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호[리뷰]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고, 어린이이며, 어린이일 것이다 | 송김경화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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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어린이였고,

어린이이며, 어린이일 것이다



김지은 외 씀,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교육공동체 벗, 2024



송김경화

layaire@icloud.com

극작가·연극연출가



2020년, 희곡을 쓰기 위해 아동·청소년에 관한 자료들을 찾고 있었다. 비슷해 보이는 정책도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지자체 등으로 흩어져 있어 혼란스러웠다. 행정 언어를 해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장 찾기 어려웠던 것은 아동·청소년을 대상화하지 않는 언어였다. 

어린이날, 수능 시험일, 크리스마스에 강제 소환되어 따듯함 같은 것을 보이고 사라지는 존재들. “상업적으로 ‘어린이’는 밑질 것이 없는 기획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어린이와 어린 동물을 동반한 정치인 사진이 늘어”(본문 227쪽)나지만 정작 아동·청소년이 살아가고 마주하고 있는 사회에는 별 관심 없다. (납·수은·비소가 검출된 용산어린이정원에 늘봄학교를 연 것을 보라! 어린이가 이미지 세탁소인가!) 아동 최선의 이익은 보호자의 책임으로 미뤄 두고서 염치없이 국가의 이익을 보장해 줄 미래 역량 초능력 인재를 오매불망한다. 아동·청소년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도구도, 비아동·청소년의 노후도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계 최고가 아니라 아이들이 모든 순간에 우선이 되고, 행복해지게 돕는 것이다.”(본문 270쪽)


대학과 취업 시장에서 서열화를 내재화하고 공정에 집착하는 2030에게 사회적 비판이 가해질 때, 나는 밤늦은 시각 대치동 학원 계단 벽에 기대서서 급하게 삼각 김밥을 입에 욱여넣던 수많은 초·중·고 학생들을 떠올렸다. (……) 대다수 어린이가 잘 자고 잘 먹고, 적당히 공부하고 충분히 놀며 자라났다면 지금 사회가 골머리를 앓는 여러 문제들은 이만큼 심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 변진경, 〈말랑한 어린이, 딱딱한 세상〉, 본문 193~194쪽

어린이에 대한 환대와 존중을 찾아보기 어려워 인터넷 세상을 찾아 헤매던 지난 날들이여, 어린이가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 화석으로 남을 책이 나왔다. 아동·청소년 현장의 목소리가 각각의 위치에서 각각의 목소리로, 다르지만 하나의 방향으로 담겼다. 제목 그대로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아동·청소년과 비아동·청소년 모두를 다독이는 책이다. 


특정한 집단을 분리하여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몰아넣는 것을 ‘당연시’하는 담론을 생산하는 권력의 이름은 ‘시설화’다. 노인-요양원, 장애인-거주시설, 탈가정청소년-쉼터, 미혼모-보호소, 돌봄의 사회적 배치를 ‘시설화’하는 돌봄 권력의 통치술은 ‘어린이라는 세계’에서도 작동한다. 편의점 구석, 교실 구석, 학원 구석, 방구석으로 ‘돌봄-구속의 일상화’는 점점 구석으로 내몬다. 구석의 문법들은 핑계를 만든다. 시간이 많이 들어가니까. 돈이 들어가기만 하니까. 위험하게 자꾸 돌아다니니까.

- 서한영교, 〈품의 민주주의〉, 본문 82쪽


12명의 저자들은 시설 사회에 구속된 아동·청소년인권을 구석으로 밀려난 이들의 구체적인 얼굴들을 통해 알려 준다. 그 고백은 어린이였던 나와 어린이 곁의 나를 헤집고 들춘다.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을, 아프고 서럽고 화나고 부끄러워 감춰 둔 기억을. 그리하여 지금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가 이렇게나 연결되어 있다고.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고, 어린이이며, 어린이일 것이라고. “어린 존재를 품고, 지금 여기에”(본문 104쪽)서 어린이라서 겪어야만 했던 차별 경험을 대물림하거나 재생산하는 일을 그만 멈추자고. 어린이 중에서도 더 연약하고 취약한 이들의 몸으로, 울음으로 세상의 문법을, 기준을 뒤집자고 제안한다. “어린 존재를 쉽게 단정하고 무시하는 일은 ‘어린 나’를 그렇게 대하는 것 아”니냐고.(본문 118쪽) 내 안의 “‘어린 나’”(본문 116쪽)를 기어코 불러 세운다.



