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후속] 줄 위의 교육과 기초학력 (송민수)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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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기초학력은 교육을 어디로 데려가나



줄 위의 교육과 기초학력



송민수

min-ye79@naver.com

참교육학부모회,

《어쩌다 우리는 괴물들을 키웠을까》, 《도대체 내가 뭘 읽은 거지》 저자




5년 전쯤 거제로 이사를 왔다. 조선소 현장에서 배관 업무로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매우 낯설고 어려웠지만 함께 일하는 성현 씨가 친절하고 자세하게 알려 주어 많이 익숙해졌다. 여러 가지 공구를 정비하고 사용하는 방법부터 복잡한 도면을 보고 파이프를 설치하는 방법까지 성현 씨의 도움 덕분으로 조금씩 익혀 가고 있다. 배를 만드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알아야 할 것들뿐만 아니라, 일의 순서부터 일하는 방법까지 흔히 말하는 ‘일머리’가 없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다. 성현 씨는 정말 머리가 좋다. 함께 일하면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성현 씨는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 성현 씨도 도면을 보면서 가끔 간단한 더하기나 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성현 씨는 휴대전화의 계산기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중학교 때부터 ‘수포자’였다고 한다. 수학만이 아니라 공부를 좀처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초학력 미달자인 셈이다. 



호들갑을 떠는 이유


학생들의 기초학력이 떨어진다고 호들갑이다.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언론이 나팔을 부는 모양새다.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원격 수업과 스마트폰 사용 시간 증가로 인해 기초학력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있고, 국가 경쟁력도 하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10월 서울형 기초학력 평가 추진… 공교육 강화 첫발””

- 〈문화일보〉, 2023년 7월 13일

“강원특별자치도의회, 강원 학생 기초학력 진단·지원 강화된다”

- 〈더코리아〉, 2023년 7월 11일

“경기도 내 초등 저학년 기초학력 미달 비율 높다”

- 〈시대일보〉, 2023년 7월 7일

“중·고생 기초학력 미달 심각… 10년 새 5배 급증”

- 〈충남일보〉, 2023년 7월 6일

“文 정부 ‘학생 전수 평가 폐지’ 이후 기초학력 미달생 계속 증가”

- 〈조선일보〉, 2023년 6월 21일

“코로나로 학력 저하 심각… 초3·중1 전수 평가 적극 권고”

- 〈뉴시스〉, 2023년 6월 21일


‘고지식’을 높은 지식으로, ‘금일’을 금요일로, ‘사흘’을 4일로, ‘심심한 사과’를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과로 이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SBS〉 뉴스도 있었다. “영어 지문을 보기 전에 한글로 된 해석본을 먼저 읽어 보라”고 해도 해석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는 영어 교사의 고충을 소개한 〈이데일리〉 기사도 있다.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면서 기초학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실감나게 드러내고자 하는 보도들이다.  

언론 보도만 보면 곧 큰일이 날 것만 같다. 무언가 대처를 하지 않고 이대로 두면 아이들이 망가지고, 의사 소통에 문제가 생기고, 국가 경쟁력이 하락할 것만 같다. 학력 양극화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고 있고 학력의 지역 간 격차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만 같다. 그러니 지금 당장 바꾸어야 한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런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정답을 그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바로 진단과 평가다. 결국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시험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줄 위의 교육


지금의 정부와 언론은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기초학력에 미달하는 학생들을 진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학생이 기초학력에 미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진단’이 필요하다. 제대로 ‘진단’을 해야 그에 알맞은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학습 능력을 진단하는 방법은 대체로 시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학생이 틀린 문제, 풀지 못한 문제가 그 학생의 학습 능력을 진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이러한 시각은 문재인 정부에서 전수 평가를 폐지한 이후부터 기초학력 미달 학생의 비율이 증가했다는 〈조선일보〉의 보도와 정확히 들어맞는다. 학생들을 진단하지 못하게 했으니 처방을 내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학생들의 학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수 평가를 부활시켜 기초학력에 미달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력을 갖출 수 있도록 더 가르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게 왜 나쁜가? 공교육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 정부에서 내세우고 있는 기초학력 프레임은 똑같은 시험 문제로 전국의 학생들을 점수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들이 세워 놓은 줄 위에서는 그들의 주장이 옳게 느껴진다. 사람을 한 줄로 세우면 그 줄의 끝에 있는 부족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그것을 국가가 정책적으로 시행한다고 하니 좋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을 지원하면서 공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은 결국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시험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기껏 팔을 걷어붙이고, 나팔을 불면서 하고 싶었던 것이 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것인 셈이다. 기초학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기초학력’ 논의의 밑바닥을 살필 수밖에 없다. 

