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호[테마 에세이] 기간제 교사로 사는 법 | ‘땜빵 교사’의 자리에서 바라본 학교의 풍경 | 현유림

2024-07-29
조회수 135

테마 에세이 | 기간제 교사로 사는 법


‘땜빵 교사’의 자리에서 바라본 학교의 풍경


현유림

hisummerimoon@gmail.com

초등 교사이자 노동자



정교사가 되어야만 할까?

 

고등학생 때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뒤로 늘 한결같이 교사가 되고 싶었다. 교사가 되고 싶거나 교사로 계속 지내고 싶은 사람들의 동기는 각각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모두가 임용 시험 공부를 하는 4학년 때 나는 막 시작된 코로나19를 핑계로 방 안에 드러누워 있었고 졸업을 한 뒤에도 마찬가지로 시험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는 것이 교사로서 겪어야 하는 경험적 가치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과정 원문과 교과서 내용을 달달 암기해서 줄줄 써 내려가는 시험 공부가 그 자체로는 별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험에 합격하면 물론 좋겠지만, 언제 합격할지도 모르는 시험 준비 과정에서 가치를 찾지 못한 채 결과만을 바라보고 의미 없는 단어와 문장들을 외우며 하루를 보내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교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준비는 시험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교사는 다양한 특성을 가진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평등한 관계 맺기를 통해 배움을 제공하는 사람이었는데, 모두가 열심히 하더라도 누군가는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상대 평가로 줄을 세워 ‘합불’을 결정하는 임용 시험은 이러한 교사가 되기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험을 치지 않더라도 교사가 될 수는 있었다. 기간제 교사로 지내면 된다. 결국 임용 시험을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해받지 못할 것이 뻔한 결정 앞에서 자부심을 가져 보고자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 보기도 했는데, 이때 내가 붙인 나의 이름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교사라는 의미를 가진 ‘보따리 교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붙인다 한들, 사람들은 나를 ‘교사 지망생’ 정도로 생각했다. 마치 기획사와 계약을 마치고 이미 데뷔한 그룹의 무대에 댄서로 서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발매한 음원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돌 지망생’으로 간주되는 기획사의 연습생들처럼 말이다. 그 덕에 학교에서 내게 기대하는 바가 없어 책임을 떠맡지 않아도 된다는 편함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교사’가 되고 싶어서 이 일을 하고 있고 또 이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나도 다른 교사들과 같은 교사인데 왜 나는 언제나 ‘교사 지망생’에 머무르는 건지, 그래서 기대도 의무도 없는 상태가 되는 건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지만, 정교사가 아닌 어린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타인에 의해 ‘교사 지망생’으로 분류되며 배제되고 싶지는 않았다.

 


담임 자율권이 적용되지 않는 담임

 

초등학교의 장점이자 단점은 교실을 꾸려 가는 방식에 있어서 담임 교사의 자율권이 비교적 높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루 내내 담임 교사와 함께 지내는 학생들에게 교사가 왕처럼 군림하게 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교사들이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반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태블릿으로 수업하는 반, 청소가 완전 중요한 반 같은 정체성을 각 반마다 다르게 꾸려 가는 분위기가 초등학교에서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만큼은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갈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편이었는데, 옆 반 선생님들이 내가 교실에서 적용하는 방식을 못마땅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는 공을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학생들과 회의에서 정했지만 옆 반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어디 교실에서 공놀이하냐’며 공을 마음대로 뺏어 간 적이 있다. 또 한번은 학생들과 회의를 통해 점심시간에는 휴대폰 게임을 해도 된다는 규칙을 만든 적이 있는데, 옆 반 선생님이 나를 불러내어 학생들이 휴대폰 게임을 못 하게 지도하라는 ‘정중한’ 지시를 한 적도 있다. 옆 반 선생님의 ‘애들한테 게임 허용은 좀 아니지 않냐’는 말에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척 ‘그럼 유튜브는 괜찮을까요?’라고 대답했다가, 한숨과 함께 ‘그냥 좀 하지 말라면 하지 않게 하라’는 말이 돌아와서 순간 등골이 섬뜩해졌던 기억이 있다.

