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가 거짓말을 할 수 있듯
독립영화도 구태일 수 있다
이윤승
autoki6@naver.com
본지 편집위원,
서울 이화여대부설미디어고 교사
손경원 감독, 〈양치기〉, 2024
난 시네키드였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고,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다. 정 안 되면 비디오 대여점이라도 하고 싶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던 시절의 동네 대여점은 나에겐 만화방이자 도서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구석에 있으면 사장님에게 영화를 소개하면서 극장에서 개봉을 못 한 탓에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보고 나면 다들 좋아할 거라며 위치를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반대로 아무리 인기가 많은 영화라도 내가 싫어하는 영화들은 대여점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만든 대여점에서는 이런 영화에는 절대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혼자 미래의 사업을 구상해 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모든 계획은 어느 것 하나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교사가 되었지만 지금도 영화를 보는 것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상이다. 그리고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에 대한 태도도 예전과 비슷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여러 번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영화는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지 않고 누군가의 필모그래피에만 한 줄 남기고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시간 때우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별로인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서 제작자나 감독이 또 비슷한 영화를 만들게 하고 싶지 않다. 〈범죄도시〉처럼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고 계속 후속작이 나오고 천만이 넘는 사람의 기억에 남아서 안타까운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바람이 운동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괜찮다. 시네키드 시절부터의 습관 같은 개인적인 실천이다. 그리고 가끔은 내 인근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때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영화 〈양치기〉를 보고 나서도 내 습관이 시작되었다.
영화에 대한 소개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은 손경원 감독은 기자 간담회[ref]“[기자 간담회] 감독 손경원 “어떻게 해야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위드인뉴스〉, 2024년 6월 5일
“[인터뷰] 손경원 감독 “편견과 오해, 그리고 어른의 자세”, 〈KBS미디어〉, 2024년 6월 11일.[/ref]에서 영화 제작 의도를 설명하며 2019년, 아동학대 문제가 이슈가 될 당시,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꼈고, 더불어 ‘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순환하듯 반복되는 걸까?’라는 의문에서 이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사건들이 영화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았다며 교직 트라우마, 교권, 학생인권 등의 학교 이야기를 다루게 된 배경을 밝혔다. 감독의 첫 고민의 결과는 학생의 허위 신고로 폭력 사건에 휘말린 교사의 억울함을 통해 인간의 잠재적인 광기와 분노를 그린 단편 영화 〈방과 후〉(2020)였고 감독은 단편에서 의도가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서 장편 〈양치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단편에서는 방과후학교 교사이고 장편에선 정규직 교사이긴 하지만 두 영화는 모두 학생의 허위 신고와 폭력 사건에 휘말린 교사의 억울함을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하필이면 아동학대 이슈가 반복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교사의 억울함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을까. 감독의 다른 인터뷰를 살펴보면 장편 기획 단계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영화를 기획할 당시에 아동학대 사건이 너무 많았다.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까. 그런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형식으로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아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정년을 얼마 안 남기고 그만두신다고 하더라. 요즘 아이가 무서워서 관둔다는 것이었다. 교사와 아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개발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 같다.”[ref]앞의 인터뷰 기사, 〈KBS미디어〉, 2024년 6월 11일.[/ref]
아마도 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요즘 아이들이 무섭다”는 말이 이 영화를 구상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동학대를 당하고 있는 피해 학생이 지옥 같은 삶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로 교사를 위기에 빠뜨린 상황, 교사와 학생은 화해에 이를 수 있을까? 초등 교사의 순직 1주기를 앞두고 펼쳐지는 교권 강화의 목소리와 학생인권조례 폐지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은 소통할 수 있을까? 영화는 과연 교사와 학생을 위한 소통의 시작을 이끄는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교사와 학생의 불신만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쓰일까.
