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인서울’만이 전부라는 세상과 싸울 수 있게 너의 삶을 말해 줘
신현아
rei1318@naver.com
동아대 강사,
지역/노동/가족 연구 중
전혀 궁금하지 않은 대치동 이야기
트위터 등의 SNS나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하여 논쟁을 빚는 주제들이 있다. “당사자로서의 내 몫만 요구하고 싶을 뿐인데, 왜 남에게까지 연대하라고 하느냐”, “국가 장학금 10분위라도 형편이 어렵다”, “서울 바깥은 사실상 다 시골 맞지 않느냐” 등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으로 언쟁을 벌이는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이제 매년 되풀이되는 ‘절기’같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중 겨울의 ‘절기’는 “내가 엘리트 대학에 간 것은 내가 고생해서 입시 공부를 한 덕이지 부모 덕 본 것이 아니다”가 되겠다. 주로 수능 직전부터 대학 원서 접수 기간에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또 거기에는 으레 자신들이 ‘대치동’이라는 곳에서 얼마나 죽을 만큼 힘들게 입시 경쟁을 거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그러면서 온갖 ‘대치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네가 대치동에서 비싼 입시 학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네 계급 덕분이다”, “능력주의적 착각 그만” 등의 당연한 지적부터, “저도 대치동 살지만 평범한 집입니다”, “‘진짜 대치키드’가 아니라서 잘 모르나 보다” 등 ‘진짜 대치동’에서 받는 사교육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준인지 간증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분당키드’랑 ‘대치키드’는 다름”, “난 ‘목동키드’인데”라며 지역별 ‘키드’를 분류하기도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좀 ‘대치키드’ 같음”이라며 그 이미지를 ‘덕질’에 응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온갖 언쟁의 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만사를 제쳐 두고 끼어들어서 마구 삿대질을 하다가도, ‘대치키드’니 ‘사교육’이니 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김이 팍 새 버리며 할 말이 없어진다. 첫째로는 나는 ‘대치동’이 어딘지 모른다. 나도 비록 ‘서울 중심주의’ 주제의 절기에 “서울 사는 사람들은 서울 바깥의 지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기는 하냐”고 욕을 해 댔지만, 미안하게도 사실 나 역시 수원 위로는 지명의 위상들이 워낙 복잡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모른다. 동탄, 판교, 분당, 강남, 대치동, 목동 등은 들어도 ‘서울 안의 어느 잘사는 동네’ 정도로만 생각되는데, 심지어 그 어딘지도 모를 동네들을 촘촘히 나누어 각 동네별 ‘키드’들의 성장 서사까지 알고 싶지가 않다.
둘째로는 나는 동네 보습 학원도 안 다녀 봤는데, 수백, 수천만 원에 육박한다는 사교육의 세계는 들어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런 사교육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쏟아 놓고, 돈은 얼마가 드는지, 대학보다 가기 어려운 최고의 입시 학원을 뚫기 위해 어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안에서는 얼마나 잔인한 경쟁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토로한다. 전혀 알고 싶지 않다.
