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호[특집]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 ‘그들’은 학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 톨

2025-06-09
조회수 525

특집 | 계몽의 한계, 구원의 모순


‘그들’은 학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 교육을 한 적 없는 학교에 저항하기 위하여



톨  10860953@hanmail.net

교육노동자, 본지 편집자문위원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 인용을 선고했다. 이 3개월 동안 극우라고 일컬어지는 일단의 집단들, 여당 정치인들, 정부 관료들이 보여 준 모습은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반민주적인 행태, 혐오에 기반한 폭력 그리고 자신들만의 신념 체계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한 뻔뻔함과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비겁함이었다. 탄핵 인용 후에도 이들에게서 반성과 성찰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자신들의 확신에 충실한 모습을 노골적으로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와 국민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국가와 국민은 자신들뿐이며 나머지는 소모되는 배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야당이라고 잘한 것은 없다. 온 나라의 광장에서 민주주의의 빛과 깃발이 흘러넘쳤을 때 그 뒤에서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분주한 기회주의적 말잔치를 보였을 뿐이다. 여당과 야당으로 갈려 있으나, 그들은 이 사회의 지배 계층으로서 정치라는 호화 관광 유람선을 탄 한통속이다.


지금 목격하고 있는 이런 난장판은 거의 모두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미 경험해 온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근대 교육 제도가 도입되면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의 학교는 소위 국가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군사 독재 정권의 영광을 위한 정치적 도구를 양산하는 공간이었다. 1980년대의 학교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의 영속적 집권을 위한 ‘국민정신교육’의 공간이었다. 1990년대 이후의 학교는 한국에 상륙한 신자유주의 속에서 국가가 자본의 이익에 충실한 인간형을 생산하는 공간이었다.


이 공간에서 특권을 누린 그들이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똬리를 틀며 남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지도층이라는 이름으로 지배 계층을 만들어 자신들만의 견고한 성을 쌓았다. 온 나라가 신자유주의 경쟁을 ‘공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남성 중심 가부장 체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삶의 현장에서, 자본군사제국주의가 말하는 약육강식을 몸으로 익혀 온 군사 문화 속에서 특권을 누려 온 그들은 특권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자신들만의 단단한 작당 속에서 저항하는 이들을 쉽게 짓밟고 있다. 이번 비상계엄에 따른 일련의 상황과 모습들은 이러한 그들의 실태에 대한 생방송이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우리가 정의와 진실의 신화처럼 믿고 있는 학교는,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처럼,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이 가능했던 때는 교육과 삶이 일치하던 때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과정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이해할 수 있었던 때다. 존재를 그 자체로서 존중해야 하지만 그 존재를 먹어야 사는 모순 속에서,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하여 더 우월한 종이 그렇지 않은 종을 살해하는 게 당연하다고 교육하지 않던 때가 있었다. 오래전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원주민 문화와 고대 인도 문화 등 근대성 바깥의 문화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았고, 동물-사람, 나무-사람, 바위-사람으로 모든 비인간 존재들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을 배운 때가 있었다. 농경 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사냥과 채집이 농업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아동의 노동에 대해 새롭게 의존하게 됨으로써 아동에게 훈련과 복종이 강요되고 아동기의 비정상성을 규정하는 등의 근본적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혹독한 아동기를 보내야 했던 역사 속에서도 18세기 이전에 아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인정받을 수 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이루어 갈수록 가르치는 행위와 배우는 행위가 위계를 바탕으로 나뉘고, 가르치는 내용과 배우는 내용이 성(性), 종(種), 계급 등을 기준으로 달라지고, 가르치는 공간과 배우는 공간이 특정 장소와 특정 집단에 의해 운영되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교육’이 문제의 원인을 유지하고(지배), 문제에 대한 저항을 통제하고(길들이기/배제), 문제를 통한 이익을 극대화하기(이윤/기득권) 위한 도구가 되어 갔다. 그리고 아동에게 훈육이 필요하다는 가정(假定), 특별한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하는(아동심리학, 교육학 등) 특수한 존재라는 가정, 그것을 쉽게 하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한 그들끼리, 같은 나이끼리 특수한 공간에 모아야 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아동기의 이데올로기가 발명되었다.


