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폭력의 현장에 서지 않도록 배우고 성찰하는 힘을 위하여
- 이어진 학살, 광주와 베트남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dholggot@gmail.com
평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상’이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야만의 세월 속에 온전히 자기 삶을 누리지 못한 아까운 그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삼촌…….
그들의 삶을 머리가 커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한베평화재단과 함께하며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일에 골똘한 1인입니다.
기억의 시작
화면이 꺼졌다. 빛이라곤 없는 암흑 속에 수백 명 사람들의 침묵이 흘다. 10초쯤 흘을까.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술다. 뭔가 끝이 아닌 것 같은데? 화면이 꺼졌으니 끝난 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화면에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나온 안내 방송, “필름 바꾸고 가겠습니다.”
1980년대 후반, 나는 중학생이었다. 친구의 대학생 오빠가 던져 준 화표는 〈오! 꿈의 나라〉라는 제목의 화다. 극장으로 화를 보러간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짜 표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학교가 파한 후 늦을세라 신나게 극장을 향해 달렸다. 극장이라는 곳이 대학교 체육관이라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것 빼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렇게 나는 친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과 숨죽여 80년 광주를 봤다.
〈오! 꿈의 나라〉는 1989년 화창작집단 장산곶매가 만든 독립 화이다. 광주항쟁과 동두천을 통해 미국 문제를 제기한 반미 화다. 화의 줄거리는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화가 무서웠고, 그 두려움은 내 기억 속에 필름을 교체하는 순간의 암전과 거리를 휘젓는 새까만 군홧발로 남아 있다. 화는 나쁜 꿈이 되었다. 악몽에는 언제나 군홧발이 등장했다. 중학생 나에게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때 보았던 것이 실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지난 5월 광주 5.18기록관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화 〈오! 꿈의 나라〉를 다시 만났다. 5.18을 다룬 작품과 노래, 화를 소개해 놓은 곳에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내게 광주의 기억은 화 〈오! 꿈의 나라〉에서 시작한다. 군홧발로 상징되는 국가 폭력에 대한 기억과 함께 말이다.
광주 순례
교육공동체 벗과 함께 광주를 찾은 것은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한베평화재단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청와대 앞에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성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다. 뜻을 함께하는 많은 시민들이 매일 피켓을 들고 릴레이를 이어 갔다. 이 릴레이는 재단에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하나는 릴레이에 참여한 시민이었고, 또 하나는 청와대 앞을 지나며 우리를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수많은 베트남 관광객이었다. 매일 광장을 채운 감동의 이야기는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 만만한 릴레이 게시판에 빼곡하게 적어 두었다. 교육공동체 벗과의 소중한 인연도 그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지난해 11월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온 교육공동체 벗 사무국 풀씨가 릴레이 주자로 서는 날이었다.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공부하고 그 모임이 베트남 평화기행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눈 게 시작이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을 중심으로 한베평화재단 사무처 활동가가 결합해 공부 모임을 열기로 하고, 첫 모임을 5월 말로 잡았다. 그리고 첫 모임 전에 광주 순례를 다녀오자고 입을 모아 순식간에 광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광주로 떠나는 날은 징검다리 연휴의 시작인 탓인지 고속도로가 붐볐다. 도착도 1시간이나 늦었다. 3시간 반이면 족한 길을 4시간 반이 걸려 도착했다. 광주에서의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예정된 것은 없었으니까. 몇 가지 순서만 정하고 떠난 길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원하는 대로 1박 2일 광주를 누볐다.
19세 처녀, 응우옌티탄과 손옥례
1994년 5월도 광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지금은 구묘역과 국립 5.18민주묘역으로 나뉘어 있어 긴 걸음으로 동선을 잡고 참배를 해야 하지만 그때는 그냥 망월동 묘지다. 망월동 묘지란 현재의 ‘구묘역’이다. 망월동 묘지 입구에서 전두환 표지석을 밟고 들어가면 한눈에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망월동에 도착한 우리는 구묘역부터 참배를 했다. 2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백남기 농민과 정광훈 의장님을 비롯해 5.18 이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묘비가 새로이 들어선 것을 빼곤 말이다.
