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리뷰] 어린이를 존중하는 일, 세상 모든 존중으로 나아가는 일 | 안정선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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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어린이를 존중하는 일,  

세상 모든 존중으로 나아가는 일



원은정 씀, 《어른들의 시선이 아이들의 현실이 됩니다》, 착한책가게, 2024



안정선

nuribyul@hanmail.net

서울 경희중 교사



사람들은 ‘내 아이’의 인격과 인권은 존중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많은 학생을 만나야 하는 교사, 다른 집 아이들을 학교폭력의 가·피해 관계로 만나는 학부모,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하는 동네 아저씨, 아줌마일 때에는 그들이 이제 겨우 누리게 된 ‘어설픈’ 인권을 불편하게 여긴다. 우리가 진정 어린 사람들에 대해서 인권을 존중하는 어른, 공동체, 국가가 되었다고 큰소리치려면 당신이 생각하는 ‘어린’ 사람들의 인권이 내 아이, 남의 아이를 구별하지 않고 고루 적용될 때, 당신 마음에서부터 그렇게 적용하고자 할 때 가능할 것이다. 

동료 교사와 대화를 나누는 어느 점심시간, 자신을 괴롭히며 권리만을 주장하는 한 학부모에 대한 성토가 식사 시간 2/3를 차지했다. 그 대화가 좀 길어질 무렵 나는 그 선생님의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의 안부를 물으며 자연스럽게 주제를 돌려 보았다. 아무리 말이 없는 사람도, 아무리 사이가 데면데면한 사람도 “요즘의 아들/딸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보이며 어떤 감정 상태인가요?” 하고 자녀의 안부를 물으면 얼굴이 해사해지며 말이 많아지고 말투가 다정해진다. 말하는 이도 즐겁지만 듣는 나도, 오래전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을 추억하며 행복해진다. 하지만 마음을 좀 편하게 하려 물었던 그이의 자녀 이야기는 즐거운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자녀가 유치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해서 속상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는 “유치원 선생님들이 아이한테 너무 무관심하고 건성건성 일하는 거 있죠? 제가 전화 걸어서 따지려다가 참았어요” 하는 게 아닌가. 바로 2분 전, 저녁 늦게 카톡을 보내 자기 일상을 침범하여 불쾌하고 불편했다는 그 이야기 속의 학부모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 심지어 동종 업계(?)에서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는 교육 동지일 자기 자녀의 교사를 두고 이야기하는 모습은 놀라웠다. 학교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인데 아이 이야기가 나오자 머리 위에 칼날이 번뜩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혹시 내 아이들이 자랄 때 저런 학부모의 마음을 갖지는 않았던가 돌아본다. 거울 치료다.



그런 것에 놀랄 자격이 있을까?


플라톤이 그랬단다, 민주정이 싫다고. 민주제 사회에서는 노예가 주인에 맞먹으려 하고 여자가 남자에게 큰소리를 치며 어린이가 어른을 조롱하고 동물들조차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걷는다면서. 플라톤이 보수주의자들에게 추앙받고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물론 그것이 플라톤 철학의 전부는 아니지만, 저 글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곰브리치 세계사》에서 ‘계몽주의’ 시대가 열릴 때의 선언문을 읽었을 때와 맞먹었다. ‘아이들은 매질을 해야 한다. 여자들은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 농부는 일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니 불평해서는 안 된다…… 하던 시대는 갔다. 이제 새로운 계몽의 시대를 맞아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그 선언이 놀라웠던 게 아니라 일찌감치 매우 합리적인 세계를 열었던 유럽조차 17, 18세기 계몽주의 이전 시대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동물처럼 취급했다는 것이다.

하긴 그런 것에 놀랄 자격이 있을까? 같은 시기 조선의 시대상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교사가 된 20세기 후반, 아니 2012년 체벌이 금지되기 전까지의 학교 모습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얼마 전 중1 학생들과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읽고 영화를 볼 때였다. 6학년 담임 선생(최민식 분)이 엄석대의 악행을 발견하고 학급 아이들 모두를 때리는 장면이 나오자 어떤 아이가 “폭력 교사다!”라고 외쳤다. 당연히 ‘그 시대는 다 그랬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학교 체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21세기 대한민국, 아직도 어디선가 아이들이 부모에게 맞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지금 여기, 우리가 플라톤의 시대나 계몽주의 이전 시대의 유럽을 야만의 시대라 조롱할 수 있을까.



