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
- 교실 붕괴부터 ‘아동학대처벌법’까지, 교권 담론의 역사를 짚다
글
하영
서울 지역 교사,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통상 교권은 교원의 정당한 교육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로 다루어지며,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전제로 여겨진다. 그런데 교권이 침해받는다고 할 때, 교권을 침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교권은 교육 노동자의 권리로 해석될 수 있는가? 이 글은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을 돌아봄으로써 교권이 활용되고 있는 방향을 다룬다. 특히 그동안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곳저곳에 활용되었던 교권 개념이 어떻게 여러 쟁점을 평면화해 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나의 ‘교권’ 담론 내러티브
내가 처음 ‘교권’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학생 때였다. 학생의 학습권, 체벌을 통해 학생을 통제할 권리, 교사의 권리와 권위가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일부 교사들은 사회의 변화와 학생들의 행동이 “교권 추락”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체벌이 금지되던 2010년대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모든 교과 선생님이 교실에 올 때마다 체벌이 사라지면 교권이 떨어지지 않겠냐, 결국은 너희에게 손해가 아니겠냐며 한탄했다. 체벌이 존재하는 건 너희의 성장을 위한 것인데, 오히려 체벌이 없어지면 학습권이 더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교사들은 더는 체벌로 우리를 다스릴 수 없는 것 자체를 ‘교권의 위기’로 인식했고, 이들에 따르면 교권의 위기는 곧 학습권의 위기였다.
체벌 자체가 금지되고, 학생인권조례가 도입되었던 고등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명백한 체벌이 줄어들고(그럼에도 교사가 손으로 학생의 뺨을 때리거나 자로 신체 일부를 때리는 일은 여전했다) 강제되던 ‘야간 자율 학습’이 정말 자율적으로 바뀌는 등 변화도 있었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교복 대신 생활복을 입고 등교할 수 있었으나 교복 치마의 길이나 넥타이 착용 여부를 검사받아야 했다. 또, 즉각적인 벌 대신 들어온 상벌점제와 벌점을 심사한다는 소위 ‘학생자치법정’은 또 다른 처벌의 굴레가 되었다. 체벌이 없어지면 학습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교권이 추락할 것이라던 위협과는 달리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언제든지 평가받을 수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의 권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으며, ‘요즘 애들’은 예의가 없고 제멋대로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기를 보내고 들어갔던 교대에서는 학교 안팎에서 ‘요즘 교사 하는 것 괜찮겠냐’는 걱정을 들었다. 사람들은 ‘요즘 애들’이 그렇게 기가 세고 막무가내라고 하는데, 교사의 권위가 떨어져서 교사로서의 일이 더는 쉽지 않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요새 애들이 안 맞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본인이 어릴 때 체벌이 얼마나 자신의 버릇을 고쳐 놓았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또 누군가는 교사 월급은 박봉인데, 실추된 권위를 버틸 수 없을 것이라며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함께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은 종종 “우리 이러다가 교실 붕괴 경험하는 것 아니야?”와 같은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0대에서 소위 예비 교사로 위치가 급격하게 전환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교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교권이 위기’라고 하지만 ‘교사의 권력’은 제자리였고, 만약 교권이 학생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더해 학교 구조 자체를 성찰하는 논의가 부재한 상황은 교사가 된 후에 겪을 어려움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침해되었던 ‘교권’?
대학교 2학년 참관 실습 때, 나는 5학년 한 학급에서 2주를 보냈다. 지도 교사와도 잘 맞았고, 함께하는 동료 교생들과도 서로 배울 수 있었다. 그 실습에서는 내가 갔던 모든 실습 중에 가장 마음을 다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실습 마지막 날, 학급에서 전체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쥐는 느낌이 들었다. 실수로 친 것이라고 하기에는 분명하게 엉덩이를 쥐는 감각이었고, 옆에 있던 동료 교생도 같은 느낌을 느꼈다고 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지도 교사에게 이 사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에 그는 ‘어린 애라 호기심으로 그럴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지도 교사 자신 또한 20대일 때 짓궂은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그런 행동들을 겪었다고 하며 가벼운 위로를 던졌다. 그렇게 그 실습은 끝났고, 그 엉덩이를 쥔 학생과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정규직 교사가 아니라 2주간 실습생 신분으로 존재했던 나에게 어떤 권리가 있었을까? 교생으로서의 위치성, 그리고 지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 등 복잡한 맥락에서 이 경험은 쉽게 해석되지 않았다. 나에게 선택지는 지도 교사와 상의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 권위를 빌리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내 경험을 해석할 힘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러한 피해가 교권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젠더 권력이 학교에서 작동하고 있음에도 이것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거나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러한 경험은 ‘교권’ 담론에 포섭될 수 없다. 오히려 ‘교권’을 중심으로 교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을 논의하는 것은 젠더 관계, 노동의 위계와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가릴 뿐이다.
