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

김인규 씀,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 교육공동체 벗, 2025
김환영 beettle@hanmail.net
그림책 작가, 동시인
서평을 써 본 적도, 쓰는 요령도 모르는 주제가 선뜻 청탁에 응한 것은, 어린이라는 존재에 관한 오랜 관심과 미술교육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온 나로서는 이 책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를 읽으며 미술에 관한 해묵은 기억들이 자주 소환되기도 했다.
유치원 단계를 포함하여 초등학교 미술 수업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머리글을 살펴보자.
“중등학교에서 30년 가까이 미술 교사를 하고 퇴직”한 저자는 “오랫동안 어린이 미술교육에 대한 생각 혹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술은 특별히 소질 있는 아이들을 위한 활동”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 즉 ‘미술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안타까움이 있었다고.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는 이러한 인식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으며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을 생각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급기야 초등학교 문을 두드리게 하였고, 학교로부터 흔쾌히 미술 수업 허가를 받는다. 그러나 미술 수업은 미술을 잘 가르쳐 보려던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들에게 미술을 배우는 시간으로 변화되었고, 미술은 누군가에게 배우고 익히는 활동이기 전에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내 어린 날의 미술 시간
50년도 더 지난 내 어린 날의 미술 시간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것이다. 검은 뿔테 안경에 수염자리가 파랗던 남자 선생님이 이파리만 늘어진 화분 하나를 하늘색 교탁 위에 올리며 그리라 했다. 2시간짜리 수업이었는데, 수업이 끝나기 전 선생님은 그림을 거둬 그 가운데 몇 장을 칠판에 붙였다. 모두 5장의 그림이 칠판에 붙었고, 맨 마지막 그림이 내 그림이었다. 선생님은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을 두고 ‘회화적이며 수채화의 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그런 뒤 맨 끝에 붙여 놓은 내 그림을 가리키며 ‘이것은 만화’라 했다. 만화라고 말하는 교사의 어감을 통해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그림은 ‘잘못 그려진 그림’이라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 오후, 퇴근을 하는지 선생님이 가방을 들고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놀던 것을 그만두고 황급히 책가방을 챙겨 선생님 뒤를 따라갔다. 일전에 들은 ‘회화적’이란 용어와 ‘수채화의 맛’이란 말뜻을 도무지 알 수 없던 열 살짜리 아이의 미행이었다. 선생님은 도로를 건너 안국동 쪽으로 내려가더니 내 키의 2배는 되는 육중한 나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찰나, 삐걱대는 문틈으로 포도와 과일들을 그린 그림이 금테 액자 안에서 얼비쳤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열 살짜리 아이의 미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내가 굳이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까닭은, ‘만화는 회화보다 저열하거나 열등한 것’이라는 편견이 바로 그 교사의 말을 시작점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까지 이어졌다. 나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나, 당시 교수를 포함해 동료 선후배들의 미술에 대한 편견은 무척이나 완강한 것이었고, 공예나 디자인은 회화에 비겨 열등하다고 여기거나 이른바 순수미술 안에서도 동양화와 서양화를 우열로 가르며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비일비재했다.
자기표현의 첫 시작
유소년 시절은 인생 전체에서는 매우 짧으나 그 명맥은 평생을 간다. 또한 적지 않게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전 생애에 잇대고 파먹으며 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유소년 교육이란 전 생애에 걸친 기초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중등 교사를 거쳐 초등과 유치원 미술교육으로 ‘하강’한 저자가 고민한 지점도 그랬을 테다. 이 재미있고 풍성한 미술을 누리지 못하는 집단적 현상을 부수어 새롭게 정초하려면 가장 낮은 단계, 그러니까 자기표현의 첫 순간까지 내려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실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다시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자기표현의 첫 단계를 유치원 시기로 판단하는데, “3세만 되어도 친구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못하면 어떡하나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이다.(본문 10쪽) 이 시기의 어린이는 “알 수 없는 것을 그려 놓고 나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다반사”이며 “무엇을 처음부터 마음먹고 만든다기보다는, 하다가 느낌에 따라 알고 있는 사물과 연결 짓는”다. “그림을 그리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자기가 한 일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인지도 모르는 것이니, 결국 아이에게 미술이란 즉흥적 놀이이며 이로써 충분한 것이다.
