따로 학생들과 수업을 해 주시거나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서 교사 혼자서 또는 둘 셋 팀을 이루어 학습 분위기를 원만히 조성할 수 있는 그런 실질적인 방법들 말입니다. 저는 어린이의 인권을, 어린이의 인권을 짓밟고 찾는 평화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그것은 저연차 교사 또는 여성 교사, 또 다른 비정규직 교사에게도 폭력으로 다가가기 때문입니다.”(초등 교사 여름(현유림), 강조는 인용자)[ref]2023년 9월 4일, 대구에서 열린 ‘공교육 멈춤의 날’ 교사 집회에서 있었던 여름의 발언문.[/ref] 

 

셋째, 교사와 학생이 그나마 보장받고 있는 현재의 존엄은 역사적, 사회적 빚짐의 결과다. 교사가 노동자임을 인정받고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를 가지게 된 데에도, 사립 학교의 민주화와 교사를 부당 해고로부터 보호할 제도가 마련된 데에도 많은 교사와 학생의 희생이 동반되었다. 학급당 학생 수 감축은 인구 감소에 따른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학생인권과 교사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 덕분에 빚어진 사회적 결과다.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덕분에 교사의 ‘생활 지도’ 노동에 대한 압박이 줄었고 자기 양심에 반해 학칙 위반자를 색출해야 할 고통에서 벗어난 교사들이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학생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교사의 자기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한 ‘어린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차별받고 배제되었던 ‘어린 존재’를 품고 있는 존재이다. 교사는 더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아니지만, 이제는 학생이 아닌 교사의 위치로 학교에 돌아왔지만, 과거의 나를 지우고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곳곳에 깔린 학생 혐오, 어린 존재에 대한 혐오는 교사들의 자기혐오로도 이어진다. 사람 누구에게나,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미숙함과 취약함, 자유분방함, 실수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취약함 속에 깃든 존엄을 아끼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인권 옹호는 ‘내 안의 어린 존재’을 옹호하는 일이고 “내 편이 되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

 

“긴 청소년기에 받았던 부당한 대우 같은 게 나를 많이 차지하고 있어서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학생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내가 교사한테 맞는다든지 폭언을 듣는다든지 했을 당시에 동료(옆 반 교사든 학부모든)가 한 명쯤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냥 같이 공포에 떠는 동급생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 고립감이 진짜 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지금 학교도 출근하면 사실 똑같다. 이제는 내 위치가 바뀌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때보다는 많이 늘었기 때문에, 똑같은 공간에서 그때 나한테 필요했던 것, 예를 들면 완전 문제 제기는 못 하더라도 그 학생의 마음을 물어본다든지 아니면 저거는 선생님의 잘못이라고 직접 말해 준다든지 할 때 내가 내 편에 있어 주는 느낌이 든다.”(초등 교사 여름(현유림) 강조는 인용자)[ref]배경내(2023), 앞의 자료집, 66쪽.[/ref]

 

상호의존을 위한 ‘곁들의 동심원’

 

‘S초 사건’들이 제기한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인간을 직접 대면하는 상호의존의 관계는 사려 깊은 상호작용과 호혜적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 수 있는 동시에 고립된 조건에서는 서로를 해할 위험도 내포한 관계이다. S초 사건에서도 문제의 핵심은 ‘독박 교실’이었다. 저연차 교사에게 1학년 담임과 열악한 환경의 교실, NEIS 업무 등이 맡겨졌고, 업무 분장의 과정 등은 선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인의 업무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S초가 있는 강남구는 다른 자치구보다 과밀 학급 문제가 심각한 지역이어서 다양한 욕구를 가진 학생들에게 저연차 교사 홀로 개별적 지원을 제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밀 학급이라 그만큼 질문하는 보호자도 많았을 것임을, 지역 특성상 교사보다는 계급/계층적 우위에 있는 보호자의 존재로 인한 유·무형의 부담이 있었을 가능성도 짐작할 수 있다. 독박 교실은 사회에 자리 잡은 ‘차별 구조를 타고’ 해당 교사에게 배정되었고 교실은 그저 견딤의 대상이 되었다.

