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마트폰 금지하고 SNS마저 차단하겠다고?!

조너선 하이트 씀, 이충호 옮김,
《불안 세대-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웅진지식하우스, 2024
편해문
hm1969@hanmail.net
자유놀이옹호가/플레이워커
또 하나의 금지 앞에서
불안과 우울증 비율이 그토록 많은 나라의 청소년 사이에서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급증한 이유를 다른 이론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 본문 76∼77쪽
최근 국내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조너선 하이트의 새 책 《불안 세대》는 1996년 이후 태어난 아동들을 ‘불안 세대’로 호명하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로 가상 세계를 지목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그와는 다른 관점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불안과 우울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조너선 하이트의 관점과 접근 방식은 방대하면서도 선별적이지만 늘 그런 접근이 실제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 줍니다. 특히, 성인과 기성세대의 관점을 권위주의적으로 관철하려는 모습은 걱정스럽습니다. 나아가 증명되지 않은 겁박(“스마트폰을 경험 차단제라고 불러도 무방”, 88쪽) 또는 과장(“종교가 없는 아이들은 인터넷의 바다에 쓸려 내려간다”❶), 그리고 선동(“온라인 세계 진입을 최대한 늦추어야 한다”, 129쪽)과 오류(“현실 세계의 자유 놀이와 달리 대다수 비디오게임은 자치 기술을 연습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286쪽)와 믿음(“도덕적이거나 영적 목적을 위해 조직된 집단에 참여하는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다”, 302쪽)이 여럿인데 대상을 지목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개선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 때문이라고 성토대회를 열면 속은 후련할지 모르지만, 잠시만 시간이 흐르면 과학적 검증의 오류만 남습니다. 지금 긴요한 일은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의 위험과 유익함에 관한 과학적 접근과 근거 추적과 데이터 취사선택에 따른 오류 검증입니다.
얼마 전에 드러난 딥페이크 사태로 이 글은 입지가 좁습니다. 반면에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는 더 많이 상찬될 것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How the great rewiring of childhood is causing an epidemic of mental illness”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어린 시절의 커다란 재배선이 정신 질환 전염병을 일으키는 방식”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의 부제는 확정적이게도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입니다. 저자의 과장이 한 번 더 증폭됩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요?
조너선 하이트는 국내에 소개된 앞선 저작에서 밝은 눈을 보여 주었고, 그의 놀이와 놀이 환경에 관한 이해는 저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위험한 놀이를 긍정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책 마지막의 그의 영성에 관한 글과 4개 강령은 조너선 하이트의 앞선 책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의 최종 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
둘. 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셋.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한다.
넷. 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와 아동의 독립성을 더 확대한다.
- 본문 427쪽
용어는 알맞은가?
조너선 하이트는 이 책에서 몇 개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논지를 폅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불안 세대’입니다. 불안을 강조하기 위한 명명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한 세대의 특징으로 정의하는 데 알맞은지 의문입니다.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스마트폰과 SNS 과사용으로 특정 세대가 불안과 우울에 빠지고 자살률이 높다는 그의 실증 없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무리한 세대 구분과 범주화가 혼란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불안 세대’보다는 ‘자유 박탈 세대’가 어떤가 합니다. 이 세대는 한 사회의 성인과 제도와 기획으로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두 번째 새로운 용어는 ‘아동기 대재편 시기’입니다. 저는 이 용어가 자유의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아동의 자리에서 보았을 때 우아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자연스러운 재편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이랄까요? 어린이 가까이서 20년 정도 지켜보면서 느꼈던 실제적 느낌을 전한다면 ‘아동기 포획기’라고 쓰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자유에서 중간 자유 그리고 대자유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관리되어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유의 공기와 닿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은 ‘놀이 기반 아동기’가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 넘어갔다는 주장과 용어입니다. ‘놀이 기반 아동기’는 아름다운 명명입니다. 그러나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는 선정적이고 협소하며 편향된 명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신에 ‘성인 주도 아동기’ 또는 ‘관리 기반 아동기’라는 용어를 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이 바야흐로 성인이 결정하고 기획하는 시대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실 세계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 과소 보호’라는 용어입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에게 널리 회자하는 용어입니다. 울림이 큰 용어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입니다. 용어를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놓인 어려움을 성인의 필요와 희망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 두 용어를 쓰며 양육자에게 도덕적 압박을 가하고 그들이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2024년 현재 제가 바라보기에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모두 과잉보호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날마다 듣는 잔소리의 대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가상 세계 과소 보호’라는 말은 의미를 잃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과잉보호하던 양육자가 태도를 바꿔 가상 세계를 과소 보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상 세계를 둘러싼 크고 작은 언쟁과 돌발적인 금지와 빼앗기와 파손이 빈번한데 어떻게 이것을 과소 보호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조너선 하이트는 왜 그토록 스마트폰과 SNS에 부정적일까요? 《불안 세대》에 한정해서 살펴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학력 증진’ 때문으로 보입니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또 하나 끝까지 좁히지 못하는 간극은 현실과 가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그의 세계관입니다. 2024년에 가상과 현실이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이 될까요? 과거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무엇이 먼저인가?
