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기초학력은 교육을 어디로 데려가나
기초학력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글
정은균
jek1015@hanmail.net
전북 군산 영광중 교사
기초학력발 에피소드들
3월 초 어느 날이었다. 기초학력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선생님께서 메시지 하나를 보내셨다. 점심 식사 후에 교장실에서 기초학력 방과 후 수업 개설 여부를 놓고 협의회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석 대상자 명단에는 각 학년 학년부장, 연구부장, 교장과 교감이 적혀 있었다. 입학식을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새 학년 초였고, 나는 올해 신입생 학급 담임과 학년부장을 동시에 맡아 입학식 전부터 여러 협의회며 워크숍이며 간담회에 참석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교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교장, 교감과 연구부장이 요청 사항을 먼저 이야기했다. 각 학급 담임과 교과 담당 교사들이 앞장서서 참여 희망 학생을 조사하여, 기초학력 방과 후 교육 활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최종 명단을 확정하여 활동반을 구성하는 데 협조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교육 활동의 일정과 기한, 방법, 운영 시간과 예산 규모 등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작년에 관련 업무를 총괄한 연구부장이 기초학력 방과 후 예산 규모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간 학교 현장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전반적으로 만족감을 주고 있는 자유학기제 관련 예산이 작년 대비 반 토막 난 게 그 때문은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기초학력발 에피소드는 계속 이어졌다. 3월 중순 교장실에서 기초학력 진단 평가 실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각 학년 학년부장과 담당 업무 교사, 연구부장, 교장과 교감 등이 참석하는 긴급 회의가 열렸다. 학교에서 불요불급한 일에 ‘긴급’이라는 딱지를 붙여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 일정을 전하는 전화를 받으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연구부장이 미리 준비한 회의 자료를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전라북도교육청 학교교육과에서 발송한 “맞춤형 학업성취도 자율평가와 기초학력진단검사 연계 활용 방안 안내”라는 제목의 공문이었다. 맞춤형 학업 성취도 자율 평가 응시 결과 ‘1수준 판정’을 받은 학생을 대상으로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통한 정밀 진단을 실시한 후 기초학력 도달 여부를 판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해당 학생에 관한 학습 지원 이력 관리, 보정 지도 및 향상도 판정 등을 실시하는 순서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활용 방안이 적혀 있었다. 맞춤형 학업 성취도 평가를 자율 평가 방식으로 실시하고, 기초학력 진단 검사 실시 여부를 그 응시 결과에 따라서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자율 결정 사항’이란 부분을 근거로 들어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실시하지 말자고 의견을 냈다.
곧이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먼저 지역 내 다수의 중학교에서 진단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정보가 있으니 우리 학교 역시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다. 보호자들이 기초학력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는 심리를 고려하여 적절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현실적인 불가피함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1학년은 신입생으로서 개인별 기초학력 도달 수준을 포함하여 학년 전체적으로 학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만한 참고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담임이나 교과 교사들이 학생을 상대로 학업 문제를 놓고 상담을 하거나 수업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몇 차례 오고간 끝에 애초 검사 실시에 부정적인 기류가 우세했던 분위기가 바뀌어, 전체 학년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결국 3월 하순경에 전체 학년 대상으로 국어, 영어, 수학 교과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나는 검사 실시 결과가 검사 취지에 맞는 경우에만 활용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학생이나 학급 간 성적 비교나 우열 심리를 조장하는 데 활용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함을 강조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학교 복지실에서 날아든 기초학력발 에피소드는 입학식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에 발생하였다. 학교 내 복지 프로그램 지원과 사업 관리를 총괄하는 전문 복지사가 1학년 학생 중 경계선 지능 학생 지원 사업을 홍보하면서 이에 따른 참여 희망 학생을 조사하여 신청 여부를 결정해 알려 달라고 했다. 그 정식 사업명은 “2023년 경계선 지능 아동(느린 학습자) 사회적응력 향상 지원 사업 ‘나.아.가.기’ 사업교 모집 안내”로, 한국학교사회복지사협회에서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부랴부랴 1학년 담임 교사 협의회를 열었으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학생들의 학력 및 지능에 관한 어떤 공식적인 자료도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담임들이 보기에 경계선 지능 아동‘처럼’ 보이는 학생을 점찍어 보는 식으로 논의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학생 몇 명을 특정하고, 담임 교사가 해당 학생들과 보호자들에게 신청 희망 여부를 알아 본 뒤 최종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가 있으면 복지실에 명단을 제공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협의회를 마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2022년 10월 교육부 교육기회보장과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제1차 기초학력 보장 종합 계
획 2023~2027〉(〈기초학력 종합 계획〉)❶에서는 기초학력 진단 및 선정 현황이나 문제점을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로 경계선 지능 아동이나 읽기 곤란 학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단위 학교에서 대상 아동이나 학생을 선정하는 데 필요한 진단 검사 도구가 부족하여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는 내용, 기존 도구가 학생 수준이나 능력에 따른 개인별 맞춤형 정밀 진단에 한계가 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복지 관련 직능 단체에서 일부 학교를 모집하여 지원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선정된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며칠 뒤 신청 희망 학생 명단을 복지실에 보내면서도 이런 불편한 마음이 깔끔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초학력의 기초와 기본은?