교권 담론의 흐름
그렇다면 ‘교권’은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교육’을 위한 권위일까? 학생을 누르는 힘이나 통제하기 위한 것일까? 교권 담론의 변화 속에서 ‘교권’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으며, 이러한 교권 개념 정의에서 간과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요하게 전교조 신문 〈교육희망〉에서 한 코너를 차지하는 ‘띵동! 교권’을 살펴보았다. 이 꼭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첫째, 교사의 보수와 노동 조건, 즉 노동권에 관한 내용이다. 교사가 휴직하거나 휴가를 쓸 수 있는 권리, 혹은 교사의 보수와 호봉에 대한 문제 제기가 대부분이다. 둘째, 학교 안전사고를 교사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는 특히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많은 논란이 되었는데 그 후 2000년대 후반부터 학교안전공제회 제도가 수정, 개선되어 정착하면서부터 논의가 축소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 안전사고의 절차와 상황 수습이 담당 교사의 몫으로 되어 있을 때, 교육청과 학교의 협력적인 해결보다는 개인에게 책임이 전가된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된다. 셋째, 교사의 정치 기본권에 관한 내용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교원이 정치적인 사안이나 논쟁적 주제를 다루기 어렵고, 정당 가입과 정치 활동이 제한된 현실에 대한 비판에 기반한다. 넷째,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내용이다. 아동학대 신고를 받았다거나 학교폭력 사안 처리 과정에서 교사의 책임 소지가 불거지는 등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특히 이 영역은 체벌 허용과 금지의 역사(징계권), ‘교실 붕괴’ 및 ‘학교 붕괴’ 담론과 궤를 함께하며 학생인권과 대립적인 항으로 여겨 왔다. ‘띵동! 교권’의 최근 기사는 첫 번째와 네 번째 쟁점을 중심으로 논의되며, 이 글에서는 네 번째 사안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체벌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 보자. 1999년 ‘교사 체벌권’의 법제화 추진, 그리고 2002년 6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생 체벌 기준이 포함된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하는 등의 사건은 교사의 학생에 대한 합당한 ‘징계’로서 체벌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2006년 대구의 고등학교 교사가 지각한 학생을 200대 때린 것이 알려진 사건 이후,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체벌 금지 등의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이에 이어 2010년에는 서울 동작구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바닥에 넘어뜨려 발로 차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체벌 전면 금지 지침이 발표되었다. 2000년대 청소년인권운동과 전교조 등이 주도한 체벌 철폐 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교총에서 2009년 발의한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법’이나 2011년 ‘40만 교원 입법 청원 서명’은 체벌 금지가 오히려 교사의 생활 지도에 방해물이 되기에 ‘적절한 수준의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골자로 했다. 특히 2010년대 지역별로 학생인권조례가 추진되면서 학생인권의 보장은 생활 지도 권한의 축소 혹은 교권 추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며 대립 항의 구도도 더 명확해졌다.