그렇게 모두가 ‘대치키드’의 세상을 비판하기 위해 계속 ‘대치키드’를 소환할수록 세상은 ‘대치키드’에 대한 이야기로 꽉 차 버린다. 그럴 때면 마구 고함을 질러서 그런 이야기들을 싹 밀어 버리고, 그 자리를 ‘거제키드’, ‘울산키드’, ‘전주키드’, ‘원주키드’, ‘충주키드’ 등 온갖 지역 키드들의 이야기로 채우고 싶다. 그러나 대체로 지역의 이야기들은 ‘지방대생의 방황’이나 ‘현장 실습생의 죽음’과 같은 ‘사회 문제’나 ‘사건’으로서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여전히 ‘수면 아래’에 남겨진 지역의 아이들은 각자 어떤 다른 풍경들을 보고 어떤 마음으로 자라서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은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 지루할까, 부러울까, 공감할까?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거제키드’의 세상 - 빈칸과 쓰레기통
영화 〈벌새〉(김보라 감독)는 1994년에 중학교 2학년이던 여학생 은희의 일상적인 시간들을 계속 쌓아 나간 끝에 ‘성수대교 붕괴’라는 재난을 이어 놓는다. 그래서 1994년은 대치동에 사는 은희의 가족들, 떡집을 하는 부모님, 춤바람이 난 아버지, ‘대원외고’와 ‘서울대’에 갈 우등생이면서 은희를 때리는 오빠, 공부를 못해서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단짝 친구 지숙, 남자친구 지완,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이상한 선생님 김영지에 대한 개인적 기억이 있는 시간인 동시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보편적 기억이 일어난 시간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은희의 개인적 기억이 던지는 “당사자는 알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의 퍼즐들”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슷한 모양의 빈칸”을 맞추어 가며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와 같은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ref]최재훈(2020), 〈영화 ‘벌새’: 속삭임의 데시벨〉, 《객석》, 2020년 8월호.[/ref]
나 역시 열심히 영화 속 퍼즐을 주워 내 마음의 빈칸에 맞춰 보려 애쓴다. 나도 은희처럼 학교에서는 매일 연습장에 만화를 그렸다. 한 칸. 나도 은희처럼 고함을 지르고 다 박살 내고 싶었다. 두 칸. 나도 슈퍼나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쳤다. 세 칸. 은희의 어머니가 고등학교를 못 갔다며 외삼촌이 한탄한 것처럼, 우리 엄마는 여상을 졸업해 바로 취업했던 것에 한이 맺혔고, 나에게 여대생이 되면 어려운 책을 껴안고 다니라고 했다. 네 칸.
그러나 애써 모은 네 칸의 퍼즐 외에 구십여섯 개의 빈칸이 남는다. 은희의 아버지는 “대치동 살면서 공부 못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야단을 치지만, 거제시 옥수동과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에는 별 상관이 없었다. 빈칸 하나. 아들이 ‘대원외고’나 ‘서울대’에 가면 기분은 좋겠지만, ‘집 근처의 대학’을 나와 ‘중공업 사무직’이 되면 더 안심이다. 빈칸 둘. 성수대교, 한강 너머, 개포 주공 아파트가 아니라 사원 아파트 단지,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골리앗 크레인, 여름 방학에 삼삼오오 가던 집 근처 해수욕장이 나의 풍경이다. 빈칸 셋. 나에게 무언가 다른 공기를 느끼게 해 주는 곳은 ‘서울대’를 휴학하고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 선생님이 있는 학원이 아니라, 서울의 어느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와 가난해도 낭만이 넘치는 서울의 삶을 자랑하는 ‘알바’가 있는 만화 대여점이었다. 빈칸 넷. 그러다 나는 거제를 떠나서 부산이라는 더 큰 도시로 대학을 갔지만, 이 대도시의 사람들은 여기조차도 서울에 비하면 ‘지방’이라고 했다. 빈칸 다섯.
그렇게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쯤에, 고향의 친구들은 대부분 조선소 협력 병원이나 조선소 하청업체의 경리, 사무 보조로 이미 취업을 했다. 나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자 마음이 급해진 엄마는 아빠에게 “너거 부서 여직원도 어디 국문과 나왔다매. 야는 그런 거 못 들어가나?”라고 물었고, 아빠는 “내가 아나?”라고 했다. 그러다 내가 뜬금없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래. 병원이든 조선소든 일할라면 빠릿빠릿해야 되는데 니는 택도 없으니 그기 낫긋다”라며 “그러다 정 안 되면 조선소에서 뭐라도 하면 되긋지”라고 막연히 기대를 했다.
