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코로나19 사태로 바라본 교육
코로나 시대,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
글
정형철
07jhch@hanmail.net
대안학교 더불어가는배움터길 교사.
학교에서는 ‘아하’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인문학과 비평 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교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 전원부터 누른다. 마스크 벗을 겨를도 없다. 오래된 컴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지는 동안, 주변을 온라인 대형으로 정돈한다. 전날 예약 걸어 둔 출첵(출석 체크)을 확인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오늘의 일정’을 재빨리 올린다. 벌써 밴드 채팅 방에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평소에는 행방을 잘 알 수 없는 녀석인데, 오늘은 멀쩡하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다. 놀라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여느 때처럼 싱겁다. “밤샜어요.”
온라인 아침 열기(조회)가 끝나자마자 부산하게 움직인다. 내 수업에 접속하기 전에, 다른 강사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선택 교양’ 수업 밴드에 우리 반 학생들이 잘 들어갔는지 살펴야 한다. 모니터 2대와 노트북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 몇 친구가 보이질 않는다. 전화를 돌린다. 이미 들어가 있다. 흔적 남기는 걸 잊었단다. 요사이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이렇게 한 지 1달이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허둥지둥 헤맨다. 익숙해 지려야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사상 초유의 이 같은 사태를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미래 교육’이니, ‘4차 산업 혁명’이니 하면서 예언가인 듯 행세하던 사람들조차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일 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고 잠시 멍해 있는데, 밴드 알림 창에 불이 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라이브 수업 시간이 코앞이다. 이제는 도리어 아이들이 나를 찾기 바쁘다.
있어야 할 것들의 사라짐, 멈춤, 삭제
무엇보다도 ‘자유’의 가치가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대안학교라지만, 온 세상을 삼키고 있는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50명 조금 넘는 작은 학교인 우리 학교만 해도 교육부의 발표에 따라 개학을 세 차례나 연기하였고, 일반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4월 9일부터 어쩔 수 없이 온라인 개학을 단행했다. 우리처럼 비인가 대안학교가 왜 국가와 교육부의 방침을 꼬박꼬박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국가의 교육 정책을 순순히 따랐다기보다는 학생의 안전을 도모할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재난이 불러온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학생들을 만나야 하는 작금의 사태는,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하고 자가당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학생들과의 ‘만남’을 가장 중시하는 대안학교 교사라면 더욱 그렇다. 마치 자기 부정이나 자기 기만을 스스로 행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수업을 준비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버거워서만은 아니다. 하루 내내 스크린만 들여다봐야 하는 신세가 답답하고 처량해서도 아니다. 문제는, 있어야 할 게 없고 없어도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는, 아이들이 없는 이 학교라는 공간 때문이다. 아이들의 소리와 몸짓이 없는 이 공간은 학교가 아니라 그저 건물일 뿐이다.
