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호[특집] ‘탈자본 교육’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강수돌)

202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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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자본주의 교육, 어떻게 반대해야 하는가


‘탈자본 교육’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강수돌

ksd@korea.ac.kr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현실은 그렇다 치고 후손들에게만큼은 더 나은 세상이 되면 좋겠다”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과연 ‘더 나은 세상’이란 무엇인가? 또, 아무리 좋은 세상을 만들어도 그 세상을 이어받는 ‘후손들’이 시원찮다면? 그래서 내 화두는 두 가지다. 첫째, 과연 현실적 삶의 고통에 대한 근본 대안은 무엇인가? 둘째, 동시대인, 특히 후손들은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나?


교육 영역은 이 두 질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한편으로, 교육의 내용과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인간형이 나오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 사회 구조(좋은 세상)조차 결국은 사람이 주체적으로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극도의 경쟁과 각자도생, 능력주의, 기술· 물질·황금만능주의, 사회·경제 양극화 속에서 높은 스트레스 지수, 우울증 발병률과 자살률을 기록하는 것도 모두 이런 문제와 연관된다. 물론, 시민 사회 내지 사회운동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모순적 현실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온갖 사회운동이 부단히 이어진다. 교육운동 역시 그렇다.


이 글에서는 주로 2000년대 이후 민주·진보적 교육운동이 기득권 동맹 주도의 신자유주의 시장화에 저항하는 가운데 놓친 게 뭔지 성찰하면서도, ‘자본주의 교육’을 보다 근원적으로 고찰하려 한다. 이는 상기한 바, 두 가지 화두, 즉 과연 어떤 세상을, 또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과정이다.



두 마리 토끼 잡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는 토끼 두 마리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는 토끼몰이를 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으면 할 만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토끼 한 마리 잡기도 만만찮은데 굳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일단 하나만 잡아도 여럿이 함께라면 자연스럽게 둘 잡는 건 시간문제일 뿐!


교육에서 두 마리 토끼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성’과 ‘실력’이다. 물론 이들은 실질적인 사회관계(상황, 맥락) 속에서 구체화한다. 예컨대 박정희식 개발 독재 상황에서 인성이란, 근면, 자조, 협동과 같은 새마을 정신, 또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 애족심 따위를 뜻했다. 또, 당시 통용된 실력이란 초·중·고 시절 무수한 시험에서 높은 점수와 등수를 기록하는 것, 나아가 ‘SKY 대학’ 진학, 각종 국가 고시 합격, 특히 고등 고시(사법 고시, 행정 고시, 외무 고시) 합격을 의미했다. 물론 이런 내용과 방향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온세상을 휩쓸면서 우리 교육계도 신자유주의 시장화의 덫에 걸린다. 이 맥락에서의 실력이란 세계화와 정보화 물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국제 경쟁력, 영어 능력, 창의성, 소프트웨어 실력, IT(정보 기술)를 활용한 신지식인, 시장 불확실성 속에서의 문제 해결력 등을 뜻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인성이란 개방성, 다양성, 적응성, 유연성 등을 뜻한다. 따라서 제도권 교육도 이런 내용의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했다.


이런 흐름에 대해 교육운동은 제도권 안팎에서 나름의 대안을 상상하고 실현하려 분투했다. 제도권 안에서는 1989년 5월 28일, 전국 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세웠다. 그러나 그 직후 7월 1일, 문교부가 전교조 교사 1,527명을 파면·해임하는 바람에 교육운동은 위기에 내몰렸다. 그러나 굴하지 않는 교육 민주화 투쟁으로 1999년 7월 합법화 (「교원노조법」)를 쟁취했다. 다시 박근혜 정부가 2013년 9월 법외 노조로 규정하고 목을 죄자 투쟁을 벌여 2020년 9월 재합법화를 쟁취했다.


동시에 전교조는 교사의 정치 활동 합법화, 수능 절대 평가화, 대학 무상 교육 등을 내걸고 투쟁해 왔다. 같은 맥락에서 전교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전국학교비정규직노조,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등 20여 단체는 2020년 11월부터 ‘대학무상화·대학평준화 운동’을 추진했다. 현행 9등급 상대 평가(영어, 한국사 과목은 절대 평가)인 수능을 전 과목 절대 평가 방식으로 바꿔 합격/불합격만 가리자는 것, 일반 사립대를 공영형으로 전환하고, 공동 선발, 공동 학위 수여를 하자는 것, 대학 서열을 없애자는 것이다. 나아가 연간 약 12조 원 수준인 대학교육 비용도 무상화하자고 요구했다. 그 밖에도, 그간 교육운동은 무상 급식, 무상 교복, 반값 등록금, 사교육 철폐, 대입 전형 다양화, 자사고나 특목고 반대 등을 통해 교육의 시장화나 신자유주의화에 맞서 왔다.