신영(5세)이와 교사의 대화를 들어 보자.
신영이가 배를 그리고 있다. 교사는 “배라면 바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바다를 그려 주길 요청한다. 아이는 배 아래쪽에 파란색을 칠하고는 “물고기를 그릴까?” 하고 다시 묻는다. 아이는 빨간색으로 물고기를 그리는데 물고기 같지 않으니까 “이건 물고기가 아니라 미생물이에요. 바다에 사는 멸치를 그릴까?” 하며 멸치를 그리다가 은색으로 그물까지 그려 넣는다. 멸치 잡는 그물까지 그려 넣은 것이다. 마침내 김까지 그리자 교사는 감탄하며 말한다. “정말 멋지구나!”(본문 62쪽)
승수(4세)는 개구리를 그리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아 선생님에게 개구리는 어떻게 그리냐고 묻는다. 못 그리겠다며 망설이는 아이에게 교사는 말한다. “네가 그리면 그게 개구리가 될 거야.” 교사의 끝없는 격려는 결국 아이가 새로운 종이를 들고 와 다시 그리도록 이끈다. “점점 그림이 커지고 더욱 천천히 차분하게”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본문 64~67쪽)
이번에는 한 아이가 눈앞에 있던 “빨간 승용차 장난감”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평소 잘 그리던 “파란 버스”를 그리고 만다. 두루뭉술하고 빨갛고 멋진 자동차가 지금 내 앞에 있으나, 아이는 그동안 ‘그려 왔던’ 네모반듯한 버스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기존 관념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한다. 기존 관념을 깨고 눈앞에 실재하는 대상에 다가가려면 관념을 부숴야 가능한 일이나 ‘두려움’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본문 68~72쪽)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보자.
아홉 살 어린이가 처음으로 튤립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튤립 모양이 좀 이상하다. 튤립 꽃잎은 위로 나 있는데 아이는 여러 번 고치다가 위아래로 나 있는 꽃잎을 그린다. “아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꽃의 이미지”와 ‘눈앞에 있는 실제 꽃’인 튤립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보고 그린다는 것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기는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미지와 눈에 보이는 것과의 차이가 가진 갈등을 담아낸다. 대체로 시선을 따라 그리는 그림을 잘 그린 것이라 말한다. 생생한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 본문 75쪽
따라서 튤립 그림의 경우도 자기표현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일반적인 꽃과 다르게 생긴 튤립을 보고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스스로 튤립의 이미지를 창조해 낸 셈이다. 그것은 대상과 자기 이미지 사이에서 벌인 갈등의 소산이고 그 갈등이란 자기가 표현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못 그렸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결코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분명 자기 나름의 성취를 해낸 것”(본문 237쪽)이다.
내 경우도 그랬다. 3학년인 열 살 때, 나는 알에서 깨어나거나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세상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한 미술 시간에 부모님 얼굴을 그리라 했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ㅣ’ 자나 ‘ㄴ’ 자로 코를 그리고 동그랗게 눈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의 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코를 볼에서 떼어 내 세우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흰색과 노랑, 빨강과 검정 물감으로 코를 세우고 얼굴을 입체적으로 그리느라 화면 전체를 벌겋게 물들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술 마신 사람 같다고 낄낄거렸으나, 봉황의 뜻을 어찌 알랴, 나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코를 세우고 눈도 보이는 그대로 구현해 내고 싶었다. 저자가 썼듯이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 자신의 머릿속의 이미지가 사투를 벌인 결과”였던 것이다.
