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연재 | 청소년의 시좌에서 - 교육복지 현장의 이야기 ]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 | 발랑(신선웅)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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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청소년의 시좌에서 - 교육복지 현장의 이야기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

- 가정에서 안녕하지 않은 학생들

 

발랑(신선웅)

woong_51@hanmail.net

관악교육복지센터 센터장



 

학교폭력, ‘교권’ 침해, 아동학대 고발 등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 사건이 주목받는 가운데,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청소년이 주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교사 단체들의 주도로 그러한 학생을 분리하거나 제지하는 데 초점을 두고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어떤 학생들이 왜 어려움을 겪는지 근본적인 원인은 논의의 주제가 되지 못했다. 연재 ‘청소년의 시좌에서’는 문제를 제기할 힘을 갖지 못하고 문제로 지목되어 밀려난 취약 계층 학생과 그 보호자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역교육복지센터는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주로 취약 계층의 학생을 의뢰받거나 발견하여 관계를 맺고 자원을 연결하며 지원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필자 발랑은 가정과 학교와 지역 기관 사이를 오가며 어떤 청소년들의 삶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청소년이 어떤 사람인지 직접 듣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전제하자 비로소 청소년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청소년의 문제라고 정의된 것을 청소년의 관점에서 재정의하니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청소년을 어떻게 적응하게 만들까’가 아니라 ‘무엇이 바뀌어야 청소년이 지금 여기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가 만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 보자. - 편집자 주

 

연재 순서

① 들리지 않는 목소리,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 –교실 밖으로 밀려나는 학생들

②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 –가정에서 안녕하지 않은 학생들

③ 청소년, 듣고 싶은 그들의 이야기 – 상담실 아닌 곳을 찾는 학생들

④ 이해의 영역이 아닌 연대의 영역 –지금도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⑤ 잊고 지내는 당연한 것의 부재 - 지금을 살아가는 부모님들께

⑥ 우리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 –구조적 변화와 모두의 연대

 

 

 

그냥 지나치면 알 수 없는 것들

 

“학교 등교에 어려움이 있어요. 지각, 조퇴, 결석을 자주 해요.”

“말과 행동이 폭력적이에요. 충동 조절이 되지 않아요.”

“가까이 가면 냄새가 심해요. 잘 씻지 않는지, 빨래가 잘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기초 학습이 되어 있지 않아요. 또래보다 학습 능력이 많이 떨어져요.”

“언제나 혼자 있어요. 같은 반에도, 다른 반에도 친구가 없어요.”

“누구와도 말을 안 해요. 무슨 말을 걸어도, 무슨 질문을 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요.”

“자해를 반복적으로 해요. 몸에 상처가 있어요. 죽고 싶다는 말도 하고요.”

학교에서 교사가, 가정에서 학부모가 청소년을 바라볼 때 그들에게 어려움이 있다고 감지되는 몇 가지 영역들이 있다. 청소년 곁에서 그 삶에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여겨지는 내용들이다. 다른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요즘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정리했을 때 위의 일곱 가지 말을 가져왔다. 그 말을 보면서 ‘그렇구나’, ‘저런 일들이 있구나’ 하고 그냥 지나치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교사나 학부모가 청소년에 대하여 어려움을 호소하는 요청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를 같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말한다. 학교생활, 위생 상황, 또래 관계, 학습 수준 등을 포함하여 심리·정서적인 부분까지도 표면적으로 보이는 내용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조차 발견하지 못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논외로 한다. 한 사람의 곁에 그의 삶을 같이 살피는 주변 사람이 있다는 건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로 문제를 감지하는 것 역시 주요하다. 그런데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교사나 학부모가 청소년 주변에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현상 외에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무엇 때문인지 알고 계실까요?’ 등으로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은 ‘모르겠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청소년을 직접 만나 보기 전까지 왜 그런 일이 있는지, 그 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등은 알 수 없다.