연출의 나태함
난 영화라는 매체를 좋아하는 만큼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 영화가 끝나고 남는 질문들이 무엇이든 대부분은 반갑다. 좋은 영화를 볼 때면 당연히 좋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이라도 ‘왜 감독은 이렇게 연출하고 편집했을까’, ‘왜 배우는 저렇게 연기했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지만 그 순간도 즐겁다. 그런데 가끔 반갑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 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영화를 통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할 감정을 감독이 주입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고, 그다음은 연출자의 나태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연출했을까’와 같은 질문을 할 여지도 없이 뻔한 연출을 보고 있으면 나태함이 느껴진다. 영화 〈양치기〉는 둘 모두에 해당하는 영화였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연출의 부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때론 감독과 나란히 걷고 때론 감독과 반대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며 감독이 짜 놓은 이야기 구조 속에서 관객과 배우가 서로 소통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질문을 하게 하는 게 좋은 영화이다. 하지만 〈양치기〉의 이야기는 갈등은 있지만 질문할 것들이 없었다. 이것은 학교, 학생, 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고 그만큼 감독이 학교, 학생, 교사에 대해 고민을 깊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 고민과 이해가 부족하니 감독만의 고유한 시선이 영화에서 드러나지 못했고 대중이 이미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아마도 감독은 여러 영화를 래퍼런스로 삼았을 것 같다. 학교가 무대이고, 학생과 교사의 갈등 상황이 나오기에 〈더 헌트〉, 〈디태치먼트〉, 〈괴물〉, 〈클래스〉, 〈티처스 라운지〉와 같은 영화를 이미 봤을 수 있고 그런 영화들과 한 카테고리에 묶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서 보고 싶었지만 위의 영화들에서 본 것 같은 장면들만 나올 뿐 위의 영화들과 비교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혹시나 내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나 싶어 〈양치기〉를 보고 온 날 밤새 위의 영화들을 다시 보았지만 전혀 비슷한 결의 영화도 아니었고 감독만의 새로운 해석도 없었다.
오히려 〈양치기〉를 다 본 후에 먼저 떠올랐던 것은 어렸을 때 본 〈위험한 아이〉였다. 〈나홀로 집에〉 이후 맥컬리 컬킨이 이미지 변신 차 찍은, 착해야 마땅한 어린이의 악행들을 나열하는 방식의 스릴러 영화였다. 공포라고는 하지만 개연성도 떨어지고 이야기도 밋밋하기만 해서 지루하게 봤던 기억이 있었는데 아동을 바라보는 방식과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의 진부함 때문인지 〈양치기〉를 보는 동안 자연스레 떠올랐다. 〈양치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이 배우의 천진함과 그 이면의 악함을 공식처럼 표현하려는 표정에서 〈위험한 아이〉에서 봤던 맥컬리 컬킨이 살짝 보였다. 아동의 천진한 듯한 웃음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장면은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동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우리는 혐오의 대상에 대해 과하게 공포심을 갖거나 과하게 무관심하다. 〈양치기〉에서 그려 낸 아동의 모습이 딱 그랬고 감독이 아동을 바라보는 방식도 그 틀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동을 무시한다. 감독은 그렇게 무관심한 어른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를 위해 주인공이 같은 장면을 다르게 대하는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초반부 밤거리에 모여 있는 어린이들을 보고는 꺼림직해하지만 애인이 “그냥 애들끼리 노는 거 같은데”라는 말에 무심코 지나갔는데, 후반부에서는 같은 상황에 “너희 거기서 뭐 하니?”라고 묻는 장면을 대비시키며 주인공의 심정의 변화를 보여 주고 관객에게도 그 정도의 관심은 가져 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감독이 말하고 싶은 소통의 방식이 그렇게 어른으로서 수직적으로 한마디하는 것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마치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주위의 쓰레기를 주워 보자며 끝나는 캠페인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감독의 나태함이 비단 아동의 묘사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대체로 모든 인물에 대해 대중의 편견에 기대어 혐오를 조장하는 듯한 묘사를 하고 있다. 