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안과 밖
- 인디스쿨 담론을 통해 본 초등 교사 주체의 형성
글
김지연
초등 교사
2023년 7월 18일, 서울 서이초에서의 교사의 사망 사건 이후, 이른바 ‘교권’을 둘러싼 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집단이 있다. 바로 초등 교사(이 글에서 ‘초등 교사’란 보건·영양·사서 등 비교과 교사를 제외한 초등 교과 교사만을 의미한다) 집단이다. 그전까지 교사들의 행보에서 ‘초등 교사’라는 독립적인 정체성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반면 지난 1년간, 거의 모든 교사 집단행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초등 교사들이 있었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참여한 ‘검은 점의 집회’,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등의 아이디어는 모두 초등 교사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에서 나왔으며, 지금도 인디스쿨은 초등 교사 여론을 이끌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집단행동 중 일부는 정당한 분노의 표출로 보이나, 일부는 반인권적이며 각종 혐오를 선동하는 등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디스쿨은 그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점점 적극적으로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전에 본 적 없는 특이하고 강력한 집단, ‘초등 교사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이 글에서는 인디스쿨의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초등 교사 주체의 형성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를 형성하는 두 가지 정서
마을, 민족, 직종, 세대 등 특정한 집단이 그저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태를 넘어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단일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우리 한국인, 우리 서울시민과 같은 ‘우리 초등 교사’라는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사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개념이 아니다. 초등학교는 다양한 직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늘 함께 일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장, 교감과 같은 관리자 교사들이 있고, 비교과 교사, 교무실무사와 급식실 조리사 등 교육 공무직, 행정실 직원, 원어민 교사, 학교 예술 강사와 방과후 강사, 그리고 당연히 학생들이 있다. 이들의 고용 형태나 근무 시간은 모두 다르지만, 어느 한 조각이라도 빠지면 학교 운영에는 큰 차질이 생긴다. 규모가 큰 학교의 경우, 4학년 3반 담임 교사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1학년 5반 담임 교사보다 당장 나를 도와주는 보건 교사와 시설 관리직 직원이 더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교과 교사만 분리하며(분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우리를 말하는 것은 분명 어떤 담론이 작동한 결과이다.
우리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는 두 가지 정서가 작동한다. 하나는 내부를 향한 애정과 결속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를 향한 증오과 배제다. 내부를 긍정하고 외부를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 그저 여러 사람의 집합에 불과했던 것이 주체라는 하나의 몸으로 탄생하게 된다. 초등 교사 주체도 마찬가지다.
인디스쿨에서 초등 교사 주체의 내부 결속은 주로 ‘라운지’에서의 경험 공유와 공감을 통해 이루어졌다. 라운지는 인디스쿨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페이지로, 엑스(구 트위터)와 비슷한 형식이지만 모든 사용자가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는 주로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푸념, 교담 시간의 꿀 같은 휴식 등 소소한 이야기들이 실시간으로 나누어진다. 초등 교사들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에 공감하고 때로는 위로나 조언을 건네기도 하며 공통점을 지닌 우리를 만들어 나간다.