교육부는 〈기초학력 종합 계획〉을 야심차게 내놓으면서 추진 배경의 하나로 개인의 삶과 사회 발전을 위한 기초학력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면서 기초학력이 개인의 존엄을 지키고 사회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자, 근래에는 인권으로서의 의미까지 부각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교육부는 기초학력에 관한 지역 간 격차 해소나 지원 사각지대 해소, 국가 및 시·도교육청의 책무성을 확보할 필요성도 언급하였다. 2017년과 2021년의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 1수준(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대비해 보면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모두 증가 추이를 보이고 있는 점❷을 고려할 때 정부에서 기초학력 보장과 지원을 위한 종합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당연하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교육 의제로서 기초학력 문제 자체를 등한시하거나 깎아내릴 까닭이나 명분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가령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를 불문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모든 학생의 기초학력을 보장한다는 〈기초학력 종합 계획〉의 비전이 보통·의무교육을 기조로 하는 현대 공교육 시스템의 중요한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역 간 또는 계층 간 격차에 따라 기초학력 수준이 격차를 보이고, 이것이 다시 교육 불공정이나 사회적인 불평등 구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기초학력 수준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적절한 지원책을 마련하는 일은 시급하고도 중요하다.
그런데 실제 기초학력과 관련된 담론이나 정책 추진 방향이 이런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와 관련해서는 비판적으로 살펴볼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 정책의 기초나 기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기초학력을 포함하여 이와 관련된 몇 가지 기본 용어의 개념 정의를 둘러싼 문제부터 살펴보자.
‘기초’와 ‘학력’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일반 명사로 누구든지 그 뜻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정책이나 제도 담론의 장 안으로 들여와 쓸 때에는 개념 정의를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초학력과 관련된 정책과 제도를 수립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교육 주체들 사이에 언제든 혼선이 일어나고,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초학력을 포함하는 관련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 보자.
① “기초학력”이란 「초·중등교육법」 제2조에 따른 학교의 학생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통하여 갖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성취 기준을 충족하는 학력을 말한다.
- 「기초학력 보장법」 제2조 제1호
② 「기초학력 보장법」 제2조 제1호에 따른 “최소한의 성취 기준”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43조 제1항에 따른 국어, 수학 등 교과의 내용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필요한 읽기·쓰기·셈하기를 포함하는 기초적인 지식, 기능 등으로 한다.
- 「기초학력 보장법 시행령」 제2조 제1항
③ “학습지원대상학생”이란 학교의 장이 기초학력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여 제8조 제1항에 따라 선정된 학생을 말한다.
- 「기초학력 보장법」 제2조 제2호
④ 학교의 장은 기초학력진단검사 결과와 학급 담임 교사 및 해당 교과 교사의 추천, 학부모 등 보호자에 대한 상담 결과 등에 따라 학습지원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을 학습지원대상 학생으로 선정할 수 있다.
- 「기초학력 보장법」 제8조 제1호
①은 ‘기초학력’의 개념을 정의한 것이다. ②는 ①에 따라 정의한 “최소한의 성취 기준”의 개념이다. 「기초학력 보장법 시행령」 제2조 제2항을 보면 교육부 장관은 “최소한의 성취 기준”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고, 이를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 포함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③은 기초학력 교육의 대상 학생인 ‘학습지원대상학생’의 개념이다. 이들 학생은 ④의 절차에 따라 선정된다.
이런 정의를 표면적으로 보면 최소한의 형식적인 개념 정의 요건이나 절차적 합리성을 충족하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문제가 적지 않다. 기초학력 개념의 핵심은 “최소한의 성취 기준”이다. 그런데 작년에 나온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는 “최소한의 성취 기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최소한의 성취 기준”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❸ 기초학력 수준 도달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이 부재한 상태에서 기초학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학습지원대상학생)이 자의적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것이다.