주인공 교사에 대한 첫 묘사는 보육원에서 교육 봉사를 하며, 비싸 보이는 머리끈을 보육원의 아이에게 망설임 없이 선물해 주는 장면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주인공 교사는 주중엔 학교에서, 주말엔 보육원에서 봉사를 하는 설정을 하고 표본의 대조군으로는 보육원의 원장을 선택했다. 둘 모두 작위적인 인물 설정이다.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머리끈을 선물하는 교사와 그 머리끈을 아이가 훔쳤을 거라며 의심하고 혼내는 보육원 원장의 대립 구도. 보육원 원장은 항상 그런가. 아이를 무시하고 지원금만 탐내는 어른이자 교육자로서 윤리의식은 없는 사람. 좋은 선생님의 대조군으로써 손색없을 수는 있지만 이과 같은 전형성은 보육원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강화시킬 뿐이다. 둘의 대비가 더 필요했는지 희생자 학생도 등장한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힘 없이 울고 있는 선생님처럼 착한 여자아이. 원장에게 화내며 이것은 훔친 게 아니고 내가 준 것이라고 화를 내며 아이를 안아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선생님 사이에서 여자아이는 울고 있다. 스스로 싸우지 못하고 힘없이 당하고 울고만 있는 연약한 아이다. 뒤에 나올 혐오스러운 어린이와는 반대되는 가냘픈 어린이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보호해 주고 싶고 보호를 원하는 어린이.
이처럼 영화는 착한 교사, 착한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시작되지만 공포물답게 감독은 이를 비틀어 보려고 한다. 감독은 신선하게 보일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그 방식이 또 진부하다. 결혼을 준비하는 착한 여교사는 부모의 이혼을 숨기기 위해 애인에게 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양치기’로 제목을 정하며 소년이 아닌 어른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등장시킨 장면이 기껏 부모의 이혼 경력을 숨긴 정도인가. 교사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설정 역시 진부하다. 역시 착해 보였던 남교사 애인은 자기 부모를 만나러 가는 여교사에게 좋은 일도 아니니 그냥 이혼 사실은 굳이 자기 부모에게 말하지 말자고 한다. 남교사는 이후 줄곧 가식적인 교사이자 ‘한남’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주인공 주위의 교사들도 딱 전형적인 교사들뿐이다. 승진을 위해 문제를 회피하는 교감, 화장실에서 뒷담화하는 여교사들처럼 나쁜 교사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은 교사들이 등장하면서 주인공 교사가 학교에서 고립되는 일이 마치 몰염치한 교사들 때문인 것처럼 비치며 학교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는 숨겨진다.
감독의 차별적 시선과 진부한 표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학생은 잘 씻지도 못하고 옷도 지저분하다. 아이의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 잠시 생각해 보라. 이미 많은 영화에서 본 익숙한 장면이다. 아이는 한부모 가정이고 가난하다. 엄마는 성노동자인 듯하고 계부는 아니지만 계부 같은 존재와 같이 지낸다. 당연히 그 남자는 폭력적이다. 엄마와 엄마의 애인은 아이가 보는 앞에서도 섹스를 멈추지 않을 정도이고 남자는 아이를 폭력적으로 대하지만 엄마는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다. 감독은 뒤에 붙어 나올 이야기를 위한 절묘한 구성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한보모 가정, 가난,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만 강화시킨다.
영화가 아동학대를 다루는 방식
아동학대로부터 구출되고 싶은 욕망이 컸던 아이는 교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왜 굳이 집까지 따라가서 선생님의 집이 열리는 순간 선생님 앞에 나타나서 도움을 청할까. 분명 높은 층의 아파트인 것 같은데 어떻게 교사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아이를 못 알아봤을까? 만약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온 것이라면 왜 굳이 아이는 교사 몰래 계단으로 올라온 것이며, 교사가 사는 층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빨리 쫓아온 것일까. 아무것도 이해가 될 리 없지만 이해할 필요도 없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갈등 상황을 시작은 해야겠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혀 버린 상황에서 찾아낸 고육지책일 뿐이다. 영화 소개 페이지엔 바로 이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 저 배고파요.” 어느 날, 담임 교사 수현을 따라 집까지 찾아간 요한, 수현은 가정의 보살핌을 못 받고 있는 듯한 요한에게 밥을 먹여 돌려보낸다. 하지만 그날의 일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상처가 덧나는 수현, 상처가 아물어 가는 요한.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서로가 필요하다.
