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호[특집] 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정은경, 현유림, 안준철, 최성용, 엄기호, 박복선)

2023-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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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노동, 교육 불가능

- 교사들의 고통과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각자도생 학교

정은경 _ 6년 차 초등 교사, 교육노동자현장실천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현유림 _ 초등 교사이자 노동자

학교공동체가 변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안준철 _ 전 전남 순천효산고 교사

누가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는가

최성용 _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강사

교육에는 대화가 있는가

엄기호 _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교사들의 분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박복선 _ 전환교육연구소 소장, 본지 편집자문위원





각자도생 학교


정은경


각자도생의 사회라고들 한다. 학교도 딱 그렇다. ‘창의·배려·소통으로 꿈을 키우는 행복교육’, ‘존중·배려·협력으로 성장하는 희망교육’, 학교 앞에 걸린 이런 아름다운 수식어들은 다 거짓이다. 각자도생 사회, 서로가 적이 되어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도록 사회를 세팅해 놓고 누구도 죽지 않길 바라는 건 모순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를 말했던 학생의 죽음에 이어 ‘업무 폭탄과 학생 난리가 버겁다’라는 말을 남긴 교사의 죽음으로 수많은 교사들이 거리로 나왔다. 1986년 학생의 죽음과 2023년 교사의 죽음은 공통적으로 교육을 경쟁으로 옥죄고 착취의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 자본주의가 불러온 ‘사회적 타살’이다. 나는 아직 ‘운이 좋아’ 살아 있지만 서이초 교사가 겪은 일은 나의 일,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교사들은 각자도생 학교에서 ‘독박 노동’을 하며 생존의 위기 앞에 서 있다.



분업화된 노동,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교사가 행정 업무에 시달리며 정작 수업 준비를 할 시간은 없다는 말은 하루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신규 발령을 받고 처음 학교에 간 날, 협의 과정 없이 통보받은 학년은 그 학교에서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했던 학년이었다. 주어진 업무는 ‘학습 준비물’, ‘과학’, ‘영재’, ‘환경’이었다. 학교 전체 학습 준비물을 취합해서 주문하고, 과학실 안전 관리와 과학의 날 행사를 추진하고, 영재 교육과 관련한 서류를 처리하고, 각종 환경 관련 공문서를 처리했다. 하루종일 공문서를 들여다보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야 다음 날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신규라서, 저경력이라 서툴러서 당연한 거라 여겼다. 교무실과 행정실을 바쁘게 오가던 어느 날, ‘학교 총괄’ 업무를 맡은 교장이 교장실에서 개인 연주회를 위한 악기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교사로서 내가 맡은 노동이 무엇일까? 학교 안의 노동은 누가 어떻게 분담하고 있을까? 질문하기 시작했다.


교사는 보통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수업이라고 퉁쳐지는 교사의 업무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수업은 교육과정을 연구하고, 학급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수업을 기획하고, 적절한 수업 자료를 만들고, 학생 한 명 한 명과 상호작용하며 피드백을 하는 일련의 노동을 말한다. 학생과 관계를 형성하고 학생의 성장을 지원하는 상호작용과 보호자와 관계 맺고 소통하는 노동도 포함한다. 이 과정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고 해결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동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쉽게 간과되며 교사의 ‘업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대신 수업이 아닌 행정 업무가 교사의 ‘업무’로 부과된다. 수업 노동은 오롯이 교사 혼자의 일이 된다.


학교 안 노동은 업무 분장표에 적혀 있듯 빼곡하게 분업화되어 있다. 분업화는 학교에서 각자가 맡은 업무를 철저히 담당자 개인의 몫으로 만든다. 학교 체육 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일은 모두 함께 고민하고 꾸려 나갈 교육 활동이 아니라 ‘체육교육’ 업무를 맡은 담당 교사의 몫이다.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해도 그건 학교폭력 업무를 맡은 교사의 몫일 뿐이다. 교실에서 학생들 간 갈등이 발생해도 그건 학급을 맡은 교사의 몫일 뿐이다. 포드가 조립 라인을 도입하여 생산성만 강조하면서 노동의 의미를 해체했던 것처럼 교육도 분업화되고 파편화되었다.


