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없다
[ref]‘어린 마음이 물은’이라는 부제가 붙은 윤동주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ref]
고교학점제, 이상과 다른 현실
허보영
ch-ultung@hanmail.net
강원 원주 북원여고 국어 교사
어느 학교의 교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조회 시간의 일이다. 출석을 확인하던 중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옆자리 아이에게 짝꿍의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빈자리 주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깜짝 놀라, “자리 바꾼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짝꿍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아이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 비슷한 일은 교과 시간에도 있었다. 화법과 작문 수업을 위해 모둠을 구성하고 모둠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한 아이가 기쁜 듯 소리쳤다. “와, 우리 반에 같이 화법과 작문 수업을 듣는 친구가 있었네.” 지금까지 자신의 학급에 같이 수업 듣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를 나누던 중 같은 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기존에 학교를 다닌 사람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두 달이 되어 가도록 모를 수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장면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2023년 고등학교 1학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되어 2025년 전면 적용 예정인 고교학점제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상은 속도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변화가 빠르다.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미래 세대에게 자기 주도적 학습 역량은 생존과 직결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성이 커졌다. 하지만 기존의 획일적인 학교교육으로는 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고교학점제이다. 고교학점제는 기초 소양과 기본 학력을 바탕으로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 누적하여 졸업하는 제도를 말한다. 칠판 옆에 커다랗게 걸린 모두 똑같은 하루 시간표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고려하여 선택한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전면 시행을 앞둔 고교학점제는 도입 목적에 충실하게 학교 현장에서 운영되고 있을까?
채영이의 하루
올해 고3인 채영이[ref]학생 이름은 가명이며 소개된 일과는 실제 학급 학생의 일과표를 바탕으로 가공한 것임.[/ref]는 아침 8시에 등교를 한다. 3-5반 자신의 학급에서 조회를 마친 후 1교시 심리학 수업을 듣기 위해 3-1반 교실로 향한다. 2교시는 미술이다. 3학년 동과 별도의 동에 위치한 미술실을 오가면 요즘같이 더운 여름엔 등에 땀이 흐른다. 하지만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3-7반 교실로 가서 3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를 맡는다. 생명과학Ⅱ는 서두르지 않으면 뒷자리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공학 분야 진학을 희망하는 채영이에게 생명과학Ⅱ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고 졸지 않기 위해서는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 3-4반 교실에서 4교시 확률과 통계 수업을 듣고 나니 피곤이 밀려온다.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이고 싶지만 점심시간이라 곧 자리의 주인이 돌아올 것이기에 감기는 눈을 비비며 채영이도 본인 교실로 간다. 조회 시간 이후 오전 내내 헤어져 있던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급식을 먹는다. 하루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오후 역시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 1층과 3층 사이를 50분 단위로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강요되는 선택
학생들마다 자신이 고른 과목으로 채워진 각기 다른 시간표. 이 과목들은 어떻게 개설되고 학생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과목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새 학기가 시작되면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부서는 바빠진다. 1, 2학년을 대상으로 과목 선택 관련한 교과 설명회(또는 박람회)를 개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과목 선택 전반에 대한 설명을 선생님들께 듣고 한 학년 위 학생들로 구성된 서포터즈를 통해 개별 과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는다. 총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과목 선택 조사 기간 중 선배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나 흥미, 진로 등을 고려하여 다음 학년에 배울 과목을 선택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선택 결과에 따라 수강생 수와 과목 개설 가능 여부 등을 조정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다음 학기 학생들의 개별 시간표가 최종 확정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개설 과목을 선정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학생들의 흥미나 관심보다는 대학 입시이다. 어떤 과목을 어느 시기에 개설해야 입시에 유리할 것인지 전략적으로 판단한 뒤 그에 맞춰 과목을 개설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 역시 자신이 진학하는 대학의 학과에 따라 달라진다. 