어린이였던 나


나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당시에는 편모 가정이라 불렸다. ‘한부모’든 ‘편모’든 행정적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이 단어가 ‘어린 나’를 결핍이 있는, 결여된, 불운하고, 불행한 존재로 생각하게 했다. 학기 초에 받는 가정통신문이 그랬다. 가족 관계, 부모님이 하시는 일 등을 적어 내야 했는데, 늘 창피하고 부끄럽고 친구들이 볼까 봐 두려웠다. ‘아빠 없는 애’라며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들, ‘엄마한테 잘하라’는 조언들은 ‘엄마가 고생하니까’ 말 잘 듣는 착한 딸이 되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나는 어른스러워져야 했다. 소풍, 운동회는 말할 것도 없고 초·중·고·대학 입학식과 졸업식에 엄마는 한 번도 오지 못했다. 엄마는 자식을 사랑한 만큼 더 오래 더 많이 일했다. 부모님이 학교에 왔는지 교실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꽃다발을 들고 가족사진을 찍고, 웃으며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러 가는 ‘정상 가족’들 사이에서 콧잔등이 시큰거리고 서글펐지만 나는 늘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었다. 나는 오래 슬픔을 모르는 척했고, 없는 척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날에는 인근 초등학교에서 나 같은 애들을 몇 명 뽑아서 운동장에 모아 놓고 체육 대회를 열었다. 안 가면 선생님한테 혼날 테니까 친구와 우울한 얼굴로 다른 초등학교에 갔다. 부모 없는 애들 불쌍하다고 불러 모은 건가? 비정상과 빈곤을 전시하는 체육 대회에서 신이 난 건 얼굴도 모르는 선생님들뿐이었다. 나는 어서 집에 가서 어린이날 특집 만화 영화를 보고 싶었다. 친구들과 더 깊은 관계로 지내지 못한 것도 ‘정상 가족 아님’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들 때문이다. 친구들이 주말에 가족들과 뭘 했는지, 방학에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는지 말할 때, 적당한 리액션과 웃음으로 뭉개고 화제를 돌렸다. 나에게는 친구들을 흥미롭게 할 만한 서사가 없었다. 친구들이 반장 후보로 나를 추천하려 했을 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장이 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반장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장이 되어도 햄버거를 돌릴 수 없을 것이고, 엄마가 학급 일이나 부모회에 참여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런 건 스승의 날 선생님에게 꽃다발과 선물을 안겨 드릴 수 있는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내내 육성회비며 학비 등을 내지 않기 위해 편모 가정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노는 대신 학교 매점에서 일을 해야 했고, 급식비를 내지 않는 대신 배식을 해야 했다. 친구들처럼 유행하는 옷과 가방을 철없이 사 달라고 말할 수 없었고, 그런 내가 친구들보다 못하다고 느꼈다. 나는 학교 앞 떡볶이를, 영화관을, 노래방을, 놀이공원을, 그러니까 돈이 드는 많은 것을 체념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골라내다 보면 꿈도 함께 쪼그라졌다. 한부모가 빈곤에 빠지지 않고도 충분한 돌봄이 가능한 사회였다면, 부와 모가 사회의 기준이 아니었다면, ‘어린 나’는 ‘주눅 든 어린 나’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아동 최상의 이익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고 싶다. 지금까지 무엇을 했냐고. 왜 차별과 혐오를 내면화하도록 내버려 뒀냐고.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기 어려웠던 관계들, 미숙함이 들통날까 봐 꼭꼭 숨긴 채 질문을 삼키고 고군분투했던 신입 시절, 꼼꼼하고 완벽하게 일을 마무리하려는 기질, 특정 감정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중립의 순간에도 웃는 표정을 짓는 습관 같은 것에도 ‘어린 나’가 있다. 

- 배경내, 〈어린 존재를 품고, 지금 여기에〉, 본문 117쪽 


‘주눅 든 어린 나’의 슬픔은 ‘다른 나들’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배경내의 문장처럼, “결정권 없음이 인생의 출발점이고 결정권 획득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핵심 목표임을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인권 투사, 민주 투사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본문 108쪽) 여러분에게도 인권 투사 DNA가 있다. 장희숙은 입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한 명이 울기 시작하면 ‘파도를 타듯’ 아기들 사이에 울음의 물결이 출렁일 때”(본문 39쪽) 아기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어 여러 가설을 찾아보았다. 


제일 마음에 드는 건 ‘공감으로서의 울음’ 설이었다. 아기들이 따라서 우는 건 타인을 모방하는 ‘거울 뉴런’을 작동시켜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료를 어려움에서 구출하기 위한 집단행동이라는 것이다. (……) ‘아하, 동료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중이군.’