현재 기초학력 미도달 학생, 또는 경계선 지능 학생 등 학습지원대상학생을 선별하는 방식이나 절차는 지필 평가 형태의 진단 검사와 교사의 관찰 및 면담 결과, 세부 체크리스트 활용 방법 등으로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교육부에서도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서 학습 지원 대상 학생 선정 절차를 체계화한다는 명목으로 학교 단위의 기본 진단과 교육(지원)청 단위의 통합적이고 전문적인 심층 진단 절차를 구별한다. 그런데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대상 학생 선별 절차가 보여 주기식으로 이루어질뿐더러, 선별을 위한 검사 방식도 그다지 다채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역과 학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학년 초 실시하는 진단 검사가 학교 간 눈치 보기나 보호자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검사 도구가 대부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실시하는 지필 평가 형태로 되어 있고, 검사 결과를 표시하는 방식이 수치화된 점수와 석차 위주로 되어 있어 학교나 교사들 사이에서 학생 간 우열을 비교하는 자료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학교 간 서열화와 이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의 왜곡과 변형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전라북도교육청의 경우에는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이 두드림 학교(공통 영역), 기초학력 보장 선도·시범 학교(공모 영역), 학습 지원 튜터(공모 영역), 교과 보충 프로그램(공모 영역) 등으로 나뉘어 분산되어 있다. 이들은 사업 영역이 상이하고 세부 내용 또한 달라 각 사업이 갖는 의미나 효과를 일률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기초학력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이에 따라 공통 영역과 공모 영역에 포함되는 대상 학생이 중복되거나 비슷비슷한 성격의 예산이 동일 학교에 중복 투입되면서 불요불급한 예산이 남용되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교사들이 기초학력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홍보를 하거나, 때로 학생들이나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강하게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서❹ 기초학력 관련 업무가 학년 초 담임 교사나 교과 교사들이 기피하는 업무처럼 간주되는 현실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기초학력 의제의 정치성
지난 5월 15일 서울시의회에서 의장 직권으로 「서울시 기초학력 보장 지원에 관한 조례」(「서울시 기초학력조례」)를 공포함으로써 지난가을 이후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 사이에서 벌어진 학력 문제로 인한 갈등의 ‘1차전’이 일단락되었다. 두 기관 사이의 갈등은 학생들의 기초학력 진단 검사 결과를 학교별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서울시의회 서울교육 학력향상 특별위원회에서 2월 14일 이 조례를 앞장서서 제안하였고,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국민의힘에서 주도하여 3월 10일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4월 3일 “법 위반 소지가 있다”라며 재의를 요구했으나, 서울시의회가 5월 3일 임시 본회의에서 조례를 재의결하자 서울시교육청은 5월 22일 대법원에 조례안 무효확인 소송과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서울시 기초학력조례」가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선 까닭은 학교 서열화, 학교 간 과도한 경쟁 유발, ‘묻지 마’식 점수 올리기를 위한 문제 풀이 수업 등의 문제점들 때문일 것이다. 실제 「서울시 기초학력조례」에는 개별 학교에서 기초학력 진단 검사 결과를 공개할 수 있고, 교육감은 그 결과를 공개한 학교에 포상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결과 공개와 포상 등은 학교장이나 교육감의 결정 사항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있어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부 학교에서 결과를 공개할 경우 자기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결과 공개를 원하는 보호자들의 요구를 단위 학교에서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 방법이나 방향을 찾는 일이 세간에 떠도는 근거 없는 풍문이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 생태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로지 교육 때문에 일어난 교육만의 일이 아니며, 학생들이 학교 교문을 통해 들고 들어오는 대상이 교과서와 책가방만은 아니다. 교육, 특히 공교육 기관은 온갖 사회적 이슈와 현상의 집약체이거나 반영물일 때가 많다. 그러나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 의제는 이러한 일반적인 시각과 정확하게 상반되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확산된다.
‘학력’에 관한 담론을 퍼뜨리는 이들은 기초학력에 관한 한 모든 책임을 학교와 교사가 져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학교와 교사가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교의 책무성을 높이기 위해 학교와 교사를 채근하는 당근과 채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꼼꼼한 현실 진단이나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막연히 퍼져 있는 인식에 기반하여 학력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막연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기반으로 학력 관련 정책을 밀어붙이는 식이다.
나는 앞서 소개한 서울시의회의 사례가 이런 점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조례 제정을 앞장서서 주도한 서울시의회의 위원회 명칭에는 ‘학력 향상’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서울시 학생들의 학력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전제된 표현이다.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은 학교장에게 결과 공개 결정 권한을 부여한 이유로, “학부모 대다수가 자녀의 학력을 알고 싶어 한다”라며 그 ‘대다수’의 근거는 “국민의힘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준 선거의 결과”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초’니 ‘학력’이니 하는 용어들 자체는 비정치적이다. 그러나 다른 교육 이슈도 그렇지만 기초학력과 관련된 교육 의제만큼 현실 정치의 자장 안에 강하게 갇혀 있는 교육 이슈도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력을 말하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대체로 학력의 기초를 제대로 규정하여 이를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책임지고 보장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메시지에서 정치적 각축이 일어날 수 있는 측면이나 갈등 요소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곳이니, 학력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일은 학교의 근본적인 존재 의의를 보증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기초)학력’ 관련 교육 의제는 진보 진영보다 보수 진영에서 선점해 강조하는 교육 사안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보수=학력 중시, 진보=학력 경시’라는 등식이 이미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강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보아도 될 정도의 수준이다.
