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속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학교 민주주의,
학교의 주민들이 모두 인정받는 연대
성열관 yksung@khu.ac.kr
경희대학교 교수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관행과 싸우는 언어로
모든 지식이 역사적이듯, 모든 질문도 역사적이다. 그렇다면 2025년의 한국에서 ‘학교 민주주의’라는 질문은 왜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도 혁신교육의 시대를 충분히 통과한 이 시대에, 이 질문이 왜 다시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학교가 왜 아직도 비민주적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오늘날의 학교 민주주의 담론이 무엇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이 역사적이라면, 적어도 1989년 전교조의 성립 전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2025년 시점에서 제대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 정권 시기, 학교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전수하는 수단이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제대로 된 교육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가 통제적이었던 만큼 학교 역시 통제적이었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 시절 학교가 군부 독재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울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군부 독재 당시 학교장은 국가 관리의 대리인이자 가부장적 권력을 발휘했으며, 교사는 명령 수행자, 학생은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교사의 자율성은 사실상 부재했고, 사회와 권력에 비판적 발언을 시도한 교사는 징계나 해직을 감수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등 사회의 변화 속에서 억압적인 정치 상황을 뚫고, 1989년 전교조의 등장은 교육민주화운동의 결실이었다. 전교조는 단순한 노동조합이 아니라 학교를 민주화하고, 더 큰 공동체인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학교와 교사의 역할을 회복하려 했다. 따라서 전교조가 말한 ‘학교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학교 권력 구조를 바꾸는 실천 그 자체였다. 교사는 더 이상 국가 관료제의 하위 공무원이 아니라 자율성과 전문성을 지닌 교육 주체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천은 군부 독재와 권위적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군부 독재의 해소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지방교육자치와 학교운영위원회가 법제화되었다. 실질적 공론장은 여전히 제약되었지만, 학교 민주주의가 공식 행정의 언어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교조 이후 학교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저항의 언어’가 아니라 ‘당연한 언어’(적어도 제도적으로는)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징검다리를 건너 2010년대에 이르러 등장한 혁신교육과 혁신학교는 학교 민주주의가 형식적 담론을 넘어 실질적 숙의와 공론의 장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혁신교육 시대의 민주주의는 군부 독재와 싸우는 언어가 아니라, 교사들이 일상 속 관행을 넘어 새로운 학교 문화를 만들기 위한 언어였다. 과거 독재에 맞서 싸우며 해직을 감수해야 했던 ‘저항의 언어’로서의 민주주의가 수십 년 만에, 모두에게 익숙한 관행과 싸우는 언어로 변모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억압과 싸우는 민주주의도 쉽지 않았듯, 관행과 싸우는 민주주의도 결코 쉽지 않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혁신교육의 노력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는 민주적인가?”라는 질문은 반복되고 있다. 혁신교육이 의사 결정의 민주화를 통해 제도적 진전을 이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학교의 많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이 충분히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수많은 회의와 위원회 참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다.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상과 기대가 상이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방향은 있다.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추구
이와 같이 학교 민주주의는 단속적으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개념이다. 의사 결정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학교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 구조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만들었는가’라는 과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결정이 학생들의 삶을 어떻게 더 낫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사회를 어떻게 더 좋은 사회로 만들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오늘날 학교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지 구조의 민주화가 아니라,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결정 자체라고 생각한다.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가 ‘권리’의 문제였다면, 더 좋은 삶과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연대’의 문제이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한다. 교사와 학생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경험이 된다.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위한 연대에 참여하는 것은 자긍심을 키우는 경험이 된다. 자존감과 자긍심은 좋은 삶을 위한 기초가 된다.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좋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학교와 사회에서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할 자유를 누리고,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기대 속에서만 진정한 좋은 삶이 가능하다. 학교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은 곧 교육이 아이들을 자유롭고 존엄한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삶이 개인적 차원이라면, 좋은 사회는 민주주의의 공적 차원이다. 좋은 사회란 가장 취약한 사람조차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원과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이며, 다양한 정체성과 삶의 방식이 존중받는 사회다. 학교 민주주의가 좋은 사회를 지향한다면,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공동체에 대해 숙의하고,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며,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학습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혁신교육을 통해 학교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루어 냈다.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지만, 이제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과제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위한 민주주의의 실천이다. 학생 자치 등 제도적 장치들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인정받고, 소속감과 역할 기대를 느끼며, 미래 시민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형식의 중요성과 좋은 삶을 위한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 교육에서 흔히 ‘교육을 위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구분하지만, 두 관계는 상보적이다. 다만 이제는 형식보다는 내용으로, 즉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위한 교육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이제는 학교에서 모두가 인정받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반드시 그렇진 않다면 학교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다시 질문해야 할 때다.