나는 앞의 ‘튤립 보고 그리기’ 장면에서 저자의 사려 깊은 눈길에 감탄하게 된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한 아이의 내적 갈등과 작지만 명백한 성취를 바로 그 아이의 자리에서 발견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저자와 같은 교사가 얼마나 될까? 이런 시선이 인간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교양 없이 가능할까?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떤 주어진 과제가 있더라도 교사는 이와 같은 아이의 활동이 가진 양면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아이가 성장의 노정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아이의 편에 서서 무엇을 격려하고 고무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개입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지 또한 판단해야 한다. 아이는 지금 새로운 세계를 그려 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 본문 237쪽
이미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 그리고 교사의 역할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본문 282쪽) 꼭지에서 저자는 자연주의 교육의 시조라 할 루소와 20세기 초 치젝의 말을 인용하며 실제의 교육 현장과 비교한다. 이들의 말이란 “간섭은 조형적 창조에 유해할 뿐이다. (……) 교사는 숨을 죽이고 간섭하지 말고, 어린이 속에 있는 독자적인 것을 자유롭게 활동시키는 것이다”가 그것인데, “문제는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3세만 되어도 이미 친구와 선생님의 눈치를 살핀다”면서, 과일 바구니에 맛있는 과일이 잔뜩 담긴 그림과 이 그림을 그린 열한 살 아동과의 대화를 보여 준다. 여기서 교사는 “좋아하는 과일”을 그린 거냐고 묻는데 아이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럼 왜 그린 거냐”라고 물으니까 “그냥” 그렸다면서, 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은 “딸기”라고 답한다. 그럼 열한 살짜리 아이는 왜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를 그리지 않고 다른 과일을 그린 것일까? 아이의 대답은 이렇다. “어려워서요.”
이 사례는 그리기의 어려움을 적나라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교사가 ‘소극적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독자적인 것에 대한 인식‘ 또한 없다는 것이다.(본문 285~286쪽)
다른 겹으로, 아이들이 그리기를 무서워하는 진짜 이유는 “잘 그린다는 그 품평의 기준이 이미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데 있으며 “잘 그린다고 하는 것에 개인의 재능의 차원이 있더라도 그것을 품평하는 기준과 가치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저자는 잘라 말한다. 거기에는 개개인이 가진 ‘독자성’ 혹은 ‘고유성’이 설 자리가 없으며, 그렇게 ‘자기표현’은 배제되고 억압되면서 성장하게 되며 이것이 “아이들에게 주어져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더 많은 조력과 지원을 해야 하며, “비교감 속에서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해내는 것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본문 286~287쪽)
미술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잘 보여 주는 사례를 하나 더 꼽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감동한 광경이기도 하다.
수수깡으로 만들기 활동을 하는 날이다. 평소에도 과잉 행동이 심해 친구들의 원성을 사고, 뭐든 집중력 있게 수행하기 어려워하는 한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은 수수깡으로 집이나 입체물을 만들고 있는데, 그 아이는 “수수깡을 그저 일직선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한다. 고민할 것 없이 그저 단순 반복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수깡은 점점 길어져 마침내 교실 벽까지 길게 이어졌고, 아이는 망설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교사는 창문을 열어 주며 “창문 밖으로 계속 연장해 보라고” 권하고, 순간 아이의 눈은 반짝인다. “아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친구들이 만들고 남은 수수깡을 주우러” 다니고 이에 다른 아이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다른 아이들도 “자신이 가진 수수깡을 들고나와 함께 연결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정말 교실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복도를 가로지르게 되자 교사는 “어디까지 갈 거냐고” 묻는다. 아이는 “집에까지 갈 거”라고 대답한다. 수수깡은 급기야 계단을 내려가고, 아이들은 “정말 집에까지 갈까?” 웃고 떠들다가 비로소 교실로 돌아온다. 결국 “아이의 행동이 가진 욕망을 읽어” 냄으로써 “새로운 발상으로 연결”된 이것은 아이와 교사가 만들어 낸 하나의 멋진 퍼포먼스로 내게는 다가온다. “아이와 교사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상력이 폭발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본문 277~279쪽)
물론 교육 현장에서 미술교육이 이렇게 실행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미술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창의적 활동에 있어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교실은 다만 하나의 공간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이도 교사도 새롭게 깨닫고 있지 않은가. 모든 수업이 이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술 수업에서는 가능한 지점인 것이니, ‘미술 교사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모든 상황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여겨 항목마다 칸을 채워야 하는 NEIS 시스템으로는 이런 창의적이며 즉흥적인 미술 활동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편견과 신화에서 벗어나 미술을 즐기게 만드는 미술교육
