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호[연재]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사유하기

202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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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교육농 | 좋은 교육과 좋은 삶을 위하여 ②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사유하기

 


날짜 및 장소

2025년 9월 20일(토) 서울 영림중학교 교장실

 

참가

박복선 전 성미산학교 교장, 윤상혁 영림중 교장

 

진행·정리

조진희 서울 초등 교사

 

사진

최승훈 본지 기자

 

 



연재를 시작하며

‘교육농(農)’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텃밭을 통한 교육을 함께해 온 지 10년을 넘어섰다. 2019년 교육농협동조합 조합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교육농》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후 좀 더 넓고 깊은 고민을 담아 나눌 필요가 있어 다시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교육농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3회에 걸쳐 담고자 한다. 교육농의 배경 철학과 원리에 대한 친절한 안내와 말 걸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연재 순서

① 느림의 힘, 관계의 복원 - 텃밭과 함께하는 교육의 생태적 전환

②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다시 사유하기

③ [좌담]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출발, 교육농 2

 



교육 의제를 넘어 좋은 삶까지 아우르는

삶과 교육의 생태적 전환

 

조진희 

선생님께서는 이계삼 선생님과 함께 《오늘의 교육》(창간호, 2011)을 통해 ‘교육 불가능’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셨어요. 당시에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어요. 지금은 그 말을 별로 안 쓰지만, 저는 여전히 유효한 담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는데, ‘교육 불가능’ 담론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박복선 

전에 《오늘의 교육》(60호, 2021)에서 전현직 편집위원장인 정용주 선생, 채효정 선생과 《오늘의 교육》에 대한 평가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교육 불가능’이란 표현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긴 합니다. 우리의 인식과 실천은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선언이었죠.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교육이 가능하느냐’고 물어야 한다고 말이죠. 정의, 용기, 책임, 공공선, 민주주의…….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덕목들을 취직이 압도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도대체 교육이 가능한가? 단지 학교에서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거나, 대다수 학생에게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 되는 현상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문제라고 느꼈어요.

제가 요즘 에리히 프롬을 다시 읽고 있는데,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체제라는 것을 말합니다. 소비적 욕망 앞에서 ‘좋은 삶’이라는 가치는 설 자리가 점점 좁아져요. 자본주의는 좋은 교육과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시스템을 채택하면서도 그것의 결점을 상당 부분 보완하는 노르딕 모델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결점을 보완한 만큼 ‘교육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닐까? 우리가 다시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한다면, 저는 그것이 결국 ‘체제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사실 나쁜 체제에서 좋은 교육을 하기 어렵다는 것은 대부분의 교사가 알고 있어요. 학교는 기본적으로 서열을 정하고 그에 따라 지위를 분배하는 기능을 하고, 누구도 여기서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교사가 아무리 체제 밖 혹은 체제 너머를 꿈꾸고, 학생들에게 다른 교육을 한다고 해도, 성적을 내고 서열을 정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경쟁을 통해 서열을 정하는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데 일조할 수밖에 없지요. 물론 교사가 하는 모든 일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복무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도 완전히 자본주의에 포섭되지는 않아요. 특히 교사와 학생이 만나는 공간에서는 부분적으로나마 비자본주의 혹은 반자본주의적 삶이 가능합니다. 이 공간이 교사들이 분투하는 자리죠. 이런 공간을 가꾸어 가는 교사들은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학교가 진짜 하는 일, 그러니까 체제 정당화와 재생산의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교사들도 마찬가지고요. 루이 알튀세르는 학교를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고 했어요. 그가 분투하는 교사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그 소수의 교사들에게 미안하다고 해요. 그러니까 ‘교육 불가능’은 교사 개개인에 대한 공격은 아닙니다. 학교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자본주의에 복무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이 강력하게 작동할수록 교육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획을 할 수 있어요.

 

조진희 

좋은 시스템 안에서 좋은 교육이 가능하다면,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연스럽게 ‘생태적 전환’ 이야기로 넘어갈 수 있을 거 같아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오늘의 교육》(4호, 5호, 2011)에서 연속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 특집을 냈어요. 전에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한 《오늘의 교육》이 처음 쓰지 않았나 해요. 좀 전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안에서 교육은 불가능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게 ‘생태적 전환’이고요.


박복선 

‘생태적 전환’이란 말이 없지는 않았을 거예요. ‘근대 문명에서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이란 뜻을 담은 여러 표현들이 있었죠. 그것을 교육과 직접 연결한 것이 《오늘의 교육》이겠죠. 좋은 글도 많이 실었는데, 교사들의 구체적 실천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근대의 끝이 보이고, 우리는 근대의 밖 혹은 근대 너머를 상상하고 실현할 때죠. 근대 문명은 사실상 자본주의 문명이니,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전환하는 기획을 하고 하나하나 실천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자본주의는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스스로 변신하면서 살아남았어요. 지금 금융 자본주의까지 왔고 가까운 미래에는 AI 자본주의가 등장할 수도 있겠어요. 그런데 생태적 위기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사회적 위기는 자본주의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자연의 한계 그리고 사회적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죠. 자연이나 인간이나 짜낼 만큼 다 짜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수십 년 동안은 재난을 상품화하여 돈을 벌겠죠. 그런데 생태적 위기와 사회적 위기가 더 심해지면 결국은 자본주의의 터전도 무너집니다. 거부들이야 지하 도시에 들어가서 살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은 작동할 수 없을 겁니다.

아무튼 ‘생태적 전환’이란 말의 의미도 넓고 깊어졌어요. 예전에는 주로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자연의 한계’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과제로 생각했다면 지금은 좋은 사회,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초점이 이동하고 있는 거 같아요. 전에도 생태와 자본주의는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이 변혁운동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어요. 사실 ‘생태적 한계’ 안에서 ‘좋은 삶’을 꾸려 가기 위해서도 시스템 전환이 필요하죠. ‘자본주의 이후’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자연과 인간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아니라는 인식은 널리 공유되고 있어요. 불평등 문제와 생태 위기는 동일한 기원에서 비롯된 동일한 문제라는 게 핵심입니다. 옥스팜에서 발표한 그래프를 보면 상위 10%가 부의 50%를 차지하고 있고, 온실가스의 50%를 배출하고 있어요. 지금으로서는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한계 내에서 좋은 삶을 가꾸어 가는 것을 생태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게 《도넛 경제학》에서 말하는 전환 모델이죠. 그것을 정치적 언어로 표현하면 자본주의 시스템을 바꾸는 운동이고. 아무튼, 생태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어떻게 결합 혹은 연대할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조진희 

선생님께서는 성미산학교에서 교육과정에 농사를 도입하셨어요. ‘텃밭 가꾸기’도 있었고, 1년 동안 농장 생활을 하는 ‘농장학교’ 프로젝트도 있었죠? 배경 설명을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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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자립 혹은 자급’으로의

방향 전환이지요.

