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호[후속] 학생들의 극우화? | 조영선

202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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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민주주의 흉내’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로


학생들의 극우화?

- 후퇴하고 있는 학교 민주주의



조영선 imaginer@hanmail.net

서울 중등 교사




광장 이후 1년이 지났다. 광장을 거치면서 20대 남성의 극우화에 대한 담론이 끓어올랐고, 이제는 10대 남성들의 극우화에 대한 걱정(?)으로 옮아간 분위기이다. 올해 8월에는 여당 국회의원이 ‘교실 극우화 방지 3법’이라는 타이틀로 ‘교원의 정치 기본권 보장’, ‘학교 내 디지털 미디어 문해 교육 강화’, ‘가짜 뉴스 극우 유튜브 제재 강화’ 법안을 발의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학교 내 스마트폰 사용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발의한 국회의원은 취지에 대해 “10대 청소년들이 이념적으로 편향된 극우 유튜버에 노출되면서 역사나 사회 문제를 균형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라며 “일각에서는 전직 대통령을 조롱하고, 외국인 노동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를 놀이처럼 소비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교사가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기에 정치교육을 하지 못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교사의 정치적 권리만으로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가짜 뉴스에 대한 제재 강화를 제외하고, 교사의 정치적 권리 보장과 학교 내 디지털 문해 교육 강화와 스마트폰 금지가 극우화 현상에 대해 전제하는 것은 이러한 것인 듯하다. 

“미성숙한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가짜 뉴스를 포함한 극우적 인식에 빠져들고 있으니 비청소년인 교사들이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미디어 문해 교육을 하면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러할까? 정치적인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없는 학생들의 생각을 자유를 갖게 된 교사의 교육으로만 바꿀 수 있을까? 



학교에서 만난 H와 J 이야기


학교에서 학생들의 정치 성향에 대해 느끼게 된 경험이다. 한번은 작년에 학생인권법 제정 서명을 받을 때였는데 어떤 학생들은 기꺼이 해 주었고, 어떤 학생들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교회를 다니는 한 학생에게 나는 장난처럼 서명해 달라고 졸랐다가 물러섰다. 그때 지나가던 어떤 학생이 서명받는 나를 보며 “역시 민주당”이라고 추켜세워 주었다. 자기도 민주당 지지자라며……. 올해 대선 기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영화 〈카트〉를 보고 마트에서 립스틱 색을 통제하는 부분을 설명할 때였다. 그것이 노동인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퀴즈 형식으로 설명하다 보니, 내 손가락을 입술에 대면서 “어떤 장면이었어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학생들이 나한테 “2번(당시 김문수) 지지해요?”라며 되물었다. 손가락이 입술을 가리킨 모양이 숫자 2를 표시한 모양과 닮아서 그냥 2번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너무나 굴욕적이었지만, 학생들에게 정치는 생각이 아닌 ‘이미지’로 더 가깝게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 경험이었다.


또 한번은 한 학생이 자신과 친한 다른 학생을 가리키며 “선생님, 얘 일베예요”라고 이르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그 학생이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말이 없고, 목소리가 중저음으로 아주 좋은 학생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에게 진짜냐고 물었더니, ‘5.18에 너무 많은 유공자가 나와서 그 수도 알 수 없고, 비리도 많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과 토론하면 안 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며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했다. 그 학생은 정말 진지하게 좌파들이 지원금을 받기 위해 폭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미화하고 스스로를 피해자로 우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교사에게 도전해서는 안 되기에 말투를 극도로 조심했다. 


그 경험을 하고 나서 영화 〈카트〉를 보면서 한 활동지를 다시 살펴봤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공감했다’고 썼는데, 그 학생은 사측 편을 든 다소 비열한 이미지로 그려진 중간 관리자를 ‘법을 수호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점거와 같은 불법적인 일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썼다. 친구들과 다른 생각을 용기 있게 쓴 그 학생의 신념이 느껴졌다. 이후 그 학생은 내 수업 시간에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쓰는 활동에 아주 짧은 글을 쓰는 등 소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수업 시간에 문재인과 이재명에 대한 혐오 동영상을 보는 등 태업을 하기도 했다. 