학생인권과 교권의 대립 항은 뉴스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나타난다. 1990년 1월부터 2023년 7월 22일까지 전국 일간지에서 ‘교권’을 언급하는 기사의 추이를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인 ‘빅카인즈’를 통해 분석한 결과, 교권에 대한 논의는 학생인권조례가 추진되던 2010년대 초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총 8,110개의 기사 중 2,984건의 기사(약 37%)가 교권 관련한 기사에서 학생인권을 다루며, 그중 대다수가 2010년과 2012년 사이에 발행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증가한 교권에 대한 논의는 2010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뉴스에서 ‘교권’이 언급되는 기사의 추이(빅카인즈)
구체적으로, 학생인권과 체벌 금지 등이 논의된 2000년대 후반을 거쳐 2010년대 초에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했다는 기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2009년도에 불거진 한 사건❶이 기사화되면서 여교사에 대한 성희롱, 성폭력이 ‘교권 실추’의 대표적인 예시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체벌이 행해지는 학교들이 많았음에도 체벌을 할 수 없어 ‘무력’해진 교사와 교사를 때릴 수 있는 학생의 프레임은 ‘교권’이 침해되는 현실을 계속해서 부각했다. 즉 ‘학교가 붕괴’되고 ‘교실이 붕괴’되고 있음에도, 교사의 수업권과 생활 지도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권’이 체벌할 권리, 두발 규제나 복장 규제를 할 권리와 동일시되는 맥락에서 교육 체제의 억압성은 유지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역설적으로 ‘교실 붕괴’의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 전가했다. 학생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때 제공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이나 교사의 수업권이 보장될 여건을 조성하는 것보다는 개인 교사가 통제할 권한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폭력이나 성희롱 피해 또한 교사의 생활 지도권이 보장되지 않아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책임이 여교사 개인에게 지워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구도에서는 ‘교권’이 포함하는 것처럼 보였던 교사로서 존엄하게 ‘노동’할 권리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 역시 지닌다. ‘교권 침해’ 담론이 결국 교사의 통제 권력과 권리의 경계를 흐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사가 자유롭게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권한이 관리자나 학교에 의해 제재되는 것이 교사의 수업권 침해임에도 이는 ‘교권 침해’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주요하게 교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학생이나 학부모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레임이 간과하는 다른 영역들도 들여다보자. 예컨대 학내 비정규직 교사를 포함하여 학교의 고용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이에 따른 차별이 더 촘촘해진 데 반해, 이들의 학교에서의 차별 경험은 으레 정규직 교사의 권리라고 여겨지는 ‘교권’ 프레임에서는 해석될 수 없다. 남학생의 여교사 성희롱 사건을 ‘교권 실추’로 바라보는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담론에서는 학교 내 강력하게 작동하는 젠더 권력을 간과하며, 동시에 해당 여교사가 학생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는 낙인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권 침해’ 프레임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힘겨루기로 볼 때, “교권은 가부장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❷
지금의 교권 담론
최근 ‘교권’에 대한 논의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앞의 그림의 기사 추이를 보면 2010년 초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후로도 교권에 대한 논의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러한 기사들은 2018년 전후, 2022년 전후로 한 번 더 증가하는 흐름을 보인다. 2018년 이후로 대두되었던 학내 스쿨미투 운동과 2022년 전후로 본격화된 초등학교 아동학대 신고의 영향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학생의 권리를 경유하지 않는 방식의 ‘교권’, 교사의 권익과 피해-가해의 구도를 유지한다는 데서 유사성을 갖는다.
먼저, 스쿨미투 운동을 떠올려 보자. 스쿨미투 운동 이후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학교와 교육청의 빠른 대처는 스쿨미투 운동을 학교 구조의 위계, 폭력에 대한 폭로에서 가해자-피해자 간의 관계로 축소했다. 이렇게 축소된 프레임에서 피해자들은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는 비난부터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거나 ‘꽃뱀’ 혹은 ‘영악한 청소년’이라는 백래시를 감당해야 했다. 반대로 가해 교사들은 문제의 행동이 ‘교육을 목적으로 한 합당한 행위’였음을 강변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명명백백한 성폭력적 가해 행동과 무고한 학생 피해자 외에는 인정될 수 없는 ‘순수한 미투’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뚜렷한 가해자-피해자 구도에서 불거져 나왔던 논의 중 하나가 ‘교권 침해’였다. 영악한 학생들이 교사를 가해자로 몰아가고 있으며(다음 그림 참고) ‘거짓 미투’가 횡행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교사나 학교의 성폭력적 구조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는 학교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가해자 대 피해자의 구도는 학교 문화를 돌아보게 하기보다는 악한 교사 개인의 문제로 치환되어 다루어졌다.
스쿨미투 고발은 ‘친밀함’ 혹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졌던 위력적 폭력, 성폭력적 문화에 대한 폭로이자 공론화였다. 그리고 피해와 일상적인 문제 제기를 발화할 수 없는 학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이 부재한 현실에서 스쿨미투는 ‘교권’의 대척점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스쿨미투 운동에서 교권 침해 프레임은 학교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와 성폭력적 문화를 다루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운동 이후 학교의 변화도 요원했다. 권력의 불균형한 상황은 계속되었고, 문제 해결을 위한 평등하고 안전한 공론장 자체가 형성되는 데까지 갈 수 없었다.
