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호[리뷰] 장애학의 시좌에서 본 특수교육 (김도현)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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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장애학의 시좌에서 본 특수교육


윤상원 씀,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교육공동체 벗, 2023


김도현

phare7@naver.com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힘든 장애 학생’이란 표현은 틀렸다

 

장애운동을 하며 처음으로 책이란 걸 내게 되었던 2007년 봄, 저자 인터뷰를 하기 위해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한겨레 사옥의 정문 쪽에는 수십 개의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몸이 불편하신 분은 경비실에 연락해 주세요.” 기자분을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이 안내문의 내용에 대해 언급했다. “오면서 계단에 ‘몸이 불편하신 분은 경비실에 연락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걸 봤다. ‘몸이 불편하신 분’이 아니라 ‘계단 이용이 불편하신 분’으로 고쳐야 한다. 엘리베이터 등의 편의 시설이 설치돼 있으면 몸이 불편할 리 없다.”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를 펼쳐 읽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은 소제목을 접하게 된다. “‘힘든 장애 학생’이란 표현은 틀렸다.” 그리고 저자 윤상원은 이 말이 틀린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특정한 심신의 상태를 ‘정상’이라 가정하고 ‘정상 아동’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사회 문화적 환경 때문에 ‘비정상’ 내지는 ‘장애 아동’이 힘들어지는 것이다.”(본문 33~34쪽)


저자는 서문에서 “여성 차별에 저항하는 학문인 여성학과 같이 장애 차별에 저항하는 학문인”(〈책을 펴내며〉 10쪽) 장애학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책을 압축적으로 소개하자면 ‘장애학의 시좌(視座)에서 본 특수교육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누구를 위해 ∼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장의 형식에 따라, ‘장애’ 명명(1장), 특수학교(2장), 특수 교사(3장), 개별화교육계획(4장), 장애이해교육(5장), 특수교육법(6장), 직업 교육(7장), 약물(8장)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에 대해 비판적으로 심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장애학의 시좌’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펼쳐 든 후 고개를 계속 주억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한나절 만에 완독하게 되었는데, 다 읽고 난 후 장애학 연구활동가로서 가슴 한편이 시원하면서도 묵직해졌다. 아래에서는 주로 (시원함보다는) 그처럼 묵직함을 느껴야 했던 이유를 책의 전반부 내용과 연결시켜 얘기해 보려 한다.


‘누구를 위해’라는 질문

 

학력 중심, 즉 능력주의 중심의 일반학교(급)의 교육 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분리하는 데 특수학교(급)의 존재 이유가 있으며, 특수 교사는 이 같은 능력주의에 기반한 학교 사회의 규범을 ‘보호하기’ 위한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책 전반부의 핵심 주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과 주장은 미셸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라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특수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에게 불편한 진실일 수 있지만, 우리는 불편함으로 인해 눈을 돌리기보다는 그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책에서는 우선 우리나라에서 특수교육이 발전해 왔던 하나의 계기와 경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970년대 중학교 무시험 입학 제도가 도입되면서 기존에 학력고사 성적이 낮아 입학이 불가능했을 학습 부진이라 명명된 학생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학력 중심의 일반학교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특수교육 대상자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분리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1970 년대에 중학교 특수학급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달리 말해, 특수 학급은 학력 중심 일반학교 사회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생하며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책을 펴내며〉 9쪽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진실은 당연히 우리나라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예컨대 우생학(eugenics) 운동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는 1913년에 「정신적 결함법(Mental Deficiency Act)」이 제정되는데, 이 법의 제정에는 인간 지능의 유전에 대한 프랜시스 골턴의 연구, 당시 막 도입되기 시작한 지능지수(IQ) 검사, 영국우생학교육협회(British Eugenics Education Society)의 캠페인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 법의 주요 내용이 바로 일반학교에서 교육받을 능력이 없고 다른 아동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신적 장애 아동들을 정신적결함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격리기숙학교에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영국의 전국교사노조 집행부는 “지금이야말로 정신적 결함자들 사이에서의 재생산이라는 총체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때다”라는 진술을 담은 결의안을 발표하며 이 법률의 시행을 적극 지지했다.