- 박복선

 


박복선 

저는 ‘생태 문명’은 소농이 중심이 된 마을 공동체들이 연대를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간디, 김종철 같은 스승들이 가르쳐 주신 것이죠. 지금 세상에 너무 단순한 생각이겠지만, ‘이념형’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소농 중심의 마을이 아니어도,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립, 자치, 연대’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생태적 전환이에요. 이런 맥락에서 농사는 그야말로 가장 중요한 자립의 기반이자 ‘삶의 기술’이에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든 농사는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농사를 강조했어요. 직업으로서 할 수도 있겠지만, ‘반농반X’를 해도 되고, 작은 텃밭 하나를 가꾸어도 되고, 그것도 어렵다면 옥상에서 상자 텃밭을 가꾸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립 혹은 자급’으로의 방향 전환이지요. 마리아 미즈도 ‘텃밭’을 자급 관점에 의한 전환의 좋은 사례로 언급하잖아요? 사실 농사를 미래의 블루 오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전환이나 대안을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권장할 만한 직업이긴 하죠. 제가 양육자들하고 진로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10명이 졸업한다면, 그중 한 명은 농부가 되고, 또 한 명은 마을에서 먹고사는 활동가가 되면 좋겠다. 나머지는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학교에서 배운 생태적 삶을 살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꽤 괜찮은 진로교육을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의 진로교육을 설명하는 썩 좋은 말 같지는 않아요. (웃음)

그래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도시에서 하는 건 감질나잖아요? 일주에 두세 시간 농사 흉내만 내느니 아예 농촌으로 가자. 농사도 배우지만, 밥하고 빨래하고 공간을 가꾸는 일도 해라. 자급적 공동체를 꾸려 보라는 거죠. 자연의 한계라는 것도 실감하게 되고, 농적 삶의 리듬감도 느껴 보고, 마을 어르신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한 활동 목표였습니다. 처음에는 폐교를 빌려서 프로젝트를 했는데, 프로젝트가 자리를 잡으면 아예 작은 농장 하나를 운영할 생각도 했어요. 농장 주변에 귀농하는 학부모들이 마을을 만드는 꿈도 꾸었죠. 그렇게 되면 농장학교는 그 마을에서 꾸려가는 거지요. 처음에는 부모들이 반대했어요. 아이들에게 너무 센 거 아니냐는 거죠. 어떤 분은 군대 보내는 느낌이라고. 사실 ‘고생도 좀 해 봐라’ 하는 생각이 없던 건 아닌데, 그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학생들이 그런 말을 해요. 겨우 아침 준비해서 먹고 나면, 점심은 무얼 먹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사실 그렇게 하라고 세팅을 한 건데, 너무 힘들면 역효과가 나요. 아무튼 농장학교 프로젝트를 하면서 얻은 팁이 몇 개 있어요. 하나는 힘든 일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즐거운 일이 많아야 한다. 특히 먹는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는 거. 사실 농사의 재미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에서 나오죠. 풍성한 식탁이 있으면 즐겁습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함께하면 좋아요. 요리를 배우는 즐거움이 크죠. 다른 하나는 학년 통합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거. 농장에서 모든 생활을 함께하니 당연히 갈등이 많이 생겨요. 그러면 맨날 회의를 하게 되는데, 이것도 자주 하면 교사든 학생이든 너무 피곤해요. 좋은 선배 역할이 중요합니다. 회의까지 가지 않게 잘 중재하는 선배가 있으면 정말 좋아요. 또 농장학교가 섬이 되면 안 된다는 거. 농장학교에서 정말 좋았던 것이 마을과의 관계 맺기예요. 마을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마을은 프로젝트의 보고입니다. 일을 하면서 맺는 관계는 뭐랄까, 깊이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프로젝트 끝나고 몇 년 지났는데도 부러 찾아뵙기도 하고 마을 축제 때는 공연단 꾸려서 가기도 해요.

 

조진희 

졸업하고 나서 청년기에 마을과 어떻게 연결될 수도 있겠네요?

 

박복선 

마을에서 정착 기반을 놓아 주면 모를까, 쉽지 않을 거예요. 풀무학교 전공부 사례만 봐도 녹록지 않아요. (성미산 학교) 졸업생 중에 풀무학교 전공부를 나와서 홍성에 정착한 청년이 있어요. 전공부 졸업생 중에 마을에 정착한 모범적 사례로 꼽히더라고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을에 정착하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학교라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홍천 마을에 성미산학교 교사 둘이 귀농을 하긴 했네요. ‘농장학교’ 프로젝트 교사로 갔다가 마을 사람이 된 거죠. (조진희 : 아, 교사들의 전환이 있었군요?) 하하, 그러게요. 얼마 전에 보니 마을 일꾼이 다 되었더라고요. 요즘은 농촌에도 지자체 지원 사업이 많아요. 사업 기획서 쓰고 보고서 쓰는 사람이 대접받아요. 마을에서 이미 발언권을 얻었더라고요. 이분들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아’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요. 워낙 일을 잘하니까 군에서도 지원을 해 줘요. 얼마 전에는 공공 일자리도 만들었다고 해요. 농촌에 혼자 사시는 노인이 많잖아요. 쓰레기 분리수거가 마을 돌봄이 돼요. 안부도 묻고, 말벗이 되고, 일을 돕기도 하는 거죠. 어느 방송에서 취재해서 유튜브에 올렸는데, 정말 뭉클하더라고요. 그래, 이게 생태운동이지! 농약병 하나 집어 들고 나오는 게 아니에요. 입소문이 나니까 다른 마을에서 강의 요청도 오고 자연스럽게 마을과 마을의 연대 활동으로 이어져요. 부모를 귀농시키지는 못했지만 (웃음) 이것도 성과라면 성과죠. 귀농까지는 아니어도 교육농처럼 일산 쪽에서 작은 농장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부모들도 계세요, 이것도 사실 농장학교 효과라고 볼 수 있어요. 농장을 꽤 규모 있게 운영하시더라고요. 농업을 공부하시겠다고 방통대에 입학하신 분도 있어요.