더불어 최근 초등학교에서의 아동학대 신고는 거의 모든 교원 노조 및 단체에서 다루고 있을 정도로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다. 2010년대 초의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법’ 발의나 학생인권조례 반대의 움직임이 교총을 중심으로 했다면, 아동학대에 관해서는 모든 교원 노조의 기조가 유사하다. 이는 전교조의 아동학대 사안 처리 과정 실태 조사에서 교사의 98%가 사안 처리 과정에서 ‘교권 침해’가 발생한다고 응답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아동학대 신고의 가장 큰 문제는 사안 처리 시스템이 사법화된 문제 처리 방식으로 기능하며 구체적인 상황 맥락이 소거된다는 점에 있다. 특히 사건이 바로 수사 기관으로 넘어가는 등 매뉴얼에 따른 처리 과정은 교사가 고립되게 하고, 학교의 공동체적인 해결을 어렵게 한다. 또한,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법에 대한 과잉 의존의 예시가 되며, 아동학대 신고는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민원 및 소송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즉 행위 주체의 관심 대부분이 입법 과정에 들어가면서 공동체적 숙의에 참여할 동기를 잃게 된 것이다.❸
이렇게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동하는 아동학대 신고를 교권의 침해로 해석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악덕 학부모와 교사 개인 사이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아동학대 신고를 ‘악의적인 민원’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교육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폭력과 교육의 경계를 톺아보기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❹
아동학대적일 수 있는 학교교육에 대한 성찰
지난 7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진행한 수다회가 있었다. 수다회에서는 그동안 아동학대로 고발되었던 사례들이 어떤 점에서 아동학대일 수 있는지, 혹은 아동학대가 아닌지를 구분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아동학대의 경계에 있는 것들, 교사의 권한, 학생인권 등 고려해야 할 지점들을 살피면서 참여자들로부터 다양한 질문들이 나왔다. ‘사법적인 판단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학생인권 침해를 모두 아동학대로 볼 수 있을까?’, ‘왜 교권 담론은 학생인권 논의의 대립 항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등 심도 있는 질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활동가 민서의 질문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민서는 아동학대 사례를 보면서 아동학대의 주체가 교사인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학교교육 자체가 아동학대적인지를 다루기 어렵다는 점을 짚었다. 예컨대 학교교육에서 평가가 학생들을 줄 세우기 하기에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작동할 때, 과연 아동학대의 주체를 교사 개인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교육이 아동학대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 채로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여기는 방식이 가지는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민서의 질문을 들으며, 최근 교원단체들의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처벌법’ 개정 요구에 교육이 아동학대적이거나 학생인권 침해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빠져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스쿨미투 이후 학교가 성폭력적인 문화를 돌아보는 데 실패했듯이, 우리는 아동학대 사건에서도 아동학대적일 수 있는 학교교육에 대한 성찰을 간과해 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동학대 신고의 증가를 교사 대 학부모, 교사 대 학생이라는 대립 항으로만 치환하는 과정이 정작 교육 자체를 돌아보기 어렵게 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적 교육운동의 초점은 학교의 구조적 변화와 교육에 대한 성찰이라고 믿는다. 학생들의 목소리 내기를 막는 추상적이고 실체 없는 권한이 아닌, 학교 구조와 교육의 방향을 중심으로 볼 때야만 권리는 노동 형태, 젠더, 계급, 학교 권력 구조 등 다양한 측면을 포섭하고 확장하는 방향에서 논의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누군가의 권리를 짓밟지 않는 형태, 그러니까 학교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일원이자 변화할 수 있는 주체로서 교원의 위치와 권리에 주목해 보자.
❶ 고등학교에서 남학생이 여교사를 성희롱하며 “누나, 사귀자”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한 동영상이 유포된 사건이다.
❷ 조영선, 〈교권 침해를 걱정하신다고요?〉, 《시사IN》, 558호, 2018년 5월 29일.
❸ 성열관(2023), 〈관계와 법 사이에서 : 학교의 사법화에 대한 대응 전략〉,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2차 월례포럼 자료집》.