 

시설 폐쇄와 특수학교 폐쇄

 

이 같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확인과 특수 교사로서의 구체적 경험은 저자가 특수학교를 개선하기보다 폐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출하도록 만든다. 그는 “아무리 동등한 시설과 교육을 제공하더라도 인종을 분리해서 운영하는 것 자체가 인종 차별”에 해당한다고 명시한 미국의 1954년 〈브라운 대 토피카교육청〉 소송 판결을 상기시키면서, 소위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이란 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로 모순이자 기만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분리하지만 일반 학생과 평등하게 그럴듯한 특수학교를 제공하겠다는 진보 교육감들의 선거 공약은 (……) 몰상식한 차별일 수”(〈책을 펴내며〉 15쪽) 있으며,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대책은 특수학교 폐쇄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개인 중심 능력관에 대한 검토와 반성”(본문 56쪽)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이미 “1993년 대다수의 특수학교와 시설이 문을 닫았”음과 동시에 “「특수학교법」을 폐기하고 특수교육 관련 조항들을 「초·중등교육법」에 편입”(본문 48쪽)시킨 노르웨이의 사례를 소개한다.


필자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동시에, 한 명의 장애운동 활동가로서 이 부분에서 가장 마음이 무겁고 복잡해졌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진 것은 크게 보자면 특수학교 폐쇄라는 의제를 구체화할 ‘운동의 주체’라는 측면, 그리고 특수학교가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한 ‘이행의 경로’라는 측면과 관련된다. 노르웨이의 사례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장애인을 일반학교에서 분리하는 특수학교는,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지역 사회로부터 분리하는 거주 시설(수용 시설)과 그 맥락 및 역사를 같이한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현재 한국 사회의 장애운동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탈시설이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전개하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이미 2020년 12월 ‘장애인 탈시설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발의하고 국회 앞에서 농성까지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특수학교 폐쇄는 하나의 정치적 의제로 제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2017년에 크게 이슈화되었던,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2021)로도 제작되었던 강서구 특수학교 건립 문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강서구 지역 주민들의 특수학교 건립 반대에 맞선 장애인 부모들의 ‘무릎 호소’는 한국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이는 동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면서 정치권과 교육계의 발 빠른 대응을 추동해 냈다. 교육부 장관은 “특수학교 설립은 장애 학생들의 교육권 확보를 위해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단호한 입장을 밝혔고, 서울시 교육감도 “서울시 모든 자치구에 특수학교를 짓겠다”고 공표했다. 그리고 2017년 12월 교육부는 특수학교를 대폭 확충하는 내용을 담은 〈제5차 특수교육발전 5개년 계획(2018~2022)〉을 발표했다. 결국 오랜 진통 끝에 2018년 9월 서울시교육청과 강서구 주민들은 상호 협력을 약속하고, 강서구의 특수학교(서울서진학교)는 2020년 3월 개교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서울서진학교 건립을 이끌어 낸 운동의 주체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부모연대)로, 이 단체는 기존 「특수교육진흥법」을 폐기시키고 2007년 새로운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을 제정해 냈던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교육권연대)의 운동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조직이다. 그리고 현재 전장연의 소속 단체이고, 당연히 탈시설 운동을 적극 지지하며 동참하고 있다. 그런 부모연대가 왜 특수학교 설립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찬성했던 것일까?