 

조진희 

2025년 2월 교육농 10주년 포럼 때 선생님께서 ‘좋은 삶, 좋은 교육, 좋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나오미 클라인이 쓴 《미래가 우리 손을 떠나기 전에》라는 책을 보니 거기에 ‘부엔 비비르’ 우리말로 ‘좋은 삶’이라는 말이 나와요. 이게 남아메리카 원주민 사상인데, 에콰도르, 볼리비아 사회운동의 정신이라고 하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좋은 삶’과 연결이 되는 건가요?

 

박복선 

‘좋은 삶’, 이건 진짜 몇 시간 얘기해도 부족할 거 같은데. 좋은 삶을 정의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별로 생산적이지 않아요. 그냥 상식적으로 우리가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떠올리면서 이야기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여기서는 조금 더 나아가 보죠. 제가 대학에서 문학 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 중에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엄밀하게 문학의 정의를 내리려면 까다로운 문제를 많이 다뤄야 해요. 그렇게 하고도 합의에 이르기 어렵죠. 그런데 문학이 아닌 것들을 배제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들을 피해서 갈 수 있어요. 최소한의 합의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또는 좋은 삶의 사례들을 많이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요, 사랑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말고, 다양한 사랑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는 거죠. 많은 사례를 수집해 놓고 보면 윤곽이 나오죠.

최근에 주디스 버틀러와 프레데리크 보름스의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거기서 버틀러가 그런 얘기를 해요. 우리가 행복에 대해 말하기 어렵고, 이루기도 어렵다. 그런데, ‘살 만한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살 만한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것 이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돌봄’을 이야기합니다. 돌봄이 있는 시스템이 ‘살 만한 삶’의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행복은 이게 보장이 되고, 거기에 ‘좋은 삶’의 다른 조건들을 덧붙여 가는 방식으로 만들어 가는 거죠. ‘부엔 비비르’는 우리말로 ‘좋은 삶’으로 번역되죠. 말씀하신 대로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합니다. 에콰도르, 볼리비아에서 ‘자연의 권리’를 헌법이나 법령에 명기하는 배경이 되었죠. 신자유주의적 침탈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 소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한 ‘좋은 삶’은 이것을 지칭한 건 아니고, 일상적 용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담은 거예요. 그러니까, ‘부엔 비비르’는 제가 말한 ‘좋은 삶’의 한 예인 거죠. 요즘 아마르티아 센이나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들)’ 이야기를 많이 해요. 마사 누스바움은 핵심 역량 열 가지를 말하는데, 그게 사실 ‘좋은 삶’의 조건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에서도 다섯 가지 핵심 역량을 제시하는 거 같은데, 맞나요? 조금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그것도 개인이 ‘좋은 삶’을 가꾸어 가기 위해 키워야 할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교육과정은 ‘역량 기반’과는 거리가 멀지만요.

저는 ‘좋은 삶’의 최소 조건을 아까 말씀드린 ‘도넛 모델’로 설명하는 걸 좋아해요. 생태적 한계와 사회적 한계 안에서의 삶. 물론 최소 조건이니, 많은 것을 덧붙여야 합니다. 버틀러의 말처럼 개인마다 사회마다 행복 혹은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이 다르니까, 자기 자리에서 덧붙일 수 있는 것을 찾아야죠. 좋은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역량을 길러야 하고요. 이게 교육의 역할이겠죠. 좋은 시스템, 공동체, 커뮤니티 같은 것을 만들어 가야 하고요.

 

조진희 

한신생태문명원에서 낸 《기후 돌봄》에서는 탈성장 사회의 요구는 자본주의 사회의 요구와 똑같을 수는 없다, 풍요로움, 욕망, 쾌락 같은 것이 다시 정의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해요.

 

박복선 

정말 좋은 지적을 해 주셨어요. 저는 이 문제가 ‘생태적 전환 교육’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헬레나 호지가 꽤 괜찮은 사회라고 했던 ‘라다크’가 큰 곤경에 처하게 된 게 결국 소비의 욕망이 생겨난 거예요. 자본주의와 접속되면서, 사실 접속은 너무 얌전한 표현이고, 자본주의의 침탈이죠. 라다크를 강제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주변부로 편입시킨 거니까, 소비의 맛을 본 거죠. 관광객이 몰려들고, 그들이 던져 주는 달러로 서구에서 만들어 낸 것들을 소비하기 시작한 거죠. 결국 자연도 파괴되고, 공동체도 무너지고. 헬레나 호지는 ‘좋은 삶’은 예전에 라다크 사회를 지탱했던 원리, ‘로컬의 자급’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 욕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케이트 소퍼의 《성장 이후의 삶》이란 책이 그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신승철 선생님의 《욕망 자본론》이란 책도 있네요. 소비의 욕망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욕망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교사들은 이 질문을 해야죠. 다른 욕망의 형성이 교육으로 가능한가?

한때 ‘배움의 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하자센터를 만드신 조한혜정 선생님이 교육계에 이 문제를 던지셨어요. 하자센터에서 청소년들의 문화작업장을 만든 것도 ‘동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동기’에서 ‘욕망’으로 초점을 옮겨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욕망 그러니까 소비가 주는 쾌락, 소비를 통한 자기 과시, 이런 것을 ‘자기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승인합니다. 학교교육은 ‘명문대 입학 – 대기업 입사 혹은 고위 관료직 진출 – 넓은 아파트, 고급 자동차로 상징되는 행복한 가정 – 교육을 통한 부의 대물림’의 ‘행복 서사’를 승인할 뿐만 아니라 부추기고 있죠. 학교 성적으로 지위를 분배하면서 ‘행복 서사’를 직접 재생산해요. 이걸 깨야 합니다. 그게 ‘생태전환교육’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학교가 이것을 할 수 있나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원용하면 학교는 상식을 승인하고 재생산하는 기구입니다. 소위 ‘공식적 지식’을 가르치고, 순응적 태도를 강요하면서 이 일을 해요. 상식을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학교교육의 역할이에요. 그러니까 전환의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정도로 욕망을 바꿀 수 있을까? 그래서 ‘생태 전환을 위한 교육’은 사회적 프로젝트가 되어야 해요. 좋은 삶의 비전을 보여야 하고, 그 비전을 실현하는 과정이 즐거워야 합니다. 그 과정이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다양한 커뮤니티를 통해 생태적 전환을 실천할 때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텃밭공동체에서 농사를 하면서 다른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텃밭이 결국 자급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조직하는 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요.

