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후속 | 4.16 10주기,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 아픔을 빨리 묻자는 사회에서, 기억교실을 봄 | 강유진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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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 4.16 10주기,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는 방법


아픔을 빨리 묻자는 사회에서, 기억교실을 봄

- 4.16기억교실 이전 과정 목격자로서 보고 들은 것

 

강유진

rkddbwls523@naver.com

서울 수명고 사서 교사


 

올해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청년 교사들이 4.16기억교실에 방문하는 추모 행사[ref]2024년 3월 30일, 전교조 주관 ‘선생님 사월이에 요’ 행사로 4.16기억교실을 관람하고, 기억과 약속의 길을 걷고, 유가족 간담회를 진행했다.[/ref]를 기획하였다. 교사들에게 학교와 교실은 일터이자 만남의 장소인데 희생 학생과 교사가 머물렀던 교실에 방문하면 희생자의 삶에 더욱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 희생 학생들의 학교생활이 담긴 〈열여덟의 우리들〉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 중 친구들끼리 서로의 10년 후를 상상하며 “10년 후에 엄청난 음악 교사가 되어 있을 거야”, “나이 먹으면 제주도에다가 집을 살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아프게 다가왔다. 이 영상을 웃으면서 설명해 주시는 재강 어머니의 모습에서 10년의 슬픔을 온몸으로 견뎌 낸 이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교실을 둘러볼 때 지나치게 조용하게, 소곤소곤 이야기하니 옆에 계시던 고운 어머니는 “선생님들, 그렇게 조용하게 하실 필요 없어요. 큰 소리로 웃고 떠들어 주세요. 그래야 이 교실과 복도가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공간이 되니까요. 우리는 그런 게 더 좋아요”라고 말씀하셨다.

고등학생에서 교사가 된 후 첫 기억교실 방문이었다. 단원고 기억 교실에서 일했던 시간이 몸에 저장된 탓인지 교실에 들어가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2016년 8월, 열아홉 살의 나는 단원고 내부에 있었던 기억교실 정리 과정에 참여했다. 성미산학교 12학년으로 4.16 기억저장소에서 인턴십 중이었는데, 기억저장소에서 기억교실 이전 업무를 주관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교실에 붙어 있는 추모 포스트잇을 떼고, 유품을 담을 상자를 접었다. 유가족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그 공간을 정리당했다. 졸업 프로젝트[ref]성미산학교 12학년 교육과정으로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에 맞는 기관에서 인턴십을 진행한다. 나는 4.16 기억저장소에서 2016년 6~8월까지 인턴십을 완료했고, 기억교실의 의미를 인터뷰하는 졸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ref]로 ‘기억교실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유가족 인터뷰를 진행했다.

올해 동료 교사들과 기억교실에 다녀온 후 다시 그때의 글을 찾아 읽었다. 베란다에서 그 자료집을 꺼낸 건 2016년 이후 8년 만의 일이다. 기억교실 이전 과정의 목격자로서 찾아오는 아픔과 슬픔이 싫어 최대한 잊고 지냈는데, 올해 기억교실을 방문해 보니 ‘이 공간이 아프기만 한 곳은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리고 열아홉 살의 내가 기억교실 이전 과정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ref]이 글은 졸업 프로젝트 내용의 일부를 활용해 재구성하였고, 여기에 등장하는 유가족 인터뷰는 2016년에 진행한 내용이다.[/ref] 

 