내가 잠시 머무르는 ‘땜빵’이 아니라 정식 담임이었다면 내게만 콕 집어 마치 상사처럼 지시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혹은 땜빵일지라도 경력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많았더라면, 내 나이가 그만큼 많았더라면 어땠을까? 학생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교사는, 많은 경우에 동료 교사도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것 같다.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도 무시하지 않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통제해야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수련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놀랍게도 아직도 조교 선생님의 호통을 들으며 군대식 훈련을 맛볼 수 있는 수련원에 특정 학년이 되면 필수로 가야 하는 지역이 존재한다.)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는 소규모 학교였고, 내가 수련회에 가는 학년의 담임 교사였기 때문에 수련회와 관련된 대부분의 업무를 내가 맡아서 하는 상황이었다. 학생들과 가게 될 수련원에 대해 미리 전화로 안내를 받고 사전 답사도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담당자와 이야기를 했을 때 학생들 휴대폰을 걷는 것은 필수가 아니고 학교 자율이라고 해서 학생들과 학급 회의 때 어떻게 할지 정했다. 결과는 ‘우리는 안 걷는다’로 나왔고, 학생들은 수련원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공포를 조금이나마 내려놓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대망의 수련회 첫째 날,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휴대폰을 걷어야 한다고 수련원에서 통보했고 몇몇 학생들은 서러운 마음에 항의를 하다 울음을 터뜨렸다. 분명 학교에서 자율적으로 정하라 했는데, 막상 당일에 와 보니 다른 학교에서 휴대폰을 걷으니까 우리 학교도 똑같이 걷어야 한다고 했다. 안내받았던 부분과 다르지 않냐고 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 따르라고만 했다. 저연차의 어린 여교사가 혼자서 문제를 제기하면 바뀌기는커녕 그냥 소란스러운 사람만 되어 버린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데 정말 비참했다.

‘비청소년’ 그리고 ‘교사’ 정체성으로 학생들의 임시 보호자로 일하더라도 어딜 가든 나보다 나이 또는 경력이 더 많은 비청소년이 있기 때문에, 결국에 나는 그냥 무능력한 ‘젊은 애’가 되곤 한다. 학생들을 최소한의 ‘보호’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나이주의 중의 나이주의이고 참으로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분노하는 학생들을 난처한 표정으로 달래는 내 속에서는 울화통이 터지고 있었고 눈물이 막 쏟아질 것 같은 마음이 들끓었다. 시키는 대로 따르며 허허실실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부당함에 끝까지 분노하고 따지고 싶었는데. 무능한 나머지 더 싸우기를 포기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사람 좋은 사람의 표정을 지어야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결국 학생들에게 밤에 몰래 휴대폰을 빼돌려 주는 방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아 영 마음이 찜찜했다. 또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학생들을 휴대폰 빼돌리기 작전에 공범으로 가담시킨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통제를 싫어하는 사람이 교사로 지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지 않더라도 나보다 발화 권력이 높은 교사가 학생들을 통제하라고 지시하면 그에 따르거나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속상하다. 반 학생들은 담임 교사가 통제하고, 담임 교사는 관리자가 통제한다. 그리고 기간제 교사는 동료 교사들에게도 통제당한다.

 


관계 맺기를 이어가는 것의 어려움

 

학생들과 평등한 관계 맺기 경험을 만들어 가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지만, 관계 맺기를 시작하는 것부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단지 나와 학생 사이의 역동이 문제였다기보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것의 제도적 한계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느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초등학교는 대체로 병가를 낸 교사가 생겼을 때 그 빈자리를 잠시 메우는 방식으로 기간제 교사가 투입되기 때문에 학생들도 나를 잠깐 있다 곧 떠날 외부인으로 생각하게 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할 ‘진짜’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벽을 더 높게 갖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과의 만남이 짧지만 교실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벽을 낮추어 보려 전전긍긍하다 보면 계약 기간이 금세 끝나 버리곤 했다.