《불안 세대》를 읽고 나면 두 가지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조너선 하이트는 많은 부모들이 믿기 쉬운 아동 발달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많이 팔릴 것입니다. 둘째, 디지털 기술이 아이들의 두뇌를 재구성하고 정신 질환의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이 책의 반복적인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더 나쁜 것은 소셜 미디어가 책임이 있다는 대담한 제안이 현재 젊은이들의 정신 건강 위기의 실제 원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❷
UC 어바인 대학의 사회과학 및 정보학 교수인 캔디스 오저스는 《네이처》 저널에 〈소셜 미디어가 정말 10대 정신 질환 유행의 배후에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위와 같은 서평을 썼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불안 세대》 곳곳에 인용되고 있는 여러 연구와 실험과 통계가 조너선 하이트가 미리 세워 놓은 가설에 편리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설은 단순하고 강력합니다. “스마트폰과 SNS 때문에 어린이와 청소년이 다 망가졌다.”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가 필요할 때마다 잘라서 인용한 여러 연구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캔디스 오저스는 조너선 하이트를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확대하는 오류에 빠진 전형적인 예로 보았습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질적 차이는 매우 커 구분해 써야 합니다. 또 하나 의문은 게임에 관해서는 반대로 그 유해성에 관해 아직 분명히 검증된 연구가 없다고 조너선 하이트가 솔직히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임은 무엇으로 하나요? 스마트폰과 SNS로 하지 않습니까? 게임과 불안과 우울 사이의 관계 불일치에 관해서는 인과관계 없음을 인정하면서, 왜 스마트폰과 SNS와 불안과 우울 사이의 관계 불일치에 관해서는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확대 해석하는지 학자적 소양과 과학적 검증의 소박함을 봅니다. 관련해서 앤드루 K. 프르지빌스키 옥스퍼드 대학교 인간 행동 및 기술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별한 주장에는 특별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❸
덧붙여 조너선 하이트가 결론적으로 제시한 첫 번째 강령(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과 두 번째 강령(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냈습니다.
“이것은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14세가 되어 첫 번째 휴대전화를 갖게 되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자녀와 책임감 있는 사용에 대해 여전히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하며, 솔직히 말해서 14세보다 10세 아이가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여기서 저는 세 번째 강령(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한다)과 네 번째 강령(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와 아동의 독립성을 더 확대한다)에 관한 의견을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세 번째 강령에 관해서는 당사자인 학교와 학생과 교사와 양육자 사이에 건설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의견은 있지만 의견 제시를 잠시 미룰까 합니다. 언제라도 첫 번째와 두 번째 강령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면 세 번째 강령에 관해서도 의견을 내 보겠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강령이 남았습니다. ‘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는 ‘자유 놀이’와 같은 말입니다. 당연히 저는 네 번째 강령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가 하듯이 강령으로 만들어 배포한다고 자유 놀이가 옹호되고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책에서 밝혔듯이 말입니다.
미국의 초등학교들이 스완슨초등학교의 사례를 따를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있는 학교가 거의 없다. 많은 학교에서 소송 위협과 부모 항의를 초래할 위험이 매우 크다. 이런 조치가 시험 준비를 방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너무 크다.
- 본문 386쪽
저 또한 스마트폰이나 인스타그램과 관련된 어린이와 청소년 현상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제한이나 규제나 관리를 떠올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SNS와 스마트폰 이전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선택권 없음과 놀이 빈곤과 시간 점유와 신체의 구속을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요?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을 소리 높여 비난하고 대속(代贖)시킨다고 해도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유와 선택을 비끄러맨 우리의 무책임과 뒤틀린 욕망은 가릴 수 없습니다.
그는 게임과 놀이를 꽤 다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유사성 또한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저는 실증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성장하는 데 게임도 놀이도 유익하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 연구 결과에 근거하는 태도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현실도 필요하고 가상도 필요합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금욕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은 호기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무엇에 관해서일까요? 새로움과 즐거움에 관해서입니다.
최종적으로, 그에게 불안과 우울에 관해 선후 관계의 착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짧게 요약해 적었습니다.
1. 우울하고 불안해져 → 스마트폰/SNS에 몰두하는 것인지?
2. 스마트폰/SNS에 몰두하다 보니 →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것인지?
3. 학력 압박, 경쟁, 비교, 고립 등으로 → 우울하고 불안해져 → 스마트폰/SNS에 몰두하는 것인지?
쉽게 말해 ‘스마트폰과 SNS를 많이 해서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우울하고 불안해서 스마트폰과 SNS에 닿는 것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전자를 주장합니다만 저는 이해는 되지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상황과 흐름을 실제로 자주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업, 경쟁, 괴롭힘 등으로 힘들고 우울하고 불안해서 스마트폰과 SNS로 흘러가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입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앞서 길게 이야기했던 논거를 보시면 조너선 하이트의 경로에 뭔가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조너선 하이트의 다른 생각과 혜안을 기대했는데, 그 역시 스마트폰과 SNS의 사용 금지와 제한을 주장하는 실제 까닭에는 성적이 떨어지고 학력이 저하되는 것에 관한 걱정이 뿌리 깊음을 확인하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 문장에 잘 드러납니다. 자연스럽게 그가 이 책에서 곁가지로 자유 놀이를 언급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학업 성적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너무도 쉽게 ‘자유 놀이’는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학업 성적을 올리기 위해 스마트폰과 SNS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제로 자유 놀이를 지지할 까닭은 적거나 없습니다. 쉽게 말해 공부에 방해되니 스마트폰과 SNS를 막자는 것이 그의 본론이며 자유 놀이와 위험한 놀이의 긍정은 부록인 듯합니다. 이런 뒤엉킨 사고가 늘 참신함으로 나가는 움직임을 붙잡아 세웁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다음 장에서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에서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 증진을 위해 휴대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주와 연방의 교육부는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하는 것이 학생의 정신 건강과 학업 성적에 도움이 되는지 입증하기 위해 그 효과에 대한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
- 본문 354∼355쪽
결론적으로 저는 자유 놀이 옹호와 스마트폰 금지와 SNS 차단은 서로 모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모두가 필요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놀이보다 스마트폰보다 SNS보다 더 긴요한 것은 ‘자유와 허용’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상하리만큼 일상적 학업 성취 압박과 독려, 지시, 관리, 제지, 경쟁, 따돌리기, 집단 괴롭힘, 모욕으로 인해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현상에 관한 내용은 부족하다는 점에 의아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학력 증진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다르면 조너선 하이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건 안 돼! 그것은 금지야! 공부하는 데 방해 돼! 핸드폰 하고 SNS 하는 시간 아깝지 않니?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해서 성적이나 올려라!”라고 말하는 성인과 무엇이 다른지 점점 알 수 없어집니다. 조너선 하이트의 다음 문장을 보면 그의 생각이 정확히 학력에 맞추어져 있음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❹ 독립은 방해받고 수동적인 배움의 환경에 노출되어 불안과 우울이 늘어나고 있음에 그도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고통이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학력도 올려야 하고 스마트폰과 SNS로 사회적 인정도 확보해야 하는 이중고의 늪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할수록 탈진할 수밖에 없는 우리 교육과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화상입니다.