폭력은 사실 매우 교묘하게 스며든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좋은 읽을거리는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할 것이 많은 ‘문제작’이기 때문에 독서 시간에 더러 읽힌다. 오독의 위험이 있어서 독후 활동과 영화 비교하기를 함께 한다. 엄석대라는 독재자를 해결하는 대안이 나약하고 비겁한 한병태도, 폭력으로 교실을 평정한 6학년 담임 김 선생도 아니어야 하기에 다른 대안과 전망을 토론으로 찾아야 하는 책 읽기이다. 영화는 그나마 조금 낫다. ‘영팔이’라는 존재가 대안(?)을 조금씩 말하게 함으로써 이문열 원작의 보수적 한계, 역사에 대한 냉소를 그나마 조금 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5학년 담임이 엄석대를 옹호할 때 그를 반박하는 논술을 써 보게 한다. 역사적 사례를 들어 ‘독재’에 기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말하게 한다. 아이들은 히틀러라든지 우리나라 군부 독재의 역사, 자신이 경험한 초등학교 시절 군림하려 들던 친구를 예로 들며 담임 교사를 논박해 본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영팔이’라는 존재를 원작 소설과 조금은 다른 캐릭터로 설정한 박종원 감독의 의중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엄석대를 보고 멋지다고 말하는 남자아이들에게 그를 독재자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토론하게 한다. 그리고, 시간이 되거나 중3쯤 수업이라면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을 읽고 두 작품을 비교하게 한다. 폭력은 사실 매우 교묘하게 스며든다. 인권은 침해된다고 느끼기 전까지의 시간이 길고 은근하고 집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다.



‘지도’가 아니라 ‘설득’ 혹은 ‘납득’


우리 학교 어떤 선생님이 수업을 마치고 와서는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학생을 야단친 이야기를 한다. 수업 태도가 좋지 않고 다른 학생들의 수업을 방해했으니 당연히 지적을 받고 지도를 받을 수 있다. 교사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 행동을 수정하도록 지시했지만 중1 개구쟁이는 “왜요? 왜요?” 이러면서 교사의 지도를 ‘흡수’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그런 태도를 지도하는 과정이 ‘지도’가 아니라 ‘설득’ 혹은 ‘납득’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교사는 학생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를 충분히 설명한다. 잘 이해한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 노력한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러나 설명과 설득의 과정이 충분하지 않고 노련하지 않은 경우나 거꾸로 아이가 설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경우(이해력이 떨어지거나 너무 산만하거나 대화의 문화를 가정에서 습득하지 못한 경우 등) 교사들은 ‘훈육’의 단계로 접어든다. 어른에게 단호하고 적절한 훈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다시, 그 교사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결국은 아이를 불러 호되게 야단을 쳐야 했다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지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큰소리도 못 내고 화도 못 내고, 이젠 아이들 눈치까지 봐, 내가” 그런다. 나는 답했다. “맞다. 관리자 눈치, 선배들 눈치, 동료 교사들 눈치도 보고 집에서는 배우자 눈치도 봐야지. 근데, 뒤집어 생각하면 눈치 보는 게 어때서? 눈치를 본다는 건 그 사람 마음을 살핀다는 거지.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면 상처받지 않을까,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잘 표현해야 할까, 생각하는 거지. 그건 눈치가 아니라 배려지. 그리고 아이들을 배려해야 하는 세상이 온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당신은 애들 눈치나 보는 선생이 된 게 아니라 학생들을 배려한 선생이었던 거야.”



‘존중’을 가르칠 뿐


가끔 무도한 사람을 만나 내 마음에 상처를 입는 날은 그가 나한테 함부로 대한 것처럼 나도 똑같이 ‘쎄게’ 대해 주지 못한 게 속상하기도 하다. 만약 어린 학생이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면 속상함은 배가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교사를 조롱하고 무시하고 대드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다만 그들과 싸울 수는 없다. 교사와 학생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동등하되 책임과 역할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잘 가르쳐야 한다. 싸우는 순간 동일한 사람이 되어 버리므로 조금 더 인생을 살았으며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어른인 교사들이 참으면서 지혜롭게 가르쳐야 한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내게 충분하지는 않다. 사실 나는 종종 전략적으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는 교사이다. 

다만 학생들에게는 ‘존중’을 가르칠 뿐이다. 잘못한 학생들과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가 그것이다. “나는 너를 아끼고 존중한다. 그런데 네가 아까 한 행동/말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속상했다/불쾌했다/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사과를 받고 싶다. 그리고 내가 너를 존중하는 만큼 너도 나를/다른 친구들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내 안의 폭력성을 돌아보는 일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좋은 사람인가. 당신은 좋은 부모인가, 당신은 좋은 교사인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면 “내가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 정도면 좋은 부모 아닐까요?”라고 말할 것 같다. 나는, 인간으로서, 엄마로서 내가 꽤 훌륭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교사로서는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폭력으로 ‘다스릴’ 때에도 힘든 길을 자초해 걸어왔기 때문이다. 매와 폭언 없이도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려 애쓰면서 학생들을 존중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노력이 당연한 시대가 되자 오히려 뒤처지는 교사가 된 듯한 기분이 들 때마다 억울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엊그제 ‘과연 나는 좋은 교사인가?’ 의문이 든 일을 겪었다. 