한번은 이 빈칸의 기억을 담아 어느 지면에 “대학원을 다니다 정 안 되면 조선소에 가서 일하면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대학보다 조선소가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라고 썼다. 그것을 본 어느 연구자는 “조선소 노동을 하찮게 여기는 쓰레기”라고 하며, 나의 지면이 언급될 때마다 “그 문장 하나만 봐도 윤리적으로 쓰레기이기 때문에 더 볼 가치가 없다”라고 되풀이했다. ‘쓰레기’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지역에서 성장하는 방식이라도 연구자가 된 나는 과거의 나와 단절하여 한발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윤리적 판단’을 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러면 ‘비윤리적인’ 것이 되어 버린 ‘거제키드’의 이야기는 어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까.
우리는 정말 ‘인서울’을 하고 싶었을까?
이처럼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각 지역의 구조가 만들어 내는 고유한 성장의 문법과 삶의 양식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는 ‘키드’라는 성장 서사로 만들어지고 유통되지 않는다. 성장의 끝에 ‘인서울 대학’이 놓일 때만 의미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채널A〉에서 방영된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는 매주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학년, 다른 지역, 다른 지망의 다양한 학생들이 출연하여 ‘일타 강사’들에게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코칭받는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목표는 모두 ‘인서울 대학’ 또는 ‘의대’ 진학이라는 하나로 수렴된다. 12화에 출연한 경북 경산의 고등학생 남매 중 고3인 오빠는 전국 상위 0.01%의 성적을 보여 주지만, 고2인 동생은 현재로서는 ‘인서울’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티처스’들은 지능지수 검사까지 해 가며 ‘솔루션’을 제시한다. 매화 나오는 ‘솔루션’의 성패는 사실상 이 학생들이 ‘인서울’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성적이 올랐는지 내렸는지로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모두 똑같이 ‘인서울’을 하고 싶었을까? 수많은 지역적 삶의 양식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서사가 너무나 없기 때문에 ‘인서울’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믿어 버린 것은 아닐까?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을 연구한 연혜원의 논문에서는 공업고 학생들이 ‘학벌이 좋지 않은’ 대학에 진학해 또다시 ‘교육 서열화의 피해’를 입기보다는 빠른 취업으로 경제적 능력을 얻고자 하지만, 취업 현장에서 ‘고졸자’라는 더 강력한 낙인을 확인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구조를 분석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학벌주의’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가장 많이 심어 주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이다. “공업 고등학교는 정책적으로 학벌주의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는 동시에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 바에야 직업교육을 이수하고 고졸 취업자가 되는 것이 나은 선택임을 주입시킨다.”[ref]연혜원(2022), 〈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업고등학교 학생의 성인이행기 전략〉, 《경제와사회》, 133, 163쪽.[/ref] 그 결과 학생들은 어떤 미래를 설계할지보다도 어떤 낙인이 덜 차별적일지를 놓고 공포에 떨며 학교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 차별적인 ‘학벌주의’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구조에 놓여 있고 어떤 다양한 삶의 서사들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지만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엘리트 대학’이라는 것을 성장의 최정점으로 내걸고 있고, 지역의 수많은 대학들에 대해선 ‘능력이 없으니 정리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삶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런 말들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세상에게 더 많은 삶의 가능성을 알려 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과 가고 싶었던 곳은 어떤 곳인지, 어떤 것을 바라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고 또 살아가고 있는지, 손쉽게 정리되어 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여전히 내 이야기를 또 이렇게 꺼내는 것이 자기 연민이 되지는 않을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닐지 두렵고 고민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각자가 안고 있는 ‘빈칸’들의 이야기를 쏟아 내서 세상이 요구하는 단 하나의 성장 이야기를 쓸어 버리고 수많은 다양한 ‘키드’들의 성장으로 채워 버리기를 바란다.