둘째, 누군가 정한 ‘정상의 범주’가 있다. 학교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날수만큼 가야 한다. 감정의 기복이 크면 안 된다. 대부분의 날들이 평온한 편이어야 하고, 심지어 밝고 힘찬 에너지를 기대한다. 신체와 의복 등이 언제나 깨끗해야 하고, 학업 성적이 아주 낮게 떨어지지는 않아야 한다. 친구나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잘 맺고 묻는 말에 대답을 잘 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 영역에서 잘 관리되는지 여부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아주 잘 관리되는 쪽은 괜찮지만 반대로 아주 관리되지 않는 쪽은 괜찮지 않게 여겨진다. 누가 정했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꽤 선명한 기준이 있는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면 그것을 ‘문제’라고 여기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소년에게 행동이 수정될 수 있도록 직접 말해 보기는 하지만, 실행되지 않으면 기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고쳐야 한다. 과연 ‘정상의 범주’는 무엇인지, 왜 그 안에 들어야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셋째,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일’이다. 개인적 차원으로 볼 때, 한 가지 어려움만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도움을 요청하는 교사와 학부모, 청소년 당사자를 만나 보면 두세 가지 이상 복합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단순하게 한 가지 어려움만 있는 경우는 빠르게 해결된다. 하지만 대부분 청소년의 어려움은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대두되는 문제는 점차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가족 구성원 간에도 서로 영향을 주어 연쇄성과 복합성을 띤다. 이는 사회적 차원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시대에 같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2019년부터 2022년 사이에 우울증을 겪는 청소년은 많아지고, 스마트폰 과의존의 위험률은 높아졌다. 학교생활에 만족도는 떨어지고, 자퇴를 통한 학업 중단율은 증가했다. 영양 결핍과 비만율은 높아졌으며, 자살률 역시 증가하고 있다.[ref]통계청(2022), 〈[정기 보고서] 아동·청소년 삶의 질 2022〉.[/ref] 실제로 도움을 요청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기초 학습이 되어 있지 않거나 등교 거부를 보이는 청소년도 늘었으며, 일상생활 관리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아동·청소년기에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은 세대라는 점에서 원인을 찾고 다양한 조사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 원인이 무엇인지, 그 영향이 어디까지인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지만 교사와 학부모들은 그것을 여전히 알 수 없다.

넷째, ‘심각성에 대한 온도차’가 크다. 청소년에게 어려움이 있으나 학교나 가정 단위에서 해결이 되지 않을 때 사회복지, 상담, 돌봄 등 지역의 전문 기관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청소년을 지원하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 면담이 동반되는데, 청소년 당사자와 교사·학부모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 교사와 학부모는 대부분 청소년이 어려움을 겪는 시기를 ‘사춘기’라는 이름으로 치부한다. 누구나 겪는 시기이고,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닌 것처럼 지나가게 되어 있으며, 그렇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면담을 한 가정에서 학부모는 청소년과의 면담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뭐가 문제래요? 이렇게 집도 있고 뒷바라지도 다 해 주는데 뭐가 불만이래요? 청소년 시기는 누구나 비슷하지 않나요? 저는 쟤보다 훨씬 힘들게 컸어요. 지금도 쟤보다는 제가 힘들죠. 그래도 지금 이렇게 버티고 살잖아요. 왜 이렇게 유난스럽게 저러는 거래요? 저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지 말씀 좀 해 보세요.”

청소년이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들었다면 청소년은 더 크게 무너졌을 것이다. 우리는 해가 지날수록 청소년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f]이은진(2023), 〈청소년 자살문제와 사회적 과제〉, 《월간복지동향》, 302(2023년 12월), 참여연대사회복지위원회.[/ref] 요즘 청소년은 교사나 학부모 등의 비청소년이 가늠하지 못하는 무게감을 안고 산다.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심각성을 띤다. 하지만 교사나 학부모는 청소년이 왜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는지, 어느 정도로 힘이 든 건지, 어떻게 해야 나아지는지 알지 못한다.