미술교육에 있어 교사의 말 한마디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갖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술은 수많은 편견과 신화 속에 휩싸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편견과 신화, 혹은 거룩하고 엄숙한 자태로 똬리를 튼 엄숙주의의 폐해를 겪으며 우리는 성장했다. 미술 시장의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이렇게 된 혐의의 또 한 중심에 미술교육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술에 대한 무수한 편견과 신화의 진폭 속에서 우리의 미술은 짐짓 괴로워하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혹은 지나치게 번쩍거리는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생한 미술 수업의 현장을 보여 주며 저자가 제안하고 있는 미술교육을 통해서라면, 아이가 자라 미술가가 되든 아니든, 미술을 즐길 만한 유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지의 생산자가 되든 소비자 혹은 향유자가 되든,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주체가 된 창의적이고 상호 협동을 통한 미술 수업은 아이들을 보다 민주적인 어른으로 성장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또한 어린이들의 미술교육 현장을 다루고 있으나 미술 교사를 넘어 전업 화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술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어린이들의 교육 현장을 통해 추체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롭고 창의적인 풍토에서 자라지 못한 내 또래의 예술가들은 이런 수업이 무척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 지금의 자신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작품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 말이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이른바 ‘그림 잘 그리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엄청나게 많은 영상이 쏟아진다. 그것이 미술이든 아니든, 이른바 그리기의 ‘스킬’에 이들은 매달린다. 이 책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에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묻고 있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과 한 아이가 물감을 흘리며 만들어 낸 그림이 본질에서 그렇게 다른 거겠냐고. 혹은 서로의 얼굴 그림을 콜라주로 변형해 본 아이가 미술이 얼마나 재미나고 혁신적인지 모를 수 있겠느냐고. 하여 나는 말하고 싶다. 진심으로 미술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시라고. 그리기를 넘어서 미술에 대한 이해에도 사뭇 다른 견해를 갖게 될 거라고. 더불어 이전보다 유쾌하고 즐거운 미술 감상의 길이 함께 열릴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는지, 나와는 무관한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진짜,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
김인규 씀,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 교육공동체 벗, 2025
김환영 beettle@hanmail.net
그림책 작가, 동시인
서평을 써 본 적도, 쓰는 요령도 모르는 주제가 선뜻 청탁에 응한 것은, 어린이라는 존재에 관한 오랜 관심과 미술교육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려 온 나로서는 이 책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를 읽으며 미술에 관한 해묵은 기억들이 자주 소환되기도 했다.
유치원 단계를 포함하여 초등학교 미술 수업 보고서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말하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머리글을 살펴보자.
“중등학교에서 30년 가까이 미술 교사를 하고 퇴직”한 저자는 “오랫동안 어린이 미술교육에 대한 생각 혹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미술은 특별히 소질 있는 아이들을 위한 활동”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 즉 ‘미술은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안타까움이 있었다고.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는 이러한 인식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으며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을 생각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급기야 초등학교 문을 두드리게 하였고, 학교로부터 흔쾌히 미술 수업 허가를 받는다. 그러나 미술 수업은 미술을 잘 가르쳐 보려던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들에게 미술을 배우는 시간으로 변화되었고, 미술은 누군가에게 배우고 익히는 활동이기 전에 스스로를 표현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내 어린 날의 미술 시간
50년도 더 지난 내 어린 날의 미술 시간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것이다. 검은 뿔테 안경에 수염자리가 파랗던 남자 선생님이 이파리만 늘어진 화분 하나를 하늘색 교탁 위에 올리며 그리라 했다. 2시간짜리 수업이었는데, 수업이 끝나기 전 선생님은 그림을 거둬 그 가운데 몇 장을 칠판에 붙였다. 모두 5장의 그림이 칠판에 붙었고, 맨 마지막 그림이 내 그림이었다. 선생님은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을 두고 ‘회화적이며 수채화의 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그런 뒤 맨 끝에 붙여 놓은 내 그림을 가리키며 ‘이것은 만화’라 했다. 만화라고 말하는 교사의 어감을 통해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그림은 ‘잘못 그려진 그림’이라는 느낌이 그것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 오후, 퇴근을 하는지 선생님이 가방을 들고 운동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놀던 것을 그만두고 황급히 책가방을 챙겨 선생님 뒤를 따라갔다. 일전에 들은 ‘회화적’이란 용어와 ‘수채화의 맛’이란 말뜻을 도무지 알 수 없던 열 살짜리 아이의 미행이었다. 선생님은 도로를 건너 안국동 쪽으로 내려가더니 내 키의 2배는 되는 육중한 나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찰나, 삐걱대는 문틈으로 포도와 과일들을 그린 그림이 금테 액자 안에서 얼비쳤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열 살짜리 아이의 미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내가 굳이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까닭은, ‘만화는 회화보다 저열하거나 열등한 것’이라는 편견이 바로 그 교사의 말을 시작점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미술에 대한 이러한 편견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까지 이어졌다. 나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나, 당시 교수를 포함해 동료 선후배들의 미술에 대한 편견은 무척이나 완강한 것이었고, 공예나 디자인은 회화에 비겨 열등하다고 여기거나 이른바 순수미술 안에서도 동양화와 서양화를 우열로 가르며 배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들이 비일비재했다.