이에 더해, 서이초 사건 이후 몇 달 동안은 집회 현장이 초등 교사들의 결속 장소가 되었다. 비록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집회였지만 그 안에서도 연대와 우정을 나눌 수는 있었다. 옆 사람이 건네는 시원한 물 한 병, 박자를 맞춰 함께 외치는 구호, 그리고 함께 환호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강렬한 정서적 경험이 우리를 결속시켰다. 물론 집회 현장에는 비초등 교사들과 일반 시민들도 함께하고 있었지만, 집회의 익명성으로 인해 초등 교사들은 내 옆 사람이 나와 동일한 부류일 거라고 짐작하기 쉬웠다. 인디스쿨 라운지에는 집회 후기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집회에서 느꼈던 분노와 희망, 집회 운영진에게 보내는 감사, 그리고 질서 정연한 집회에 대한 자부심이 주로 공유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연대와 결속의 경험은 일회적이고 익명으로 이루어졌다. 검은 점의 집회는 참가자들이 개인적인 친목을 맺는 것을 경계했으며, 인디스쿨에서도 ‘네임드’가 아닌 이상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고 특정 사용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라운지에는 뚜렷한 화자도 청자도 없이 그저 모두가 모두에게 외치는 말들만이 가득했다. 토요일은 집회의 열광에 젖어 보내고, 일요일에는 인디스쿨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나누었지만, 월요일부터는 다시 외롭고 힘겨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익명의 우리 초등 교사들과 함께 느꼈던 일체감은 사라지고, 정작 옆 교실의 실제 동료 교사들은 그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디스쿨의 초등 교사 주체는 불완전한 내부 결속을, 더욱 강력한 외부 증오로 보완하고자 한다. 가장 1차적인 증오 대상은 그들을 그토록 괴롭히는 악성 민원인/학부모들이다. 그러나 사실 악성 민원은 초등 교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비교과 교사, 각종 강사, 그리고 분야를 넓히면 콜센터 상담원을 비롯한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비슷한 고통에 처해 있다. 그러나 서이초 사건 이전에도 인디스쿨의 초등 교사 주체는 이들의 고통과 연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자신들은 정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임용된 ‘진짜 교사’라는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이 연대를 가로막았다. 초등 교사 주체는 자신들의 고통(이 고통은 분명 실존하며 아주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이다)을 보편의 인권 문제, 노동 문제로 해석하는 대신, 이 고통을 ‘우리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줄 다른 ‘가해자’들을 생산해 냈다.
순환하는 증오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 연구자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집단 증오의 본질은 그 대상이 고정되지 않고 순환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집단의 정체성은 하나의 대상을 계속해서 증오하는 것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고, “여러 형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증오의 순환”을 통해 형성된다.
인디스쿨의 ‘교육 이슈’ 게시판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 가면, 담론장에 증오의 형상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순환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볼 수 있다. 우선, 학부모와 학생인권을 향한 뿌리 깊은 분노가 있다. 그리고 이 학생인권이라는 것을 학교에 끌고 온(?) 전교조와 진보 교육감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서이초 사건 직후 몇 달간은 혹시 피해자를 괴롭힌 게 전교조였나 생각될 정도로 강도 높은 혐오가 인디스쿨에 범람했다. 동시에 전교조가 상징(?)하는 것, 즉 ‘진보 정치’와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그다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2023년 7월 24일 서울교사노조 박근병 위원장이 기자 회견에 노란 리본을 달고 나왔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은 일이다.
인디스쿨이 전교조를 증오하는 또 다른 이유로 ‘교육 공무직과 연대했다’는 것이 있다. 교육 공무직 역시 오래전부터 증오 대상이었다. 이들이 강한 노조를 가졌고, (교사들 생각에) 교사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업이나 단체 교섭을 하는 날이면 인디스쿨은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 찬다. 교육 행정직과 각종 강사들도 비슷한 이유로, 즉 우리만큼 고생하지 않으면서 우리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이유로 증오받는다. 함께 일하는 다른 이들의 노동을 증오함으로써 ‘우리 초등 교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른 직종과 분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증오의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서이초 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슬픔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 초등 교사 주체를 지탱하는 공감과 증오의 에너지가 약해지자 인디스쿨은 이번에는 같은 교사인 비교과 교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교육 공무직을 비난했던 문장들과 비교과 교사를 비난하는 문장들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는 증오가 순환하면서 증오받는 대상들이 서로 비슷하게 형상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우리와 ‘같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서로 똑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인디스쿨에서 교육 공무직은 ‘일도 많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집단’이고, 비교과 교사는 ‘수업도 하지 않으면서 교사 대우를 받으려는 집단’으로 형상화되며 두 집단 사이의 또는 내부의 차이는 삭제된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교사의 고립
그리하여 인디스쿨은 비로소 초등 교사 주체를 탄생시킨다. 이는 순수한 피해자 주체, 또는 인디스쿨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호구’ 주체다. 이 주체의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고통(다시 말하지만 이 고통은 분명 실존한다)만이 거울 쌍처럼 끝없이 비추며 반복되고, 외부에서는 증오스러운 타자들이 형상을 바꿔 가며 빙글빙글 순환하고 있다. 제일 목표는 호구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도 저들처럼 이기적으로 굴 필요가 있다. ‘오직 교사만’을 외치던 교사노조연맹이 세를 불렸고, 곧이어 ‘오직 초등 교과 교사만’을 외치며 대한초등교사협회가 나타났다. 더 반연대적이고 반인권적인 입장을 내세울수록 박수를 받는다.