요약해 보면 이렇다. 청소년에게 어려움이 있다. 청소년은 스스로 그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기가 어렵다. 그런데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왜 어려움이 생겼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려운지, 어떤 어려움이 연결되어 있는지, 언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어려움인지. 알고 있지 않고, 알 수 없는 상태이다. 계절마다 길에 피어나는 꽃도 모른 채 지나가면 무슨 꽃인지, 언제 피었다가 지는지, 꽃이라는 존재가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많은 이들이 청소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 곁에 있다. 모르는 이유는 그냥 지나쳤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시선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을 지원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초기 면담으로 시작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청소년을 지원하기 위해 청소년 당사자 면담과 소속 학교의 담임 교사 또는 관련이 있는 교사, 그리고 가정의 양육을 담당하는 학부모와 면담이 진행된다. ‘학부모’라는 용어가 대중성을 가지고 있어서 사용했지만 부, 모, 조부, 조모, 친척, 양부모, 형제·자매, 기타 등 가정의 상황마다 다양한 분들이 그 역할을 한다. 청소년을 양육하거나 보호하는 입장의 분들이기 때문에 ‘양육자’ 또는 ‘보호자’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정리하자면, 청소년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청소년 당사자와 보호자[ref]양육자는 어린이를 양육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보호자는 어떤 사람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미성년자에 대하여 친권을 행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과 적합성을 고려할 때 ‘보호자’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ref]를 같이 만나게 되는데, 주목할 부분은 이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도 그 해결을 위해 접근하고자 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알게 된 청소년 산들바람[ref]전달과 이해의 편의를 위해 임의로 정한 닉네임을 사용하고자 한다.[/ref]이 있다. 담임 교사가 학습과 정서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청하였다. 산들바람과 담임 교사, 그리고 보호자 조부모를 만났다. 코로나19가 한창인 시절이었는데, 담임 교사는 산들바람이 학교가 진행하는 온라인 수업에 참여가 잘 안 된다고 했다. 조부모가 양육을 담당하면서 온라인 수업에 접속하는 것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해 보여 가정 상황을 살피고 지원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가정에 가서 청소년과 보호자를 만났다. 산들바람은 이미 지역아동센터와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학습 때문에 무척 바쁜 일상을 보냈다. 부모가 생존해 있지만 모에게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고 그들이 직접 양육하지 않는 점 등을 살폈을 때, 산들바람에게는 정서적 안정을 주는 관계와 학교 온라인 수업에 원활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옆에서 살피고 돕는 역할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조부모를 만났을 때, 그들은 산들바람에게 다른 것보다 학습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대면하여 지원하는 사업이 거의 불가능했고,
1 대 1 멘토링 방식으로 청소년에 대한 맞춤 지원을 활발히 진행했다. 학습, 놀이(여가) 활동, 문화예술, 심리·정서 등 활동 내용에 따라 다양한 영역으로 멘토링이 확장된 시기였다. 그런데 산들바람의 가정에서는 오직 학습 멘토링만을 원했다. 산들바람에게 물으니 보호자 말대로 학습 멘토링을 하겠다고 했다. 고민 끝에, 학습을 도우면서 정서적인 교류가 같이 이루어질 수 있는 멘토를 찾아 매칭했다. 무엇보다 심리·정서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미 진행하고 있던 사교육이 산들바람의 일과에서 항상 우선순위가 되며 멘토링은 밀려났다. 그렇게 산들바람과의 만남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시간이 흘러 5학년이 된 산들바람에 대한 지원 요청이 다시 들어왔다. 코로나19 이후 학교생활을 하는 산들바람을 지켜보던 담임 교사와 상담 교사,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지원 요청을 해 왔다. 깨끗하지 않은 신체와 의복, 친구 관계를 맺지 못하는 점, 전반적으로 기초 학습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 등을 이야기했다. 가정에 가서 다시 청소년과 보호자를 만났다. 산들바람은 여전히 지역아동센터와 학원을 다니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보호자인 조부모는 여전히 학습 지원을 요청했다. 당사자인 산들바람과는 대화를 진행하기 어려웠고,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 그의 상황을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다. 초기 면담을 확대하여 몇 차례 만남을 진행해 본 결과, 산들바람의 어려움은 학습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확인되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불안정이 크고, 보호자가 그의 일상과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2년 전에도 발견되었던 부분이었는데,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미움, 복수, 살인 등의 언어가 등장했다. 더구나 기준 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타인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모른 채 미디어에서 본 대로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호감이 있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하는지, 또래 친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타인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심리·정서적인 상황과 학교에서의 학습이나 관계 맺기 등을 살폈을 때 종합 심리 검사가 필요했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진단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았고, 결과에 따라 약물이나 상담·치료 등과 병행하면서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는 접근이 필요했다. 어렵게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검사를 진행한 결과, 경계선 이하의 지능과 심리·정서적으로 복합적인 어려움이 확인되었다. 적극적으로 전문적 개입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병원에서는 이대로 중학교에 진학하였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은 더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보호자인 조부모는 한결같았다. 산들바람의 상황은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학습적인 지원 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했다. 영어를 잘하면, 공부를 잘하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적극적인 치료가 아니더라도 상담 전문가와 오랜 기간을 두고 정서적인 교감이 있는 대화를 통해 관계 맺는 방법을 익혀 가고,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삶의 기준들을 세워 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제안했다. 돌아온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상담이 진행될 경우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을 염려하고 부담스러워했다. 조부모는 산들바람에게 부모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창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라고 여기며 정서적인 안정 같은 데에 시간을 뺏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보호자와 해결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산들바람의 문제 행동은 점차 더 드러났다. 같은 학급의 친구를 때리고, 담당하는 사회복지사에게 성 문제로 간주될 만한 문자를 보내고, 수업 시간에는 교과 내용과 무관한 말을 하면서 수업 진행에 어려움을 주었다. 이런 행동이 대두되면서 교장, 교감, 담임 교사, 상담 교사가 나서서 조부모를 설득했다. 수차례 대면하고 전화 통화를 시도하면서 면담하고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자 했다. 어렵게 동의를 얻은 것은 방학 기간 동안만 일주일에 1번, 1시간 정도의 상담 전문가와의 만남이었다. 상담 전문가는 산들바람을 면담해 본 후, 상담사가 아닌 멘토로서의 역할을 자청했다. 산들바람에게 대화를 통해 진행하는 상담은 적절하지 않으며, 편안하게 장기간 지속적으로 놀이하고 삶을 나누면서 타인과 소통하고 마음에 안정을 찾아 가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 횟수는 10회를 채우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산들바람은 상담 전문 선생님과의 만남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지만 보호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누구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다며 학교나 기관과의 소통도 단절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처음 알게 되었고, 2년이 지나 다시 만났다. 청소년 스스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내어 주면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청소년에게 어려움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고, 근본적 해결을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같이 하나씩 실마리를 풀어 가고자 했다. 어려운 상황과 환경을 바꿀 수 없더라도 그 안에서 살아갈 힘을 같이 키워 가고자 했다. 그것이 그이의 삶과 성장에 필요했다. 청소년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답답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무언가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처음으로 꺼내 놓기 시작했으니 크게 한 발 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자 동의가 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결국 마음을 바꾸지 않은 보호자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어려움의 이유를 찾아 가는 길