개학하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어야 할 대부분의 배움 과정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수업 과정에 맞게 배움 과정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짜 맞춰 보지만, 결국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뽑혀 나간 느낌이다. 반가운 얼굴, 새로운 얼굴을 서로 맞대며 함께 환대하던 ‘만남’의 자리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갓 입학한 ‘작은나무(중1)’ 친구들의 앳된 모습을, 애틋한 시선으로 지켜볼 단 한 번의 기회는 영영 없어지고 만 것이다. 새로 오신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교사실 창문을 기웃거리던 짓궂은 녀석들의 호기심과 설렘도 순식간에 모두 지워졌다.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함께 있는 것처럼, 서로가 누군지 모르면서 벌써 아는 사이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학년별로 다녀오던 ‘도보 여행’, ‘공정 여행’, ‘마을 여행’, ‘책여행’, ‘청춘 여행’을 온라인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 학교에서의 여행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다. 여행 전, 여행 중, 여행 후의 과정에 우리가 지향하는 배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내며 내가 살아가는 주변과 세상에 대해 더 깊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아이들에게 온전히 줄 수 없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소중한 배움의 기억으로 남을 작은나무 아이들의 봉산탈춤, 생태 탐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온나무(중2) 아이들의 ‘더불어 살기’나 큰나무(중3)의 ‘대안학교 탐방’, 대숲(고2)의 ‘직업 체험’도 모두 어그러졌다. ‘배움터길’ 식구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의사를 결정하는 ‘전체 회의’는 ‘작은 학교’만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배움의 자리지만, 언제 열릴지 기약이 없다. 한 학년 아이들이 매일 번갈아 가며 전체 식구들의 밥을 만드는 ‘소박한 밥상’은 우리 학교의 참 아름다운 배움 과정이자 자랑할 만한 전통이다. 내가 아닌 다른 이와 함께 먹을 밥을 손수 짓는다는 것은, ‘소박함’을 넘어선 ‘위대함’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소박하고 위대한 밥상을 함께 나누는 대신 “찬밥처럼 방에 담겨” ❶ 오늘도 무얼 먹어야 할지 홀로 고민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몸에 좋은 빵과 천연 화장품을 만들거나, 삶에 필요한 적정기술을 배우는 ‘작업장’ 수업도 모두 멈췄다. 다른 이와 함께하는 우리 삶의 대부분이 멈춘 것처럼.
❶ 기형도, 〈엄마 걱정〉 중
장기 비상 시대의 교육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의 안전과 등교 여부 문제를 제외하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교육적 논의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의 온라인 인프라, 학생들의 온라인 교육 적응과 학업 성취, 대학 입시 일정, 9월 학기제, 그리고 코로나 이후의 미래 교육 과제 등에 대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름 충분히 논의할 만한 내용이라 생각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짚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코로나19 시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코로나19로 훼손되고 멍든 우리의 삶이 단시일 내로 이전과 같은 상태로 복원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의 근본적인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점이나 언제 종식될지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점, 그리고 치료 약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우리 삶이 예전처럼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안감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조 섞인 푸념을 늘어놓기에 앞서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의 우리의 삶은 과연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안전하고 정상적인 상태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살펴야 한다. 코로나19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발병과 전파에는 어떤 경우든 현 인류의 탐욕적인 삶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화석 에너지의 남용과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 생태계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었고, 기후 위기라는 대재앙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재난의 상황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불평등과 격차 문제도 전부터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골이 깊었다.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가기 어려운 전 지구적 재난 상황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과 격차 만큼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의 크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코로나19 이전 시대의 인류가 만들어 낸 괴질임에 틀림없다.
인류가 이전처럼 화석 에너지에 의존한 성장에의 욕구와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와 이로 인한 신종 바이 러스의 창궐은 앞으로도 빈번하게 일어날, 우리의 일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어쩌면 이러한 일상적 대재앙의 서막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쿤슬러는 이를 두고 ‘장기 비상 시대’ ❷ 라 명명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류가 처한 위기는 이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는 장기 비상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후 위기든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든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비상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❷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이한중 옮김(2011), 《장기 비상 시대》, 갈라파고스.
