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가꾸기
그것은 숭엄한 장례일지도 모른다
생기 잃은 영혼을 위한 정갈한 의식
봉분마다 하관을 준비하는 땅이 열리고
무심하게 던져진 영혼 위에 뿌려진 흙은 묵언 중이다
틈틈이 영혼의 숨결을 살피러 온 고라니 사이
꽃마리, 강아지풀, 쇠비름, 쇠뜨기, 민들레, 명아주, 방동사니, 들깨풀, 중대가리풀, 개비름, 닭의장풀, 개망초, 질경이, 조뱅이, 뽀리뱅이……
애꿎은 것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땅속에서 문드러진 씨감자는
자신의 낡은 육신을 다 내놓고서야
비로소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한참의 시간을 흘린 불면의 궤적
지상을 뚫고 나오는 저 연록의 생을
환생이라 불러도 될까
텃밭 사용 설명서
먼저 겨우내 잠든 땅을 깨워주세요
계절은 오 분 간격으로 알람을 울립니다
알람이 줄기차게 울린 후
졸음에 겨운 봄은 기지개를 켭니다
땅이 눈꺼풀을 걷어 올리면 향내가 납니다
습한 기운을 따라 호흡기로 스미는 저 냄새
애써 봄 향기라 부릅니다
텃밭 옆에서 겨울을 난 두엄을 쏟아붓고
괭이로 적당히 섞어 줍니다
다음은 두둑과 고랑을 만들어 주세요
굼벵이가 나와도 놀라지 마세요
왕지렁이가 나오면 반갑게 웃어 주세요
흙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두둑을 따라 씨앗을 뿌리면 되는데
요즘은 모종을 심기도 합니다
뿌린 씨앗 절반은 까치 참새 몫이고
심은 모종 절반은 고라니 몫이라 생각하세요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감자나 땅콩 수확이 적어도 화내지 마세요
땅속을 싱싱하게 지킨 두더지 몫입니다
배추벌레가 보이면 활짝 웃으며 맞아 주세요
이상, 친환경 텃밭 사용 설명서였습니다
소나무 장미
학교 울타리에 소나무 장미가 활짝 피었다
초록에 싸인 붉은 숨결은
해그림자 따라 늘어진 심장을 설레게 한다
지난 오월,
계절은 송홧가루처럼 몽환스럽게 내렸다
몽롱이라는 한 절기가 흐르던 시절
송홧가루 취한 장미는 소나무를 한껏 안았으리라
서로의 가시를 포개는 황홀한 떨림
더러는 애틋함이 가슴에 꼭꼭 박혔으리라
붉은 핏방울이 봉오리처럼 송골송골 맺혔으리라
붉게 흐른 눈물이 고여 생흔이 되고
그 상처는 허공에 붉은 별이 되었다
별에서 태어난 꽃
공생의 시간이 하늘가에서 맴을 돈다
더운 바람이 시샘하듯 톡톡 건드려 보지만
가시로 맺은 굳은 언약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시작 노트
지난 2023년 3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에 있는 전교생 38명인 강하중학교로 발령받았다. 면 소재지도 아닌 다소 외진 산속에 자리 잡은 소규모 농촌 학교는 도시의 학교와는 사뭇 다른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교육 가족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피부에 와닿는 공동체 의식이 가득한 학교다. 이는 아이들과 하나하나 소통할 수 있는 작은 학교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는 ‘꿈사랑 멘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교사 1인당 학생 2~4명과 함께 ‘4 in 1(진로, 생활, 학습, 상담) 포트폴리오’를 3년간 운영하며 학생들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그 활동 중 하나로 ‘생태 텃밭 가꾸기’를 진행하고 있다. 운동장의 공간을 활용하여 텃밭을 만들고 친환경 ‘낙엽 덮기’를 통해 상추, 고추, 토마토, 오이 등 각종 채소와 수박, 참외 등 과일을 키우고 있다. 아침과 점심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면서 직접 재배한 채소로 삼겹살 파티를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까지도 흐뭇해진다.
사택 주변에 텃밭을 마련한 나는 초보 농부다. 거름을 주고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작업은 신성한 제례 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씨감자가 땅속에 묻혀 자신을 자양분으로 내어줄 때 비로소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생명은 생태계를 이루는 소중한 순환 구조의 한 축을 담당한다. 자벌레와 고라니, 두더지가 공생하는 친환경 텃밭이 소중한 생태교육의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텃밭을 거닐며 소중한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안영선(sigolanduk@korea.kr) 2013년 《문학의오늘》로 등단. 시집으로 《춘몽은 더 족한 계절이다》, 산문집으로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가 있다. 현 경기 양평 강하중학교 교장.