과목 선택은 곧 대학 입시와 연결되기 때문에 진로를 명확히 한 뒤 그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여 듣는 것이 입시의 핵심적인 과정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진로를 고민하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충분히 권장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진로 강조’는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 강하게 든다. 삶의 방향 설정을 고민하는 의미로서의 ‘진로’가 아니라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진로를 향한 노력의 결과가 생활기록부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진학 희망 학과에 맞춰 진로를 설정하고 적절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고 연관되는 활동을 하여 그야말로 보기 좋은 생활기록부를 ‘만든다’. 진로를 향한 일관된 노력과 풍부한 활동으로 가득한 생활기록부는 숫자로 나타나는 내신 성적만큼 입시의 중요한 사정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해진 진로가 있는 아이들은 행복한 편이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거나 반대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아이의 경우 교사나 학생 모두 곤란하다. 어떤 과목을 선택해야 할 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학년이 되도록 진로를 확정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신이 낙오자라도 된 듯 실의에 잠긴다. 급기야 고3이 되면 담임과의 첫 상담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이젠 진짜 시간이 없어. 얼른 진로를 정해야 해. 지금도 이미 충분히 늦었는걸.”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아이스크림도 31가지 맛 중에서 골라 먹는 시대다. 학생들은 수많은 과목 중에서 본인이 희망하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과연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화를 나눠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과목을 선택할 때 자신의 흥미와 진로 못지않게 고려하는 것이 자신이 평소 싫어하는 과목을 피하는 것이었다. 즉 ‘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받는 것에 대한 ‘만족’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내신 성적을 고려한 과목 선택도 많다. 수강자 수가 적은 과목은 상대 평가의 특성상 매우 치열한 내신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예를 들어, 공학 계열의 대학을 진학하는 데 필수적인 물리 과목의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워하기 때문에 수강자 수가 많지 않다. 우리 학교 물리 과목은 매년 한 학급이 어렵게 개설된다. 이 수업에서 내신 1등급은 오직 1명만 받을 수 있다. 주로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아이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다. 이러다 보니 치열한 내신 경쟁에 지레 겁먹고 배제 1순위 과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하나 미적분 같은 과목도 상황은 비슷하여 아무리 필요한 과목이라도 내신에 발목이 잡힐까 걱정이 되어 수강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유의 시간과 공간을 빼앗긴 아이들
어른들에게 하루 7번, 50분마다 자리를 바꿔 가며 새로운 사람과 업무를 하라고 지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복도를 비집고 1층부터 3층 복도를 이동해야 한다면? 10분 안에 자리 이동과 개인적인 볼일을 모두 마치고 앉아 아무 일 없던 듯 시작종에 맞춰 집중해야 한다면? 옆에 얼굴도 잘 모르는 낯선 아이가 앉아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이미 지쳐서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피폐해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쫓기는 듯한 일상의 반복이 고교학점제 속 아이들의 모습이다.
청소년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또래와의 만남을 통해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학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안정적 또래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교에서 이러한 관계 형성이 가능할까? 학급은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최소의 단위였다. 수업 중에 조는 친구가 있으면 깨워 주고, 숙제를 미처 끝내지 못한 친구가 있으면 자기 것을 보여 주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매점도 함께 가며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지금의 학급에는 이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하루 10분 이내의 짧은 만남 후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하루 종일 이동하는 아이들은 차분히 관계를 형성할 틈이 없다. 교류할 틈이 없으니 한정된 관계에만 머물게 된다. 1학년 때 공통과목을 함께 들으며 형성된 친구들과 좁은 범위의 만남을 이어 간다. 관계 맺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지만 하루에 일곱 개의 교실을 돌아다니며 50분 만났다 헤어지게 되는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에너지를 쏟는 학생은 별로 없다. 친구를 통해 성장하는 시기에 정작 친구를 만들 시간도, 여유도, 지금의 고등학교 교실에는 없다. 그렇다 보니 사람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거나 스스로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 자신의 필요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조용히 누군가의 배경이 된 채 하루를 보내게 된다.