한편, 제도권 내에서의 교육 혁신을 위한 교육감 직선제 운동도 활발해졌다. 2007년 부산에서부터 교육감 주민 직접 선거가 실시됐다. 그러나 직선제로 뽑는다고 해서 꼭 교육 혁신이 되는 건 아니었기에 이후 혁신 교육감 내지 진보 교육감 운동이 커졌다. 마침내 2018년 6월 지방 선거에서 17개 시·도 중 14개 시·도에서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었다. 진보 교육감들은 혁신 교육, 행복 교육, 무지개 교육 등 그 이름은 다르지만 교육 혁신을 위해 진력 중이다.


제도권 밖에서는 대안교육운동이 199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1997년 설립된 산청 간디학교다. 물론, 그사이에 전국 곳곳에 다양한 대안학교들이 생성되어 현재 대략 100군데를 넘는다. 서울·경기 지역에서만도 고양자유학교, 발도르프학교(서울, 경기 광주/성남/안양/양평/청계), 더불어가는배움터길, 동림자유학교, 수지꿈학교, 벼리학교, 맑은샘학교, 수원칠보산학교, 볍씨학교, 산돌학교, 산학교, 불이학교, 꿈틀자유학교, 무지개학교, 파주자유학교, 하남꽃피는학교, 산울어린이학교, 한걸음학교, 닻별학교 등이 있다. 학교마다 특성은 다소 다르지만 대체로 이들은 사랑과 자율성, 공동체의 가치를 중시하며 아이들의 자유로운 성장을 돕는다.


제도권 밖의 대안학교가 ‘특성화 학교’ 형식으로 교육 당국의 인가를 받으며 제도권 속으로 들어간 경우도 있고, 기존 공립 학교가 혁신 교육의 일환으로 제도권 밖의 대안교육적 요소를 대폭 수용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행복한 성장을 중시하는 방향성 안에서 제도권과 비제도권이 수렴할 필요가 있다. 최근 고조된 혁신 교육감 물결도 다양한 교육 혁신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제도권 안이건 밖이건 참된 교육을 실천하기란 정말 힘겹다. 제도권 밖의 대안학교들은 늘 생존 문제와 씨름하고, 제도권 안의 혁신학교들은 변화의 한계와 씨름한다. 결국, 이는 인성과 실력이라는 ‘두 마리 토끼’ 문제로 귀결된다. 더 중요하게는, 그런 인성과 실력이 과연 무엇(누구)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국, 제도권 안팎을 불문, 근본 장애물은 역시 대학 입시 및 노동 시장이다.



대학과 노동 시장 위계 속에서의 개혁?


아무리 대안교육이나 혁신 교육을 외쳐도 부모나 교사들이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자발성과 활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 입시나 취업 전망으로 불안감이 엄습할 때이다. 전자는 주체의 문제고 후자는 제도의 문제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네 삶을 꽁꽁 얽매고 있는 제도, 특히 대학과 노동 시장이 크게 봐도 상위 10~20%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과연 누가 개성을 맘껏 펼치며 자유로운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자발성과 활기가 저조한 것이 그들의 탓이 아니란 말이다.


그간 민주·진보적인 교육운동이 신자유주의(개방화, 탈규제, 민영화, 유연화 등)나 시장화(상품화) 반대를 내세우며 ‘혁신’을 외치긴 했지만, 대학 입시나 노동 시장의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작동하는 대학 및 노동 시스템 때문이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노예제나 봉건제처럼 우리들 삶을 지배하는 자본제 사회에 대한 근본 성찰 없이는 그 어떤 혁신도 헛발질로 끝난다. 이 문제를 크게 대학 서열화, 노동 차별화, 자동 주체화로 나눠서 살펴보자.