학교 안 노동자 정원은 계속 줄어드는 반면 학교가 운영되기 위한 기본적인 업무는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는 계속 과중되어 왔다. 관례적 업무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대신 사회적 문제를 쉽게 교육 탓으로 돌리면서 학교의 업무가 늘어나기도 했다. 늘어난 업무는 학교 안의 약한 고리로 떠밀려 온다. 교장, 교감에서부터 교사에게로 각종 행정 업무와 민원이 떠밀려 온다. 기피 학년과 기피 업무가 신규·저경력 교사나 전입 교사에게 떠밀려 온다. 정규직 교사에게서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떠밀려 온다. 이 업무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업무인지, 누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은 지워진 채 그저 각자의 업무에 고립된다. 서로가 업무 말고도 서로를 떠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약한 고리로 밀려 온 업무는 끝내 노동자를 죽음에 잠기게 했다. 하지만 ‘내 담당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능력주의와 무너진 학교 민주주의 속의 독박 노동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강조하며 경쟁 교육과 독박 노동을 정당화시킨다. 나는 ‘성적’이라는 틀에 모든 다양성을 구겨 넣을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숨 쉴 곳을 찾아 새로운 교육을 시도하는 혁신학교로 왔다. 지식 암기 능력을 겨루는 시험 대신,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 성장 평가를 시행했다. 사실 초등학교는 2011년부터 순차적으로 중간·기말고사 같은 지필 시험이 폐지되고 교과 상시 평가나 성장 평가가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 안 봐요?”가 보호자와 학생의 단골 질문이었다. 안 본다는 대답에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보호자는 답답해했다. 심지어는 보호자가 “학교에서 환경, 인권 이런 거 교육하지 마세요. 그런 건 집에서 알아서 할 거고 학원 보낼 필요 없게 공부나 제대로 시키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능력주의가 얼마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 사회가 기대하는 학교교육의 기능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더 놀라웠던 것은 동료 교사들의 반응이었다. 교사들은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을 불안해했고 시험을 통해 ‘학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책무라 여겼다. 매일매일 쪽지 시험과 단원 평가가 시행되었고 학생들은 서로의 점수를 물으며 자랑스러워하거나 위축됐다. 배움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것이 되었다. 학생들은 “내 거 베끼지 마!”, “넌 이것도 몰라?”, “너는 못해서 같이 하기 싫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능력주의가 정당화하는 ‘성적’이라는 틀은 교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승진 제도와 성과급은 교사를 ‘성과’라는 틀에 가뒀다. 승진 제도는 교사가 하는 교육 활동을 점수 매겨 교육 활동을 승진을 잣대로 판단하게 만들었다. 승진 가산점은 학교폭력에도 적용되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교폭력 예방 교육과 학생 상담도 ‘성과’로 만들어서 학생의 상처마저 교사의 능력으로 계산해 버렸다. 성과를 매겨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성과급제는 누군가가 기피 학년과 기피 업무를 맡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학교폭력 업무는 S등급’이라는 성과급 기준표는 기피 업무를 돈으로 쉽게 보상해 버림과 동시에 그 업무를 오롯이 개인에게 떠안겨 버렸다. 성과급 기준표를 논의하면서 교사들은 누가 더 힘든지 경쟁하는 한편 더 편한 학년과 업무를 맡기 위해 경쟁한다. 자연스레 교사들의 연대와 협력은 무너졌다.


학교 구성원 간 소통과 신뢰가 무너졌기에 학교 민주주의도 무너졌다. 민주 시민을 양성해야 하는 학교지만 학교에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게 오직 교장이 의사 결정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교직원이 모두 모여 A를 합의해도 B라고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교장에게 있다. 보직 교사 회의, 교사 회의에서 협의를 하고 교장이 결정한다. 어렵게 모아 낸 의견도 교장에 의해 쉽게 뒤집어지는 구조 속에서 교사들은 무기력해진다. 승진 제도는 권위에 맞서 목소리를 내기 더욱 어렵게 한다. 협의할 자리조차 주어지지 않고 소수가 정보를 독점하며 결정을 내리고 통보하는 방식이 대다수 학교의 모습이다. 교사의 목소리는 죽어 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더 쉽게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목소리에 익숙해져서일까. 혁신학교에서 시도했던 ‘교직원 다모임’은 교직원이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는 과정이 비효율적이며 힘들고 시간 낭비라는 평을 들었다.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악화된 노동 환경, 과밀 학급과 과중한 업무는 서로 만날 시간과 공간을 삭제했고 서로를 돌볼 여유를 뺏어 버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육부는 교원 정원을 줄일 것을 발표했다. 학교 구성원이 모두 모일 시간도, 모일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학교 안에서 서로는 소외되고 병들어 갔다. 동료 노동자가 업무 폭탄으로 힘들어해도, 불안정한 일자리로 생계를 걱정해도, 악성 민원 전화에 상처를 받아도, 폐암으로 죽어 가도 당장 나의 생존이 우선일 뿐이다. 학교공동체는 없다.



동료의 눈을 마주 보는 것부터


노동이 분업화되어 개인에게 떠맡겨지고, 노동자 간 연대와 협력이 무너진 각자도생 학교 안에 남아 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동료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공간 밖으로 나와 동료와 눈을 마주 보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그리고 함께 외치자. 죽음의 구조를 이제 그만 멈추라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동료와 더 많은 인권과 더 많은 민주주의다. 교육은 더 이상 성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경쟁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학교 구성원 모두가 소외되지 않고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위해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여건과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동료를 신뢰하며 협력하고 연대하는 공동체,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가 학교여야 하고 우리 사회여야 한다. 우리 함께 안전한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 함께 살자. 


❶ “인력 부족·과다 업무에 갈등하는 학교 노동자들”, 〈매일노동뉴스〉, 2022년 10월 28일.

❷ “초등 성장 평가제 도입했더니 ‘학생이 변했다’”, 〈뉴스1〉, 2016년 2월 20일.

❹ “유초중등 교사 채용 감소 예고… 교원단체 “과밀 학급 방치하나””, 〈뉴시스〉, 2023년 8월 9일.

❺ “교사단체들, “윤석열 정권의 ‘교권’ 대책을 거부한다””, 〈민플러스〉, 2023년 8월 8일.






내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다


현유림


나는 기간제 교사다. 학교에서의 일이 3년 차이지만, 이제서야 한 호봉을 인정받은 기간제 초등 교사다. 임용 시험 공부를 하고 있지만 언제 정교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비정규직 교사로 지내고 있는 나에게는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어떤 입장을 가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상황에서 꼭 이야기되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교권’이라는 말이 불편하다. 정부에서 교권 보호를 명분으로 학생인권을 무시하는 행태를 보며 이제는 더 이상 학생인권의 반댓말로 교권이 쓰이게 두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긴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 보고 겪은 것은, 많은 선생님들이 연차와 상관없이 굉장히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사에게 학생을 개인적으로 벌할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사의 노동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과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다.