 

앞서 만난 사례는 산들바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드물게 만나게 되는 케이스도 아니다. 한국 사회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영역에 있어서 양육자·보호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아주 많다. 권한에는 상당 부분의 결정권을 포함한다. 청소년이 살아가는 데에 많은 부분을 보호자가 결정하게 되어 있다. 청소년이 자신의 삶에 대해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살 수가 없다.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성인으로 간주되지 않고 있으며, 병원 진료를 받을 때에도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할 수 있다. 청소년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만든 구조이지만, 그에 따르는 부작용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어려움이 있어서 도움이 요청되는 청소년을 만날 때에도 보호자의 역할이 크다. 학교에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을 공공이나 지역 기관으로 의뢰를 하더라도 보호자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또한 어떤 지원을 할 때에도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실시할 수 없다. 단편적인 예로, 보호자의 동의 없이 정신과에서 약물을 처방받거나 치료를 받기는 어렵다. 진료나 상담이 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초진부터 받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의 상황을 바라보거나 해결하기 위한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있어 보호자와 청소년이 서로 다른 시선과 서로 다른 욕구를 보이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청소년과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보호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렇다. 청소년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더라도 보호자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큰 어려움이라고 여기지 않거나 그 정도는 어려움도 아니라는 생각도 있다. 그리고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물으면 대부분의 보호자는 학습 지원을 이야기한다. 학교에 잘 가게 해 달라, 1 대 1 과외 형식의 학습 코칭을 해 달라, 기초 학습부터 시작해서 학업 수준을 올려 달라, 학업에 흥미를 갖게 해 달라 등의 요청이다. 그리고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의 원인을 청소년에게서 찾는다. 보호자를 만나면서 많이 듣게 되는 몇 가지 말들이 있다.