제가 좋아하는 넬 나딩스의 《행복과 교육》이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서 교육이 목적을 상실했다고 지적하면서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쓰는 ‘좋은 삶’이라는 말과 의미가 거의 같습니다. 존 화이트의 책도 몇 권 번역되었는데, 그는 ‘웰빙’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도 ‘좋은 삶’과 거의 말이에요. 행복이나 웰빙이 너무 타락해서, 저는 ‘좋은 삶’이라는 말을 썼어요. 나딩스나 화이트가 주관적 행복이나 주관적 쾌락을 경계하고 있으니 제가 쓰는 말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생태전환교육’을 시작하면 됩니다. 그리고 인식과 실천이 넓고 깊어지면 주류 교육학을 대체할 수 있을 겁니다.

 

근대 문명(진보주의, 자본주의, 인간중심주의 등)의 

문제점과

근대 교육에 대한 비판과 성찰

 

조진희 

윤상혁 선생님, 2025년 2월 교육농 10주년 포럼 때 선생님 발표문에서 “세계에 대한 배움에서 세계와 함께 되기 위한 배움으로 전환해야 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표를 보여 주셨어요. 제가 교육농협동조합 밑줄 독서회에서 읽은 《향모를 땋으며》를 보니까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나와요. 저자인 로빈 월 키머러는 인디언의 후손으로 식물학자인데 인생의 국면 국면에서 식물이 자기한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해 주어요. 인디언들이 식물을 ‘서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고도 하고요. 식물 존재를 사람처럼 대한다는 점에서 아예 언어의 개념조차도 다른 거죠. 기존의 교육은 세계에 대한 배움이라면 지금은 세계와 함께 되기 위한 배움이 될 거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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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태적으로

터닝할 수 있는

페다고지를 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인 거죠.

- 윤상혁

 


윤상혁 

박복선 선생님도 말씀하셨는데 에듀케이션이라는 것 자체가 휴먼 에듀케이션이잖아요.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추구하는 게 에듀케이션의 본질이란 말이에요. 근데 우리가 생태전환교육을 얘기할 때는 비욘드 휴먼 에듀케이션이 돼야 하는 거죠. 인간 너머 존재들과 함께하는 교육에 대해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 페다고지라는 것도 생태적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한 상태나 단계에서 다른 상태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이행으로서의 전환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터닝이라는 관점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에콜로지컬하게 터닝을 해야 하는 거죠. 결국 비욘드 휴먼 에듀케이션과 에콜로지컬 터닝 페다고지의 결합이죠.

전환이라는 건 굉장히 동적인 개념이고 계속 어떤 방향을 바꾸는 작업인데 그런 차원에서 과거의 페다고지 왼쪽은 인간 중심 교육이라고 보면 되는 거죠.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해서 배우는 거였다면 오른쪽은 인간 너머의 교육이에요. 그래서 인간 너머의 교육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 존재로서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나도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그런 교육이 되어야 해요. 그 다음에 교사로서의 페다고지 자체는 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돼야 하고요. 이 화살표는 다 터닝이에요. 예를 들면 인본주의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지만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생태적 의식에까지 이를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사회 정의 역시 마찬가지이요. 불평등 문제, 차별과 혐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간-너머-존재를 포괄하는 생태 정의를 위한 작업으로 넘어가야 하는 거죠. 그러니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태적으로 터닝할 수 있는 페다고지를 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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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희 

아까도 생태교육 관련 법을 말씀하셨는데, 「교육기본법」이요. (윤상혁 : 네, 「교육기본법」 제2조 교육이념에 이렇게 나와 있죠.) 홍익인간의 이념이 아직도 「헌법」에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로 되어 있고요. 그래서 널리 ‘인간만’ 이롭게 하지 않게 「교육기본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어떠세요?

 

윤상혁 

「교육기본법」은 「헌법」 제31조의 영향을 받고 있고 「교육기본법」 제2조에 명시된 교육이념도 헌법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죠. 그러니 「교육기본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헌법」 제31조 더 나아가 환경권을 명시한 「헌법」 제35조를 개정하는 일과 병행되어야 할 거예요. 그러고 나서 교육이념에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기본 개념이 들어가야 되겠죠. 그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개념의 확장 혹은 폐기에서부터 출발할 거에요.

 

조진희 

지난 계엄 이후에 개헌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교육법도 그렇지만 개헌을 하면서 우리 사회 전체의 사회적 전환을 위한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비인간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 이런 얘기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헌법」에 비인간 존재들의 권리를 담자, 이런 얘기도 나오고 있고요. 아기 기후 소송도 말씀하셨는데 실제 개헌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윤상혁 

개헌을 할 때 그 내용보다는 개헌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구윤리센터 디렉터 카렌나 고어는 2020년 가을에 열린 ‘한국생태문명회의’에서 국제 정책이 만들어지는 어느 공간이든 3개의 빈 의자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3개는 각각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미래 세대, 그리고 지구에 있는 모든 인간 이외의 생명체, 그러니까 현재 만들어지는 정책들에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면서도 가장 적은 영향력을 가진 존재들을 위한 지정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3개의 빈 의자가 있다고 상정해 놓고 그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우리가 들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헌법」을 새로 구성한다는 것은 그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들을 상정하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목소리까지 「헌법」에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상상력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법을 만드는 것이 기술적인 작업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좀 인문학적이고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법 개정을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예를 들어 에콰도르는 2008년 세계 최초로 헌법에 자연의 권리를 명문화했어요. 헌법 전문에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전제하고, 어머니 대지의 보호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좋은 삶’이라고 규정한 것이죠. 에콰도르 헌법은 ‘자연과 인간의 집단적 조화’를 추구하면서 자연을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 제7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4개 조로 ‘자연의 권리’를 규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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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희 

와, 자연만 좋은 게 아니라 인간도 함께 좋은 법 같아요! 지난 ‘새만금 신공항 백지화 걷기 행진’(2025년 9월 6일)에서 뵀잖아요. 지역 개발 논리로 공항을 계속 밀어붙이고 있는 지자체와 정부에 맞서는 주민, 환경단체, 무안 제주항공 희생자 가족들도 함께했어요. 그때 비인간 존재들 인형 모자를 쓰고 걸으셨는데 같은 이유에서지요.