한편에서 교육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진보 교육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해서 전반적으로 학력 하향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며 목소리를 높이면, 반대편에서 교육의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학력은 당신들이 말하는 단순한 문제 풀이 능력과 질적으로 다르므로 학력 저하는 정치적 마타도어에 불과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곧이어 학력 이슈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다른 모든 교육 이슈를 집어삼키는 힘을 갖는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사회적인 파동과, 작년 치른 교육감 선거에서 이른바 진보 교육(감)에 대한 안티테제의 하나로 보수 성향의 교육감 후보 측에서 불을 붙인 학생들의 학력 저하 이슈는 기초학력을 포함한 학력 관련 이슈의 강력한 정치적 폭발력을 방증한다.
실상 우리는 기초나 학력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어떤 관점에서 정리할 것인지, 나아가 기초학력 수준 도달 여부를 진단하고 판정하기 위한 기준을 정하거나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등을 숙고할 때, 정치적인 영향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다. 학력과 기초학력이 엄밀하게 보면 서로 구별되는 개념이면서도 교육을 둘러싼 정치·사회적인 토론이나 교육감 선거와 같은 정치 활동 절차에서 별다른 구별 없이 쓰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점도 기초학력 이슈의 정치성을 함축하는 측면이다.
기초학력 수준 미도달 학생, 학습 더딤 학생❺, 경계선 지능 아동(느린 학습자) 등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력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쓰이고 있는 명칭들이다. 이들이 이렇게 일반 학생들과 다르게 분류되면서 특별한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선천적으로 학력 수준이 낮거나 학업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학습자 개개인의 학습 속도는 개별 학습자의 지능이나 태도 등 생득적이고 내재적인 유전 요인보다 후천적이고 외재적인 사회·경제적 요인, 이를테면 부모나 보호자의 경제력, 가족(집안)의 문화적 배경이나 자본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력이나 기초학력 문제를 고민하면서 굳건히 지켜야 하는 기조나 철학이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기초학력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인 해법의 방향도 이런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❶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 82-3과 국정과제 82-5(“모든 학생이 최소한의 학습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국가·교육청·학교가 체계적인 기초학력 보장과 교육 결손 해소를 위한 효율적인 정책 추진 방안 마련”)를 기반으로 마련되었다. 국가·지역·학교로 이어지는 기초학력 보장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추진 배경 아래 국가(교육부) 단위 종합 계획, 지역(교육청) 단위 시행 계획, 학교 단위 운영 계획을 만들어 시행하는 시스템이다. 종합 계획은 5년 주기로, 시행 계획과 운영 계획은 매해 수립된다.
❷ 국어, 수학, 영어 중 증가율이 가장 높은 교과를 보면, 중3에서는 국어가 2.6%에서 6.0%로, 고2에서는 영어가 4.1%에서 9.8%로 증가하였다.
❸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새 교육과정”인 2022 개정 교육과정 적용 시기에 맞추어 초등 1~2학년군은 2023년 12월, 초등 3~4학년군과 중등 1~3학년군과 고등 1학년은 2024년 12월, 초등 5~6학년군은 2025년 12월에 “최소한의 성취 기준”이 제공될 예정이다.
❹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목적성 사업으로 분류되므로 교육 당국에서 내려보낸 예산을 모두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산 규모에 맞춰 대상 학생 숫자를 채우거나 해야 한다.