이러한 불일치와 이데올로기를 제도적으로 집단화하고 규율화/규격화하여 특정 인간 동물형을 대량 생산하게 된 근대 교육의 산물인 학교는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는 교육’을 한 적이 없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남성 중심 가부장 체제에 적합한, 자본군사제국주의에 익숙한, 인간 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자연 착취와 수탈에 무감각해진 특정 형태의 인간을 양산하는 기능을 담당했을 뿐이다.


 

‘그들’은 학생을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의 이익과 작당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릴 때면 그들의 말버릇 중 하나가 ‘학생이, 학교교육이 문제다’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학교교육’을 들먹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기획한 ‘학교교육’이 문제라는 말이 아니고, 학교 안의 ‘교사’와 ‘학생’이 문제임을 강변하는 것이다. 그들은 온갖 ‘교육’을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제도화하여 생색을 내며 명분을 쌓고, 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교사와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는 학생들이 문제라고 말한다. 특히 학생을 향해 원인 분석과 해결책이 집중되곤 한다.


1970년대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청소년들이 많아지면서 생긴 문제부터, 1980년대 중·고등학생 입시 열풍에 따른 문제, 1990년대 소위 X세대의 교실 붕괴와 대중 문화 소비 현상, 2000년대의 청소년 보호 담론과 학교 민주화 운동, 2010년대 학교폭력, 스마트폰 사용, 자살률 증가와 MZ세대론 등까지 청소년과 관련이 있는 문제에서는 늘 ‘학생’과 ‘학교교육’이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 방안으로 지목되었다. 


또한 청소년 인권(청소년 참정권, 학생인권조례·법, 청소년 노동 인권 등), 장애인 인권, 차별금지법, 페미니즘, 노동권, 동물권, 기후 생태, 반핵, 반군사주의, 입시 제도 철폐 등 사회 변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면, ‘편향’, ‘미성숙’ 운운하며 학교교육을 단속하려 든다. 다른 한편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문제 해결의 책임을 떠넘기려 든다. 기후 생태 문제의 원인은 본인들임에도 ‘환경교육’을 무지막지하게 해 대면서 이들에게 기후 위기 해결의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작태를 보라. 학생(청소년)은 피곤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 가해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 때에도 늘 그렇듯이 학교교육에 대한 훈수가 무수히 등장했다. ‘교육의 심각한 실패’, ‘헌법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등을 이야기하며 ‘교육천하지대본’을 강조한다.


그래서일까? 학교에서 학생들은 엄청 많은 교육을 받고 있다. 학생 안전교육 7대 영역(생활 안전, 교통 안전, 폭력/신변 안전, 약물/인터넷 중독, 재난 안전, 직업 안전, 응급 처치), 선행교육 및 선행학습 예방 교육, 학교폭력 예방 교육, 성폭력/성매매 예방 교육, 교육 활동 침해 행위 예방 교육, 가정폭력 예방 교육, 학생인권교육, 장애 인식 개선 교육, 다문화 이해 교육, 노동인권교육, 생태 전환 교육, 인터넷/스마트폰 과의존 예방 교육, 보건교육, 영양식생활교육, 생명 존중 및 자살 예방 교육, 학교 언어 순화 교육, 성교육, 참정권교육, 인성교육 등. 이것들은 1년 동안 학교에서 교과 수업 외에 학생이 필수로 받아야 하는 교육이다. 그래도 이런 교육을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이 수많은 ‘교육’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런 학교에서 ‘교육’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답답한 점은 ‘학교에서 교육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얼굴 뒤의 기득권이다.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면서 정작 자신들은 변할 생각도 없이 학생들 뒤로 숨는 이중적 태도다. 