에세이
‘인서울’만이 전부라는 세상과 싸울 수 있게 너의 삶을 말해 줘
신현아
rei1318@naver.com
동아대 강사,
지역/노동/가족 연구 중
전혀 궁금하지 않은 대치동 이야기
트위터 등의 SNS나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하여 논쟁을 빚는 주제들이 있다. “당사자로서의 내 몫만 요구하고 싶을 뿐인데, 왜 남에게까지 연대하라고 하느냐”, “국가 장학금 10분위라도 형편이 어렵다”, “서울 바깥은 사실상 다 시골 맞지 않느냐” 등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으로 언쟁을 벌이는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이제 매년 되풀이되는 ‘절기’같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중 겨울의 ‘절기’는 “내가 엘리트 대학에 간 것은 내가 고생해서 입시 공부를 한 덕이지 부모 덕 본 것이 아니다”가 되겠다. 주로 수능 직전부터 대학 원서 접수 기간에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또 거기에는 으레 자신들이 ‘대치동’이라는 곳에서 얼마나 죽을 만큼 힘들게 입시 경쟁을 거쳤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그러면서 온갖 ‘대치동’에 관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네가 대치동에서 비싼 입시 학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네 계급 덕분이다”, “능력주의적 착각 그만” 등의 당연한 지적부터, “저도 대치동 살지만 평범한 집입니다”, “‘진짜 대치키드’가 아니라서 잘 모르나 보다” 등 ‘진짜 대치동’에서 받는 사교육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준인지 간증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분당키드’랑 ‘대치키드’는 다름”, “난 ‘목동키드’인데”라며 지역별 ‘키드’를 분류하기도 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좀 ‘대치키드’ 같음”이라며 그 이미지를 ‘덕질’에 응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온갖 언쟁의 절기가 돌아올 때마다 만사를 제쳐 두고 끼어들어서 마구 삿대질을 하다가도, ‘대치키드’니 ‘사교육’이니 하는 이야기만 나오면 김이 팍 새 버리며 할 말이 없어진다. 첫째로는 나는 ‘대치동’이 어딘지 모른다. 나도 비록 ‘서울 중심주의’ 주제의 절기에 “서울 사는 사람들은 서울 바깥의 지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기는 하냐”고 욕을 해 댔지만, 미안하게도 사실 나 역시 수원 위로는 지명의 위상들이 워낙 복잡해서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모른다. 동탄, 판교, 분당, 강남, 대치동, 목동 등은 들어도 ‘서울 안의 어느 잘사는 동네’ 정도로만 생각되는데, 심지어 그 어딘지도 모를 동네들을 촘촘히 나누어 각 동네별 ‘키드’들의 성장 서사까지 알고 싶지가 않다.
둘째로는 나는 동네 보습 학원도 안 다녀 봤는데, 수백, 수천만 원에 육박한다는 사교육의 세계는 들어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런 사교육에 관한 온갖 정보들을 쏟아 놓고, 돈은 얼마가 드는지, 대학보다 가기 어려운 최고의 입시 학원을 뚫기 위해 어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며 그 안에서는 얼마나 잔인한 경쟁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토로한다. 전혀 알고 싶지 않다.