영혼을 갈아 넣거나 마음을 내려놓거나
5반 담임을 맡고 있는 나는 매일 아침 8시 20분이 되면 조회를 위해 교실에 들어간다. 문을 열면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소녀들이 있다. 농담 한마디 주고받을 여유 없이 출석을 확인한 뒤 교실을 나온다. 문밖에는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맡기 위해 서둘러 온 부지런한 소녀들이 대기 중이다. 고교학점제는 기존 학급 기반의 담임제와 맞지 않는 면이 많다. 과목을 선택하여 듣다 보니 사실상 자신의 학급 교실은 출결 확인하는 시간에나 있는 곳이 되었다. 담임 교사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10분 남짓이고, 학급에 전달할 일이 있거나 학생들이 궁금해 교실을 찾아가도 학생들을 만날 수 없다. 하루 종일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듣는 학생을 쉬는 시간에 부르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담임은 결석계를 받거나 학교 안내 사항을 전달하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다.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로 수업에 들어가면 12개 반에서 두세 명씩 와서 모인 교실에서 수업을 한다. 같이 앉아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인 버스 속 승객처럼 어색하게 수업을 듣는다. 다른 해 같았으면 뻥뻥 터질 만한 웃긴 얘길 해도 별 반응이 없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옆자리 아이가 날 어떻게 볼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공을 들여 가까워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도 그때뿐이다. 다음 주가 되어 다른 아이와 앉게 되면 다시 데면데면해진다.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서먹함, 그 속에서 말하기와 쓰기(화법과 작문)를 가르치는 교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콩쥐의 심정이 되곤 한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인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사 인력 확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필요한 교사 정원을 늘리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의 과목을 개설하다 보니 한 명의 교사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두세 과목을 가르치는 일은 아주 흔하고 심한 경우 네 과목을 맡기도 한다. 매 교시 다른 과목을 가르쳐야 할 때 내실 있는 수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세심한 평가와 피드백이 가능할까? 학생 개개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진로를 탐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자신이 전공한 과목을 수업하는 것은 운이 좋은 경우이다. 전공은커녕 학창 시절 배운 적 없는 과목을 맡는 경우도 많다. 이른바 상치 교사[ref]중·고등학교 내 비전공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일컫는다.[/ref]가 보편화된 것이다. 일반적인 고등학교에 심리학이나 철학 등을 전공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선생님은 없다. 그러니 결국 평균 시수에 못 미치는 교과에서 부족한 시수만큼 교양 교과 시간을 나눠 맡게 되는 것이다. 비전공자의 수업에서 전문성이 발휘되리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는 이름의 자습이 이루어지고 생활기록부에 적을 만한 그럴듯한 내용을 채운 뒤 남은 시간은 각자 자유롭게 보내는 것이 불편한 진실에 가깝다. 학생들은 관심이 있어 배우고 싶은 마음에 과목을 선택하였지만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사실상 의미 없는 선택이 된 것이다.
버려지지 않는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맘껏 배우고 그 배움을 토대로 성장을 꿈꾸는 것은 분명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진로’와 ‘선택’이 강조(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고 싶다)되고 이것이 입시에 영향을 미치다 보니 아이들은 강박적으로 진로를 결정한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충분히 탐색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두르다 보니 마음이 바뀌는 경우도 생기지만 대학 입시에서 진로의 일관성 없음은 치명적 약점이 되기 때문에 방향을 트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전면적 방향 수정이 필요한 학생은 극단적인 경우 검정고시를 보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기도 한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꿈을 찾는 여정에서 빠른 진로 ‘선택’만큼 필요한 것은 진로 ‘탐색’이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탐색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버리도록 강요한 것이 아닐까? 10대 시절을 지나온 우리들은 모두 안다. 삶이란, 10대에 ‘결정’한 진로의 방향에 기대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패와 좌절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방향을 수정하며 성장할 때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품은 ‘나’가 된다는 것을. 그런 ‘나’가 맘껏 실패하고 상처받고 다시 일어나 꿈을 키워 갈 수 있는 공간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 선택으로 포장된 진로 목표에 나를 끼워 맞추는 삶 말고, 어떤 실패도 경험이 되어 삶의 밑거름이 될 수 있게 응원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내일은 없다