대체 왜 집에 찾아오는 무리한 설정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나타난다.
집에 찾아온 남학생과 여교사. 이것은 몇 년 전부터 심해진 젊은 여자 교사들의 공포 트리거를 건드리는 설정이다. 영화에선 굳이 이 장면에서 아이가 여교사의 가슴을 만지게 해서 노골적으로 공포의 심리를 강화시킨다. 이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한 빌드업으로 엄마와 엄마의 애인의 섹스 장면을 보는 장면과 엄마와의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잠든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을 배치했다. 그러더니, 감독은 본격적으로 판타지 호러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아이가 교사가 도어 락을 여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장면을 배치한 후 가출한 아이가 여교사의 집 침대 밑에서 지내는 장면을 보여 준다. 심지어 애인과 섹스를 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침대 밑에 숨어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까지는 바라지 않는다.[ref]〈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감독 숀 베이커는 빈곤, 성노동, 아동 방임의 상황에 대해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담백하게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 아동에게 필요한가에 대해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영화 내내 고정관념을 가진 관객에게 혼란을 주면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토론을 가능케 하고자 했다.[/ref] 하지만 이렇게 쉽게 아동학대를 묘사하며 성노동자 엄마의 이미지를 소모하고 성에 노출된 아이가 여교사를 성추행하고 집에 숨어 있는 설정에서 성노동자는 영화의 가학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감독이 기획 의도에서 밝힌 대로 반복되는 아동학대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우는 것이 영화 제작의 동기였다면 이렇게 해서는 그 목적에 다가갈 수 없다. 아동학대의 피해자이자 다른 사건의 가해자 역할을 동시에 맡은 인물을 통해서는 감정 이입도, 공감도 어려웠고 아동학대의 가해자인 양육자를 지나치게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아동학대의 다양한 원인을 살필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아동학대에 대한 감독의 진정성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동학대에 대한 고민을 영화에 풀어내기엔 감독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동학대가 왜 반복되는가를 고민했던 감독의 결론은 학대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가정에서 탈출하여 보육원에 들어간다. 매일 다크서클이 가득하던 아이는 보육원에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다시 교사를 만난다. 그 옆엔 여교사가 선물해 준 머리끈을 한 그 아이가 있다. 아이는 이제 착해질까? 이제 거짓말하지 않고 학대 없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교사도 이제 거짓말하지 않고 편견을 갖지 않은 좋은 선생님이 다시 될 수 있을까? 이제 주위 어른들은 아이를 잘 돌봐 줄까? 세상의 어른들은 더 이상 거짓 없이 아이를 대하게 될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영화 〈양치기〉를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작자와 배급사는 어쩌면 2024년
6월에 개봉하면 젊은 여교사들의 공감을 사면서 2024년 7월 순직 교사의 1주기까지 꽤 흥행할 것으로 여겼을 것 같다. 고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런 영화라면 2024년 6월엔 개봉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아동 혐오와 교사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호러 영화를 통해서는 상처를 치유받을 교사도 없고 이와 같은 연출로는 아동학대의 반복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시네키드였던 것처럼 감독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분명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클 것이다. 모든 감독이 첫 영화부터 성공적일 수는 없다. 부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감독이라면 문제를 멀리서 관망하지만 말고 문제의 현실에 들어와 고민하고 이야기를 풀어 가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좋은 감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린이가 거짓말을 할 수 있듯
독립영화도 구태일 수 있다
이윤승
autoki6@naver.com
본지 편집위원,
서울 이화여대부설미디어고 교사
손경원 감독, 〈양치기〉, 2024
난 시네키드였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고,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다. 정 안 되면 비디오 대여점이라도 하고 싶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던 시절의 동네 대여점은 나에겐 만화방이자 도서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가 구석에 있으면 사장님에게 영화를 소개하면서 극장에서 개봉을 못 한 탓에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보고 나면 다들 좋아할 거라며 위치를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요청하기도 했다. 반대로 아무리 인기가 많은 영화라도 내가 싫어하는 영화들은 대여점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만든 대여점에서는 이런 영화에는 절대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혼자 미래의 사업을 구상해 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모든 계획은 어느 것 하나 이뤄지지 않았고 결국 교사가 되었지만 지금도 영화를 보는 것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상이다. 그리고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에 대한 태도도 예전과 비슷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여러 번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영화는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지 않고 누군가의 필모그래피에만 한 줄 남기고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시간 때우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렇게 별로인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서 제작자나 감독이 또 비슷한 영화를 만들게 하고 싶지 않다. 〈범죄도시〉처럼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고 계속 후속작이 나오고 천만이 넘는 사람의 기억에 남아서 안타까운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바람이 운동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니 괜찮다. 시네키드 시절부터의 습관 같은 개인적인 실천이다. 그리고 가끔은 내 인근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때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영화 〈양치기〉를 보고 나서도 내 습관이 시작되었다.