우리에게 묘역을 안내해 준 분은 광주 효천중학교 배이상헌 선생님이다. 5.18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그때 함께 싸우지 못한 미안함,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부채감이 활동의 이유이고 동력이라고 말했다. 1시간 남짓의 짧은 강의 후 묘역을 돌며 열사 한 분 한 분을 소개하는 그의 열정이 대단했다. 어떤 묘비 앞에서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시간만 있었다면 좀 더 많은 열사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그 마음은 훗날 5.18기념재단이 편찬한 증언록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로 달래 보리라. 이 책은 5.18 당시 돌아가신 열사와 행방불명자, 항쟁 이후의 열사들 한 분 한 분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묘역을 돌며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가 기억났다. 묘역 어귀에서 마주했던 사진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나는 그때, 태어나 가장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 시간이 흘러 몇 해 전 5.18민주묘역 전시관을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보았던 사진들이 여전히 전시되어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눈여겨 찾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이전에 보았던 사진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후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을 만났다. 어린이, 여성, 갓난아이 할 것 없이 들판과 논둑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그것은 1968년 베트남 중부 퐁니퐁넛 마을에서 74명의 민간인이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으로, 사진은 학살 직후 미군인 본 상병이 촬한 것이었다. 그중에 한 여성의 사진에 눈이 갔다. 설명에는 “가슴이 잘린 채 살아 있는 여자”라고 적혀 있었다. 여성의 이름이 ‘응우옌티탄’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다. 옷을 잘 짓는 19세 처녀 응우옌티탄의 이름을 불러온 사람은 〈한겨레〉 고경태 기자다. 응우옌티탄과 함께 그날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찾아 주었다. 고 기자가 마을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과정은 한베평화재단이 주최하는 아카이브전 〈한마을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나는 이번에 광주를 찾아 응우옌티탄과 닮은 죽음을 만났다. 5월의 노래에 담긴 가사처럼 가슴이 찢긴 채 주검으로 발견된 손옥례 열사의 검시 기록이 5.18기록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손옥례 열사 역시 당시 여고 졸업생으로 응우옌티탄과 같은 열아홉 살이었다. 사인은 “엠-16 총상 및 자상” 부위 및 사인은 “좌유방부 자창, 우측 흉부, 하악골, 좌측 골반부, 대퇴부 관통 총상, 직접 사인 우흉부 관통 총상”이었다. 총알에 몸이 뚫리고 대검으로 가슴이 찢긴 처참한 모습이었다. 1980년 당시 심하게 훼손된 시신은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손목시계를 보고 딸임을 확인하는데, 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부모 모두 단명하고 동생마저 불운하게 삶을 마쳤다고 한다. 1968년 베트남 처녀 응우옌티탄의 죽음이 12년 후 광주에서 재현되었다.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은 베트콩이었을까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은 왜 그리 잔인했을까? 지난해 미 기문서를 통해 의혹으로만 머물던 광주의 진실이 확인되었다. 광주에서의 잔인한 진압 작전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기문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의혹은 사실이었다. 월남 참전의 경험은 광주 학살로 이어졌다.
해당 기문서는 복수의 한국군 내부 정보원의 말을 인용해 “한국군의 동떨어지고 잔인한 처리는 현 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모두 베트남전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4.19와 같은) 1960년대 초반의 유사한 사건에 비해 광주에서의 대응이 훨씬 잔혹했던 것도 그 이전의 선배 장교들과 달리 군 수뇌부들이 베트남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라며 “한국군이 점령군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마치 광주 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고 적고 있다. 문서에서 한 정보원은 베 트남에서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마을인 ‘미라이(MY LAI)’에 빗대 광주를 ‘한국의 미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재된 국가 폭력의 역사가 베트남을 지나 광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해 혹은 피해로 얽힌 국가 폭력의 역사
우리는 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저자 이삼성은 베트남 전쟁이 우리 한반도 현대사의 거울이며, 그것은 우리 현대사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현대사의 모순과 고뇌와 많은 면에서 닮은꼴을 지녔다고 말한다. 일본이 아시아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 진정으로 되돌아보아야 되듯이, 그 정도와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 역시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자기성찰의 역사의식을 가다듬어야 한다고도 덧붙인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 역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 가해의 역사를 돌아보며 폭력의 경험이 어느 순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자리바꿈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경험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 통치 기간 동안 겪었던 고통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과하길 바라고 있는데, “당신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고통을 끼쳤는지 기억하거나, 혹은 거기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팔레스타인 작가가 본 한국군 잔혹의 서사, 내가 만난 베트남’ 19화, 다음 스토리펀딩). 그렇다면 자기 성찰의 역사의식은 무엇으로 가능할까?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광주의 정신
폭력의 경험은 반복된다. 그것이 피해의 역사든 가해의 역사든 폭력의 기억을 성찰하지 않고 내재화한다면 언제든 자리바꿈을 하여 등장한다. 그 폭력의 배후에 국가가 있다면 우리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고 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나는 우리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평화로 치환해 나아가는 힘을 광주 정신에서 찾아본다.