교수로서 나는 학업 성적을 높이기 위한 개혁을 적극 찬성한다.
- 본문 380쪽
화성 그리고 영성
한 인터뷰에서 조너선 하이트가 “종교가 없는 아이들은 인터넷의 바다에 쓸려 내려간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왜 종교와 영성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지 의아했습니다. 책 앞쪽의 엉뚱한 화성 비유도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주관적인 내용이라 8장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8장 〈영적 고양과 퇴화〉를 읽고 나서 써야 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스마트폰과 SNS에 조정당하는 꼭두각시로 보는 확증을 멈추고 ‘자비심’❺과 만났으면 합니다. 경쟁과 비교로 엉클어진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들의 극한의 좌절과 절망과 고독과 선택할 수 없음과 자유의 소거가 스마트폰과 SNS로 넘어가게 만드는 강력한 경로임을 한 번 더 천착해 주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스마트폰과 SNS를 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아프고 망가진 인간으로 낙인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 경쟁과 입시와 등수와 압도적인 해야 할 것의 무한 반복 속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견디고 숨 쉬고 있는지 마주해야 합니다. 만약 가까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면 스마트폰 금지와 SNS 차단이라는 재앙을 처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8장에 영향을 받아 한 말씀 보탭니다. 영성이 남에게 적용하는 수단이 되면 위험합니다. 영성은 오로지 자신을 보는 수단으로서만 유용합니다. 영성을 타인에게 적용하려고 할 때 변고가 일어납니다. 지금은 스마트폰과 SNS 가까이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향한 불안과 걱정을 잠시 거두고 이해와 자비심을 가지고 바라볼 때인 것 같습니다. 선택과 결정이 모두 막힌 세계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에 얼마나 많은 위로와 응원을 받고 있는지 차분히 보는 것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음악과 춤은 하루의 피로와 부자유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차가운 샘물과 선선한 바람과 같은데, 스마트폰과 SNS 없이 어떻게 춤과 음악의 해방된 세계에 잠시나마 즉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 노래는 어디서 듣고 춤은 어디서 보고 흔드냐는 말입니다. 지금은 음악과 춤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영성을 만들고 있지 않나요? 금지하고 차단한다면 그들 삶의 풍성함은 훼손되고 각박해질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SNS의 해악도 보지만 유익함도 함께 볼 수 있는 사려 깊은 성인이 어린이와 청소년 주변에 늘었으면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쉽게 깨지거나(fragile) 망가지지 않는다
그 결과로 뇌에서 재배선이 일어나는 가장 민감한 시기에 그들이 아동과 청소년을 쥐처럼 훈련시키도록 방치했다.
- 본문 206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조너선 하이트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떻게 보는지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수동적이지 않으며 성인과 사회가 그들에게 이식하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라는 것이 저의 오랜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난 경험에서 나온 성찰입니다. 겉으로는 백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떤 식으로든 거르고 재구성합니다.
성인과 테크 기업과 엔터 기업이 모여 온갖 함정을 파고 전략을 짜도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신만의 경로와 서식지를 만듭니다. 이미 조심할 것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것도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곳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도 경험을 통해 데이터를 모아 둡니다. 무슨 까닭인지 조너선 하이트는 이런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의식과 결정력과 회복력에 관해 신뢰하는 내용이 적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쥐처럼 훈련’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자주 나올 때 모욕을 느꼈습니다.
왜 그들은(남자아이) 현실 세계에서 위험을 피하게 되었을까?
- 본문 273쪽
위험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와 여기서 갈립니다. 남자아이들은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과 만날 수 있는 국면과 차단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현실 속에서 위험과 만나고 다룰 기회를 누군가, 무엇이 소거시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상 세계의 위험이라도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왜 문제인가요?
201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폰을 가진 청소년은 깨어 있는 시간 내내 회사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 본문 276쪽
그들을 땅에 고정하고 영양분을 공급해 줄 뿌리가 전혀 없다. 그들을 제약하고 성인기로 가는 길을 안내할 분명한 규범도 없다.
- 본문 289쪽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리석거나 고립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사람과 기관이 없어도 언제나 어디서나 배울 만큼 지혜가 있습니다. 배우려면 대상과 연결되어야지 금지하고 차단되어서는 좋음도 나쁨도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테크 기업이나 엔터 기업 위에 올라설 전술과 전략을 짜는 활발한 협업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상부를 조정하는 막강한 영향력의 주도권을 쥐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조너선 하이트는 먹잇감이 되었다고 단언하는 것일까요? 그가 대상으로 보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기 조정과 비판적 사고를 믿지 못해서인지 모릅니다. 그가 3장에서 길게 강조한 안티프래질(antifragile)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그는 말할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의 장기간 사용 또는 과도한 사용이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이득을 준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젊은이들이 인스타그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2013년에 전 세계 각지에서 정신 건강 향상과 행복의 물결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 본문 208쪽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신 건강에 이득이 안 되는 것은 다 금지해야 하나요? 어린이와 청소년 모두가 날마다 행복의 물결에 휩싸여 지내야 하나요? 혼돈과 갈등과 손상과 회복은 안티프래질의 서식지가 아닌가요? 앞에서 비슷한 말을 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해 간섭하고 관리하고 금지하려는 위치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도 좋은 선택지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테크 기업에게는 친근한 말투를 쓰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준엄한 불호령을 내리는 건가요? 제가 말을 여태 못 알아듣는다며 그는 또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11세 아동은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의 요지는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가 놀이 기반 아동기를 대체한 아동기 대재편이 청소년 정신 질환이라는 국제적 유행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 본문 210쪽
저도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과장으로 버무려지고 편집된 스마트폰과 SNS 금지와 제한에 대한 주장으로 양육자와 어린이와 청소년의 시야를 흐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의 주장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고 지금은 스마트폰과 SNS의 취약성과 유용함에 관한 균형 잡힌 접근이 긴요합니다. 팬데믹 때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악영향만을 준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당시 그마저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봅시다. 더불어 학교에 가지 않아 경쟁과 학업과 또래 압력에서 해방감을 느낀 어린이와 청소년이 많았음도 새삼스럽게 헤아려져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은 시간과 공간과 친구의 많은 부분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학습과 경쟁과 차별에 최적화한 시스템을 성인과 사회와 제도가 힘을 모아 구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바쁨과 시간 없음 속에서, 친구를 실시간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조차 마련하기 어려워 그나마 SNS로 우정을 쌓고 소통하려는 처절한 자발적 몸부림까지 왜 막아서려는 것일까요?