자기표현의 첫 시작
유소년 시절은 인생 전체에서는 매우 짧으나 그 명맥은 평생을 간다. 또한 적지 않게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을 전 생애에 잇대고 파먹으며 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유소년 교육이란 전 생애에 걸친 기초 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중등 교사를 거쳐 초등과 유치원 미술교육으로 ‘하강’한 저자가 고민한 지점도 그랬을 테다. 이 재미있고 풍성한 미술을 누리지 못하는 집단적 현상을 부수어 새롭게 정초하려면 가장 낮은 단계, 그러니까 자기표현의 첫 순간까지 내려가 미술에 대한 이해와 실현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다시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자기표현의 첫 단계를 유치원 시기로 판단하는데, “3세만 되어도 친구들과 비교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못하면 어떡하나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이다.(본문 10쪽) 이 시기의 어린이는 “알 수 없는 것을 그려 놓고 나중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다반사”이며 “무엇을 처음부터 마음먹고 만든다기보다는, 하다가 느낌에 따라 알고 있는 사물과 연결 짓는”다. “그림을 그리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자기가 한 일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인지도 모르는 것이니, 결국 아이에게 미술이란 즉흥적 놀이이며 이로써 충분한 것이다.
신영(5세)이와 교사의 대화를 들어 보자.
신영이가 배를 그리고 있다. 교사는 “배라면 바다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바다를 그려 주길 요청한다. 아이는 배 아래쪽에 파란색을 칠하고는 “물고기를 그릴까?” 하고 다시 묻는다. 아이는 빨간색으로 물고기를 그리는데 물고기 같지 않으니까 “이건 물고기가 아니라 미생물이에요. 바다에 사는 멸치를 그릴까?” 하며 멸치를 그리다가 은색으로 그물까지 그려 넣는다. 멸치 잡는 그물까지 그려 넣은 것이다. 마침내 김까지 그리자 교사는 감탄하며 말한다. “정말 멋지구나!”(본문 62쪽)
승수(4세)는 개구리를 그리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아 선생님에게 개구리는 어떻게 그리냐고 묻는다. 못 그리겠다며 망설이는 아이에게 교사는 말한다. “네가 그리면 그게 개구리가 될 거야.” 교사의 끝없는 격려는 결국 아이가 새로운 종이를 들고 와 다시 그리도록 이끈다. “점점 그림이 커지고 더욱 천천히 차분하게” 그리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본문 64~67쪽)
이번에는 한 아이가 눈앞에 있던 “빨간 승용차 장난감”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평소 잘 그리던 “파란 버스”를 그리고 만다. 두루뭉술하고 빨갛고 멋진 자동차가 지금 내 앞에 있으나, 아이는 그동안 ‘그려 왔던’ 네모반듯한 버스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기존 관념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곤혹스러워한다. 기존 관념을 깨고 눈앞에 실재하는 대상에 다가가려면 관념을 부숴야 가능한 일이나 ‘두려움’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본문 68~72쪽)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보자.