교사가 사망에 이르기까지 학생 교육에 어려움이 있을 때, ‘특이 민원’에 시달릴 때 도움을 요청할 시스템은 왜 부재했는가. 학교와 교육청 등 교육 당국의 부작위가 만들어 낸 이 ‘무책임의 구조’는 왜 제대로 도마 위에 오르지 않았나. 교권이 없어서가 아니라 교권 회복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접근이 교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취약한 위치를 더 고백하지 못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사의 권위나 학생 통제권을 뜻하는 ‘교권’은 교사 홀로 학생들을 카리스마 있게 통제하고 지도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교사 홀로 다양한 욕구를 지닌 학생들을 통솔하는 완벽한 교실을 구현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압력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고립된 관계 속에서 독박 노동에 지친 이들은 그 분노를 자기가 돌보고 지원해야 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원망과 폭력으로 해소할 가능성이 큰데, 바로 그 위험성 때문에 교사가 아동을 학대할 수 있다는 의심을 더 사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교육의 시장화에 따라 교육을 자신이 구매한 서비스로 여기는 인식이 확산한 탓도 있지만, 학생이 학교에 볼모로 잡혀 있다고 여기는 보호자들의 불안도 한몫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2023)에 등장하는 싱글맘 사오리처럼, 보호자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민원인’이 되어야 제대로 된 응답을 받을 수 있고 학생을 지켜 낼 수 있다는 암시를 받는다. 자녀의 어떤 특성으로 차별받은 경험이 누적된 보호자일수록 더 민감하다. 민감한 보호자의 불안을 진정시키면서도 신뢰할 만한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교사와 보호자 1:1의 관계에만 내맡겨서는 안 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독박 교실에 포위되었기에 교사들이 노동권을 포함하여 교사의 인권 보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학생 통제권을 중심으로 한 ‘교권’ 회복에만 매달리게 되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교사에겐 다른 고백이 필요하다. 윤상원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전문성이 부족한 ‘특수’ 교사였다. 도저히 혼자서는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에 응답할 수 없었다. (……) 학교 환경은 A부터 Z까지 장애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 환경에서 내 한 몸 또는 한 개인의 제한된 지식으로는 아이들의 욕구를 맞출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특수 교사 개인으로서 느꼈던 나의 부족함은 협력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ref]윤상원(2023),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교육공동체 벗, 74~75쪽.[/ref]

 

특수 교사만이 겪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지금 전 사회적인 돌봄의 공백 속에서, 다양한 삶의 위기로 흔들리는 가정에서 살아가는 학생들,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프로그래밍된 일상을 보내느라 집중과 몰입을 힘들어하는 학생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교에 적응하기 힘든 다양한 학생들이 교실에 존재하고 있다.[ref]대표적인 예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고해 볼 수 있다. “2000년 5만 4,732명이던 특수교육 대상자 수는 2022년 10만 3,695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유치원·초·중·고등학교 학생 수가 853만 6,557명에서 301만 8,411명으로 쪼그라든 것과 대조적이다. 장애 영역별로 살펴보면, 시각·청각·지체(운동기능)장애 비율은 줄어드는 반면, ‘자폐성 장애’와 ‘발달 지체’가 차지하는 비율은 빠르게 늘고 있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장애에 대한 인식 개선과 진단 기준 확대 등으로 숫자가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특수교사 고소 논란이 남긴 아픈 질문〉, 《시사인》, 834호(2023년 9월 15일).)[/ref] 이는 교사 개인에게만 홀로 내맡겨진 교실에서는 교육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교사라는 위치는 바로 그 위기를 몸으로 떠안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위치이고, 바로 그 위치 때문에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윤상원은 교사라는 직업의 특성을 아동학대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위치, 누적된 차별 경험으로 민감한 보호자를 만나야 하는 위치로 받아들인다.