우리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육이 코로나 시대 이전의 세계로 단순히 귀환할 수 없는 것은, 장기 비상 상황에 처한 사회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학교만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안전에 가장 민감한 공간인 학교가, 안전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학교는 장기적이고 상시적인 재난 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막중한 과제를 떠안았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코로나19 시대 이후 고도의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 없는 교육’을 더 강도 높게 추구하려는 경향이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던진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과 인식 없이, 현상적이고 기술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단순히 눈앞의 문제만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는 ‘스크린’ 교육으로 모든 교육을 제도화할 때 우리는 더큰 재앙에 봉착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교육이 여전히 우리 아이들을 사회의 성장을 위한 자원이나 도구로 보는 관점을 탈피하지 못한 채 거대한 학력 카르텔의 동업자로 군림한다면, 숱한 희생을 치른 코로나19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역병으로 인한 ‘거리 두기’의 필요성을 교육적 필요성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현행 비대면 원격 교육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기술력이나 인프라의 부족으로 오판해서는 안 된다. 교육에서만큼은 이러한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우리 정부가 추진하려는 원격 의료 시스템도 이와 유사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명확해진 것은 공공 의료 체계의 중요성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코로나19에 비교적 잘 대응한 것은 공적 의료 체계 덕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원격 의료 시스템 도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는 이것이 재벌이나 대기업, 대형 병원의 배만 불릴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최근 다시 원격 의료 도입을 위한 법 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정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대형 병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원격 의료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공적 의료 체계의 붕괴를 가져올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정부가 원격 의료를 밀어붙이는 것은 디지털 인프라 구축, 데이터 경제의 가속화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형 뉴딜 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원격 수업이 한창이던 지난 스승의 날에 교사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원격 수업 시스템과 정보통신 인프라를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나 정부는 원격 의료와 유사한 관점으로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바라보고 있음이 명백하다. 취임 이후 일관되게, 허상의 개념에 불과한 ‘4차 산업 혁명론’에 입각한 국가 발전 모델에 집착해 온 정부의 정책 기조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 정부는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그 어떤 돌아봄이나 전향도 없이, 오히려 삼성을 위시한 IT 대기업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는 길을 마다 않고 걷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기업 총수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1년이 다 돼 가도록 목숨 건 고공 농성을 이어 갔던 해고 노동자 김용희에 대해서는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한 대통령과 정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 습성으로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재난을 통해서나마 우리는 희망을 이어 갈 마지막 기회를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근대 산업 사회의 산물로서 근대 교육이 걸어온 길은 이제 ‘장기 비상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끝이 보이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운명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거나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 비상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가 처한 교육 현실을 미봉하려 들거나 눈앞의 현실을 잠시 포장하려는 시도는 별반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질문이, 이번 사태로 더 명확해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꼭 가야만 하는가? 만일 꼭 가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통해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를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폐 성향이 있던 아들 히카루가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워 나간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히카루에게 음악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깊고 풍부한 감정을 스스로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그리고 자기를 사회와 연결시켜 나가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는 언어입니다. 이것은 가정생활에서 싹튼 것이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확실한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자국어뿐만이 아니라 과학도 산수도 체조도 음악도 자기를 확실히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 나가기 위한 언어입니다. 외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어느 세상에서나 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에 겐자부로, 송현아 옮김(2001), 《‘나의 나무’ 아래서》, 까치
작가가 말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는 지식이나 정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 지식이나 정보만을 의미한다면 지금이라도 학교는 문을 닫아도 좋다. 그것만이 교육이라면 역병과 재난이 장기적으로 상존할 시대에 굳이 학교를 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모든 것은 기술에 맡기면 된다. 고삐 풀린 기술은 앞으로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다. 기술이 교육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는, 단언컨대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들이 지난 시절 그렇게 자라 오지 않았듯이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진 않을 것이다. 학교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는 곳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하나둘이 아니다. 그 방식도 수업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 이전에, 아이들이 숨을 쉬고, 뛰어놀고, 친구를 만나고, 밥을 먹는 공간이다. 아이들의 소리와 몸짓이 없는, 삶의 흔적이 없는 공간은 학교가 아니라 진공의 공간, 기계실이다. 우리 아이들을 기계로 키우지 말자. 나는 이것이 우리가 코로나19 시대 이후에 놓쳐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특집 - 코로나19 사태로 바라본 교육
코로나 시대,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
글
정형철
07jhch@hanmail.net
대안학교 더불어가는배움터길 교사.
학교에서는 ‘아하’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인문학과 비평 수업을 맡고 있습니다.