통합교육을 지향하는 장애인 교육에서는 흔히 ‘최소 제한 환경(least restrictive environment)’이라는 개념이 사용되는데, 이 개념에 따르자면 특수학교보다는 특수학급이, 특수학급보다는 일반학급이 장애 아동에게 보다 덜 제한적인 교육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완전 통합교육으로 가기 위해서는 특수학급이 일종의 매개적 역할 내지는 이행의 경로로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가 많은 곳에서 ‘특수학교(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또 책의 여러 곳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의 장애인 교육에서 특수학급은 기계적인 물리적 통합을 이루는 수준에서 진전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있다. 실질적 통합이 아닌 사실상 ‘포함적 배제(inclusive exclusion)’를 제도화하는 기제에 머물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이 특수학교에 대한 장애인 부모들의 현실적 수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특수학교가 필요하다는 장애인 부모들의 호소에서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즉 경쟁과 수월성이 우선시되는 입시 교육 중심의 한국 교육 제도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특수학급을 중심으로 한 통합교육의 실패를 증언하는 것이었다는 점에 보다 많은 주의가 기울여져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특수학교 폐쇄라는 정치적 의제, 그리고 완전 통합으로 가는 잠정적 대안이자 경로로서 특수학급이 처한 곤경은 성년후견 제도를 통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자기결정권(right to self-determination) 영역에서의 ‘성년후견제도’가 주거권 영역에서의 ‘거주 시설’과 동일한 위상을 지닌다고 말해 왔다. 양자 모두 장애인을 위한 제도로 선전되지만 궁극적으로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인권이 아닌 ‘보호’라는 관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만 하나의 대안으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필자 역사 ‘의사결정 대리(substituted decision-making)’를 합법화한 성년후견제도의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하고 있지는 못한데, 이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가 〈장애인 권리협약〉의 이행 상황에 대한 한국의 1차 국가 보고서를 심의한 후 최종 견해(2014년 10월)를 통해 권고한 ‘의사결정 지원(supported decision-making)’ 시스템이 한국 사회에서 전혀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거주 시설, 특수학교, 성년후견제도는 장애인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해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할 제도이지만, 그 대안의 현실화 정도와 가능성에 대한 대중적 감각의 차이에 따라 정치적 의제로서의 성공적인 상정 여부가 판가름 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탈시설 운동이 구체적인 정치적 의제가 되지 못하고 ‘시설 민주화 운동’에 머물렀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특수 교사로서 무엇을 어떻게

 

이러한 현실은 그렇다면 누가 특수학교 폐쇄 운동을 구체적으로 추동해 낼 것인가라는 문제, 주체의 문제라는 차원을 고민하게 만든다. 흔히 교육운동의 3주체로서 학생, 학부모, 교사가 이야기된다. 그런데 학령기 장애인 교육에서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은 비장애 학생들보다도 자신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내는 데 더 많은 장벽과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리고 학부모, 즉 장애인 부모 운동에서는 통합교육에 대한 원칙과 요구가 당연히 일차적이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탈시설을 지지하면서도) 특수학교에 대한 현실적 필요를 느끼고 요구하는 이들이 함께 공존한다. 그렇다면 운동의 주체로서 특수 교사들은 현재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이런 맥락에서 또 한 번 묵직한 마음으로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이 책의 3장 〈누구를 위해 ‘특수 교사’는 존재하는가〉였다. 필자 역시 특수교육과를 졸업했고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지니고 있지만, 특수 교사가 되지는 않았다. 학생운동을 하며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 현직 특수 교사의 길을 가장 먼저 접었던 것은 물론 여러 적극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소극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보수적인 교사/학교 사회에 대한 얼마간의 거부감 내지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학교 사회에서 “학교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문지기’로서 특수 교사”(본문 63쪽)가 되지 않기 위해 저자는 “닫힌 교문에 균열을 내는 ‘이 물질’ 같은 존재로서 특수 교사”(본문 65쪽)가 되자고 제안한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원피스 스트롱 워즈》의 인상적인 구절을 따르자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지만, 시스템 안의 이물질로서 시스템 내부에 머무르는”(본문 66쪽)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 역시 제시한다.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에 대한 분리 요청에 너무 쉽사리 응하지 말 것, 장애라 명명된 학생의 소속 학급(원적 학급)은 일반 학급이지 특수학급이 아니며 특수 교사는 그 학생의 학교생활 전반을 책임지는 담임 교사가 아님을 당당히 밝힐 것,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학교 사회에 적응시키려 하기보다 학교 사회가 그들에게 적응할 기회를 줄 것, 학교 사회의 불필요한 행정 업무들을 거부할 것 등이다.


필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일상적 갈등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실천이 절대로 쉬운 게 아님을, 부단한 자기 점검과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특수학교 폐쇄를 통한 완전 통합교육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물론 저자의 이러한 전략 제안은 “학교 사회를 특수 교사 개인이 전복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그렇다고 (……) 장애라 명명된 학생을 위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본문 66쪽)라는 언급에서 나타나듯, 주로 ‘개인적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03년 교육권연대가 조직되어 2007년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을 제정해 내기까지의 시기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 교육권 운동이 가장 대중적으로 확장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권연대에는 장애인 당사자(장애인이동권연대), 교사(전국교직원노동조합 특수교육위원회), 장애인 부모 3주체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활동을 전개했다. 법률 제정 이후 장애인 당사자들은 전장연을, 장애인 부모들은 부모연대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며 대중적 조직화를 확장했지만, 전교조 특수교육위원회의 활동력은 그 이후 오히려 축소된 듯 보인다. 저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도 탈시설과 시설 폐쇄를 이야기하는 운동 조직은 있는데, 왜 특수학교 폐쇄라는 정치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조직은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바 있지만, 이러한 정치적 의제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특수 교사들의 개인적 실천을 넘어 조직화한 정치적 실천 역시 함께 도모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가 그 같은 고민 역시 치열하게 해 왔음을 모르지 않기에, 이번 책에 그에 대한 내용이 녹아들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애화된(disabled) 사회

