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특집] 교권, 근대적 교사론과 폭력적 교권 담론을 넘어 (진냥(희진))

2023-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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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교권’은 진보적 교육운동의 의제가 될 수 있는가


교권, 근대적 교사론과 폭력적 교권 담론을 넘어

 

진냥(희진)

jinnyang3@gmail.com

본지 편집위원, 초등 교사,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채움활동가




교권 개념에 대한 합의는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권이 ‘교육권’의 줄임말인지 ‘교사의 권리/권한’, 혹은 ‘교사의 인권’인지에 대한 합의도 없이 마구 혼용되고 있다. 무엇보다 교육 법규를 포함하여 다른 행정 체계 전반에서 교권이 정의된 바가 없다. 이 점에서 ‘교권’이라는 개념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개념이 구체화되지 않았다고 해서 권리가 주장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모든 권리 투쟁은 권리를 호명하고 구체화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교육운동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권리는 발굴되고 확장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권리가 ‘구체화’되는가이다. 어떤 장면에서 그 권리가 호명되고 어떤 장면에서 기능하게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권리의 보장을 사회 전체에 요구하고 설득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은 권리 보장의 정당성을 평가하고 성찰하는 내부 투쟁의 시간들이다. 그래서 권리의 호명과 필요성은 운동 초기에 마련되나 그 권리의 성격과 본질, 정당성은 운동의 과정에서 완성된다. 안팎의 운동 속에서 권리의 이름은 변화하기도 하고 통합되기도 하며, 사라지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교권’ 역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쓴 이 글은, 교권 담론이 절대적이지 않으며, 고통받는 교사들의 호소만으론 권리가 될 수 없다는 문제 제기이다.

 

폭력적인 교권 담론과 단절이 필요하다

교사의 교육 행위에서 유발되는 갈등에 대해 유상덕(2018) 등의 연구는 교사의 주체성과 자율성 확대를 해결 방안으로 제시한다. 교사노동조합 등에서도 교권 보호를 주장하며 시·도교육청별로 교권보호센터가 만들어지고 있어, 교사의 자율성을 확대하거나 보호하는 것이 교권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이라는 인식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조기성·정상우(2016)는 교권 침해를, 교사의 권위가 훼손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생의 학습권이 침해되는 현상으로 정의하여, 교사의 권한을 더 구체적으로 보장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교권에 대한 논의는 몇십 년간 ‘교실 붕괴’ 혹은 ‘학교 붕괴’ 담론과 함께 지속되어 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교사의 권한/권위/권력이 부족하여 학생을 통제할 수 없음을 교실 붕괴로 이해하는 인식이 교권에 관한 논의의 대부분을 차지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에 교권을 ‘학생 지도권’, 구체적으로는 ‘학생 징계권’과 같은 개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체벌을 못 해서 교권이 추락한다’, ‘학생인권만 부상해서 문제다’는 식의 접근은 사회적 인식에만 그치지 않고 제도화되기까지 하는데, 1999년 ‘교사 체벌권’의 법제화 추진, 2002년 6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생 체벌 기준이 포함된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한 것 등의 사건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교사의 체벌 폭행은 합당한 ‘징계’로 인정되었으며 재판부의 판결에서도 ‘체벌’은 처벌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 대구의 고등학교 교사가 지각한 학생을 200대 때린 것이 알려지며,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체벌 금지 등의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서 체벌이 법적으로 각급 학교에서 금지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현재진행형으로, 현재 국회에도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 그러나 ‘학생인권의 향상이 교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강력하게 기능하고 있다. 여전히 교육 정책의 책임자들을 비롯하여 정치인, 단체들 등이 교권 강화를 이유로 학생인권조례 폐지나 개악을 주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교권은 매우 오랫동안 학생의 인권을 침해/통제/제한할 수 있는 권리로 이해되어 왔다.

