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호[특집] ‘학벌’은 끝났는가 - ‘학벌없는사회’ 잘못한 판단, 다시 시작해야 할 운동 (채효정)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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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공정은 평등을 향하는가

학벌은 끝났는가

- ‘학벌없는사회’ 잘못한 판단다시 시작해야 할 운동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해산 학벌없는사회의설립 멤버로 참가하여 활동가운영위원사무처장으로 활동했으며,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 하는 인문학 교실 삶은 달걀거리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떡볶이 학교’ 등을 기획 운영하였다.



만남 또는 만나지 못함 학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


모이고 보니 다들 학벌이 좋았다.” 변명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종종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한다면서 모인 사람들이 왜 죄다 학벌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다반은 농담반은 진담인 그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지만우리는 저런 식으로 삼켜 버렸다어쩔 수 없지 않느냐그러려고 해서 그런 건 아닌데하지만 과연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우연인 것뿐이었을까.

 

1998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 모임으로 시작한 학벌없는사회1999년에 독자적인 시민단체로 정식 출범하였다당시 최초 발기인을 보면 크게 세 그룹으로 구성되었다주로 서울 수도권 지역의 대학 교수들이 한 축전교조 교사들이 한 축그리고 서울 시내 소재 대학의 대학원생들이 한 축을 이루었다하지만 그 안에는 해직 교수와 해직 교사가난한 시간 강사와 대학원생들이 있었고주로 그들이 중심적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초창기에는 학벌’ 개념을 정의하는 일부터 한국 사회의 주요 문제로서 학벌 문제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활동들이 중요했다그 무렵에는 학력학벌도 잘 구분되지 않았고한국 교육의 파행을 낳는 주범인 입시 교육도 교육열이나 과다 경쟁 등으로만 인식되었지그 중심에 결국 학벌 취득 경쟁이 있다는 점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개념과 담론의 생산과 확산이 단체 활동에서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고초기에 지식인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초창기 함께했던 사람들 중에는 대학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거나 해직된 이들도 많았고대학 바깥 연구 교육운동의 거점이었던 민예총과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강의를 하던 젊은 연구자들도 많았다회원 가입도 이런 루트로 많이 이루어졌다나와 함께 학벌없는사회 초기 멤버로 참여했던 친구들도 모두 민예총과 철학아카데미에서 철학 수업이나 라틴어· 희랍어 수업을 들으면서 만난 친구들이었다이렇게 유입된 회원들과 활동가들은 당연히 단체의 성격과 재생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말과 글이 우리의 무기였으니활동도 말과 글 위주였다행동보다는 토론을실천보다는 연구를 중심으로 했고나중에는 그게 한계가 되기도 했지만단체가 자기 운동을 이론화할 수 있는 연구 역량을 가졌다는 것은 특히 담론 투쟁으로서의 운동을 벌여 나가는 데 요긴하기도 하였다유학에서 돌아오거나 학위를 마친 신진 연구자들이 학벌없는사회 토론회에 초대되어 학벌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나 분석을 발표하기도 했고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는데시민 사회 안에서 드물게 연구의 관점을 소개할 수 있는 장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특히 학벌 문제는 곧 대학 문제이기도 했으므로대학에 있는 연구자들 중 실천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연구의 대상인 현장과 연결할 수 있으면서도 직접적인 실천장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단체라는 점은 충분한 유인 요소였다.

 

이 담론화 과정에서 가장 중심이 되었던 인물은 김상봉 교수였다당시 그는 그리스도신학대에서 해직되어 거리의 철학자로 대학 바깥의 강단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그는 우리가 세미나나 뒤풀이 등 여러 자리에서 갑론을박하며 토론했던 것들을 자신의 철학적 개념과 언어로 탁마하여 《학벌 사회》라는 책으로 내놓았다김상봉 외에도 홍세화박노자김동춘 등 유명 진보 인사들이 학벌없는사회 회원으로서 언론 지면 등에 활발히 글을 썼고또 운동을 열심히 소개했다연구도 많이 했다학벌의 상품 성격을 분석한 홍훈의 연구가 있었고아리스토텔레스의 공교육 이념을 철학적 근거로 가져온 김재홍의 연구가 있었고사무처장이던 이철호는 아예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 비판으로 학위를 받았으며국립대 통합 네트워크 안을 내놓은 정진상과 정세근이 있었다그런 활동에 힘입어 학벌없는 사회는 단체의 역사나 역량에 비해 초기부터 꽤 높은 사회적 지명도와 시민 사회 안에서의 명성과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다그것은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이 계속 결합하고 회원도 꾸준히 가입하여 단체의 외형을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훗날 이 운동의 경향성이 지나치게 지식인 중심명망가 중심의 활동으로 굳어지게 만든 원인 이기도 했다.

 

매달 한 월례 토론회는 열띤 분위기였고때로는 논쟁도 격렬하였다무슨 말이라도 다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는 사교계가 된 학회나 대학 내의 권위적인 토론 분위기에 질려 있던 교수들과 대학생대학원생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인이었다그런데 자발적으로 가입한 일반 회원들 가운데는 살면서 학벌에 한이 맺힌 경험이 있어 꼭 이 학벌만은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후원을 결심한 무학자고졸자학벌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그런 회원들 중 어떤 이는 토론회에 왔다가 감탄하기도 했지만어떤 이는 너무 아카데믹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잘못 찾아온 것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다시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토론회나 뒤풀이 자리에서 어김없이 그런 말이 꼭 한번씩 나왔다학벌없는사회 운동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이 말이었다. “여기는 모두 학벌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하고 있군요.” 하지만 대체로 그렇게 돌아간 사람들은 후원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나는 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대신 열심히 해서 학벌을 꼭 없애 달라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많았고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진심으로 미안해하기도 했다.