주인 잃은 교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참사 이전까지 희생자들이 생활하였던 2학년 1반부터 10반까지의 교실, 교무실, 복도는 참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기억교실’로 불렸다.[ref]참사 이후 생존 학생 및 수학여행 미참여 학생 등 88명은 기억교실을 제외한 다른 교실 4곳에서 수업을 하였다.[/ref] 수학여행 이후 그 교실은 비어 있는 상태로 2년간 존치되었다가 3번 이전되었다. 2014~2016년에는 단원고 내부에, 2016~2018년에는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에, 2018~2020년에는 교육지원청 본관에 있다가 2021년에 현재의 4.16민주시민교육원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기억교실이 단원고 내에 있는 동안 그대로 둘지 말지로 의견이 분분했다. 당시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은 2학년이었던 희생 학생들이 3학년을 마치는 해, 2016년 1월 명예 졸업식 때까지는 기억교실을 존치하도록 결정했다. 단원고 측은 명예 졸업식 이후에도 기억교실이 존치된다면 신입생들의 교실이 부족하다는 입장이었다.[ref]교실 총 40개 중 1, 2학년 각 12개 학급, 3학년 14개 학급으로 38개의 교실이 필요한데 10개의 교실이 존치되고 있어 8개의 교실이 부족하다고 전했다.[/ref] 이에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가족협의회)’는 경기도교육청에 명예 졸업식 이후 기억교실 대책 마련 방안을 적극적으로 논의할 것을 요구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유가족의 의견과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2015년 9월, 가족협의회는 경기도교육청에 ‘단원고 교실 존치안’을 제출했다. 단원고에 기억교실을 존치하면서 부족한 교실은 교사(校舍)를 증축하고, 기억교실과 재학생 교실의 입구를 분리하여 재학생 학습권을 보장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가족협의회의 의견 제출 이후, 경기도교육청의 답변은 달라졌다. 교실 문제는 당사자 간의 합의가 가장 중요하기에 교육청은 유가족과 재학생 부모의 합의 내용에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유가족과 재학생 학부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단원고 운영위원회와 일부 재학생 학부모는 기억교실 철거를 주장하는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에 교육청도 ‘교실은 추모 공간이 아닌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밝히며 교실을 복원할 수 있는 ‘4.16민주시민교육원 건립’을 제안했다. 교실 문제를 ‘사회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해 한국종교인평화회의(종교인평화회의)가 중재에 나섰다. 2016년 5월, 사회적 합의를 통한 ‘4·16 안전교육 시설 건립을 위한 협약식’이 진행되었다. 각 주체는 공교육의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4.16민주시민교육원과 단원고 내 추모 조형물 등 ‘기억 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전제로 단원고 기억교실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임시 이전한 후 4.16민주시민교육원을 건설하여 복원하기로 한다.

 


참사의 현장이 되어 버린 교실, 그 의미는?

 

열아홉 살의 여름, 처음 단원고에 다녀온 날을 떠올려 본다. 기억교실 창문 밖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남학생들의 모습이 보이고, 복도에서는 여학생들이 수다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생 학생들의 교실만이 평범하지 않았다. 단원고 내 희생자의 교실과 재학생의 교실은 크게 대비되었다. 단원고 2학년 교실은 세월호 참사의 현장이다. 그 교실은 우리 사회가 희생시킨 학생과 교사의 흔적이었다. 고2 교실이 생전의 마지막 자리가 되었다는 점과 희생자의 자리가 ‘비어 있음’은 ‘사회적 거울’로서 방문객들에게 물음표와 아픔, 울림을 남겼다.

 

교실은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 중에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창현이가 꿈이 없었는데 2학년 때 故 이해봉 선생님(역사 선생님)을 만나면서 꿈을 꾸기 시작했어. 2학년 교실은 처음으로 창현이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설계하고, 하고 싶은 것들을 꿈꿨던 곳이기에 의미 있었고 지키고 싶었지.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교실은 텅 비어 있어. 이 현장을 보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를 통렬하게 느끼고 깨달아야 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 그 어떤 가치보다 안전과 생명은 뒤로 밀릴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해.

- 이창현 어머니 최순화

 

단원고 내 기억교실은 이 책상에 앉아서 존재했던 이들이 한순간에 사라졌음을 보여 주었다. 희생자와 개인적 친분이 없다면 누군가의 ‘희생’은 온몸으로 와닿지 못한다. 기억교실에서는 누구나 희생 학생들의 책상과 의자에 앉을 수 있으며, 편지나 추모 메시지를 쓰고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흔적을 시각, 촉각 등으로 직접 느낄 수 있고, 방문객들에 의해 새로운 기록물들이 축적되고 쌓여 나간다. 참사를 사회의 비극적 사건 전체로서 기억하는 것을 ‘피해자성의 기억론’, ‘담론적 애도’라고 한다면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고통과 살아 있을 때의 삶의 궤적을 기억하는 것은 ‘인격성의 기억론’, ‘관계 생성적 애도’라고 한다. 예컨대 경빈 어머니를 만난 후에는 교실에서 경빈이 자리를 찾는다. 그 자리에는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쓴 가족들과 친구들의 편지, 생전에 함께 찍은 사진, 추모 포스트잇 등이 붙여져 있다. 상실된 타자와 직접적 관계가 없어도 희생 학생들의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며, 꿈과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 갈 수 있다. 나아가 ‘이렇게 많은 학생과 교사는 어디로 갔는가?’, ‘배는 왜 침몰했으며 왜 구조하지 않았을까?’ 질문도 생긴다. 먼저 떠나간 이들에 대해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지를 다잡는다. 교실에서의 슬픔을 정치를 위한 자원으로 만들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조사하고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힘과 원동력이 되기를 바란다. 기억교실의 기록물들이 참사의 증거로서 잘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단원고 내 기억교실 존치는 유가족의 이기심일까?