영화에 대한 소개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은 손경원 감독은 기자 간담회[ref]“[기자 간담회] 감독 손경원 “어떻게 해야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위드인뉴스〉, 2024년 6월 5일
“[인터뷰] 손경원 감독 “편견과 오해, 그리고 어른의 자세”, 〈KBS미디어〉, 2024년 6월 11일.[/ref]에서 영화 제작 의도를 설명하며 2019년, 아동학대 문제가 이슈가 될 당시,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꼈고, 더불어 ‘왜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순환하듯 반복되는 걸까?’라는 의문에서 이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사건들이 영화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았다며 교직 트라우마, 교권, 학생인권 등의 학교 이야기를 다루게 된 배경을 밝혔다. 감독의 첫 고민의 결과는 학생의 허위 신고로 폭력 사건에 휘말린 교사의 억울함을 통해 인간의 잠재적인 광기와 분노를 그린 단편 영화 〈방과 후〉(2020)였고 감독은 단편에서 의도가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서 장편 〈양치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단편에서는 방과후학교 교사이고 장편에선 정규직 교사이긴 하지만 두 영화는 모두 학생의 허위 신고와 폭력 사건에 휘말린 교사의 억울함을 소재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하필이면 아동학대 이슈가 반복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교사의 억울함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을까. 감독의 다른 인터뷰를 살펴보면 장편 기획 단계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 영화를 기획할 당시에 아동학대 사건이 너무 많았다.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까. 그런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형식으로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제대로 전하고 싶었다. 아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정년을 얼마 안 남기고 그만두신다고 하더라. 요즘 아이가 무서워서 관둔다는 것이었다. 교사와 아이가 나오는 이야기를 개발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 같다.”[ref]앞의 인터뷰 기사, 〈KBS미디어〉, 2024년 6월 11일.[/ref]
아마도 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요즘 아이들이 무섭다”는 말이 이 영화를 구상하는 데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동학대를 당하고 있는 피해 학생이 지옥 같은 삶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거짓말로 교사를 위기에 빠뜨린 상황, 교사와 학생은 화해에 이를 수 있을까? 초등 교사의 순직 1주기를 앞두고 펼쳐지는 교권 강화의 목소리와 학생인권조례 폐지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은 소통할 수 있을까? 영화는 과연 교사와 학생을 위한 소통의 시작을 이끄는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교사와 학생의 불신만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쓰일까.