아홉 살 어린이가 처음으로 튤립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튤립 모양이 좀 이상하다. 튤립 꽃잎은 위로 나 있는데 아이는 여러 번 고치다가 위아래로 나 있는 꽃잎을 그린다. “아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꽃의 이미지”와 ‘눈앞에 있는 실제 꽃’인 튤립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튤립 그림의 경우도 자기표현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는 일반적인 꽃과 다르게 생긴 튤립을 보고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스스로 튤립의 이미지를 창조해 낸 셈이다. 그것은 대상과 자기 이미지 사이에서 벌인 갈등의 소산이고 그 갈등이란 자기가 표현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못 그렸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결코 잘못 그린 것이 아니라 분명 자기 나름의 성취를 해낸 것”(본문 237쪽)이다.
내 경우도 그랬다. 3학년인 열 살 때, 나는 알에서 깨어나거나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세상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한 미술 시간에 부모님 얼굴을 그리라 했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ㅣ’ 자나 ‘ㄴ’ 자로 코를 그리고 동그랗게 눈을 그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의 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코를 볼에서 떼어 내 세우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흰색과 노랑, 빨강과 검정 물감으로 코를 세우고 얼굴을 입체적으로 그리느라 화면 전체를 벌겋게 물들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술 마신 사람 같다고 낄낄거렸으나, 봉황의 뜻을 어찌 알랴, 나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코를 세우고 눈도 보이는 그대로 구현해 내고 싶었다. 저자가 썼듯이 “그림은 눈에 보이는 대상과 자신의 머릿속의 이미지가 사투를 벌인 결과”였던 것이다.
나는 앞의 ‘튤립 보고 그리기’ 장면에서 저자의 사려 깊은 눈길에 감탄하게 된다. 성장 과정에서 겪는 한 아이의 내적 갈등과 작지만 명백한 성취를 바로 그 아이의 자리에서 발견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저자와 같은 교사가 얼마나 될까? 이런 시선이 인간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과 교양 없이 가능할까?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미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 그리고 교사의 역할
‘자유롭지 않은 아이들’(본문 282쪽) 꼭지에서 저자는 자연주의 교육의 시조라 할 루소와 20세기 초 치젝의 말을 인용하며 실제의 교육 현장과 비교한다. 이들의 말이란 “간섭은 조형적 창조에 유해할 뿐이다. (……) 교사는 숨을 죽이고 간섭하지 말고, 어린이 속에 있는 독자적인 것을 자유롭게 활동시키는 것이다”가 그것인데, “문제는 아이들은 이미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3세만 되어도 이미 친구와 선생님의 눈치를 살핀다”면서, 과일 바구니에 맛있는 과일이 잔뜩 담긴 그림과 이 그림을 그린 열한 살 아동과의 대화를 보여 준다. 여기서 교사는 “좋아하는 과일”을 그린 거냐고 묻는데 아이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럼 왜 그린 거냐”라고 물으니까 “그냥” 그렸다면서, 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과일은 “딸기”라고 답한다. 그럼 열한 살짜리 아이는 왜 자신이 좋아하는 딸기를 그리지 않고 다른 과일을 그린 것일까? 아이의 대답은 이렇다. “어려워서요.”
이 사례는 그리기의 어려움을 적나라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교사가 ‘소극적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독자적인 것에 대한 인식‘ 또한 없다는 것이다.(본문 285~286쪽)
다른 겹으로, 아이들이 그리기를 무서워하는 진짜 이유는 “잘 그린다는 그 품평의 기준이 이미 사회 문화적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데 있으며 “잘 그린다고 하는 것에 개인의 재능의 차원이 있더라도 그것을 품평하는 기준과 가치는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저자는 잘라 말한다. 거기에는 개개인이 가진 ‘독자성’ 혹은 ‘고유성’이 설 자리가 없으며, 그렇게 ‘자기표현’은 배제되고 억압되면서 성장하게 되며 이것이 “아이들에게 주어져 있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더 많은 조력과 지원을 해야 하며, “비교감 속에서 위축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 해내는 것을 든든하게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다.(본문 286~287쪽)
미술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을 잘 보여 주는 사례를 하나 더 꼽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감동한 광경이기도 하다.