온라인 포르노와 달리, 연구자들은 비디오게임을 하는 청소년이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연구는 비디오게임이 작업 기억 향상, 반응 억제, 심지어 학교 성적을 포함한 인지 기능과 지적 기능 향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 실험은 우울증 증상이 있는 실험군에게 일주일에 세 차례, 한 번에 30분씩 한 달 동안 비디오게임을 하게 했더니 증상이 상당히 감소하는 결과를 얻었다. 다른 연구들에서는 서로 협력하는 게임을 하면 게임 밖에서도 협력이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본문 282쪽
그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게임의 부정적인 면은 아직 충분히 실증적으로 검증된 바 없으며 게임의 긍정적인 면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SNS가 게임과 같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그럴 수 있지만 스마트폰이나 SNS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도 섣부른 일입니다. 나아가 지금은 게임과 스마트폰과 SNS의 경계와 구분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이 세 가지가 모두 절실하고 유용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자유 놀이’와의 친연성 또한 매우 높았음을 밝힙니다.
스마트폰 사용 금지와 SNS 접속 차단은 당사자인 어린이와 청소년과 먼저 상의할 일이지 양육자와 교사와 테크 기업에 투척할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양육자와 교사는 지쳐 있고 테크 기업은 대화의 창구를 폐쇄하고 숨어 버린 상태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스마트폰과 SNS 사용에 관한 걱정과 불안을 거두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에 도착한 기술과 도구를 어떻게 안전하게 주인으로 쓸 것인지에 관한 사려 깊은 안내가 긴요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 모든 난관에 포위된 듯이 보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헤쳐 나갈 용기가 있고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할 만큼 유능합니다.
그는 자신이 제안한 네 가지 실천 방안을 성공시키기 위해 크게 말하고 연결하라고 조언합니다. 덧붙여 저는 작고 낮게 말하고 성인이나 단체나 입법과 연결하기 전에 어린이나 청소년과 연결을 권하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스마트폰과 SNS를 잘 쓰는 것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이 필요한 것이지 금지하거나 차단하는 것은 분명 퇴행이라는 말씀을 길게 하고 말았습니다.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은 이제 ‘디폴트’가 아닐는지요? 우리 사회가 긴 시간 묻어 두었던 여러 이야기를 꺼내고 따져 보고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불안 세대》의 미덕은 여럿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
- 본문 320쪽
그러려면 독립적 사고가 필요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배움과 성장의 환경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긴요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은 다양합니다. 자유 놀이가 될 수도 있고 위험한 놀이터일 수도 있고 게임일 수도 있고 SNS일 수도 있고 스마트폰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 모든 것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통제력을 가늠하고 기를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에 관한 걱정과 공포와 혐오 또한 행위 주체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통제력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것입니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허용적인 환경, 금지와 간섭과 제지가 덜한 관계와 태도가 긴요합니다. 걱정하며 이것저것을 금지하다 보면 어린이와 청소년은 실감과 만날 수 없습니다. 규제와 금지와 제한과 간섭과 관리와 감독만으로는 참신함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위험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이 통제될 수 있는 자장 안에 있음을 자각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단절과 절망과 두려움을 안기는 것에 신중하고 그들의 가능성으로 무게 중심을 서서히 이동하는 것이 건설적이지 않을까요?
치밀하게 관리하고 공모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유와 선택을 빼앗는 데 성공한 뒤로 이제는 스마트폰마저 금지하고 SNS도 차단하겠다고 합니다. 다음은 또 그들에게서 무엇을 금지하고 차단할 건가요? 금지하고 차단할 것이 더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이제 그 정도 합시다. 지금보다 더 인색해지지는 맙시다.
❶
〈역대 최악 10대 행복지수, 해외에서 청소년 SNS를 금지한 진짜 이유?(ft. 조너선 하이트 박사) | 불안세대〉, 조승연의 탐구생활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watch?v=ig7tgxOJ_Ck
❷
Odgers, C. L.(2024), 〈The great rewiring: is social media really behind an epidemic of teenage mental illness?〉, Nature, 628(8006), pp. 29-30. www.nature.com/articles/d41586-024-00902-2
❸
“Inside the debate over The Anxious Generation”, 〈Platformer〉, Apr 11, 2024. www.platformer.news/anxious-generationjonathan-haidt-debate-critique
❹
놀이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놀이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되새기며 ‘자유놀이옹호가’로 지내고 있음을 밝힙니다.
❺
어색하지만 8장의 세계를 빌려 왔습니다.
리뷰
스마트폰 금지하고 SNS마저 차단하겠다고?!