그렇게 모두가 ‘대치키드’의 세상을 비판하기 위해 계속 ‘대치키드’를 소환할수록 세상은 ‘대치키드’에 대한 이야기로 꽉 차 버린다. 그럴 때면 마구 고함을 질러서 그런 이야기들을 싹 밀어 버리고, 그 자리를 ‘거제키드’, ‘울산키드’, ‘전주키드’, ‘원주키드’, ‘충주키드’ 등 온갖 지역 키드들의 이야기로 채우고 싶다. 그러나 대체로 지역의 이야기들은 ‘지방대생의 방황’이나 ‘현장 실습생의 죽음’과 같은 ‘사회 문제’나 ‘사건’으로서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면 여전히 ‘수면 아래’에 남겨진 지역의 아이들은 각자 어떤 다른 풍경들을 보고 어떤 마음으로 자라서 어디로 갔을까?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은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 지루할까, 부러울까, 공감할까?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거제키드’의 세상 - 빈칸과 쓰레기통
영화 〈벌새〉(김보라 감독)는 1994년에 중학교 2학년이던 여학생 은희의 일상적인 시간들을 계속 쌓아 나간 끝에 ‘성수대교 붕괴’라는 재난을 이어 놓는다. 그래서 1994년은 대치동에 사는 은희의 가족들, 떡집을 하는 부모님, 춤바람이 난 아버지, ‘대원외고’와 ‘서울대’에 갈 우등생이면서 은희를 때리는 오빠, 공부를 못해서 강북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단짝 친구 지숙, 남자친구 지완, 한문 학원에 새로 온 이상한 선생님 김영지에 대한 개인적 기억이 있는 시간인 동시에, 김일성이 사망하고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보편적 기억이 일어난 시간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은희의 개인적 기억이 던지는 “당사자는 알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의 퍼즐들”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슷한 모양의 빈칸”을 맞추어 가며 “지극히 개인적인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와 같은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ref]최재훈(2020), 〈영화 ‘벌새’: 속삭임의 데시벨〉, 《객석》, 2020년 8월호.[/ref]
나 역시 열심히 영화 속 퍼즐을 주워 내 마음의 빈칸에 맞춰 보려 애쓴다. 나도 은희처럼 학교에서는 매일 연습장에 만화를 그렸다. 한 칸. 나도 은희처럼 고함을 지르고 다 박살 내고 싶었다. 두 칸. 나도 슈퍼나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쳤다. 세 칸. 은희의 어머니가 고등학교를 못 갔다며 외삼촌이 한탄한 것처럼, 우리 엄마는 여상을 졸업해 바로 취업했던 것에 한이 맺혔고, 나에게 여대생이 되면 어려운 책을 껴안고 다니라고 했다. 네 칸.
그러나 애써 모은 네 칸의 퍼즐 외에 구십여섯 개의 빈칸이 남는다. 은희의 아버지는 “대치동 살면서 공부 못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야단을 치지만, 거제시 옥수동과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에는 별 상관이 없었다. 빈칸 하나. 아들이 ‘대원외고’나 ‘서울대’에 가면 기분은 좋겠지만, ‘집 근처의 대학’을 나와 ‘중공업 사무직’이 되면 더 안심이다. 빈칸 둘. 성수대교, 한강 너머, 개포 주공 아파트가 아니라 사원 아파트 단지,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골리앗 크레인, 여름 방학에 삼삼오오 가던 집 근처 해수욕장이 나의 풍경이다. 빈칸 셋. 나에게 무언가 다른 공기를 느끼게 해 주는 곳은 ‘서울대’를 휴학하고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 선생님이 있는 학원이 아니라, 서울의 어느 대학을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와 가난해도 낭만이 넘치는 서울의 삶을 자랑하는 ‘알바’가 있는 만화 대여점이었다. 빈칸 넷. 그러다 나는 거제를 떠나서 부산이라는 더 큰 도시로 대학을 갔지만, 이 대도시의 사람들은 여기조차도 서울에 비하면 ‘지방’이라고 했다. 빈칸 다섯.
그렇게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쯤에, 고향의 친구들은 대부분 조선소 협력 병원이나 조선소 하청업체의 경리, 사무 보조로 이미 취업을 했다. 나만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자 마음이 급해진 엄마는 아빠에게 “너거 부서 여직원도 어디 국문과 나왔다매. 야는 그런 거 못 들어가나?”라고 물었고, 아빠는 “내가 아나?”라고 했다. 그러다 내가 뜬금없이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하자 “그래. 병원이든 조선소든 일할라면 빠릿빠릿해야 되는데 니는 택도 없으니 그기 낫긋다”라며 “그러다 정 안 되면 조선소에서 뭐라도 하면 되긋지”라고 막연히 기대를 했다.
