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정말로 인구가 문제인가
인구, 정치, 교육
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서울·수도권 외 지역, 특히 촌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몇 해 전부터 매우 위협적으로 들리는 말이 있다. ‘지방 소멸론’이다. 군 단위 지역과 지방 소도시부터 인구 감소로 인해 사라질 것이란 가설이다.
내가 사는 강원도 인제도 그런 소멸 예정지에 포함된다. 군 소식지 상단 잘보이는 곳에는 매달 인구 변동 상황이 전월 기준 플러스, 마이너스로 표시되어 기재된다. 새로 전입하는 세대에겐 쌀, 쓰레기봉투, 지역 상품권 등을 선물로 준다.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는 속초에 있었는데 그마저 사라져 이제 인제에 살면서 아이를 낳으려면 강릉까지 가야 한다. 강릉까지 가는 버스 노선은 없다. 도청 소재지인 춘천으로 가는 버스 노선도 지난해 없어졌다. 군에서는 퇴직한 산부인과 의사를 특별 영입해 읍내 병원에 진료실을 만들었다. 폐교와 폐원, 버스 노선 축소 같은 공공 서비스 감축에 맞서 우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중이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필수적인 공공 인프라가 토대부터 와해되고 있는데, 전입 지원금이나 농민 기본 소득이 과연 사람들을 농촌에 살게 할 수 있을까? 출산 장려금을 주면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거라 생각하는 저출산 대응 정책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하다.
기업화한 대농과 영세 자영 소농을 농민이란 하나의 범주로 묶기는 힘든 일이고, 농민도, 농촌도, 지방도, 간단히 단일화할 수는 없는 정치적 구성체인데, 개인별 지원책은 지역의 내부 정치를 너무 쉽게 간과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를 야기한 원인부터 찾아야 하는데, 지금 인구 정책은 ‘저출산 고령화’로 요약되는 인구 위기를 지역, 계급, 젠더 간의 불평등 관계를 바꾸는 구조적 해결책이 아닌 개별화된 지원책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고령 인구를 인위적으로 줄일수는 없으니 늘 초점은 출산에 맞춰지고, 책임은 언제나 ‘더 약자’에게 지워지며, 조절 대상도 늘 ‘더 약자’를 향한다.
인구 위기는 기후 위기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인구 위기도 사회 전체의 공통 위기지만 지역, 계급, 젠더, 세대 간의 불평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체험될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와 산업 전환의 충격을 제일 먼저 맞는 노동자, 농민, 소수자, 빈곤 지역 등 ‘최전선공동체’가 인구 위기의 최전선과 겹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인구란 무엇인가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이르미노 엮음, 이기영 옮김(2014), 한국문화사〕은 아주 두꺼운 채권 장부 책이다. 수도원의 관할 영지에 속한 장원들에서 거둬들여야 할 세금, 노역, 공물을 가구별로 세세하게 정리해 놓은 이 장부는 당시 영주가 속민colonus에 대해 가진 권리들의 목록을 보여 준다. 중세의 토지 대장이자 인구 대장이며, 예속민들에게 대한 영주의 권리 명세서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이장부는 문서 보관소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후대에 발견되었다. 영지명세장은 당시의 통치가 얼마나 치밀한 인구 관리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영주는 자기의 농사나 집안 살림 등 사적 경제를 위해 일상적으로 영지 내 속민들의 노동을 동원하고 생산물을 징발하였는데, 속민들에게 할당된 부역 일수와 징발 물품은 감자 1알, 계란 1알까지 세세하게 지정되어 있다.
이런 인구 관리 통치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으며, 고대 로마 황제가 제국의 영토 전역에서 실시한 ‘켄수스census’라고 불리는 정기적 인구 조사를 비롯해서,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영론에서 로마의 카토와 바로의 농업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정 경영론이 국가 경영론의 원형이다. 켄수스에서 유래된 ‘센서스’라는 말이 그대로 ‘인구 조사’라는 현대어 고유 명사로 쓰일 정도로, 인구 조사는 고대부터 근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국가 경영의 핵심 통치 기술에 속한다. 한마디로, ‘인구’가 없이는 국민도 없고, 국가도 없고, 통치도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인구는 가장 중요한 통치의 기초다. 통치자는 무엇보다 인구를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로마의 황제는 인구가 감소한 지방 수령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고, 인구 유출이 심할 경우에는 관직을 박탈했으며 반대로 인구 유입이 많은 지방의 영주에겐 상을 하사했다. 인구가 곧 황제의 노동력이며 재산이자 군대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인구 관리는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서부터 갈리아 지방의 생제르맹데프레 같은 변방까지 촘촘히 연결된다.