그들은 학교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결코 교사와 학생을 ‘평등’하게 놓고 싶지는 않다. 학생은 그들이 원하는 인간으로 양성되어야 하기에 교사에게 권력을 쥐여 줌으로써 효율적인 방식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사는 이 사회 바깥에서 파견된 용역이 아니다. 이 사회 내부에 단단히 결속되어 있는 구성원이다. 따라서 ‘그들’이 교사일 수 있고, 교사가 ‘그들’일 수 있다. 교사도 알게 모르게 이를 내면화하고 있다. 그래서 교사는 기본적으로 체제 유지의 파수꾼이며, 학교는 파수꾼의 주둔지다. 파수꾼이기에 보수적이고 권력 친화적이다.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나누어 받은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신을 부정하는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일 수 없기에, 권력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 관리자나 교사는 자신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비상계엄 선포 후에도, 탄핵 인용 선고 후에도, 세상에선 학교교육이 문제라고 떠들어 대도 학교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신기루 속에서 조용했다. 민주, 생태, 정의, 인권 등을 입에 달고 있는 학교는 정작 민주, 생태, 정의, 인권이 짓밟히는 상황 앞에서는 교문을 굳게 닫고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닫힌 교문 안에서 상명하복, 요지부동 하면서 학생들에게는 편향된 가치관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고 12년을 지내야 한다고 자못 엄중하고 진지하게 다그치고 있다. 마치 우물가의 아이가 위험하면 우물을 뚜껑으로 덮어야 할 것을 아이에게 모진 매를 드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학생 뒤에 숨는다


이렇게 그들은 학생 뒤에 숨는다. 학생의 안전을 위한다고 문을 꽁꽁 잠그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학생의 안전을 강조하면서 ‘나침반 안전교육’을 점심시간마다 틀어 주는 것 외에 학생 자신의 안전을 위한 방어권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 뼈와 살이 다치지 않으면 안전이라는 협소한 개념 아래, 학교라는 공간에서 ‘온전한 존재’로서 안전할 수 있게 하려는 기획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 학생인권조례가 ‘좌빨(좌익 빨갱이)’이라고 짓밟히고, 제정된 적도 없는 학생인권법이 교권 앞에서 산산이 부서질 때 학교는 그저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교권과 학생인권은 다르지 않다’면서 대립 구도를 깨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학생인권을 가로막으면서 말이다. 대립 구도가 가능하려면 먼저 서로 대등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그런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애당초 교사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는데 어떤 대립 구도가 형성됐기에 그것을 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이런 운동장에서 교권은 학생인권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양육자로부터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다. 지배적 교권 담론 안에서는 ‘권력에 저항하는 교권’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사의 정치 기본권, 노동 기본권, 교육권(교육과정 편성권, 교육 내용 결정권, 교육 방법 결정권, 평가권 등) 등을 제한하는 권력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교권이어야 한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말이 오용되는 것처럼 ‘교권’의 방향과 용법도 한참 잘못되어 있다. 현실은 안전을 핑계로, 학습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교권이라는 이유로 학교 관리자와 교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을 뿐이다. 학교든 교사든 자신의 이런 모습에 대한 성찰은 없으면서 자꾸 학생들이 문제라고 한다.


그토록 학생들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민주주의를 통째로 짓밟은 비상계엄 사태 속에서 학교가 입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 학교는 학생들의 오지도 않은 ‘미래’만 생각하고 ‘현재’에는 관심이 있지 않기에, 그러나 자신의 안전은 바로 지금의 문제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바라보며 나온 이야기 중에는, 군인이라 하더라도 정의롭지 않은 명령에는 불복종하는 것이 민주 시민의 의무임을 강조하는 것들도 있다. 하물며 학교는 군대가 아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곳이 학교다. 정치적 편향성이 걱정된다며 멈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향한 편향성을 추구하며 비상계엄 사태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 적극 다루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시험공부만 열심히 시키고 있었다. 저항으로서 불복종은 사라지고 ‘가만히 있으라’라는 자기변명을 내면화하고 있다. 