우연히 다른 선생님과 그 학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현재 5등급제 내신에서 전 과목 평균 1.27등급인 전교권에 있는 학생이라고 했다. 쉬는 시간에 자신의 극우적인 사고를 거침없이 이야기해서 친구들로부터 국회에 진출하라는 얘기를 듣는 학생이라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수업 시간이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교사와 토론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어떤 마음일까 싶어 내내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후 선택 과목에 대한 설명을 할 때였다, 학생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다가 “야, 이번에 정치 들을까? 그래서 좌파 정치 선생들하고 맞짱 깔까?”, “왜 이렇게 학교 선생 중에는 좌파가 많아”라는 등의 말이 오갔다. 나는 그 학생들 앞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제가 바로 여러분이 극혐하는 좌파에 꼴페미예요.” 그랬더니 학생들이 실망이라며 빨리 빠져나오라고 했다. 내가 뭔가 잘못된 것에 빠져 있는 것처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말투로. 


다른 학급에서는 앞서 언급한 학생과 비슷한 신념을 가진 한 학생이 현 대통령을 기괴하게 만든 이미지를 교실에 붙이고 교사에게 “선생님은 대통령을 지지하느냐?”고 공개적으로 물은 사건이 있었다. 그 학생은 교사가 얼버무리자 계속 공격적으로 따지듯 물었다고 한다. 결국 그 사건은 담임이 학교 교칙에 있는 ‘허가받지 않은 게시물은 게시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근거해 철거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후퇴하고 있는 학교 민주주의


학생들과 이러한 대화가 어려운 이유에는 교사의 정치적 자유 부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또 이런 극우적인 이야기들이 논리적이지 않고 이미지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지금, 대통령을 딥페이크한 이미지를 유머로 소비하고 이번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한 채 다른 논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5.18에 대해 조근조근 근거를 대는 학생과는 토론할 수 있지만, 그 외 다른 주제들은 토론조차 하기 어렵다. 일베 문제가 불거졌던 초기에는 자신이 일베라는 사실은 다소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너, 일베지!”라고 다른 학생들이 한마디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생각은 특별한 집단, 즉 일베만의 생각이 아니다. 국민의힘이라는 공당과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논리적 비약과 근거 없는 주장에 대해서 더 이상 성찰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앞에서 교사와 토론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말한 학생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막혀 있다. 그러니 왜곡된 생각이 세상에 드러나도 수정되는 과정이 일어날 수 없다. 그저 의견을 표현해야 하는 시간에는 소극적으로 쓰고, 다시 자신의 생각의 토양이 되는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쇠퇴와 함께 학교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쇠퇴해 온 것과도 연관이 있다. 최근 20년 동안 광장이 큰 규모로 열린 것은 2008년 광우병 촛불 집회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집회 때다. 2008년 촛불 때, 중고등학교 여학생들의 참여가 높아 ‘촛불 소녀’로 광장에서 호명되었다. 2008년 촛불은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화의 분위기와 이어져 거리 공연과 밤샘 집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광우병 이슈는 발병이 15년, 20년 이후라는 것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가 많았고 학교에서도 많이 공론화되었다. 또 이명박이 특권 교육과 경쟁 교육 정책을 심화시킬 때여서, 학교 자율화의 이름으로 강제 방과 후 보충이나 야간 자율학습에 대한 규제가 풀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즉 ‘미친 소’라는 광우병 이슈만큼이나 ‘미친 교육’으로 대변되는 교육 문제가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광우병 자체는 하나의 해프닝처럼 소비되었지만, 오히려 교육 이슈는 이후 진보 교육감 선거의 주요 의제인 학생인권조례와 안전한 먹거리를 기반으로 한 무상 급식 의제로 전면화되었다. 당시 광장에는 청소년의 참여가 활발했고, 이것이 교육운동의 의제로 부상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다시 보수 정당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철도 민영화 등 사회는 다시 후퇴하였다. 대학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이슈가 되자, 고등학교에서도 이러한 대자보가 대거 붙었지만, 학교에 의해 철거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흐름 뒤에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고, 다시 한번 청소년을 비롯한 전 국민을 광장으로 모았다. 몇 년간의 끈질긴 세월호 참사 투쟁에 많은 청소년들이 함께했고, 이후 태블릿 PC 폭로로 촉발된 박근혜 탄핵 집회로 이어졌다. 보수적인 중앙 정부와 진보 교육감이라는 대립각이 세워진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를 ‘안전의 날’로 새길 수 있도록 공문을 내리는 교육청들이 있었고, 그나마 그러한 숨통 때문에 세월호에 대한 추모는 학교 안에서 부분적으로 공론화될 수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가 당시 모토였기에 경기도교육청에서는 인간의 존엄과 민주공화국의 원리를 중심으로 한 ‘4.16 교육 체제’를 만들었고, 박근혜 탄핵 후 ‘18세 선거권 연령 하향’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러한 일들을 공식적으로 허용하거나 보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국정 교과서에 대한 반대 서명을 받다가 학교에서 징계를 받기도 했다. 2010년대 초부터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된 지역들이 있었지만, 그나마 두발·용의 복장 규제조차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규제의 완화는 슬그머니 이루어지고, 생활지도부장이 바뀌면 다시 학교는 내홍을 겪었다. 스쿨 미투에 대한 그 수많은 문제 제기와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성희롱 발언을 하면 안 된다는 인식과는 별개로 피해자가 되지 않는 한 그런 발언을 하는 교사에 대해 누구도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처럼 학교는 미약하게 변화했을 뿐 그 변화를 공식화한 적이 없다. 교육청에서 관련 공문이 오면 ‘복사하여 붙여넣기’를 통해 교칙만 바뀔 뿐이다. 그마저도 조항의 삭제 또는 변화의 의미를 학생들과 공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신의 권리를 모르고 있고, 학교는 그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것이 교사 입장에서는 학교가 변한 것 같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학교가 그대로인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청소년들은 늘 부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러나 학생들이 참여한 만큼 그 몫의 권리가 그들의 가장 가까운 일상의 공간인 학교에서 보장된 적은 없었다. 이번 광장에서도 5만 명의 청소년들이 계엄에 반대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 의제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스마트폰 규제와 극우화