❹ 하영(2023), 〈‘아동학대’라는 언어가 교육에 대한 성찰이 되려면 -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의 한계와 가능성〉, 《오늘의 교육》, 72호(2023년 1·2월),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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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은 어떻게 변화해 왔나
- 교실 붕괴부터 ‘아동학대처벌법’까지, 교권 담론의 역사를 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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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
서울 지역 교사,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통상 교권은 교원의 정당한 교육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로 다루어지며, 교원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전제로 여겨진다. 그런데 교권이 침해받는다고 할 때, 교권을 침해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교권은 교육 노동자의 권리로 해석될 수 있는가? 이 글은 교권을 둘러싼 프레임을 돌아봄으로써 교권이 활용되고 있는 방향을 다룬다. 특히 그동안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곳저곳에 활용되었던 교권 개념이 어떻게 여러 쟁점을 평면화해 왔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나의 ‘교권’ 담론 내러티브
내가 처음 ‘교권’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학생 때였다. 학생의 학습권, 체벌을 통해 학생을 통제할 권리, 교사의 권리와 권위가 혼재되어 사용되었다. 일부 교사들은 사회의 변화와 학생들의 행동이 “교권 추락”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체벌이 금지되던 2010년대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모든 교과 선생님이 교실에 올 때마다 체벌이 사라지면 교권이 떨어지지 않겠냐, 결국은 너희에게 손해가 아니겠냐며 한탄했다. 체벌이 존재하는 건 너희의 성장을 위한 것인데, 오히려 체벌이 없어지면 학습권이 더 보장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교사들은 더는 체벌로 우리를 다스릴 수 없는 것 자체를 ‘교권의 위기’로 인식했고, 이들에 따르면 교권의 위기는 곧 학습권의 위기였다.
체벌 자체가 금지되고, 학생인권조례가 도입되었던 고등학교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명백한 체벌이 줄어들고(그럼에도 교사가 손으로 학생의 뺨을 때리거나 자로 신체 일부를 때리는 일은 여전했다) 강제되던 ‘야간 자율 학습’이 정말 자율적으로 바뀌는 등 변화도 있었지만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교복 대신 생활복을 입고 등교할 수 있었으나 교복 치마의 길이나 넥타이 착용 여부를 검사받아야 했다. 또, 즉각적인 벌 대신 들어온 상벌점제와 벌점을 심사한다는 소위 ‘학생자치법정’은 또 다른 처벌의 굴레가 되었다. 체벌이 없어지면 학습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교권이 추락할 것이라던 위협과는 달리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언제든지 평가받을 수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교사의 권력은 여전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교사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으며, ‘요즘 애들’은 예의가 없고 제멋대로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기를 보내고 들어갔던 교대에서는 학교 안팎에서 ‘요즘 교사 하는 것 괜찮겠냐’는 걱정을 들었다. 사람들은 ‘요즘 애들’이 그렇게 기가 세고 막무가내라고 하는데, 교사의 권위가 떨어져서 교사로서의 일이 더는 쉽지 않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요새 애들이 안 맞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본인이 어릴 때 체벌이 얼마나 자신의 버릇을 고쳐 놓았는지 구구절절 설명했다. 또 누군가는 교사 월급은 박봉인데, 실추된 권위를 버틸 수 없을 것이라며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함께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은 종종 “우리 이러다가 교실 붕괴 경험하는 것 아니야?”와 같은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0대에서 소위 예비 교사로 위치가 급격하게 전환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교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교권이 위기’라고 하지만 ‘교사의 권력’은 제자리였고, 만약 교권이 학생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더해 학교 구조 자체를 성찰하는 논의가 부재한 상황은 교사가 된 후에 겪을 어려움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침해되었던 ‘교권’?
대학교 2학년 참관 실습 때, 나는 5학년 한 학급에서 2주를 보냈다. 지도 교사와도 잘 맞았고, 함께하는 동료 교생들과도 서로 배울 수 있었다. 그 실습에서는 내가 갔던 모든 실습 중에 가장 마음을 다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실습 마지막 날, 학급에서 전체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쥐는 느낌이 들었다. 실수로 친 것이라고 하기에는 분명하게 엉덩이를 쥐는 감각이었고, 옆에 있던 동료 교생도 같은 느낌을 느꼈다고 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지도 교사에게 이 사실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이에 그는 ‘어린 애라 호기심으로 그럴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지도 교사 자신 또한 20대일 때 짓궂은 고학년 어린이들에게 그런 행동들을 겪었다고 하며 가벼운 위로를 던졌다. 그렇게 그 실습은 끝났고, 그 엉덩이를 쥔 학생과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정규직 교사가 아니라 2주간 실습생 신분으로 존재했던 나에게 어떤 권리가 있었을까? 교생으로서의 위치성, 그리고 지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 등 복잡한 맥락에서 이 경험은 쉽게 해석되지 않았다. 나에게 선택지는 지도 교사와 상의하는 것밖에 없었고 그 권위를 빌리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내 경험을 해석할 힘을 잃어버렸다. 나는 이러한 피해가 교권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젠더 권력이 학교에서 작동하고 있음에도 이것이 적극적으로 논의되거나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이러한 경험은 ‘교권’ 담론에 포섭될 수 없다. 오히려 ‘교권’을 중심으로 교사가 경험하는 모든 일을 논의하는 것은 젠더 관계, 노동의 위계와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가릴 뿐이다.