연출의 나태함
난 영화라는 매체를 좋아하는 만큼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 영화가 끝나고 남는 질문들이 무엇이든 대부분은 반갑다. 좋은 영화를 볼 때면 당연히 좋고 그렇지 않은 영화들이라도 ‘왜 감독은 이렇게 연출하고 편집했을까’, ‘왜 배우는 저렇게 연기했을까’와 같은 생각을 하지만 그 순간도 즐겁다. 그런데 가끔 반갑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 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영화를 통해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할 감정을 감독이 주입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고, 그다음은 연출자의 나태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왜 이렇게 연출했을까’와 같은 질문을 할 여지도 없이 뻔한 연출을 보고 있으면 나태함이 느껴진다. 영화 〈양치기〉는 둘 모두에 해당하는 영화였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연출의 부분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때론 감독과 나란히 걷고 때론 감독과 반대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며 감독이 짜 놓은 이야기 구조 속에서 관객과 배우가 서로 소통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질문을 하게 하는 게 좋은 영화이다. 하지만 〈양치기〉의 이야기는 갈등은 있지만 질문할 것들이 없었다. 이것은 학교, 학생, 교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이고 그만큼 감독이 학교, 학생, 교사에 대해 고민을 깊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 고민과 이해가 부족하니 감독만의 고유한 시선이 영화에서 드러나지 못했고 대중이 이미 갖고 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아마도 감독은 여러 영화를 래퍼런스로 삼았을 것 같다. 학교가 무대이고, 학생과 교사의 갈등 상황이 나오기에 〈더 헌트〉, 〈디태치먼트〉, 〈괴물〉, 〈클래스〉, 〈티처스 라운지〉와 같은 영화를 이미 봤을 수 있고 그런 영화들과 한 카테고리에 묶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면서 보고 싶었지만 위의 영화들에서 본 것 같은 장면들만 나올 뿐 위의 영화들과 비교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혹시나 내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나 싶어 〈양치기〉를 보고 온 날 밤새 위의 영화들을 다시 보았지만 전혀 비슷한 결의 영화도 아니었고 감독만의 새로운 해석도 없었다.
오히려 〈양치기〉를 다 본 후에 먼저 떠올랐던 것은 어렸을 때 본 〈위험한 아이〉였다. 〈나홀로 집에〉 이후 맥컬리 컬킨이 이미지 변신 차 찍은, 착해야 마땅한 어린이의 악행들을 나열하는 방식의 스릴러 영화였다. 공포라고는 하지만 개연성도 떨어지고 이야기도 밋밋하기만 해서 지루하게 봤던 기억이 있었는데 아동을 바라보는 방식과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의 진부함 때문인지 〈양치기〉를 보는 동안 자연스레 떠올랐다. 〈양치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이 배우의 천진함과 그 이면의 악함을 공식처럼 표현하려는 표정에서 〈위험한 아이〉에서 봤던 맥컬리 컬킨이 살짝 보였다. 아동의 천진한 듯한 웃음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장면은 클리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동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상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우리는 혐오의 대상에 대해 과하게 공포심을 갖거나 과하게 무관심하다. 〈양치기〉에서 그려 낸 아동의 모습이 딱 그랬고 감독이 아동을 바라보는 방식도 그 틀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동을 무시한다. 감독은 그렇게 무관심한 어른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될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를 위해 주인공이 같은 장면을 다르게 대하는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부각시킨다. 초반부 밤거리에 모여 있는 어린이들을 보고는 꺼림직해하지만 애인이 “그냥 애들끼리 노는 거 같은데”라는 말에 무심코 지나갔는데, 후반부에서는 같은 상황에 “너희 거기서 뭐 하니?”라고 묻는 장면을 대비시키며 주인공의 심정의 변화를 보여 주고 관객에게도 그 정도의 관심은 가져 보자고 말한다. 하지만 감독이 말하고 싶은 소통의 방식이 그렇게 어른으로서 수직적으로 한마디하는 것으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마치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주위의 쓰레기를 주워 보자며 끝나는 캠페인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감독의 나태함이 비단 아동의 묘사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대체로 모든 인물에 대해 대중의 편견에 기대어 혐오를 조장하는 듯한 묘사를 하고 있다. 