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호[특집]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기후 정의(2/2) (채효정)

202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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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기후 위기 시대의 교육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기후 정의(2/2)

- 전환을 탈환하는 사유와 저항을 위하여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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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전환은 생태적 저항이다


나는 ‘전환’의 상상력이 가져올 수 있는 급진적 상상력과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른 세계를 상상할 때 흔히 취해 온 ‘고안과 설계’의 관점, 하나의 체제를 다른 체제로 ‘교체’한다는 관점, ‘나라를 세운다’고 하는 ‘건설’의 관점에서 벗어나, 체제 내부에서부터 ‘다르게-되기’와 ‘다르게-살기’라는 새로운 상상력과 즉시적 수행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공산-공유의 삶을 살아 버리기’는 그동안 ‘자본주의 안에서는 어쩔 수 없어’라며 구조에 대해 스스로 패배하도록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대안은 없다’라는 교리를 효과적으로 전복할 수 있다. 


사회 변혁을 체제 안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기의 삶으로부터 지배 체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환은 ‘지금-여기-당장’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더 이상 자본주의 이후도 없고 외부도 없다는 종결의 신화와 신자유주의가 쳐 놓은 상상력의 봉쇄에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은 중요한 시작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태적 전환을 정치적 개념으로 적극 탈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환’이란 개념에서 역사적·정치적·계급적 맥락을 소거하면 결국 ‘대체’와 ‘이행’만이 남는다. 지금 전환을 둘러싼 개념적 투쟁은 누가 전환의 주체가 될 것이냐의 싸움이고, 어떤 전환의 상상력이 이길 것이냐의 싸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저항 없이 생태적 전환은 없다. 지금 전국의 농지와 산림, 바다와 하늘을 먹어 치우는 재생 에너지의 난개발식 확장과 노동자 해고나 지역 경제의 붕괴를 뒷전으로 미루고 진행되는 에너지 전환, 산업 전환의 방식은 생태적 전환이 곧 사회적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우리가 원하는 생태적 전환은 우리가 원하는 정치적 전환과 직결된다. 우리가 태양 에너지, 풍력 에너지를 바랐던 것은 그것이 석탄이나 석유보다 깨끗하거나 비용이 저렴해서만은 아니다. 우리의 삶터 가까운 곳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고, 그리하여 태양을 기다리고 바람에 귀를 기울이며 날씨를 통해 자연을 돌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너지의 공동 관리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 판매자와 투자자라는 분리된 관계가 아니라 ‘돌보는 자’로서의 공유인이 되고, 지역공동체의 자치와 자급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생산관계와 권력관계의 전환을 빼고 에너지 전환만 말하는 순간, 재생 에너지는 상품이 되고, 신성장 동력이 되고, 자본의 돈벌이 수단이 되며, ‘위장된 민영화’를 통해 글로벌 자본의 투자 시장으로 넘어가고 만다.