❺ 이 용어는 「전라북도교육청 학습더딤학생 교육 지원 조례」 제2조 제1호에 등장한다. 「초·중등교육법」 제28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학생(“성격 장애나 지적(知的) 기능의 저하 등으로 인하여 학습에 제약을 받는 학생 중, 학습 장애를 지닌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지 아니한 학생”)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특집 / 기초학력은 교육을 어디로 데려가나
기초학력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글
정은균
jek1015@hanmail.net
전북 군산 영광중 교사
기초학력발 에피소드들
3월 초 어느 날이었다. 기초학력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선생님께서 메시지 하나를 보내셨다. 점심 식사 후에 교장실에서 기초학력 방과 후 수업 개설 여부를 놓고 협의회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참석 대상자 명단에는 각 학년 학년부장, 연구부장, 교장과 교감이 적혀 있었다. 입학식을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새 학년 초였고, 나는 올해 신입생 학급 담임과 학년부장을 동시에 맡아 입학식 전부터 여러 협의회며 워크숍이며 간담회에 참석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교장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교장, 교감과 연구부장이 요청 사항을 먼저 이야기했다. 각 학급 담임과 교과 담당 교사들이 앞장서서 참여 희망 학생을 조사하여, 기초학력 방과 후 교육 활동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최종 명단을 확정하여 활동반을 구성하는 데 협조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어 교육 활동의 일정과 기한, 방법, 운영 시간과 예산 규모 등에 관한 논의가 이어졌다. 작년에 관련 업무를 총괄한 연구부장이 기초학력 방과 후 예산 규모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그간 학교 현장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고, 학생과 교사들에게 전반적으로 만족감을 주고 있는 자유학기제 관련 예산이 작년 대비 반 토막 난 게 그 때문은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기초학력발 에피소드는 계속 이어졌다. 3월 중순 교장실에서 기초학력 진단 평가 실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각 학년 학년부장과 담당 업무 교사, 연구부장, 교장과 교감 등이 참석하는 긴급 회의가 열렸다. 학교에서 불요불급한 일에 ‘긴급’이라는 딱지를 붙여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 일정을 전하는 전화를 받으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연구부장이 미리 준비한 회의 자료를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전라북도교육청 학교교육과에서 발송한 “맞춤형 학업성취도 자율평가와 기초학력진단검사 연계 활용 방안 안내”라는 제목의 공문이었다. 맞춤형 학업 성취도 자율 평가 응시 결과 ‘1수준 판정’을 받은 학생을 대상으로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통한 정밀 진단을 실시한 후 기초학력 도달 여부를 판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해당 학생에 관한 학습 지원 이력 관리, 보정 지도 및 향상도 판정 등을 실시하는 순서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활용 방안이 적혀 있었다. 맞춤형 학업 성취도 평가를 자율 평가 방식으로 실시하고, 기초학력 진단 검사 실시 여부를 그 응시 결과에 따라서 결정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자율 결정 사항’이란 부분을 근거로 들어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실시하지 말자고 의견을 냈다.
곧이어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먼저 지역 내 다수의 중학교에서 진단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정보가 있으니 우리 학교 역시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왔다. 보호자들이 기초학력 문제에 대해 불안해하는 심리를 고려하여 적절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현실적인 불가피함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1학년은 신입생으로서 개인별 기초학력 도달 수준을 포함하여 학년 전체적으로 학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만한 참고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담임이나 교과 교사들이 학생을 상대로 학업 문제를 놓고 상담을 하거나 수업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몇 차례 오고간 끝에 애초 검사 실시에 부정적인 기류가 우세했던 분위기가 바뀌어, 전체 학년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결국 3월 하순경에 전체 학년 대상으로 국어, 영어, 수학 교과 기초학력 진단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나는 검사 실시 결과가 검사 취지에 맞는 경우에만 활용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학생이나 학급 간 성적 비교나 우열 심리를 조장하는 데 활용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함을 강조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학교 복지실에서 날아든 기초학력발 에피소드는 입학식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지난 시점에 발생하였다. 학교 내 복지 프로그램 지원과 사업 관리를 총괄하는 전문 복지사가 1학년 학생 중 경계선 지능 학생 지원 사업을 홍보하면서 이에 따른 참여 희망 학생을 조사하여 신청 여부를 결정해 알려 달라고 했다. 그 정식 사업명은 “2023년 경계선 지능 아동(느린 학습자) 사회적응력 향상 지원 사업 ‘나.아.가.기’ 사업교 모집 안내”로, 한국학교사회복지사협회에서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부랴부랴 1학년 담임 교사 협의회를 열었으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학생들의 학력 및 지능에 관한 어떤 공식적인 자료도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담임들이 보기에 경계선 지능 아동‘처럼’ 보이는 학생을 점찍어 보는 식으로 논의를 이어 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학생 몇 명을 특정하고, 담임 교사가 해당 학생들과 보호자들에게 신청 희망 여부를 알아 본 뒤 최종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가 있으면 복지실에 명단을 제공하자고 결론을 내리고 협의회를 마쳤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2022년 10월 교육부 교육기회보장과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제1차 기초학력 보장 종합 계
획 2023~2027〉(〈기초학력 종합 계획〉)❶에서는 기초학력 진단 및 선정 현황이나 문제점을 보여 주는 사례 중 하나로 경계선 지능 아동이나 읽기 곤란 학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단위 학교에서 대상 아동이나 학생을 선정하는 데 필요한 진단 검사 도구가 부족하여 실질적인 지원을 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는 내용, 기존 도구가 학생 수준이나 능력에 따른 개인별 맞춤형 정밀 진단에 한계가 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록 복지 관련 직능 단체에서 일부 학교를 모집하여 지원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선정된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며칠 뒤 신청 희망 학생 명단을 복지실에 보내면서도 이런 불편한 마음이 깔끔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기초학력의 기초와 기본은?