조너선 하이트 씀, 이충호 옮김,
《불안 세대-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웅진지식하우스, 2024
편해문
hm1969@hanmail.net
자유놀이옹호가/플레이워커
또 하나의 금지 앞에서
불안과 우울증 비율이 그토록 많은 나라의 청소년 사이에서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급증한 이유를 다른 이론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 본문 76∼77쪽
최근 국내외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조너선 하이트의 새 책 《불안 세대》는 1996년 이후 태어난 아동들을 ‘불안 세대’로 호명하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로 가상 세계를 지목합니다. 저는 이 글에서 그와는 다른 관점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불안과 우울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조너선 하이트의 관점과 접근 방식은 방대하면서도 선별적이지만 늘 그런 접근이 실제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이 책은 보여 줍니다. 특히, 성인과 기성세대의 관점을 권위주의적으로 관철하려는 모습은 걱정스럽습니다. 나아가 증명되지 않은 겁박(“스마트폰을 경험 차단제라고 불러도 무방”, 88쪽) 또는 과장(“종교가 없는 아이들은 인터넷의 바다에 쓸려 내려간다”❶), 그리고 선동(“온라인 세계 진입을 최대한 늦추어야 한다”, 129쪽)과 오류(“현실 세계의 자유 놀이와 달리 대다수 비디오게임은 자치 기술을 연습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286쪽)와 믿음(“도덕적이거나 영적 목적을 위해 조직된 집단에 참여하는 행동이 필요할 수도 있다”, 302쪽)이 여럿인데 대상을 지목하고 비난한다고 해서 개선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 때문이라고 성토대회를 열면 속은 후련할지 모르지만, 잠시만 시간이 흐르면 과학적 검증의 오류만 남습니다. 지금 긴요한 일은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의 위험과 유익함에 관한 과학적 접근과 근거 추적과 데이터 취사선택에 따른 오류 검증입니다.
얼마 전에 드러난 딥페이크 사태로 이 글은 입지가 좁습니다. 반면에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는 더 많이 상찬될 것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How the great rewiring of childhood is causing an epidemic of mental illness”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어린 시절의 커다란 재배선이 정신 질환 전염병을 일으키는 방식”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의 부제는 확정적이게도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입니다. 저자의 과장이 한 번 더 증폭됩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조장해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요?
조너선 하이트는 국내에 소개된 앞선 저작에서 밝은 눈을 보여 주었고, 그의 놀이와 놀이 환경에 관한 이해는 저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위험한 놀이를 긍정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 책 마지막의 그의 영성에 관한 글과 4개 강령은 조너선 하이트의 앞선 책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그의 최종 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
둘. 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셋.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한다.
넷. 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와 아동의 독립성을 더 확대한다.
- 본문 427쪽
용어는 알맞은가?
조너선 하이트는 이 책에서 몇 개의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논지를 폅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불안 세대’입니다. 불안을 강조하기 위한 명명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한 세대의 특징으로 정의하는 데 알맞은지 의문입니다.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스마트폰과 SNS 과사용으로 특정 세대가 불안과 우울에 빠지고 자살률이 높다는 그의 실증 없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무리한 세대 구분과 범주화가 혼란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불안 세대’보다는 ‘자유 박탈 세대’가 어떤가 합니다. 이 세대는 한 사회의 성인과 제도와 기획으로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두 번째 새로운 용어는 ‘아동기 대재편 시기’입니다. 저는 이 용어가 자유의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아동의 자리에서 보았을 때 우아한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자연스러운 재편이 이루어졌다는 느낌이랄까요? 어린이 가까이서 20년 정도 지켜보면서 느꼈던 실제적 느낌을 전한다면 ‘아동기 포획기’라고 쓰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자유에서 중간 자유 그리고 대자유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관리되어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유의 공기와 닿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은 ‘놀이 기반 아동기’가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 넘어갔다는 주장과 용어입니다. ‘놀이 기반 아동기’는 아름다운 명명입니다. 그러나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는 선정적이고 협소하며 편향된 명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신에 ‘성인 주도 아동기’ 또는 ‘관리 기반 아동기’라는 용어를 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이 바야흐로 성인이 결정하고 기획하는 시대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실 세계 과잉보호’와 ‘가상 세계 과소 보호’라는 용어입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독자에게 널리 회자하는 용어입니다. 울림이 큰 용어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지는 의문입니다. 용어를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놓인 어려움을 성인의 필요와 희망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 두 용어를 쓰며 양육자에게 도덕적 압박을 가하고 그들이 죄책감에 빠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2024년 현재 제가 바라보기에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 모두 과잉보호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날마다 듣는 잔소리의 대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가상 세계 과소 보호’라는 말은 의미를 잃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과잉보호하던 양육자가 태도를 바꿔 가상 세계를 과소 보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상 세계를 둘러싼 크고 작은 언쟁과 돌발적인 금지와 빼앗기와 파손이 빈번한데 어떻게 이것을 과소 보호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조너선 하이트는 왜 그토록 스마트폰과 SNS에 부정적일까요? 《불안 세대》에 한정해서 살펴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학력 증진’ 때문으로 보입니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또 하나 끝까지 좁히지 못하는 간극은 현실과 가상을 이분법으로 보는 그의 세계관입니다. 2024년에 가상과 현실이 그렇게 무 자르듯 구분이 될까요? 과거에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무엇이 먼저인가?
《불안 세대》를 읽고 나면 두 가지를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조너선 하이트는 많은 부모들이 믿기 쉬운 아동 발달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많이 팔릴 것입니다. 둘째, 디지털 기술이 아이들의 두뇌를 재구성하고 정신 질환의 전염병을 일으킨다는 이 책의 반복적인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더 나쁜 것은 소셜 미디어가 책임이 있다는 대담한 제안이 현재 젊은이들의 정신 건강 위기의 실제 원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❷
UC 어바인 대학의 사회과학 및 정보학 교수인 캔디스 오저스는 《네이처》 저널에 〈소셜 미디어가 정말 10대 정신 질환 유행의 배후에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위와 같은 서평을 썼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불안 세대》 곳곳에 인용되고 있는 여러 연구와 실험과 통계가 조너선 하이트가 미리 세워 놓은 가설에 편리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설은 단순하고 강력합니다. “스마트폰과 SNS 때문에 어린이와 청소년이 다 망가졌다.”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가 필요할 때마다 잘라서 인용한 여러 연구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캔디스 오저스는 조너선 하이트를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확대하는 오류에 빠진 전형적인 예로 보았습니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질적 차이는 매우 커 구분해 써야 합니다. 또 하나 의문은 게임에 관해서는 반대로 그 유해성에 관해 아직 분명히 검증된 연구가 없다고 조너선 하이트가 솔직히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임은 무엇으로 하나요? 스마트폰과 SNS로 하지 않습니까? 게임과 불안과 우울 사이의 관계 불일치에 관해서는 인과관계 없음을 인정하면서, 왜 스마트폰과 SNS와 불안과 우울 사이의 관계 불일치에 관해서는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확대 해석하는지 학자적 소양과 과학적 검증의 소박함을 봅니다. 관련해서 앤드루 K. 프르지빌스키 옥스퍼드 대학교 인간 행동 및 기술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별한 주장에는 특별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❸
덧붙여 조너선 하이트가 결론적으로 제시한 첫 번째 강령(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과 두 번째 강령(16세가 되기 전에는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는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냈습니다.