 

윤상혁 

네. 그날은 전북지방환경청에서 출발한 ‘새, 사람행진’의 4주 차 마지막 날이었어요. 비가 몹시 내리는 날임에도 많은 시민들이 동작대교 전망쉼터에 모였습니다. 환경과생명을지키는서울교사모임, 구로기후위기비상행동의 벗들 그리고 향린교회공동체 교우들과 반갑게 만났어요. 향린공동체 교우들과는 2024년 2월 수라갯벌에서 새만금 생태정의 기도회를 진행했었어요. 구로기후위기비상행동의 벗들과는 2023년 9월 17일 구로 시민사회와 함께 영화 〈수라〉 공동체 상영회를 열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가 이런 표현을 썼죠.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이번에 새만금 신공항 기본 계획 취소 판결에서 승소하기까지 과거가 현재를 도왔다고 생각해요. 그 속에는 인간-너머-존재들도 포함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새만금 파괴의 역사가 되게 오래됐어요. 아주 오랫동안 파괴가 지속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은 새만금은 이미 끝난 게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수라〉에서는 여전히 많은 생명체들이 수라 갯벌에 서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잖아요. 목소리를 내고 있고 회복되고 있고 그걸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고요. 어떻게 보면 이번에 새만금 신공항 반대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과 용기를 주었던 존재가 바로 수라 갯벌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서로를 돕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조진희 

왼쪽에 있는 세계에 대한 배움의 철학은 근대의 데카르트 철학에 기반한다고 설명을 해 주셨어요. 이제 철학적인 사고를 좀 해 보려고 하는데요, 근대 철학에 도대체 어떤 문제점이 있는 거죠?

 

윤상혁 

사실 저도 그렇게 철학적이지는 않은데 데카르트를 수학 교사로서 되게 좋아해요. 좌표 평면이라는 것을 도입해서 세계를 굉장히 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죠. 당시에 미신이라든지 종교라든지 반이성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이성의 필요성, 이성을 도구로 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을 해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도구가 근대적인 문명이었고 근대적인 다양한 지식이었죠. 그러면서 결국 데카르트로부터 촉발된 근대 교육의 핵심은 교육이라는 것이 특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권리로서 교육을 누릴 수 있게끔 해 주었다는 거예요. 그 기본적인 원리가 여러 가지 다양한 지식을 세분화하고 그다음에 쉬운 것부터 단계적으로 어려운 것들로 나갈 수 있게 해 주었죠. 그런 공교육 시스템을 만든 것은 데카르트가 한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의 후예들이 비용을 낮춤으로써 모두에게 교육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에 의의가 있어요. 그렇지만 결국은 인간 중심적이라는 것은 벗어날 수 없죠.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도구로 삼으면서 지식을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도구로 삼다 보니까 인간들까지도 지식의 위계 속에서 도구화되고 계급화되는 것이 한계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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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와 교육도

그런 능력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닌가.

- 조진희

 


조진희 

자본주의가 워낙 자연을 도구화하고 착취하고 대상화하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성장하고 발전했어요. 그 철학적 배경에는 자연과 인간의 대립 이분법뿐만이 아니라 문명/야만, 서구/비서구, 남성/여성, 이성/감성, 이성애/퀴어 이런 전반적인 사회적 이분법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것과 연관지어서 교육에서도 어떤 헤게모니를 갖고 있는 존재, 능력 있는 존재와 그 반대에 있는 존재인 학생들이 같이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학교와 교육도 그런 능력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윤상혁 

능력주의라는 것도 분명히 그전에 정실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나왔을 때, 세습에 대한 반대로 능력의 강조는 어느 정도 필요했었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오직 능력만을 강조한다고 할 때 사회적 소수자들, 예를 들어 여성, 장애인, 이주민 그리고 학벌의 밖에 있는 학생들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질 수 있죠. 그런데 능력주의가 종교가 되는 순간 사회적 소수자들의 불리한 여건들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폐해가 발생하는 것이고 능력이 인간을 나누는 계급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독재라는 것들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나갔는데 이제는 능력주의가 독재의 권좌에 오른 것 같아요. 능력주의의 폭정에 저항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조진희 

윤 선생님은 수학교육을 전공하셨어요. 1972년에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가 나왔습니다. 2022년엔 《성장의 한계》 50주년 보고서(《모두를 위한 지구》, 2023년)가 나왔어요. 50년이 지났음에도 방향이 안 틀어진 거죠. 50이라는 수학적·사회적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보고서에 보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거든요. 하나는 빈곤과의 결별을 포함한 전환의 시나리오,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시나리오인데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시나리오예요. 앞의 전환의 시나리오에서 전환의 내용 중에는 “불평등 전환, 권한 부여 전환, 식량 전환, 에너지 전환, 승자 독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스4올 경제”로 이런 챕터들이 있거든요. 그중에 가장 중심적인 내용 중 하나가 교육의 전환이에요. 그래서 성장의 한계가 얘기하는 교육의 전환과 우리 생태전환교육과 연결해 보려고 해요. 선생님께서 지난 포럼 발표에서 석탄, 석유가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원료이듯 “학력 경쟁이 근대 학교 기계의 원료다”라고 비유를 하셨잖아요.

 

윤상혁 

네. 어떻게 보면 우리 교육은 성공 서사였잖아요. 그러니까 학교라는 게 그동안 계속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참자’였어요. 앞에서 ‘좋은 삶’ 얘기하셨지만 미래를 위한 좋은 삶의 예전 기준은 좋은 대학에 가는 거였잖아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경쟁에서 승리하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좋은 삶은 주어지는. 좋은 삶이라는 것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에게만, 능력을 갖춘 자에게만 주어지는 희소재로서 교육이라는 게 존재했죠. 그게 근대 교육의 핵심적인 원료였다고 생각을 해요. 근데 지금은 그런 부분들이 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고 또 경쟁에 통과한 자들조차도 좋은 삶을 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거죠.