 

“학생들한테 항상 학기 초에 얘기한다. 내가 잘못하면 어쨌든 아동학대로 신고하라고.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학생들 관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인권 침해의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민원이 제기될 수 있다는 걸 직업적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 특수 교사들은 학생들을 더 많이 챙겨야 하고 또 부모님들도 편견과 차별을 자주 경험하다 보니 더 우울감이 있거나 민감하다거나 하는 상황에서 일한다. 조그마한 밴드 하나 붙이는 상처가 생겨도 미리 말씀 안 드리면 다 연락 온다. 교사들이 자존심 세우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면 부모들은 또 미안하다는 말을 왜 안 하냐고 못 받아들인다. 일반 교사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서 우리가 대우를 받아야 되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나한테 이렇게 해야 된다라는 비교를 하다 보니 괴로워지는 거다. 용인 특수학급 사건도 재판까지 간 것도 그것 때문이다. 부모들이 차별 경험이나 죄책감이 쌓여서 트라우마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교사들이 이해해야 한다.”(특수 교사 윤상원)[ref]배경내(2023), 앞의 자료집, 71쪽.[/ref]

 

이와 같은 성찰은 구조적 뒷받침이 있을 때 더 촉진될 수 있다. 존엄의 상호의존 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려면 이 관계를 돌보고 지원하는 동심원이 펼쳐져야 한다. 김영옥·류은숙은 《돌봄과 인권》에서 돌봄이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3개의 동심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운데 핵심에는 두 당사자가 있고, 그 두 사람을 돌보고 관계가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들락거리고 중재하는 둘레 세계, 그리고 복지 제도를 포함하여 그 세계를 돕는 사회적 연대망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현장에도 상호의존을 뒷받침하는 ‘곁들의 동심원’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배움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동심원의 한 가운데 두 당사자가 있고, 그 두 사람을 돌보는 학생, 동료 교사, 특수교육 전문가나 작업치료사, 상담사와 같은 전문가, 관리자 등이 둘레 세계에 있어야 하고, 이들을 지원하는 교육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동심원의 한가운데 보호자와 교사를, 학생과 보호자를 넣어도 마찬가지의 둘레 세계와 시스템이 필요하다. 상호의존의 동심원은 또 다른 의미에서 서로의 존엄을 책임질, 책임의 동심원이기도 하다.

둘레 세계에 ‘학생’도 포함됨을 놓쳐서는 안 된다. 교육의 세계에서 학생은 언제나 교육과 돌봄의 ‘대상’으로만 상정되곤 하는데, 이는 큰 오류다. 교사의 교육 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학생이 있다고 했을 때 동료 학생들은 그 학생으로 학습권을 침해당하는 ‘피해자’로만 상정되지만 과연 그럴까. 《학교에는 작업치료가 필요합니다》의 저자, 나카마 치호는 유치원에서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친구들과 상호작용도 없는 나오토라는 어린이를 지원한 사례를 소개한다. 나오토는 교실에 그저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지만, 작업치료를 통해 청소, 바깥 놀이 등에 함께하며 점차 유치원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나오토의 변화를 격려하고 그의 특성을 이해하는 친구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나오토가 초등 6학년이 되었을 때, 새 담임 교사는 수업 중에 걸어 다니는 나오토를 보곤 앉으라고 지시했다. 그때 반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나오토에게 배우게 하고 싶으세요? 아니면 앉게 하고 싶으세요?” 배우게 하고 싶다는 담임의 대답을 듣고 학생들이 덧붙였다. “나오토는 저렇게 걸어 다니면 더 잘 생각할 수 있어요. 그래서 배우게 하고 싶으시면 나오토가 수업 중에 걷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저희는 신경 쓰지 않아요.”[ref]나카마 치호(2023), 지석연 옮김, 《학교에는 작업치료가 필요합니다》, 케렌시아, 24~34쪽.[/ref] 상호의존의 동심원 속에서 학생들은 단지 지원의 대상일 뿐 아니라 교육이라는 역동 속에서 함께 움직이는 ‘주체’로 사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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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