교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 전원부터 누른다. 마스크 벗을 겨를도 없다. 오래된 컴퓨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켜지는 동안, 주변을 온라인 대형으로 정돈한다. 전날 예약 걸어 둔 출첵(출석 체크)을 확인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오늘의 일정’을 재빨리 올린다. 벌써 밴드 채팅 방에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평소에는 행방을 잘 알 수 없는 녀석인데, 오늘은 멀쩡하게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다. 놀라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여느 때처럼 싱겁다. “밤샜어요.”
온라인 아침 열기(조회)가 끝나자마자 부산하게 움직인다. 내 수업에 접속하기 전에, 다른 강사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선택 교양’ 수업 밴드에 우리 반 학생들이 잘 들어갔는지 살펴야 한다. 모니터 2대와 노트북 사이를 정신없이 오간다. 몇 친구가 보이질 않는다. 전화를 돌린다. 이미 들어가 있다. 흔적 남기는 걸 잊었단다. 요사이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이렇게 한 지 1달이 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허둥지둥 헤맨다. 익숙해 지려야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다. 사상 초유의 이 같은 사태를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미래 교육’이니, ‘4차 산업 혁명’이니 하면서 예언가인 듯 행세하던 사람들조차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일 게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고 잠시 멍해 있는데, 밴드 알림 창에 불이 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 라이브 수업 시간이 코앞이다. 이제는 도리어 아이들이 나를 찾기 바쁘다.
있어야 할 것들의 사라짐, 멈춤, 삭제
무엇보다도 ‘자유’의 가치가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대안학교라지만, 온 세상을 삼키고 있는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50명 조금 넘는 작은 학교인 우리 학교만 해도 교육부의 발표에 따라 개학을 세 차례나 연기하였고, 일반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4월 9일부터 어쩔 수 없이 온라인 개학을 단행했다. 우리처럼 비인가 대안학교가 왜 국가와 교육부의 방침을 꼬박꼬박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전대미문의 역병 앞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국가의 교육 정책을 순순히 따랐다기보다는 학생의 안전을 도모할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재난이 불러온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학생들을 만나야 하는 작금의 사태는, 교사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난감하고 자가당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학생들과의 ‘만남’을 가장 중시하는 대안학교 교사라면 더욱 그렇다. 마치 자기 부정이나 자기 기만을 스스로 행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수업을 준비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버거워서만은 아니다. 하루 내내 스크린만 들여다봐야 하는 신세가 답답하고 처량해서도 아니다. 문제는, 있어야 할 게 없고 없어도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는, 아이들이 없는 이 학교라는 공간 때문이다. 아이들의 소리와 몸짓이 없는 이 공간은 학교가 아니라 그저 건물일 뿐이다.
개학하면서 순조롭게 진행되었어야 할 대부분의 배움 과정이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수업 과정에 맞게 배움 과정을 재구성하고 새롭게 짜 맞춰 보지만, 결국 껍데기만 남고 알맹이는 뽑혀 나간 느낌이다. 반가운 얼굴, 새로운 얼굴을 서로 맞대며 함께 환대하던 ‘만남’의 자리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갓 입학한 ‘작은나무(중1)’ 친구들의 앳된 모습을, 애틋한 시선으로 지켜볼 단 한 번의 기회는 영영 없어지고 만 것이다. 새로 오신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교사실 창문을 기웃거리던 짓궂은 녀석들의 호기심과 설렘도 순식간에 모두 지워졌다. 우리는 아직 만나지 않았음에도 이미 함께 있는 것처럼, 서로가 누군지 모르면서 벌써 아는 사이처럼 그렇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학년별로 다녀오던 ‘도보 여행’, ‘공정 여행’, ‘마을 여행’, ‘책여행’, ‘청춘 여행’을 온라인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우리 학교에서의 여행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다. 