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연속 기획] 불구는 왜 급진적인가 | 이명훈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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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기획 | 특수에서 보편으로


불구는 왜 급진적인가

불구의 관점으로 교육을 재상상하기

 

이명훈

zer0lab@naver.com

(전) 중등교사, (현) 독립연구자, 강사,

《반란의 매춘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역자


 

이 글은 불구(crip)에 관한 불완전한 소개문이자 초대장이다. 불구 및 불구 이론의 개념과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와 교육이 강제하는 규범에서 빈번히 탈락되고 주변화되는 이들의 시간 및 경험을 불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저항의 지점으로 삼을 수 있을지, 그리고 교육을 ‘불구화(cripping)’한다는 것의 의미와 가능성은 무엇인지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장애에서 불구로

 

1970년대 장애 권리 운동의 성장에 힘입어, 학자 및 활동가들을 통해 소개되고 확산된 장애학(disability studies; DS)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을 기반으로 장애에 관한 기존의 모델 ― 장애는 개별 인간을 괴롭히는 사적 비극이므로 개인의 기질이나 의지의 힘으로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던 ‘장애의 개별적 모델(individual model of disability)’, 그리고 장애는 의료적 관점에서 가장 잘 이해되고 다루어질 수 있는 의학적·병리적 상태이므로 질병이나 손상을 제거·교정·치료해야 한다고 보았던 ‘장애의 의료적 모델(medical model of disability)’ ― 을 비판해 왔다. 장애는 개인의 몸/마음에 관한 객관적 사실이 아닌, 건강한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적·건축학적 환경에 의해 자원, 지위, 권력 등이 불평등하게 분배됨으로써 형성된 몸/마음 위계의 결과이자, 사회적 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가 있는 개별 몸/마음을 정상화하려는 의학적·기술적 노력이 아니라, 장애인을 구속하는 사회 제도 및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기반한 장애학은 장애를 ‘문제’로 규정하여 이를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 왔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소수자 정치의 한 방식으로서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비판해 온 일부 퀴어 장애학자 및 활동가들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 장애를 명확하고 고정된 정체성으로 이해하여, 몸/마음의 불안정성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장애의 사회적 모델은 몸/마음에 대한 이해를 다원화하지 못한 채, 비규범적·비재현적인 장애인의 존재를 지우고,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의 영향력을 주로 전형적인 모습의 장애인에만 국한하여 살펴왔다는 것이다.[ref]McRuer, R.(2018), Crip Times: Disability, Globalization, and Resistance, New York University Press, p.19; Price, J. & Shildrick, M.(1998), Uncertain thoughts on the dis/abled body, Vital Signs: Feminist Reconfigurations of the Bio/logical Body, ed. Margrit Shildrick, & Janet Price, Edinburgh University Press, p.15; 앨리슨 케이퍼, 이명훈 옮김(2023),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 불구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치학과 상상력》, 오월의봄, 39~42쪽.[/ref]

이에 앨리슨 케이퍼는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의 틀을 토대로 장애를 분석하는 혼종적 모델인 ‘장애의 정치적/관계적 모델(political/relational model of disability)’을 제안한다. 케이퍼에 따르면, 장애의 사회적 모델과 정치적/관계적 모델은 장애의 개별적/의료적 모델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를 보인다.[ref]장애의 사회적 모델에서는 손상을 신체적·정신적 한계로, 장애를 손상에 기초한 사회적 배제·의미로 구분하면서, 장애가 손상이 아니라 사회적·건축학적 장벽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ref] 