교육부는 〈기초학력 종합 계획〉을 야심차게 내놓으면서 추진 배경의 하나로 개인의 삶과 사회 발전을 위한 기초학력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면서 기초학력이 개인의 존엄을 지키고 사회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자, 근래에는 인권으로서의 의미까지 부각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교육부는 기초학력에 관한 지역 간 격차 해소나 지원 사각지대 해소, 국가 및 시·도교육청의 책무성을 확보할 필요성도 언급하였다. 2017년과 2021년의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 1수준(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대비해 보면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모두 증가 추이를 보이고 있는 점❷을 고려할 때 정부에서 기초학력 보장과 지원을 위한 종합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당연하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교육 의제로서 기초학력 문제 자체를 등한시하거나 깎아내릴 까닭이나 명분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가령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를 불문하고, 국가가 책임지고 모든 학생의 기초학력을 보장한다는 〈기초학력 종합 계획〉의 비전이 보통·의무교육을 기조로 하는 현대 공교육 시스템의 중요한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역 간 또는 계층 간 격차에 따라 기초학력 수준이 격차를 보이고, 이것이 다시 교육 불공정이나 사회적인 불평등 구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면 기초학력 수준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적절한 지원책을 마련하는 일은 시급하고도 중요하다.
그런데 실제 기초학력과 관련된 담론이나 정책 추진 방향이 이런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와 관련해서는 비판적으로 살펴볼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 정책의 기초나 기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기초학력을 포함하여 이와 관련된 몇 가지 기본 용어의 개념 정의를 둘러싼 문제부터 살펴보자.
‘기초’와 ‘학력’은 일상적으로 자주 쓰이는 일반 명사로 누구든지 그 뜻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들을 정책이나 제도 담론의 장 안으로 들여와 쓸 때에는 개념 정의를 엄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초학력과 관련된 정책과 제도를 수립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교육 주체들 사이에 언제든 혼선이 일어나고,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기초학력을 포함하는 관련 용어들이 어떻게 정의되어 있는지 보자.
① “기초학력”이란 「초·중등교육법」 제2조에 따른 학교의 학생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 교육과정을 통하여 갖추어야 하는 최소한의 성취 기준을 충족하는 학력을 말한다.
- 「기초학력 보장법」 제2조 제1호
② 「기초학력 보장법」 제2조 제1호에 따른 “최소한의 성취 기준”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43조 제1항에 따른 국어, 수학 등 교과의 내용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필요한 읽기·쓰기·셈하기를 포함하는 기초적인 지식, 기능 등으로 한다.
- 「기초학력 보장법 시행령」 제2조 제1항
③ “학습지원대상학생”이란 학교의 장이 기초학력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여 제8조 제1항에 따라 선정된 학생을 말한다.
- 「기초학력 보장법」 제2조 제2호
④ 학교의 장은 기초학력진단검사 결과와 학급 담임 교사 및 해당 교과 교사의 추천, 학부모 등 보호자에 대한 상담 결과 등에 따라 학습지원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학생을 학습지원대상 학생으로 선정할 수 있다.
- 「기초학력 보장법」 제8조 제1호
①은 ‘기초학력’의 개념을 정의한 것이다. ②는 ①에 따라 정의한 “최소한의 성취 기준”의 개념이다. 「기초학력 보장법 시행령」 제2조 제2항을 보면 교육부 장관은 “최소한의 성취 기준”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을 정하고, 이를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 포함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③은 기초학력 교육의 대상 학생인 ‘학습지원대상학생’의 개념이다. 이들 학생은 ④의 절차에 따라 선정된다.
이런 정의를 표면적으로 보면 최소한의 형식적인 개념 정의 요건이나 절차적 합리성을 충족하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문제가 적지 않다. 기초학력 개념의 핵심은 “최소한의 성취 기준”이다. 그런데 작년에 나온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는 “최소한의 성취 기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최소한의 성취 기준”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다.❸ 기초학력 수준 도달 여부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기준이 부재한 상태에서 기초학력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학습지원대상학생)이 자의적으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인 것이다.