 

그 말들은 내내 아프고 슬펐는데그 아픔과 슬픔을 쉽게 삼키지 말고 끄집어내 봤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모이고 보니 우연히 다들 학벌이 좋았다라는 말은부끄러운 변명이기도 했다. ‘강남 좌파는 아니라고 해도지식 계급의 삶이란 것은 어느 정도 민중과 유리되어 있고민중에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신분 이동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도 사 이다그런 점에서 우리 역시 운동 주체의 존재와 의식의 괴리를 인식하고 부단히 자기 점검을 했어야 했다그런데 너무 방어적으로만 생각했다.

 

사실 이런 논리는 학벌없는사회 운동에 대한 비판자들도 언제나 들고나오는 것이었다. ‘학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면서 자기들은 모두 학벌이 좋다라고그런데 우리가 볼 때 그 프레임은 비열했다그건 노동 계급도 아니면서 노동자의 편에 서서 노동운동에 필요한 이론과 사상적 무기를 제공하려는 연구자지식인들을 향해 다 필요 없다너의 계급성이 너의 말을 이미 배신하고 있다라고 공격하던 조··동의 비열한 프레임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는 자신의 계급성에 반하는 운동에 대한 이런 물음들에 어떻게 응답해야 했을까하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서 응대의 논리는 자동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 운동을 학벌 없는 사람이 하면 계급적 열등감 때문에’ 한다고 하고학벌 있는 사람이 하면 계급적 여유가 있어 하는 거라 비난할 거 아닙니까그러면 이 운동은 누가 해야 합니까?”라는 반론이었다실제로 학벌이 있는 자는 있는 대로학벌이 없는 자는 없는 대로 학벌없는사회에 대한 운동의 자기 동기는 다들 가지고 있었고그것으로 충분했다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이야말로 우리 안에서 학벌없는사회를 실제로 구현해 볼 수 있는 운동이 될 수 있으리라 희망하기도 하였다그러나 유기적 지식인이 되기는 쉽지 않았다풀뿌리인 회원들과 단체 활동의 가시적 결과물들은 점점 유리되어 갔다회원은 회비를 내고상근 활동가는 활동을 책임지는 이중 구조가 고착화되었다학벌없는사회의 활동이 뉴스에 나오거나 성과를 내면회원들은 회비 내는 보람을 느끼면서 동시에 회비밖에 내지 않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평등한 관계를 지향했지만 그 평등은 결국 서로 닮은 이들이 공유하는 동질성의 조건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 동질성은 더욱 단단해 졌다초창기 멤버들에게 공유된 사건과 기억의 공동체는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단체를 더욱 낯설게 만들었다술자리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논쟁하고칸트와 데카르트를 농담의 소재로 삼고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음악을 평하며듣도 보도 못한 라틴어 사전이나 희랍어 사전을 안주 접시 밑에 놓아 두는 사람들 틈으로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는 학벌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대체 얼마나 있을까그때는 부르디외도 잘 몰랐었고그냥 단순히 코드가 잘 맞고 문화적 취향이 같은 사람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여기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안 나와도 되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고한번 나와 보고 오지 않는 것이 패턴화되었다.

 

그때조금만 더 일찍, ‘너무 좋았던’ 우리의 관계를 반성해 보았더라면 어땠을까처음 시작할 때는 나도 이 학벌없는사회라는 단체가 너무 좋았다전에 경험했던 조직이나 단체들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고세상에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매일 만나도 또 보고 싶고 마주 앉아 대화를 시작하면 집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말 안 통하는 세상에서 말 통하는 친구들이 거기 있었다자취방에서 밤새 토론하며 입장문성명서를 만드는 일이 재밌기만 했다그런 작업을 하며 역사학도에게 역사를철학도에게 철학을정치학도에게 정치학을 서로 넘나들며 배웠다남녀가 없고 노소가 없는 이 동지와 친구를 뛰어넘는 우정의 공동체를당시에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연합체라고 불렀다. ‘수유너머에서 넘어온 친구들도 몇 있었는데 (거기는 아니고여기야말로 진짜 코뮌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별 또는 분열 떠난 자와 남은 자


삶의 공통성에 기반하지 않는 뜻의 공동체가 흔히 그렇듯이 이 잘 맞는 취향의 공동체도 좋은 관계가 오래가지는 않았다단체는 초창기부터도 심각한 내홍과 분열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그 후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10여 년을 서로 못 잡아먹고 으르렁거리며 지냈다그러다 보니 그만 미운 정도 들어 버리고 만 것인데그게 참 치명적인 덫이 되었다으르릉거리지 않으려고 소 닭 보듯 피하기도 했지만 서로 예의와 격식을 차리는 관계가 되니 어쩐지 활동은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보고 싶어 가던 회의도 가야 해서 가는 의무가 되었다.