공장 지붕 위에 태양광 패널을 깔고 그 전기로 공장을 가동한다고 해도 그 아래 노동자들이 ‘착한 전깃불’ 아래 밤낮없이 착취당한다면 그걸 생태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시의 에너지가 모두 재생 에너지로 조달된다고 해도 그 공급을 맥쿼리 같은 투기 자본이 독점한다면 생태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교도 마찬가지다. 탄소 중립 건물에서 저탄소 친환경 급식을 먹으면서, 여전히 입시 체제하에서 친구와 경쟁하며 청소년들이 자기의 힘과 에너지를 남김없이 채굴해야 한다면, 그런 학교와 교육을 생태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적 전환이란 ‘정치적으로 정의로운’ 전환의 원칙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정의로운 전환’ 개념도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다. 원래 이 개념은 노동운동과 기후정의운동에서 제시된 것으로, 기후정의운동은 이 개념을, 기후 위기 대응이 노동자 민중, 소수와 약자에게 피해를 집중시키고 부자와 기업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물론, 그 정책적 대안들이 지금까지의 위기가 초래할 결과일 뿐만 아니라 원인이기도 한 계급, 지역, 젠더, 종 간 불평등을 시정하는 적극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전환의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하지만 자본과 국가 그리고 주류 환경운동은 정의로운 전환을 피해자 구제나 보상의 문제로 축소하려 한다. 심지어 정의로운 전환은 기업의 책임을 면제해 주고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는 수단으로도 이용된다. 우리가 정의롭게 에너지 전환을 하겠으니, 그에 따르는 기업의 피해와 전환 비용을 정부와 시민, 노동자들도 ‘공평하게’ 함께 부담하자! 유럽의 다국적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은 독일 정부의 탈핵, 탈석탄 정책에 맞서 당당하게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기업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막대한 철수 비용을 청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던진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화두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지금 기후 위기가 교육 정책에 어떤 식으로 들어오고 있는지를 보자. 관료적 상상력은 친환경 먹거리나 채식 식단, 텃밭 교육, 생태 감수성 제고, 탄소 중립 학교 같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그것을 행하는 주체의 자발적 동기와 자율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과제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건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새로운 노동 강도, 학습 강도 가중일 뿐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니까 교사도 학생도 코딩이 필수로 요구되었던 것처럼 기후 위기 시대니까 필수로 해야 한다는 기후교육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지 ‘안 봐도 비디오’처럼 그려진다. ‘그린 스마트 스쿨’이나 ‘기후시민교육’, ‘탄소 중립 학교’ 같은 정책 용어는 어떤 식으로 구체화될까. 학생들은 불타는 지구를 형상화한 포스터 위에 ‘지구를 구하자’ 같은 표어를 쓴다. 시범 학교가 지정되고, ‘교육농’을 상상하고 있던 우리 앞에 교육용 그린 스마트 팜이 학교 운동장에 떡하니 만들어지며, 교실이나 복도에 스타트 업에서 개발한 컨테이너식 미니 스마트 팜이 체험용 교구로 비치될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과장일까? 빌 게이츠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세계 각국 공공 기관에 독점으로 공급하고 있는 소프트웨어처럼 식량 공급자가 되길 꿈꿔 왔는데, 그린과 디지털을 결합시킨 ‘그린 스마트 푸드 시스템’ 이 가장 먼저 들어올 수 있는 곳은 민주주의와 공공성이 취약한 국가의 군대와 학교다.


우리가 꿈꾼 탄소 문명의 종식과 생태적 전환을 그런 식으로 굴절시키지 않으려면, 한편으로는 생태적이지 않은 것을 생태적이라고 하는 상징 조작에 맞서는 싸움이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 당신들이 말하는 생태적 교육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먹거리, 텃밭, 채식, 동식물 키우기와 같은 활동은 물론 중요한 시작점이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일상의 작은 실천을 정치적 권력 및 사회적 구조와 연결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자본은 그 연결 고리를 끊음으로써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다짐과 다른 삶을 향한 우리의 의지를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하는 소비의 욕망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노동의 생태적 전환 및 정치의 생태적 전환과 연결하여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육, 노동, 정치를 함께 잇는 생태적 전환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 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이제 좌표에서 서사로 나아가야 한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지난 10년간 교육운동이 나아갈 바를 제시했던 하나의 좌표였다면, 이제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도, 기후 정의도,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는 새로 ‘발명’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실은 이미 계속 터져 나오고 있던 언어 속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들이다.


후쿠시마 사태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우리는 ‘돈보다 생명’ 을 외쳤다. 저 다섯 글자만큼 선명하게 교육의 생태적 전환과 기후 정의를 설명하는 말이 있는가. 그걸 다시 ‘녹색이 돈이다’로 되돌리지 말자. 생태교육이 ‘녹색으로 대학 가자’가 되고 ‘녹색으로 창업하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노동자들은 “우리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고, 청소년들은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고, 여성들은 “우리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동물권 활동가들은 “닭은 알 낳는 기계가 아니고 소와 돼지는 고기를 만드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친다. 우리는 수많은 살아 있는 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나누고, 이을 수 있다. 기계화, 상품화, 시장화에 저항하는 ‘생태적 저항’을 통해서만 생태적 전환은 가능하다.