손상과 장애를 엄격히 구분하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은 양자 모두 사회적·정치적·관계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사회적 장벽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마음 또한 장애를 만드는 효과를 보인다는 점을 간과하며, 의학적 개입과 치유의 욕구를 가진 장애인을 주변화하고, ‘강제적 비장애신체성(compulsory able-bodiness)’ 및 ‘강제적 비장애정신성(compulsory able-mindness)’[ref]비장애인의 몸/마음을 기준으로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결함이나 이상(異常)으로 가정하고, 비장애를 강건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적 관행을 유지·강제하는 체계.[/ref]이 어떻게 손상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기 어렵게 한다. 반면, 장애의 정치적/관계적 모델은 의학적 개입을 완전히 정당화하거나 반대하는 양극단 중 어느 한쪽에 서지 않는다. 즉, 몸/마음의 차이에 대한 의학적 표현·진단·치료가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편파적·정치적인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신체적·정신적 상태 및 기능의 변화가 일어나는 맥락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여지, 불편함이나 통증을 치유하길 바라는 장애인의 욕구를 수용하면서도 장애와 함께하는 삶에 공감하거나 장애인과 연대할 여지를 남겨 둔다. 또한 정상성, 바람직한 형태·기능을 전제하는 문화가 장애인뿐만 아니라, 주변화된 몸/마음을 가진 모든 존재, 가령 아픈 사람, 노인, 퀴어, 유색인, 비인간 동물, 그리고 그들과 관계 맺는 가족, 애인, 친구, 동료, 이웃, 활동지원사, 반려종 등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비판적 장애학(critical DS)’, ‘페미니즘 장애학(feminist DS)’, ‘퀴어 장애학(queer DS)’, 그리고 이 글에서 살필 ‘불구’, ‘불구학(crip studies)’, ‘불구 이론(crip theory)’ 등은 케이퍼를 비롯한 일부 장애학자 및 활동가들이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기반한 장애학의 성과와 한계를 비판적·급진적으로 보완하고자 활용해 온 용어이자 인식 틀이다. 이때 불구는 ‘퀴어’가 규범적 젠더·섹슈얼리티로부터 주변화된 사람을 비하하는 멸칭에서 자긍심의 용어로 재전유된 것처럼, 일부 장애인 하위 문화에서 전복적인 의미로 쓰여 왔다. 케이퍼, 로버트 맥루어, 일라이 클레어 등은 불구가 퀴어처럼 잠재적 확장성을 지닌 변화무쌍하고 유동적인 용어이며, 정체성에 관한 역설적 논의의 장, 정치를 구축하고 경합이 일어나는 장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불구라는 용어를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불구와 불구 이론

 

케이퍼가 자신의 책 제목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내듯,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사이에 지적·정신적·정치적 유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ref]물론 불구 및 불구 이론에 영향을 미친 분야는 페미니즘, 퀴어 이론에 한정되지 않는다. 멜 첸 등은 불구에 관한 연구를 트랜스 연구, 비판적 인종학, 트랜스내셔널리즘, 매드 이론 등 타 분야와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억압적·해방적 관행을 함께 읽어 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Chen, M. Y., Kafer, A., Kim, E. & Minich, J. A.(2023), ‘Introduction’, Crip Genealogies, Duke University Press.[/ref] 여성, 퀴어, 장애인이 동물화·악마화·괴물화·병리화되어 왔던 역사적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도, 장애에 관한 탐문은 여성성(femininity) 및 퀴어성(queerness)에 관한 페미니스트, 퀴어들의 탐문과 분리될 수 없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불구 이론의 개념 및 방법 역시 대부분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의 자장에서 나온 것이다.

기존의 장애학 및 운동에서 장애는 유능함, 경쟁력, 생산성, 효율성, 합리성, 관계성, 사회성 등의 기준과 그에 대한 애착의 문제를 주로 ‘권리’에 기반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말로 쓰여 왔다. 반면, 불구는 주로 ‘장애 정의(disability justice)’[ref]장애 정의는 2000년대 중반, 백인, 남성, 이성애자, 토착민, 지체 장애인 위주의 주류 장애 권리 운동을 비판해 왔던 이주민, 유색인, 퀴어/트랜스 장애인 활동가들이 고안한 용어로서, 장애 공동체와 장애학 안에서 가장 주변화된 (주로 법적 권리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의 정치를 지향한다. Chen, M. Y., Kafer, A., Kim, E. & Minich, J. A.(2023), 앞의 글, pp. 5-6.[/ref]의 관점에서 권리 기반의 정치, 행정적·관료적 통합·수용의 메커니즘을 지양하고, 체제와 구조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법적 권리에 접근할 수 없는 이들을 향해 장애 범주를 더 주변부로 열어 놓는 말로 쓰인다. 구체적으로, 불구는 전통적 의미의 장애인뿐만 아니라, 의학적 진단이나 제도적 규정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질병 및 장애가 있는 사람, 신경전형성(neurotypicality)[ref]전형적인 사고방식과 보편적인 뇌신경을 가진 신경전형인의 특성이나 이를 향한 기대를 일컫는다. 이와 반대로,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은 뇌신경의 변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고방식 및 특성, 가령 자폐 스펙트럼, ADHD, 비언어적 학습 장애, 양극성장애, 분열정동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 난독증, 난필증, 실어증, 사회소통장애, 조현 스펙트럼, 성격장애 등을 치료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차이 또는 생물학·유전학적 다양성으로 인식하기 위한 맥락에서 쓰이는 용어이다.[/ref]에서 벗어난 사람, 트라우마나 독특한 건강 이력을 가진 사람, 일시적 통증이나 불편함을 경험하지만 호전되면 기능적 제한이 사라지는 다발성 경화증, 화학물질과민증(multiple chemical sensitivity) 등이 있는 사람, 기능이나 능력과 무관하지만 신체적·정신적 차이가 타인에게 쉽게 드러나는 사람, 언웰니스(unwellness)[ref]웰니스하지 못함을 뜻하는 말. 웰니스(wellness)는 웰빙(well-being)과 피트니스(fitness)가 결합된 용어로, 신체적·정서적·사회적·지적 영역에서 최상인 상태, 혹은 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ref] 상태에 있는 사람, 역사적으로 장애인과 공명했던 모든 비규범적 존재, 과거에 없었지만 새롭게 생겨나는 정치적 지향·소속·연대의 존재 등을 포함한다.[ref]Chen, M. Y., Kafer, A., Kim, E. & Minich, J.A.(2023), 앞의 글, p. 3. 줄리 리빙스턴은 장애뿐만 아니라, 나이 듦을 경험하는 사람, 만성질환이나 다양한 종류의 손상이 있는 사람을 포괄하기 위해 ‘쇠약(debility)’이라는 용어를 장애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Livingston, J.(2006), Insights from an African history of disability, Radical History Review, 94, pp.111–126.[/ref] 

