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기획] 서이초 사건 1년, 우리 사회에 남긴 것들에 대한 성찰 | 자살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 선수윤

202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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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서이초 사건 1년, 우리 사회에 남긴 것들에 대한 성찰 


자살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윤 

초등 교사


 

“공무 중에 사망했지만 
그 공무가 무엇인지는 밝힐 수 없습니다”

 

2023년 여름, 검은 옷을 입은 교사들의 집회는 매우 특별했다. 주말마다 교사들은 여의도 앞 도로를 가득 채웠고 서이초 교사의 죽음의 진상 규명과 교권 보호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20년 넘게 학교를 다녔는데 교사들이 그렇게 모이는 것은 그때 처음 보았다. 전교조가 왕성하게 운동을 할 때도 그 정도로 대규모 집회는 없었다. 특히 초등 교사들이 집회를 주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동료의 죽음을 보고 비로소 거리로 나왔다. 그것은 추모제이자 악성 민원, 근거 없는 소송으로 노동 현장을 위협받는 교사들의 생존권 투쟁이었다.

모두가 신기하게 초등 교사들의 집회를 바라보았다. 초등 교사들은 시간을 잘 지켰고, 줄을 반듯하게 유지했고, 필요 없는 소음을 만들지 않았다. 매우 절실한데 악착같지 않았고, 분명 누군가와 싸우고 있는데도 함부로 적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슬픔과 분노 속에서도 질서 정연한 교사들의 모습이 의아했다. 조금은 못마땅했다. ‘고상한 척할 만큼 아직 여유가 있구나’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교사들은 자기들이 괴롭다고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일을 차마 할 수 없었구나. 그건 그들을 괴롭히던 악성 민원인들의 방식이었다. 자기들이 지키고 싶은 삶의 모습 그대로 집회를 하는 것이 교사들의 방식이었다.

교사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교권 보호 관련 5개 법안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교사들은 변화된 현실이 없다고 느낀다. 교사들은 여전히 성실하게 학교에 나가 수업을 하고 안타깝게도 자신에게 행사되는 물리적, 언어적, 감정적 폭력을 고스란히 당한다. 그리고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이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약을 먹는다.

다행히 교사들의 요구대로 서이초 교사의 죽음은 ‘순직’이라는 걸 인정받았다. 무려 7개월이 걸렸지만 국가는 서이초 교사가 “공무상의 이유”로 “공무 중”에 사망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교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공무가 ‘무엇’이었는지, 그 공무를 지시한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그 공무가 교사가 감당해야 할 ‘정당한 것’이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빌헬름 라이히는 이렇게 말했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또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ref]빌헬름 라이히, 황선길 옮김(2006),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55쪽. 강조는 원문 참고.[/ref]

 

라이히의 말을 빌어 지금의 학교를 바라보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교사들이 거리에서 투쟁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교사들 중 대다수는 왜 싸우지 않고 학교를 떠나거나 자살을 하는가, 또 악성 민원을 받고 있는 학교는 왜 민원인과 싸우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은 서이초 교사를 죽게 만든 그 ‘공무’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살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 한다

 

교사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며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앙토냉 아르토의 글이 떠올랐다. 아르토는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더구나 자살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도 혼자서 태어나지 않았다. 물론 혼자서 죽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자살의 경우라면 육체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는,

이 자연에 反하는 행동을 결심하기 위해서라면

나쁜 인간의 대무리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극단적인 죽음의 순간에는 항상 누군가 배후에 있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박탈한다고 믿는다.[ref]앙토냉 아르토, 조동신 옮김(2003),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도서출판 숲, 110쪽.[/ref]

 

많은 이들이 반 고흐를 “자신의 광기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아르토는 반 고흐를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이라고 변호한다. 아르토가 지목한 반 고흐를 자살시킨 사람 중에는 그의 동생 테오와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에겐 악의가 없었다. 심지어 반 고흐에 대한 애정도 듬뿍 가지고 있었다. 다만 테오는 조카가 태어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음을 알리며 반 고흐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행사했다. 가셰 박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리라고 조언하면서 이제까지 반 고흐가 그렸던 그림은 광인의 착란일 뿐이라는 암시를 내비쳤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은 아주 평범한 말로 반 고흐를 살해했다. 너는 화가가 아니야. 네 그림은 그림이 아니야. 사람들이 좋아하는 팔리는 그림을 그려 봐. 그런 말들로 위대한 화가를 살해한 것이다.