 

첫 번째 분열은 학벌없는사회가 생기자마자 둘로 쪼개진 엄청난 사건이었다당시 조직 체계는 결정 단위인 운영위원회와 집행 단위인 집행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는데주로 나이 많은 남자 교수들이 운영위원을나를 포함하여 젊은 대학원생들이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고집행위에는 남학생도 있었지만 여학생이 더 많았다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당시 사무국장의 계속된 성차별적 인식과 발언운영위와 집행위 사이의 위계 관계였다당연히 이 위계와 차별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다른 곳도 아니고 학벌없는사회에서 그런 차별이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문제는 비슷하게 풀린다문제의 당사자는 항의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았고 문제의 핵심을 비켜 갔다다른 교수들이 젊은 학생들을 꼬드겨서’ 자신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조선일보〉에 학벌없는사회 소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린 사건이었다당시 우리는 강준만 교수가 펼치고 있던 조선 불매 운동에 동참하여 기고나 인터뷰를 일절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하고 있었는데사무국장이 독단적으로 인터뷰를 한 것이다.

 

단체를 널리 알리고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구독자가 많은 〈조선일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기에 개인적인 판단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그는 조직을 위해서’ 한 일이며 크게 문제 될 것도 아니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집행위원들이 계속 반발하자 결국은 사무국장 명의로 개설된 단체 통장을 들고 단체를 나가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라는 유사 단체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경실련흥사단 등의 경로로 들어왔던 일부 초기 회원들이 함께 탈퇴하여 새로운 단체로 이동하였다이 그룹에는 주로 온건한 교육운동 노선을 지향하는 중장년층이 많았고학벌 투쟁을 사회 구조적 관점보다는 문화적 운동의 차원에서 바라보았는데그건 방법론적인 문제 이상의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이기도 했다제안하는 활동도 주로 계몽적 성격의 캠페인이나 표어 만들기 등으로초동 주체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이런 인식과 방향이 창립 선언문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고 느끼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함께할 수 없는 노선이었고 초기에 분리된 것은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하지만 학벌 없는 사회 만들기라는 단체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종종 혼선을 초래했고우리 단체인 줄 알고 그 단체로 언론에서 연락을 하거나 회원 가입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이 사건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면도 있다운영위와 집행위를 통합했고 활동가들 간의 차별이나 위계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됐으며교육 혁명과 사회변혁운동을 결합하는 정치적 계급적 지향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계급 운동이다” - 이것이 당시 우리의 명제였고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명제를 확인했다.

 

두 번째 이별은바로 그 계급 이념의 차이 때문이었다학생 그룹에서도 가장 급진적이며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사람들 중에서 제일 먼저 우리 안의 위선에 대한 비판자가 나왔다그들은 계급 투쟁을 표방한 우리 운동이 근대 계몽주의와 유럽 중심주의 및 또 다른 엘리트주의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학벌없는사회 안에서 그 논쟁은 버스 운전사 논쟁이라고 불렸다그것은 최근 회자된 타다 택시의 친절에 관한 논쟁과 유사했다운전 기사가 여성 승객이나 노약자들에게 보이는 무시폭언불친절 뒤에는 노동 착취가 있고 그 문제의 해결이 더 중요하다는 청년들의 주장과모든 것을 구조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고 구조에 완전히 포획된 존재로 설정하는 것이 인간을 비주체화하는 것이며어떤 구조 속에서도 주체의 자기의식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책임이란 것이 있다는 선생의 주장이 부딪혔다.


그것은 사변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문제였고사소한 데서 시작되었지만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를 드러내며 들불처럼 번져 갔다주체와 구조의 대항에서 어른들은 주체의 편에 섰고, ‘청년들은 구조의 편에 섰다.

 

화장실도 제때 가지 못하고날마다 파김치가 되는 노동을 해 보았나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해야지 왜 버스 운전사의 개인적 성찰을 요구하는가?”, “학벌은 의식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라 하지 않았나?” 청년들은 따져 물었다선생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하였다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포획되어 죄를 저지른 오이디푸스가 자유를 얻는 것은이를 운명의 구조’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의 눈을 찔러 스스로를 벌하였을 때라고.

 

오이디푸스가 제 눈을 찌르는 것은 신들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세상이 그렇다’, ‘구조가 그렇다’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주체의 자발적 행위는 어디 서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중요한 논쟁이었다하지만 제대로 심화시키지 못했다논쟁은 감정적으로 격화되었고크게 실망한 이들은 당신의 위선을 비판하는 공개 편지를 제출하고 단체를 떠났다나는 이 사건이 앞서 일어났던 사건보다 훨씬 치명적인 내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이전의 것은 해야 할 결별이었지만이번엔 그게 아니었다내부에 크레바스가 생겼는데 사람들은 각자 스크래치’ 난 마음에 연고만 발랐다. “버스 운전사는 금기어가 되었고도대체 어떤 문제였는지 본질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봉합되었다그 상처는 깊이오래갔다이후에 나는 학벌없는사회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단체들에서 내부의 갈등과 소통 문제가 발생했을 때 결국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 식으로 일이 풀려 가는 것을 보았다그건 운동 내부의 어떤 고질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어쨌든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단체는 대표 중심 체제를 탈피하고 전과 같이 사무국장이 통장을 들고 나가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사단법인을 출범시켰다학벌없는사회는 CMS로 회비 출금을 할 수 있는 법인단체가 되었고급여를 받는 상근 사무국장을 둔 사무국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그런데 이 시스템은 활동가들이 품을 나눠 공동 살림을 꾸리던 이전과 달리 사무국으로 실무가 집중되었고 행정 업무가 가중되었다. 1인 사무국에 그것은 상당한 부담이 되었고 활동을 위한 시간과 노력을 법인 업무에 더 많이 쏟게 만들었다.