 

공공의, 공유의 공간인 교실을 희생자 추모 공간으로 두자는 주장에 반대할 수 있다. ‘공간의 비효율화, 재학생의 면학 분위기 침해, 학교의 정상적 운영 방해 등의 이유가 있는데 왜 굳이 단원고 내에서 교실을 보존하길 원했는가?’ 하고 질문할 수도 있다. 단원고 내 기억교실을 존치하고 싶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실의 옮김 그 자체가 훼손이다. 교실은 희생 학생의 영혼이 깃든 공간으로서 부재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뛰어난 비유나 상징을 동원한 추모 공간도 생생한 교실에 미치지 못한다”[ref]이현정(2019), 〈4.16교실 존치 투쟁과 새로운 장소성의 생성 : 피해자성의 기억론을 넘어 인격성의 기억론을 향하여〉, 《기억과 전망》, 41, 160쪽[/ref]라는 주장처럼 교실은 참사 이후 생겨난 추모 공간이 아니라 희생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공부하고 웃고 싸우고 장난치는 ‘현재’를 살아왔던 곳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100%,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며 교실 이전 그 자체로 아우라의 상실과 기억의 삭제를 강요당한 것이다. 이전 이후의 공간도 4.16 기억저장소의 노력으로 기억과 추모의 공간으로 거듭났지만, 희생자들이 생전 머무른 장소는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단원고에 가면 내가 공부한 책상, 우리 반이었던 교실 창문, 내가 놀았던 복도가 있어. 나와 똑같이 그곳에서 놀았을 아이들이 보이니깐. 그래서 단원고에 가면 진짜 너무 슬픈데……. 엄청나게 슬픈 날에는 학교에 와. 청문회에서 온종일 증인들의 거짓말을 듣고 온 날에는 집에도 갈 수 없고 그 어디도 갈 수 없는 거야. 그럴 때면 지현이 교실에 가서 울었어. 이 세상에 동생이 없고, 어디를 가도 동생의 흔적이 없는데 교실에는 동생의 흔적이 있잖아. 납골당에 가서 동생을 만나지만 동생의 흔적은 아니잖아. 단원고등학교 교실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생의 흔적이야.

- 남지현 언니 남서현(단원고 졸업생)

 

둘째, 단원고에서 쫓겨나고 싶지 않음이다. 이전 과정에서 발생한 소통의 부재, 기억교실을 혐오 시설로 몰고 감, 학적부에서 제적[ref]단원고는 학적 처리 지침에 따라 희생 학생 246명을 전원 제적, 미수습자 4명을 유급 처리하였다. 그 이후 명예 졸업 학적부가 신설되었다.[/ref] 처리됨은 유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학교 교육과정의 일부인 수학여행 도중 희생되었는데 참사의 책임이 있는 학교와 교육청은 희생자들에게 예우를 갖추지 못했다. 기억교실을 ‘혐오 시설’로 인식하는 순간 소통의 부재는 필연이었다. 유가족이 주장해 온 교실 보존의 사회적, 교육적 의미가 공유되지 못하고, 교실 철거 여부만을 결정하고자 함이 안타까웠다. 학교운영위원장과 일부 재학생 학부모는 재학생의 학습권을 주장하며 기억교실 철거를 강력히 원했다. 그러나 정말로 ‘재학생의 교육 공간 부족’ 때문일까? 가족협의회는 교실을 존치하면서도 재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2016년도 신입생을 100명만 받을 것, 새로운 교실을 증축할 것, 기억교실과 재학생 교실 입구를 분리할 것 등 여러 제안을 했지만 거부당했다.