주인공 교사에 대한 첫 묘사는 보육원에서 교육 봉사를 하며, 비싸 보이는 머리끈을 보육원의 아이에게 망설임 없이 선물해 주는 장면이다. 주인공이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주인공 교사는 주중엔 학교에서, 주말엔 보육원에서 봉사를 하는 설정을 하고 표본의 대조군으로는 보육원의 원장을 선택했다. 둘 모두 작위적인 인물 설정이다.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으로 아이에게 머리끈을 선물하는 교사와 그 머리끈을 아이가 훔쳤을 거라며 의심하고 혼내는 보육원 원장의 대립 구도. 보육원 원장은 항상 그런가. 아이를 무시하고 지원금만 탐내는 어른이자 교육자로서 윤리의식은 없는 사람. 좋은 선생님의 대조군으로써 손색없을 수는 있지만 이과 같은 전형성은 보육원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을 강화시킬 뿐이다. 둘의 대비가 더 필요했는지 희생자 학생도 등장한다. 아무 말도 못 하고 힘 없이 울고 있는 선생님처럼 착한 여자아이. 원장에게 화내며 이것은 훔친 게 아니고 내가 준 것이라고 화를 내며 아이를 안아 주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선생님 사이에서 여자아이는 울고 있다. 스스로 싸우지 못하고 힘없이 당하고 울고만 있는 연약한 아이다. 뒤에 나올 혐오스러운 어린이와는 반대되는 가냘픈 어린이다. 우리 사회가 바라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보호해 주고 싶고 보호를 원하는 어린이.
이처럼 영화는 착한 교사, 착한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시작되지만 공포물답게 감독은 이를 비틀어 보려고 한다. 감독은 신선하게 보일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그 방식이 또 진부하다. 결혼을 준비하는 착한 여교사는 부모의 이혼을 숨기기 위해 애인에게 아버지가 죽었다고 거짓말했다. ‘양치기 소년’이 아니라 ‘양치기’로 제목을 정하며 소년이 아닌 어른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등장시킨 장면이 기껏 부모의 이혼 경력을 숨긴 정도인가. 교사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설정 역시 진부하다. 역시 착해 보였던 남교사 애인은 자기 부모를 만나러 가는 여교사에게 좋은 일도 아니니 그냥 이혼 사실은 굳이 자기 부모에게 말하지 말자고 한다. 남교사는 이후 줄곧 가식적인 교사이자 ‘한남’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주인공 주위의 교사들도 딱 전형적인 교사들뿐이다. 승진을 위해 문제를 회피하는 교감, 화장실에서 뒷담화하는 여교사들처럼 나쁜 교사의 통념을 벗어나지 않은 교사들이 등장하면서 주인공 교사가 학교에서 고립되는 일이 마치 몰염치한 교사들 때문인 것처럼 비치며 학교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는 숨겨진다.
감독의 차별적 시선과 진부한 표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학생은 잘 씻지도 못하고 옷도 지저분하다. 아이의 부모는 어떤 존재일까. 잠시 생각해 보라. 이미 많은 영화에서 본 익숙한 장면이다. 아이는 한부모 가정이고 가난하다. 엄마는 성노동자인 듯하고 계부는 아니지만 계부 같은 존재와 같이 지낸다. 당연히 그 남자는 폭력적이다. 엄마와 엄마의 애인은 아이가 보는 앞에서도 섹스를 멈추지 않을 정도이고 남자는 아이를 폭력적으로 대하지만 엄마는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다. 감독은 뒤에 붙어 나올 이야기를 위한 절묘한 구성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한보모 가정, 가난, 성노동자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만 강화시킨다.
영화가 아동학대를 다루는 방식
아동학대로부터 구출되고 싶은 욕망이 컸던 아이는 교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런데 왜 굳이 집까지 따라가서 선생님의 집이 열리는 순간 선생님 앞에 나타나서 도움을 청할까. 분명 높은 층의 아파트인 것 같은데 어떻게 교사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아이를 못 알아봤을까? 만약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온 것이라면 왜 굳이 아이는 교사 몰래 계단으로 올라온 것이며, 교사가 사는 층은 어떻게 알고 그렇게 빨리 쫓아온 것일까. 아무것도 이해가 될 리 없지만 이해할 필요도 없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갈등 상황을 시작은 해야겠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혀 버린 상황에서 찾아낸 고육지책일 뿐이다. 영화 소개 페이지엔 바로 이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선생님, 저 배고파요.” 어느 날, 담임 교사 수현을 따라 집까지 찾아간 요한, 수현은 가정의 보살핌을 못 받고 있는 듯한 요한에게 밥을 먹여 돌려보낸다. 하지만 그날의 일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한 번의 거짓말로 인해 상처가 덧나는 수현, 상처가 아물어 가는 요한.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서로가 필요하다.