작년에 담임이 여러 번 바뀐 고학년 교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학생들 대다수는 수업을 듣지 않았고, 반 1/3에 달하는 학생들이 성적인 농담을 일삼으며 낄낄대는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학교 관리자에게 처음으로 어렵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관리자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주변 교사들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래서 애들을 때릴 수 있어야 하는데’라고도 했고, ‘선생님이 너무 착해서 애들을 못 잡아서 그렇다’라고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매일 자책을 했다. ‘이게 정말 내 탓인 걸까? 이 학교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게 정말 내가 어리고 물러서이기 때문일까?’ 나는 억울했다. 관리자에게 면담 및 상담으로 불려 가느라 정작 수업 준비하는 시간은 다 빼앗기고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분들이 마련해 주는 대책은 없었다. 잠을 자기 전에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내가 어린이들을 때리지 못하고, 무섭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결국은 동료 교사와 관리자의 말처럼 내가 ‘무능’한 교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괴로운 걸까? 그렇다면 나의 괴로움은 다 내 탓이 되는 거다. 내가 죽거나, 숨을 못 쉬게 된다 하더라도 그건 그냥 내 탓이다.


힘든 학생들로 인해 정말 괴로웠고, 그 학생들을 진심으로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관리자에게서 단지 상담과 조언만이 아닌 다른 방식의 지원을 받고 싶었다. 예를 들면 교감 선생님께서 따로 학생들과 수업을 해 주시거나,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서 교사 혼자 또는 두셋이 팀을 이루어 학습 분위기를 원만히 조성할 수 있는 그런 실질적인 방법들 말이다. 나는 어린이의 인권을 짓밟고 찾는 평화는 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것은 학교의 또 다른 취약한 구성원인 저연차 교사 또는 여성 교사, 또 다른 비정규직 교사에게도 폭력으로 돌아올 것이다. 교사에게 어린이를 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교사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권리가 아니라 위력이 될 뿐이다.


5년 전, 나는 스쿨 미투의 물결에도 함께 참여했었다. 그때 가해 교사들이 했던 말들이 ‘그건 다 교육 목적이었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이 예뻐서 한 거였다’ 등이었다. 지금 많은 교사들이 주장하는 아동학대 면책과 같은 방법은 교사에게 ‘아동학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아주 이상한 말을 붙이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이 말이 수치스럽다. 내가 계속해서 기간제이든 정규직으로 발령을 받든 어디에서도 ‘아동학대를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2023년 9월 4일 49재 집회 현장  ⓒ 최승훈 기자



학급당 학생 수가 20명만 넘어도 대부분의 교사가 정말 힘들어한다. 점심시간만 지나도 온몸의 진이 다 빠져 쌓인 업무를 건드릴 수조차 없는 날이 반복된다. 하지만 교육부는 낮은 출생률 운운하면서 교사 수를 계속 줄이고만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괴로운 담임 교사들이 병 휴직을 내도 기간제 교사를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누적된 불만과 교육 현장 개선의 교사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교원 임용 TO는 대폭 줄 예정이다. 결국 정부는 돈은 쓰기 싫고 아무런 노력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같다. 교사들은 말을 잘 들으니까, 20만 명 넘게 모이는 집회에서도 청소 잘했다고 경찰한테 칭찬받았다고 으쓱해하니까, 대충 학생인권이랑 싸움 붙이고 학대해도 괜찮은 사람 만들어 주는 걸로 권리를 보호해 주는 척하며 예산과 노력은 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학교 노동자다.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학교 노동자다. 나에게는 인권이 있고 노동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있다. 교사는 성직자가 아닌 노동자다. 성직자는 성당에 있고, 절에 있고, 교회에 있다. 나는 월급을 받고 (비록 기간제이지만) 일을 하러 학교에 간다.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나는 노동자로서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부는, 정부는 학생을 적으로 돌리는 이상한 말과 대책 말고 학교의 주체들이 모두 평화롭고 안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학교공동체가 변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안준철


오래전에 학교를 떠났다. 매일 아침 동네 초등학교에 가서 맨발 걷기를 하고 있지만 그곳은 건물과 토지로서의 학교일 뿐이다. 교직 2년 차 새내기 교사가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비극적 선택을 한 날, 나는 전직 교사 혹은 선배 교사로서 부끄럽고 참담했다. 그날 이후 막혔던 봇물 터지듯 쏟아진 후배 교사들의 절규에 가까운 고백과 외침을 통해 학교가 지옥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직 완전히 학교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학교가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을까? 돌이켜 보면 ‘교실 붕괴’ 현상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그 후에는 교육계 일각에서 ‘교육 불가능’ 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교사들은 이런 현상들로 인해 자괴감과 낭패감을 호소했을지언정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 교사들은 ‘교사를 보호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안전하게 교육할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상황이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 교사들은 아동학대 관련 법을 지목하며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법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아동학대에 대한 국가적 개입의 필요성 때문에 2014년 제·개정되었고, 교사도 아동학대를 저지를 수 있는 ‘보호자’에 포함되어 신고-출동-조사-격리의 절차를 따르도록 되어 있다. 말하자면 교사는 교육 제공자이자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이중 구조에 갇히게 된 꼴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의 교육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누구와도 상의하거나 협조를 요청할 수 없는 각자도생의 환경이라면 일부 학부모의 갑질과 악성 민원은 교사의 생존을 위협하는 어머어마한 공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경험이 일천한 새내기 교사의 경우 이런 끔찍한 상황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거기에 학기 초 업무 폭주까지 더해지면 그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날 깊은 슬픔과 절망감에 휩싸여 관련 기사를 찾아 읽다가 나는 한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부모가 교사의 개인 전화로 전화를 했다는 대목이었다. 이게 왜 문제가 되지? 나중에야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의 개인 전화로 직접 소통을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이초 사태 이후 교육부도 교사 개인 전화 대신 업무용 전화를 사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나는 놀랐고, 저간의 사정이 이해되기도 했지만, 강한 의문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사랑의 소통이 금지된 건조하고 삭막한 곳에서 교육이 제대로 꽃필 수 있을까?