교권을 이렇게 폭력적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교사들에게도 점차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교사들도 자신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교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교사들이 부당한 민원이나 고소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나 안전치 못한 문제가 체벌 금지나 학생인권조례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나를 향한 폭력뿐이 아니라 내가 행사할 폭력으로부터도 안전하고 싶다는 교사들의 주장이 과거보다 가시화되고 있고 평등하고 안전한 학교를 갈망하는 교사들도 많다.

하지만 앞서 서술한 역사적 과정이 존재하고, 많은 국민이 그 역사를 경험했기에 우리 사회에서 교권 강화 주장은 교사의 체벌권, 징계권, 지도권, 노동권 등이 혼재되어 이해된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사회적 신뢰 역시 종종 위협받는다. 때문에 교(육)권 보장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사회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사실 2000년대, 2010년대 초는 그렇게 과거도 아니다)의 주장들과 단절이 전제되어야 한다. 폭력적 권한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졌던 과거가 문제적이었음을 인정하고 교사 집단이 조직적으로 체벌 및 폭력적 지도를 완전히 ‘포기’하는 선언과 가시적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학교에서는 과거와 달리 물리적 체벌이 현저하게 줄어들기는 했다. 그러나 일부의 주장처럼 체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다. 또한 체벌 폭행이 줄어든 것은 교사 집단 스스로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법 개정과 체벌에 대한 처벌 강화 등 외부적 압박에 의한 변화였다. 즉 교사 집단 전반이 변화했다는 감각은 사회적으로 체득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교사는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고 차별하는, 인권 침해적인 사람들로 인식된다.

학생들을 ‘잡고’ 통제하기 위해 고생하는 교사를 지지하기 위한 방법은 교사에게 학생들을 더 잘 잡아 묶을 수 있도록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반면, 인권적으로 행동하고 비폭력과 평등을 실천하는 교사를 지지하기 위한 방법은 폭력과 반인권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교육 혁신의 상당 부분은 학교를 인권적으로 만들고, 교사로 인한 인권 침해를 사라지게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교사를 어떤 사람으로 볼 것이고, 교사의 어려움을 어떤 방향으로 지원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서 폭력적 교권 담론은 삭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교권 강화 주장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근대적 교사론이 가지는 한계

근대 공교육 체계가 확립된 이래 교사들은 특정한 공간, 특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확립되고 기능하는 교육 체계에 접속되고, 그 체계와 상호작용하면서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정기오, 2015) 이 상호작용은 매우 강력하면서도 느슨한데, 교육 체계가 매우 구체적 장면에 이르기까지 교사의 역할을 규정하지만, 동시에 교사 개인이 스스로의 교사론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다양한 학습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공교육 체계는 매우 폭넓고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범위를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개별 교사들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이런 이유로 교사에게 교육적 권한, 즉 ‘교권’이 부여된다. 국가가 주도하는 공교육 체계 안이지만 자율적인 교육 행위를 요구받기 때문에 그 개별적 행위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권리가 교사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에 개별 교사는 나름의 준거에 따라 직무적 자율권으로서 교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교권의 행사가 항상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교육 체계는 특정한 공간, 특정한 시대적 상황에서 확정되기에 교권 행사의 허용 범위 역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 때문에 교권의 행사는 갈등적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교사는 교육 체계로부터 부여받은 책무를 수행하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교사론에 근거하여 교육 체계와 경쟁하거나 협상한다. 요컨대 사회적인 관점에서 특정한 상황에 형성되어 있는 교사론에 따라 교권은 허용되거나 불허되며, 그 과정에서 개별 교사들은 자신의 교사론에 따라 자신의 교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교권 개념을 검토하려면 교권에 영향을 끼치는 이 두 가지 차원, 구체적으로 사회에서 담론으로 기능하는 교사론과 개별 교사들의 교사론을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육 체계 내에서 정립된 대표적인 교사론으로 언급되는 것은 주로 성직자관, 그리고 상대적으로 이후에 등장한 노동자관, 전문가관, 공직자관이다.(이경범, 2021) 성직자관은 가장 전통적인 교사관으로 교사의 행위는 소명 의식과 봉사심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공교육 체계가 확립되면서 교사 역시 임금 노동자이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노동 3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기반한 노동자관이 등장하였다. 또한 한국은 대부분의 교사가 국가에게 고용된 형태이기 때문에 교사는 공무원으로서의 특징이 강하며, 이에 청렴이나 공정 등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공직자관이 주장되었다. 근래 가장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교사론은 전문가관으로,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이 교사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교육 전문가로서 능력과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담은 관점이다.