 


교육을 불구화하기

 

불구화는 불구의 관점에서 비장애신체성 및 정신성에 특권을 부여하고 사람들을 정상성으로 밀어붙이는 현실을 폭로하여 그와 관련한 가정, 이념, 개념을 탈구축하기 위한 실천이다.[ref]Abes, E. & Wallace, M. M.(2020), Using crip Theory to reimagine student development theory as disability justice, Journal of College Student Development, 61(5), pp. 574-592; McRuer, R.(2006), 앞의 글.[/ref] 이에 따르면, 교육을 불구화한다는 것은 과거와 지금의 우리 교육이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정신성의 관념에 의해 구축된 정치적·논쟁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비판한다는 뜻이다.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정신성은 실제로 누가 더 무능하고, 덜 가치 있으며, 재생산되기에 바람직한지에 관한 정치 경제적·사회 문화적 기준뿐만 아니라, 교육의 목적 설정 및 실행에 영향을 미친다. 가령, 교육 체제 내에서 작동하는 비장애신체성/정신성은 학업 성취에 대한 규준과 좋은 학습자에 대한 덕목을 구성하는 원리로 작동하여, 신체적·정신적 차이에 무감한 교육 및 휴게 공간 설계, 점자나 수어 등 다양한 언어를 활용하는 교원·교육 자료·수업의 부재, 빠른 속도의 학습 진도 및 교육과정 이수, 그리고 비장애중심주의적인 교육 목표, 교육 내용, 교수·학습 방법, 평가, 생활 지도 및 상담 등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교육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거나 도태되는 학습자는 무력해지고 낙인찍히며, 발달 지체자, 문제 행동을 저지르는 비행 청소년, 학습 분위기 저해자 등으로 간주된다.

비장애중심주의적 기대와 환경은 불구의 몸/마음을 가진 이들의 학습, 전인적 성장·발달을 가로막는 장벽으로 기능하여 결과적으로 이들을 교육과 사회에 참여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학교에 경사로, 승강기, 화장실, 통번역 장비 등을 설치하고, 활동지원사, 통역사, 안내견 등의 업무·휴식을 위한 시공간을 마련하고, 동료 학생들의 친화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장애인과 불구를 위한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교원을 선발·훈련하여 교수-학습 및 활동을 지원한다 해도, 학교와 교육과정 안에서만 시도되는 변화만으로는 장애인과 불구의 교육 접근을 가로막는 학교 밖 환경까지 바꾸기 어렵다. 애초에 학교교육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 혹은 학교교육에 접근할 수 있어도 사회적 장벽과 차별로 인해 학업, 입학, 취업, 성취 등의 평가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장애인만큼의 교육 기회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탓이다. 이에 앨런 새뮤얼스는 장애인과 불구를 위한 교육 접근성이 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학비 마련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고도 과중한 학업 부담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재정적 접근(financial access)’, 교육, 주거, 고용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접근(social access)’, 낙인이 찍히지 않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이 상상할/될 수 있도록 하는 ‘재현적 접근(representational access)’ 등을 교육 접근성의 틀 안에서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ref]Samuels, E.(2017), Six ways of looking at crip time, Disability Studies Quarterly, 37(3), pp. 19-20. [/ref] 