첫째, 대학 서열화! 《탈학교 사회》를 쓴 이반 일리치처럼 근본적으로 보면, 행복한 삶을 위해 과연 대학 진학이 필수인지 따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는 대학 공부조차 사회적 평균으로 수용되기에, 여기선 서열(위계)화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서열화에 찬성할 이는 없다. 그러나 자본의 관점에서는 서열화가 중요하다. 하나는, 어차피 모든 ‘인적 자원’이 같진 않으니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상위 그룹(엘리트)을 추려야 한다는 논리. 다른 하나는, 서열화의 기본 틀 위에서 치열한 경쟁을 시켜야 각 인적 자원의 잠재력이 최대로 발휘될 것이라는 논리. 이 두 논리의 공통점은 사람 사이에 연대와 소통이 아니라 질투와 분열을 조장한다는 것, 이를 통해 전체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 착취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경쟁은 지배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통찰을 진지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대안으로, ‘개성 있는 평등화’를 제시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가진 다양한 잠재력을 개성 있게 발휘하도록 돕되, 개성들 사이엔 서열과 우열을 허락지 않는 것! 대학 서열화가 사다리 구조라면, 개성 있는 평등화는 원탁 구조다. 초· 중·고는 물론 대학에서조차 학생이 원탁에 둘러앉아 교육 문제, 취업 문제, 사회 경제적 불평등 문제, 코로나19, 기후 위기, 자원 고갈, 에너지 문제, 미세 먼지, 쓰레기 문제 등 인간 삶의 복합적 위기에 대한 인간적 대안, 생태적 대안을 찾는 것이 교육과 학습의 내용이 돼야 한다. 자본과 권력을 동시에 넘어서려는 문제의식이 없는 한 그 어떤 운동도 헛발질로 끝난다.


둘째, 노동 차별화! 같은 맥락에서 노동 시장에서의 차별(성별, 연령별, 규모별, 인종별, 고용 형태별, 능력별, 노조 유무별 등) 역시 자본 입장에서는 필요조건이다. 왜 그런가? 하나는 비용 문제, 다른 하나는 통제 문제다. 노동 시장이나 노동 과정에서 차별과 경쟁을 강화시켜야 자본 입장에서 비용은 줄고 효율은 오른다. 더 중요한 점은 차별과 경쟁을 통해 분할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노동자 개인은 경쟁에서 살아남기와 승진하기를 삶의 목표로 삼는다. 그러려면 아래로 ‘갈’구고 위로 ‘비’벼야 하는, ‘갈비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경우에도 이런 경향성 자체를 버리기 쉽지 않다. 말로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치지만, 현실적으론 노동자 간 연대가 힘든 까닭이다. 그러나 노동자에겐 연대와 소통이, 자본에겐 분할 통치가 절대적이다. 이 적대성의 지점을 정확히 읽어 내야 연대와 소통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한 아이가 일정한 공부를 한 뒤 자본주의 노동 시장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어야만(노동력 상품화를 해야만) 생계가 해결되는 프레임의 정당성 자체를 질문하는 것! 요컨대, 우리는 경쟁적인 노동력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격체로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어야 비로소 대학이나 노동 시장의 굴레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갈처럼 “노예 해방을 위해서라도 먼저 노예 스스로가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런 면에서 현재 우리는 처음부터 자본 종속적인 삶을 전제로 학교와 노동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음을 봐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초·중·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 나아가 대학 중에서도 ‘일류 대학’에 진학한다는 것, 이어 ‘일류 직장’에 취업한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는 물론 개인적으로는 놀라운 성취이지만, 사회적으로 그것은 차별적인 노예 제도에 종속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의 교육과 노동은 ‘(삶의) 자유’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임금) 노예’를 위한 것인가?


셋째, 자동 주체화!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측면이다. 칼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에서 화폐와 상품이 서로 교환되는 과정을 지속하면서 스스로 자본의 몸(가치)을 불려 주는 “자동 주체(ein automatisches Subjekt)”로 변신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과연 화폐나 상품과 같은 사물이 어떻게 스스로 주체가 되는가? 결국, 화폐나 상품은 노동자나 소비자, 즉 사람을 매개로 자본 증식 운동에 참여한다. 역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리들 인간은 노동, 가치, 상품, 화폐 등을 매개로 자본의 자기 증식을 돕는 역할을 하며 산다. 우리는 겉보기엔 인격체의 얼굴을 하고 능동적으로 사는 듯 보이나, 실은 자본의 시스템을 원활하게 작동·유지하는 톱니바퀴 역할을 하며 피동적으로 살 뿐이다. 이런 삶의 실상이 곧 “자동 주체”다. 만일 ‘별 생각 없이’ 산다면, 우리는 상품, 화폐, 노동, 가치에 갇힌 자동 기계로 작동(느낌, 사고,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는 제대로 산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매번 헛발질!


