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시]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외 | 복효근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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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누 떼가 강을 건너는 법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 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버팀목에 대하여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고쳐 심고

각목으로 버팀목을 세웠습니다.

산 나무가 죽은 나무에 기대어 섰습니다.

 

그렇듯 얼마간 죽음에 빚진 채 삶은

싹이 트고 다시

잔뿌리를 내립니다.

 

꽃을 피우고 꽃잎 몇 개

뿌려 주기도 하지만

버팀목은 이윽고 삭아 없어지고

 

큰바람 불어와도 나무는 눕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것이 나무를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허위허위 길 가다가

만져 보면 죽은 아버지가 버팀목으로 만져지고

사라진 이웃들도 만져집니다.

 

언젠가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기 위하여

나는 싹틔우고 꽃 피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시작 노트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지식의 전달자로서보다 더불어 살며 온기를 나눌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싶었다. 갈수록 세상은 개별화되고 무한 경쟁 속으로 치달아 간다. 어제오늘 일이 아니긴 하지만 나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가속화되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더욱 넘어지면 짓밟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일으켜 세우고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세상을 그려 왔던 것이다.

세상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도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 지지와 응원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 인식이 먼저 선다면 내가 할 일이 분명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남는 것이다. 개인적인 고난에서부터 시대가 주는 시련을 우리는 그렇게 헤쳐 나갔다. 나는 어릴 적 가난을 가족과 친구들의 배려와 사랑 속에서 큰 상처 없이 지나왔다. 그처럼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재난을 당해서도 우리 국민은 서로 배려하고 위로하며 함께 문제를 극복해 오지 않았나 싶다.

AI 시대를 맞아 교육은 그 어느 때보다 지식 전달과 습득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서로 나누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힘이 아니라 사랑을, 사랑이 곧 힘임을 알고 실천하는 교육을 그리며, 나의 시도 어찌 보면 그런 지향 속에서 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복효근(bokhg62@hanmail.net) 1962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1991년 《시와 시학》으로 활동 시작하였으며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중심의 위치》, 청소년 시집 《운동장 편지》,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디카시집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교육 에세이집 《선생님 마음 사전》 등을 출간하였다. 중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으며 지금은 퇴직하여 깊고 푸른 시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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