교육의 불구화는 ‘불구의 실패(crip failure)’, ‘불구의 시간/시간성(crip time/temporality)’, ‘불구의 미래/미래성(crip future/futurity)’,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등에 관한 새로운 이해에 기반하여 불구의 앎과 경험을 바라보는 관점, 즉 ‘불구 인식론(cripistemology)’을 교육 현장 및 이론에 적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불구 인식론은 불구가 억압적인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비판적·사회적·감각적·정치적·개인적 위치에서 체화한 경험 및 관점을 토대로 형성시킨 불구 고유의 생생한 앎의 방식 및 해석의 틀을 뜻한다.[ref]Johnson, M. L. & McRuer, R.(2014), Cripistemologies: Introduction, Journal of Literary & Cultural Disability Studies, 8(2), pp. 127-147.[/ref] 불구의 실패, 불구의 시간, 불구의 미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지배하는 엄혹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불구가 경험하거나 경험할 것으로 예상되는 실패와 위기를 의식적으로 성찰하는 동시에, 그러한 시간, 미래, 실패, 관계의 경험을 정상성과 규범성의 잣대로 해석하는 기존의 흐름을 거부하고 그 다양성과 가능성을 인정하는 양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용어들은 불구의 가혹한 현실을 드러내고 불구 인식론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동시에, 불구 인식론을 통하여 그 현실에 맞서는 언어로서 재해석·재탄생된 말들이다.

구체적으로, 불구의 실패는 불구가 일상이나 교육·연구 과정에서 겪는 실패의 경험을 긍정적 잠재력이 있는 반-비장애중심주의적 지식 이해·생산의 한 방식으로 본다.[ref]Mitchell, D. T., Snyder, S. L. & Ware, L.(2014), “[Every] child left behind”:Curricular cripistemology and the crip/ queer art of failure, Journal of Literary & Cultural Disability Studies, 8, pp. 295-313.[/ref] 현재의 교육 평가는 학습자가 정상화된 기준에 도달/미달하는 정도만을 측정하므로,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대안적 삶의 전략을 평가절하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교육 환경에서 실패와 그로 인한 좌절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쉽게 떨쳐 내기 어려운 일종의 부정성일 테지만, 그것은 우리를 “제멋대로인 어린 시절에서 정숙하고 평범한 성인으로 이끈다는 목표 아래 행동을 규율하고 인간의 발달을 감독하는 처벌 규범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잠재적 가능성이기도 하다.[ref]잭 핼버스탬, 허원 옮김(2024),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현실문화, 18~19쪽.[/ref] 만약 어떤 신경다양인의 느리고 산만해 보이는 학습 경험을 불구 인식론을 통해 해석한다면, 학습 자료를 이해하고 수업에 참여하는 비전형적 방식을 평가 절하하는 대신, 이를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고유한 관점과 방법을 통해 지식 생산 및 이해에 참여하는 행위로서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구 시간성은 불구가 경험하거나 지향하는 시간의 속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엘리자베스 프리먼은 시간성을 “제도적 힘의 산물을 신체적 사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주입의 방식”이며, “일정, 달력, 시계 등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에게만 자연스럽게 보이는 시간적 경험의 형태를 심는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특권화된 시간적 경험의 주입이 비대칭한 권력 체제를 평범한 신체적·정신적 리듬과 루틴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ref]Freeman, E.(2007), Queer Temporalities, GLQ, 13(2-3), p. 159.[/ref] 이러한 관점에서 퀴어성, 장애, 불구성(cripness), 광기(madness) 등은 특정한 시간의 형태 및 역사적 시기에 발명되고 문제화된 특성이자, 특권화된 시간적 경험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가령, 퀴어 시간성이 “생애 경험의 전형적인 표지들, 이른바 탄생, 결혼, 재생산, 죽음”이라고 부르는 삶의 순간을 둘러싼 규범성을 폭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ref]Halberstam, J.(2005), In a Queer Time and Place: Transgender Bodies, Subcultural Lives, New York University Press.[/ref] 불구 시간성은 기존의 비장애중심주의적 시간관과 질병, 장애를 둘러싼 관념이 건강, 젊음, 장수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각자의 경험 및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른 속도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정한다.