“집에서 이렇게 다 해 주는데 뭐가 부족해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불만이 많은 애예요. 누구나 다 힘들게 사는데 우리 애만 왜 저러는 거예요?”

“어떻게 더 잘해 줘요? 내가 이렇게까지 희생하는데요. 더 해 줄 것도 없어요.”

“쟤를 도저히 이해 못 하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청소년에게 어려움이 있는 이유가 청소년 개인에게 있을까? 과연 청소년은 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일까? 보호자는 청소년이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청소년에게 있다고 보지만, 청소년을 통해 알아보면 사실 그 원인은 대부분 가정에 있다. 다시 말해, 청소년의 어려움은 가정에서 시작된다. 청소년이 가정 밖으로 탈출하게 되는 이유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가족과의 갈등이나 가족의 폭력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통계를 보아도 그렇다.[ref]“‘사람 살 수 없는 곳’ 악몽이 된 집… 쉼터 떠도는 청소년들 바람은”, 〈머니투데이〉, 2024년 2월 13일.[/ref] 보호자를 포함한 비청소년의 시선으로 가출한 청소년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라고 일축할 수 있지만, 실상 청소년들은 가정 안에서 겪게 되는 상황 때문에 살기 위해 가정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가정 안에서 보호자로부터 신체 또는 언어 폭력을 경험하거나, 가족과의 갈등, 소통의 부재, 가족의 해체 등이 청소년에게 심리·정서적 불안감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가정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 되고,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을 때 청소년은 혼란스럽다.

등교를 하지 않는 어려움으로 우리 기관에 의뢰된 초등학생 높새바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학교에 잘 가지 않았고 주로 모바일 게임만 했다. 가정에서는 보호자와 형제에게, 학교에서는 교사와 친구들에게 폭력을 쓰기도 했다. 관내에서 이 청소년을 모르는 기관이 없을 정도였다. 학교장 이하 어떤 교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어떤 사회복지사나 상담 전문가가 가 보아도 만날 수 없었다. 우리 기관에 의뢰가 들어와 개입하기 시작했고, 쉽지 않았으나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관계가 맺어졌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문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 기관으로 연락이 왔고, 밤낮없이 청소년이 있는 곳으로 가서 대화하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보호자가 가장 많이 호소했던 말이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자랄 때는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어요. 부모님 말씀은 잘 들어야 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크게 혼났어요. 10살부터 집안일도 도왔고요. 우리 애한테는 집안일도 안 시켜요. 그런데 내 말은 듣지도 않아요.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욕을 하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해요. 왜 저러는지 모르겠고, 난 너무 지쳐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보호자의 말 중에 청소년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를 묻는 질문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왜’를 궁금해하거나 알고자 하지는 않는다. 왜 그런지보다는 빨리 문제 상황이 해결되기를 바란다. 설령 청소년이 왜 어려운지 묻더라도 청소년은 쉽게 말하지 않는다. 이미 청소년은 알고 있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준비가 된 사람인지 아닌지, 나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같이 고민할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은 그 누구보다 청소년이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런데 청소년에게는 ‘왜’에 대한 답이 있다. 그럴 만한 이유와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다는 의미이다. 처음부터 스스로 말해 주는 청소년은 없다. 그들에게 물어보고 듣고자 기다릴 때 비로소 말해 준다. ‘교사나 학부모에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입을 꾹 닫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구도 청소년에게 진심으로 묻고, 듣고자 기다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청소년의 말을 들어 보면 교사와 학부모가 감지한 소위 ‘문제’라는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다. 교사와 학부모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 높새바람의 경우, 어린 시절에 가정 폭력을 목격하고 경험했다. 남성이 여성을 폭력으로 제압하고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장면을 보면서 성장했고 학습했다. 폭력적이지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했던 경험이 없었다. 그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고마움, 미안함, 두려움, 화가 남 등에 대한 감정이 올라올 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보호자는 청소년 개인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했으나, 결국 가정에서 안전과 안정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려움들이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경험이 없었고, 자기 존중감은 점점 사라져서 무기력할 뿐이었다. 타인과 대화가 어려우니 친밀한 사람을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휴대전화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높새바람은 가정에서 분리되었다. 가족이 같이 갈등을 해결하고 잘 지낼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고 노력했지만 더욱 악화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보호자가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없이는 청소년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높새바람은 보호자에게서 분리된 후 생활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가족과 만나 교류하고 정신과적 치료를 받으면서 예전에 비해 안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디에서 안녕할 수 있는가