 

공식적인 이전 이유는 면학 분위기 침해와 교실 부족이지만 속내는 기억교실이 꼴 보기 싫다는 거야. 기억교실을 혐오 시설로 보았어. 일부 재학생 부모는 교실에서 귀신 나올 것 같다는 막말도 서슴없이 했어. 2015년에는 재학생 부모와 교장이 원하는 사람이 운영위원장이 되었어. 그 운영위원장을 앞세워서 학교가 원하는 대로 다 쟁취하고 있어. 학교의 허락이 없으면 운영위원장 혼자서는 진행할 수 없는 부분이거든. 재학생 학부모와 학교랑 교육청이 다 유착 관계인 거지. 학교가 주도한 것이고 그 위에는 교육청이 있었어. 교육청, 단원고, 재학생 부모가 공동 작품으로 우리를 쫓겨나게 한 거지.

- 김도언 어머니 이지성

 

일부러 청소년들을 배제시킨 것 같아요. 대부분 재학생은 교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실 문제는 청소년들의 생각이 가장 중요하죠. 학교에서는 교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재학생들이 더 많아질 것을 예상해 일부러 발언도 못 하게 했어요. 참사 이전처럼 ‘너희들은 아직 어리니깐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해’가 계속 반복되고 있어요. 청소년들은 학업에 매진해야 하기에 세월호뿐만 아니라 다른 정치 문제도 관심 두지 말아라. 결국에는 청소년들의 관심을 없애는 거죠.

- 김동혁 동생 김예원(당시 단원고 재학생)

 

2016년 8월 20일, 단원고 기억교실 이전은 희생자들을 학교에서 떠나보내는 제2의 장례식이었다. 이전 당일까지도 유가족의 눈물과 분노가 합쳐진, ‘이렇게 쫓겨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이 있었다. 교실 이전에 대한 진정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학교운영위원회 측의 강경한 태도와 국민 여론에 유가족이 두려움을 느껴 놓아 줬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교실 이전하는 당일에 우리 반 부모님 중 한 분이 엄청나게 우시면서 교실을 뺄 수 없다고, 교실을 둘러싼 기자들한테 ”여러분, 제발 도와주세요. 여러분이 도와주면 지킬 수 있잖아요”라고 이야기했어. 기자들이 제대로 기사만 써 주고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해 주면 이런 상황이 안 되었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이 어머니가 우는 장면을 찍으려고 그 많은 기자가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플래시를 켜? 교실의 의미, 중요성에는 플래시를 안 켜는 사람들이……. 그게 너무 슬프고 화가 났어. 유가족이 왜 교실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 학교 측은 어떤 짓을 하면서 쫓아내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어. 사실을 정확하게만 전달해도 교실 존치와 관련해서 찬반이 갈릴 수 없고 연대자들이 엄청나게 뭉쳤을 텐데.

- 남지현 언니 남서현


셋째, 단원고에서부터 경쟁적,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실현하는 교육을 시작하고 싶었다. 세월호 참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상징되었던 한국 교육의 모순에 문제를 제기했다. 기억교실마저 사라지면 단원고 내에서 세월호 참사는 완전히 잊힐 것이라는 불안감이 있었다. 단원고는 하루빨리 참사의 흔적을 정리하고 ‘정상 교육’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수학여행 답사를 다녀온 교사를 비롯하여 수학여행의 준비에 참여했던 행정실 직원들은 급히 다른 학교로 전출시켰다. 단원고는 애도의 장소로서 교실의 공간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였으며, 신속한 행정적 집행을 통해 참사와의 연관성 및 희생 학생과 관련된 기억을 삭제하고자 노력하였다.[ref]이현정(2019), 앞의 글, 156쪽[/ref]

 

교실까지 이전하면 단원고는 더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 없는 학교가 되어 버릴 것 같아. 저들은 분명 가해자인데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피해자 흉내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어. 교실 싸움에서 지면 단원고는 더 파렴치해질 것 같다고 느꼈어. 단원고가 ‘우리가 옳았어’라고 생각할까 봐 무서웠어.