 

그런데 살림살이란 것은집에서나 밖에서나 못할 때만 표가 나지 잘하는 것은 표나지 않는 법이다사무국 활동가의 의지와 열정은 알아주는 이 없는 우편물 처리나 온갖 서류 업무 같은 소소한 일에 소진된다누군가가 일상 업무를 전담한 덕분으로다른 사람들은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 같은 큰 판도 벌이고책도 쓰고단체를 대표해 토론회도 나가고 그랬다그들의 이름은 남지만플래카드를 주문하고 복사기를 돌리고 보도 자료를 뿌린 실무자의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어쨌든 활동을 할수록 회원은 1명이라도 더 늘어나고그만큼 행정 업무 부담도 커진다하지만 사무국 활동가를 더 보충하기에 회비는 턱없이 부족했고예산을 만들려면 다른 수익 활동을 벌여야 했지만그러기엔 또 인력과 역량이 역부족이었다결국 활동을 내부로 하청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동의 소외와 같은 활동의 소외가 나타났고정작 활동가들은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마치 하청 활동가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세 번째 결별에서도세대 간의 문제가 나타났다단체 활동이 알려지고 외연이 확장되면서 청소년청년학생 회원 수가 많이 늘어났는데그중에 단체 안의 단체처럼 자치적으로 활동하는 학생모임이 만들어졌다이들은 학벌없는사회 학생모임이란 이름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동시에 운영위 회의에도 참석하고 함께 활동 계획을 세워 나갔다학생모임이 주최하는 토론회나 공부 모임, (나이 든 세대들이 잘하지 못하는온라인 활동이나 퍼포먼스 등을 통해서 단체 이름이 청년층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그나마 운동을 소생시킬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모임 안에서도 남성 활동가의 권위와 위계 억압의 문제로 인한 구성원 간의 갈등이 있었다학생모임 활동가들과 시니어 멤버 사이의 불화도 있었다초창기의 대학원생들은 어느덧 30대 중반의 장년층이 되어 중년층의 운영위원들과 서로 불편한 말도 대체로 스스럼없이 하면서 지내는 사이가 되어 있었지만연령 차가 많이 나는 신입 청년들과는 그렇지가 못했다반말과 존댓말호칭을 둘러싼 상호 허용 범위와 지켜야 할 선의 경계도 모호했다처음에 우리는 서로 말을 놓거나서로 높이거나상호 존칭을 하거나 상호 편한 이름을 부르거나 그랬다그런데 동지아무개 님이라는 호칭이 들어왔고청년 학생들은 서로 ‘~’, ‘~’, ‘~동지로 불렀다반면 시니어들은 원래 쓰던 대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누구는 선생님인데학생들은 ‘~로 불렸다말의 평등이 무너진 것이다그리고 어느 날 회의에서 한 학생이 선생님라고 불렀다약간 논쟁이 격화된 중이었는데이 표현에 그 선생님이 인내심을 잃었다대노했던 그에게 학생모임은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 학생은 떠나 버렸고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이 사건이 공개적으로 외화되었다문제는 이 문제를 공개한 사람도 학생모임에서 억압적 태도로 계속 문제 제기를 받았던 사람이며 사건 공개 또한 학생모임의 다른 멤버들과 전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들 입을 다물어 버렸다그 누구의 편에 서서 옳다 그르다 판단을 하지 않았다학생도 떠나고 교수도 떠났다그때 우리는 다들 서로 조금 징글징글해졌고조금씩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한다하지만 결과적으로 와해된 건 역시 학생모임이었다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져서광주로 가고군대로 가고유학을 떠나고다른 단체로 갔다사무국도 함께 몸으로 때우며 일해 주던 젊은 벗들이 사라지자 다시 조용해졌다학생들이 상주하던 사무실은 비어 있는 날이 많았고운영위원들은 회의가 있는 날에만 사무실에 나왔다.

 

이런 이별은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있었다우리는 갈등과 내홍을 잘 해결해 나가지 못했다늘 대판 싸우고 사람이 떠나는 방식으로 정리가 되었고그러고 나면 남은 사람들의 관계도 서걱거렸다지금 돌아보면 늘 일하는’ 사람들이 떠났고 말하는’ 사람들이 남았고, ‘젊은이들은 떠나고 어른들은 남았다안에서는 계속 사람이 빠져나가는데 이상하게도 회원 수는 그만큼 들어와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뭔가 활동을 벌일 만큼 충분하지는 않으면서사무실 월세와 활동가 급여를 간신히 맞추고 나면 월례 토론회 같은 정기 행사를 겨우 치를 수 있을 만큼딱 그만큼의 회비가 (그만큼의 정산 처리에 드는 품을 요구하면서다달이 입금되는 조직이었다회원들은 학벌없는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지도 않고 열심히 회비를 내고 있는데단체는 사무실을 겨우 유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찾을 수 없는스스로 갇혀 돌고 있는 쳇바퀴 같았다.



모색 학교 밖 청소년 운동과 학벌없는대학


돌파구를 모색해야 했다. 2009년 학벌없는사회는 경희대학교와 공동 사업으로 한국연구재단 시민 인문학 사업에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 하는 인문학 교실로 지원을 신청했다당시 이미 많은 시민단체들이 그런 지원을 받아 사업을 하고 있었고정부는 물론 기업 후원을 받는 곳도 많았다하지만 우리는 초기부터 그런 지원에 대해 암묵적인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때껏 해 본 적이 없었다물론 그런 쪽으로 추진력도 욕심도 별로 없었던 것도 이유다.