[ref]‘어린 마음이 물은’이라는 부제가 붙은 윤동주의 시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ref]
고교학점제, 이상과 다른 현실
허보영
ch-ultung@hanmail.net
강원 원주 북원여고 국어 교사
어느 학교의 교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여가 지난 어느 날 조회 시간의 일이다. 출석을 확인하던 중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옆자리 아이에게 짝꿍의 이름을 물었다. 아이는 빈자리 주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깜짝 놀라, “자리 바꾼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짝꿍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자 아이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 비슷한 일은 교과 시간에도 있었다. 화법과 작문 수업을 위해 모둠을 구성하고 모둠원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는데 한 아이가 기쁜 듯 소리쳤다. “와, 우리 반에 같이 화법과 작문 수업을 듣는 친구가 있었네.” 지금까지 자신의 학급에 같이 수업 듣는 친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소개를 하며 인사를 나누던 중 같은 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기존에 학교를 다닌 사람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두 달이 되어 가도록 모를 수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장면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2023년 고등학교 1학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되어 2025년 전면 적용 예정인 고교학점제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상은 속도를 가늠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변화가 빠르다. 변화의 시대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미래 세대에게 자기 주도적 학습 역량은 생존과 직결된다고 할 정도로 중요성이 커졌다. 하지만 기존의 획일적인 학교교육으로는 개인의 역량을 최대치로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고교학점제이다. 고교학점제는 기초 소양과 기본 학력을 바탕으로 진로·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 누적하여 졸업하는 제도를 말한다. 칠판 옆에 커다랗게 걸린 모두 똑같은 하루 시간표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고려하여 선택한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이 제도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전면 시행을 앞둔 고교학점제는 도입 목적에 충실하게 학교 현장에서 운영되고 있을까?
채영이의 하루
올해 고3인 채영이[ref]학생 이름은 가명이며 소개된 일과는 실제 학급 학생의 일과표를 바탕으로 가공한 것임.[/ref]는 아침 8시에 등교를 한다. 3-5반 자신의 학급에서 조회를 마친 후 1교시 심리학 수업을 듣기 위해 3-1반 교실로 향한다. 2교시는 미술이다. 3학년 동과 별도의 동에 위치한 미술실을 오가면 요즘같이 더운 여름엔 등에 땀이 흐른다. 하지만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3-7반 교실로 가서 3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를 맡는다. 생명과학Ⅱ는 서두르지 않으면 뒷자리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공학 분야 진학을 희망하는 채영이에게 생명과학Ⅱ는 매우 중요한 과목이고 졸지 않기 위해서는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 3-4반 교실에서 4교시 확률과 통계 수업을 듣고 나니 피곤이 밀려온다. 책상에 엎드려 눈을 붙이고 싶지만 점심시간이라 곧 자리의 주인이 돌아올 것이기에 감기는 눈을 비비며 채영이도 본인 교실로 간다. 조회 시간 이후 오전 내내 헤어져 있던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급식을 먹는다. 하루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오후 역시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 1층과 3층 사이를 50분 단위로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새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강요되는 선택
학생들마다 자신이 고른 과목으로 채워진 각기 다른 시간표. 이 과목들은 어떻게 개설되고 학생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과목을 선택하게 되는 것일까? 새 학기가 시작되면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부서는 바빠진다. 1, 2학년을 대상으로 과목 선택 관련한 교과 설명회(또는 박람회)를 개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과목 선택 전반에 대한 설명을 선생님들께 듣고 한 학년 위 학생들로 구성된 서포터즈를 통해 개별 과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얻는다. 총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과목 선택 조사 기간 중 선배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나 흥미, 진로 등을 고려하여 다음 학년에 배울 과목을 선택한다. 학교는 학생들의 선택 결과에 따라 수강생 수와 과목 개설 가능 여부 등을 조정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다음 학기 학생들의 개별 시간표가 최종 확정되는 것이다.