대체 왜 집에 찾아오는 무리한 설정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나타난다.
집에 찾아온 남학생과 여교사. 이것은 몇 년 전부터 심해진 젊은 여자 교사들의 공포 트리거를 건드리는 설정이다. 영화에선 굳이 이 장면에서 아이가 여교사의 가슴을 만지게 해서 노골적으로 공포의 심리를 강화시킨다. 이 장면을 보여 주기 위한 빌드업으로 엄마와 엄마의 애인의 섹스 장면을 보는 장면과 엄마와의 애착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가 잠든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을 배치했다. 그러더니, 감독은 본격적으로 판타지 호러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린다. 아이가 교사가 도어 락을 여는 모습을 유심히 보는 장면을 배치한 후 가출한 아이가 여교사의 집 침대 밑에서 지내는 장면을 보여 준다. 심지어 애인과 섹스를 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침대 밑에 숨어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까지는 바라지 않는다.[ref]〈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감독 숀 베이커는 빈곤, 성노동, 아동 방임의 상황에 대해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를 담백하게 보여 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 아동에게 필요한가에 대해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영화 내내 고정관념을 가진 관객에게 혼란을 주면서 공적인 영역에서의 토론을 가능케 하고자 했다.[/ref] 하지만 이렇게 쉽게 아동학대를 묘사하며 성노동자 엄마의 이미지를 소모하고 성에 노출된 아이가 여교사를 성추행하고 집에 숨어 있는 설정에서 성노동자는 영화의 가학성의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감독이 기획 의도에서 밝힌 대로 반복되는 아동학대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우는 것이 영화 제작의 동기였다면 이렇게 해서는 그 목적에 다가갈 수 없다. 아동학대의 피해자이자 다른 사건의 가해자 역할을 동시에 맡은 인물을 통해서는 감정 이입도, 공감도 어려웠고 아동학대의 가해자인 양육자를 지나치게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아동학대의 다양한 원인을 살필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아동학대에 대한 감독의 진정성이 부족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동학대에 대한 고민을 영화에 풀어내기엔 감독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동학대가 왜 반복되는가를 고민했던 감독의 결론은 학대하는 자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가정에서 탈출하여 보육원에 들어간다. 매일 다크서클이 가득하던 아이는 보육원에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다시 교사를 만난다. 그 옆엔 여교사가 선물해 준 머리끈을 한 그 아이가 있다. 아이는 이제 착해질까? 이제 거짓말하지 않고 학대 없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될까? 교사도 이제 거짓말하지 않고 편견을 갖지 않은 좋은 선생님이 다시 될 수 있을까? 이제 주위 어른들은 아이를 잘 돌봐 줄까? 세상의 어른들은 더 이상 거짓 없이 아이를 대하게 될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영화 〈양치기〉를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작자와 배급사는 어쩌면 2024년
6월에 개봉하면 젊은 여교사들의 공감을 사면서 2024년 7월 순직 교사의 1주기까지 꽤 흥행할 것으로 여겼을 것 같다. 고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런 영화라면 2024년 6월엔 개봉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아동 혐오와 교사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호러 영화를 통해서는 상처를 치유받을 교사도 없고 이와 같은 연출로는 아동학대의 반복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시네키드였던 것처럼 감독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분명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클 것이다. 모든 감독이 첫 영화부터 성공적일 수는 없다. 부디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감독이라면 문제를 멀리서 관망하지만 말고 문제의 현실에 들어와 고민하고 이야기를 풀어 가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좋은 감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