- 남지현 언니 남서현

 

이번에 학교에서 여행을 갈 때 학교에서 ‘안전’을 강조하더라고요. 학교 측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희생된 언니, 오빠들이 안전하게 다녀오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들이 너무 싫어요. 사회 구조의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려고 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불편해요. 단원고에서는 이 참사를 빨리 묻어 버리고 싶어 해요. 학교를 ‘활기찬 학교’로 바꾸기 위해 교실을 스마트 식으로, 제2의 체육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학교의 겉모습을 바꾸면 다인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김동혁 동생 김예원(당시 단원고 재학생)

 

기억교실의 의미는 4.16 이전의 교육을 반성하며 이후 새로운 교육을 실현해 나가자는 변화의 밑거름이다. 단원고에서부터 이를 실현해 나가고 싶은 유가족들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참사 이후, 교육 체계에 대한 근본적 혁신보다는 정규 과정 외의 영역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추가하는 것이 전부였다. 입시 교육 탈피와 현 교육 체계의 근본적 변혁이라는 지향은 포함되지 않았다. 새로운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기억교실 이전은 참사의 흔적 지우기에 불과하다는 우려가 있었다.

 

다시 그 교실에서는 입시 경쟁이 벌어지겠지. 내 친구를 밟고 올라서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 대학 입시 문제 때문에 제도를 바꾸고 바꾸어도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것은 바뀌지 않아. 입시 교육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 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 우리는 자식을 잃고 나니깐 그런 거 소용없다는 거, 입시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참사를 교훈 삼아 교육을 온전히 통틀어서 다 뒤집어엎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거야.

- 이창현 어머니 최순화

 

종교인평화회의 중재 과정에서 우리가 교육감과 학교에 요구했던 것은 교실을 영구 보존하라는 것이 아니었어. 새로운 교육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교육의 책임 있는 주체들이 어떻게 협력할지의 계획을 요구했어. 그때 사회적 협약을 통해서 이를 행하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교실 이전에 합의하게 된 거지. 그러나 협약식 당일 제적 처리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유가족 대부분이 협약식 내용을 파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학교에서 제적 처리를 하는 모습이나 이삿짐센터 차를 대기시킨다는 점은 사회적 협약의 정신과 위배되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우리는 교실도 못 빼고 사회적 협약도 못 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회적 협약을 성사시키고 그 약속들을 책임 있게 이행을 해 나가도록 이끌어 갈 것인지의 관점으로 보았지. 그래서 사회적 협약을 무산시키지 않았어.

- 유예은 아버지 유경근

 

사회적 협약을 끝으로 길었던 기억교실 이전 논의는 마무리된다. 2016년 8월 19일 단원고 운동장에서는 교실 이전 전야제 ‘기억과 약속의 밤’ 행사가 진행되고, 8월 20일 종교 의례가 진행된 후 단원고에서 1.3㎞ 떨어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까지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4.16 기억저장소는 이전을 위해 단원고 기억교실의 기록물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 그 기록으로 복원 계획을 세우고 일일이 목록과 대조해 가면서 실제 공간을 복원했다. 교실 문, 창문틀, 몰딩 같은 고정 기록물도 그대로 원래 장소에서 떼어내 온전히 재현하려 노력했다.[ref]이경래(2022), 〈정동의 기록화 ‘4.16 기억저장소’ 를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74, 32쪽.[/ref] 비록 단원고라는 공간적 특성을 잃었지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매개체로서 기억교실의 역할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현재 4.16민주시민교육원 기억교실은 기억저장소 유가족들의 노력으로 기존 교실과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됐으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책상에 놓인 기억 패에는 학생들의 모습과 각자의 꿈에 대한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희생자들의 책상에는 QR코드를 붙여 4.16 기억저장소 홈페이지의 ‘희생자를 기억하며’ 컬렉션으로 연결해 두었다. 4.16기억교실은 재난 아카이브로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12월 27일 국가지정기록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참사의 본질은 참사 이후에 있지 않을까

 

기억교실은 “교실은 재학생의 것”, “너무 아픈 장소는 비교육적”이라는 인식 속에서 단원고 내에서 애도의 공간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문득 단원고 졸업생인 친구 J가 생각났다. 대학에서 만나 자주 보는 사이인데 제대로 고등학교 생활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J는 2014년도에 고1, 즉 희생 학생들의 한 학년 후배이다. 사고 당일에는 2교시쯤 수업이 중단되었고, 집에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사고’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큰일이 발생함을 알아차렸다. 2주 동안 학교 일정은 중단되었고, 집에서 친구들과 카톡을 하며 계속 뉴스를 봤다. 며칠이 지난 후 J의 어머니는 뉴스를 껐다. 다시 학교에 나갔을 때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J는 기억교실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누군가 한 사람을 추모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선배들 모두가 한꺼번에 사라진 경우라……. 교실 안에 들어가서 뭘 해야 할지 몰랐어. ‘진짜 들어가도 되나?’ 싶기도 해서 못 들어갔어.”