학교에서 개설 과목을 선정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학생들의 흥미나 관심보다는 대학 입시이다. 어떤 과목을 어느 시기에 개설해야 입시에 유리할 것인지 전략적으로 판단한 뒤 그에 맞춰 과목을 개설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 역시 자신이 진학하는 대학의 학과에 따라 달라진다. 과목 선택은 곧 대학 입시와 연결되기 때문에 진로를 명확히 한 뒤 그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여 듣는 것이 입시의 핵심적인 과정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진로를 고민하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청소년들에게 충분히 권장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진로 강조’는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 강하게 든다. 삶의 방향 설정을 고민하는 의미로서의 ‘진로’가 아니라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진로를 향한 노력의 결과가 생활기록부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진학 희망 학과에 맞춰 진로를 설정하고 적절한 과목을 선택하여 이수하고 연관되는 활동을 하여 그야말로 보기 좋은 생활기록부를 ‘만든다’. 진로를 향한 일관된 노력과 풍부한 활동으로 가득한 생활기록부는 숫자로 나타나는 내신 성적만큼 입시의 중요한 사정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해진 진로가 있는 아이들은 행복한 편이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거나 반대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아이의 경우 교사나 학생 모두 곤란하다. 어떤 과목을 선택해야 할 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학년이 되도록 진로를 확정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신이 낙오자라도 된 듯 실의에 잠긴다. 급기야 고3이 되면 담임과의 첫 상담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이젠 진짜 시간이 없어. 얼른 진로를 정해야 해. 지금도 이미 충분히 늦었는걸.”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아이스크림도 31가지 맛 중에서 골라 먹는 시대다. 학생들은 수많은 과목 중에서 본인이 희망하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과연 만족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화를 나눠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과목을 선택할 때 자신의 흥미와 진로 못지않게 고려하는 것이 자신이 평소 싫어하는 과목을 피하는 것이었다. 즉 ‘하지 않을 권리’를 인정받는 것에 대한 ‘만족’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내신 성적을 고려한 과목 선택도 많다. 수강자 수가 적은 과목은 상대 평가의 특성상 매우 치열한 내신 경쟁에 내몰리게 된다. 예를 들어, 공학 계열의 대학을 진학하는 데 필수적인 물리 과목의 경우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워하기 때문에 수강자 수가 많지 않다. 우리 학교 물리 과목은 매년 한 학급이 어렵게 개설된다. 이 수업에서 내신 1등급은 오직 1명만 받을 수 있다. 주로 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과목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아이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어렵다. 이러다 보니 치열한 내신 경쟁에 지레 겁먹고 배제 1순위 과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하나 미적분 같은 과목도 상황은 비슷하여 아무리 필요한 과목이라도 내신에 발목이 잡힐까 걱정이 되어 수강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유의 시간과 공간을 빼앗긴 아이들
어른들에게 하루 7번, 50분마다 자리를 바꿔 가며 새로운 사람과 업무를 하라고 지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복도를 비집고 1층부터 3층 복도를 이동해야 한다면? 10분 안에 자리 이동과 개인적인 볼일을 모두 마치고 앉아 아무 일 없던 듯 시작종에 맞춰 집중해야 한다면? 옆에 얼굴도 잘 모르는 낯선 아이가 앉아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이미 지쳐서 몸은 물론 마음까지도 피폐해지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쫓기는 듯한 일상의 반복이 고교학점제 속 아이들의 모습이다.
청소년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또래와의 만남을 통해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학교가 여전히 의미 있는 이유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안정적 또래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교에서 이러한 관계 형성이 가능할까? 학급은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고 관계를 형성하는 최소의 단위였다. 수업 중에 조는 친구가 있으면 깨워 주고, 숙제를 미처 끝내지 못한 친구가 있으면 자기 것을 보여 주기도 하고 쉬는 시간에 매점도 함께 가며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지금의 학급에는 이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하루 10분 이내의 짧은 만남 후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하루 종일 이동하는 아이들은 차분히 관계를 형성할 틈이 없다. 교류할 틈이 없으니 한정된 관계에만 머물게 된다. 1학년 때 공통과목을 함께 들으며 형성된 친구들과 좁은 범위의 만남을 이어 간다. 관계 맺음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되지만 하루에 일곱 개의 교실을 돌아다니며 50분 만났다 헤어지게 되는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에너지를 쏟는 학생은 별로 없다. 친구를 통해 성장하는 시기에 정작 친구를 만들 시간도, 여유도, 지금의 고등학교 교실에는 없다. 그렇다 보니 사람과 친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거나 스스로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 자신의 필요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조용히 누군가의 배경이 된 채 하루를 보내게 된다.