반면에 인구-되기를 거부하는 ‘인구로부터의 이탈자’도 끊임 없이 출현한다. 인구로 포함되어 얻을 수 있는 보호나 법적 권리보다 강제 노역이나 징발 등 수탈에 의한 피해와 고통이 더 클 때 민중은 인구 장부로부터 도망친다. 제임스 C. 스콧이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이상국 옮김(2015), 삼천리〕에서 보여 주었던 조미아들의 이야기는 인구로 셈해지지 않으려는 민중의 적극적 탈출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그 말 자체가 ‘산사람’을 뜻하는 조미아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산악 지대에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유럽 도처에서도 비옥한 토지를 떠나 농사짓기 어려운 곳, 자원이 없는 곳, 인간이 살기 힘든 곳으로 향하는 도망 행렬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 외부로의 탈주 역시 인구로부터 탈출하는 인민의 행렬이라고 할 수 있다. 산적과 해적은 도망자들의 공동체다.
인구 조사와 인구 대장은 이를 막기 위한 중요한 장치다. 통치자에게 ‘장부’는 자신이 가진 인구와 재산을 한눈에 보이도록 해 주는 ‘가시화’의 수단이다. 가시화는 위치와 숫자를 파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래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회계 담당자는 사람의 숫자는 물론 그들이 바쳐야 할 감자 1알, 계란 1알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던 것이다. ‘어디에 있는가’와 ‘얼마나 있는가’가 장부에 정확하게 기재되어야 한다. 특히 이것은 부자에게 필요한 기술이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 알기 힘들 만큼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겐 재산 관리인이 필요하며 ‘관리자에 대한 관리’도 중요한 경영술이다. 크세노폰의 《경영론》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책은 고대의 한 부유한 귀족 가문의 가장과 소크라테스가 경영술에 대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테네에서 경영술의 귀재로 알려진 이스코마코스는 경영의 기초는 무엇보다 집안에 있는 재물의 위치와 수량,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확하게 세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자기도 모르게 재물이 술술 새어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집안에서 잘 감시하고 관리해야 할 재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물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다. 너무 많이 가진 이들에겐 노예를 관리하는 노예도 필요하고, 이들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집사가 필요하다. 인적 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위치를 위계화하여 상명하달의 복종 체계를 만드는 것이고, 그들이 노예임에도 마치 주인의 분신인 양 주인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주인처럼 생각하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 노예 교육의 목표이듯이, 통치의 관점에서 좋은 교육은 국민을 국가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이고, 노동자를 사장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고대 가정에서 노예와 그들의 생산물을 남김없이 셈하고 관리하는 이 방식은 제국의 신민과 중세 영지의 농노, 근대 국가의 국민과 공장의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그러니까 인구란 단지 숫자가 아니다. ‘인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머릿수가 아니라 그것을 세는 것에 있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인구의 본질은 ‘셈하기’다. 세지 않는다면, 그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있는 사람을 세는 것이 정치적 행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는 자와 세어지는 자 사이에는 분명한 권력관계가 있고, 누가 세느냐, 왜 세느냐, 어떻게 세느냐, 셈의 결과로 무엇을 하느냐 하는 모든 층위마다 정치적 의도와 목표가 개입한다. 호패를 버리고 산으로 가는 동남아시아 산악 지역의 조미아 지대 공동체로부터 주민 등록과 지문 날인을 거부하는 시민운동까지, 그 셈하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저항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적 행위다.