현직에 있을 때 개학하기가 무섭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담임한 반 학생들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 주는 것이었다. 학기 초에는 학생 집으로 전화를 걸어 전화 면담을 길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개학 전에 얼굴도 모르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혹시라도 어려운 사정이 있는지 전화 상담을 하기도 했다. 내가 30년 동안 근무한 학교가 가정적으로 힘든 아이들이 다수 존재하는 전문계 특성화고라는 특수성이 있긴 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교권 추락의 원인을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정부와 여당은 학생인권조례와 무관하지 않은 진보 교육감 죽이기에 나섰다. 학생인권은 교권과 상관없이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임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일부 보수 기득권층의 편향된 시각을 반영한 결과라고 이해한다.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것은 상식이다. 이에 대해 거리로 나온 교사들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낡아빠진 옛날의 교권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만약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적 관계라면 교권의 신장은 학생인권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 다음에는 국회의사당으로 학생들이 몰려가지 않을까? 다행히도 교사들은 시대착오적인 정부 관리들과는 달리 교사로서의 자세와 결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난 교사 추모 대회에서 자진하여 무대에 오른 한 기간제 교사의 ‘학생을 학대해도 괜찮은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다, 실질적으로 법의 보호를 받고 싶다’라는 즉흥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대규모 추모 집회에 참석한 교사들의 엄청난 숫자와 기세에 눌렸는지 이주호 장관은 참여 교사에 대한 징계 방침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법을 일부 개정하면 학교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인가? 정부는 낮은 출생률을 말하면서 교사 수는 계속 줄이고 있다. 사람을 살리는 삶을 위한 교육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과도한 입시 경쟁 교육도 여전하다. 무엇보다도 각자도생의 삭막한 학교 환경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학교공동체가 변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다.  


며칠 전에 내가 존경하는 혁신학교 교장 선생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읽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이가 평교사로 남자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다. 2학년 수업을 맡았는데 유독 한 반이 어려웠다. 껄렁한 몇 학생이 수업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했다. 지속적으로 지적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교사 독서 모임이 있던 날, 문제의 학급에 들어가는 선생님들이 모두 좌절감을 토로했다. 개별 교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하고 동료 교사들에게 공동 대응을 하자고 했다. 당분간 그 학생들을 따로 떼어 내 상담도 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책도 읽고 글도 써 보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다행히 교감 선생님이 좋은 분이어서 선생님들의 공동 대응을 적극 지지해 주었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교사의 공동 대응 이후 학생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는데, 그 과정이 생각보다 순탄해서 ‘원래 저런 녀석들이었나’ 싶을 정도였다고 한다. 생각보다 나쁜 아이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혁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이때의 경험을 살려 전체 교사의 다모임과 학년 교과 모임, 학습공동체 모임 등을 꾸리게 된다. 교장 자신도 부적응 학생 지도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힘든 학생의 경우 성장 교실이라 해서 학습 지원이나 정서적 지원을 하는 멘토-멘티를 정한다. 망설이는 학생들은 설득하고 학부모들의 동의도 얻었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학교공동체가 협동의 힘을 발휘하여 하나씩 풀어 나갔다. 글 말미에 잠깐 마음이 출렁했다. 그 대목을 소개하며 어쭙잖은 글을 마친다.  


“수업 방해 학생들은 어떤 면에서는 마음이 아픈, 좌절한 학생들일 수 있으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설득과 교육으로 잘 품어 안는 것이 일반적으로 되기를 바란다.”