초등 교사 주체의 등장으로 교육 현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부 종교단체와 극우 세력은 이 주체를 등에 업고 학생인권조례를 폐지시켰다. 전교조는 내외부의 공격에 시달리다 학생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반동적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권 3법’이 통과되었고 교사 출신 국회의원이 2명 탄생했다. 좋다. 그렇다면 초등 교사 주체는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는가?
대답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물론 교사를 향한 폭력과 악성 민원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정서적 이유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지난여름 느꼈던 효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짙은 무력감만이 남았다. 우리가 되었는데도 교사들은 여전히 외롭다. 초등 교사 주체는 비록 강력할지언정 결코 행복하지는 않다. 물체가 구심력 없이 원심력만으로 회전할 수 없듯이, 내부적 결속 수단인 애정과 연대 없이 고통과 증오 그리고 능력주의적 혐오 정서만이 순환하는 주체는 긍정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저서 《정치적 감정》에서 집단의 유지와 결속에 가장 중요한 정서는 다름 아닌 사랑과 공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정서를 만드는 것은 “자유 공간, 이야기, 그리고 농담”이다. ‘광장을 열어 사람들의 연결을 돕는다’는 모토와는 정반대로, 인디스쿨은 이 모든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순수하고 억울한 우리’라는 관념은 교사를 스스로 고립시켰다.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긍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논의의 가능성으로부터.
‘독박 교실’을 해소해야 한다
다시 2023년 여름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집회 현장은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들끓는 정동(affect)의 집합소였다. 젊은 동료가 고통 속에서 죽었다. 많은 교사가 그때 “마치 내가 죽은 것 같았다”라고 증언했다. 교사들은 그전까지 집회를 조직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답답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주말마다 모이고 또 모이기를 거듭했다. 그곳에는 고통이 있었고, 슬픔과 분노와 답답함 그리고 희망이 있었다.
나도 그 집회에서 발언한 적이 있다. 서이초 교사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1998년생으로 동갑이다. 그리고 나 역시 교실에서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발령 첫해, 나는 늘 학교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저녁 7~8시는 기본이었고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교실을 일찍 떠나지 못했던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진상 학부모’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그저 내 등 뒤에서 닫히는 교실 문이, 십수 명의 아이들을 오로지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다음 날이 두려웠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교실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그것은 전부 나의 책임이 될 것이었다.
매일 오후 4시 반이 되면 교내 메신저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이름이 일제히 꺼졌다. 그때부터 나의 시간, 불안과 외로움과 싸우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고, 나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잠시 숨을 돌릴 때면 이런 상상을 했다. 텅 빈 학교에 나 혼자 있구나. 여기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오늘 밤 학교에 괴한이 침입해, 내일 아침에 나는 없고 내 손가락 하나만 남아 있다면? 그때 나는 그저 흥미로운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서이초 사건 이후에 알았다.
시간이 흐르고, 내게도 부족하게나마 경험이라는 것이 조금 생겼다. 이제는 안다. 교육이란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교실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서이초 교사에게도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분명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 그때의 나에게, 그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토록 두려웠던 닫힌 교실 문을 두드려 주고, 옆을 지켜 주며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때 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발언대에 섰다. ‘우리’라는 말이 품은 온갖 맹점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교사들에게는 우리가 간절히 필요했다. 다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우리보다는 사랑하는 우리를 원했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기꺼이 책임을 나누어 지며 함께 투쟁하는 우리. 그날 집회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했고, 교사들은 일제히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그 간절한 눈빛, 눈물과 환호, 그때만큼은 정말 모든 것이, 교육공동체라는 것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교사들은 정말로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벗고 옆 사람의 이름을 물을 수 있었다. 그러다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게 될 수도, 그러다 마침내 서로 존중하게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사들은 집회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지나가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전혀 다른 직종인 우리의 고통이 서로 닮았음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사들은 질서를 조금 포기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조금 정치적인 구호를 외칠 수도 있었다.