인구와 정치, 인구 만들기와 인구로부터의 탈주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인구 만들기와 탈주하기 사이의 긴장은 지배와 저항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쪽에는 적극적인 ‘인구-만들기’의 지배 권력이 작동하고, 다른 한쪽에는 그만큼 적극적인 ‘인구-되지 않기’의 대항력이 작동한다. 스콧은 이 긴장을 구심력과 원심력의 긴장으로 비유한다. 인민을 세금, 군역, 노동력으로서 할당, 배치, 관리하고자 하는 국가적 통치의 구심력과 그 의무와 복종, 착취와 수탈의 구심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탈주하는 힘으로서의 원심력은 지금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보건 당국이 ‘저출산’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사태 또한 인구로 환원되고 동원되는 것에 대한 명백한 거부의 원심력일 것이다. 그것은 도망갈 수 있는 광대한 변경도 사라지고, 도피할 산도 없어져 공간적 탈주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이 선택한 시간적 탈주의 행렬인지도 모른다. 미래의 채권에 현재를 담보 잡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으로, 인구의 생산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저출산의 기저에도 자본의 착취 재료가 될 것이 뻔한 존재를 재생산하는 기계가 되지 않겠다는 암묵적 거부와 저항이 존재한다.
로마의 노예 경제의 근간이 되었던 귀족들의 대토지, 라티푼디움은 제국의 지배를 상징하는 로마 군대의 ‘위대한 길’에 인접해 있다. 곡물과 노예를 실어 나르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농공동체의 소규모 경작지는 군대의 이동 경로에서 될수록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난다. 군대가 접근하기 힘든 지형이 가난한 민중에겐 더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중파의 근거지도 ‘산’이었고, 아테네의 3정파 중 민중파가 ‘산악파’로 불렸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전사 계급은 평원파, 해상 무역으로 돈을 벌었던 상인들은 항구를 근거지로 하여 ‘해안파’ 라 불렸다. 아테네 민중이 민주정을 수립하고 민회에서 다수 결정제를 채택했을 때, 인구는 정치적 힘으로 전환됐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원과 산지, 해안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구의 다수’였기 때문이다. ‘데모스’의 의미도 여기저기 촌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촌락민에서 귀족 세력과 힘을 겨루는 계급적 정치 세력의 의미로 전환됐다. 직접 민주주의하의 1인 1표제는 인구에서 시민으로의 극적인 전환 장치였다. ‘무리, 떼’로 불리던 다수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각자 시민으로 셈해지고 정치적으로 가시화되었을 때, 지배 기득권층은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이렇게 인구가 시민으로 정치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정치 세력을 인구 집단으로 탈정치화할 수도 있다. 시민도, 민중도, 노동 계급도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인구라는 숫자의 집합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고, 그래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도 정치적 주체들의 세력화를 가로막는 ‘탈정치화’로서의 인구화다. 근대 부르주아는 고대로부터 공화주의나 민주주의를 가져와 왕정과 귀족정을 무너뜨리는 사상적 기반으로 사용하면서도 현실 정치에서 민중이 숫자의 우위를 통해 정치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민주주의의 제도적 변형을 통해 다수의 민중이 소수의 엘리트들로 대의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민중의 참정권은 투표권으로 축소되었고, 대의와 대표를 가질 때만 민중은 온전한 시민권을 행사하고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근대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가 엘리트를 통한 정치적 대표성을 추구했다면, 오늘날 인구론은 대의와 대표의 원리를 해체하여 개인화함으로써 정치적 대표성을 인구 대표성으로 전환한다.
최근 정부 산하 탄소중립위원회에서 구성한 ‘탄소중립시민의회’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친정부·친기업적인 위원회의 대표성과 편향성도 문제지만 ‘공론화 방법을 도입한 여론 조사’를 ‘숙의 민주주의’로 가장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시민의회’ 혹은 ‘시민대표단’이란 이름은 정치적 대표체인 의회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것처럼 혼동하게 만들지만, 실은 여론 조사 기법에 따라 조사 대상으로 추출된 표본 집단에 불과하며, 사회를 지역, 성별, 나이 등 인구 구성에 비례하게 축소하여 재구성한 집합일 뿐이다.
이렇게 인구 대표성으로 정치 대표성을 대체하는 것은 ‘대체’, ‘왜곡’을 넘어 정치 대표성을 해체하고 와해시키는 것이다. 표집된 개인들이 인구 구성을 대표하며 진보 정치,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은 이런 인구 대표성 속에 무차별적으로 용해된다. 그러나 ‘인구’는 매우 객관적인 실체로 여겨지기 때문에, 독재 정권의 ‘체육관 투표’를 반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비판했던 사람들도 시민을 인구로 동원하는 정책 결정 과정을 반민주주의라고 여기지 않으며, 때로는 ‘민주적인 방법’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어디에도 데모스의 크라토스, 즉 민중의 정치 세력화는 없다. 인구로 환원된 민중은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며, 민중도 시민도 국민도 아닌 인구는 어떤 경우에도 민주적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시민을 인구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매우 위험한 반정치적 시도이며, 무력과 공포에 의한 파괴의 양식을 갖지 않고도 민주주의처럼 보이는 극장 정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민주주의를 분쇄하는 신자유주의적 파시즘의 대표적 양상이다.