여행 전, 여행 중, 여행 후의 과정에 우리가 지향하는 배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행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율적으로 기획하고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내며 내가 살아가는 주변과 세상에 대해 더 깊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아이들에게 온전히 줄 수 없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소중한 배움의 기억으로 남을 작은나무 아이들의 봉산탈춤, 생태 탐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온나무(중2) 아이들의 ‘더불어 살기’나 큰나무(중3)의 ‘대안학교 탐방’, 대숲(고2)의 ‘직업 체험’도 모두 어그러졌다. ‘배움터길’ 식구 전체가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누고 의사를 결정하는 ‘전체 회의’는 ‘작은 학교’만이 누릴 수 있는 소중한 배움의 자리지만, 언제 열릴지 기약이 없다. 한 학년 아이들이 매일 번갈아 가며 전체 식구들의 밥을 만드는 ‘소박한 밥상’은 우리 학교의 참 아름다운 배움 과정이자 자랑할 만한 전통이다. 내가 아닌 다른 이와 함께 먹을 밥을 손수 짓는다는 것은, ‘소박함’을 넘어선 ‘위대함’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소박하고 위대한 밥상을 함께 나누는 대신 “찬밥처럼 방에 담겨” ❶ 오늘도 무얼 먹어야 할지 홀로 고민하는 신세가 돼 버렸다. 몸에 좋은 빵과 천연 화장품을 만들거나, 삶에 필요한 적정기술을 배우는 ‘작업장’ 수업도 모두 멈췄다. 다른 이와 함께하는 우리 삶의 대부분이 멈춘 것처럼.
❶ 기형도, 〈엄마 걱정〉 중
장기 비상 시대의 교육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면서 학생들의 안전과 등교 여부 문제를 제외하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교육적 논의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의 온라인 인프라, 학생들의 온라인 교육 적응과 학업 성취, 대학 입시 일정, 9월 학기제, 그리고 코로나 이후의 미래 교육 과제 등에 대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름 충분히 논의할 만한 내용이라 생각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짚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코로나19 시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수긍이 가는 말이다. 코로나19로 훼손되고 멍든 우리의 삶이 단시일 내로 이전과 같은 상태로 복원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의 근본적인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점이나 언제 종식될지가 여전히 불투명하다는 점, 그리고 치료 약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우리 삶이 예전처럼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불안감을 더 증폭시키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조 섞인 푸념을 늘어놓기에 앞서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의 우리의 삶은 과연 제대로 된 것이었는지,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안전하고 정상적인 상태라 말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살펴야 한다. 코로나19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발병과 전파에는 어떤 경우든 현 인류의 탐욕적인 삶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화석 에너지의 남용과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 생태계는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었고, 기후 위기라는 대재앙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재난의 상황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불평등과 격차 문제도 전부터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골이 깊었다. 그 어느 누구도 피해 가기 어려운 전 지구적 재난 상황이지만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과 격차 만큼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의 크기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코로나19 이전 시대의 인류가 만들어 낸 괴질임에 틀림없다.
인류가 이전처럼 화석 에너지에 의존한 성장에의 욕구와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인간에 의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와 이로 인한 신종 바이 러스의 창궐은 앞으로도 빈번하게 일어날, 우리의 일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어쩌면 이러한 일상적 대재앙의 서막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제임스 쿤슬러는 이를 두고 ‘장기 비상 시대’ ❷ 라 명명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류가 처한 위기는 이제 단시간에 해결될 수 없는 장기 비상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후 위기든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이든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비상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❷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이한중 옮김(2011), 《장기 비상 시대》, 갈라파고스.