영혼을 갈아 넣거나 마음을 내려놓거나
5반 담임을 맡고 있는 나는 매일 아침 8시 20분이 되면 조회를 위해 교실에 들어간다. 문을 열면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소녀들이 있다. 농담 한마디 주고받을 여유 없이 출석을 확인한 뒤 교실을 나온다. 문밖에는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맡기 위해 서둘러 온 부지런한 소녀들이 대기 중이다. 고교학점제는 기존 학급 기반의 담임제와 맞지 않는 면이 많다. 과목을 선택하여 듣다 보니 사실상 자신의 학급 교실은 출결 확인하는 시간에나 있는 곳이 되었다. 담임 교사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10분 남짓이고, 학급에 전달할 일이 있거나 학생들이 궁금해 교실을 찾아가도 학생들을 만날 수 없다. 하루 종일 옮겨 다니며 수업을 듣는 학생을 쉬는 시간에 부르는 것도 쉽지 않다. 결국 담임은 결석계를 받거나 학교 안내 사항을 전달하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다.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로 수업에 들어가면 12개 반에서 두세 명씩 와서 모인 교실에서 수업을 한다. 같이 앉아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인 버스 속 승객처럼 어색하게 수업을 듣는다. 다른 해 같았으면 뻥뻥 터질 만한 웃긴 얘길 해도 별 반응이 없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옆자리 아이가 날 어떻게 볼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공을 들여 가까워질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도 그때뿐이다. 다음 주가 되어 다른 아이와 앉게 되면 다시 데면데면해진다.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서먹함, 그 속에서 말하기와 쓰기(화법과 작문)를 가르치는 교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콩쥐의 심정이 되곤 한다.
고교학점제의 핵심인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교사 인력 확충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필요한 교사 정원을 늘리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의 과목을 개설하다 보니 한 명의 교사가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다. 두세 과목을 가르치는 일은 아주 흔하고 심한 경우 네 과목을 맡기도 한다. 매 교시 다른 과목을 가르쳐야 할 때 내실 있는 수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세심한 평가와 피드백이 가능할까? 학생 개개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진로를 탐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자신이 전공한 과목을 수업하는 것은 운이 좋은 경우이다. 전공은커녕 학창 시절 배운 적 없는 과목을 맡는 경우도 많다. 이른바 상치 교사[ref]중·고등학교 내 비전공 교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를 일컫는다.[/ref]가 보편화된 것이다. 일반적인 고등학교에 심리학이나 철학 등을 전공하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선생님은 없다. 그러니 결국 평균 시수에 못 미치는 교과에서 부족한 시수만큼 교양 교과 시간을 나눠 맡게 되는 것이다. 비전공자의 수업에서 전문성이 발휘되리라 기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결국 자기 주도적 학습이라는 이름의 자습이 이루어지고 생활기록부에 적을 만한 그럴듯한 내용을 채운 뒤 남은 시간은 각자 자유롭게 보내는 것이 불편한 진실에 가깝다. 학생들은 관심이 있어 배우고 싶은 마음에 과목을 선택하였지만 가르칠 사람이 없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사실상 의미 없는 선택이 된 것이다.
버려지지 않는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맘껏 배우고 그 배움을 토대로 성장을 꿈꾸는 것은 분명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진로’와 ‘선택’이 강조(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고 싶다)되고 이것이 입시에 영향을 미치다 보니 아이들은 강박적으로 진로를 결정한다. 아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충분히 탐색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두르다 보니 마음이 바뀌는 경우도 생기지만 대학 입시에서 진로의 일관성 없음은 치명적 약점이 되기 때문에 방향을 트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전면적 방향 수정이 필요한 학생은 극단적인 경우 검정고시를 보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기도 한다.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꿈을 찾는 여정에서 빠른 진로 ‘선택’만큼 필요한 것은 진로 ‘탐색’이다.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탐색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버리도록 강요한 것이 아닐까? 10대 시절을 지나온 우리들은 모두 안다. 삶이란, 10대에 ‘결정’한 진로의 방향에 기대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패와 좌절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방향을 수정하며 성장할 때 비로소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품은 ‘나’가 된다는 것을. 그런 ‘나’가 맘껏 실패하고 상처받고 다시 일어나 꿈을 키워 갈 수 있는 공간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 선택으로 포장된 진로 목표에 나를 끼워 맞추는 삶 말고, 어떤 실패도 경험이 되어 삶의 밑거름이 될 수 있게 응원하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