우리를 연결하는 이야기들


큰 이야기지만 작은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지금 ‘기후 위기’라고 부르는 이 위기는 오래전에 감지되었다. 내가 기후 환경 문제를 본격적으로 나의 삶의 문제로 생각하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출산과 육아를 통해서였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던 2000년대 초반에는 자연주의 출산, 자연주의 육아, 자연주의 교육이 유행했다. 왜 자연주의 육아가 유행했을까? 그때는 황사, 미세먼지, 자동차 배기가스,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을 일상에서 체감할 정도로 환경이 나빠졌고, 아토피와 같은 질병이 새로운 호환마마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국 사회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파트가 올라가고, 자동차가 늘어나고, 도로가 뻗어 나갔다. 그야 1970~198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도 그랬지만, 문제는 1990년대의 소비 팽창은 경제 불황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고 그 속도가 무섭게 빨랐다는 것이다. 제조업에 기반한 산업화 시기의 성장과는 질적, 양적으로 다른 성격과 규모의 성장이었다. 노태우 정권에서 대통령 공약 사업이었던 주택 200만 호는 놀라운 속도로 건설됐다. ‘집값 안정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비웃듯이 아파트 값은 무려 95.5%(서울 기준)나 치솟았다. 서울, 부산 등 도시 일부 지역에 있던 아파트들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2000년대를 지나면서 거의 한국인의 표준 주거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까지 뉴스에 나오던 ‘집 투기’는 ‘투자’로 합법화되었고, 신문 사회면 범죄 기사는 ‘부동산 재테크’라는 이름을 달고 경제 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수도권 중산층의 자산 기반을 만들어 줬고, 금융 시장 개방 이후 금융 자본의 공격적 마케팅과 새로운 금융 대출 상품은 사람들이 현금 없이도 대출로 집을 사고 차를 사도록 부추겼다. 1990년대 한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과 연달아 이어진 금융 위기는 산업 자본 중심에서 금융 자본 중심으로의 산업 체제 전환 과정에서 나타난 충격과 적응의 과정이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빈자와 약자들이 짊어졌다. 주의해서 볼 것은 이 경제 도약이 탄소 배출의 도약으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탄소 배출량 그래프를 보면 산업 혁명 이후 서서히 증가하던 탄소 배출량이 급속도로 치솟는 시점이 두 번 나타난다. 첫 번째가 1945년으로 석유 채굴량이 늘어나고 전후 자본주의 경제가 고속 성장하는 시기고, 두 번째가 바로 1990년대 이후다. 탄소 배출은 에너지 소비량과 직결되는데, 전후 호황기의 탄소 배출이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사회의 배출이었다면, 1990년대 포스트 포디즘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늘어난 탄소 배출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세계화와 직결된다.


직접적 원인은 저발전 국가들에서 탄소 배출과 에너지 소비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OECD 국가들에서는 굴뚝 산업이 사라지며 하늘이 맑아지고 에너지 소비 증가율도 눈에 띄게 떨어진다. 이유는 ‘굴뚝’이 OECD 국가 바깥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세계의 굴뚝 나라들은 서구 바깥에서 서구의 소비자들을 위한 상품을 더 많이 더 빨리 더 싸게 생산하고 있었다. 위험과 오염의 외주화와 저임금 노동력이 서구 OECD 국가들의 환경 위기와 경제 위기 동반 탈출 비결이 었지만,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마치 선진국이 기술 혁신과 산업 전환을 통해 환경도 살리고 경제 위기도 극복하고 있는 듯 착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압축적 성장은 노동과 자연에 대한 압축적 착취와 추출을 전제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자본에겐 유리했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노동자들에겐 불리했다. 노동자들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노동 시장에서의 압박은 고스란히 교육 현장으로 전가되었다. 입시 경쟁은 취업 경쟁으로 또다시 연장됐고, 중·고등학교의 성적 경쟁은 대학의 학점 경쟁으로 연장됐다. 대학의 경쟁 교육 심화는 학생운동의 쇠퇴와 노학 연대의 단절에 중요한 원인이 됐다. 자본은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과 정규직-비정규직 간 갈등, 세대 갈등, 직종 갈등, 노노 갈등을 유발하는 동시에 사회운동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등으로 폭력과 회유를 통해 전체 운동의 단결력을 약화시켰다. 자본의 무제한적 성장 추구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회운동의 힘과 민주적 통제력이 약화되자, 국가 권력과 자본의 결속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 성장의 동력은 사회를 파괴하는 동력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빨라졌다.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빨라진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자는 살아남고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빨라진다는 말은 지구의 물질 자원이 상품화되었다가 폐기되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는 의미다. 


1990년대 공장식 축산업이 급속히 발달하자 소, 닭, 돼지의 성장의 속도가 놀랍게 빨라졌고 사육 기간은 단축되었다. 기술 혁신이 거듭될수록 상품의 사용 주기는 점점 짧아지는 역설이 나타났다. 2007년 처음 출시된 아이폰은 지금 아이폰 13까지 나왔다. 거의 매년 새로운 모델이 나온 셈이다. 신모델이 출시되면 이전 모델은 구형이 된다. 스마트폰 평균 교체 주기는 2년 몇 개월로 3년을 넘지 못한다. 스마트폰 회사들과 이동통신사들은 이 주기를 더 단축시키려고 노력한다. 더 많이 더 빨리 쓰레기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 상품 회전 주기는 동물이나 물건에만 해당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용 주기’는 2년 미만이다. 인간도 더 빨리 ‘쓰레기’가 된다. 낙오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상품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압박이 전 사회적으로 강도를 높여 갔다.