현재 기초학력 미도달 학생, 또는 경계선 지능 학생 등 학습지원대상학생을 선별하는 방식이나 절차는 지필 평가 형태의 진단 검사와 교사의 관찰 및 면담 결과, 세부 체크리스트 활용 방법 등으로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교육부에서도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서 학습 지원 대상 학생 선정 절차를 체계화한다는 명목으로 학교 단위의 기본 진단과 교육(지원)청 단위의 통합적이고 전문적인 심층 진단 절차를 구별한다. 그런데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대상 학생 선별 절차가 보여 주기식으로 이루어질뿐더러, 선별을 위한 검사 방식도 그다지 다채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우리 지역과 학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학년 초 실시하는 진단 검사가 학교 간 눈치 보기나 보호자에게 보여 주기식으로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겠다. 검사 도구가 대부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실시하는 지필 평가 형태로 되어 있고, 검사 결과를 표시하는 방식이 수치화된 점수와 석차 위주로 되어 있어 학교나 교사들 사이에서 학생 간 우열을 비교하는 자료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학교 간 서열화와 이에 따른 학교 교육과정의 왜곡과 변형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전라북도교육청의 경우에는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이 두드림 학교(공통 영역), 기초학력 보장 선도·시범 학교(공모 영역), 학습 지원 튜터(공모 영역), 교과 보충 프로그램(공모 영역) 등으로 나뉘어 분산되어 있다. 이들은 사업 영역이 상이하고 세부 내용 또한 달라 각 사업이 갖는 의미나 효과를 일률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기초학력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이에 따라 공통 영역과 공모 영역에 포함되는 대상 학생이 중복되거나 비슷비슷한 성격의 예산이 동일 학교에 중복 투입되면서 불요불급한 예산이 남용되는 등의 문제점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교사들이 기초학력 관련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홍보를 하거나, 때로 학생들이나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강하게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서❹ 기초학력 관련 업무가 학년 초 담임 교사나 교과 교사들이 기피하는 업무처럼 간주되는 현실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기초학력 의제의 정치성
지난 5월 15일 서울시의회에서 의장 직권으로 「서울시 기초학력 보장 지원에 관한 조례」(「서울시 기초학력조례」)를 공포함으로써 지난가을 이후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 사이에서 벌어진 학력 문제로 인한 갈등의 ‘1차전’이 일단락되었다. 두 기관 사이의 갈등은 학생들의 기초학력 진단 검사 결과를 학교별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법적으로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서울시의회 서울교육 학력향상 특별위원회에서 2월 14일 이 조례를 앞장서서 제안하였고,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국민의힘에서 주도하여 3월 10일 조례를 통과시켰다. 이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4월 3일 “법 위반 소지가 있다”라며 재의를 요구했으나, 서울시의회가 5월 3일 임시 본회의에서 조례를 재의결하자 서울시교육청은 5월 22일 대법원에 조례안 무효확인 소송과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서울시 기초학력조례」가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선 까닭은 학교 서열화, 학교 간 과도한 경쟁 유발, ‘묻지 마’식 점수 올리기를 위한 문제 풀이 수업 등의 문제점들 때문일 것이다. 실제 「서울시 기초학력조례」에는 개별 학교에서 기초학력 진단 검사 결과를 공개할 수 있고, 교육감은 그 결과를 공개한 학교에 포상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결과 공개와 포상 등은 학교장이나 교육감의 결정 사항이라는 외피를 걸치고 있어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부 학교에서 결과를 공개할 경우 자기 자녀가 다니는 학교의 결과 공개를 원하는 보호자들의 요구를 단위 학교에서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다.
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 방법이나 방향을 찾는 일이 세간에 떠도는 근거 없는 풍문이나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교육 생태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로지 교육 때문에 일어난 교육만의 일이 아니며, 학생들이 학교 교문을 통해 들고 들어오는 대상이 교과서와 책가방만은 아니다. 교육, 특히 공교육 기관은 온갖 사회적 이슈와 현상의 집약체이거나 반영물일 때가 많다. 그러나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 의제는 이러한 일반적인 시각과 정확하게 상반되는 곳에서 만들어지고 확산된다.
‘학력’에 관한 담론을 퍼뜨리는 이들은 기초학력에 관한 한 모든 책임을 학교와 교사가 져야 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학교와 교사가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교의 책무성을 높이기 위해 학교와 교사를 채근하는 당근과 채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꼼꼼한 현실 진단이나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막연히 퍼져 있는 인식에 기반하여 학력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막연한 불안이나 두려움을 기반으로 학력 관련 정책을 밀어붙이는 식이다.