한편 인구-되기를 거부하는 탈주는 시간적 탈주와 함께 공간적 이동의 양상으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방향이 과거와 달라졌다. 사람들이 중심에서 변방으로가 아니라 변방에서 중심으로 낙오하거나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남구에서 북구로 이동하는 이주 경로는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이촌향도’와 비슷한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거꾸로 작동하고 있다.
마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2007), 돌베개〕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저개발 국가의 대도시 주변으로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한 슬럼은 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적 도시화와는 정반대의 양상이라고 설명한다. 산업 도시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인위적인 도시 유입 정책을 펼쳤던 결과로 나타난 ‘이촌향도’와 달리, 지금은 도시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 농촌, 지역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변방에서조차 밀려나 중심부로 흘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도시 주변의 슬럼은 진입 장벽이 높아진 중심부의 삶으로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 상류층의 삶을 뒤치다꺼리하는 노동을 담당하며 그들의 사치와 낭비의 부산물에 기대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야기한 양극화 속에서, 소수의 특권적 삶과 그 삶을 떠받치는 잉여화된 다수, 도시 젠트리피케이션과 농촌 공동화, 수도권 과밀과 지방 소멸은 동시 진행 중이다. 한쪽에는 감당할수 없을 만큼 돈과 인구가 몰리고, 다른 한쪽은 텅텅 비어 가고 있다. 현재의 인구 절벽론과 지방 소멸론 같은 인구 담론이 만들어 내는 관점은 이런 인구 잉여화와 이동성에 대한 정치 사회적 해석을 가로막고, 유출과 유입, 감소와 증대 간의 숫자로 치환된 양적 문제로 접근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적 인구 통치의 이중성과 최적화의 신화
그런데 그간 인구 문제도 시장주의적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 이동의 자유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은 신자유주의 논리였다.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만 하면 이곳의 부족한 인구가 저곳의 넘치는 인구로 상쇄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늘 ‘이동성’을 찬미했다. 셈하기 위해서는 가시화가 필요 하고, 그래서 과거에는 행정이 인구를 관리하기 쉽도록 정주定住를 중심으로 주민 등록과 인구 정책을 설계했다면, 자본, 자원, 인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이동성이 요구되면서부터는 국가의 인구 정책도 이주를 촉진하는 정책으로 변화했다. 어디에 있든 이동 추적이 가능하도록 관리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것도 한몫했다.
사회를 시장 원리로 재구성하는 수요 공급론과 적정 유지를 목표로 한 덧셈과 뺄셈의 상쇄 논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농업처럼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은 도태시키고, 경쟁력 있는 자동차·반도체 산업을 키우자, 축소된 농업 생산분은 저렴한 외국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여 상쇄하면 된다, 교육도 시장이 더 필요로 하는 인재(인력)를 더 많이 공급해서 노동 시장의 수요-공급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셈법은 인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인구도 부족하면 수입하면 된다는 발상은 부족한 여성과 부족한 일손과 부족한 인력을 수입으로 메우는 인력 수급 정책의 기조를 이뤘다. 정부는 닭값이 오르면 닭을 수입하고 달걀 값이 오르면 달걀을 수입해서 시장 가격을 안정화하듯이 노동 시장의 가격도 똑같은 방식으로 조절했다.
노동 비용이 비싸지면 ‘저가’의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해서 해결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들어온 여성들로 국내의 여성들이 탈출한 지역과 산업과 계급의 빈자리를 채우면 됐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본이 요구한 ‘자유로운 이주 보장’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노동 시장의 공급 사슬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말처럼 이동은 모두에게 자유롭지는 않았다. 인구 이동은 항상 선별적으로 통제됐다. 유럽의 농업 경쟁력을 위해 계절 노동자들은 탄력적으로 상시 유입 가능하도록 규제가 완화됐지만 난민의 이동에는 감시와 봉쇄가 강화됐다.