교권 담론의 흐름
그렇다면 ‘교권’은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교육’을 위한 권위일까? 학생을 누르는 힘이나 통제하기 위한 것일까? 교권 담론의 변화 속에서 ‘교권’이 어떻게 정의되고 있으며, 이러한 교권 개념 정의에서 간과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요하게 전교조 신문 〈교육희망〉에서 한 코너를 차지하는 ‘띵동! 교권’을 살펴보았다. 이 꼭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첫째, 교사의 보수와 노동 조건, 즉 노동권에 관한 내용이다. 교사가 휴직하거나 휴가를 쓸 수 있는 권리, 혹은 교사의 보수와 호봉에 대한 문제 제기가 대부분이다. 둘째, 학교 안전사고를 교사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는 특히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많은 논란이 되었는데 그 후 2000년대 후반부터 학교안전공제회 제도가 수정, 개선되어 정착하면서부터 논의가 축소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 안전사고의 절차와 상황 수습이 담당 교사의 몫으로 되어 있을 때, 교육청과 학교의 협력적인 해결보다는 개인에게 책임이 전가된다는 문제가 꾸준히 제기된다. 셋째, 교사의 정치 기본권에 관한 내용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교원이 정치적인 사안이나 논쟁적 주제를 다루기 어렵고, 정당 가입과 정치 활동이 제한된 현실에 대한 비판에 기반한다. 넷째,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내용이다. 아동학대 신고를 받았다거나 학교폭력 사안 처리 과정에서 교사의 책임 소지가 불거지는 등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특히 이 영역은 체벌 허용과 금지의 역사(징계권), ‘교실 붕괴’ 및 ‘학교 붕괴’ 담론과 궤를 함께하며 학생인권과 대립적인 항으로 여겨 왔다. ‘띵동! 교권’의 최근 기사는 첫 번째와 네 번째 쟁점을 중심으로 논의되며, 이 글에서는 네 번째 사안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다루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체벌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 보자. 1999년 ‘교사 체벌권’의 법제화 추진, 그리고 2002년 6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생 체벌 기준이 포함된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하는 등의 사건은 교사의 학생에 대한 합당한 ‘징계’로서 체벌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2006년 대구의 고등학교 교사가 지각한 학생을 200대 때린 것이 알려진 사건 이후,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체벌 금지 등의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이에 이어 2010년에는 서울 동작구 초등학교 교사가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바닥에 넘어뜨려 발로 차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체벌 전면 금지 지침이 발표되었다. 2000년대 청소년인권운동과 전교조 등이 주도한 체벌 철폐 운동의 성과였다. 그러나 교총에서 2009년 발의한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법’이나 2011년 ‘40만 교원 입법 청원 서명’은 체벌 금지가 오히려 교사의 생활 지도에 방해물이 되기에 ‘적절한 수준의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골자로 했다. 특히 2010년대 지역별로 학생인권조례가 추진되면서 학생인권의 보장은 생활 지도 권한의 축소 혹은 교권 추락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며 대립 항의 구도도 더 명확해졌다.