 

이 사업 제안은 처음에는 반대에 부딪혔고운영위에서 갑론을박을 거쳐 어렵게 통과가 되었다누가 한다고 하면 크게 막는 분위기는 아닌 단체였지만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우리 역량으로 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사무국의 부담이 계속 걸림돌이었다제안자인 나의 상황도 불신의 요소였다아이는 어렸고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다시 밟으며 공부하고 있던 중이었다나는 사무처장을 그만두었고학벌없는사회 운동은 학교 밖청소년과 함께하는 인문학 교실’ 사업으로만 결합하기로 했다결국 이 사업은 학벌없는사회가 기획과 진행을 맡고 제반 행정적 지원은 경희대에서 맡은 협업 모델로 이루어지게 됐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나니 다들 관심을 보이고 전과 다른 분위기로 도움을 주었다교수나 연구자들은 한국연구재단 사업에 공동 연구원으로 참여하면서 연구 실적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단체가 제도권 안에서도 알려져 공신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돈이 많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았다사람도 많이 끌어모을 수 있었고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볼 수 있었다돈은 좋은 것이었지만 또 독이기도 했다지원 사업 체계의 요구와 형식에 맞추느라 전에 없던 스트레스가 우리를 압박해 왔다다들 서툴렀지만실수는 책임을 지게 했고서로를 책망하게 했다.

 

그래도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산이 아니라 이 사업을 통해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주체를 교수명망가지식인에서 학벌이 없는 자’ 당사자들로 다시 세우려는 시도였다.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 하는 인문학 교실 삶은 달걀거리의 청소년과 함께하는 떡볶이 학교는 청소년들을 만나는 새로운 형태의 활동을 만들어 냈고회의만 하던 단체가 일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들고 그들이 다시 활동을 조직하는 활동체로 조금씩 변모해 갔다우리의 활동을 통해 탈학교 청소년이나 학업 중단 청소년이란 이름을 거부하고 학교 밖 청소년이라는 이름을 탈환했다거리 조사 활동으로 학교 밖 청소년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분석했던 것도 활동가의 역량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작은 일 하나하나가 커다란 무용담이었다현장이 없던 단체에 현장이 생겨났고탈학교 지원 센터와 쉼터돌봄 센터대안학교 등과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현장이 생기니 문제가 보이고문제가 보이니 필요한 사업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2년 연속 지원 이후 지원 사업은 탈락했지만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하는 인문학 교실’ 사업은 아주 적은 예산으로우리가 할 수 있는 규모에서, 3년 차까지 진행하고 마쳤다이때 만났던 학교 밖 청소년들과 현장 교사들활동가들은 나의 문제 의식과 운동의 방향을 수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학벌없는 사회의 든든한 연대자이자 주체가 될 사람들이었다대학거부자들의 투명 가방끈 운동과 청소년운동 활동가들의 모임인 활기도 학벌없는사회 운동과 결합했다새로운 루트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활동에서 얻은 자신감과 필요성네트워크를 토대로 학벌없는 대학이라는 대안 대학대안 배움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그런데 주체적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너무 성급하게 공론화를 했다내부적으로 방향을 어느 정도 수립한 상태에서 사람과 의견을 모아 나갔어야 했는데처음부터 너무 열어 놓고 논의를 시작했다학교 밖 청소년 사업이 성공하면서단체에 다시 중심이 형성되고 발길이 뜸했던 사람들도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그러면서도 교수 집단은 대학거부자 운동과 학교 밖 청소년 운동을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중심에 놓지는 않고 다소 주변적이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했다그런데 가칭 학벌없는대학을 제안하자마자 가장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대학 교수들이었다.

 

학벌없는대학에 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정도 노선으로 정리되었다첫째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안 대학(대안학교 이후 진로모델둘째는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대안적 연구 대학 모델셋째는 현장을 중심으로 노동과 학습을 결합하는 고등 야학 모델이었다그런데 준비 없이 시작된 논의 단계에서 이미 함께할 수 없는 입장의 차이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결국 죽도 밥도 되지 않았다딱히 의지도 없고 책임지지도 않을 일을 왜 벌이고와서 일해라 절해라’ 말만 하는지화가 났다짜증은 가장 가까운 사람가장 만만한 친구에게 튀기 마련이다. ‘말만 하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나마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남았던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가장 큰 문제는 3년간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하는 인문학 교실 사업을 하면서 주체들의 에너지가 많이 소진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마추어적 운동에서 조금은 프로페셔널하게 사업의 방식에 적응해 갔다공모 지원 사업이 그렇게 단체들의 활동 목표와 방법을 운동에서 사업으로’ 변형시킨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다성공할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여전히 실무를 담당할 사람은 적었고예산은 많았지만 그에 따른 요구도 그만큼 많았다지원은 언제나 가시적 성과를 요구했고 평가의 척도에 활동이 맞춰져 갔다나도 그때는 거의 워커홀릭이 되었고건강을 잃었고친구도 잃었다.



해산


어느 날 회의에서 나는 하도 답답해서 단체 청산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식으로 하려면 차라리 그냥 같이 망하자이렇게 질질 끌고 가느니반성하고 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단체는 청산하지 않고 법인만 청산했다그러고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어느 날 회의에서 나는 또 선언했다. “이런 식이라면 나는 더 이상 못 한다나가겠다.” 운영위원 사퇴의 압박이었다다들 어쩔 수 없이 이름만 걸어 놓고 정작 누구도 총대 맬 생각이 없는 주인 없는 조직에서 회의에 나가 앉아 있는 시간이 아까웠고내 인생이 아까웠다하지만 그런 식으로 협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방식이었다.