적정 유지가 사회의 목표가 된다고 해서 그 ‘최적정’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인구’와 ‘너무 적은 인구’는 언제나 동시적으로 생산된다. 너무 많은 것과 너무 적은 것을 가르는 기준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며 차별적인 잣대에 따른다.
우리가 보통 ‘너무 많은 인구’에서 떠올리는 국가와 민족, 인종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출산율은 높지만 유아 사망률도 그만큼 높으며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빨리 죽고, 그래서 가장 기대 수명이 낮은 나라들도 모두 아프리카에 있다. 그런데도 흔히들 그곳엔 먹을 것도 없는데 인구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북구의 잘사는 나라들에선 인구의 과밀도 저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세계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편에 속하지만 그 국민들은 ‘너무 많은 인간’으로 표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꽉 찼다’라는 말은 극우 정치인들이 이민자를 배척할 때만 쓰는 말이다.
부자들에게 ‘너무 많은 아이’란 없다. 너무 많이 낳는 것은 키울 능력도 안 되는 이들에게만 문제가 될 뿐이다. 너무 적게 낳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유한 기업가는 이미 많은 아이들(국민들,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므로. 프롤레타리아란 말은 돈도 능력도 없고, 국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자식을 낳는 것밖에는 다른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그것도 안 하는 이들은 쓸모없는 인간 중에서도 쓸모없는 자들로 취급되는 것이다.
결국 불필요한 인간은 ‘너무 많고’, 필요한 인간은 ‘너무 적다’. 이 사이에 적정을 유지하는 것이 오늘날 국가와 자본이 공유하는 인적 자원론과 인간 개발론의 관점이다. 그러나 잉여화되는 99%와 특권화되는 1% 사이에 ‘최적’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99%가 박탈당한 것으로부터 1%가 취득한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적 인구, 정상 인구는 최적화된 정상 사회라는 목표를 전제로 하지만 과연 어느 정도 인구가 최적인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구수는 어느 정도이고, 그 구성 비율은 어느 정도가 가장 적당한가? 인구의 적정 기준을 설정하고 전체 사회를 그에 맞춰 정책을 통해 조절한다는 것 자체가 전체주의적이며 폭력적인 발상이다.
슈미트부터 아렌트와 아감벤까지 20세기 서구 정치철학에는 이 적정을 추구하는 사회 조절론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를 정치적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들의 뭉쳐진 덩어리, 인간들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거부다. 이런 관점은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치공동체와 사익을 추구하는 이익공동체 간의 차이를 없애고 집합의 집합으로 더 큰 집합이 되고, 사회의 사회를 통해 더 큰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이합집산적 사회확장론에 반대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에는 이 ‘전체 사회로서의 전체 국가’라는 이념이 있다. 정치가 소멸된 시장-사회, 기업-국가야말로 전체 국가의 대표적 모델이다.
일정 비율의 잉여 인구는 국가의 전체주의적 관리에서는 유용하며, 쓸모없는 인구도 자본에겐 쓸모가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입장에서, 실업자 같은 경쟁 탈락자들은 거대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하여 노동 계급 내부의 경쟁을 심화시키고, 이를 통해 자본이 아니라 서로를 적대하도록 분열시켜 통치할 수 있으며, ‘아직’ 일자리를 잃지 않은 노동자들도 미래의 해고와 실업에 대한 공포로 인해 투쟁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협상력과 단결력을 약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무가치화와 잉여화는 의도된 전략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실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선에서 최적의 실업 인구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완전 고용은 시민적 삶을 위한 정치적 요구지만 최소 고용은 기업의 이익을 위한 사적인 요구다. 공적 요구와 사적 요구 사이의 차이를 양적으로 전환하면 ‘이해관계 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숫자의 협치는 권력관계를 이해관계로, 공공선에 대한 합의를 공공재의 분배와 할당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이다.
알랭 쉬피오가 《숫자에 의한 협치》〔박제성 옮김(2019), 한울 아카데미〕에서 매우 잘 보여 준 것처럼, 실업률을 얼마로 유지하고, 사망률을 얼마로 유지하고, 성장률을 얼마로 목표로 하는 것과 같은 숫자에 대한 합의에는 공모된 착오와 착시 및 은폐가 항시 개입한다.