-  장희숙, 〈주기만 하는 사랑은 없다〉, 본문 39쪽


투사여,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여 동료를 어려움에서 구출하기 위한 울음 파도 버튼이 ‘어린 나’에게 있다. 내 안의 ‘어린 나’를 불러 세우자. 작고 구겨진 ‘어린 나’에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자. 토닥이고 쓰다듬어 주자. ‘어린 나’는 오래 사용하지 않은 울음 파도 버튼을 내밀 것이다. 어서 가서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내 동료들을 구출해 오라고.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멀쩡하게 잘 놀다가’ ‘한 명이 울기 시작하면 ‘파도를 타듯’ 울음의 물결이 출렁일 때’를 상상해 봤다. 우리가 아기의 언어를 회복하면 울음이 파도가 되어 도처의 인권을 옹호할 수 있지 않을까. 울음뿐인 아기들의 언어를 이해해 보려는 장희숙의 다정함 덕분에 인간 최초의 연대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울음 파도 버튼을 잃어버린 걸까. 


“애 하나 죽었다고 이렇게 어른들 불편하게 만드는 게 맞아요?”라고 소리치는 스쿨존 어린이 사망 발생 지역 인근 상인의 말을 들을 때, 고등학교 문제집이 가득 담긴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끌고 가면서 입에 햄버거를 욱여넣는 초등학생을 만난 밤 10시 반 대치동 학원가에서, 이주민·난민 가정 어린이들을 향해 ‘세금 축내지 말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끔찍한 댓글들이 수백 개씩 달리는 지옥도 같은 포털 댓글란을 읽어 내려갈 때,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삭제’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 변진경, 〈말랑한 어린이, 딱딱한 세상〉, 본문 181쪽



어린이 곁의 나


내가 아동·청소년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함께 사는 어린이와 동행하면서부터다. 세 살이었던 이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늦은 저녁의 지하철은 한산했고, 우리는 교통약자석에 앉아 몇 정거장을 가야 하는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애가 시끄럽다’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평범한 회사원으로 보이는 40대 남성은 체격이 크고 건장했다.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는데 시끄럽다 시비를 걸기에 나는 ‘우리 애가 시끄럽게 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답했다. 그는 ‘당신 같은 사람이 앉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교통약자석의 그림을 가리켰다. 어린이를 안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남성은 나에게 주먹을 날렸다. (얼굴을 때린 것은 아니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에 말릴 사람도 없었다. 평소라면 지금 뭐 하는 거냐며 큰 목소리를 무기로 지하철 내의 모두가 이 상황을 주목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바로 옆 칸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 주먹은 어린이에게 향했을 테니까. 사과하라는 요구도 하지 못한 채 그가 아니라 내가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는 사실에 분하고 화가 났다. 112에 전화라도 걸었어야 했나. 내가 남성이었다면 시비를 걸지 못했을 거다. 아니 내가 어린이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말이다. 비슷한 일들은 종종 일어났다. 혼자 있을 때는 겪지 않는 고성과 욕설이 어린이와 있으면 무방비 상태로 날아들었다.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이 사회가 함께 도모해 온 낡고 오래된 구조적 폭력이다.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작가님들은 어린이를 사랑하세요?”(본문 226쪽)

김지은은 2024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동화를 쓰는 신인 작가들과의 북토크에서 받은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질문을 다시 우리에게 던진다. 나 역시 종종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질문자는 주로 비아동·청소년들이었다. ‘연출님은 어쩌다가 아동·청소년인권에 대한 작품을 쓰게 되었어요?’ ‘원래 애들을 좋아하셨어요?’ ‘같이 사는 어린이 말고 다른 어린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저는 별로 아이를 안 좋아하거든요. 근데 연출님과 함께 사는 아이는 좀 다른 거 같아요’, ‘내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까요?’ 같은 말도 종종 듣는다. 답을 정해 놓고 묻는 질문 같아서 진지한 대답을 한 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의 질문에는 꼭 답을 하고 싶다. 

“저는 어린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린이가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삶의 주체로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접근 가능하고 정확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안전한 시공간을 확보하여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대개는 어린이를 주체로 인정한다면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거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답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서다.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되려 화를 내거나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린이는 알고 있다. 사회가, 우리가, 질문에 답하지 않았음을 말이다. 