 

지금은 그때 그런 식으로 했던 것을 후회하고 반성한다사실 반은 엄포였는데아무도 잡지 않았다아무도 잡지 않은 것이 서운했고뱉은 말을 번복하기엔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게 결별하고 말았다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니그래 나가라 하고 붙잡지 않은 것이 아니라누구도 더 하자고 붙잡을 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나의 실수였고실패였다지금의 나는 망하자고 했으면 망하는 것도 최선을 다해 망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단체 청산 논의에 대한 안내 메일이 왔다다시 얼마 후에 청산 결과 안내 메일이 해산 선언문과 함께 도착했다신문에는 그동안 앞에 나섰던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가 실렸다한국 사회에서 크다면 큰 사건이었다. 2016년 봄이었다.

 

학벌없는사회가 해산 선언을 한 325일은 내가 서울지방노동위 원회에 부당 해고 구제 신청을 접수한 날이다. 20151225일 경희대로부터 해고 이메일을 받은 날로부터 딱 3개월째 되는 날신청 기한의 마지막 날이었다그때도 나는 대학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신문에서 학벌없는사회 해산의 변을 보았다해산 이유는 간단했다학벌 사회는 끝나지 않았지만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시효가 다했다는 것이었다학벌 사회보다 자본 사회가 더 막강해졌고학벌이 더 이상 신분 보장의 수단이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이 이유였다운동의 이유는 객관적 조건에 의해 자동 소멸한 것으로 되었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삶은 같은 학벌이라는 심리적 연결도 끊어 내 버리고 모두를 파편화하고 있다노동 자체가 해체되어 가는 불안은 같은 학벌이라고 밀어주고 끌어주는 아름다운(?) 풍속조차 소멸시켰다학벌 사회는 교육에서 비롯하지만 그 본질은 사회 권력의 독점에 있다그러나 자본의 독점이 더 지배적인 2016년 지금은 학벌이 권력을 보장하기는커녕 가끔은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다학벌과 권력의 연결이 느슨해졌기에 학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삶의 안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학벌없는사회 해산 선언문 가운데


나는 해산 선언문의 이 진단에 동의할 수 없었다그 시점에서 학벌없는사회란 단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동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한번 만들었다고 영원히 짊어지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객관적 주관적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해산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그런 식으로 망해서는 안 되었다그 평가에는 우리 운동에 대한 주관적 평가와 반성이 빠져 있었다그건 공중분해와 소멸의 방식이었다최소한 활동의 역사와 평가는 정리해서 남겼어야 한다단체는 망해도 운동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시정해야 할 판단과 여전히 남아 있는 운동의 과제


반反 학벌운동의 시효가 끝났다는 판단의 근거는학벌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현실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당시 해산 기사에는 한 유명대 졸업식장에 걸린 이색 플래카드가 함께 소개되었다그 플래카드에는 ○○대 나오면 모하냐 백순데…라고 쓰여 있었다실제로 대졸자 취업률은 계속 하락하고청년 실업률은 외환 위기 이후로 계속 치솟고 있었다. 2006년 금융 위기 이후외환 위기 당시 구조 조정의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교육부는 각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률을 평가 점수에 반영하거나취업이 잘되는 이공계 정원을 늘리고인문사회과학 분야 기초 학문 수요를 줄이는 정원 조정을 유도하는 프라임 사업 같은 인위적 학과 구조 조정으로 노동 시장의 수요-공급 미스매치를 해결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대책을 내놓고 있었다그래서 취업도 학벌에 따라 성적순으로 하던 시대는 가고이제는 명문대 나와도 취직 걱정을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으며그런 점에서 학벌 가치가 전반적으로 하락했다는 것이다경쟁의 중심은 학벌 경쟁에서 취직 경쟁생존 경쟁으로 옮겨갔고신분과 자본의 취득에서도 학벌이 미치는 영향력이 예전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진단이었다.

 

이 진단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당시 해산 소식을 접하고 단체 외부에서도 여러 사람이 글을 썼는데그중 엄기호는 한국이 자본 앞에서 학벌도 힘을 못 쓰는 사회가 되었다는 이 진단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학벌은 끝났는가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학벌은 붕괴했다는 말을 하곤 했다학벌이 서울대부터 가장 마지막에 있는 대학까지 일렬로 서열화를 이룬강한 구조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런 의미에서의 학벌은 밑에서부터 이미 붕괴되었다고 말이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홍동 국숭세단으로 대표되는 서울의 대학과 지방의 몇몇 국립대를 제외하고는이미 서열이 무의미해졌다.

엄기호(2016), 〈과연 학벌은 끝났는가〉《시사인》, 452


그러나 엄기호는 학벌이 밑에서부터 붕괴되었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여전히 학벌은 강하고 더 강화되리라고 진단했다.


하층에서 대학이 의미가 없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상층에서는 대학이 큰 의미를 가진다경제 자본뿐 아니라 문화 자본으로서 가치를 함께 가진다과거에 학벌이 그나마 소규모일지라도 사회 이동을 가능하게 한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다면이제 학벌은 중상 이상의 계층에 독점물로서 가치를 가진다이른바 명문대 안에서도 특목고나 자사고 출신이 이너 서클을 만들어 이런 가치를 독점한다학벌이 대학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출신고-대학으로 더 강화된 현상이 나타난다학벌學閥 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계층이 더 폐쇄적이고 독점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엄기호(2016), 앞의 글


조국 사태는 이런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중상위층의 계급 세습에서 학벌은 여전히 중요하고 독점적인 가치를 지니는 자본이다올해 5월 미국에서 뇌물 액수가 무려 75억 원에 달하는 스탠퍼드대 부정 입학을 포함하여뇌물 총액 규모가 2500만 달러연루자가 33명에 이르는 초대형 대학 입시 비리 사건이 터졌다. “자본 앞에 학벌이 힘을 못 쓰는 사회가 부분적으로만 맞을 뿐이며 자본과 결합하는 학벌이 계급 재생산 및 지배 권력 강화에 필수적임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지금 학벌과 자본의 결합지식 정보 사회라고 불리는 지식-자본주의’ 사회에서 중간 계급에게 가장 유리하고 이상적인 형태의 권력 획득 수단이다.