또 어쩌면 교사들은 학교에 돌아가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디스쿨에서 대신 곁에 있는 진짜 동료 교사와 고통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위로를 얻고 함께 눈물 흘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급식실 조리사들과, 방과후 강사들과 대화할 수도 있었다. 물론 결국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저들’ 역시 단일한 존재가 아니고 우리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사들은 학생들과 연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기설기 모인 사람들, 결코 완전히 같아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다종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집회에 나설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결과는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외롭고 비참했을까?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인디스쿨에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일지 모른다. 어쩌면 인디스쿨은 고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 모른다. 오프라인의 교육공동체가 와해되고, 더 이상 학교 현장에서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수많은 초등 교사가 인디스쿨로 모인 것이라고. 그렇다면 고립을 해소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대안적 공론장이 필요하다
심각한 피해가 실존하는 것과, ‘유일한 피해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초등 교사 주체는 이 둘을 뒤섞음으로써 탄생했다. 이 주체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 즉 일터에서의 기본적인 인권 보장부터 교육 공무직이나 비교과 교사에 대한 차별 대우까지 정말 모든 것을 ‘교권’이라 부르며 강하게 요구하고, 학생인권이나 교육공동체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이야기는 ‘참교사병’이나 가스라이팅이라며 거부한다.
그러나 이렇게 쓰면서 나는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인디스쿨의 의견을 실제 교사 집단 전체의 의견이라 하기에는, 내가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의 입장은 그렇게 획일적이지 않았다. 분명 ‘다른 목소리’들이 있다. 큰 소리로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지만, 내가 먼저 인디스쿨에 대한 비판을 꺼내면 조심스럽게 “사실 나도 불편했다”라고 털어놓는 교사들이 많았다. 그보다 더 많은 반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디스쿨에 그런 얘기도 올라와요? 난 자료실만 봐서 몰랐네”였다. ‘자료실’ 게시판은 교사들이 직접 만든 수업 자료를 공유하는 곳이다. 의미 있고 즐거운 수업을 위한 자료들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업로드되고, 댓글 창은 칭찬과 감사 인사로 가득하다. 대다수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아주 많은 수의 교사들이 인디스쿨의 혐오 정서에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채로 순전히 자료만을 위해 인디스쿨에 접속하고 있다.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말이 있다. 인디스쿨의 초등 교사 주체에 대응할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그에 대응할 새로운 초등 교사 주체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인디스쿨의 담론이 과대표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다른 목소리, 더 중립적이거나 진보적인 목소리가 초등 교사 집단 내에 결코 적지 않은 수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의 인디스쿨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면 즉시 조롱과 비난 세례가 쏟아진다. 모두 그걸 알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만약 대안적 공론장을 연다면 어떨까? 침묵을 강요당했던 초등 교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긴다면?
새로운 공론장, 그리고 그곳에서 탄생할 새로운 초등 교사 주체를 제안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주체는 학교 현장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어려운 말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냥 옆 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옆 반 문을 열자.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자. 이야기는 생각만큼 잘 안 될 수도 있다. 옆 반 선생님은 증오로 똘똘 뭉친 우리의 인디스쿨 주체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꼭 옆 반이 아니어도 좋다. 학교 안팎에서, 사적인 모임에서, 교원단체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를 많이 만들자.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안부를 묻자.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도 좋다. 시시한 수다와 농담을 충분히 나누되, 중요하고 정치적인 문제를 회피하지 말자. 그저 괴롭지 않은 교실, 억울하지 않은 교실을 넘어 안전하고 즐겁고 평등한 교실을 함께 상상하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독박 교실’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그를 절대, 절대로 혼자 울게 두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안과 밖
- 인디스쿨 담론을 통해 본 초등 교사 주체의 형성
글
김지연
초등 교사