한번은 이 빈칸의 기억을 담아 어느 지면에 “대학원을 다니다 정 안 되면 조선소에 가서 일하면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대학보다 조선소가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라고 썼다. 그것을 본 어느 연구자는 “조선소 노동을 하찮게 여기는 쓰레기”라고 하며, 나의 지면이 언급될 때마다 “그 문장 하나만 봐도 윤리적으로 쓰레기이기 때문에 더 볼 가치가 없다”라고 되풀이했다. ‘쓰레기’라는 말을 곱씹어 본다. 그것이 내가 살아온 지역에서 성장하는 방식이라도 연구자가 된 나는 과거의 나와 단절하여 한발 멀리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윤리적 판단’을 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러면 ‘비윤리적인’ 것이 되어 버린 ‘거제키드’의 이야기는 어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까.
우리는 정말 ‘인서울’을 하고 싶었을까?
이처럼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졸업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각 지역의 구조가 만들어 내는 고유한 성장의 문법과 삶의 양식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는 ‘키드’라는 성장 서사로 만들어지고 유통되지 않는다. 성장의 끝에 ‘인서울 대학’이 놓일 때만 의미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채널A〉에서 방영된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라는 예능 프로그램에는 매주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학년, 다른 지역, 다른 지망의 다양한 학생들이 출연하여 ‘일타 강사’들에게 제대로 공부하는 법을 코칭받는다. 그러나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목표는 모두 ‘인서울 대학’ 또는 ‘의대’ 진학이라는 하나로 수렴된다. 12화에 출연한 경북 경산의 고등학생 남매 중 고3인 오빠는 전국 상위 0.01%의 성적을 보여 주지만, 고2인 동생은 현재로서는 ‘인서울’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티처스’들은 지능지수 검사까지 해 가며 ‘솔루션’을 제시한다. 매화 나오는 ‘솔루션’의 성패는 사실상 이 학생들이 ‘인서울’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성적이 올랐는지 내렸는지로 결정된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모두 똑같이 ‘인서울’을 하고 싶었을까? 수많은 지역적 삶의 양식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서사가 너무나 없기 때문에 ‘인서울’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믿어 버린 것은 아닐까? 공업 고등학교 학생들을 연구한 연혜원의 논문에서는 공업고 학생들이 ‘학벌이 좋지 않은’ 대학에 진학해 또다시 ‘교육 서열화의 피해’를 입기보다는 빠른 취업으로 경제적 능력을 얻고자 하지만, 취업 현장에서 ‘고졸자’라는 더 강력한 낙인을 확인하고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구조를 분석한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학벌주의’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을 가장 많이 심어 주는 곳은 다름 아닌 학교이다. “공업 고등학교는 정책적으로 학벌주의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는 동시에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 바에야 직업교육을 이수하고 고졸 취업자가 되는 것이 나은 선택임을 주입시킨다.”[ref]연혜원(2022), 〈능력주의 사회에서 공업고등학교 학생의 성인이행기 전략〉, 《경제와사회》, 133, 163쪽.[/ref] 그 결과 학생들은 어떤 미래를 설계할지보다도 어떤 낙인이 덜 차별적일지를 놓고 공포에 떨며 학교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 차별적인 ‘학벌주의’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구조에 놓여 있고 어떤 다양한 삶의 서사들이 존재하는지 알고 있다면 그렇게 두려워하지만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엘리트 대학’이라는 것을 성장의 최정점으로 내걸고 있고, 지역의 수많은 대학들에 대해선 ‘능력이 없으니 정리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며 삶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런 말들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세상에게 더 많은 삶의 가능성을 알려 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과 가고 싶었던 곳은 어떤 곳인지, 어떤 것을 바라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고 또 살아가고 있는지, 손쉽게 정리되어 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여전히 내 이야기를 또 이렇게 꺼내는 것이 자기 연민이 되지는 않을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닐지 두렵고 고민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각자가 안고 있는 ‘빈칸’들의 이야기를 쏟아 내서 세상이 요구하는 단 하나의 성장 이야기를 쓸어 버리고 수많은 다양한 ‘키드’들의 성장으로 채워 버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