불구 시간성이 폭력성/가능성을 모두 내포한 말이듯, 불구의 시간도 양가적 의미, 다시 말해 건강한 비장애인의 시계에 맞춰져 불구의 몸/마음에 맞지 않은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을 불구의 속도와 일정에 따라 재상상·재편성한 시간이라는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예를 들어, 불구의 시간은 느린 이동 및 학습(활동) 속도, 접근을 제약하는 물리적·심리적·제도적 장벽 등으로 인해 불구가 어딘가에 도달하거나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간, 이를 위해 소요되는 추가적인 시간, 그러한 시간적 경험으로 인해 재설계된 유연하고 창의적인 시간(관) 등을 모두 포함한다. 첫 번째 의미에서는 유전학적 시간, 발전론적 시간, 치유적 시간(curative time)[ref]장애인과 불구의 몸/마음을 치유하거나 치유하기 위해 나아갈 때만 적절하다고 인정되는 시간적 틀을 일컫는다. 앨리슨 케이퍼(2023), 앞의 책, 89쪽.[/ref] 등으로 표현되는 비장애중심주의적 시간관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한편, 두 번째 의미에서는 속도와 일정에 대한 기대의 규범화와 정상화에 도전하여, “장애인의 몸과 마음을 시계에 맞추는 대신, 시계를 장애인의 몸과 마음에 맞추고,” “시간을 재지향(reorientation)”할 가능성을 강조한다.[ref]앨리슨 케이퍼(2023), 앞의 책, 87쪽.[/ref] 

다른 시계에 맞추어 재지향된 불구의 시간은 “단순히 연장되는 시간이 아니라, 폭발해 버리는 유연한 시간”이다.[ref]Mitchell, D. T., Snyder, S. L. & Ware, L.(2014), “[Every] child left behind”: Curricular cripistemology and the crip/queer art of failure, Journal of Literary & Cultural Disability Studies, 8, pp. 295\_313.[/ref] 즉, 이는 불구 학습자가 등하교하고 공부하고 휴식하고 시험을 치를 때, 더 많은 시간을 쓰거나 더 긴 일정을 잡을 수 있도록 추가된 시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불구의 시간을 교육에 적용하는 일은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교육 공간에 도달하고, 학습 내용을 이해·전달하고, 언어를 구사하고, 과제를 수행·평가하고, 여기에 필요한 자원과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사실, 개인의 선택이 타인의 시간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 그에 따라 대화, 수업, 평가, 상담, 휴식의 속도와 방식을 결정하고, 전반적인 교육 공간, 교육과정, 이수 기준 등을 검토하고, 어떤 증상을 촉발하는 사건이나 발병에 대비해 현재의 일상을 살피고 미래의 교육 일정을 계획하는 매우 광범위한 작업이다.[ref]Price, M.(2011), Mad at School: Rhetorics of Mental Disability and Academic Lif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p. 62. 과거/현재/미래의 몸, 자신/타인의 몸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이런 다중적 불구 시간성을 인식하는 일은 자신의 에너지를 아끼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창의적 생활 일정”, 자기 돌봄을 생산성과 효율성을 위한 일이 아니라 개인의 필요, 욕망, 능력에 따라 즐거움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일로 여기는 상호부조, 협동조합, 돌봄 조직화, 창작 활동 등의 “특이한 경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앨리슨 케이퍼(2023), 앞의 책, 106~118쪽.[/ref] 