다시 강조하건대, 모든 질문이 역사적이듯,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 또한 역사적이다. 오늘날 이 질문이 다시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위험 사회’로 불리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외와 배제, 혐오와 분열이 만연한 가운데, 학교는 시대의 균형추가 되어야 한다. 학교 민주주의는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즉 시민들을 성장시키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저항의 언어로 출발한 학교 민주주의는 제도화를 거쳐 의사 결정의 민주화를 이끌어 왔다. 그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롭고 충만한 삶,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 즉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향한 학교 민주주의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좋은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학교 민주주의는 학교의 주민이라 볼 수 있는 학생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관계의 민주주의를 뜻한다. 호네트는 인간의 존엄이 사랑, 권리, 연대라는 세 차원의 인정 속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사실상 사랑은 1차적으로 가정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적 돌봄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권리의 인정은 평등한 학교 주민으로서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가 모든 학생에게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각자의 기여와 존재 이유가 학교 안에서 존중받을 때 비로소 연대라는 차원에서 인정받기 때문이다.
학교 민주주의의 본질
혁신교육에서 호네트를 인용하거나 권리나 연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와 유사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서 학교 민주주의의 역사는 인정의 확장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교조의 등장은 권리의 회복을 향한 인정 투쟁이었다. 그리고 혁신교육은 의사 결정의 민주화는 물론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존재와 기여를 존중하며 공동체적 연대를 실천하는 단계였다. 오늘날 학교 민주주의의 과제는 바로 이 연대의 인정, 즉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의미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는 경험을 확장하는 일이다.
나는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모두가 미래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학생들은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에 참여하기 때문에 어린이·청소년 시기에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경험을 내면화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지 절차가 아니라 관계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적 정치 체제인 동시에 사회 윤리이다. 학교란 곳은 인정의 평등/불평등이 일상에서 구현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결국 좋은 삶과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학교는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존엄하고 자유로운 학교 주민으로 정체성을 형성해 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학교 민주주의의 오늘날의 과제라 생각한다.
몇 년 전 나는 중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고 복도를 지나가고 운동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혐오나 조롱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학생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이러한 문제가 교사들에게 상당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학생들에게는 훈육이 필요하고, 지도가 가해져야 한다. 그러나 한편 이 학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그나마 자신들을 인정해 주는 공동체로 흘러갔고, 그것이 혐오와 조롱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진단이 정말 맞는 것인지는 보다 더 엄밀한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단은 유사한 현상을 연구하는 다른 연구자들도 말하는 바다.