 

조진희 

그러면 학력 경쟁 능력주의를 양산하는 것이 아닌 전환된 교육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윤상혁 

박복선 선생님께서 많이 말씀하신 부분인 것 같아요. 좋은 삶을 위한 교육. 201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OECD 교육 2030 : 미래교육과 역량〉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모든 학습자가 전인적 인간으로 성장하고, 각자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개인과 공동체, 지구의 안녕에 기초한 공동의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개인을 넘어 공동체, 공동체를 넘어 행성 차원의 안녕을 교육의 목적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우리가 안녕이라는 말을 쓰는 의미를 좀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동료나 이웃에게 일상적으로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방식이요. 저는 좋은 삶이라는 게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관계 맺음을 통해 얼마든지 좋은 삶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과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 그 관계들을 지키는 것을 포함해서 학교에서도 ‘안녕’이라는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불안, 우울, 강박, 권태, 무기력 등 이 시대를 짓누르고 있는 감정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결코 안녕하다고 말할 수 없죠.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너머–존재들까지도요.

 

조진희 

학교 학생들 중 안녕하지 않은 모습들도 있나요?

 

윤상혁 

성적, 경쟁 그런 것들이 있지만, 요즘은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아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우울함 등을 많이 보여요. 그 우울함, 불안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미래 자체를 생각할 수 없다는 건 학생들한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거잖아요. 은연중에 그런 불안감이 사회 전체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러니 학교에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힘을 잃었고요. 또 하나는 어떻게 우리가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떻게 서로를 배려하고 공감하고 서로 포용하면서 공존하면서 지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있죠.

 

조진희 

영림중은 생태 계기 수업도 많이 하고, 또 학생들이 실천적으로 동아리 활동도 하고, 학교 텃밭도 있어요. 이런 전환의 교육 활동 프로그램들이 말씀하신 안녕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반향이 좀 있는지요.

 

윤상혁 

제가 정동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정동이란 말이 너무 어려워서 ‘기운’이라는 말로 바꿔 쓰고 있어요. 관계라는 것은 학생과 교사의 일대일 관계가 아니라 이 학교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정동 또는 기운들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함께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거고요. 그런 면에 있어서 저는 생태전환교육이라든지 학교에서 하는 생태 환경적인 활동들이 더 좋은 기운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식물 가꾸기, 조경 등을 하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고 얘기했죠. 근데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 학교라는 공간에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비인간 생명들도 같이 있잖아요. 또 인간이 비인간 생명을 돌보는 건 줄 알았는데 우리가 돌봄을 받기도 하는 거였어요. 학교 내에 있는 다양한 인간, 비인간 생명들이 서로 돌보고 서로를 바꾸는 과정 속에서 좋은 정동이 만들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꼭 논이나 밭만은 아니고요. 저는 그것이 사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태양과 물과 바람의 학교로 표현을 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항상 다가오는 태양을 흡수할 수 있는 도구, 또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도구, 또 바람을 흡수할 수 있는 도구들도 학교의 어떤 정동을 만드는 데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진희 

그러면 구체적으로 에너지와 관련해서 뭔가 장치나 시설이 있나요?

 

윤상혁 

2026년 1월부터 본관 외벽 공사를 하는데 외벽 일부에 벽면 일체형 태양광을 시공합니다. 준비하는 데 아주 오래 걸렸어요. 한 3년 걸린 것 같아요. 시공을 마치면 태양의 학교가 되는 거예요. 제가 꿈꾼 건 본관 벽면 전체를 다 태양광 발전 시설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만큼 예산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맨 꼭대기 층에만 설치를 하기로 했어요. 영림관(체육관/강당) 아래쪽에는 빗물 저금통이 있어요. 빗물 저금통에 저장한 물을 가지고 텃밭하고 연못에 물을 공급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꿈꾸는 건 바람 나무인데 풍력 발전기 중에서 나무처럼 생긴 게 있어요. (조진희 : 프로펠러가 있는 게 아니라요?) 네, 나무 잎사귀 하나하나가 다 풍력 발전기예요. 그런 바람 나무를 학교에 설치하고 싶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봐요. 우리가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대도시가 해체되지 않는 이상, 지금 2000만 명이 수도권에 모여 살고 있는데 여기서 에너지 자급이 가능할까? 저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러면 계속해서 발전 방식만 원자력, 석탄 화력 발전에서 재생 에너지로 바뀌었을 뿐이지 결국 지방에서 만들어진 에너지를 송전탑을 통해서 가져오는 건 마찬가지일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로에 여러 가지 나무들이 있죠, 저는 그런 나무들도 풍력 발전기 바람 나무로,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건물들도 다 태양광 패널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경관이 바뀔 거라고 여기지 않고 생태적 전환을 말한다는 것은 조금 위선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본다면 학교에서 먼저 교육적으로 해 보는 거죠. 그냥 프로펠러가 달린 풍력 발전기가 아니라 나무 형태의 바람 나무도 있는데, 이를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님한테 보여 드리고 싶어요.

 

조진희 

공저하신 책들 있잖아요. 《기후위기 시대 환경교육 : 세 학교 이야기》, 《서로를 살리는 기후위기 교육》 등. 제가 보기에는 한국 사회에서 기후위기 교육에 가장 앞서 나가고 계신데요. 학교장으로 일하면서 에너지 자립이나 마을 차원에서의 에너지 자립 이런 것도 고민하고 계시고요. 그런데 이런 사유와 실천이, 교육과정이 혹시 선생님들한테 거부감을 주거나 아니면 또 부가적인 업무가 되어 비판을 받지는 않으셨나요?

 

윤상혁 

그런 거 좀 있었죠. (웃음) ‘우리 교장은 생태전환교육에만 관심이 많다…….’ 그래서 요즘은 조용히 하고 있어요.

 

조진희 

그렇다면 아까 그 정동과 기운까지 가는 데는 조금 부족한 것 같은데요. (웃음)


윤상혁 

학교가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죠. 국소적으로 촛불을 잘 지켜 내도 외부에서 큰바람이 불어오면 불꽃이 꺼져 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요. 오늘 하루를 생태적으로 의미 있게 살았다는 만족감에 빠져 있다가도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남들은 다 자기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 멋대로 살고 있는데, 나만 불편을 감수한다고 의미가 있을까?’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는 거죠. 그래도 주변에서 힘을 내 주시는 분들은 좀 계세요. 올해(2025년) 탄소 제로 실천 학교를 하고 있는데 제가 한 게 아니거든요. 1학년 부장 선생님이 한번 해 보겠다고 해서 탄소 제로를 실천하고 있어요. 저는 속으로 ‘너무 좋다, 고맙다’ 그러면서 제가 상당 부분 역할을 가져갈 테니 같이 해 보자고 했어요. 학교 운동장과 학교협동조합인 여물점 앞에 가 보면 멋진 벤치들이 있어요. 에코 체인지 프로젝트라고 해서 재고 의류에서 나온 폐섬유를 친환경 벤치로 재탄생시킨 거예요. 청소년들이 자원 순환의 가치를 일상 속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기획한 거죠. 의류 기업 무신사가 폐섬유 자원화 및 캠페인 운영 비용을 후원하고 재활용·재사용 전문 기업 세진플러스에서 폐섬유로 친환경 벤치를 제작하는 기술을 제공했어요. 기빙플러스는 친환경 벤치 설치와 더불어 우리랑가협동조합의 환경 강사진과 함께 청소년 환경 의식 향상을 위한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하구요.