학생들이 여성혐오의 목소리를 가장 공개적으로, 일관되게 표현하는 것은 여가부(현 성평등가족부)에 대한 반감이다. 여가부는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를 한 주범으로 학생들이 거의 유일하게 자신들의 세계라고 여기던 게임 세계를 억압한 곳이다. ‘꼴페미’에 대한 반감은 사실 여가부에 대한 반대를 토양 삼아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일하게 구축된 세계를 여성의 이름으로 검열하고 금지했을 때 어떤 정서가 만들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이번 교내 스마트폰 금지 조치에 대해 SNS에 공유되는 것들을 보면, 교사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좌빨 교사들의 수업을 고발하는 것을 못 하게 하려고 금지 조치를 한 것이라는 영상이 떠돌아다닌다. 즉 금지는 그 내용의 정당성을 따져 묻기 전에 정당성을 훼손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프리 운동, 이른바 ‘스프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스마트폰의 악영향과 폐해에 대해 동의하는 청소년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강제적인 금지 조치 때문에 주장할 수 있는 공론화의 장을 잃어버렸다. 학생들 스스로가 스마트폰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답정너 식의 법적 금지 조치가 이루졌기 때문이다. 계엄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대통령도 사실상 청소년들의 의견은 ‘필요 없다’는 것을 입법을 통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스마트폰 금지 조치는 법 내용상에서도 서로 모순이 있다. 수업 시간에는 금지되지만, 교사와 학교가 허용한 경우에는 사용할 수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다시 금지시킬 수 있다. 즉 기기의 사용이 오직 교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타인의 판단이 자신의 사생활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스마트폰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판단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감시자의 눈을 피하거나 감시자의 비위를 맞춰 자신이 사용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남과 나를 해치지 않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자리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학생은 이번 법 조치를 계엄령이라고 하기도 했다. 자유를 지닌 존재만이 자신의 자유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성찰할 수 있다.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는 극단의 자유만이 자신의 자유라고 생각하게 될 확률이 높다. 