학생인권과 교권의 대립 항은 뉴스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나타난다. 1990년 1월부터 2023년 7월 22일까지 전국 일간지에서 ‘교권’을 언급하는 기사의 추이를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인 ‘빅카인즈’를 통해 분석한 결과, 교권에 대한 논의는 학생인권조례가 추진되던 2010년대 초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총 8,110개의 기사 중 2,984건의 기사(약 37%)가 교권 관련한 기사에서 학생인권을 다루며, 그중 대다수가 2010년과 2012년 사이에 발행되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증가한 교권에 대한 논의는 2010년대에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뉴스에서 ‘교권’이 언급되는 기사의 추이(빅카인즈)
구체적으로, 학생인권과 체벌 금지 등이 논의된 2000년대 후반을 거쳐 2010년대 초에는 “학생이 교사를 폭행”했다는 기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2009년도에 불거진 한 사건❶이 기사화되면서 여교사에 대한 성희롱, 성폭력이 ‘교권 실추’의 대표적인 예시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체벌이 행해지는 학교들이 많았음에도 체벌을 할 수 없어 ‘무력’해진 교사와 교사를 때릴 수 있는 학생의 프레임은 ‘교권’이 침해되는 현실을 계속해서 부각했다. 즉 ‘학교가 붕괴’되고 ‘교실이 붕괴’되고 있음에도, 교사의 수업권과 생활 지도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권’이 체벌할 권리, 두발 규제나 복장 규제를 할 권리와 동일시되는 맥락에서 교육 체제의 억압성은 유지되어야 할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역설적으로 ‘교실 붕괴’의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 전가했다. 학생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때 제공할 수 있는 지원 시스템이나 교사의 수업권이 보장될 여건을 조성하는 것보다는 개인 교사가 통제할 권한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폭력이나 성희롱 피해 또한 교사의 생활 지도권이 보장되지 않아 일어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책임이 여교사 개인에게 지워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구도에서는 ‘교권’이 포함하는 것처럼 보였던 교사로서 존엄하게 ‘노동’할 권리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 역시 지닌다. ‘교권 침해’ 담론이 결국 교사의 통제 권력과 권리의 경계를 흐리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사가 자유롭게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권한이 관리자나 학교에 의해 제재되는 것이 교사의 수업권 침해임에도 이는 ‘교권 침해’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주요하게 교권을 침해하는 주체는 학생이나 학부모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레임이 간과하는 다른 영역들도 들여다보자. 예컨대 학내 비정규직 교사를 포함하여 학교의 고용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이에 따른 차별이 더 촘촘해진 데 반해, 이들의 학교에서의 차별 경험은 으레 정규직 교사의 권리라고 여겨지는 ‘교권’ 프레임에서는 해석될 수 없다. 남학생의 여교사 성희롱 사건을 ‘교권 실추’로 바라보는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담론에서는 학교 내 강력하게 작동하는 젠더 권력을 간과하며, 동시에 해당 여교사가 학생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라는 낙인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교권 침해’ 프레임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힘겨루기로 볼 때, “교권은 가부장의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❷
지금의 교권 담론
최근 ‘교권’에 대한 논의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앞의 그림의 기사 추이를 보면 2010년 초 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후로도 교권에 대한 논의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러한 기사들은 2018년 전후, 2022년 전후로 한 번 더 증가하는 흐름을 보인다. 2018년 이후로 대두되었던 학내 스쿨미투 운동과 2022년 전후로 본격화된 초등학교 아동학대 신고의 영향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 두 사건은 학생의 권리를 경유하지 않는 방식의 ‘교권’, 교사의 권익과 피해-가해의 구도를 유지한다는 데서 유사성을 갖는다.
먼저, 스쿨미투 운동을 떠올려 보자. 스쿨미투 운동 이후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학교와 교육청의 빠른 대처는 스쿨미투 운동을 학교 구조의 위계, 폭력에 대한 폭로에서 가해자-피해자 간의 관계로 축소했다. 이렇게 축소된 프레임에서 피해자들은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는 비난부터 학교의 명예를 실추했다거나 ‘꽃뱀’ 혹은 ‘영악한 청소년’이라는 백래시를 감당해야 했다. 반대로 가해 교사들은 문제의 행동이 ‘교육을 목적으로 한 합당한 행위’였음을 강변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명명백백한 성폭력적 가해 행동과 무고한 학생 피해자 외에는 인정될 수 없는 ‘순수한 미투’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뚜렷한 가해자-피해자 구도에서 불거져 나왔던 논의 중 하나가 ‘교권 침해’였다. 영악한 학생들이 교사를 가해자로 몰아가고 있으며(다음 그림 참고) ‘거짓 미투’가 횡행한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교사나 학교의 성폭력적 구조에 대한 정당한 문제 제기는 학교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가해자 대 피해자의 구도는 학교 문화를 돌아보게 하기보다는 악한 교사 개인의 문제로 치환되어 다루어졌다.
스쿨미투 고발은 ‘친밀함’ 혹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졌던 위력적 폭력, 성폭력적 문화에 대한 폭로이자 공론화였다. 그리고 피해와 일상적인 문제 제기를 발화할 수 없는 학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공론장이 부재한 현실에서 스쿨미투는 ‘교권’의 대척점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스쿨미투 운동에서 교권 침해 프레임은 학교의 불평등한 권력 구조와 성폭력적 문화를 다루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운동 이후 학교의 변화도 요원했다. 권력의 불균형한 상황은 계속되었고, 문제 해결을 위한 평등하고 안전한 공론장 자체가 형성되는 데까지 갈 수 없었다.