‘그들’은 권력만을 고려한다


그들이 교육을 들먹일 때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은 학교(교실) 현장의 남성 중심 가부장 체제, 인간 중심주의 그리고 자본군사제국주의의 영향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체제라고 해서 ‘일개 남자’만 떠올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남성 중심 가부장 체제는 세상의 중심에 남성/남성적 가치관을 두고, 그 외의 모든 것(여성, 자연 등)은 남성/남성적 가치관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 지배 문화를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체제다. 이 체제를 부정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에 체제에 도전하는 모든 것은 공격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여성/장애/성소수자/외국인 혐오 발언은 분노나 짜증을 표현할 때 단골 소재로 쓰이곤 한다. 학교에서 여성 학생은 여전히 남성적 시선을 중심으로 평가된다. 가부장 체제에서 학교의 의사 결정 과정은 한 살이라도 나이 많은 사람을 더 고려한다. 이런 모습 중에서 압권은 나이 많은 남성 교사의 눈치를 누구나 본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인간의 기준은 남성 중심 가부장 체제에 따라 결정된다. 학교에서는 학생보다 교사가 인간 대접을 받고, 교사보다 교장이 더 인간 대접을 받고,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은 인간 대접을 받고, 정규직은 비정규직보다 자신들을 더 인간 대접한다. 이처럼 ‘인간에 더 가까운’ 집단이 학교에서 대부분을 결정한다. 


기후 위기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학교에서도 생태교육이 유행이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담론 속에서 인간에게 가까운 동식물에만 반려의 자리를 내어주고 나머지는 멸종 위기임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일회용품 줄이기는 포스터 만들기 대회의 단골 소재일 뿐이고, 급식의 채식 식단은 심리적 죄책감을 덜기 위해 한 달에 1번 자리 잡고 있으며 이마저 급식 당일이 되면 대부분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일 뿐이다.


자본은 우리에게 국가라는 허상을 의인화하여 국제적 갈등 속에서 국민을 지키기 위해 전쟁 무기로 무장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착한 나라의 국민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판매하는 군수 산업의 이익을 신성 불가침의 영역으로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다. 전 지구적 분쟁과 전쟁은 힘 있는 자의 논리가 정당성을 확보한다.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일어난 희생은 힘에 의한 평화의 당연한 결과이며, 힘이 없으므로 생긴 안타까운 일일 뿐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힘에 의한 위계와 다수의 이익을 위한 폭력은 교실과 일상에서 은밀히 승인된다. 힘에 의한 평화가 남성 학생들 사이에서 환영받고 교실을 힘의 위계가 지배하게 된다. 젊은 여성 교사에 대한 남성 학생의 적절하지 않은 태도가 곧잘 나타나지만, 시험 대비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여성 교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넘어가야 하는 ‘웃픈’ 상황이 일상이다. 친절한 남성 교사는 학생을 아끼는 교사가 되고, 화를 내는 남성 교사는 면학 분위기를 위해 어쩔 수 없는 폭력을 행사하는 교실의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 



‘그들’은 확신에 가득 찬 고인 물이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콘클라베〉(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에 이런 대사가 있다.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의심 없는 확신은 관용의 가장 치명적인 적입니다.”


학교가 교육하고 있다는 확신, 학교는 민주주의의 공간이자 평등의 공간이며 배움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확신, 학교 관리자가 자신을 학교의 최고 결정권자라고 생각하는 확신, 교사는 가르치고 학생은 배워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바탕을 둔 채 학생을 잘 교육하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확신, 교사가 자신을 지성인이고 평등하며 인권을 지향하고 반권위적이며 진리를 추구한다는 확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학생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 학교와 교사의 이러한 자기 확신이야말로 자기기만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지금 거의 모든 학교의 관리자와 교사 대다수는 이 확신을 ‘교육’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지만, 사실은 그 뒤에 숨어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교에서 불평등에 대해 말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경쟁과 공정을 교실에서 강변한다. 그들은 공교육이 위기라고 말하지만, 위기의 책임을 학생에 돌릴 뿐 관리자와 교육 관료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교육이 문제라고 말하지만, 학교의 민주화와 입시 제도의 변화를 위한 저항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누구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능력에 따라 선별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노동인권을 말하지만, 주식과 부동산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 평등은 중요하지만, 이미 양성평등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학생인권도 소중하지만, 교권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변할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 확신에 균열이 생기거나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 관리자는 교사 뒤에 숨고, 교사는 학생 뒤에 숨어서 ‘교권’, ‘교육’, ‘안전’을 외치며 자신의 책임은 외면하고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것(진리)은 없다. 관계에 의해서만 드러날 뿐인 현상을 원래 그런 것(진리)으로 고정하는 것이 확신이다. 확신에 대한 의심은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태도이자 확신을 올바름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다. 진리를 모순으로 의심하지 않고 확신을 확신한다면, 상대를 타자화하는 이분법적 사고 속에서 통제와 지배를 정당화할 뿐이다. 학교가 계속 이렇다면 그건 비상계엄 사태를 초래한 그들과 극우 양아치들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교사는 모든 억압에 저항해야 한다