성평등 도서에서 시작된 검열은 다양한 철학과 사회 문화를 다루는 다른 도서에 대한 검열을 불러오게 될 수 있다. 검열주의자들은 왜 어린이책을 검열의 첫 번째 표적으로 삼는 것일까? 독자로서 발언의 기회가 적은 어린이가 독서 문화의 생태계에서 가장 고립시키기 쉬운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김지은, 〈무슨 일이 있으면 책으로 달려와!〉, 본문 243쪽


발언할 기회가 적다는 것은 어린이가 목소리를 내는 시공간의 부재를 의미한다. 어린이의 목소리는 늘 보호자에 의해 대리되고, 왜곡되고, 폄하되고, 삭제된다. 김지은은 “금서 지정을 요구하는 목록에 공통점이 있다”(본문 239쪽)고 말한다. “책 소개나 분류 항목에 “성, 인권, 어린이, 평등”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책들”(본문 239쪽)이다. 어린이책을 금서로 지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권과 평등에 대한 감각이 모든 세대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가장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사소한 것도 함께 의논하고, 갈등이 생기면 다 같이 둘러앉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풀고 헤어”(본문 249쪽)지는 어린이들. 검열주의자들은 사실 어린이가 많이 두렵다. 금서 지정이 그렇다. 

함께 사는 어린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뭐 하고 놀았는지 꼭 묻는다. ‘언박싱’이나 ‘스쿱마켓’처럼 유튜브에서 본 걸 따라 하며 도파민을 터트렸다. 500원, 1,000원부터 시작하지만 3,000원, 5,000원, 1만 원이 된다. 도박과 다름없다. 아이돌 춤을 따라 추거나 아이돌 매니저 놀이를 한다고도 했다. 놀이는 미디어를 넘지 못했다. 학급 친구들 간의 갈등은 쉽게 따돌림이 됐다. 교실에서 할 수 있는 몇 가지 놀이를 제안했다. 딱지치기, 지우개 따먹기, 고무줄놀이, 오징어 게임 등. 어린이는 친구들이 재미없어 할 것 같아 싫다는 말만 반복했다. 놀이터에서 동네 언니들에게 배우는 구전 놀이의 대는 영영 끊어진 건가. 기찻길옆작은학교 공부방 어린이들이 해가 지는 골목을 머리에 땀나게 누비면서 공놀이하는 풍경을 그려 본다. 경쟁 말고 차별 말고 배제도 혐오도 말고, 서로 관계 맺고 배려하는 법을 배우는 진짜 놀이를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친구들끼리 놀면서 눈치를 배우는 것도 중요한 공부다. 놀다 보면 넘어져 다치고, 상처가 나기도 하고, 원하지 않더라도 술래를 해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과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 생각과 감정을 타자에게 말하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는 법도 배운다. (……)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놀이’다. 놀지 않고 자라는 아이들이 어디서 사회성을 배우고, 타자와 관계 맺고, 배려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 뒤에는 갈등을 또래들끼리 해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현실이 있다.

- 김중미, 〈함께하는 그 모든 순간에 자란다〉, 본문 253~254쪽



함께 살아간다는 것


어린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보호자가 일방적 돌봄을 제공하고 어린이가 무한한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린이 역시 최선을 다해 보호자를 돌본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국과 밥을 데우고 계란 ‘후라이’를 부쳐 저녁 밥상을 깜짝 선물한다거나, 굽은 어깨와 등을 두드려 주기도 하고, 아끼는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지 않고 남겨 두었다가 입에 넣어 주기도 한다. 카카오톡 메신저에 생일을 맞은 ‘내 친구’의 이름이 올라오면 “생일 축하해” 하며 이모지로 3단 케이크를 만들어 보낸다. “집에 어린이가 없어도 사회적 부모가 될 수 있다”(본문 48쪽)고 끌어들인다. 어린이도 돌본다. 서로의 구멍 난 자리를 메우는 “거대한 협동의 바느질”(본문 50쪽)을 한다. 대상이 아닌,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의 어린이다. 어린이는 깊고, 넓고, 유연하고, 유동한다. 다행히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다. ‘어린 나’와 어린이의 자리에 서서 보자. 묻자. 어린이가 살아가는 사회를, 어린이가 살기 좋은 사회를. 


‘살기 좋은’ 조건들 가운데 대부분은, 어린이의 안전과 복지에 연관되어 있다. (……) 그렇다면 정치와 행정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 다양한 지역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아이들이 최소한의 균등한 자원을 배분 받으며 퍼져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자. 그것은 어린이만의 이익이 아니다. 어른들이 지금 그토록 답을 찾고자 하는 노동, 저출생, 지역 소멸, 학벌(의대) 지상주의, 부동산, 젠더, 이주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바로 ‘어린이’로부터 출발한다.

- 변진경, 〈말랑한 어린이, 딱딱한 세상〉, 본문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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