이러한 교사론들은 근대적 교육 체제 구축 시기에 형성되어, 특정한 가치와 행위 양식을 교사 집단에게 요구하려는 목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하여 유상덕(2018)은 기존의 교사론들이 학교교육을 근대 국민 국가 형성의 한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교사 집단의 행위를 이에 가장 적합하게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흔히 말해지는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라는 명제 역시 교육의 질을 개별 교사로 귀결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근대적 교사론은 실제적 맥락을 단순화하고 교육적 실천을 개인적인 행위 양식으로 계속 환원시켜 구체적인 장면, 즉 교사-교육 체계 간의 상호작용이나 교사-학생, 교사-양육자(보호자) 간의 역동을 해석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근대적 교사론은 교사의 취약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여성인 신규 교사가 교육적 실천에서 취약한 것은 부족한 경험 때문만이 아니다. 성별 권력과 나이 위계에서 가지는 취약성 역시 그 이유다. 시각장애를 가진 10년 경력 교사가 계속 담임 업무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해당 교사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맥락과 다양한 제도 사이의 복합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주장되고 있는 교권 담론은 ‘전문적인 교사의 교육적 실천을 방해받지 않게 해 달라’는 요구에만 집중되어 있다. 이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단일 축을 기반으로, 또 다른 능력주의 또는 개인들의 자기 개발 서사에 보다 강력하게 연동되어 결과적으로 교사를 더 억압하는 배경이 된다. 그러면서 교사가 지원과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는 취약해지는 순간들은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교사에 대한 개별적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사가 교육의 모든 것을 책임지거나 대변할 수 없다. 교육의 질은 교육 체제 전체로 접근되어야 하고, 교사 역시 교육 제도의 일부로,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여겨져야 한다.

 

인권과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이해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서, 교권 혹은 ‘교사의 인권’이란 무엇일까.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 사회의 권리 의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권리 의식은 1980년대 후반 자유화 물결 속에서 시작되어 문화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1990년대에 생성되었고 2000년대에 제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육 제도 안에서 인권교육 역시 2000년대 들어 제도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권교육은 왜곡되고 분절되어 산산이 파편화되었다. 장애인권교육, 성인권교육, 다문화인권교육 등 분야별로 도입되어 제도화된 인권교육 실태는, 인권을 문제 해결 방안으로만 활용하며 오히려 보편적이고 전반적인 인권 자체를 이해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인권은 총체적이고 모든 사람이 가지는 인권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것, 이는 인권 보장의 절대적이고 원칙적인 명제다. A의 인권과 B의 인권이 다르다면 우리는 차별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을까? 장애인 인권은 장애인이 가지는 특수한 인권이 아니며, 아동 인권 역시 아동만이 가지는 고유한 인권이 아니다. 이주민에게 이루어지는 지원 정책은 이주민에게만 어떤 인권을 보장하고자 하는 제도가 아니다. 다만 특수한 상황에서 보다 취약하여 침해되기 쉬운 인권들이 있고 그러한 상황 들을 재구성하여, 그러니까 새로운 질서로 다시 정렬시켜 인권 보장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경사로와 저상버스, 자동 변속기는 공간의 질서를 새롭게 정렬시키는 시도였고, 학생인권조례와 혁신학교운동은 학교 내 권력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시도였다. 이 모두는 새로운 질서를 통해 인권 보장이 취약한 영역들을 보완하여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에 ‘진보’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인권의 개념은 각계각층의 집단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위계 관계와 가/피해 등 사회 구조와 상관없이 모든 권리 주장을 동등하게 이해하는 것으로 오독되었다. 당사자와 주변인의 의사가 동등한 무게로 다루어지고, 기본권과 소비자적 불편함이 모두 1/n의 권리로 대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과 권리는 매우 자주 혼용된다. 그러나 인권과 권리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인권은 모든 인간이 무조건적으로 가지는 보편 권리의 총체를 뜻한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도 인권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지 않으며, 모두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인권은 인권 감수성을 통해 끊임없이 감각되고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인권의 영역은 확장 되어 가는 것이다. 반면 권리는 제도적으로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는 인권이지만, 이 이동권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충돌하기도 하고 종종 위험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횡단보도를 만들고 신호등을 세우는 등 사회 제도가 보장을 조정한다. 이때 권리가 생성된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면 보행자는 도로를 가로지를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인권은 권리로 구현되나, 침해받을 수도 있고 파란불 신호등이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것처럼 권리가 인권을 실제로 보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즉, 권리는 지엽적이고 파편적이며, 따라서 계속 수정되고 추가된다.