이를 좀 쉽게 보자. 갓난아기 때는 모든 아기가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지만, 아이가 커서 일단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가치 기준이 뒤틀린다. 부모건 교사건 높은 평가를 중시하고 우등생이 되길 바란다. 아이는 어른들 눈치를 보며 자란다. 공부를 잘해야 향후 일류 학교에 진학하고 일류 직장에 취업하기 때문. 고생하는 어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아이는 죄책감을, 어른은 배신감을 느낀다. 설사 어른들 기대에 부응하더라도 그 방향이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공해도 실패다. 다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취업 후는 어떤가? 월급을 받고 저축이나 투자(또는 투기)를 하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온갖 상품을 듬뿍 사고 소비(생활)한다. 은행 융자를 끼고 집을 사는 경우, 달마다 융자금을 갚아야 하니 성실 노동이 답이다.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아도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행복을 느끼기보다 더 많은 화폐와 상품을 소유하기 위해 더 많은 노동을 감수한다. 경쟁력 있는 노동력, 생존과 승진에 목매는 노동력! 설사 나를 고용한 자본이 인격이나 건강을 파괴해도 참고 참다가 결국 쓰러지기도 한다. 아니면, 자본이 더 이상 나를 필요치 않다고 해고하면 “해고는 죽음”이라며 결사 항쟁한다. 다시 고용되면 성실히 노동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다시 자본의 몸을 불리는 순환을 지속한다. 만일 실패하고 실패하면, 좌절과 절망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감행하기도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본이 “쓸모” 있다며 고용을 존속하는 한에만 자기 가치를 느끼며, 반대로 자본이 무용 지물이라며 해고하는 경우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이런 모습이 곧 우리의 서글픈 “자동 주체”다. 과연 우리 교육의 실상은 이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탈자본 교육’이 지향하는 내용과 형식


교육을 포함해 모든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법은 다양할 수 있으며 다차원적이기도 하다. 일례로, 학교생활이 재미없다고 하는 아이가 있다 하자. 이 경우, 친구 관계(예, 왕따나 폭력)가 문제일 수도 있고, 학업 성적이나 열등감이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수업 방식이 따분할 수도 있다. 이들의 해법은 교우 관계를 원만히 하는 것, 학습에 대한 흥미를 북돋는 것, 수업을 재미있게 디자인하는 것 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해법은 학교생활을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변화시킬 순 있지만, 대학 입시와 평가 제도에서 오는, 보다 심층적인 스트레스는 해소하지 못한다. 따라서 대입 전형을 다양화하고(예를 들면 학종 내지 특기 적성 반영) 절대 평가를 전면화하며, 심지어 전국 대학을 K1에서 K100 대학까지 평등화함과 동시에 무상 교육을 전면화하는 것이 보다 고차원적 해법이 된다. 물론 K1에서 K100 대학 사이에 서열화나 선입견이 없어지려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체제가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자기 개성과 특기를 살리면서도 조금만 노력하면 ‘합격선’을 통과, 대입 자격을 얻는다. 1지망에서 5지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면 누구나 가고 싶은 대학에 가서 배우고 싶은 걸 배울 수 있으니, 평소에 (초·중·고나 대학 모두) 학교생활도 재미있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문제는 있다. 그것은 학교 졸업 이후에 노동 시장에 나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취업)해야 하고, 또 학력 간, 전공 간, 능력 간 차별 구조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취업을 해야 먹고살 수 있고, 취업을 해도 더 잘 대우받는 곳에 가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취업 강박증과 우등 강박증이 부모나 교사로 하여금 아이들을 달달 볶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니 근본 문제는 결국 취업 강박증과 우등 강박증을 심층에서 조장하는 자본주의 삶의 방식 그 자체다. 만일 우리가 자본의 등가 교환 법칙(사물들을 동일한 가치끼리 교환하는 것)과 노동 착취 법칙(노동력의 가치인 임금보다 더 많은 잉여 가치를 자본이 수취하는 것)에 종속되지 않고 그를 넘어선다면,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일을 상호 소통과 협력으로 해결하면서도, 모두가 생계 해결은 물론 갈수록 삶의 질을 고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된다. 그러면 마침내 노동력 상품화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격체들이 조화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될 것이다.