 

청소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가까이에서 그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요즘 청소년에게 있는 것 같지만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특히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에게 있어야 하지만 없는 것들이다.

첫째, 청소년에게 사람이 없다. 청소년 주변에 가정과 학교와 마을이 있지만 막상 청소년이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다. 청소년에게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누구와 이야기를 하나요’라고 질문을 하게 되는데, 아무도 없다는 답변을 많이 듣는다. 친한 친구가 1명이라도 있다고 하면 안심이 될 정도이다. 같이 살아가는 가족, 학교에서 만나는 또래 집단과 교사, 마을에서 오고 가며 지내는 사람들이 있어도 막상 청소년과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큰 위기 상황이다.

둘째, 청소년에게 공간이 없다.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의 경우, 가정 안에서 자기 공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기 영역, 자신을 위한 방이 없다. 최근에 만난 청소년 중에는 편안하게 쉼을 얻을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에 누워 안정을 취한다고 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도 그렇다.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없다. 청소년 전용 공간이 사업적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공간이든 그이를 맞이하고 만나고 대화할 사람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다. 청소년을 위해 서비스를 실시하는 기관은 많을지 몰라도, 청소년이 언제라도 가고 싶고 갈 수 있는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 공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셋째, 청소년에게 시간이 없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지만 막상 청소년이 무척 바쁘다. 학교, 사교육, 또는 지역의 이용 시설 등에서 학업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청소년의 마음이 어렵고 해결할 일이 있어도 공부하는 시간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보호자가 용인하지 않는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욱 그렇다. 학업을 위해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친구를 만나거나 놀이와 문화를 즐기거나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거나 편안하게 쉼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넷째, 청소년에게 기회가 없다. 친구와 싸우고 화해할 기회가 없다. 또래 관계에서 갈등 상황은 학교폭력으로 신고되기 일쑤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다투기도 하고, 서로 사과도 하면서 사회성이 길러져야 하지만 요즘 시대는 그러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며 자신을 탐색할 기회가 없다.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 여행을 하고 다종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은 여러 면에서 안정적인 다른 청소년들의 이야기이다. 가정체험학습을 사용하여 국내외로 여행을 가는 것이 대중화된 시대에, 학교에 빠지지 않고 다니는 것이 놀림거리가 되어 버렸다.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에게는 여러 면에서 더욱 기회가 없다.

다섯째, 청소년에게 선택지가 없다. 주변에서는 공부를 잘해야 이름 있는 대학에 가고, 취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공부를 열심히 잘하라고 한다. 그런데 사교육 없이 좋은 성적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취업, 부를 얻는 것 등 외에 다른 선택지는 무엇이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두려움만 가지고 자립을 준비해야 한다.

청소년과 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 중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족이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도 청소년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되거나 이해받지 못한다.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도 풀어내려는 방향이 다르니 더 꼬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 존재로서 자신이 살아갈 삶의 방향을 찾고 고민하고 한 걸음 나아가는 청소년 시기에서 신체와 호르몬의 변화를 겪으며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아 가고자 한다. 이 시기를 그저 누구나 겪는, 짜증 내고 반항하는 ‘사춘기’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청소년과 영원히 대화할 수 없다. 청소년 스스로도 자신이 왜 화가 나고, 무엇이 고민이 되고, 어떤 이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인지 모를 수 있다. 더구나 겉으로 하게 되는 말과 진짜 속마음의 이야기는 다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는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이쯤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누가 청소년과 대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을 걸고 그들과 마음이 통하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지금 누가 그 역할을 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청소년에게 사람, 공간, 시간, 기회, 선택지를 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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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