이번 광주 순례가 빛났던 것은 ‘1980년 광주 정신’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를 단지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현재 살아 있는 정신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배이상헌 선생님을 통한 배움이 컸다. 광주를 ‘짓밟히는 5.18’과 ‘저항하는 5.18’,‘부활하는 5.18’로 기억하자는 것이다. 5.18을 통해 우리 시대가 진정 이어 가야 할 것은 저항과 대동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의식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폭력의 현장에 서지 않도록 역사를 배우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저항의 역사를 돌아보고 단지 진실을 밝히는 것을 넘어 그 정신을 배우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광주에 잇닿아 있는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하고, 광주 정신을 통해 베트남전 참전이 가져온 가해의 역사를 성찰해야 한다. 광주는 베트남이고, 베트남은 광주다.
기고
폭력의 현장에 서지 않도록 배우고 성찰하는 힘을 위하여
- 이어진 학살, 광주와 베트남
석미화
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dholggot@gmail.com
평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상’이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야만의 세월 속에 온전히 자기 삶을 누리지 못한 아까운 그들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삼촌…….
그들의 삶을 머리가 커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한베평화재단과 함께하며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일에 골똘한 1인입니다.
기억의 시작
화면이 꺼졌다. 빛이라곤 없는 암흑 속에 수백 명 사람들의 침묵이 흘다. 10초쯤 흘을까.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술다. 뭔가 끝이 아닌 것 같은데? 화면이 꺼졌으니 끝난 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화면에 시동이 걸렸다. 그리고 나온 안내 방송, “필름 바꾸고 가겠습니다.”
1980년대 후반, 나는 중학생이었다. 친구의 대학생 오빠가 던져 준 화표는 〈오! 꿈의 나라〉라는 제목의 화다. 극장으로 화를 보러간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짜 표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학교가 파한 후 늦을세라 신나게 극장을 향해 달렸다. 극장이라는 곳이 대학교 체육관이라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그것 빼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그렇게 나는 친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과 숨죽여 80년 광주를 봤다.
〈오! 꿈의 나라〉는 1989년 화창작집단 장산곶매가 만든 독립 화이다. 광주항쟁과 동두천을 통해 미국 문제를 제기한 반미 화다. 화의 줄거리는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화가 무서웠고, 그 두려움은 내 기억 속에 필름을 교체하는 순간의 암전과 거리를 휘젓는 새까만 군홧발로 남아 있다. 화는 나쁜 꿈이 되었다. 악몽에는 언제나 군홧발이 등장했다. 중학생 나에게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때 보았던 것이 실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은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지난 5월 광주 5.18기록관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화 〈오! 꿈의 나라〉를 다시 만났다. 5.18을 다룬 작품과 노래, 화를 소개해 놓은 곳에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었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내게 광주의 기억은 화 〈오! 꿈의 나라〉에서 시작한다. 군홧발로 상징되는 국가 폭력에 대한 기억과 함께 말이다.