나는 앞서 소개한 서울시의회의 사례가 이런 점들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조례 제정을 앞장서서 주도한 서울시의회의 위원회 명칭에는 ‘학력 향상’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서울시 학생들의 학력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전제된 표현이다. 김현기 서울시의회 의장은 학교장에게 결과 공개 결정 권한을 부여한 이유로, “학부모 대다수가 자녀의 학력을 알고 싶어 한다”라며 그 ‘대다수’의 근거는 “국민의힘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준 선거의 결과”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초’니 ‘학력’이니 하는 용어들 자체는 비정치적이다. 그러나 다른 교육 이슈도 그렇지만 기초학력과 관련된 교육 의제만큼 현실 정치의 자장 안에 강하게 갇혀 있는 교육 이슈도 드물다.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력을 말하면서 강조하는 메시지는 대체로 학력의 기초를 제대로 규정하여 이를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책임지고 보장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메시지에서 정치적 각축이 일어날 수 있는 측면이나 갈등 요소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가 무엇인가를 배우는 곳이니, 학력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일은 학교의 근본적인 존재 의의를 보증하는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기초)학력’ 관련 교육 의제는 진보 진영보다 보수 진영에서 선점해 강조하는 교육 사안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보수=학력 중시, 진보=학력 경시’라는 등식이 이미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강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보아도 될 정도의 수준이다.
한편에서 교육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진보 교육 때문에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해서 전반적으로 학력 하향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며 목소리를 높이면, 반대편에서 교육의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학력은 당신들이 말하는 단순한 문제 풀이 능력과 질적으로 다르므로 학력 저하는 정치적 마타도어에 불과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곧이어 학력 이슈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 다른 모든 교육 이슈를 집어삼키는 힘을 갖는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정치·사회적인 파동과, 작년 치른 교육감 선거에서 이른바 진보 교육(감)에 대한 안티테제의 하나로 보수 성향의 교육감 후보 측에서 불을 붙인 학생들의 학력 저하 이슈는 기초학력을 포함한 학력 관련 이슈의 강력한 정치적 폭발력을 방증한다.
실상 우리는 기초나 학력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어떤 관점에서 정리할 것인지, 나아가 기초학력 수준 도달 여부를 진단하고 판정하기 위한 기준을 정하거나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등을 숙고할 때, 정치적인 영향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를 온전히 유지하기 힘들다. 학력과 기초학력이 엄밀하게 보면 서로 구별되는 개념이면서도 교육을 둘러싼 정치·사회적인 토론이나 교육감 선거와 같은 정치 활동 절차에서 별다른 구별 없이 쓰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점도 기초학력 이슈의 정치성을 함축하는 측면이다.
기초학력 수준 미도달 학생, 학습 더딤 학생❺, 경계선 지능 아동(느린 학습자) 등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초학력과 관련하여 공식적으로 쓰이고 있는 명칭들이다. 이들이 이렇게 일반 학생들과 다르게 분류되면서 특별한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선천적으로 학력 수준이 낮거나 학업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학습자 개개인의 학습 속도는 개별 학습자의 지능이나 태도 등 생득적이고 내재적인 유전 요인보다 후천적이고 외재적인 사회·경제적 요인, 이를테면 부모나 보호자의 경제력, 가족(집안)의 문화적 배경이나 자본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학력이나 기초학력 문제를 고민하면서 굳건히 지켜야 하는 기조나 철학이 이와 같은 사실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기초학력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인 해법의 방향도 이런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❶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 82-3과 국정과제 82-5(“모든 학생이 최소한의 학습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국가·교육청·학교가 체계적인 기초학력 보장과 교육 결손 해소를 위한 효율적인 정책 추진 방안 마련”)를 기반으로 마련되었다. 국가·지역·학교로 이어지는 기초학력 보장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추진 배경 아래 국가(교육부) 단위 종합 계획, 지역(교육청) 단위 시행 계획, 학교 단위 운영 계획을 만들어 시행하는 시스템이다. 종합 계획은 5년 주기로, 시행 계획과 운영 계획은 매해 수립된다.
❷ 국어, 수학, 영어 중 증가율이 가장 높은 교과를 보면, 중3에서는 국어가 2.6%에서 6.0%로, 고2에서는 영어가 4.1%에서 9.8%로 증가하였다.
❸ 〈기초학력 종합 계획〉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새 교육과정”인 2022 개정 교육과정 적용 시기에 맞추어 초등 1~2학년군은 2023년 12월, 초등 3~4학년군과 중등 1~3학년군과 고등 1학년은 2024년 12월, 초등 5~6학년군은 2025년 12월에 “최소한의 성취 기준”이 제공될 예정이다.
❹ 기초학력과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들이 목적성 사업으로 분류되므로 교육 당국에서 내려보낸 예산을 모두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산 규모에 맞춰 대상 학생 숫자를 채우거나 해야 한다.
❺ 이 용어는 「전라북도교육청 학습더딤학생 교육 지원 조례」 제2조 제1호에 등장한다. 「초·중등교육법」 제28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학생(“성격 장애나 지적(知的) 기능의 저하 등으로 인하여 학습에 제약을 받는 학생 중, 학습 장애를 지닌 특수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지 아니한 학생”)이라고 정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