또한 이런 한정된 짧은 기간 때문에, 멀리까지 길게 보고 가야 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어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갈등이 생겼을 때는 갈등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을 같이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적인 수업이나 생활 양식을 꾸준히 만들어 가야 하는데, 잠깐 투입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일어난 일들만 급급히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학생들과 보다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었는데, 기간제 교사가 투입되는 방식이 가지는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이를 실현하기에는 어려운 구조였다.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말이 있다. 내게는 책임질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되고 없는 상태에서, 어긋난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학교라는 공간에서 무력해지는 내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무책임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점점 싫어지기만 했다. 내게 권한은 없는데 권한 없음 상태에서 느끼는 찌꺼기 같은 감정들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가령, 학교장이 일방적으로 만들어 버린 시험을 학생들이 추가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학생들과 토론해서 시험에 대한 의견을 모으는 수업까지는 했지만 그 이후에 함께 문제를 제기하거나 시험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곧 떠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촉박한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허겁지겁 지켜 내려 한 것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써클 대화였다. 써클 대화는 반 학생들이 하나의 큰 원을 만들어 둘러앉은 뒤 토킹 피스(돌아가며 대화할 때 말할 차례인 사람이 드는 인형)를 들고 돌아가며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화 방식이었다. 스무 명의 학생들과 써클 대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정말 지난한 시간이고 에너지가 많이 쓰이지만,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못 본 척 지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부족함이 많았지만 교과서 진도를 늦춰 가면서도 써클 대화를 실시했던 것에 후회는 없다. 교실에서 생활하며 반 친구에게 쌓여 있던 감정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사과를 요구하거나 용기 내어 먼저 사과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써클 대화를 한 뒤 진이 빠졌지만 어쩐지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이렇게 차근차근 마음을 돌보며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내가 바라는 교실이었다는 생각의 줄기가 더욱 단단해졌다.

“선생님은 다음 주부터 우리 학교에 아예 없어요? 그럼 어디로 가는 거예요? 왜 가는 거예요?”

“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수업 시간에 하고 싶다고 적어 주었던 세계 여행과 비슷하달까요?”

학생들이 나의 노동 형태에 대해 궁금해할 때면 나는 보따리를 둘러매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보따리 교사로 옮겨 다니는 것의 좋은 점은 더 많은 학교에 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불편한 점은 어떤 학교에도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인데, 이때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은 내가 언제 어떤 사람으로 교체되어도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씁쓸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땜빵은 험난한 자리에

 

‘문제 학생’들과의 싸움에서 지쳐 버린 교사들이 병가를 길게 내는 경우가 꽤 많은데, 나는 대체로 그런 자리에 땜빵으로 갔다. 나간 사람이 있어야만 생기는 땜빵 자리는 대체로 험난한 환경에 나기 마련인데, 나는 그런 곳들에만 갈 수밖에 없는 기간제였고 그래서인지 학생들과의 갈등을 정말 많이 겪었다. 관리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사랑으로 품으라 하고 그냥 조퇴 쓰고 마음 챙김 하라고 하고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없었다. 내가 통제를 못 해서 무딘 사람이라서 학생들을 못 잡아서 고통받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방관했다.

이미 ‘어른’들에게 적대적인 마음이 강하게 쌓인 학생들이 잠깐 쓰이고 사라질 내게 쏟아 내는 비수를 나는 그대로 맞아야만 했다. (나도 학생에게 무지막지한 비수를 쏟아 냈다.) 내게 가장 많은 비수를 꽂던 학생은 학부모의 허락을 받고 체벌을 하는 악명 높은 학원에 다녔다. 숙제를 까먹으면 학원에서 혼나고 맞으니 오전 내내 공포에 떨었고, 대화를 시도하려 해도 단시간에 라포르를 형성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다 처음으로 계약 기간을 다 지키지 못하고 중간에 관둔 적이 있다. 도저히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밤에 잠들 수가 없어서, 누우면 눈물만 나서 그랬다. 당시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뒤 숟가락을 아무도 모르게 휴지통에 버린 적이 있는데, 영화 〈스왈로우〉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 주인공이 남몰래 뾰족한 물건들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행동을 반복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지금은 쓰레기통에 넣었지만, 조금 있으면 나도 차가운 금속 물질을 내 목구멍으로 쑤셔 넣고 싶어질 것 같았다.

학생들이 소위 ‘문제 행동’을 하게 되는 원인은 정말 다층적인데, 이는 요즘 많이들 보는 TV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 한 편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것을 학교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인지하고 있다. 게다가 학교는 학생들의 변화를 도모하는 교육 기관이다. 학생이 가정에서 경험하는 것을 당장 변화시킬 수 없더라도 학교에서의 경험만큼은 다르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런데 학생의 문제 행동을 단지 개인의 문제로 보고 교사에게 해결하기를 바라거나, 교사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면 다른 교사를 데려와서 그 자리를 땜빵할 사람으로 쓰고 버리는 현실을 자주 마주한다.