2023년 7월 18일, 서울 서이초에서의 교사의 사망 사건 이후, 이른바 ‘교권’을 둘러싼 현장에서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집단이 있다. 바로 초등 교사(이 글에서 ‘초등 교사’란 보건·영양·사서 등 비교과 교사를 제외한 초등 교과 교사만을 의미한다) 집단이다. 그전까지 교사들의 행보에서 ‘초등 교사’라는 독립적인 정체성이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반면 지난 1년간, 거의 모든 교사 집단행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초등 교사들이 있었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참여한 ‘검은 점의 집회’,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등의 아이디어는 모두 초등 교사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에서 나왔으며, 지금도 인디스쿨은 초등 교사 여론을 이끌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집단행동 중 일부는 정당한 분노의 표출로 보이나, 일부는 반인권적이며 각종 혐오를 선동하는 등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디스쿨은 그러한 비판에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점점 적극적으로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전에 본 적 없는 특이하고 강력한 집단, ‘초등 교사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이 글에서는 인디스쿨의 담론을 분석함으로써 초등 교사 주체의 형성 과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를 형성하는 두 가지 정서
마을, 민족, 직종, 세대 등 특정한 집단이 그저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상태를 넘어 하나의 주체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단일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우리 한국인, 우리 서울시민과 같은 ‘우리 초등 교사’라는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사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개념이 아니다. 초등학교는 다양한 직종과 연령의 사람들이 늘 함께 일할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장, 교감과 같은 관리자 교사들이 있고, 비교과 교사, 교무실무사와 급식실 조리사 등 교육 공무직, 행정실 직원, 원어민 교사, 학교 예술 강사와 방과후 강사, 그리고 당연히 학생들이 있다. 이들의 고용 형태나 근무 시간은 모두 다르지만, 어느 한 조각이라도 빠지면 학교 운영에는 큰 차질이 생긴다. 규모가 큰 학교의 경우, 4학년 3반 담임 교사에게는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든 1학년 5반 담임 교사보다 당장 나를 도와주는 보건 교사와 시설 관리직 직원이 더 중요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교과 교사만 분리하며(분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우리를 말하는 것은 분명 어떤 담론이 작동한 결과이다.
우리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는 두 가지 정서가 작동한다. 하나는 내부를 향한 애정과 결속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를 향한 증오과 배제다. 내부를 긍정하고 외부를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 그저 여러 사람의 집합에 불과했던 것이 주체라는 하나의 몸으로 탄생하게 된다. 초등 교사 주체도 마찬가지다.
인디스쿨에서 초등 교사 주체의 내부 결속은 주로 ‘라운지’에서의 경험 공유와 공감을 통해 이루어졌다. 라운지는 인디스쿨에 접속하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페이지로, 엑스(구 트위터)와 비슷한 형식이지만 모든 사용자가 같은 타임라인을 공유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는 주로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푸념, 교담 시간의 꿀 같은 휴식 등 소소한 이야기들이 실시간으로 나누어진다. 초등 교사들은 자신과 비슷한 경험에 공감하고 때로는 위로나 조언을 건네기도 하며 공통점을 지닌 우리를 만들어 나간다.
이에 더해, 서이초 사건 이후 몇 달 동안은 집회 현장이 초등 교사들의 결속 장소가 되었다. 비록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집회였지만 그 안에서도 연대와 우정을 나눌 수는 있었다. 옆 사람이 건네는 시원한 물 한 병, 박자를 맞춰 함께 외치는 구호, 그리고 함께 환호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강렬한 정서적 경험이 우리를 결속시켰다. 물론 집회 현장에는 비초등 교사들과 일반 시민들도 함께하고 있었지만, 집회의 익명성으로 인해 초등 교사들은 내 옆 사람이 나와 동일한 부류일 거라고 짐작하기 쉬웠다. 인디스쿨 라운지에는 집회 후기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집회에서 느꼈던 분노와 희망, 집회 운영진에게 보내는 감사, 그리고 질서 정연한 집회에 대한 자부심이 주로 공유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연대와 결속의 경험은 일회적이고 익명으로 이루어졌다. 검은 점의 집회는 참가자들이 개인적인 친목을 맺는 것을 경계했으며, 인디스쿨에서도 ‘네임드’가 아닌 이상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고 특정 사용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라운지에는 뚜렷한 화자도 청자도 없이 그저 모두가 모두에게 외치는 말들만이 가득했다. 토요일은 집회의 열광에 젖어 보내고, 일요일에는 인디스쿨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나누었지만, 월요일부터는 다시 외롭고 힘겨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익명의 우리 초등 교사들과 함께 느꼈던 일체감은 사라지고, 정작 옆 교실의 실제 동료 교사들은 그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디스쿨의 초등 교사 주체는 불완전한 내부 결속을, 더욱 강력한 외부 증오로 보완하고자 한다. 가장 1차적인 증오 대상은 그들을 그토록 괴롭히는 악성 민원인/학부모들이다. 그러나 사실 악성 민원은 초등 교사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비교과 교사, 각종 강사, 그리고 분야를 넓히면 콜센터 상담원을 비롯한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비슷한 고통에 처해 있다. 그러나 서이초 사건 이전에도 인디스쿨의 초등 교사 주체는 이들의 고통과 연대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자신들은 정식으로 시험을 치르고 임용된 ‘진짜 교사’라는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이 연대를 가로막았다. 초등 교사 주체는 자신들의 고통(이 고통은 분명 실존하며 아주 중대하고 시급한 문제이다)을 보편의 인권 문제, 노동 문제로 해석하는 대신, 이 고통을 ‘우리만의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줄 다른 ‘가해자’들을 생산해 냈다.