누가 ‘방패막이’가 되어야 하는가


최성용


2018년 10월, 경기도 김포시 한 어린이집의 30대 여성 보육 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보육 교사의 아동학대를 제보하는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와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고 이윽고 보육 교사의 신상 정보까지 노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밝혀진 바 소문은 오해였으며 해당 아동과 교사는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아동의 모친과 교사는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었으나, 정작 유언비어는 불식되지 않아 악성 댓글과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그 아동의 이모가 계속 항의하며 어린이집을 찾아가 교사에게 물을 뿌리고 무릎을 꿇게 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 끝에 보육 교사는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검찰은 아동의 이모를 폭행 혐의로,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 2명을 명예 훼손 혐의로, 어린이집 원장을 「개인정보 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020년 인천지법은 이모의 폭행죄를 인정하였으나 그 외에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나는 서이초 교사의 비보를 접했을 때 이 사건을 떠올렸다. 5년의 시차를 두고 두 죽음은 이어져 있었다. 비록 보육 교사가 초등 교사보다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사회적 위치에 놓여 있지만, 근본적으로 두 여성 청년 노동자 모두 조직이 지켜 주지 않는 가운데 ‘진상 학부모’에 시달리며 고립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2018년의 보육 교사들은 억울함과 분노를 말하지 못했다. 지금도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게 어려울 만큼 보육 교사들은 취약한 조건하에 있고, 사회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2023년,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되새기며 제 목소리를 잘 내지 않던 교사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렇기에 교사들의 울분과 사회적 관심이 만들어 낸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현재의 국면은 근본적인 질문을 요구한다. 교사들이 교실 현장에서 겪는 문제가 더 깊고 넓은 사회적 위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단순히 ‘갑질’하는 ‘진상’ 학부모와 말 안 듣는 학생이 많아진 것이 문제의 원인인가? 그들을 억누르기 위해 ‘교권’을 확립하는 것으로 문제가 불식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교권 담론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교실 안에 가두고 개별 교사-학생의 문제로만 국한함으로써 교실을 둘러싼 더 넓은 맥락을 비가시화한다. 과연 김포 어린이집의 보육 교사에게 필요했던 게 ‘교권’이었을까? 더 근본적인 문제를 포착하기 위해 ‘노동권’ 개념을 제안해 본다.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을 사회적으로 적절히 애도하기 위해서라도, 고인을 ‘여성 청년 노동자’로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구조적 문제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성찰은 취약한 위치에서 사회적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 온 다른 여성 청년 노동자들로부터 배우는 것을 통해 더욱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회 붕괴 상황에서 여성 청년 노동자의 자리


먼저 ‘청년 노동자’라는 위치성부터 짚어 보자. ‘청년’은 매우 다양한 위치와 정체성이 뒤섞인 개념이지만, 생애 과정에서 이행기에 위치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즉 교육에서 노동 시장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 놓인 청년들 다수가 공유하는 취약성이 있다. 그렇기에 청년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신입’이자 ‘막내’라는 위치로 인해 저임금, 직장 내 괴롭힘이나 부당한 업무 지시, 과로 등을 감내하도록 요구받는다. 지난 몇 년간 청년 노동자는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재 사망의 희생자로 조명되어 왔다. 구조적으로 위험 업무는 원하청 관계에서 아래로 흐르고, 그 업무를 전가받은 n차 하청의 영세 사업장은 그 내부에서 정직원이 아닌 계약직 및 파견직 노동자에게 위험 업무를 맡긴다. 또 그중에서도 업무의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할 만한 지식이 부족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역량이 부족한 ‘신입’, 즉 청년 노동자에게 위험 업무가 전가된다.


올해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일어난 전북 전주 콜센터 현장 실습생 사망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교육생’, ‘실습생’, ‘인턴’이라는 이름의 청년 노동자는 ‘임시적’이라거나 ‘과도기’라는 이유로 노동자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다. 기업은 청년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노동자의 탓으로 돌린다. 현장 실습생의 경우 학교 역시 취업률 관리를 위해 노동자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이렇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고립’되어 자살로 이르게 되는 것은 콜센터 상담사, 보육 교사, 서이초 교사와 같은 여성 청년 노동자들의 비극에 공통된 맥락이다.


조직이 보호와 책임을 방기하고 노동자를 오히려 등 떠밀 때 역설적이게도 보호와 책임을 다하는 건 바로 노동자가 된다. 책임을 위한 권한도 역량도 제공되지 않은 채, ‘진상’, ‘악성 민원’, ‘갑질’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이다. 김관욱은 콜센터 노동자의 이 같은 역할을 ‘방패막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교사들이 현재 겪고 있는 상황에도 적절한 표현이다. “상담사들이 전화 상담을 통해 지키고 있는 진짜 대상이 존재한다. (……) 콜센터 산업의 특징은 상담사와 고객과의 비대면을 넘어 바로 고객과 고용주와의 비대면이라는 점에 있다.”


기업이나 공공 기관을 향한 ‘진상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진상 학부모’의 이면에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불신과 억울함이 있다.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는 건 여성 청년 노동자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채 자력 구제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인 데다, 세월호 참사에서 코로나19 유행, 이태원 참사나 오송 참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시민들은 국가를 믿지 못한 채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재난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국가를 향한 이 불신은 당장 눈앞에 있는, 가장 말단이자 현장에서 교과를 가르치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돌보는 교사들을 향한다. 그렇게 교사들은 사회 붕괴의 상황에서 국가와 학교의 ‘방패막이’가 되어 사회적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다.


교권 담론이 보지 못하는 것은 이렇듯 교사들이 겪는 ‘갑질’이 단순히 ‘진상 학부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붕괴된 사회와 국가·학교라는 두 방향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여러 겹의 취약성을 지닌 여성 청년 노동자들은 양쪽으로부터의 ‘갑질’ 사이에 끼어 소리 없이 죽어 왔다. 이는 콜센터, 어린이집, 초등학교와 같이 여성 청년 노동자들이 많은 직업의 특성과 맞물려 있다.


근대적 성별 노동 분업하에서 ‘감정 노동’, ‘돌봄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일들은 성별 규범에 맞추어 여성에게 적합한 일처럼 여겨지며, 실제 주로 여성들에게 할당됐다. 그렇기에 직장의 관리자와 ‘진상 소비자’로부터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취급되며 그들을 달래고 어르고 돌보며 온갖 감정들의 쓰레기통이 되는 것까지도 업무의 일부로 경험하게 된다. 특히 현재 사회 붕괴의 상황에서 그 스트레스가 집중적으로 전가된다. 여기에 더해 어리고 경력이 짧을수록, 그러니까 청년일수록 더 강한 강도로 이를 경험하게 된다. 서이초 교사가 겪은 부당함과 고립은 이렇게 여성-청년-노동이 교차하는 자리에 놓여 있다.