아동 청소년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사회의 시스템 때문에 곪고 문드러진 마음으로 ‘문제 행동’을 표현하게 되는 학생을 단지 교사의 사랑으로 품으라고 말하는 것, 신뢰하기 어려운 구조로 인해 발생하는 학생 또는 학부모와의 갈등을 단지 정성스러운 대화로 풀어 보라고 말하는 것, 그 말들은 내가 경험하는 학교 안의 문제를 하나도 해결할 수 없었다. 학생을 탓하는 것도 교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학생의 곪은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비수를 고스란히 맞아 내야 하는 것은 결국 교사이기 때문이다. 교실의 구멍 난 자리에 기간제 교사를 꽂아 두는 방식으로 무마하지 않고 구멍 난 자리를 새롭게 보수하고, 다시는 구멍이 나지 않도록 학교의 기반 자체를 단단히 다질 수 있도록 변화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학교는 지금도 교사 수를 줄이고 있기만 하다. 교사 수를 늘리고, 학급당 학생 수를 더 적게 조절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학생의 문제 행동만 탓하는 학교가 밉다. 미워 죽겠다.

 


학교를 떠나지 않는 이유

 

학교와 불화하고 학교가 못마땅하면 내가 학교를 떠나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 적이 수백 번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불쑥 올라와서 그럴 수 없었다. 중이 절을 떠나면 된다는 말은 떠나는 중에게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내가 있는 곳의 절이 굴러가는 방식에 불만인 것이지 절이라는 공간의 존재 자체에는 애정이 있다면 말이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지내는 동안, 뜯어고칠 것이 천지인 학교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다 결국 절을 떠나는 것 대신 다른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임용 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2년여의 시간을 보냈는데, 우여곡절의 시간을 지나며 내 안에 생긴 역동들이 나를 부추겼다.

호기롭게 기간제 교사로 지내겠다고 했지만, 기간제 교사로 초등학교에서 일을 하는 것이 정말로 내가 원했던 교사의 노동을 할 수 있는 방식이었나? 나는 결국 정교사가 되고 싶어졌다. 뚝심 없이, 기존의 체제에 편입되고 싶어서 발버둥 치게 되는 결말을 맞다니, 이렇게 빨리 울면서 포기하고 타협하게 되다니. 그렇지만 비겁함 속에서도 끝끝내 놓치지 않고 싶었던 끈이 있다. 지금부터는 그 끈을 더욱 두껍게 꼬아 가는 시간을 보내 보고 싶다. 제도 안에 영영 머무르게 될지라도 다른 모양들을 상상하고 그 이야기를 꼭 유별나게 밖으로 드러내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재수 끝에 시험에 어찌저찌 턱걸이로 합격을 한 상태이다. 아직 발령 대기 중이라 잠시 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쉬면서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은데, 어쨌거나 피하고 싶었던 제도 안으로 결국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누구보다도 제도에 속해 있는 사람이며 학생들이 제도에 무사히 속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다.

교대생일 때 학교생활에 늘 적응하지 못했다. 적응하고 싶지도 않았다. 교사가 되어 학교에 일을 하러 나와서도 늘 마찬가지의 마음이 있었다. 내가 교대에 가고 학교에서 일하고 싶었던 이유는 학창시절 학생이었던 우리를 괴롭혔던 교사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맞서 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못난 행동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학교에 지속적으로 더 잘 항의하고 싶어서 정교사 됨이라는 타협점을 찾은 것이지만, 그것이 이렇게 생겨 먹은 나를 학교에 융화시켜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학교에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지더라도 끝끝내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지내고 싶다. 비록 정교사가 되었지만, 정교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학교를 향한 거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드러내고 싶다. 발령을 받고 나면, 성폭력 2차 가해를 당당히 해 대던 교대 남학생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스쿨 미투 지지 서명 요청을 못 들은 척 지나가던 교대생들과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학교는 갑자기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모임 ‘연대하는 교사잡것들’에서 동료가 해 주었던 말처럼,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균형을 찾아가는 하루들을 보내다 보면 나처럼 학교 부적응 교사들과 학생들이 기록해 온 이야기들이 어딘가 구석구석에 돌탑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작은 돌멩이를 쥐어 들고 중심을 찾아가며 돌탑을 쌓는 마음으로, 자신을 지우고 적응하기를 강요당해 온 학생들과 연대하고 싶다.

 

0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