순환하는 증오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 연구자 사라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집단 증오의 본질은 그 대상이 고정되지 않고 순환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집단의 정체성은 하나의 대상을 계속해서 증오하는 것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고, “여러 형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증오의 순환”을 통해 형성된다.
인디스쿨의 ‘교육 이슈’ 게시판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 가면, 담론장에 증오의 형상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순환하는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 볼 수 있다. 우선, 학부모와 학생인권을 향한 뿌리 깊은 분노가 있다. 그리고 이 학생인권이라는 것을 학교에 끌고 온(?) 전교조와 진보 교육감이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서이초 사건 직후 몇 달간은 혹시 피해자를 괴롭힌 게 전교조였나 생각될 정도로 강도 높은 혐오가 인디스쿨에 범람했다. 동시에 전교조가 상징(?)하는 것, 즉 ‘진보 정치’와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그다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2023년 7월 24일 서울교사노조 박근병 위원장이 기자 회견에 노란 리본을 달고 나왔다는 이유로 거센 비난을 받은 일이다.
인디스쿨이 전교조를 증오하는 또 다른 이유로 ‘교육 공무직과 연대했다’는 것이 있다. 교육 공무직 역시 오래전부터 증오 대상이었다. 이들이 강한 노조를 가졌고, (교사들 생각에) 교사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업이나 단체 교섭을 하는 날이면 인디스쿨은 원색적인 비난으로 가득 찬다. 교육 행정직과 각종 강사들도 비슷한 이유로, 즉 우리만큼 고생하지 않으면서 우리보다 좋은 대우를 받는다는 이유로 증오받는다. 함께 일하는 다른 이들의 노동을 증오함으로써 ‘우리 초등 교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른 직종과 분리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증오의 순환은 멈추지 않는다. 서이초 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슬픔의 파도가 한 차례 지나가고, 초등 교사 주체를 지탱하는 공감과 증오의 에너지가 약해지자 인디스쿨은 이번에는 같은 교사인 비교과 교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교육 공무직을 비난했던 문장들과 비교과 교사를 비난하는 문장들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는 증오가 순환하면서 증오받는 대상들이 서로 비슷하게 형상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우리와 ‘같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서로 똑같은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인디스쿨에서 교육 공무직은 ‘일도 많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는 집단’이고, 비교과 교사는 ‘수업도 하지 않으면서 교사 대우를 받으려는 집단’으로 형상화되며 두 집단 사이의 또는 내부의 차이는 삭제된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교사의 고립
그리하여 인디스쿨은 비로소 초등 교사 주체를 탄생시킨다. 이는 순수한 피해자 주체, 또는 인디스쿨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호구’ 주체다. 이 주체의 내부에서는 자신들의 고통(다시 말하지만 이 고통은 분명 실존한다)만이 거울 쌍처럼 끝없이 비추며 반복되고, 외부에서는 증오스러운 타자들이 형상을 바꿔 가며 빙글빙글 순환하고 있다. 제일 목표는 호구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도 저들처럼 이기적으로 굴 필요가 있다. ‘오직 교사만’을 외치던 교사노조연맹이 세를 불렸고, 곧이어 ‘오직 초등 교과 교사만’을 외치며 대한초등교사협회가 나타났다. 더 반연대적이고 반인권적인 입장을 내세울수록 박수를 받는다.