숫자에 대한 합의와 비율의 속임수는 수없이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교육부가 대학에 전임 교수 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며 전체 교원 중 전임 교수 비율을 평가 지표에 넣겠다고 했을 때, 대학들은 교수 숫자를 늘리는 대신 비전임 교원인 강사를 잘라서 비율을 높였다. 숫자를 맞추는 건 계산의 기교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탄소 중립 개념에서도, 배출량을 늘려도 흡수량으로 상쇄하면 탄소 중립, 넷제로Net-zero는 달성된다. 기업들은 탄소 경제를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 전환이 아니라 기술적·산술적 방법을 개발하는 데 매진한다.
지표와 척도는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제시되기도 한다. 일본의 지방 소멸 예상 지역을 분류했던 마스다 보고서에서 소멸의 기준이 된 지표는 ‘가임 여성 대 노령 인구 비율’이었다. 이 비율이 0.5 이하가 되면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런 척도가 국가 정책 개발에서 객관적 지표처럼 사용되고, 중요한 기준이 된다. 출생자와 사망자가 1:1이면 사회가 안정화될 것처럼.
교육은 인구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교육은 인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만성화된 청년 실업에 대응하여 취업·진로교육을 도입하고 산업 전환에 대응하여 좌초 산업 직군의 재교육을 강조하는 것처럼, 현상을 결과론적으로 수용하면서 개별화된 개인주의적 대안에서 해결책을 찾는 접근 방식은 ‘인구교육’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나타난다.
지금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인구교육 사이트나 교재를 들여다보면, 개인이 어떤 가족을 만들고, 어떤 노후를 준비하며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응할 것인가 하는 ‘각자도생의 생애 주기 계획’을 수립하고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인구 관점은 인구 문제, 저출산 문제를 다루는 학교교육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같은 표어 만들기나 포스터 대회를 열던 시절부터 학교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구교육의 장이었지만, 지금 인구교육은 1970년대식 국가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장이 요구하는 각자도생의 세계관을 주입한다.
진로교육과 취업교육의 실제 효과가 학생들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취업을 목표로 촘촘하게 진로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성공이든 실패든 그 모든 책임을 자기의 계획과 준비 탓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듯, 인구교육도 마찬가지다. 인구교육은 개인들에게 생애 주기별로 필요한 학업 계획, 진로 계획, 건강, 부동산 계획, 자녀 교육, 노후 자금 등 투자와 자산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세대별 학습 동영상은 중상층 부르주아의 생애 주기별 관심사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며 특정 계급의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다양한 가족 형태를 제시하고 개인들의 선택권과 정체성을 옹호하며 대안 가족을 인정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근대적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다양성이 종국에는 각자의 선택, 각자의 책임, 각자의 인생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생애 주기별 과제를 제대로 완수하는 것이 인구화된 개인의 사회적 의무이자 새로운 정상성의 기준이 된다.
인구는 거의 모든 정책에서 중요한 객관적 기준으로 등장하여 학령 인구 감소는 초·중등교육과정에선 교사 감원의 근거가 되고 고등교육에서는 대학 퇴출의 근거로 설명되고 있다. 진로교육이 실업률 증가의 원인을 묻지 않고 기술 발달의 결과라는 식으로 사회 변화를 마치 자연적 변화처럼 설명하듯이, 인구교육 역시 ‘저출산 고령화’의 원인에 대해 묻지 않고 수용과 적응을 요구한다.
지방 대학의 위기를 학령 인구 감소 탓으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망한다’며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지만 IMF 경제 위기 이후 출생율이 급속히 떨어지며 20년 후 학령 인구 감소가 예상되던 시점에 대학들이 급속히 늘어난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대학 자유화는 당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구조 조정 기간 동안 예비 실업자들의 사회 진출을 일정 기간 대학 안으로 유보시켰다. 가난한 사람들도 불안한 미래를 위해 자기 개발에 투자하고 더 높은 학력·학벌 자본을 취득하도록 부추겼으며, 저소득층의 고등교육 접근을 막았던 비용의 장벽을 학자금 대출과 카드 대출로 낮춰 주었다는 사회적 원인에 대한 분석은 ‘학령 인구수 대비 대학 수’의 계산에 가려진다. 소위 학령 인구에 맞는 적정한 숫자로 대학이 추려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교육 당국은 경쟁력 없는 대학을 퇴출시킨다. 마치 기업 시장에서 투자사들이 신용 평가를 통해 기업을 퇴출시키는 것처럼.