노동권,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질 권리


연구자로서 나는 다양한 직종, 직업의 노동자들과 만나 그들을 인터뷰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직업을 폄훼하고 비하하는 노동자를 만나 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경시되거나 비하되기 쉬운 직업의 경우에도, 그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노동자들 모두 자신의 일의 의미에 자긍심을 표현했다. 자기 일을 향한 보람과 긍지를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둘러싼 부당한 환경과 조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권’이란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이 노동에 자긍심을 가질 권리를 의미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는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가 있다. 교사의 경우에는 학교 및 조직으로부터, 학부모와 학생으로부터 안전이라는 두 차원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특히 관리자와 조직이 교사 노동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교권을 외친들 학교 현장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억누를 수는 없다. 갈등은 민주적 관행과 문화, 이를 보장하는 제도를 통해 더 나은 학교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전환’의 계기로 다뤄져야 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행정 업무만 늘어나는 단기적 처방과 가시적 성과 추구에 그치는 행정 편의적 대처 대신에, 담임 교사, 교장, 교감, 학부모, 학생, 지역 사회 및 전문가들이 참여해, 속도가 느리고 성과가 비가시적이지만 갈등을 상호 신뢰의 구축 과정으로 전환해 가는 제도적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교사의 자율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교사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교사를 보호함으로써 교사가 더 좋은 수업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교사의 자율권을 보장해 줄 것이다.


결국은 시스템이 변해야 한다. 불신을 신뢰로 전환하는 과정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건 지난한 일이지만 이는 교실을 넘어 붕괴된 사회 전체를 향한 교육적 과정일 것이다. 또한 무책임한 이들 대신, 적극적으로 교사를 보호하고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어 갈 의지와 역량이 있는 사람을 관리자로 진급시키는 인사 평가 시스템도 갖추어야 한다. 더 크게는 교육이 입시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거창한 논의들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성장하는 좋은 교실을 만들어 자신의 일에 보람과 자긍심을 갖고 싶다는 교사의 소박한 바람에 근거한 것이다. 교권이 아니라 노동권이 그 바람의 더 정확한 명명일 것이며, 그 이름을 통해 오늘날 사회 붕괴의 상황에서 부당함을 겪는 다른 여성, 청년, 노동자들과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❻ 하영(2023),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 《오늘의 교육》, 75호(2023년 7·8월), 39~40쪽.

❼ 천주희(2019), 《회사가 괜찮으면 누가 퇴사해》, 바틀비, 54쪽.

❽ 전혜원(2021),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서해문집, 217쪽.

❾ 천주희(2019), 앞의 책, 30쪽.

❿ 김관욱(2022), 《사람입니다, 고객님》, 창비, 354쪽.

⑪ 전세란(2023), 〈‘교육 사법화’와 ‘교권 강화’를 넘어,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로〉, 《오늘의 교육》, 72호(2023년 1·2월), 26~27쪽.






교육에는 대화가 있는가


엄기호


교육은 배우는 자의 욕망과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 사이의 갈등이다. 많은 경우에 배우는 자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배우려고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배움의 효능감이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의 시선은 멀리 보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교육(education)이기보다는 훈련(training)일 경우가 많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몸’을 만드는 것 — 문제를 푸는 ‘머리’도 몸이다 — 에 관심이 집중된다.


반면 가르치는 자가 생각하는 교육은 훈련과는 다르다. 가르치는 자는 지금 당장 필요한 것보다 배우는 자의 현 상태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고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기획한다. 따라서 가르치는 자는 배우는 자가 요구하는 것과 달리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며 배우는 자의 욕망에 어긋나게 행위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의식 중심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는 ‘의식’을 중심에 둔다.


이 둘 사이에서 교육은 여러 가지 경우에 불가능해진다. 첫 번째는 배우는 자가 아무런 욕망이 없을 때다. 배우는 자가 욕망이 없이 무기력하면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과 만나는 것이 없다. 이 경우 교육은 가능하지 않다. 반면 가르치는 자가 문제의식이 없을 경우에도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욕망을 추종하기만 한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맞춤형 상품을 파는 서비스에 불과하다. 거기에 ‘만족’은 있겠지만 성장은 없다. 


마지막은 이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만나지 못할 때다. 이 경우 배우지 못한 자의 욕망과 만나지 못하는 문제의식을 가진 교사는 교육에 대해 ‘환멸’하게 된다. 더구나 그 배우는 자의 욕망이, 최근의 몇몇 사태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배우는 자 본인의 욕망도 아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통해 ‘모니터링’을 하는 ‘학부모’로 대변되고 대표되는 현실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의 환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나아가 교육이 서비스가 된 상황에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자(또는 학부모)의 욕망에 충실한 교사가 제도로부터 ‘유능’한 교사로 여겨지는 상황에 대해 환멸하고 냉소하게 된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교육의 핵심인 문제의식은 성과가 되지 않고 대중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추수하는 자가 ‘유능’하다고 인정받는 상황에서 학교가 ‘교육 기관’인지에 대해 환멸하고 냉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은 훈련과는 다른 것이다. 만일 교육이 훈련이라면 가르침(teaching)이 아니라 코칭(coaching)이 필요하다. 얼핏 생각하면 코칭은 티칭과는 달리 배우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실행하며 주도권을 가지고 배워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가르침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활동’은 없고 가르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이었기에 교육의 주도권을 ① 배우는 자의 ② 활동에 두는 것이 보다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코칭의 과정은 교육에 포함된다. 그러나 교육은 코칭을 통한 훈련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코칭이 몸을 숙련시키는 과정이라면 교육은 그 몸의 지식을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즉 개체(개인)의 개별적 몸에 특정한 역량이 능수능란하게 붙게 하는 훈련의 과정뿐만 아니라 그 앎을 개별적인 것에서 도약해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의 핵심은 앎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누구나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교육은 전적으로 언어의 문제다.