어떤 경우에는 권리가 인권에 반하는 경우도 있다. 재산권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권리다. 목마름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앞에서 음료수를 사서 한숨에 다 마시는 행위가 존중될 수 있고 그것이 곧 재산권 행사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반인권적 상황이며 동시에 연대적 인권의 관점에서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는 권리의 제도적 보장을 고려해야 하지만 이와 더불어 총체적이고 사회적인 인권의 진전을 지향하는 방향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흔히 ‘누구누구의 인권만 중요하냐’라는 질문이 나오곤 하는데, ‘누구누구의 인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사에게 특별한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교사도 공무 직원도 학생도 모두가 가진 인권은 동일하고 동등하다. 직무상 권한은 직무상 권한으로 호명할 수 있고 여타의 직업들에서도 그렇다. 또한 공급자와 수혜자가 존재하는 행위에서 권리를 호명할 때 그것은 공급자의 권리일 수 없다. 권리는 향유하는 자의 것이기에 진료권은 환자의 것이고 정보권은 정보를 제공받는 사람의 권리다. 이런 의미에서 교사에게 교권은 없다. 교권이 교육권의 준말이라면 그것은 학습자의 권리이지 교수자의 권리가 아니다.

 

인권 보장은 도덕이 아니라 책무다

인권 보장의 책무는 국가에게 있고, 지방자치단체, 즉 교육청에게, 그리고 학교에서는 관리자에게 있다. 인권은 개인 간에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 주는 도덕 규범이 아니다. 인권 존중이 선언되고 보장 수준이 연속적으로 평가되고 침해가 발생했을 때 구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 인권 보장의 기본인 것처럼, 인권은 사람과 사람 간의 호의가 아닌, 정부가 보장해야 할 제도적 규범이다. 인권 침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인권 보장 프레임워크를 마련하고 그것이 잘 작동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의 권리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권리가 보장될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권리를 억압하면서 동시에 인권적이고 민주적인 조직/공간/공동체는 만들어질 수 없거니와, 설혹 통제에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늘 존재하기에 인권 보장 프레임워크는 단단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는 저절로 돌아가는 무한 동력 기계 장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제도를 만드는 것만으로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프레임워크는 반드시 개입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조정 행위자’를 필요로 한다.