초등 교사 주체의 등장으로 교육 현장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부 종교단체와 극우 세력은 이 주체를 등에 업고 학생인권조례를 폐지시켰다. 전교조는 내외부의 공격에 시달리다 학생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반동적 위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교권 3법’이 통과되었고 교사 출신 국회의원이 2명 탄생했다. 좋다. 그렇다면 초등 교사 주체는 이 모든 변화를 통해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는가?
대답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물론 교사를 향한 폭력과 악성 민원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정서적 이유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 지난여름 느꼈던 효능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짙은 무력감만이 남았다. 우리가 되었는데도 교사들은 여전히 외롭다. 초등 교사 주체는 비록 강력할지언정 결코 행복하지는 않다. 물체가 구심력 없이 원심력만으로 회전할 수 없듯이, 내부적 결속 수단인 애정과 연대 없이 고통과 증오 그리고 능력주의적 혐오 정서만이 순환하는 주체는 긍정적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저서 《정치적 감정》에서 집단의 유지와 결속에 가장 중요한 정서는 다름 아닌 사랑과 공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정서를 만드는 것은 “자유 공간, 이야기, 그리고 농담”이다. ‘광장을 열어 사람들의 연결을 돕는다’는 모토와는 정반대로, 인디스쿨은 이 모든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순수하고 억울한 우리’라는 관념은 교사를 스스로 고립시켰다. 현실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긍정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논의의 가능성으로부터.
‘독박 교실’을 해소해야 한다
다시 2023년 여름으로 돌아가 보자. 그때 집회 현장은 무더운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들끓는 정동(affect)의 집합소였다. 젊은 동료가 고통 속에서 죽었다. 많은 교사가 그때 “마치 내가 죽은 것 같았다”라고 증언했다. 교사들은 그전까지 집회를 조직해 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답답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주말마다 모이고 또 모이기를 거듭했다. 그곳에는 고통이 있었고, 슬픔과 분노와 답답함 그리고 희망이 있었다.
나도 그 집회에서 발언한 적이 있다. 서이초 교사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1998년생으로 동갑이다. 그리고 나 역시 교실에서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발령 첫해, 나는 늘 학교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었다. 저녁 7~8시는 기본이었고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교실을 일찍 떠나지 못했던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진상 학부모’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그저 내 등 뒤에서 닫히는 교실 문이, 십수 명의 아이들을 오로지 나 혼자 감당해야 할 다음 날이 두려웠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교실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그것은 전부 나의 책임이 될 것이었다.
매일 오후 4시 반이 되면 교내 메신저에서 다른 선생님들의 이름이 일제히 꺼졌다. 그때부터 나의 시간, 불안과 외로움과 싸우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고, 나 때문에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잠시 숨을 돌릴 때면 이런 상상을 했다. 텅 빈 학교에 나 혼자 있구나. 여기서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오늘 밤 학교에 괴한이 침입해, 내일 아침에 나는 없고 내 손가락 하나만 남아 있다면? 그때 나는 그저 흥미로운 상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서이초 사건 이후에 알았다.
시간이 흐르고, 내게도 부족하게나마 경험이라는 것이 조금 생겼다. 이제는 안다. 교육이란 아이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교실은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서이초 교사에게도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분명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든 그때의 나에게, 그에게 알려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토록 두려웠던 닫힌 교실 문을 두드려 주고, 옆을 지켜 주며 이야기를 들어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때 나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발언대에 섰다. ‘우리’라는 말이 품은 온갖 맹점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교사들에게는 우리가 간절히 필요했다. 다만 나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우리보다는 사랑하는 우리를 원했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기꺼이 책임을 나누어 지며 함께 투쟁하는 우리. 그날 집회에서 나는 이런 얘기를 했고, 교사들은 일제히 박수로 화답해 주었다. 그 간절한 눈빛, 눈물과 환호, 그때만큼은 정말 모든 것이, 교육공동체라는 것이 가능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교사들은 정말로 서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검은 마스크를 벗고 옆 사람의 이름을 물을 수 있었다. 그러다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게 될 수도, 그러다 마침내 서로 존중하게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사들은 집회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 지나가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전혀 다른 직종인 우리의 고통이 서로 닮았음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사들은 질서를 조금 포기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조금 정치적인 구호를 외칠 수도 있었다.