불구 인식론으로 바라본 미래는 어떠한가? 불구의 미래를 상상하는 일 역시 불구의 재생산을 저해하는 유전학적·발전론적·치유적 시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리 에덜먼은 미래, 혹은 이를 향한 노력 및 관심이 거의 언제나 재생산의 용어로 표현된다고 분석하면서, ‘(대문자) 아이’를 이상화하는 ‘재생산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의 이념이 기득권이나 정상성에 멀어진 아이들을 배제하고 박멸해야 할 해로운 대상으로 여기게 만든다고 주장한 바 있다.[ref]Edelman, L.(2004),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ref] 핼버스탬도 이러한 틀 안에서 미래가 이성애규범적·부르주아중심적 ‘재생산 시간성(reproductive temporality)’에 의해 구성된다고 지적하면서, 그런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는 현재의 욕구와 경험을 무시한 채 치유와 정상화에만 집중하는 유예의 윤리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ref]Halberstam, J.(2005), 앞의 책.[/ref] 실제 대중문화, 교육 담론 및 운동에서 선전하는 바람직한 미래, 살아갈 가치·추구할 가치가 있는 미래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책, 영상, 이야기들 속에서 그려지는 유토피아는 대부분 불구의 삶을 주변화하는 사회적 장벽과 편견을 해결하기보다 고도로 발전된 과학·의료 기술, 그리고 산전 검사, 불임 시술, 임신 중지 등의 각종 재생산 기술을 통해 질병과 손상을 예방·치유하여 결국 근절시켜 버리는 미래, 즉 불구 없는 미래로 상상되지 않는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불구의 부정성을 치유하고 없애려는 노력은 불구의 미래뿐만 아니라, 불구의 현재마저 무력화한다. 케이퍼의 말을 빌리면, “미래가 위축될수록 현재는 더 긴급해지고, 과거는 현재의 질병을 야기하는 복합적인 원인이 되거나 낭비된 시간의 연속으로 인식되며, (……) 미래는 치료와 생존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ref]앨리슨 케이퍼(2023), 앞의 책, 112쪽.[/ref] 김은정은 “정상적인 과거로 현재를 대신하고, 동시에 특정한 종류의 정상적인 미래를 현재에 투영시킴으로써 현재를 사라지게” 만드는 이러한 양상을 ‘접힌 시간성(folded temporality)’이라 표현하고 비판한다.[ref]김은정, 강진경·강진영 옮김(2022),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 젠더, 성의 재활과 정치》, 후마니타스, 23쪽.[/ref] 하지만 미래의 모습이 편향적인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다른 미래, 다른 시간성을 상상하는 일은 현재를 다르게 해석하고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불구의 미래를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벗어난 대안적 미래로 구체화하고 이에 관심을 쏟는 일은 미래 없이 퇴락하는 다양한 집단, 더/덜 우대받는 미래들에 관심을 쏟는 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ref]앨리슨 케이퍼(2023), 앞의 책, 104~105쪽[/ref]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처럼, 교육 당국과 학교는 명시적으로 미래에 대비하여 장기 로드맵을 짜고, 그 “대계”에 따라 바람직한 몸/마음들을 길러 낼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마련한 후, 이를 잘 따르는 학습자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한다. 이때 불구 인식론은 그 ‘바람직함’에 깃든 가정, ‘더 나은 미래’ 안에서 상상되는 인간의 모습을 심문하고, 재생산 미래주의, 재생산 시간성 밖의 미래를 그리는 토대를 마련한다. 또한 불구 인식론은 교육이 지배 이념뿐만 아니라 그것에 얽힌 정동까지 가장 효율적·체계적으로 재생산하는 국가 장치라는 점에 주목하여, 교육이 약속한 미래에 의해 유포되는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의 정동을 문제 삼는다. 잔인한 낙관은 대상이 제공하는 약속이 너무 절실해서, 그 낮은 실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중독적 낙관을 놓지 못한 채, 현재의 삶과 상실의 애도를 유예하려는 욕망이다.[ref]로런 벌랜트, 박미선·윤조원 옮김(2024), 《잔인한 낙관》, 후마니타스.[/ref] 비장애중심주의적 관념에 얽힌 정상, 유능함, 성공을 향한 교육의 약속은 비록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우 비정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면에서 허구적이지만, 개인의 자유의지와 노력으로 이에 근접할 수 있고 이미 근접해 있다고 낙관하게 된다는 면에서 사회가 제시하는 여느 환상들보다 더 현실적이다.[ref]박지원(2020), 〈잔혹한 낙관에서 깨어나기〉, 《인 문잡지 한편 3 : 환상》, 민음사, 118~119쪽.[/ref] 그리고 그 낙관은 주체를 끊임없이 불가능한 미래의 목표에 매달리게 만들어 소진시키고, 그로 인한 (특히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주체의 고통과 상실을 개별화·탈정치화한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따라서 교육의 불구화는 교육의 과정에서 나타난 소진, 고통, 상실 등의 부정적 느낌을 학습자가 성장과 발달을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라, “잔혹한 교육의 명령에 대한 몸/마음의 투항”[ref]박지원(2020), 앞의 글, 128쪽.[/ref] 또는 저항의 가능성으로 보는 작업이어야 한다.

불구 인식론은 우리의 몸/마음이 경험하는 시간성에 대한 가정을 파헤치기도 하지만, 그러한 몸/마음의 밖에서, 혹은 그것을 통해서 연결되는 관계성에 대한 가정을 파고들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불구 인식론은 ‘성숙한 관계’가 무엇인지를 탐문하면서, 불구의 관점과 경험을 통해 기존의 관계성을 재고하고, ‘행위성’과 ‘친밀성’이 균형을 이루는 관계를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준다.[ref]Abes, E.(2019), ‘Crip theory: Dismantling ableism in student development theory’, Abes, E., Jones, S. R. & Stewart, D. L.(Eds.), Rethinking College Student Development Theory Using Critical Frameworks, Stylus.[/ref] 가령, 미아 밍거스는 관계 내에서 작동하는 권력 및 의존성을 논의하면서, 장애인은 관계를 맺을 때 종종 자신의 행위성이 무력화되는 ‘강제된 친밀성(forced intimacy)’을 경험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강제된 친밀성은 “비장애중심주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장애인이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드러내야 하는 일상적인 경험”으로,[ref]Mingus, M.(2017), “Forced intimacy: An ableist norm”, 〈Leaving Evidence〉, August 6, 2017.[/ref] 장애인을 부담으로 여기는 기존의 통념을 재생산하고, (불구의 접근 요구를 고려하고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춰 불구와 불구, 불구와 비불구 사이의 집합적 노력이나 사랑, 친교를 통한 관계의 방식인) ‘접근 친밀성(access intimacy)’을 저해한다. 다시 말해, 교육 접근이나 일상적 요구를 충족하고자 자신의 특성과 욕구를 타인에게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교사, 교직원, 또래 집단, 활동지원사 등과 친밀해져야만 하는 관계는 불구 학습자의 접근 요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충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편안한 친교 행위를 오히려 가로막는다.