 

조진희 

박복선 선생님 말씀하신 홍천에 정착한 성미산학교 선생님처럼 그런 전환하는 선생님들이 나오시는 거네요. 텃밭 가꾸는 것도 학생들이 하고 있죠, 동아리 선생님과 같이요.

 

윤상혁 

그렇죠. 저 앞에 보이는 텃밭은 ‘꼬마농부반’이라고 자유학기제 수업으로 진행했어요. 연못 앞쪽에 있는 텃논은 교무부장 선생님이 당구반 학생들과 함께 경작하고 있어요.

 

조진희 

당구반이요? 당구반과 논이 무슨 관련이 있죠?

 

윤상혁 

‘논당구반’이에요, 처음에 논당구반이라고 했을 때 노는 당구반인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논을 가꾸는 당구반이었어요. 우리 학교 꾸러기를 모두 모아 당구반을 만들었는데 당구 수업이 끝나고 나서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내기를 했어요.

 

조진희 

학교에 협동조합이 있잖아요. 서울의 중학교 협동조합 중에서는 1호가 맞나요?

 

윤상혁 

서울만이 아니라 공립 학교 협동조합 1호예요.

 

조진희 

운영이 쉽지는 않지만 그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학생 조합원들이 있잖아요. 저는 그런 협동조합 운영도 교육의 생태적 전환의 한 내용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회적 경제로서. 학교협동조합을 좀 소개해 주세요.

 

윤상혁 

학교협동조합 이름이 ‘여물점’이에요. 전에도 학교에 매점이 있었나 봐요. 그런데 학부모들이 와서 보니까 아이들이 건강에도 별로 좋지 않고 그럴 것 같으니까, ‘그럼 우리가 제대로 유기농 같은 좋은 음식으로 매점을 한번 만들어 보자’ 하고 매점을 만들었다가 다시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고 들었어요. 그게 2013~2014년 무렵이었고 지금까지 10년 이상이 이어졌죠. 요즘은 좀 어려워졌어요. 학생 수가 줄다 보니 수익도 줄어들었기 때문이에요.

학교에서는 여물점을 진로 수업과 연계해서 활용하고 있어요. 진로 수업 내용 중에 사회적 경제와 공정 무역 파트가 있어요. 그때 여물점 사무국장님이 특강 형식으로 1학년 학생들한테 사회적 경제와 공정 무역에 대해 가르치고 있어요. 그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에 학생들을 데리고 여물점으로 이동해서 ‘이 매점 자체가 사회적협동조합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야’, ‘이런 물품들이 있어 너희들도 먹어 봐’ 하고 말이죠. 이 외에도 일련의 흐름 속에서 공정 무역에 대한 교육 활동, 조합원 대상 교육 캠페인 활동을 하고요. 학부모 대상으로도 하고 학생 대상으로도 해요. 선생님도 구로 지역에 계셔서 아시겠지만, 요즘 ‘구로 공정한 2주’라고 지역 내에서 사회적 경제에 대한 캠페인 활동들이 쭉 이루어지고 있는데 어제는 영림중학교 순서였어요. 그래서 어제 점심시간에 여물점 앞에서 학부모 조합원님들이 오셔서 이 공정 무역의 10원칙을 비롯해 공정 무역이 왜 필요한지, 그게 뭔지, 공정 무역 상품은 뭐가 있는지, 그런 것들을 알리고 교육하는 활동을 했죠.

 

조진희 

삶 자체가 교육이어서 지금 살아 내고 있는 당장 여기가 중요한데 우리가 그렇게 못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들 대부분이 ‘입시 시스템이 있는 한, 신자유주의 경제가 있는 한, 그리고 학교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못 해, 안 해, 그리고 내가 뭐 한다고 바뀌겠어?’ 이런 좀 비관적이고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진짜 민원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공문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렇게 사회가 바뀔 때까지 정책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애들이 다 성장하고 졸업해 버리고 그 학생들이 20대, 30대가 돼 버리잖아요. 그래서 지금 선생님들이 가져야 할 어떤 비전과 용기는 뭘까요?

 

윤상혁 

미셀 푸코가 고안한 개념 중에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이 있더라구요. 현실에 존재하지만 일상적인 공간과는 다른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성격을 띠는 공간을 의미한다고 해요. 헤테로토피아는 상상 속의 공간이 아니라 실제 물리적 위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유토피아와는 다릅니다. 푸코는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의 장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유토피아를 이야기할 때 유토피아의 뜻 자체가 이곳에 없는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너무나 이상적이거나 반대로 너무나 반사회적이면 그런 사회는 절대로 도래하지 않아요. 반면에 헤테로토피아는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다른 온갖 장소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을 전도시키는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입니다. 어둠 속에서 깜빡거리는 불빛들을 상상해 볼까요? 항상 불이 켜 있지는 않지만 위치를 가지고 있는. 저는 우리의 실천이 깜빡거리는 불빛들을 닮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근대의 학교가 유토피아를 추구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면 근대 이후의 학교는 헤테로토피아적인 공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학교 안의 작은 텃밭도, 아니 심지어는 평범한 교실도 얼마든지 생태적으로 의미를 지닌 공간이 될 수 있죠.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제가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우리를 둘러싼 기계들의 전원을 찾아 하나씩 끄는 활동을 했습니다. 기계들에게도 멈춤의 시간을 준 거죠. 그때 느껴지는 침묵 속의 공명, 어둠 속의 밝음, ‘에너지 절약’이라는 행위가 전복될 때 느껴지는 쾌감. 이런 것이죠.