 

그러나 해산 선언문의 판단은 새로운 계급 사회의 구조 변동과 그 속에서 학벌의 가치 성격 변화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였다세계화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장된 초국적 자본은 새로운 관리 계급을 필요로 한다그것은 지금이 밀리반드와 풀란차스가 자본과 국가의 관계를 논쟁하던 시대로부터 훨씬 지나온 단계즉 자본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관료와 학자들을 동원하여 국가 단위의 통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단계로서이른바 다보스맨’ 같은 초국적 세계 상류 시민 계층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국가에 충성하지 않고 시장에 충성하는 마켓월드의 시민들과 기업의 수백만 손발이 되어 노동 계급을 대리 착취하는 일을 담당하는 신중간 계급이 등장했다그들은 스스로 고소득 전문 직종 임금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금융 자산가로서소자영업자나 농장 경영주 같은 고전적인 쁘티 부르주아 직업군들을 대체해 나갔다시애틀의 창업가와 실리콘 밸리의 기술자들은 어지간한 기업체 사장보다 연봉이 더 높고주식이나 채권 등금융 자산으로 인센티브를 받는 것을 좋아한다그들은 고액 임금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유휴 자산으로 투자하는 투자자이다학벌 가치의 양극화는 이 중간 계급의 양극화와 관련된다.

 

중간 계급의 양극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중간 계급의 상층부로서 자본가 계급과 이해관계의 내적 일치를 이룬 집단은 형식상의 임노동자라도 자산 소유 투자자로서 금융 자본가이기도 하다리처드 플로리다가 문화 계급이라고 규정한 신규 계급 집단도 여기에 속한다이미 유명 연예인이나 밀리언셀러 작가셀럽 지식인메이저 출판사미디어 그룹부동산 재벌벤처 기업가 등 수많은 구체적 사례를 우리는 알고 있다그 가운데서 전형적으로 중간적 기생 존재였던 지식인들도 지식 계급으로서 자기 계급화를 해 나간다. ‘자본가적-지식인지식-자본가들의 모습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충분히 찾을 수 있고오늘날 진보적 지식인의 타락 혹은 변절이라 불리는 현상 이면에는 개인적 차원의 전향이 아니라 이런 계급적 구조의 변동 아마 자기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의 아래쪽에는 몰락한 중간 계급이 불안정 비정규직 임노동자와 마찬가지의 영세 자영업자소상인 등의 형태로 존재한다.

 

양극화의 상층부는 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금융 자산의 투자를 통해 소득과 재산을 계속 불려 나가지만아래쪽의 노동은 자기 착취적이며 할수록 부채의 늪으로 빠져들어 소득과 재산이 줄어든다기술과 지식에 기반하는 비물질 자본주의는 신체와 노동에 기반하는 물질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그 물질성의 가치를 하락시켜 비물질 가치를 높이는 방식의 착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소위 그런 비물질 자본주의’ 시대에지식의 환금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고학벌 자본은 금융 자본주의의 자산 경쟁에서 수익률이 아주 높은 투자 자본이다.

 

이러한 양상은 김상봉의 《학벌 사회》에서 시작한 반학벌운동이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 봉건성과 패거리주의를 청산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합리적 사회를 추구했던 것과 지금 시대의 학벌타파운동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를 보여 준다《학벌 사회》에서는 학벌을 전근대적 유물로 파악하고 그것을 근대주의적 합리성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하지만 지금은 학벌이 세계 시민 사회의 상층부로 진입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고지식을 금융화할 수 있는 자본이 되었다.

 

이런 계급 구조 변동과 학벌의 가치 변동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과거 전근대적 학벌 체제하의 한국 대학에 대해 대안적 모델로 항시 제시되었던 것은 주로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대학들이었다지금도 중산층 진보 시민들은 그 모델을 선호한다하지만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를 쓴 것은 68혁명으로 프랑스 대학들이 평준화된 이후였다부르디 외의 의문은 대학을 평준화했는데도 왜 사회가 평등해지지 않고 계급 세습이 계속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었다그 답은 교육과정 외부에서 문화 자본이나 상징 자본 같은 무형의 자본 형태를 통해 계급의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이것이 계층 이동을 봉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생각해야 할 문제우리가 누락했던 문제는 학벌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며그것에 대해 노동 계급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 가의 문제다. ‘공정한 기회를 얻으면 이 지배 구도에 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자본과 학벌의 관계를 끊기 위해서 지금 중요한 것은 세 가지다.

첫째돈 문제다등록금을 철폐해야 한다이것은 정치적으로는 교육 기본권의 요구다.

둘째경영이다총장 직선제를 포함 대학 경영에 참가하여 대학의 지배 구조를 바꿔야 한다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참정권의 요구다.

셋째대학 평준화다입시를 철폐하고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부터 만들어야 한다정치적으로 이것은 평등권의 요구다.