결국 학교 민주주의의 본질은 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소외된 학생들이 충분히 존중받는 문화, 즉 인정의 일상화에 있다. 민주주의는 가르쳐야 하는 교과목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그 주민들이 평등하게 인정받는 삶의 형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와 조롱 등 오늘날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문제는 존중과 인정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파괴되었기보다는 존중과 인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제 학교 민주주의는 제도의 언어에서 관계의 언어로, 권리에서 연대의 윤리로 옮겨 왔다. 학교 민주주의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향한 기초를 쌓는 일이다. 학생들이 “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로 어려운 일은 이것을 직접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튼 방향은 그렇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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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학교 민주주의,
학교의 주민들이 모두 인정받는 연대
성열관 yksung@khu.ac.kr
경희대학교 교수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관행과 싸우는 언어로
모든 지식이 역사적이듯, 모든 질문도 역사적이다. 그렇다면 2025년의 한국에서 ‘학교 민주주의’라는 질문은 왜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도 혁신교육의 시대를 충분히 통과한 이 시대에, 이 질문이 왜 다시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학교가 왜 아직도 비민주적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오늘날의 학교 민주주의 담론이 무엇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이 역사적이라면, 적어도 1989년 전교조의 성립 전후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2025년 시점에서 제대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부터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 정권 시기, 학교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전수하는 수단이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제대로 된 교육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가 통제적이었던 만큼 학교 역시 통제적이었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 시절 학교가 군부 독재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울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군부 독재 당시 학교장은 국가 관리의 대리인이자 가부장적 권력을 발휘했으며, 교사는 명령 수행자, 학생은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교사의 자율성은 사실상 부재했고, 사회와 권력에 비판적 발언을 시도한 교사는 징계나 해직을 감수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등 사회의 변화 속에서 억압적인 정치 상황을 뚫고, 1989년 전교조의 등장은 교육민주화운동의 결실이었다. 전교조는 단순한 노동조합이 아니라 학교를 민주화하고, 더 큰 공동체인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학교와 교사의 역할을 회복하려 했다. 따라서 전교조가 말한 ‘학교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 개선이 아니라 학교 권력 구조를 바꾸는 실천 그 자체였다. 교사는 더 이상 국가 관료제의 하위 공무원이 아니라 자율성과 전문성을 지닌 교육 주체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실천은 군부 독재와 권위적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운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후 군부 독재의 해소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지방교육자치와 학교운영위원회가 법제화되었다. 실질적 공론장은 여전히 제약되었지만, 학교 민주주의가 공식 행정의 언어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교조 이후 학교 민주주의는 더 이상 ‘저항의 언어’가 아니라 ‘당연한 언어’(적어도 제도적으로는)가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징검다리를 건너 2010년대에 이르러 등장한 혁신교육과 혁신학교는 학교 민주주의가 형식적 담론을 넘어 실질적 숙의와 공론의 장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혁신교육 시대의 민주주의는 군부 독재와 싸우는 언어가 아니라, 교사들이 일상 속 관행을 넘어 새로운 학교 문화를 만들기 위한 언어였다. 과거 독재에 맞서 싸우며 해직을 감수해야 했던 ‘저항의 언어’로서의 민주주의가 수십 년 만에, 모두에게 익숙한 관행과 싸우는 언어로 변모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억압과 싸우는 민주주의도 쉽지 않았듯, 관행과 싸우는 민주주의도 결코 쉽지 않다. 지난 10여 년 동안 혁신교육의 노력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는 민주적인가?”라는 질문은 반복되고 있다. 혁신교육이 의사 결정의 민주화를 통해 제도적 진전을 이뤘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학교의 많은 의사 결정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이 충분히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수많은 회의와 위원회 참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다.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상과 기대가 상이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발전해 나가는 방향은 있다.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추구
이와 같이 학교 민주주의는 단속적으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발전하는 개념이다. 의사 결정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중요하지만, 동시에 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학교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 구조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만들었는가’라는 과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결정이 학생들의 삶을 어떻게 더 낫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살아갈 사회를 어떻게 더 좋은 사회로 만들 것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오늘날 학교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지 구조의 민주화가 아니라,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결정 자체라고 생각한다.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가 ‘권리’의 문제였다면, 더 좋은 삶과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연대’의 문제이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한다. 교사와 학생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경험이 된다.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위한 연대에 참여하는 것은 자긍심을 키우는 경험이 된다. 자존감과 자긍심은 좋은 삶을 위한 기초가 된다.