이것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훈련은 암묵지의 문제다. 훈련은 코치하는 자의 몸에는 새겨져 있는 암묵지를 반복 훈련을 통하여 배우는 자의 몸으로 이전한다. 이 과정에도 언어는 작용하지만 그보다는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의 몸을 관찰하고 반복적으로 교정해 주면서 코치하는 자의 몸과 같은 몸을 만드는 과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르치는 자의 암묵지를 배우는 자의 암묵지로 전수하는 것이 코칭이며 훈련이다.


교육은 암묵지를 암묵지로 곧바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명시지의 과정을 거친다. 즉 가르치는 자의 암묵지를 체계적인 이론을 통해 언어로 보편타당한 앎인 명시지로 끌어올린다. 이 명시지는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 이후 교육은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 명시지를 훈련과 같이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는 자의 몸에 새긴다. 이 과정을 통해 교육은 앎을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전승 가능한 것이 된다.


이 점에서 이전 시기 한국의 교육처럼 교육의 과정에서 훈련이 없이 의식의 수준만 강조하는 폐단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교육이 아니라 훈련을 강조하고, 가르침을 부정하며 코칭을 긍정하는 경향이 있다. 몸에 익숙해지지는 않은 채 언어의 수준에서 말만 할 줄 아는, 그러면서 안다고 착각하는 ‘무능한’ 존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험 기계가 되어야 하는 한국 입시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이 또한 일종의 ‘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앉아서 시험 문제를 풀어 정답을 맞히는 훈련만 반복한다. 즉 역설적으로 의식의 수준에만 앎이 머물고 몸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정답을 맞히는 데 최적화된 ‘몸’으로 훈련된 것이다. 머리만 남은 몸이 이 훈련의 결과로서의 몸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르침은 정답을 맞히는 ‘코칭’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물론 교육이 최종적 목적으로 하는 것은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은 반복된 훈련을 통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 ‘생각하는 손’으로서의 몸이다. 그 생각한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로 전승할 수 있는 몸이다. ‘말’할 수 없다면, ‘글’로 드러낼 수 없다면, 그것은 보편적 앎이 아니다. 우연하고 개별적인 앎은 교육, 특히 근대 교육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교육은 몸에 새겨진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되묻는다.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것인가, 아닌가? 반복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일회적인 것인가? 타자에게 전승 가능한 것인가? 따라서 교육은 끊임없는 비판적인 문제 제기의 과정이다. ‘모두’가 모두가 될 때까지 반복하면서 공통된 보편적 앎에 도달하려고 하는 공동의 노력이 교육의 과정이다. 가르치는 자만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도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문제의식에 초대되어야 한다.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문제의식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대화’다. 문제의식을 가로막는 욕망을 통제하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대화’다. 이 대화를 통해 가르치는 자의 문제의식은 배우는 자의 문제의식으로 매개되고(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매개를 통해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앎’으로 다시 가르치는 자에게 매개된다. 프랑스 철학자 라투르식으로 말한다면 번역을 통해 새롭게 발생한 의미가 원문에 더해지며 앎은 변형적 반복을 거치며 더 풍부해지고 새로워진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육 현장에서 훈련을 품은 배움, 코칭을 품은 가르침으로서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문제’ 제기를 공유하는 대화가 있는가? 문제 제기를 공유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문제를 변주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주체로 형성되는 과정으로서의 교육이 가능한가? 교육 현장에서의 대화는 ‘나’의 개별적 앎을 넘어서서 모두를 향한 모두의 앎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유능’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교육 불가능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사건들을 2023년에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사들의 분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박복선



1. 

학부모들은 교사와 (민원성) 상담을 할 때, 녹음을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교사들도 녹음을 하고.) 법정에 제출할 증거를 수집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수틀리면 언제든 법정으로 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10여 년 전에 들었다. 뭔가 갈등이 생기면 변호사를 쓴다고 한다. 변호사 중에 신참자들이 학교 관련 일을 맡는다고 한다. 이쪽으로 나름 전문성(?)을 축적한 변호사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5년 전쯤 들었다. 최근에는 교사들이 교실에서 학생이나 부모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기사를 종종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교사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학교와는 꽤 먼 거리에 있어서 뜨문뜨문 보고 듣는 게 다지만, 지금 교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런 흐름은 이미 10여 년 전에 예견할 수 있었다. 그때쯤 교육공동체 벗에서 ‘교육 불가능’이라는 화두를 꺼내 들었다. 흔히 교사가 도무지 수업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학생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좋은 삶’이라는 근본적인 목적을 상실한, 서열화를 정당화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하는, 결국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곳이 학교다. 학교는 상층으로 진입하려는 욕망을 채우려는 학생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것도 의미라면 말이다.) ‘교육 불가능’이라는 화두는 교육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나 실험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거대한 시스템이 한순간에 정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생기부 권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학생이나 부모나 성적을 내고 상벌을 주는 교사의 눈치를 보았고, 그 정도 수준에서 통제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 질서 유지의 방법으로 ‘사법’이 고착되면서, 교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졌다. 학교 이사장이나 교장에게 압력을 넣을 수 있거나, 유능한 변호사를 동원할 수 있거나, 민원이라는 ‘법 기술’을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 교사들이 가진 권한은 하찮은 것이니까. 법정이 된 학교에서 교육의 자리는 매우 좁다.    