학교에서 참사와 관련된 추모의 시간은 분향소에 함께 간 게 전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왔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다가도 기억교실과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말소리를 줄였다. 방과 후나 방학에는 기억교실에서 유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고3 때는 교실 부족으로 컨테이너 임시 교실에서 지냈고, 도서실은 교무실로 사용되었다. J는 단원고 내 기억교실이 존치되는 게 과연 좋았을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학교는 교실을 보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 학생들에게 참사 이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고, 모두가 각자 알아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으니까.”

학교에서 죽음의 상실을 극복하는 애도 교육은 부재했다. 애도와 추모 교육이 지속해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학교 내 기억교실을 그대로 존치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하다. 참사를 직접 경험한 당시 재학생들과 교사들은 교실을 바라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참사의 기억이 희미해진 구성원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기억교실을 마주한다면 당혹스럽고 낯설 것이다. 기억교실을 보존함은 물리적 차원을 넘어 학교 시스템 자체의 혁신이 필요한 문제였다. 교사가 되기 전에는 단원고가 참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특별한 학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학교에서 발생한 참사였어도 제대로 애도 교육을 하지 못하고, 기억교실을 철거하고, 학교의 ‘정상 운영’이 중시되었을 것이다. 아픈 기억은 빨리 묻으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교가 독립적으로 슬픔을 추모하고, 참사 이후를 상상하기에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한국 사회가 대형 참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라’였다. J 또한 생존 학생들, 유가족을 보며 자신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며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회와 학교에서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아픔을 오롯이 혼자 견뎌 내야 했던
J는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어른들에게 “지금 너희가 처한 상황은 괜찮지 않다”라는 말을 가장 듣고 싶다고 했다. 급히 묻어 두었던 세월호 참사의 기억은 여전히 들여다보기 힘든 숙제, 알 수 없는 눈물이 되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세월호 관련 책, 기사, 영상은 보지 못하고, 기억교실은 가까워서 오히려 발걸음하기 힘든 공간이 되었다.

“내가 제대로 된 애도 방법을 배웠다면 지금 세월호 관련 책을 들여다보는 게 이렇게 힘들진 않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 슬프겠지만 유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재학생들에게 ‘세월호’란 고등학생 시절에 멈추어져 있는 것 같아.”

충분히 아파한 후, 아픔을 넘어 추구해야 할 가치들을 함께 고민하고 실현해 나가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을까? 참사 이후의 변화, 움직임, ‘희망’이라 불릴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논의하는 장이 많아지면 좋겠다. 유가족은 세월호 기억 공간이 밝아지길 꿈꾼다. 기억저장소 도언 어머니는 한 인터뷰에서 “기억관이 밝았으면 좋겠어요. 밝은 마음으로 남아 있어야 영원히 기억할 수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참사의 본질은 사건 ‘이후’에 있을지 모른다. 서로의 곁을 더 살필 수 있는, 슬픔을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참사 이후 변화의 필요성을 고민하는 사회와 교육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아픔을 빨리 묻자는 사회에서 기억교실을 밝게 마주해야 하는 이유이다.

 

 



참고 문헌

박진형(2021), 〈단원고 기억교실에 관한 기록학적 쟁점들과 그 함의 : 사회적 기억의 생성과 공간, 기억, 기록〉, 석사 학위 논문,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신혜란(2016), 〈기억의 영토화〉, 《공간과 사회》, 57, 115~154쪽.

이경래(2022), 〈정동의 기록화 ‘4.16 기억저장소’를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74, 5~43쪽.

이현정(2019), 〈4.16교실 존치 투쟁과 새로운 장소성의 생성 : 피해자성의 기억론을 넘어 인격성의 기억론을 향하여〉, 《기억과 전망》, 41, 145~188쪽.

정지연(2023), 〈애도의 아카이브 연구 : 4.16기억교실 사례를 중심으로〉, 석사 학위 논문, 한신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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