이명박, 박근혜, 윤석열 정권과 같은 보수 정권이 추구하는 교육의 목적은 동일하다. 그들은 참으로 집요하게 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고 싶어 한다. ‘킬러 문항’을 없애겠다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빼고는 전부 그렇다. 그들은 시험을 통해 끊임없이 학생들을 경쟁시킨다. 왜 그럴까? 경쟁을 통해서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일까? 어림없다. 지금과 같은 경쟁 교육의 우등생들로는 결코 노벨상 한 번을 받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들도 혼자 책을 들여다보며 외우기만 하는 공부의 한계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줄 세우는 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경쟁 과정을 통해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태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이다. 

지속적인 시험을 통해서 얻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다. 그들에게 출제자의 의도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은 위험하다. 문제에 의문을 가져도 안 되고,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된다. 오로지 출제자의 의도에 맞춰 주어진 문제를 풀기만 해야 한다. 출제자의 의도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곧 권력자와 기득권, 그리고 교수님과 직장 상사의 의도가 된다. 줄 잘 서는 자들이,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자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출세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줄 위의 교육’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시험을 통해서 한 줄로 서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학부모들도 그 줄 위에 늘어선다. 그 줄 위에 서면 시야가 좁아진다. 그리고 더 앞으로 가는 것만을 목표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더 나은 대학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한 명이라도 제치고 앞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기초학력 진단·지원, 공교육 강화’라는 달콤한 포장지 안에는 ‘줄 위의 교육’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변별력이 죽인 교육


줄 위의 교육은 ‘객관성’, ‘공정성’, ‘변별력’을 지상 과제로 삼는다. 선발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객관성, 공정성, 변별력은 선발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육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교육은 선발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우리가 논술형 문제와 서술형 문제를 거북하게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문제가 교육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놈의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변별력 때문이다. 

학생들은 제대로 된 평가권도 없는 교사들이 변별력을 고려하여 검인정 교과서 안에서 출제하는 객관식 문제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조건 하에서 공정하게 풀어야 한다. 학생들은 교과서 안에서 출제될 문제나 생각하며, 출제자가 정한 정답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필기한 것을 그대로 외워서 시험을 본다. 무엇을 어떻게 배웠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배움의 과정에서 학생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꼈는지, 그리고 어떤 의문을 가졌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배움의 과정은 무시되고 시험의 결과만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제도가 자리 잡은 이유는 교육의 목표를 오로지 선발에 두었기 때문이다.