타인이 억지로 빼앗은 것이 자유가 될 수 없다. 자유가 자유일 수 있는 것은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지만 스스로 결별하기로 선언할 수 있는 결단의 주체로서 존중받을 수 있을 때이다. 그런데 법으로 금지해 놓고 그것을 자유라고 명명하는 것은 자유의 의미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만은 진보의 위선의 증거가 되어 극우의 토양이 될 것이다. 대통령은 비상계엄 때 자신의 유튜브 라이브로 계엄을 막았다고 자랑했다. 이후에도 SNS에 소식을 공유하며 K-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만 금지하는 이러한 법을 만들고 또 스마트폰 프리 운동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 진보 정치인, 진보 교육감, 진보적 어른들의 위선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극우 10대들로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대응은 학생들을 ‘진실을 말하면 극우인가?’라는 현수막을 건 사람들에게로 향하게 할 것이다. 학생들 당사자를 배제한 선한 가치는 그렇게 그 가치를 배신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 금지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해도 적절한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사용까지 금지하는 일괄 압수 등이 시행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학생인권조례를 존중하고 그 범위 안에서 단위 학교는 학생의 의견이 50% 이상 반영된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규칙을 제정하고, 학생들이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왜 능력주의와 학교의 차별은 금지하지 않는가?


최근 청년들의 극우화 문제를 심리적 측면에서 조명한 《극우 청년의 심리적 탄생》에서 저자는 극우화해 가는 심리적 토양으로 능력주의와 기득권의 위선에 대한 분노를 지적한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정확히 이러한 메시지의 온상이다. 최근 중학생이 만든 신문을 검열하고 학교 배포를 금지한 사건에서 보듯 민주 사회의 기본인 언론·출판의 자유조차 금지의 대상이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대학 입시를 통해 자원을 배분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시스템 속에서 학생들의 일상은 성적과 벌점제를 통해 통제된다. 아직도 두발·용의 복장은 벌점 항목에 포함돼 신체적 자유조차 상벌점제를 통해 감시된다. 수업 시간을 방해한다는 모호한 기준으로 갑자기 교실에서 쫓겨나는 일이 가능해졌고, 최소한의 숨통인 스마트폰 사용도 이제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등급이 낮은 학생은 취직이 잘 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진학을 못 하면 사회에서 잉여가 된다는 극단적인 능력주의는 각종 시험을 통해 뼛속 깊이 내면화한다. 특정 나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성숙하다’는 딱지를 붙여 자신의 인권을 침해받는 것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학교를 자신이 참여해서 바꿀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할 때 자신보다 힘이 약한 존재에 이러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더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 청소년들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사회가 약자에게 혐오를 표현하는, 분출하는 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청소년 인권 보장의 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참여는 배제하고 의무만 강요받는 일상에서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에게 불합리한 딱지를 붙이고 분노를 표현하는 혐오에서 출구를 찾고 있다.  


혐오·차별에 대응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혐오 금지의 공식적인 법제화와 이를 근거로 한 대항 표현이다. 하지만 혐오와 차별을 법적으로 금지한 차별금지법과 학생인권법은 통과되지 않고 학생을 규제하는 법이 먼저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의 혐오·차별 반대 교육은 매우 위선적으로 보일 것이다. 청소년 전체의 사생활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인권과 평등을 위해 혐오와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이 그 자체로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집권 여당은 학생인권을 후퇴시키는 각종 법안을 주도하거나 동조하고 있다. 소위 진보 교육감 운동을 하는 진영도 스마트폰을 법적으로 빼앗긴 학생들에게 스스로 ‘스마트폰 프리’한 운동을 벌이라는 기만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진보의 위선’에 대한 청소년들의 감각을 보다 강화시키고, 동료 집단에서도 “너는 1찍이냐”는 말로 정치적인 토론을 막아 버리게 된다. 