“이것은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14세가 되어 첫 번째 휴대전화를 갖게 되면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자녀와 책임감 있는 사용에 대해 여전히 어려운 대화를 해야 하며, 솔직히 말해서 14세보다 10세 아이가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여기서 저는 세 번째 강령(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한다)과 네 번째 강령(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와 아동의 독립성을 더 확대한다)에 관한 의견을 말해야 할 의무를 느낍니다. 세 번째 강령에 관해서는 당사자인 학교와 학생과 교사와 양육자 사이에 건설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의견은 있지만 의견 제시를 잠시 미룰까 합니다. 언제라도 첫 번째와 두 번째 강령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면 세 번째 강령에 관해서도 의견을 내 보겠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강령이 남았습니다. ‘감시를 받지 않는 놀이’는 ‘자유 놀이’와 같은 말입니다. 당연히 저는 네 번째 강령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가 하듯이 강령으로 만들어 배포한다고 자유 놀이가 옹호되고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도 책에서 밝혔듯이 말입니다.
미국의 초등학교들이 스완슨초등학교의 사례를 따를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있는 학교가 거의 없다. 많은 학교에서 소송 위협과 부모 항의를 초래할 위험이 매우 크다. 이런 조치가 시험 준비를 방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너무 크다.
- 본문 386쪽
저 또한 스마트폰이나 인스타그램과 관련된 어린이와 청소년 현상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제한이나 규제나 관리를 떠올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SNS와 스마트폰 이전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선택권 없음과 놀이 빈곤과 시간 점유와 신체의 구속을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요?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을 소리 높여 비난하고 대속(代贖)시킨다고 해도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유와 선택을 비끄러맨 우리의 무책임과 뒤틀린 욕망은 가릴 수 없습니다.
그는 게임과 놀이를 꽤 다른 것으로 보고 있지만 유사성 또한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저는 실증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성장하는 데 게임도 놀이도 유익하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학적 연구 결과에 근거하는 태도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현실도 필요하고 가상도 필요합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금욕하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은 호기심을 가진 존재입니다. 무엇에 관해서일까요? 새로움과 즐거움에 관해서입니다.
최종적으로, 그에게 불안과 우울에 관해 선후 관계의 착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을 간략하게 설명하기 위해 짧게 요약해 적었습니다.
1. 우울하고 불안해져 → 스마트폰/SNS에 몰두하는 것인지?
2. 스마트폰/SNS에 몰두하다 보니 →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것인지?
3. 학력 압박, 경쟁, 비교, 고립 등으로 → 우울하고 불안해져 → 스마트폰/SNS에 몰두하는 것인지?
쉽게 말해 ‘스마트폰과 SNS를 많이 해서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우울하고 불안해서 스마트폰과 SNS에 닿는 것인지’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전자를 주장합니다만 저는 이해는 되지만 동의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상황과 흐름을 실제로 자주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업, 경쟁, 괴롭힘 등으로 힘들고 우울하고 불안해서 스마트폰과 SNS로 흘러가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입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앞서 길게 이야기했던 논거를 보시면 조너선 하이트의 경로에 뭔가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조너선 하이트의 다른 생각과 혜안을 기대했는데, 그 역시 스마트폰과 SNS의 사용 금지와 제한을 주장하는 실제 까닭에는 성적이 떨어지고 학력이 저하되는 것에 관한 걱정이 뿌리 깊음을 확인하고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 문장에 잘 드러납니다. 자연스럽게 그가 이 책에서 곁가지로 자유 놀이를 언급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학업 성적 증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너무도 쉽게 ‘자유 놀이’는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학업 성적을 올리기 위해 스마트폰과 SNS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제로 자유 놀이를 지지할 까닭은 적거나 없습니다. 쉽게 말해 공부에 방해되니 스마트폰과 SNS를 막자는 것이 그의 본론이며 자유 놀이와 위험한 놀이의 긍정은 부록인 듯합니다. 이런 뒤엉킨 사고가 늘 참신함으로 나가는 움직임을 붙잡아 세웁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다음 장에서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교에서 정신 건강뿐만 아니라 학업 성적 증진을 위해 휴대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 주와 연방의 교육부는 학교에서 휴대폰을 금지하는 것이 학생의 정신 건강과 학업 성적에 도움이 되는지 입증하기 위해 그 효과에 대한 연구를 지원할 수 있다.
- 본문 354∼355쪽
결론적으로 저는 자유 놀이 옹호와 스마트폰 금지와 SNS 차단은 서로 모순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모두가 필요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놀이보다 스마트폰보다 SNS보다 더 긴요한 것은 ‘자유와 허용’입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이상하리만큼 일상적 학업 성취 압박과 독려, 지시, 관리, 제지, 경쟁, 따돌리기, 집단 괴롭힘, 모욕으로 인해 불안과 우울을 호소하는 현상에 관한 내용은 부족하다는 점에 의아했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학력 증진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다르면 조너선 하이트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건 안 돼! 그것은 금지야! 공부하는 데 방해 돼! 핸드폰 하고 SNS 하는 시간 아깝지 않니?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해서 성적이나 올려라!”라고 말하는 성인과 무엇이 다른지 점점 알 수 없어집니다. 조너선 하이트의 다음 문장을 보면 그의 생각이 정확히 학력에 맞추어져 있음이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❹ 독립은 방해받고 수동적인 배움의 환경에 노출되어 불안과 우울이 늘어나고 있음에 그도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고통이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학력도 올려야 하고 스마트폰과 SNS로 사회적 인정도 확보해야 하는 이중고의 늪에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할수록 탈진할 수밖에 없는 우리 교육과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화상입니다.