‘탈자본 교육(EBC, Education beyond Capital)’이란 바로 이런 내용과 지향성을 갖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교육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더 이상 사람을 노동력으로 보지 않고 인격체로 보게 된다. 그래야 차별적 시선도 극복하고 모두가 모두를 존중하며 사는 세상이 열린다. 이제 교육이란 자본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것(직업 훈련)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 나아가 실제로 그런 세상을 만드는 실천에 동참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의 성장이 돈벌이를 위한 도구(자본을 위한 ‘자동 주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삶’ 이 되는 것, 즉 교육과 삶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는 것, 바로 이것이 ‘탈자본’ 교육의 핵심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토론이 온 세상에 무수히 확산돼야 한다.



두려움과 강자 동일시를 털어 내고


누구나 자기 자녀는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설사 부모 자신이 별로 행복하지 않더라도 자녀만큼은 행복하길 희구한다. 정당한 소망이다. 그러나 삶의 현실은 척박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들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힘들다. 왜 그런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어른들이 돈만 잘벌면 진정 행복할 것인가? 사람이 산다는 것, 행복하게 산다는 것, 지속 가능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 이것은 공부나 돈의 문제로 해결되지 않는, 보다 깊은 차원을 내포한다. 그것은 작게는 인간관계의 문제요, 크게는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친구나 동료끼리 소통하고 협력하기보다 경쟁하고 질투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 경쟁 회사보다 더 막강한 경쟁력으로 시장에서 싸워 이겨야 내 생존이 보장되는 관계, 노동력을 포함해 상품을 팔고 돈을 벌어야 생계가 영위되는 관계, 아래로 ‘갈’구고 위로 ‘비’벼야만 조직에서 생존하고 위로 승진할 수 있는 관계들 속에서 과연 그 누가 지속적으로 행복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교육과 생활이 모두 행복하려면 노동력 상품화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관계, 노동력 간 경쟁이나 차별, 억압, 착취가 없는 관계를 만들어 내야 하고, 그런 전제 위에서 교육 시스템과 내용을 전반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요컨대, 노동, (교환) 가치, 상품, 화폐, 자본, 경쟁, 이윤 등의 범주 안에서 작동하는 사회 구조를 뛰어넘는 새 사회(생태공동체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런 가치관과 전망을 가진 주체들이 새로운 물결을 이루며 넘치도록 흘러나와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필요한 새 범주는 공감과 소통, 우애와 환대, 연대와 협력, 나눔과 공존 등이다. 더 이상 노동, 가치, 상품, 화폐 등이 우리를 분열하고 파괴하게 둬선 안 된다. 아니, 그런 파괴의 과정에 더 이상 동참해선 안 된다. 이게 ‘탈자본 교육’의 근본이다.


그러나 이런 근본 대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가? 오히려 두려움과 거리낌을 느끼는 이들이 더 많다. 진정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기 위한 교육과 생활 방식을 대안적으로 제시해도 이를 진심으로 반기기보다는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한다.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에 재빨리 적응해, 그 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근본 대안’을 추구하던 세력들이 자본과 권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죽임까지 당하는 걸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최강자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동일시한다. 그 외는 대안적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체제 동일시). 또, 무수한 시험들과 경쟁 속에서 대다수는 ‘강자 동일시’ 심리를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즉, 기존 시스템에서 내가 승자라면 승자로서 누리는 기득권의 달콤함을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고, 패자라면 (사회적 경쟁과 폭력의 희생자로서 느끼는) 열등감이나 수치심에 휩싸여 자식만큼은 승자 그룹에 오르게 만들기 위해 진력을 다한다. 이게 곧 ‘강자 동일시’ 심리다.


요컨대, 폭력과 트라우마, 그리고 두려움, 이것이 우리의 느낌과 사고, 선택과 행동에 심층적인 장애물이다. 따라서 ‘탈자본 교육’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시민 사회, 사회운동) 스스로 깊은 마음속에 지닌,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털어 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삼삼오오 둘러앉아 마음을 열고 시작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두려움의 고백’이다. 그래야 주체의 변화가 가능하고, 주체가 변해야 대안도 열리기 시작한다. 과연 나는, 우리는 무엇이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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