학생들이 성인이 되어 좋은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학교와 사회에서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할 자유를 누리고,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기대 속에서만 진정한 좋은 삶이 가능하다. 학교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한다는 것은 곧 교육이 아이들을 자유롭고 존엄한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좋은 삶이 개인적 차원이라면, 좋은 사회는 민주주의의 공적 차원이다. 좋은 사회란 가장 취약한 사람조차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원과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이며, 다양한 정체성과 삶의 방식이 존중받는 사회다. 학교 민주주의가 좋은 사회를 지향한다면,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공동체에 대해 숙의하고,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며,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학습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혁신교육을 통해 학교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루어 냈다.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지만, 이제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과제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위한 민주주의의 실천이다. 학생 자치 등 제도적 장치들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인정받고, 소속감과 역할 기대를 느끼며, 미래 시민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형식의 중요성과 좋은 삶을 위한 민주주의는 분리될 수 없다. 교육에서 흔히 ‘교육을 위한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을 구분하지만, 두 관계는 상보적이다. 다만 이제는 형식보다는 내용으로, 즉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위한 교육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이제는 학교에서 모두가 인정받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하고, 반드시 그렇진 않다면 학교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가 다시 질문해야 할 때다.
다시 강조하건대, 모든 질문이 역사적이듯,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 또한 역사적이다. 오늘날 이 질문이 다시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위험 사회’로 불리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외와 배제, 혐오와 분열이 만연한 가운데, 학교는 시대의 균형추가 되어야 한다. 학교 민주주의는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 즉 시민들을 성장시키는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저항의 언어로 출발한 학교 민주주의는 제도화를 거쳐 의사 결정의 민주화를 이끌어 왔다. 그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유롭고 충만한 삶,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 즉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향한 학교 민주주의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좋은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학교 민주주의는 학교의 주민이라 볼 수 있는 학생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관계의 민주주의를 뜻한다. 호네트는 인간의 존엄이 사랑, 권리, 연대라는 세 차원의 인정 속에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사실상 사랑은 1차적으로 가정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적 돌봄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권리의 인정은 평등한 학교 주민으로서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교가 모든 학생에게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가 질문해야 한다. 각자의 기여와 존재 이유가 학교 안에서 존중받을 때 비로소 연대라는 차원에서 인정받기 때문이다.
학교 민주주의의 본질
혁신교육에서 호네트를 인용하거나 권리나 연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와 유사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서 학교 민주주의의 역사는 인정의 확장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교조의 등장은 권리의 회복을 향한 인정 투쟁이었다. 그리고 혁신교육은 의사 결정의 민주화는 물론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존재와 기여를 존중하며 공동체적 연대를 실천하는 단계였다. 오늘날 학교 민주주의의 과제는 바로 이 연대의 인정, 즉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의미 있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는 경험을 확장하는 일이다.
나는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모두가 미래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학생들은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에 참여하기 때문에 어린이·청소년 시기에는 자신이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경험을 내면화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지 절차가 아니라 관계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적 정치 체제인 동시에 사회 윤리이다. 학교란 곳은 인정의 평등/불평등이 일상에서 구현되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결국 좋은 삶과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학교는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존엄하고 자유로운 학교 주민으로 정체성을 형성해 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학교 민주주의의 오늘날의 과제라 생각한다.
몇 년 전 나는 중학교에서 수업을 참관하고 복도를 지나가고 운동장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혐오나 조롱의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학생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이러한 문제가 교사들에게 상당한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학생들에게는 훈육이 필요하고, 지도가 가해져야 한다. 그러나 한편 이 학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그나마 자신들을 인정해 주는 공동체로 흘러갔고, 그것이 혐오와 조롱의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진단이 정말 맞는 것인지는 보다 더 엄밀한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단은 유사한 현상을 연구하는 다른 연구자들도 말하는 바다.
결국 학교 민주주의의 본질은 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소외된 학생들이 충분히 존중받는 문화, 즉 인정의 일상화에 있다. 민주주의는 가르쳐야 하는 교과목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그 주민들이 평등하게 인정받는 삶의 형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와 조롱 등 오늘날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문제는 존중과 인정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그 자체가 파괴되었기보다는 존중과 인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제 학교 민주주의는 제도의 언어에서 관계의 언어로, 권리에서 연대의 윤리로 옮겨 왔다. 학교 민주주의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를 향한 기초를 쌓는 일이다. 학생들이 “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로 어려운 일은 이것을 직접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나는 존엄한 존재이며, 다른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튼 방향은 그렇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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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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