경제 위기의 진실을 은폐하며 인구 위기론이 재난 담론과 위기 서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2000년대 들어 인구론은 ‘소멸’이라는 파국론 서사와 본격적으로 결합했다. 2014년 일본 창성회의에서 나온 ‘마스다 보고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마스다 히로야는 이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인구 감소 추세대로라면 2040년까지 일본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절반이 사라진다는 말은 지방자치단체 절반이 존립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인구 감소는 세수 감소로 이어지고, 세수 감소는 재정의 위기로 이어지며 이는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연결돼 인구 유출이 심화되는 악순환을 낳게 되어 결국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지방 소멸론’은 한국에 서도 마강래의 《지방도시 살생부》(2017, 개마고원) 같은 책을 통해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멸’이라는 상징이 가져온 충격은 컸다. ‘소멸 예정지’의 사람들에게 그 예측은 공포와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소멸 예정지는 인구는 줄고 있는데 세금은 계속 투입되어 혈세를 낭비하는 곳이 되었고, 주민들은 세금에 기생하는 잉여 인구가 되었으며, 다른 곳의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되었다. 에너지 전환에 따른 좌초 산업 분야의 노동자들처럼, 소멸 예정 지역의 주민들도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구제 대상으로 전락했다.
전문가들은 경제 위기를 기후 위기나 인구 문제로 치환하면서, 국가를 기업처럼 운영하라는 신자유주의적 요구 속에서 채택된 긴축 재정과 민영화, 공공 부문 축소가 지역을 퇴락하게 만든 과정에 대해선 묻지 않고, ‘소멸’이란 용어를 통해 인구가 사라지는 것이 마치 바위가 시간 속에 풍화하는 것 같은 자연 현상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기후 위기’가 자연 현상을 통해 표현되지만 실은 정치적 결과이듯이, 인구 문제도 그렇다.
이런 서사의 구조는 기후 위기 담론에서 나타나는 파국론과 지구 소멸론에서도 공히 나타난다. 파국론은 위기의 엄중함을 지적하는 데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무력감과 냉소주의를 퍼뜨린다. 물론 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심각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경고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 극복 대안이 사회가 개인들에게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교육’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장주의적이고 기술주의적 수급론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경로를 찾을 때만 개인적 실천도 연대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파국론적 경고와 두려움은 우리의 실천 의지를 자기만족과 허무의 양극을 오가는 무한 진동 속에 가둘 뿐이다. 그런 점에서 강의실에서 수행하는 기후교육이 아니라 거리의 기후 행동이, 인구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 주는 인구교육이 아니라 인구에서 시민으로 정치화하는 길을 만드는 사회운동이, 지금 가장 필요한 시민교육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민교육은 국민교육에 대한 대항 관계를 통해, 민중교육은 시민교육에 대한 비판적 긴장 관계를 통해 대안적 교육 이념을 형성해 왔다면, 인구교육은 어떤 교육 이념을 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시민교육이 국민을 찍어 내는 국민 조형 과정으로서의 ‘국민 교육’에 반대하며 ‘시민-되기’를 목표로 삼고, 민중교육이 부르주아적 시민 교양에 맞서 ‘민중-되기’의 교육을 모색하며, 대안교육은 제도교육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다른 교육의 길을 모색해 왔던 것과 달리, 인구교육에서는 ‘저출산 고령화’가 일종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지고 교육 정책에서도 기본값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진보든 보수든, 인구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시민교육, 민중교육, 민주교육, 평등교육이 진보 교육의 철학이라면, 기본적으로 시민을 인구로 해체하고 노동자 민중을 탈계급화하여 인구로 동원하는 이 ‘인구의 관점’과 싸워야 하지 않을까? 국민도, 시민도, 인민도 아닌 이 이상한 ‘인구-되기’의 인구화 정치와 교육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특집 / 정말로 인구가 문제인가
인구, 정치, 교육
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서울·수도권 외 지역, 특히 촌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몇 해 전부터 매우 위협적으로 들리는 말이 있다. ‘지방 소멸론’이다. 군 단위 지역과 지방 소도시부터 인구 감소로 인해 사라질 것이란 가설이다.