텃밭 가꾸기
그것은 숭엄한 장례일지도 모른다
생기 잃은 영혼을 위한 정갈한 의식
봉분마다 하관을 준비하는 땅이 열리고
무심하게 던져진 영혼 위에 뿌려진 흙은 묵언 중이다
틈틈이 영혼의 숨결을 살피러 온 고라니 사이
꽃마리, 강아지풀, 쇠비름, 쇠뜨기, 민들레, 명아주, 방동사니, 들깨풀, 중대가리풀, 개비름, 닭의장풀, 개망초, 질경이, 조뱅이, 뽀리뱅이……
애꿎은 것들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땅속에서 문드러진 씨감자는
자신의 낡은 육신을 다 내놓고서야
비로소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한참의 시간을 흘린 불면의 궤적
지상을 뚫고 나오는 저 연록의 생을
환생이라 불러도 될까
텃밭 사용 설명서
먼저 겨우내 잠든 땅을 깨워주세요
계절은 오 분 간격으로 알람을 울립니다
알람이 줄기차게 울린 후
졸음에 겨운 봄은 기지개를 켭니다
땅이 눈꺼풀을 걷어 올리면 향내가 납니다
습한 기운을 따라 호흡기로 스미는 저 냄새
애써 봄 향기라 부릅니다
텃밭 옆에서 겨울을 난 두엄을 쏟아붓고
괭이로 적당히 섞어 줍니다
다음은 두둑과 고랑을 만들어 주세요
굼벵이가 나와도 놀라지 마세요
왕지렁이가 나오면 반갑게 웃어 주세요
흙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두둑을 따라 씨앗을 뿌리면 되는데
요즘은 모종을 심기도 합니다
뿌린 씨앗 절반은 까치 참새 몫이고
심은 모종 절반은 고라니 몫이라 생각하세요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감자나 땅콩 수확이 적어도 화내지 마세요
땅속을 싱싱하게 지킨 두더지 몫입니다
배추벌레가 보이면 활짝 웃으며 맞아 주세요
이상, 친환경 텃밭 사용 설명서였습니다
소나무 장미
학교 울타리에 소나무 장미가 활짝 피었다
초록에 싸인 붉은 숨결은
해그림자 따라 늘어진 심장을 설레게 한다
지난 오월,
계절은 송홧가루처럼 몽환스럽게 내렸다
몽롱이라는 한 절기가 흐르던 시절
송홧가루 취한 장미는 소나무를 한껏 안았으리라
서로의 가시를 포개는 황홀한 떨림
더러는 애틋함이 가슴에 꼭꼭 박혔으리라
붉은 핏방울이 봉오리처럼 송골송골 맺혔으리라
붉게 흐른 눈물이 고여 생흔이 되고
그 상처는 허공에 붉은 별이 되었다
별에서 태어난 꽃
공생의 시간이 하늘가에서 맴을 돈다
더운 바람이 시샘하듯 톡톡 건드려 보지만
가시로 맺은 굳은 언약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시작 노트
지난 2023년 3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에 있는 전교생 38명인 강하중학교로 발령받았다. 면 소재지도 아닌 다소 외진 산속에 자리 잡은 소규모 농촌 학교는 도시의 학교와는 사뭇 다른 묘한 매력이 있다. 특히 교육 가족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피부에 와닿는 공동체 의식이 가득한 학교다. 이는 아이들과 하나하나 소통할 수 있는 작은 학교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는 ‘꿈사랑 멘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교사 1인당 학생 2~4명과 함께 ‘4 in 1(진로, 생활, 학습, 상담) 포트폴리오’를 3년간 운영하며 학생들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있다. 그 활동 중 하나로 ‘생태 텃밭 가꾸기’를 진행하고 있다. 운동장의 공간을 활용하여 텃밭을 만들고 친환경 ‘낙엽 덮기’를 통해 상추, 고추, 토마토, 오이 등 각종 채소와 수박, 참외 등 과일을 키우고 있다. 아침과 점심시간을 통해 아이들이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면서 직접 재배한 채소로 삼겹살 파티를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까지도 흐뭇해진다.
사택 주변에 텃밭을 마련한 나는 초보 농부다. 거름을 주고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작업은 신성한 제례 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씨감자가 땅속에 묻혀 자신을 자양분으로 내어줄 때 비로소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생명은 생태계를 이루는 소중한 순환 구조의 한 축을 담당한다. 자벌레와 고라니, 두더지가 공생하는 친환경 텃밭이 소중한 생태교육의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텃밭을 거닐며 소중한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안영선(sigolanduk@korea.kr) 2013년 《문학의오늘》로 등단. 시집으로 《춘몽은 더 족한 계절이다》, 산문집으로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가 있다. 현 경기 양평 강하중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