교수로서 나는 학업 성적을 높이기 위한 개혁을 적극 찬성한다.
- 본문 380쪽
화성 그리고 영성
한 인터뷰에서 조너선 하이트가 “종교가 없는 아이들은 인터넷의 바다에 쓸려 내려간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왜 종교와 영성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지 의아했습니다. 책 앞쪽의 엉뚱한 화성 비유도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주관적인 내용이라 8장에 관해 언급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시 8장 〈영적 고양과 퇴화〉를 읽고 나서 써야 했습니다. 조너선 하이트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스마트폰과 SNS에 조정당하는 꼭두각시로 보는 확증을 멈추고 ‘자비심’❺과 만났으면 합니다. 경쟁과 비교로 엉클어진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들의 극한의 좌절과 절망과 고독과 선택할 수 없음과 자유의 소거가 스마트폰과 SNS로 넘어가게 만드는 강력한 경로임을 한 번 더 천착해 주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스마트폰과 SNS를 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아프고 망가진 인간으로 낙인찍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 경쟁과 입시와 등수와 압도적인 해야 할 것의 무한 반복 속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견디고 숨 쉬고 있는지 마주해야 합니다. 만약 가까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면 스마트폰 금지와 SNS 차단이라는 재앙을 처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8장에 영향을 받아 한 말씀 보탭니다. 영성이 남에게 적용하는 수단이 되면 위험합니다. 영성은 오로지 자신을 보는 수단으로서만 유용합니다. 영성을 타인에게 적용하려고 할 때 변고가 일어납니다. 지금은 스마트폰과 SNS 가까이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향한 불안과 걱정을 잠시 거두고 이해와 자비심을 가지고 바라볼 때인 것 같습니다. 선택과 결정이 모두 막힌 세계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에 얼마나 많은 위로와 응원을 받고 있는지 차분히 보는 것이 먼저라 생각합니다. 음악과 춤은 하루의 피로와 부자유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차가운 샘물과 선선한 바람과 같은데, 스마트폰과 SNS 없이 어떻게 춤과 음악의 해방된 세계에 잠시나마 즉시 연결될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 노래는 어디서 듣고 춤은 어디서 보고 흔드냐는 말입니다. 지금은 음악과 춤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영성을 만들고 있지 않나요? 금지하고 차단한다면 그들 삶의 풍성함은 훼손되고 각박해질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SNS의 해악도 보지만 유익함도 함께 볼 수 있는 사려 깊은 성인이 어린이와 청소년 주변에 늘었으면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쉽게 깨지거나(fragile) 망가지지 않는다
그 결과로 뇌에서 재배선이 일어나는 가장 민감한 시기에 그들이 아동과 청소년을 쥐처럼 훈련시키도록 방치했다.
- 본문 206쪽
이 문장을 읽으면서 조너선 하이트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떻게 보는지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수동적이지 않으며 성인과 사회가 그들에게 이식하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비판적이라는 것이 저의 오랜 어린이와 청소년을 만난 경험에서 나온 성찰입니다. 겉으로는 백지처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떤 식으로든 거르고 재구성합니다.
성인과 테크 기업과 엔터 기업이 모여 온갖 함정을 파고 전략을 짜도 어린이와 청소년은 자신만의 경로와 서식지를 만듭니다. 이미 조심할 것을 조심하고 있습니다. 위험한 것도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곳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지도 경험을 통해 데이터를 모아 둡니다. 무슨 까닭인지 조너선 하이트는 이런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의식과 결정력과 회복력에 관해 신뢰하는 내용이 적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쥐처럼 훈련’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자주 나올 때 모욕을 느꼈습니다.
왜 그들은(남자아이) 현실 세계에서 위험을 피하게 되었을까?
- 본문 273쪽
위험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와 여기서 갈립니다. 남자아이들은 위험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과 만날 수 있는 국면과 차단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현실 속에서 위험과 만나고 다룰 기회를 누군가, 무엇이 소거시켰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상 세계의 위험이라도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왜 문제인가요?
2010년대 초반에는 스마트폰을 가진 청소년은 깨어 있는 시간 내내 회사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 본문 276쪽
그들을 땅에 고정하고 영양분을 공급해 줄 뿌리가 전혀 없다. 그들을 제약하고 성인기로 가는 길을 안내할 분명한 규범도 없다.
- 본문 289쪽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리석거나 고립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사람과 기관이 없어도 언제나 어디서나 배울 만큼 지혜가 있습니다. 배우려면 대상과 연결되어야지 금지하고 차단되어서는 좋음도 나쁨도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테크 기업이나 엔터 기업 위에 올라설 전술과 전략을 짜는 활발한 협업을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상부를 조정하는 막강한 영향력의 주도권을 쥐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조너선 하이트는 먹잇감이 되었다고 단언하는 것일까요? 그가 대상으로 보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기 조정과 비판적 사고를 믿지 못해서인지 모릅니다. 그가 3장에서 길게 강조한 안티프래질(antifragile)의 의미를 다시 떠올리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그는 말할 것입니다.