더불어 최근 초등학교에서의 아동학대 신고는 거의 모든 교원 노조 및 단체에서 다루고 있을 정도로 활발히 논의되는 주제다. 2010년대 초의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법’ 발의나 학생인권조례 반대의 움직임이 교총을 중심으로 했다면, 아동학대에 관해서는 모든 교원 노조의 기조가 유사하다. 이는 전교조의 아동학대 사안 처리 과정 실태 조사에서 교사의 98%가 사안 처리 과정에서 ‘교권 침해’가 발생한다고 응답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아동학대 신고의 가장 큰 문제는 사안 처리 시스템이 사법화된 문제 처리 방식으로 기능하며 구체적인 상황 맥락이 소거된다는 점에 있다. 특히 사건이 바로 수사 기관으로 넘어가는 등 매뉴얼에 따른 처리 과정은 교사가 고립되게 하고, 학교의 공동체적인 해결을 어렵게 한다. 또한,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법에 대한 과잉 의존의 예시가 되며, 아동학대 신고는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민원 및 소송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즉 행위 주체의 관심 대부분이 입법 과정에 들어가면서 공동체적 숙의에 참여할 동기를 잃게 된 것이다.❸
이렇게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동하는 아동학대 신고를 교권의 침해로 해석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를 악덕 학부모와 교사 개인 사이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아동학대 신고를 ‘악의적인 민원’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교육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상적이고 세세한 폭력과 교육의 경계를 톺아보기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❹
아동학대적일 수 있는 학교교육에 대한 성찰
지난 7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진행한 수다회가 있었다. 수다회에서는 그동안 아동학대로 고발되었던 사례들이 어떤 점에서 아동학대일 수 있는지, 혹은 아동학대가 아닌지를 구분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아동학대의 경계에 있는 것들, 교사의 권한, 학생인권 등 고려해야 할 지점들을 살피면서 참여자들로부터 다양한 질문들이 나왔다. ‘사법적인 판단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학생인권 침해를 모두 아동학대로 볼 수 있을까?’, ‘왜 교권 담론은 학생인권 논의의 대립 항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일까?’ 등 심도 있는 질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활동가 민서의 질문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민서는 아동학대 사례를 보면서 아동학대의 주체가 교사인 것인지, 아니면 현재의 학교교육 자체가 아동학대적인지를 다루기 어렵다는 점을 짚었다. 예컨대 학교교육에서 평가가 학생들을 줄 세우기 하기에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작동할 때, 과연 아동학대의 주체를 교사 개인으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교육이 아동학대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는 채로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여기는 방식이 가지는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민서의 질문을 들으며, 최근 교원단체들의 「아동복지법」과 ‘아동학대처벌법’ 개정 요구에 교육이 아동학대적이거나 학생인권 침해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 빠져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스쿨미투 이후 학교가 성폭력적인 문화를 돌아보는 데 실패했듯이, 우리는 아동학대 사건에서도 아동학대적일 수 있는 학교교육에 대한 성찰을 간과해 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동학대 신고의 증가를 교사 대 학부모, 교사 대 학생이라는 대립 항으로만 치환하는 과정이 정작 교육 자체를 돌아보기 어렵게 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적 교육운동의 초점은 학교의 구조적 변화와 교육에 대한 성찰이라고 믿는다. 학생들의 목소리 내기를 막는 추상적이고 실체 없는 권한이 아닌, 학교 구조와 교육의 방향을 중심으로 볼 때야만 권리는 노동 형태, 젠더, 계급, 학교 권력 구조 등 다양한 측면을 포섭하고 확장하는 방향에서 논의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누군가의 권리를 짓밟지 않는 형태, 그러니까 학교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일원이자 변화할 수 있는 주체로서 교원의 위치와 권리에 주목해 보자.
❶ 고등학교에서 남학생이 여교사를 성희롱하며 “누나, 사귀자”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한 동영상이 유포된 사건이다.
❷ 조영선, 〈교권 침해를 걱정하신다고요?〉, 《시사IN》, 558호, 2018년 5월 29일.
❸ 성열관(2023), 〈관계와 법 사이에서 : 학교의 사법화에 대한 대응 전략〉,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2차 월례포럼 자료집》.
❹ 하영(2023), 〈‘아동학대’라는 언어가 교육에 대한 성찰이 되려면 - 아동학대 신고 시스템의 한계와 가능성〉, 《오늘의 교육》, 72호(2023년 1·2월), 교육공동체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