이런 형식상의 개혁 과제와 함께 또 하나 내용적으로 이루어 내야 할 중요한 교육 개혁의 과제가 있다그것은 교육과정에서 노동 계급의 관점을 확장해 내는 것이다중등교육과정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대학 개설 과목에서 진보 학문과 좌파 이론이 도입될 수 있도록 하는 가치 투쟁을 해야 한다지금 대학의 커리큘럼은 1987년 이후로 진전되었던 1990년대의 수준보다도 훨씬 후퇴했다역사학 대신 미래학이사회과학 대신 문화연구가정치학 대신 경영학과 행정학이 학문적 위상을 전도하며 대체하고 있다.

 

학벌없는사회는 학벌 없는 사람들이 학벌 체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이론과 철학담론의 무기를 제공하고자 했다지금도 그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여전히 절실하고 필요한 일이다또한 보다 실천적인 행동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것보다알면서도 어떻게 행동할지를 모르는 것이 더 문제다홍콩칠레볼리비아 등 세계 곳곳에서 분출되는 저항운동에서는 흐름을 막는’ 운동이 빠짐없이 등장한다마치 유연성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듯이 교통의 흐름을 끊고플랫폼 자본주의에 항의하듯이 플랫폼을 장악한다프랑스의 노란 조끼 운동은 차들이 쉬지 않고 흐르는 로터리를 점거하면서 시작되었고홍콩의 여명 시위는 지하철의 운행 방해를 통해 열차를 고의 지연시킨다시위대는 도로에 돌과 나무로 된 장애물을 설치하여 진압 차량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도 한다칠레에서도 도로를 봉쇄하여 물류를 차단하는 시위가 일상화되고 있다흐름을 끊는 운동의 실천적 사례들은 중요한 암시를 담고 있다하나는 공동 지성이 유동성과 플랫폼이라는 억압 기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이 체제가 이대로 흘러가는 것을 그 한 길목을 직접 차단함으로써 중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은 무수히 많다그 의미를 간과하고 있을 뿐이다학교 밖 청소년들과 떡볶이 학교를 했을 때도 그랬다사람들이 오가고 모이는 광장에 흩어져 있던 청소년들을 한데 모으자그 자체만으로도 공간의 성격이 변하면서 무엇인가 문제가 드러났다청소년 1분 발언대를 시작하자말하지 않을 것 같은 청소년들이 1분이 아니라 5, 10분씩 학교와 사회와 부모와 교사를 성토하기 시작했다경찰들은 계속 와서 여기서 뭐 하느냐고 물어보았다경희대에서 잔디밭 강의를 할 때도 그랬다들어갈 수 없다고 구획되어진 장소에 들어갔을 때그 외부로부터 입력된 금지의 훈육을 깨트릴 수 있는 건 결국은 우리의 몸이었다.

 

학벌없는사회는 그 몸이 필요했지만그 몸을 만들지 못했다연결되며 확장되는 공통의 몸을 만들지 못했다강고한 학벌 체제에 대한 치명적인 균열은 어쩌면 입시 철폐나 국공립대 통합 같은 정책 제안보다지하철을 멈춰 세우거나 사유지로 종획하는 대학을 점거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더 빨리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이 대학 서열 체제학벌을 해소하지 않고는 한국의 교육 문제는 어디를 건드려도 해결할 수 없다혁신교육 담론이든미래 교육 담론이든 그 점을 외면하고서는모두 기만적인 미봉책일 뿐이다공정은 경제적 언어지만 정의는 정치적 언어다대학 체제를 직접 타격하는 반학벌운동만이 공정의 덫에 걸리지 않고 교육의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정치적 교육운동이다우리는 이 통치 기구화하는 대학과의 싸움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그것이 우리의 현재를 혁신하고 미래를 구하는 길이다.



마치며


이 글은 108일 광주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광주 학벌 없는사회)에서 발표한 글이다이날 광주 학벌없는사회는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선언을 다시 쓰고 발표했다회원들과 시민들은 이 글을 함께 낭독했다광주 학벌없는사회는 지금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전국 차원의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벌여 나갈 것이며단체 또한 지역 운동이 아니라 전국 단위 운동 단체로 전환할 것도 함께 선언했다.


이날 선언문을 다시 쓴 또 다른 이유를 들었다온라인에서 학벌없는사회를 검색하면 해산’ 소식이 제일 먼저 뜬다는 것이다그것이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그래서 이 선언문을 통해 사람들이 검색했을 때 최소한 해산이 아니라 선언이란 글자를 먼저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광주 학벌없는사회는 학벌없는사회의 해산 당시에도 논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단체의 사정이 아니라 운동의 실효성까지 고려한 해산이었다면다른 곳에서 운동하고 있는 주체들과도 함께 논의를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서울의 해산 소식을 들었을 때광주도 함께 해산당한’ 기분이었다는 말을 들었다서울과 광주의 문제 역시학벌없는사회 운동 안에 내재했던 운동의 주체와 대상의 문제중심과 주변화의 문제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 글은 객관적 평가라기보다는 주관적 반성에 가까운 글이다그래서 다른 이들의 경험이나 각자의 평가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이 글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나는 이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각자의 운동을 정리하고해산문 한 장으로 정리할 수 없는 각자의 경험으로부터의 평가와 전망의 목소리를 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과거를 잘 정리하는 것은 다음의 운동을 잘 시작하기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다우리 운동에서 부족한 것이기도 하다이 글이 그 일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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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