광주 순례
교육공동체 벗과 함께 광주를 찾은 것은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한베평화재단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청와대 앞에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성찰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했다. 뜻을 함께하는 많은 시민들이 매일 피켓을 들고 릴레이를 이어 갔다. 이 릴레이는 재단에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하나는 릴레이에 참여한 시민이었고, 또 하나는 청와대 앞을 지나며 우리를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수많은 베트남 관광객이었다. 매일 광장을 채운 감동의 이야기는 한베평화재단 홈페이지 만만한 릴레이 게시판에 빼곡하게 적어 두었다. 교육공동체 벗과의 소중한 인연도 그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지난해 11월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온 교육공동체 벗 사무국 풀씨가 릴레이 주자로 서는 날이었다. 두런두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공부하고 그 모임이 베트남 평화기행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눈 게 시작이었다.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을 중심으로 한베평화재단 사무처 활동가가 결합해 공부 모임을 열기로 하고, 첫 모임을 5월 말로 잡았다. 그리고 첫 모임 전에 광주 순례를 다녀오자고 입을 모아 순식간에 광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광주로 떠나는 날은 징검다리 연휴의 시작인 탓인지 고속도로가 붐볐다. 도착도 1시간이나 늦었다. 3시간 반이면 족한 길을 4시간 반이 걸려 도착했다. 광주에서의 시간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예정된 것은 없었으니까. 몇 가지 순서만 정하고 떠난 길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원하는 대로 1박 2일 광주를 누볐다.
19세 처녀, 응우옌티탄과 손옥례
1994년 5월도 광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지금은 구묘역과 국립 5.18민주묘역으로 나뉘어 있어 긴 걸음으로 동선을 잡고 참배를 해야 하지만 그때는 그냥 망월동 묘지다. 망월동 묘지란 현재의 ‘구묘역’이다. 망월동 묘지 입구에서 전두환 표지석을 밟고 들어가면 한눈에 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망월동에 도착한 우리는 구묘역부터 참배를 했다. 20여 년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백남기 농민과 정광훈 의장님을 비롯해 5.18 이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묘비가 새로이 들어선 것을 빼곤 말이다.
우리에게 묘역을 안내해 준 분은 광주 효천중학교 배이상헌 선생님이다. 5.18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그때 함께 싸우지 못한 미안함,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부채감이 활동의 이유이고 동력이라고 말했다. 1시간 남짓의 짧은 강의 후 묘역을 돌며 열사 한 분 한 분을 소개하는 그의 열정이 대단했다. 어떤 묘비 앞에서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시간만 있었다면 좀 더 많은 열사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그 마음은 훗날 5.18기념재단이 편찬한 증언록 《꽃만 봐도 서럽고 그리운 날들》로 달래 보리라. 이 책은 5.18 당시 돌아가신 열사와 행방불명자, 항쟁 이후의 열사들 한 분 한 분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묘역을 돌며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가 기억났다. 묘역 어귀에서 마주했던 사진의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나는 그때, 태어나 가장 끔찍한 장면을 보았다. 시간이 흘러 몇 해 전 5.18민주묘역 전시관을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내가 보았던 사진들이 여전히 전시되어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눈여겨 찾아보았다. 하지만 내가 이전에 보았던 사진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후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을 만났다. 어린이, 여성, 갓난아이 할 것 없이 들판과 논둑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진이었다. 그것은 1968년 베트남 중부 퐁니퐁넛 마을에서 74명의 민간인이 한국군 청룡부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으로, 사진은 학살 직후 미군인 본 상병이 촬한 것이었다. 그중에 한 여성의 사진에 눈이 갔다. 설명에는 “가슴이 잘린 채 살아 있는 여자”라고 적혀 있었다. 여성의 이름이 ‘응우옌티탄’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다. 옷을 잘 짓는 19세 처녀 응우옌티탄의 이름을 불러온 사람은 〈한겨레〉 고경태 기자다. 응우옌티탄과 함께 그날 비극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 하나하나 이름을 찾아 주었다. 고 기자가 마을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과정은 한베평화재단이 주최하는 아카이브전 〈한마을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나는 이번에 광주를 찾아 응우옌티탄과 닮은 죽음을 만났다. 5월의 노래에 담긴 가사처럼 가슴이 찢긴 채 주검으로 발견된 손옥례 열사의 검시 기록이 5.18기록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손옥례 열사 역시 당시 여고 졸업생으로 응우옌티탄과 같은 열아홉 살이었다. 사인은 “엠-16 총상 및 자상” 부위 및 사인은 “좌유방부 자창, 우측 흉부, 하악골, 좌측 골반부, 대퇴부 관통 총상, 직접 사인 우흉부 관통 총상”이었다. 총알에 몸이 뚫리고 대검으로 가슴이 찢긴 처참한 모습이었다. 1980년 당시 심하게 훼손된 시신은 가족도 못 알아볼 정도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가 손목시계를 보고 딸임을 확인하는데, 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부모 모두 단명하고 동생마저 불운하게 삶을 마쳤다고 한다. 1968년 베트남 처녀 응우옌티탄의 죽음이 12년 후 광주에서 재현되었다.