 

2. 

지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교사들을 유·무형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해 줄 제도적 장치도 없고, 그걸 막아 낼 집단적 힘도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민원을 제기하게 되면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모멸감과 수치심이 드는 상황을 견뎌 내야 한다. 민원이 접수되면 조사가 시작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법정에 서야 한다. 이런 과정에 교사는 홀로 맞서야 한다.


그렇게 각자도생하던 교사들이 동료들의 죽음에 분노했고,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모였다. 근래 보기 드문 열기가 넘치는 집회였다. ‘참가하는 교사들을 전원 징계하겠다’고 허세를 부리던 교육부가 꼬리를 내렸다. 깜짝 놀란 정치권에서도 ‘교사를 보호하라’라는 요구를 반영하는 정책안을 만들기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 교사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될지 모르겠으나, 가시적인 몇 가지 안은 내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물론 아니다. 정치권에서 꽤 진전된 안이 나온다고 해도 그렇다.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분노를 집단적 성찰과 실천으로 이어 가야 한다. 나는 무엇보다 교사들의 연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번 집회는 노동조합이 전면에 나선 집회는 아니었지만, 교사들의 단결과 단체행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일깨웠다.  


연대는 학교 현장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없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한 교사들의 외로움, 좌절감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동료 교사, 교사회는 무엇을 했는가? 학교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총체적 책임을 져야 하는 교장(그리고 교감)은 무엇을 했는가? 언론 보도를 보면서, 나는 계속 이렇게 질문했다. 교장이 부모들에게 ‘개인사로 인한 극단적 선택’ 운운했다는 기사를 보면서는 욕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교사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지만, 현장 동료들과의 연대가 훨씬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교사들의 연대가 있어야 제도적 장치도 잘 작동되는 법이다.   


학부모와 학생들과도 연대해야 한다. 연가를 내고 집회에 참석한 교사를 응원하면서 아이와 체험 학습을 한 부모들이 꽤 많았다고 들었다. 여러 학교에 ‘선생님을 응원한다’는 현수막이 걸렸다고 들었다. 교실에서 친구들의 언행을 늘 지켜보는 다수의 학생들이 발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학생들을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구성원으로의 책임을 지우는 일이다. ‘교사 대 부모’가 아니라 ‘공동체 대 반공동체’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3. 

공동체의 어떤 선을 훌쩍 넘는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적 태만이 되겠지만, 모든 문제는 신자유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이들이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낸 ‘괴물’이라고 감히 말한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는 학생들, 그런 아이들을 키우면서 극도로 자기의 이해에 예민해지는 부모들, 기능주의의 늪에 빠진 교사들이 합작한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러니 교사 개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시스템으로서의 학교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다들 이 체제에서 살아가기 위한 악을 쓰는데, 그럴수록 세상은 망가진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해답은 없다. 해답이 없으니 난감하다. 그러나 해답이 없으니 새로운 사유와 실천이 나올 수 있다. 지금까지 자꾸 쉽게 답을 내려고 했다. 그것을 멈추는 게 중요하다.   


‘교권’이란 말을 소환하는 교사들이 있는 것 같다. 교권에 대한 이해가 얕아서 그런지, 나는 교권의 뜻을 모르겠다. 교사의 권력인가? 교사의 권위인가? 교사의 권리인가? 만약 교권이 교사의 권력이나 권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제도적으로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제를 감추는 기능을 할 뿐이다. 그것이 교사의 권리라면, 이 질문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 외에 교사라는 직업인에게 특별히 주어야 할 권리는 무엇인가? 


교권이 ‘가르칠 권리’를 의미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그것을 가지고 있는 주체는 국가다. 학교를 짓는 것도, 교육과정을 정하는 것도, 교사 자격증을 주고 임용하는 것도 국가다. 교사는 국가가 고용한 노동자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지금 이야기되는 교권이란 교사가 직업적 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어떤 것’이다. ‘교사를 보호하라’라는 구호에 담긴 요구는 사실상 노동자로서의 교사가 더 좋은 ‘노동 환경’에서 일하게 해 달라는 것 아닌가? ‘양심에 따라’ 뉴 라이트 버전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는 교사들이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거부할 때도 굳이 교권이란 말을 쓰지 않고도 정당화가 가능하다. 정말 교권을 위한 투쟁을 하려면, 국가 교육 시스템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신자유주의라는 체제의 모순들이 드러나는 교실에서 교사들만이 아니라 부모와 학생들도 난감한 상황에 있음을 이해하면 좋겠다. 그래서 약자들이 연대할 수 있는 고리를 찾으면 좋겠다. 그 고리가 무엇인지 서둘러 답을 내려고 하지 말고, 둘러앉아 많은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교권’은 그 고리가 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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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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