반 고흐의 살해 방식은 대한민국에서 교사들이 살해당하는 방식과 많이 닮아 있다. 아이들이 폭력적이야? 애들이잖아. 교사가 참아야지. 학부모가 부당한 요구를 해? 부모 마음이잖아. 교사가 이해해야지. 학교에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아? 시대가 변했잖아. 교사가 변해야지. 학교폭력 문제를 왜 교사가 해결하지 못해? 아이들의 품행 문제에 왜 교사가 대응하지 못해? 교사는 교육 전문가라며? 그런 말들은 순식간에 “그러고도 네가 교사야?”라는 질책으로 변하여 교사를 살해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한때는 교사들이 전문성을 키워서 그 모든 과제를 멋지게 해결하길 바랐다. 수업이 점점 힘들다고 투덜대는 동기가 전문성을 키워서 좀 더 의연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헤쳐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교사들은 적어도 모두 대학교육을 받았고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학교 내에서 주도권을 지니고 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반 고흐가 살해당한 방식으로 교사들을 살해할 뻔했다. 실상은 무엇일까? 왜 교사는 과한 업무에 허덕이고 교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악성 민원의 타깃이 되는 것일까?

 


교사를 낙담시키고 모욕하면서 
교육 개혁을 이룰 수는 없다

 

국가는 오랫동안 현대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문제를 학교에 떠넘겨 왔다. 노동 시간 증가, 여성 고용 증가 등으로 인한 아동 돌봄 공백, 스마트폰의 지나친 사용으로 인한 학생들의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 문제, 특수교육 대상자의 통합교육과 장애 이해 교육, 늘어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학습과 정서 안정, 아동학대 피해 학생 파악과 지원, 학생들의 정서 문제 해결, 젠더 문제와 성평등 교육, 흡연 예방 및 약물 오남용 예방, 도박 중독 예방, 학교폭력 예방 및 적절한 해결,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코딩 교육, AI 시대를 준비하는 디지털 교과서 활용 등등.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가 너무나 당연하게 학교의 과제로 들어왔고 그 모든 것이 교사들의 과제로 남았다.

비슷한 현상이 20세기 후반 미국에도 있었다. 미국은 대학 입학 자격 시험 평균 점수 하락, 문해력 감소와 문맹자 수 증가 등의 문제를 고심하며 30년 넘게 교육 개혁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력 저하와 학생들의 마약, 음주, 폭력 문제 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을 보고 교육운동가 파커 J. 파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은 ‘교사 때리기(teacher-bashing)’가 하나의 대중 스포츠가 된 시대이다. 현대 생활의 지나친 요구 사항에 겁먹은 나머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참아 낼 수 없는 죄악에 대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교사는 그중 만만한 타깃이다. 왜냐하면 교사는 아주 평범한 인종이고 또 반격할 만한 힘도 별로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는 사회적 질병에 대하여, 교사들이 그 치유 방법을 모른다며 비난한다. (……)

교육을 개혁하려는 성급한 마음 때문에 우리는 아주 간단한 진실마저도 망각해 버렸다. 만약 우리가 소중한 교사 자원을 이처럼 낙담시키고 모욕한다면, 아무리 정부 예산을 증액하고, 학교의 구조를 개편하고, 학과목의 내용을 변경하고, 교과서를 새로 집필한다고 해도 교육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ref]파커 J. 파머, 이종인·이은정 옮김(2007),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울림, 17쪽.(초판 1쇄 발행 2000년)[/ref]

 

사회가 학교에 바라는 것이 점점 늘어나는 동안 정작 교사들에게 주어진 것은 사회의 요구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비난과 전문성 함양과 관련 없는 온갖 의무 연수뿐이었다. 그런 연수들은 이미 잡무가 된 지 오래다. 2023년에 교사들의 자살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이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교육청들은 연수를 늘렸다. 내가 근무하는 교육청에서는 교사들 마음 챙기라고 문화 연수를 신설했다. 동료들과 문화생활을 누리라고 비용을 지원해 주는 정책이었다. 교사들의 절망이 문화생활 한 번으로 떨쳐 낼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교육청은 교사들의 마음을 챙겼다고 생색을 낼 수 있겠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올해 학교는 과제를 하나 더 받았다. 법령을 통해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목표로 한 자살 예방 교육이 공공 기관 및 초·중등학교 등에 의무화되었다. 학교에 자살 예방 교육이 없었던 게 아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교육청은 공문을 통해 학교에 생명존중위원회를 구성하고 자살 예방 교육을 실시할 것을 지시하고 그 결과를 보고받아 왔다. 그랬던 것을 최근 보건복지부가 법령으로 의무화했다. 보건복지부가 해결할 문제를 공식적으로 학교에 떠넘긴 것이다.

교육청 권고와 법령의 무게는 다르다. 대개 이런 교육이 법령으로 지정되면 학교 교육과정 및 생활기록부에 기재된다. 서류가 늘어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제 학생 자살 사건이 나면 학교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모는 학교에 와서 원망을 토로할 것이고, 교사들은 민원 대응 법을 고민하며 적절한 자살 예방 교육을 했다는 근거 자료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자살 예방 교육은 몇 시간 이루어졌는지’, ‘위험 징후는 없었는지’, ‘그에 따른 적절한 상담은 이루어졌는지’ 등. 제자의 죽음을 슬퍼할 새도 없이 서류를 준비하며 교사들은 문득 ‘이러고도 내가 교사인가?’라고 질문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악성 민원을 키우고 교사들을 자살시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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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