이 시기 탈학교, 왕따, 청소년 범죄와 자살률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인간 자원으로부터의 추출의 강도 및 속도가 강화된 것과 분명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90년 내가 다니던 대학 앞에는 24시 편의점이 생겼다. ‘7시부터 11시까지’ 영업 시간을 혁신했던 일본계 편의점 ‘세븐 일레븐’보다 훨씬 더 혁신한 한국 재벌이 만든 편의점은 24간도 아니고 25시간 문을 여는 ‘LG25’였다. 텔레비전 방송 시간이 점점 연장되더니 24시간 방송이 돌아가고, 온갖 물건을 팔고 전화기 버튼만 눌러 주문할 수 있는 홈 쇼핑 방송이 심야에도 나왔다. 대치동 학원가는 밤늦도록 불야성을 이루고 밤 11시부터 교통 체증이 피크를 이뤘다. 노동 시간은 연쇄적으로 길어졌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의 일터와 삶터는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어 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러다이트 시대의 방직 공장 노동자에서 ‘타이밍’을 먹고 잠을 쫓던 전태일 시대의 봉제 공장 노동자들을 지나,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콜 수 경쟁에 독촉당하는 콜 센터 노동자들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성들의 생리통이 점점 심해지고 아이들이 아토피로 몸을 긁을 때,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에 쌓인 피로와 분노를 친구와 동료를 향해, 또는 자신을 향해, 또는 누구든 내가 갑질할 수 있는 약자를 찾아서 뿜어낼 때, 그때가 탄소가 대기 중으로 펑펑 뿜어져 나오던 그때였다. 


왕따, 집단 괴롭힘, 직장 괴롭힘 같은 말은 유럽에서는 1970년대, 일본에서는 1980년대에 생겨났고,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쓰이기 시작해서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사회 현상으로 대두되고 용어가 공식화되었다. 연쇄 살인이나 ‘묻지 마 범죄’ 같은 이상 행동 범죄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아이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죽고’, 중대 범죄 사건이 늘어나기 시작하던 그때, 나는 ‘학벌없는사회’를 만들고, 학교 밖 청소년 활동을 시작하고, 왕따와 학교 폭력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이런 문제들을 교육-정치-노동과 연결하여 생각했지만 그것을 생태적 문제와 연결하여 생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하에서 가속화된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 차별과 혐오, 봉쇄된 미래가 만들어 낸 장기 억압과 억압된 신체들의 반생태적 삶은 같은 시기 폭발적으로 증대한 사회적 폭력성과 직접적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1990년대 이후 시민 사회운동의 분화 속에서 교육운동과 환경운동은 각자 영역에서의 이슈들에 집중하여 투쟁하였고, 대안교육이나 공동 육아 정도에서 접점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교육운동 안에서 민주주의와 생태주의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교육을 노동, 정치와 연결하여 사유하지 않고서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고 이어 가자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라는 커다란 이야기 속에 앞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연결하고 담아내자고 말하고 싶다. 사회의 파괴를 자연의 파괴와, 인간이 겪고 있는 문제를 비인간 동물과, 북반구의 위기를 남반구의 역사와, 도시의 에너지를 농촌의 파괴와 연결하고 작은 이야기들을 큰 이야기로 연결할 때에만 우리는 지금 일어나는 변화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럴 때에만 우리를 지엽적인 문제들에 매몰시키고, 정치적 행동을 개인적인 소비 실천으로 인도하며, ‘숫자의 달성’을 위해 시민을 동원하고, 행동하려는 의지들이 사회 변혁의 힘으로 세력화하지 못하도록 좋은 정책과 좋은 기업의 파트너이자 캠페이너 정도의 ‘좋은 시민’에 머무르게 하려는 지배 권력의 통치술에 속지 않을 수 있다.


기업과 정부는 ‘전환’의 의미를 사회를 완전히 바꾸는 변혁transformation이 아니라 교체나 이행transition으로 고착시키려고 한다. 똑같이 ‘전환’이란 말을 쓰면서 그다음에 자본의 이행 전략을 구체화한 개념들을 주렁주렁 붙임으로써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전유한다.