20년 넘게 교사로 일하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관리자를 딱 2명 만나 보았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개입할 역량이 없는 관리자여서 그가 개입하고 난 후에 따로 학생과 양육자를 만나 다시 애프터 상담을 해야 했다. 하지만 역량을 갖추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관리자 1명을 경험해 본 것은 내 교직 생활 전반에서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관리자는 연이어 담임 교체가 이루어지는 학급에 스스로 담임으로 들어갔고, 내가 담임한 학생이 실종되었을 때 함께 길바닥을 뒤지고 다녔으며, 학교폭력 사안과 관련하여 학교에 항의하는 양육자들을 스스로 나서 상대했다. 이러한 개입은 관리자에게 따로 보고해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없어도 되는 것만으로도 교사인 내게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관리자가 따로 보고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 사안에 스스로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교사는 전화 통화와 사안 설명 보고서를 쓰는 데 상당한 시간을 쓰게 되는데, 관리자가 직접 개입하고 있으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더불어 관리자의 적극적 개입은 구성원이 조직에 가지는 신뢰도를 높이고 인권 보장의 프레임워크가 실제로 작동하게 한다. 지금처럼 관리자의 침해는 ‘갑질’로, 정부와 교육청의 침해는 ‘정책’으로 호명하고, 학생과 양육자만 교권 침해의 행위자로 바라보는 구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치의 회복

조정 행위자와 함께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기준에 대한 합의를(비록 그것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더라도) 만들어 낼 공적인 장이다. 교권에 대한 보호 노력이 제도화된 이후에도 교권 갈등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갈등은 힘의 크기가 커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커진 힘은 위계를 심화하거나 갈등의 부작용을 키운다.

교사의 자율권 행사로 갈등이 유발되는 이유는 권한의 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권한 행사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서로에게 용인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교사는 학생에게 개입할 수 있는가, 또 다른 상황에서 양육자는 교사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가, 교직원과 양육자 간의 갈등은 어디까지 허용 가능하고 어디서부터는 제도적으로 접근되어야 하는가, 양육자의 연락에 교직원은 어느 정도 시간 안에 응답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일정한 판단 기준을 우리 사회는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도 양육자의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되는 권리는 매뉴얼에 적혀 있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학생을 교실에서 배제할 수 있는 권한도 교사에게 있다. 다만 민원과 후속되는 신고, 행정 조치 등이 두려워 그 권한을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규정은 권한의 행사를 방해하고 갈등을 심화시킨다.

양육자들은 높았던 학교의 벽을 두들기고 있고 그것을 교사들은 교권 침해로 인식하고 있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부분이 분명 있으나 벽을 더 높이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어느새 사라져 버린 ‘교육의 3주체’라는 말을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어느 개인도, 어느 집단도 홀로 다른 누군가의 인권 보장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우리는 그것을 ‘자치’라는 이름으로 명명해 왔다. 학생 자치에서 더 나아가 교사 자치, 양육자 자치가 필요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자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낭만적이거나 속없는 소리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민원에 민원으로 대응하는 소비자적 권리 의식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국민과 국민이 갈등할 때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일까?

학교교육은 매우 큰 규모의 사회 제도이고 거의 모든 대중에게 열려 있는 보편 제도다. 심지어 구성원의 구성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시 말해 표준화된 행동이나 인식을 구성원에게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공간에서 권리 침해를 막기 위해 특정 집단을 통제하는 전략은 실패하기 쉽다. 또한 법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법은 절대 세세할 수 없으며, 법의 빈틈들을 우리는 사회적 합의, 공동체의 문화 규범으로 채워야 한다.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규범의 동의 수준을 높이는 과정, 즉 자치가 필요한 이유다.

 

 

참고 문헌

교사노동조합연맹 외(2023), 《“가르칠 수 있는 용기” 교실회복을 위한 토론회 – 정당한 교육활동이 인정받는 교육 생태계 조성을 위하여》, 제42회 스승의 날 기념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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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성·정상우(2016), 〈교권의 개념과 침해 구제방안〉, 《교육문화연구》, 22(6), 33~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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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미투는 계속 돼야 한다… 그런데 무고한 교사들은?”, 〈경향신문〉, 2020년 1월 5일.

““쌤, 페미죠?” 교실도 휩싸인 백래시”, 〈한겨레〉, 2021년 5월 17일.

“스쿨미투 이후, 교실에서 우리가 듣는 말”, 〈여성신문〉, 2022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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