군인들에게 광주 시민은 베트콩이었을까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은 왜 그리 잔인했을까? 지난해 미 기문서를 통해 의혹으로만 머물던 광주의 진실이 확인되었다. 광주에서의 잔인한 진압 작전이 베트남 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 미국 국방정보국(DIA)의 기문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의혹은 사실이었다. 월남 참전의 경험은 광주 학살로 이어졌다.
해당 기문서는 복수의 한국군 내부 정보원의 말을 인용해 “한국군의 동떨어지고 잔인한 처리는 현 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모두 베트남전에서 실전 경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4.19와 같은) 1960년대 초반의 유사한 사건에 비해 광주에서의 대응이 훨씬 잔혹했던 것도 그 이전의 선배 장교들과 달리 군 수뇌부들이 베트남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라며 “한국군이 점령군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마치 광주 시민을 외국인처럼 다뤘다”고 적고 있다. 문서에서 한 정보원은 베 트남에서 미군이 양민을 학살한 마을인 ‘미라이(MY LAI)’에 빗대 광주를 ‘한국의 미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내재된 국가 폭력의 역사가 베트남을 지나 광주로 이어지고 있었다.
가해 혹은 피해로 얽힌 국가 폭력의 역사
우리는 왜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저자 이삼성은 베트남 전쟁이 우리 한반도 현대사의 거울이며, 그것은 우리 현대사와 불가분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현대사의 모순과 고뇌와 많은 면에서 닮은꼴을 지녔다고 말한다. 일본이 아시아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해 진정으로 되돌아보아야 되듯이, 그 정도와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 역시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자기성찰의 역사의식을 가다듬어야 한다고도 덧붙인다.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 역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 가해의 역사를 돌아보며 폭력의 경험이 어느 순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자리바꿈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경험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일본 식민 통치 기간 동안 겪었던 고통에 대해 일본 정부가 사과하길 바라고 있는데, “당신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어떻게 고통을 끼쳤는지 기억하거나, 혹은 거기에 대해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팔레스타인 작가가 본 한국군 잔혹의 서사, 내가 만난 베트남’ 19화, 다음 스토리펀딩). 그렇다면 자기 성찰의 역사의식은 무엇으로 가능할까?
베트남 전쟁의 기억과 광주의 정신
폭력의 경험은 반복된다. 그것이 피해의 역사든 가해의 역사든 폭력의 기억을 성찰하지 않고 내재화한다면 언제든 자리바꿈을 하여 등장한다. 그 폭력의 배후에 국가가 있다면 우리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가 되고 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나는 우리가 겪은 폭력의 경험을 평화로 치환해 나아가는 힘을 광주 정신에서 찾아본다.
이번 광주 순례가 빛났던 것은 ‘1980년 광주 정신’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를 단지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현재 살아 있는 정신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배이상헌 선생님을 통한 배움이 컸다. 광주를 ‘짓밟히는 5.18’과 ‘저항하는 5.18’,‘부활하는 5.18’로 기억하자는 것이다. 5.18을 통해 우리 시대가 진정 이어 가야 할 것은 저항과 대동 정신을 계승하는 역사의식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폭력의 현장에 서지 않도록 역사를 배우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저항의 역사를 돌아보고 단지 진실을 밝히는 것을 넘어 그 정신을 배우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광주에 잇닿아 있는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하고, 광주 정신을 통해 베트남전 참전이 가져온 가해의 역사를 성찰해야 한다. 광주는 베트남이고, 베트남은 광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