소셜 미디어의 장기간 사용 또는 과도한 사용이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이득을 준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젊은이들이 인스타그램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2013년에 전 세계 각지에서 정신 건강 향상과 행복의 물결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 본문 208쪽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신 건강에 이득이 안 되는 것은 다 금지해야 하나요? 어린이와 청소년 모두가 날마다 행복의 물결에 휩싸여 지내야 하나요? 혼돈과 갈등과 손상과 회복은 안티프래질의 서식지가 아닌가요? 앞에서 비슷한 말을 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해 간섭하고 관리하고 금지하려는 위치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도 좋은 선택지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테크 기업에게는 친근한 말투를 쓰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준엄한 불호령을 내리는 건가요? 제가 말을 여태 못 알아듣는다며 그는 또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11세 아동은 인터넷에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장의 요지는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가 놀이 기반 아동기를 대체한 아동기 대재편이 청소년 정신 질환이라는 국제적 유행병의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 본문 210쪽
저도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과장으로 버무려지고 편집된 스마트폰과 SNS 금지와 제한에 대한 주장으로 양육자와 어린이와 청소년의 시야를 흐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의 주장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고 지금은 스마트폰과 SNS의 취약성과 유용함에 관한 균형 잡힌 접근이 긴요합니다. 팬데믹 때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악영향만을 준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당시 그마저도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 봅시다. 더불어 학교에 가지 않아 경쟁과 학업과 또래 압력에서 해방감을 느낀 어린이와 청소년이 많았음도 새삼스럽게 헤아려져야 합니다. 오늘을 사는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은 시간과 공간과 친구의 많은 부분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학습과 경쟁과 차별에 최적화한 시스템을 성인과 사회와 제도가 힘을 모아 구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바쁨과 시간 없음 속에서, 친구를 실시간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조차 마련하기 어려워 그나마 SNS로 우정을 쌓고 소통하려는 처절한 자발적 몸부림까지 왜 막아서려는 것일까요?
온라인 포르노와 달리, 연구자들은 비디오게임을 하는 청소년이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부 연구는 비디오게임이 작업 기억 향상, 반응 억제, 심지어 학교 성적을 포함한 인지 기능과 지적 기능 향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한 실험은 우울증 증상이 있는 실험군에게 일주일에 세 차례, 한 번에 30분씩 한 달 동안 비디오게임을 하게 했더니 증상이 상당히 감소하는 결과를 얻었다. 다른 연구들에서는 서로 협력하는 게임을 하면 게임 밖에서도 협력이 잘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본문 282쪽
그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게임의 부정적인 면은 아직 충분히 실증적으로 검증된 바 없으며 게임의 긍정적인 면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SNS가 게임과 같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그럴 수 있지만 스마트폰이나 SNS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도 섣부른 일입니다. 나아가 지금은 게임과 스마트폰과 SNS의 경계와 구분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입니다. 저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이 세 가지가 모두 절실하고 유용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자유 놀이’와의 친연성 또한 매우 높았음을 밝힙니다.
스마트폰 사용 금지와 SNS 접속 차단은 당사자인 어린이와 청소년과 먼저 상의할 일이지 양육자와 교사와 테크 기업에 투척할 주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양육자와 교사는 지쳐 있고 테크 기업은 대화의 창구를 폐쇄하고 숨어 버린 상태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스마트폰과 SNS 사용에 관한 걱정과 불안을 거두고 그들이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그들이 사는 세상에 도착한 기술과 도구를 어떻게 안전하게 주인으로 쓸 것인지에 관한 사려 깊은 안내가 긴요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이 모든 난관에 포위된 듯이 보이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헤쳐 나갈 용기가 있고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할 만큼 유능합니다.
그는 자신이 제안한 네 가지 실천 방안을 성공시키기 위해 크게 말하고 연결하라고 조언합니다. 덧붙여 저는 작고 낮게 말하고 성인이나 단체나 입법과 연결하기 전에 어린이나 청소년과 연결을 권하고 싶습니다. 지금보다 스마트폰과 SNS를 잘 쓰는 것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건강한 환경이 필요한 것이지 금지하거나 차단하는 것은 분명 퇴행이라는 말씀을 길게 하고 말았습니다.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은 이제 ‘디폴트’가 아닐는지요? 우리 사회가 긴 시간 묻어 두었던 여러 이야기를 꺼내고 따져 보고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불안 세대》의 미덕은 여럿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아야 한다.
- 본문 320쪽
그러려면 독립적 사고가 필요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배움과 성장의 환경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긴요합니다. 그리고 그 환경은 다양합니다. 자유 놀이가 될 수도 있고 위험한 놀이터일 수도 있고 게임일 수도 있고 SNS일 수도 있고 스마트폰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 모든 것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통제력을 가늠하고 기를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SNS와 게임에 관한 걱정과 공포와 혐오 또한 행위 주체인 어린이와 청소년의 통제력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가 찾아질 것입니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허용적인 환경, 금지와 간섭과 제지가 덜한 관계와 태도가 긴요합니다. 걱정하며 이것저것을 금지하다 보면 어린이와 청소년은 실감과 만날 수 없습니다. 규제와 금지와 제한과 간섭과 관리와 감독만으로는 참신함으로 나아가기 어렵습니다. 위험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이 통제될 수 있는 자장 안에 있음을 자각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단절과 절망과 두려움을 안기는 것에 신중하고 그들의 가능성으로 무게 중심을 서서히 이동하는 것이 건설적이지 않을까요?
치밀하게 관리하고 공모하여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유와 선택을 빼앗는 데 성공한 뒤로 이제는 스마트폰마저 금지하고 SNS도 차단하겠다고 합니다. 다음은 또 그들에게서 무엇을 금지하고 차단할 건가요? 금지하고 차단할 것이 더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이제 그 정도 합시다. 지금보다 더 인색해지지는 맙시다.
❶
〈역대 최악 10대 행복지수, 해외에서 청소년 SNS를 금지한 진짜 이유?(ft. 조너선 하이트 박사) | 불안세대〉, 조승연의 탐구생활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watch?v=ig7tgxOJ_Ck
❷
Odgers, C. L.(2024), 〈The great rewiring: is social media really behind an epidemic of teenage mental illness?〉, Nature, 628(8006), pp. 29-30. www.nature.com/articles/d41586-024-00902-2
❸
“Inside the debate over The Anxious Generation”, 〈Platformer〉, Apr 11, 2024. www.platformer.news/anxious-generationjonathan-haidt-debate-critique
❹
놀이는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놀이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되새기며 ‘자유놀이옹호가’로 지내고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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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지만 8장의 세계를 빌려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