또 어쩌면 교사들은 학교에 돌아가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디스쿨에서 대신 곁에 있는 진짜 동료 교사와 고통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다 뜻하지 않은 위로를 얻고 함께 눈물 흘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급식실 조리사들과, 방과후 강사들과 대화할 수도 있었다. 물론 결국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저들’ 역시 단일한 존재가 아니고 우리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교사들은 학생들과 연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얼기설기 모인 사람들, 결코 완전히 같아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다종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다시 집회에 나설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해도 결과는 그대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외롭고 비참했을까?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인디스쿨에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일지 모른다. 어쩌면 인디스쿨은 고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지 모른다. 오프라인의 교육공동체가 와해되고, 더 이상 학교 현장에서 긍정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수많은 초등 교사가 인디스쿨로 모인 것이라고. 그렇다면 고립을 해소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대안적 공론장이 필요하다
심각한 피해가 실존하는 것과, ‘유일한 피해자’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초등 교사 주체는 이 둘을 뒤섞음으로써 탄생했다. 이 주체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 즉 일터에서의 기본적인 인권 보장부터 교육 공무직이나 비교과 교사에 대한 차별 대우까지 정말 모든 것을 ‘교권’이라 부르며 강하게 요구하고, 학생인권이나 교육공동체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이야기는 ‘참교사병’이나 가스라이팅이라며 거부한다.
그러나 이렇게 쓰면서 나는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인디스쿨의 의견을 실제 교사 집단 전체의 의견이라 하기에는, 내가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의 입장은 그렇게 획일적이지 않았다. 분명 ‘다른 목소리’들이 있다. 큰 소리로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지만, 내가 먼저 인디스쿨에 대한 비판을 꺼내면 조심스럽게 “사실 나도 불편했다”라고 털어놓는 교사들이 많았다. 그보다 더 많은 반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디스쿨에 그런 얘기도 올라와요? 난 자료실만 봐서 몰랐네”였다. ‘자료실’ 게시판은 교사들이 직접 만든 수업 자료를 공유하는 곳이다. 의미 있고 즐거운 수업을 위한 자료들이 하루에도 수백 개씩 업로드되고, 댓글 창은 칭찬과 감사 인사로 가득하다. 대다수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아주 많은 수의 교사들이 인디스쿨의 혐오 정서에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채로 순전히 자료만을 위해 인디스쿨에 접속하고 있다.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말이 있다. 인디스쿨의 초등 교사 주체에 대응할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그에 대응할 새로운 초등 교사 주체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인디스쿨의 담론이 과대표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다른 목소리, 더 중립적이거나 진보적인 목소리가 초등 교사 집단 내에 결코 적지 않은 수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의 인디스쿨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면 즉시 조롱과 비난 세례가 쏟아진다. 모두 그걸 알기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만약 대안적 공론장을 연다면 어떨까? 침묵을 강요당했던 초등 교사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구심점이 생긴다면?
새로운 공론장, 그리고 그곳에서 탄생할 새로운 초등 교사 주체를 제안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주체는 학교 현장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어려운 말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냥 옆 반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뜻이다. 옆 반 문을 열자.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자. 이야기는 생각만큼 잘 안 될 수도 있다. 옆 반 선생님은 증오로 똘똘 뭉친 우리의 인디스쿨 주체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꼭 옆 반이 아니어도 좋다. 학교 안팎에서, 사적인 모임에서, 교원단체에서 얼굴을 마주 보는 자리를 많이 만들자.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고 안부를 묻자.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어도 좋다. 시시한 수다와 농담을 충분히 나누되, 중요하고 정치적인 문제를 회피하지 말자. 그저 괴롭지 않은 교실, 억울하지 않은 교실을 넘어 안전하고 즐겁고 평등한 교실을 함께 상상하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독박 교실’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면 그를 절대, 절대로 혼자 울게 두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