우리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육이 코로나 시대 이전의 세계로 단순히 귀환할 수 없는 것은, 장기 비상 상황에 처한 사회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곳도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학교만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안전에 가장 민감한 공간인 학교가, 안전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학교는 장기적이고 상시적인 재난 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막중한 과제를 떠안았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은, 코로나19 시대 이후 고도의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 없는 교육’을 더 강도 높게 추구하려는 경향이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던진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과 인식 없이, 현상적이고 기술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단순히 눈앞의 문제만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벌써부터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는 ‘스크린’ 교육으로 모든 교육을 제도화할 때 우리는 더큰 재앙에 봉착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교육이 여전히 우리 아이들을 사회의 성장을 위한 자원이나 도구로 보는 관점을 탈피하지 못한 채 거대한 학력 카르텔의 동업자로 군림한다면, 숱한 희생을 치른 코로나19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역병으로 인한 ‘거리 두기’의 필요성을 교육적 필요성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현행 비대면 원격 교육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기술력이나 인프라의 부족으로 오판해서는 안 된다. 교육에서만큼은 이러한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우리 정부가 추진하려는 원격 의료 시스템도 이와 유사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번에 명확해진 것은 공공 의료 체계의 중요성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나라가 코로나19에 비교적 잘 대응한 것은 공적 의료 체계 덕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원격 의료 시스템 도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는 이것이 재벌이나 대기업, 대형 병원의 배만 불릴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최근 다시 원격 의료 도입을 위한 법 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정부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대형 병원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원격 의료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공적 의료 체계의 붕괴를 가져올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정부가 원격 의료를 밀어붙이는 것은 디지털 인프라 구축, 데이터 경제의 가속화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형 뉴딜 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원격 수업이 한창이던 지난 스승의 날에 교사들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원격 수업 시스템과 정보통신 인프라를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나 정부는 원격 의료와 유사한 관점으로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을 바라보고 있음이 명백하다. 취임 이후 일관되게, 허상의 개념에 불과한 ‘4차 산업 혁명론’에 입각한 국가 발전 모델에 집착해 온 정부의 정책 기조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현 정부는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그 어떤 돌아봄이나 전향도 없이, 오히려 삼성을 위시한 IT 대기업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는 길을 마다 않고 걷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기업 총수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1년이 다 돼 가도록 목숨 건 고공 농성을 이어 갔던 해고 노동자 김용희에 대해서는 냉정할 정도로 무관심한 대통령과 정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
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 습성으로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재난을 통해서나마 우리는 희망을 이어 갈 마지막 기회를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교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근대 산업 사회의 산물로서 근대 교육이 걸어온 길은 이제 ‘장기 비상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끝이 보이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운명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다거나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 비상한 상황에서 지금 우리가 처한 교육 현실을 미봉하려 들거나 눈앞의 현실을 잠시 포장하려는 시도는 별반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늘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질문이, 이번 사태로 더 명확해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꼭 가야만 하는가? 만일 꼭 가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 〈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통해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를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폐 성향이 있던 아들 히카루가 학교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워 나간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히카루에게 음악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깊고 풍부한 감정을 스스로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그리고 자기를 사회와 연결시켜 나가는 데에 가장 도움이 되는 언어입니다. 이것은 가정생활에서 싹튼 것이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확실한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자국어뿐만이 아니라 과학도 산수도 체조도 음악도 자기를 확실히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 나가기 위한 언어입니다. 외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어느 세상에서나 아이는 학교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오에 겐자부로, 송현아 옮김(2001), 《‘나의 나무’ 아래서》, 까치
작가가 말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는 지식이나 정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 지식이나 정보만을 의미한다면 지금이라도 학교는 문을 닫아도 좋다. 그것만이 교육이라면 역병과 재난이 장기적으로 상존할 시대에 굳이 학교를 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모든 것은 기술에 맡기면 된다. 고삐 풀린 기술은 앞으로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다. 기술이 교육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는, 단언컨대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들이 지난 시절 그렇게 자라 오지 않았듯이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진 않을 것이다. 학교는 오에 겐자부로의 말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는 곳이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하나둘이 아니다. 그 방식도 수업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학교는 공부를 하는 곳 이전에, 아이들이 숨을 쉬고, 뛰어놀고, 친구를 만나고, 밥을 먹는 공간이다. 아이들의 소리와 몸짓이 없는, 삶의 흔적이 없는 공간은 학교가 아니라 진공의 공간, 기계실이다. 우리 아이들을 기계로 키우지 말자. 나는 이것이 우리가 코로나19 시대 이후에 놓쳐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