사회 전환, 체제 전환 대신 에너지 전환, 동력 전환, 연료 전환, 산업 전환이라는 틀에 전환의 상상력을 가두고, 탈탄소, 탄소 중립 같은 탈정치화된 용어로 목표를 제시하면서, 여기에 다시 보다 구체적인 정책 대안들, 이를테면 탄소세, 탄소 국경 조정, 탄소 배출권 거래제 같은 시장 조절 정책 그리고 수소 에너지 개발이나 탄소 포집 기술 같은 기술주의적 대안들을 주렁주렁 달아서 하나의 종합 패키지로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시장은 바꾸지 않고, 사회와 자연을 바꾸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은 학교교육, 시민교육, 미디어교육을 통해 확산된다. 그 속에서 전환은 계속 파국과 구원, 이행과 교체의 서사로 재생산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여전히 인간 중심주의, 기술 중심주의, 시장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를 변화시켜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이 아니라 기후를 변화시켜 사회 변화를 막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거짓과 기만을 폭로하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환’이란 기표에 그와 반대의 이야기를 주렁주렁 달아야 한다. 노동자, 농민, 청소년, 청년, 여성, 이주민, 난민, 빈민, 비인간 동물 등 기후 위기 당사자와 최전선 공동체의 목소리들이 ‘해시태그’처럼 주렁주렁 달릴 때 전환의 개념을 전유당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이미 수없이 많이 들었고, 각자의 삶 속에서 갖고 있다.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 봤던 ‘돈보다 생명’을 ‘교육의 생태적 전환 - 돈보다 생명이다!’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교육의 생태적 전환 -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로 연결하는 문장을 만들어 보자. 죽은 문장이 어디서 살아 있는 힘으로 전환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체제 전환’이란 구호도 전환의 의미가 뭉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후정의운동을 통해 재전유된 것이다. 보통 “기후 변화가 아니라 체제 변화 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 ”라 표현되는 기후정의운동의 구호를 “기후가 아니라 체제를 바꾸자”로 다시 번역하는 것도 그런 의도이며, 이는 주류 기후 담론이 ‘체제가 아니라 기후를 바꾸려는’ 것임을 폭로하는 역할도 한다. 그레타 툰베리와 청소년 활동가들이 이끌고 있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 Fridays for Future: FFF ’ 운동은 오는 3월 25일 글로벌 기후 파업에서 ‘이윤 말고 사람(#peoplenotprofit)’을 모토로 내걸었다. 3.11과 4.16의 시간 속에서 ‘돈보다 생명’과 함께 가장 많이 외쳐진 구호가 ‘이윤보다 사람’이 아니던가. 


우리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 이윤보다 사람이다.’ 글로벌 기후 거버넌스 체제가 에너지 체제, 산업 체제를 적극 말하기 시작하면서 체제 전환의 의미까지 두루뭉술해지자 지난해 글로벌 청소년기후행동은 ‘체제 전환’에서 나아가 아예 ‘체제를 전복하라(#uprootthesystem)’를 내걸고 싸웠다. 나는 생태적 전환은 생태적 저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다시 이어진다. 전환은 전복이다. 전환은 저항이다.


나는 최근에 ‘탈석탄’을 말할 때는 ‘석탄 발전소 퇴출’에서 끝내지 않고 반드시 발전 노동자와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 하기로 마음 먹었다. 농촌에 살면서 도시민들이 잘 체감하지 못하는 기후 변화와 그걸 감당해 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농적 사유와 감각의 복원이고, 농촌과 농민에 대한 자본의 침략과 수탈에 맞서는 것이고, 인간을 상품으로 길러 내고 교육과정을 기업에 납품하는 상품 생산 장치로 만드는 데 저항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교사와 학생이 함께하는 ‘금요일의 학교 파업’ 이 조직될 수 없는지도, 무엇이 우리의 몸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 이토록 감금하고 있는지도, 자연에 대한 감각과 사회에 대한 감각의 상실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세계에 대한 공통 감각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도,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화두를 안고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이고 이어지길 바란다. 지금은 과학과 경제학, 특히 지구공학과 환경-시장경제학의 관점에 경도된 주류 기후 담론의 흐름을 보다 급진적인 상상력으로 전복시킬 정치적 상상력과 사회학적 상상력 그리고 시적 상상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할 때다. 지금까지 교육운동은 늘 그 세계관의 싸움이지 않았던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구호 아래 이제 우리의 교육학적 상상력을 주렁주렁 펼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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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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