객관식 시험은 출발부터 교육을 위한 평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한 평가로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객관식’이라고 부르는 시험 문제는 1914년 프레드릭 켈리가 대규모 집단을 시험하기 위해 개발한 선다형 문제다. 값싸고 빠르게 대규모 집단을 분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험인 것이다. 많은 사람을 손쉽게 한 줄로 세우기 위해서 고안된 선다형 시험은 해방 후 미국 교육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선다형 시험은 채점하는 사람이 주관적 판단으로 채점을 할 수 없다. 1번 보기가 답이면, 나머지 2, 3, 4, 5번은 틀린 것이다. 누구의 시험지이든지, 누가 채점을 하든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선다형 시험을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를 위한 문제는 결국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선택된 것이다. 객관성은 그저 채점 과정의 투명성을 뜻할 뿐, 학생들이 풀어야 할 문제 자체가 객관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객관’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뜻은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함’이다. 객관식 시험은 점수를 위해 죽은 지식을 잠시 기억하고 있게 할 뿐, 오히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더군다나 변별력을 위해서는 시간의 압박이 중요하다. 수능 시험의 시간을 넉넉하게 준다면 점수의 격차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내에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학교를 벗어나기만 하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살펴보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문제를 푸는 능력보다 질문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변별력을 우선하는 시험에서는 깊게 사고하는 것도 질문하는 능력도 모두 필요치 않다. 많은 문제를 시간 내에 푸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킬러 문항’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점수에 여러 명의 학생들이 있으면 변별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놈의 공정한 선발을 위해서는 ‘킬러 문항’으로 학생들을 변별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문제를 단지 학생들을 변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제하는 것이다. 이런 죽어 버린 ‘객관식 시험’과 억지스러운 ‘변별력’이 우리가 떠받들고 있는 ‘공정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발을 위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이 어쩌다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변별력에만 몰두하게 되었을까? 가진 자들의 불법, 편법, 특권이 판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시험을 벗어난 세상은 불공정하기만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이용해 계속 더 가질 뿐이다. 공정하지 않은 세상, 불합리한 세상, 특권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녀들에게는 개천의 용이 될 ‘기회’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객관성’, ‘공정성’, ‘변별력’을 중요시하는 시험 제도를 지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교육보다 선발을 더 우선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을 것이다. 내 자식을 어떻게든 개천의 용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교육을 우리 아이들을 구분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것이다. 선발을 위한 교육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선발될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헛된 욕망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헛된 욕망은 불평등한 구조와 부도덕한 지배층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얻은 수능 점수와 입학한 대학 합격증으로 평생의 공부를 다 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교육을 바꿔야 한다. 고작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한 공부가 배움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지금의 교육과 사회 시스템은 뿌리부터 잘못됐다. 선발을 위한 교육은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는 소수의 괴물과 그들을 우러러보며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는 루저를 만들어 낼 뿐이다. 무엇보다 선발을 위한 교육은 이기적인 존재를 양산한다. 

선발을 위한 교육은 협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메마르게 한다. 창조적인 생각의 싹을 짓밟는다. 세상에 의문을 갖지도 못하게 하고, 자신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한다. 우리의 삶을 넓히는 큰 질문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관심 있는 책도 보지 못하게 하고, 친구들과 관심 있는 문제에 대해 깊은 토론도 하지 못하게 한다. 선발을 위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이제 우리, 시험 점수를 올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이런 교육을 그만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 자식을 리더로 만들겠다는 생각 좀 버리고


아직도 대한민국은 OECD에서 주관하는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PISA)에서 최상위권이다. 대학 진학률도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학력 좀 떨어져도 된다. 설사 ‘기초학력’이 부족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험을 더 잘 보게 만들기 위한 ‘기초학력’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과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진짜 공부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기초학력 미달자를 위한 추가 학습이 아니라, 즐거운 배움의 과정이다. 검인정 교과서 체계도 더 자유롭게 바꾸고, 교사들에게 제대로 된 평가권을 주자. 질문하고, 배우고, 익히고, 읽고, 토론하는 그런 교육을 만들자.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행복한 이야기에 잠시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정부가 이야기하는 ‘기초학력’은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교육과는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간다.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는 교육으로, 객관성과 공정성 그리고 변별력을 중시하는 교육으로, 선발을 위한 교육으로 가는 길 위에 ‘기초학력’이 있는 것이다.

어떤 나라든 그 나라의 교육 시스템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들이 그 사회의 리더가 된다. 나는 교육을 통해 배출된 우리 사회의 리더들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교육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과 같은 선발을 위한 교육 환경 속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리더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시험 문제만 풀 줄 아는 자들이 리더가 된 사회를 우리 지금 충분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내 자식을 우리 사회의 리더로 만들겠다는 생각 말고, 우리 사회에 어떤 리더가 필요한지를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성현 씨는 기초학력 미달자이다. 맞춤법도 자주 틀리고, 계산도 느리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나는 성현 씨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고백하자면 그 앞에서 내가 참 멍청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성현 씨는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사물을 한쪽에서만 보지 않고, 여러 관점에서 바라본다. 일의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 속도를 조절해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두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할 때도 있는데, 그는 일의 특성에 맞춰 시간을 늘리기도 줄이기도 한다. 그렇다. 그는 일을 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조절한다. 나는 도저히 그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성현 씨가 기초학력 미달자가 된 것은 성현 씨의 잘못일까? 혹시 학교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대한민국의 교육 전체가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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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