 

이 책에는 용어의 사용 혹은 소개와 관련하여 사소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또 얼마간은 중요한 오류가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장애화된(disabled) 사회’다. 저자는 책의 맨 앞부분에서 이 용어에 대해 “장애에 대한 사회적 관점을 강조하는 영국의 장애학(disability studies)은 특정 신체적 차이를 지닌 한 사람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장벽으로 인해 사회에 의해 할 수 없도록 장애화됐음(disabled)을 강조하기 위해 ‘장애화된 사람’ 또는 ‘장애화된 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일러두기〉 7쪽)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 장애학에서 ‘disabled people’과 하나의 짝을 이뤄 사용되고 있는 표현은 사실 ‘disabling society’다. ‘할 수 없게 된(disabled) 사람’이라는 수동태 표현은 그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든(disabling)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러한 ‘disabling society’라는 표현은 영국의 오픈 유니버시티(Open University)가 1975년부터 1994년까지 운영했던 장애학 과정에서 최종 프로그램의 타이틀이기도 했다. 저자가 “특정 손상을 지닌 학생이 할 수 없도록 장애화하는(disabling) 학교 사회가 역설적이게도 그 학생을 ‘장애 학생’이라 명하며 ‘할 수 없는 학생’으로 낙인(stigma)찍는다”(본문 40쪽)라고 서술한 것을 보면, 이러한 오류는 문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의 작은 착각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이 ‘disabled society’라는 표현이 조금 다른 맥락에서 충분히 사용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하다시피 영국의 마 거릿 대처 수상은 “사회 따위는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society)”는 관점하에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을 해체한 후 시장 질서와 경쟁의 원리를 일상의 수준으로까지 확산함으로써 사회를 통치하는 기법인 신자유주의를 전면화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람들 간의 유대적 관계이자 공동체로서의 사회들이 실제로 무력화되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경우가 많아졌다. 낸시 프레이저는 최근 국역본이 출간된 저서 《좌파의 길》에서 자본주의를 단순히 경제의 한 유형이 아닌 ‘사회’의 한 유형으로 볼 것을 제안한 바 있는데, 그녀의 입장에 따르자면 결국 현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공동체로서의 사회들이 장애화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각장애라 명명된 ‘특수’ 교사인 저자의 꿈이 실현될 수 있는가는 결국 그처럼 장애화/무력화된 사회를 어떻게 되살리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희미해지고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각자도생만이 남은 세계에서, 저자뿐만 아니라 필자 또한 바라는 완전 통합교육의 실현은 요원한 일일 테니 말이다.

 


 

❶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한겨레〉, 2007년 4월 27일.

❷ 미셸 푸코, 김상운 옮김(2015),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난장. 

❸ Lowe, R.(1979), Eugenicists, doctors, and the quest for national efficiency: an edu\-cational crusade, 1900~1939, History of Education, 8(4), p. 304. 

❹ 김도현(2021), 〈장애로 읽는 인권〉, 김도현 외,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 휴머니스트, 172~173쪽. 

❺ 김도현(2021), 앞의 글, 174쪽. 

❻ 김도현(2019),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357쪽. 

❼ 미국에서는 최근 기존의 성년후견제도를 대체하 는 의사결정 지원을 모든 주에서 일관되게 적용하 기 위한 법안이 상원에서 발의된 바 있다. [한국장 애포럼, “[해외 장애계 뉴스브리핑] 미국 상원, 지 원의사결정제도 법안 발의”, 〈비마이너〉, 2023년 5월 8일] 참조. 

❽ 김도현(2019), 앞의 책, 33쪽. 

❾ 김도현(2019), 앞의 책, 150쪽. 

❿ 낸시 프레이저, 장석준 옮김(2023), 《좌파의 길 -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서해문집,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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