불구 이론은 관계를 권력과 의존성이 작동하는 장소로 보는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아동·청소년의 성장과 발달에 대한 가정을 탈구축한다. 매끈하고 선형적인 발달 이론의 비현실성을 폭로하는 불구 시간성에 관한 통찰을 토대로, 학습자의 성장 및 발달을 “타인을 향한(to) 관계가 아닌, 타인과 함께하는(with)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유동적·공동체적 변화로 재구성하는 것이다.[ref]Abes, E. & Wallace, M. M.(2020), 앞의 글, p.587.[/ref] 이러한 관점에서 상호의존성은 우리가 지닌 몸/마음의 현실, 관계 내 역학, 비장애중심주의적 규범과의 연결을 통해 관계적·상황적으로 발생하는 발달의 필연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만약 각자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의존이 우리의 삶에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립과 이를 위한 능력 개발이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쫓기보다 상호의존적 관계에서 오는 취약성을 다르게 평가하는 교육을 상상할 수 있다.[ref]Mingus, M.(2017), 앞의 글[/ref] 그리고 그러한 교육을 통해 불구는 단지 의존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립/의존의 이분법에 도전하는 탐험자이자, 취약한 몸/마음들의 둘라(doula),[ref]둘라는 ‘여성을 섬기는 여성’이라는 의미의 희랍어에서 유래한 말로, 주로 출산 과정에서 산모에게 조언, 정보, 정서적 지원, 신체적 위안을 제공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을 일컫는다. 스테이시 박밀번은 둘라의 의미를 확장하여 몸/마음의 상태 및 기능의 변화를 맞이한 사람들이 비장애중심주 의적 사회에서 겪는 불편함과 고립감에서 벗어나 그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불구의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고, 지원·멘토링하는 것을 ‘불구 둘라잉(crip doulaing)’이라고 표현한다. PiepznaSamarasinha, L. L.(2018), Care Work:Dreaming Disability Justice, Arsenal Pulp Press, p. 240.[/ref] 돌봄 제공자로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ref]미미 쿠크는 이러한 교육을 ‘언웰니스 페다고지(pedagogy of unwellness)’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그녀는 우리 모두가 차별적으로 언웰니스한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언웰니스함의 윤곽을 파악하고, 언웰니스함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함께 발견하는 것”, “자신의 취약성에서 출발하여 교실 안팎에서 취약성 및 신뢰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 “집합적이고 공유된 취약성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집합적 돌봄을 구축”하는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www.mimikhuc.com/about(2024년 5월 1일 검색).[/ref] 또한 기존의 발달 이론이 전제하듯, 정체성 형성이 간결하고 확고하게 이루어지는 완결형의 과정이 아니라 관계와 상황에 따라 지난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지는 진행형의 과정이라고 인식하는 지도와 상담을 상상할 수도 있다.[ref]Mingus, M.(2010), “Interdependency”, 〈Leaving Evidence〉, January 22, 2010.[/ref] 이러한 상호의존적 교육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행위성을 자유 의지에 따른 자기결정 및 행동으로 해석하여 불구의 행위성을 수동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인식을 재고해야 한다. 자신의 접근 요구를 이해하고 충족해 줄 수 있는 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집합적 노력을 통해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정신성에 저항하며, 이를 통해 소진, 고통, 상실을 회복하는 능동적 행위성을 지닌 존재로 불구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ref]Abes, E. & Wallace, M. M.(2020), 앞의 글, p.587.[/ref] 하지만 이러한 관계적·공동체적 행위성을 지닌 이들은 장애인과 불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연결되어 느끼고 행동하는 존재이며, 누군가의 노동과 돌봄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관계적·공동체적 행위성에 기반한 교육, 다시 말해 취약한 이들이 서로의 삶을 지탱하고, 서로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축적하고, 서로를 돌봄과 책임을 공유하는 동료로서 존중하는 교육은, 개인이 많은 과업을 떠안고 책임지는, 독립적 행위성에 기반한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에 접근할 수 없었던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는 각자의 몸/마음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다양한 지식 생성·이해의 방식을 존중하고, 그에 대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반응과 느낌을 인정하는 교육·연구·운동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 접근 가능한 교육을 향하여