확신은 더 이상 알고자 하지 않는 게으름의 변명이다. ‘교육을 한다’라는 확신 속에서 교육 아래 사라진 아동 인권을 못 본 척하면 안 된다. ‘평등을 교육한다’라는 확신 속에 성평등을 불편해하거나 ‘착한 페미니즘’, ‘건강한 페미니즘’ 운운하며 건전하고, 온건하고, 무해하고, 고분고분하고, 전복적이지 않은 평등을 요구하면 안 된다. ‘평화가 중요하다’라는 확신 속에서 갈등이 없는 교실을 만든다며 젠더 권력과 나이 권력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생태전환교육을 한다’라는 확신 속에 ‘탄소 제로’,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환경교육인 양 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라는 확신 속에 학생을 학교운영위원회의 들러리로 세우면 안 된다. ‘교육을 걱정한다’라는 확신 속에 입시 경쟁은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학생을 위해서’라는 확신 속에 학생들 뒤에 숨으면 안 된다.


학생 뒤에 숨지 않고 저항해 온 많은 교사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해 온 숱한 길들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생각해 보면 그 길들 중 대부분은 교육 노동자로서 교사의 노동 환경을 바꾸기 위한 요구만 해 온 것이었다(이것마저도 생계를 걸어야 하는, 벅찬 실천이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것만 요구하고, 그것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기에 지금부터라도 학교에서 모든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교사는 ‘모든 억압’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고 그 억압에 저항하는 실천이 더욱 필요하다.


“학생은 교사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삶을 바라본다”라는 말을 무심히 넘기지 말고, 학생 뒤에 숨지 않았으면 좋겠다. 



❶  여기서 ‘그들’은 학교교육이라는 제도 속의 교육 행정, 교육 관료, 학교 관리자, 교사 등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썼다.

❷  여기서 ‘때’는 시간의 어떤 순간이나 부분, 일정한 일이나 현상이 일어나는 시간, 어떤 경우 등의 뜻으로 사용했다.

❸  유기쁨(2023), 《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눌민.

❹  피너 N. 스턴스, 김한종 옮김(2017), 《인류는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삼천리.

❺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김민예숙·유숙열 옮김(2016), 《성의 변증법》, 꾸리에.

❻  「교육기본법」 제6조(교육의 중립성)에는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파당적/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교사의 정치적 발언 등을 금지하는 근거다. 하지만 이 법의 취지는 교사가 정치적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특정 정치권력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의미로 재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❼  캡틴 아메리카(Captain America)는 미국의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만화 캐릭터로 지구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지구를 보호하는 슈퍼 히어로 팀의 대표적인 지휘관 역이다.

❽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아동청소년인권위원회, 〈[성명] 판결 속에 사라진 아동 인권, 교육 아래 사라진 아동 인권을 묻는다〉, 2025년 5월 21일] 참고.

❾  [김진해, “‘건강한’ 페미니즘”, 〈한겨레〉, 2021년 8월 8일] 참고.

❿  “생태전환교육이란 점차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에 대응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지속가능한 생태 문명을 위해 생각과 행동의 총체적 변화를 추구하는 교육을 말한다.”(서울시교육청)


0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