한 학생이 머리를 많이 길렀다. 앞머리가 눈과 코를 가릴 정도로. 학교에서는 두발을 단속하지 않지만 그렇게 머리를 기른 학생이 없었기에 매우 눈에 띈다. ‘여자 친구와 스킨십 잘하는 방법’이란 주제로 설명문을 쓰겠다고 해서 ‘설명문’다운 주제로 다시 생각해 보자고 권했던, 이성 교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다. 교무실에서 만난 그 아이의 머리는 덥수룩하다 못해 위험(눈앞이 안 보일 것 같았다)해 보여서 “○○군, 여자 친구 잘 사귀려면 머리를 예쁘게 해 보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쉬는 시간마다 매번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고 있을 만큼 개구쟁이이긴 해도 예의 바르고 상냥한 학생이었다. 지적을 받으면 “죄송합니다, 선생님” 하던. 그런데 그날 아이는 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 가슴이 너무 아픕니다” 이런다. 아마도 그 아이는 교무실에 들렀다가 여러 선생님에게 ‘머리’ 지적을 받았을 것이다. 비교적 친한 학생이라 스스럼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던 그 아이의 쓸쓸한 대응은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는 작은 조언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지적질’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는 그와 내가 평등하다고 생각하지만 대개 ‘우리는 평등하고 공평해’라는 생각은 더 많은 권력과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는 일


이 글에서 나는 ‘아이’와 ‘학생’을 섞어 썼다. 오래전 한 시사 주간지에 교육 칼럼을 연재할 때 그곳 기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 왜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쓰는지요?” “아이들을 그럼 뭐라 부르지요?”라고 반문하자 그는 “학생”이라 하면 되지 않느냐 한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명칭은 공식적이고 객관적이다. 관계는 명확하고 역할과 태도도 분명해진다. 하지만 ‘선생과 아이’가 되는 순간 존경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개입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관계의 학교를 바라고 선생 노릇을 해 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일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어른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를 극도로 피곤해하는 내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과 함께할 때 힘든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한 선배 교사는 “안 선생은 애들을 꽃이나 강아지 보듯 하네”라고 하셨더랬다. 물론 선배 교사는 ‘어쩌면 당신은 아이들을 그렇게 사랑스러워할 수 있지?’라는, 칭찬의 의미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어느새 교실에 머물기보다 얼른 교무실에 가서 쉬고 싶은 나이 든 교사가 되면서 그 말은 “당신은 학생들을 ‘사람’이 아닌 그저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로 여겼던 걸세”란 말로 해석이 된다. 교실에 오래 있으면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들어 얼른 교무실로 도망치듯 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나는 이제 비로소 학생들이 ‘아이’가 아닌 ‘사람’으로 여겨지나 보다, 혼자 쓴웃음을 머금은 적이 있다. 

말은 의식을 규정하고 명칭은 관계를 정립한다. 이제 아이들을 ‘학생’이라 부르며 적당히 멀어지고 어느 정도는 존중의 관계를 갖게 될 만큼 세월은 흘렀다. 어느 여성학자의 말대로 한번 이름 지어 부른 후에는 세상은, 역사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귀함을 대접받을 그 어떤 존재, 꼭 ‘학생’은 아니어도 좋지만 ‘아이’도 아닌 어떤 아름다운 이름으로 나의 배움의 동지들, 어리나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들을 부를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 《어른들의 시선이 아이들의 현실이 됩니다》의 저자도 그렇게 아동을 부르는 명칭을 바르게 하자고, 사랑이란 말로 멸칭조차 함부로 쓰는 그런 어른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라, 한다.



단지 교육이나 보육에 대한 주장이 아니다


《어른들의 시선이 아이들의 현실이 됩니다》은 어른을 위한 책이다. 설명하기보다 생각의 자리로 이끄는 다정한 책. 게다가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한다. 우리 학교 학생들과 함께 본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 나와서 반가웠고, 학부모 연수 때마다 꼭 보라고 권하는 〈늑대 아이〉도 반가웠다. 그리고 책에서 권한 영화 중 〈가버나움〉과 〈마이 리틀 히어로〉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어른들에게 권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면 생각지도 않았던 지점에 꽂히곤 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교과서에 실려서 학생들과 함께 봤지만 저자가 주목한 이 장면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영화에는 강아지 윌리를 훔쳤던 주인공 지소(초등학교 2, 3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강아지 윌리에게 “윌리, 내가 미안했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어. 너도 나와 마찬가지로 집이 필요한데 말이지. 미안……” 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지소의 ‘감수성’은 이러하다. 강아지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 그게 진짜 감수성이라고 저자는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의 말을 빌려 말한다. “감성은 내 마음과 나와의 관계이고 감수성은 타인의 마음과 나와의 관계이다.”

딸이 나와 페미니즘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처음에는 여성을 억압하는 것들에 화가 나서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고,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서 점점 이주민, 소수자, 약자의 관점으로 생각이 넓어지더니 동물권으로까지 나아가더라’고. 이렇게 관점이 넓어지고 성찰이 사유가 되고 그것이 쌓여 행동에 영향을 주면 철학이 되는 것이다. 아동의 인권을 논하는 일은 단지 교육이나 보육에 대한 어떤 주장이 아니다. 약자를 돌아보고 그들과 함께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지 내 삶의 방향과 태도를 결정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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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