 

교육을 불구화한다는 것의 의미와 가능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교육이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정신성에 의해 구성된 정치적·논쟁적인 것임을 밝힘으로써, 교육이 추구하고 재생산하고자 했던 가치와 인간상을 재고하도록 만든다. 둘째, 학습자의 실패, 상실의 경험과 그로 인한 부정적 느낌을 지배 규범의 폭력과 억압의 산물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기존의 치유적 시간, 재생산적 미래, 선형적 발달관을 거부하고 새로운 시간적 틀을 마련하는 데, 즉 ‘불구의 재산(crip wealth)’[ref]불구가 자신의 한계나 결함에 집중하기보다 건강한 비장애인이 가지지 못한 경험과 인식 등 자신이 가진 것에 더 집중함으로써 그것을 불구의 삶에 필요한 일종의 재산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의 용어.[/ref]으로 재평가하는 데 기여한다. 셋째, 상호교차성·상호의존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자립/의존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장 및 발달 기준의 재정립을 촉구한다. 넷째, 불구의 몸/마음이 지닌 무질서함과 변화 가능성, 불구의 느낌이 지닌 모순성·양가성을 통해 나/우리의 위치와 정체성을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할 여지를 제공한다. 다섯째, 교육, 학문, 담론, 운동 등을 향한 교수자, 학습자, 연구자, 활동가의 복잡한 반응과 느낌을 인정함으로써, 그 느낌을 앎과 행동의 대안적 방식으로 해석할 가능성, 즉 ‘느낌에 의한 배움(learning by feeling)’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배움을 통해 접근성의 폭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요컨대, 불구가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드는 일은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만드는 일이다. 건강중심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 그로 인한 물리적·제도적·문화적·경제적·지적 자원에의 접근 제약이 미치는 효과가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것처럼, 교육을 불구화하는 것의 효과도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치지 않는 까닭이다. 사회와 학교에서 인정받는 능력 및 업적을 얻기 위해 각개약진하는 능력주의적 ‘자기계발 주체’, 그 경쟁적 삶이 자신의 몸/마음에 맞지 않아 소진되고 무능함을 체감하고 자책하는 ‘우울증적 주체’들은 모두 특정한 몸/마음을 특권화하는 사회와 교육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에서 불구적이다. 따라서 교육을 불구화한다는 것은 장시간 고강도로 일하고 공부할 수 있는 생산적인 몸/마음, 나와 후손들이 갖기에 바람직한 몸/마음, 고로 미래에 재생산하고 싶은, 재생산해야 하는 몸/마음을 가진 이를 떠올릴 때, 여기서 누락되는 이들이 모두 접근할 수 있는 교육을 상상하고 마련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다른 시간 동안 활동하고 다른 장비를 이용하고 다른 부피와 장소를 차지하는 이, 다른 발달 과업과 건강, 수명이 기대되는 이, 그리하여 규범적인 정체성, 노동, 관계, 정서, 태도에서 빈번히 미끄러지는 이,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정해 놓은 생산성, 독립성, 효율성 위주의 시공간에서 벗어나 고유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상호의존하는 이들을 위한 교육 말이다.[ref]앨리슨 케이퍼(2023), 앞의 책, 435쪽.[/ref] 어쩌면 이들의 이름은 다양할지도 모른다. 무능하고 저속하고 쓸모없고 불량하다고 평가됨으로써 역사적으로 불임 시술, 분리, 배제, 시설화, 지원 축소, 교통·의료·교육·복지·정보에의 접근 제한, 폭력 및 학대, 시민권 보류 등을 통해 자손, 문화, 웰빙의 재생산이 제약되었던 이들, 과거·현재·미래의 시공간에서 퇴락되고 사라지지만, 그 사실이 기억되지도, 애도되지도 않는 이들, 늘 망각과 삭제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온 이들은 아픈 사람, 장애인뿐만 아니라, 이주민, 성노동자, 약물 사용자, 가난한 자, 홈리스, 탈가정·탈학교 청소년이기도 하니까. 소진, 고통, 상실을 직면하고 애도하면서도 이를 다른 에너지와 가능성으로 전환해 왔던 불구들의 인식과 경험이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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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