수수깡으로 만들기 활동을 하는 날이다. 평소에도 과잉 행동이 심해 친구들의 원성을 사고, 뭐든 집중력 있게 수행하기 어려워하는 한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은 수수깡으로 집이나 입체물을 만들고 있는데, 그 아이는 “수수깡을 그저 일직선으로 연결시키기 시작”한다. 고민할 것 없이 그저 단순 반복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수깡은 점점 길어져 마침내 교실 벽까지 길게 이어졌고, 아이는 망설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교사는 창문을 열어 주며 “창문 밖으로 계속 연장해 보라고” 권하고, 순간 아이의 눈은 반짝인다. “아이는 이제 본격적으로 친구들이 만들고 남은 수수깡을 주우러” 다니고 이에 다른 아이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다른 아이들도 “자신이 가진 수수깡을 들고나와 함께 연결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정말 교실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복도를 가로지르게 되자 교사는 “어디까지 갈 거냐고” 묻는다. 아이는 “집에까지 갈 거”라고 대답한다. 수수깡은 급기야 계단을 내려가고, 아이들은 “정말 집에까지 갈까?” 웃고 떠들다가 비로소 교실로 돌아온다. 결국 “아이의 행동이 가진 욕망을 읽어” 냄으로써 “새로운 발상으로 연결”된 이것은 아이와 교사가 만들어 낸 하나의 멋진 퍼포먼스로 내게는 다가온다. “아이와 교사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상상력이 폭발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협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본문 277~279쪽)
물론 교육 현장에서 미술교육이 이렇게 실행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미술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창의적 활동에 있어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교실은 다만 하나의 공간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아이도 교사도 새롭게 깨닫고 있지 않은가. 모든 수업이 이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술 수업에서는 가능한 지점인 것이니, ‘미술 교사 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모든 상황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여겨 항목마다 칸을 채워야 하는 NEIS 시스템으로는 이런 창의적이며 즉흥적인 미술 활동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편견과 신화에서 벗어나 미술을 즐기게 만드는 미술교육
미술교육에 있어 교사의 말 한마디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갖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술은 수많은 편견과 신화 속에 휩싸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편견과 신화, 혹은 거룩하고 엄숙한 자태로 똬리를 튼 엄숙주의의 폐해를 겪으며 우리는 성장했다. 미술 시장의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이렇게 된 혐의의 또 한 중심에 미술교육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술에 대한 무수한 편견과 신화의 진폭 속에서 우리의 미술은 짐짓 괴로워하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혹은 지나치게 번쩍거리는 화려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생한 미술 수업의 현장을 보여 주며 저자가 제안하고 있는 미술교육을 통해서라면, 아이가 자라 미술가가 되든 아니든, 미술을 즐길 만한 유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지의 생산자가 되든 소비자 혹은 향유자가 되든, 차별과 배제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주체가 된 창의적이고 상호 협동을 통한 미술 수업은 아이들을 보다 민주적인 어른으로 성장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또한 어린이들의 미술교육 현장을 다루고 있으나 미술 교사를 넘어 전업 화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술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어린이들의 교육 현장을 통해 추체험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자유롭고 창의적인 풍토에서 자라지 못한 내 또래의 예술가들은 이런 수업이 무척 부러울지도 모르겠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 지금의 자신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작품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 말이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이른바 ‘그림 잘 그리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 주는 엄청나게 많은 영상이 쏟아진다. 그것이 미술이든 아니든, 이른바 그리기의 ‘스킬’에 이들은 매달린다. 이 책 《우리는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을까》에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묻고 있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과 한 아이가 물감을 흘리며 만들어 낸 그림이 본질에서 그렇게 다른 거겠냐고. 혹은 서로의 얼굴 그림을 콜라주로 변형해 본 아이가 미술이 얼마나 재미나고 혁신적인지 모를 수 있겠느냐고. 하여 나는 말하고 싶다. 진심으로 미술을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시라고. 그리기를 넘어서 미술에 대한 이해에도 사뭇 다른 견해를 갖게 될 거라고. 더불어 이전보다 유쾌하고 즐거운 미술 감상의 길이 함께 열릴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었”는지, 나와는 무관한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깨닫게 될 수도 있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