이렇게 생겨난 정치적 감각은 20대에도 지속된다. 자신의 근본적인 자유를 제한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미시적 통제를 감내한 학생들은 옛날처럼 대학 입학을 통해 자유를 회복하지 못한다.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계속된 경쟁에 내몰리지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최근의 캄보디아 사태에서 보듯 위험한 일자리를 택하거나 ‘쉬었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청소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청소년의 의견을 배제하고 청소년을 규제하는 제도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지원하기는커녕 자신들을 명분 삼아 자유를 빼앗는 이러한 정치 전체가 위선으로 느껴지고, 실질적인 팩트 체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위선 세력에 반대하는 운동 자체에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내란 세력과 싸우고 있고,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있다고 여기는 여당의 기대와 다르게 민주주의가 막힌 학교는 지속적인 학생인권의 후퇴로 극우 세력의 토양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극우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학생인권을 주저한다면?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학생들이 전국 어느 학교에 다니든 자신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학생인권법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학생인권법에는 혐오·차별로부터 학교를 자유롭게 할 소수자 보호 조항과 윤석열 정권 때 무력화된 학생인권조례의 기준을 전국 모든 학교에 보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 또, 학생들의 정치 효능감이 일상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는 학생 언론의 자유와 각종 참여권, 그리고 학생인권위원회와 학생인권센터 등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인권 침해의 문제를 사법적 절차가 아닌 행정적 절차로 다룰 수 있는 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에 대해 최근 극우의 자유와 인권 프레임 가로채기에 휘말려 주저하는 의견들이 있다. 즉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민주적’이고 ‘학교 friendly’한 학생들의 인권과 참여권이 보장되기보다 교실을 어지럽히고 혐오·차별 발언을 일삼는 학생들이 그들의 인권을 더 주장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이 그 정당함을 인정받아 온 역사는 그 상대가 누구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존엄함의 가치와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감옥에서의 인권을 윤석열과 박근혜가 가장 많이 누렸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누렸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가치 자체를 무시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운동에서 편파적인 방식으로나마 인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극우들도 인권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인권과 우리의 인권을 갈라치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피하면서 학생인권과 차별금지법은 ‘인권이 아니라’고 응수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권을 ‘경험’한 사람은 인권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권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이 제대로 된 인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즉, 학생인권법과 차별금지법이 인권 침해라는 해괴한 논리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인권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 경험이 불가능한 학교에서 성장하면서 교육으로만 인권을 배웠기 때문에 학생들은 일견 논리적으로 보이는 또 다른 교육(?)에 의해 그 인권에 대한 가치는 쉽게 덮어쓰기 될 수 있는 것이다. 머릿속으로만 배운 인권과 민주주의는 삶을 통해 익힌 자유의 감각과 인권의 감수성과 연결되지 않을 때 이렇게 반대의 논리로 쉽게 흡수될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극우화한 것인가? 

극우 이데올로기가 더 잘 통하는 현실인 것인가? 


 나는 학생들의 이데올로기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별히 10대 학생들만 더 극우화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전의 극우 논리가 일베라는 폐쇄적인 사이트를 통해 숨겨야 하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공당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공론화되고 빠르게 유통되는 환경이 되었을 뿐이다. 


돌아보면 특목고를 나온 나는, 학생회장으로서 스스로 두발을 규제하는 ‘파마와의 전쟁’을 벌이기도 한 어용 학생회장이었다. 내가 일반고가 아니라 특목고 소속인 것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S대를 못 갈까 봐 3년 내내 전전긍긍했었다. 나의 불안을 잠재운 것이 나보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었기에 어떤 의미에서 나는 혐오·차별을 숨기고 살았을 뿐 극우 세력이었을 수 있다.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살지 않아도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살 수 있고, 아니 살아야 하며, 그런 사회의 차별들이 문제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학생들의 극우화는 이러한 사회 환경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선택지이다. 배제당함에 억울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차별받아도 되는 존재를 찾아 나도 그 차별에 동참하고 배제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학생들의 극우화가 진정으로 걱정된다면, 여전히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제한하며 매일 스크리닝당하는 일상 속에서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그러면서도 교실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의 위선에 대해 먼저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명실공히 1등급이 아니면 인서울 대학에 갈 수 없고,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능력주의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없애고, 어려운 처지일수록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게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학교와 사회는 전혀 변하지 않으면서 청소년들만 문제 삼으며 처벌하고 억압하고, 그러면서 현실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가르치기만 한다. 그 한계는 너무나 뚜렷하다. 이제 혐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학교에서부터 ‘다시 말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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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조합 통신을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조합원 연수와 총회에 참여할 수 있고, 지역 벗모임과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 교육농, 나눔공방 등 조합원들이 만들어 내는 모임들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임을 직접 제안하고 만들 수도 있습니다.

 

· 조합비는 월 15,000원이며, 아래 링크를 통해 가입 신청서를 제출하시면 매월 CMS로 자동 출금됩니다.

(단,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분들이나 청소년들은 월 회비 납부를 조정하거나 유예할 수 있습니다.)

· 출자금은 최소 '1구좌 2만 원'이며, 약정하신 금액만큼 첫 번째 월 조합비와 함께 출금됩니다.

· 가입서 작성시 ‘상호’에 재직 중인 학교나 회사명 또는 소속을 입력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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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