 

조진희 

생태전환교육을 이론화도 하고 정책도 만들었고 또 직접 관리자로서 운영도 해 보고, 또 학생들하고 바로 실천 활동도 하는 등 다양한 교육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앞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또 담론화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지요.

 

윤상혁 

교사도 시민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기후위기를 인식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시민. 학생들만 교육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교사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있고 그 지역의 주민이자 시민이잖아요.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는 교회에서는 교인들과 함께, 학교 밖에서는 구로마을교육공동체나 구로기후위기비상행동과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물론 학교 역시 바뀌어야 하는데 그건 앞에서 많이 이야기했어요. 뭔가를 쥐어짜듯이 해서는 안 되고요.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의미와 보람을 찾는 일이어야 할 것 같아요.

 

박복선 

교육부 장관도 그렇고 국가교육위원회도 반영을 해야 하고, 교사들도 목소리를 내 줘야 그들도 힘을 받아요. 그리고 생태전환교육은 학생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측면에서 아래로부터 올라온 거예요. 하지만 교사들 입장에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느낌이 사실 있는 거잖아요.

 

윤상혁 

교육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터전이 사물들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사유 역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살아 있게 하는 여러 가지 환경들과 엮여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과학계에서 얘기하는 건 탄소 중립이에요. 2단계 해법을 제시하고 있잖아요. 2030년까지 적어도 2018년 탄소 배출량 기준으로 50% 정도 감축해야 된다. 2050년까지 탄소 중립에 도달해야 된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적인 변화가 수반되려면 거기에 맞춰서 사회, 경제, 교육, 문화도 전환의 단계가 있어야 하잖아요. 예를 들어 그걸 교육에 적용한다면 장기적으로 2050년에 바뀔 교육의 상을 하나 그려 봐야 해요. 지금과 다른 인간 너머 교육 또는 생태적 전환의 페다고지라는 것이 2050년도에 완전히 구현된다고 보고, 그때의 학교는 어떤 모습이고 그때의 교육학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를 상정하는 게 필요해요. 그리고 좀 짧게는 2030년까지 우리가 절반이라도 바꿔 보자, 그럼 교육에서 절반을 바꾼다는 게 무엇인지 시급하게 바꿔야 할 목표들을 몇 가지 정해서 절반의 전환을 시도해 볼 수도 있겠죠.

 

조진희 

로드맵이 나와야 된다. 그런 말씀이신 것 같아요, 그런데 누가 하죠?

 

박복선 

북유럽 모델 같은 경우를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그리고 아까 헤테로토피아 얘기도 하셨는데 그런 거와 어쨌든 비슷한 맥락이죠. 우리가 급진적인 건 좋은데 실천적으로 그 급진적인 걸 한 걸음에 갈 수는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내 앞에 다음에 할 것들에 대해 좀 보여 줘야 되고. 그러나 이것들이 큰 방향으로는 어떻게 가는 것이라는 큰 비전, 구체적인 실현 목표도 있어야 하는데, 그건 뭐 교사들이니까 익숙하잖아요. 학생들한테 이런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거기 도달하는 데는 몇 개 단계가 있어서 이걸 잘 나눠 주는 게 사실 되게 중요하거든요. 학생들에게 성취감을 느끼게 하고 실제로 그렇게 도달하게 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생태전환학교를 할 때도 1차적으로는 이 정도까지 한번 가 보자, 그다음에는 이 정도까지 가자, 이런 그림은 되게 중요하죠.

 

윤상혁 

우리는 결국 생태적 전환을 이뤄낼 운명이라는 믿음이 필요할 것 같아요. 운명론은 아니고요. 우리의 운명을 결국 우리가 결정한다는 신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까 라다크 얘기하실 때, 헬레나 호지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통해서 공개되는 순간 라다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봐요. 왜냐하면 헬레나 호지와 같은 사람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니까요. 자본주의의 레이더에 라다크가 포착되는 순간 자본주의가 유입돼 버리는 거잖아요. ‘오래된 미래’가 하나의 소비 상품이 되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저는 두 가지 모델이 필요하다고 봐요. 닫힌 모델과 열린 모델. 스스로 회복 탄력성을 갖출 때까지 외부의 침투를 막아 주는 폐쇄적인 모델과 처음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용인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만들어 내는 개방적인 모델. 그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정부에서 조직을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너무나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실 그 어떤 성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어떻게 보면 굉장히 허황되고 도전적인 상상을 할 수 있는 그런 조직을 만들어야 해요. 그러면 진짜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을 해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것이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 중에 하나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❶ 김선희(2023), 〈생태적 환경국가원리에 관한 연구: 기후변화에 관한 비교헌법적 연구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❷ 박태현(2019), 〈에콰도르 헌법상 자연의 권리, 그 이상과 현실〉, 《환경법연구》 41권 2호, 한국환경법학회.



교육공동체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는 지식공동체입니다. 

교육 전문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을 펴내고, 세상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대안적인 삶을 함께 꿈꾸고 공부하고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도 꾸려 가고 있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공동체를 지향합니다. 교육에 대한 건강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고 어우러질 수 있는 마당을 만들겠습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은 공통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경제조직입니다. 정론직필의 교육전문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정직한 책들, 함께 배우고 나누며 성장하는 배움 공간 등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들을 우리 힘으로 만들고 함께 나누겠습니다.

 

‘벗’이라는 이름에는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배우고 나누는 우리 교육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격월간 《오늘의 교육》과 교육 관련 책들을 발행하며 다양한 모임들을 꾸리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은 손쉬운 희망과 위로를 건네지 않고 정직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매체가 되고자 애써 왔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오늘날 교육 현장의 현실을 증언하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책상에 ‘널브러진’ 학생들,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삶의 문제는 입시 경쟁을 완화하고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근대적인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어 나가는 데서 풀어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교육의 생태적 전환, 교육과 페미니즘, 마을과 학교, 광장과 민주시민교육, 4차 산업 혁명과 교육의 시장화라는 기획으로 계속해서 이어 가고 있습니다. 다양한 강연과 연수, 포럼 등을 통해 교육 현안을 고민하고 공부하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와 ‘교육의 생태적 전환’ 등의 주제로 전국을 순회한 〈이 시대 교육 포럼〉, 순종적인 교사이기만을 강요받는 불의한 시대에 불온한 교사를 꿈꾸자며 모인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교육과 삶의 생태적 전환을 고민하는 이들이 모여 함께 농사를 짓는 〈교육농〉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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