내가 사는 강원도 인제도 그런 소멸 예정지에 포함된다. 군 소식지 상단 잘보이는 곳에는 매달 인구 변동 상황이 전월 기준 플러스, 마이너스로 표시되어 기재된다. 새로 전입하는 세대에겐 쌀, 쓰레기봉투, 지역 상품권 등을 선물로 준다.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는 속초에 있었는데 그마저 사라져 이제 인제에 살면서 아이를 낳으려면 강릉까지 가야 한다. 강릉까지 가는 버스 노선은 없다. 도청 소재지인 춘천으로 가는 버스 노선도 지난해 없어졌다. 군에서는 퇴직한 산부인과 의사를 특별 영입해 읍내 병원에 진료실을 만들었다. 폐교와 폐원, 버스 노선 축소 같은 공공 서비스 감축에 맞서 우리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중이다.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 필수적인 공공 인프라가 토대부터 와해되고 있는데, 전입 지원금이나 농민 기본 소득이 과연 사람들을 농촌에 살게 할 수 있을까? 출산 장려금을 주면 여성들이 아이를 낳을 거라 생각하는 저출산 대응 정책과 무엇이 다른가 싶기도 하다.
기업화한 대농과 영세 자영 소농을 농민이란 하나의 범주로 묶기는 힘든 일이고, 농민도, 농촌도, 지방도, 간단히 단일화할 수는 없는 정치적 구성체인데, 개인별 지원책은 지역의 내부 정치를 너무 쉽게 간과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를 야기한 원인부터 찾아야 하는데, 지금 인구 정책은 ‘저출산 고령화’로 요약되는 인구 위기를 지역, 계급, 젠더 간의 불평등 관계를 바꾸는 구조적 해결책이 아닌 개별화된 지원책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고령 인구를 인위적으로 줄일수는 없으니 늘 초점은 출산에 맞춰지고, 책임은 언제나 ‘더 약자’에게 지워지며, 조절 대상도 늘 ‘더 약자’를 향한다.
인구 위기는 기후 위기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인구 위기도 사회 전체의 공통 위기지만 지역, 계급, 젠더, 세대 간의 불평등에 따라 불평등하게 체험될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와 산업 전환의 충격을 제일 먼저 맞는 노동자, 농민, 소수자, 빈곤 지역 등 ‘최전선공동체’가 인구 위기의 최전선과 겹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인구란 무엇인가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영지명세장》〔이르미노 엮음, 이기영 옮김(2014), 한국문화사〕은 아주 두꺼운 채권 장부 책이다. 수도원의 관할 영지에 속한 장원들에서 거둬들여야 할 세금, 노역, 공물을 가구별로 세세하게 정리해 놓은 이 장부는 당시 영주가 속민colonus에 대해 가진 권리들의 목록을 보여 준다. 중세의 토지 대장이자 인구 대장이며, 예속민들에게 대한 영주의 권리 명세서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이장부는 문서 보관소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후대에 발견되었다. 영지명세장은 당시의 통치가 얼마나 치밀한 인구 관리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영주는 자기의 농사나 집안 살림 등 사적 경제를 위해 일상적으로 영지 내 속민들의 노동을 동원하고 생산물을 징발하였는데, 속민들에게 할당된 부역 일수와 징발 물품은 감자 1알, 계란 1알까지 세세하게 지정되어 있다.
이런 인구 관리 통치는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고 있으며, 고대 로마 황제가 제국의 영토 전역에서 실시한 ‘켄수스census’라고 불리는 정기적 인구 조사를 비롯해서, 고대 그리스의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영론에서 로마의 카토와 바로의 농업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정 경영론이 국가 경영론의 원형이다. 켄수스에서 유래된 ‘센서스’라는 말이 그대로 ‘인구 조사’라는 현대어 고유 명사로 쓰일 정도로, 인구 조사는 고대부터 근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국가 경영의 핵심 통치 기술에 속한다. 한마디로, ‘인구’가 없이는 국민도 없고, 국가도 없고, 통치도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인구는 가장 중요한 통치의 기초다. 통치자는 무엇보다 인구를 만들고 유지해야 한다. 로마의 황제는 인구가 감소한 지방 수령에 대해서는 벌을 내리고, 인구 유출이 심할 경우에는 관직을 박탈했으며 반대로 인구 유입이 많은 지방의 영주에겐 상을 하사했다. 인구가 곧 황제의 노동력이며 재산이자 군대였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인구 관리는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서부터 갈리아 지방의 생제르맹데프레 같은 변방까지 촘촘히 연결된다.
반면에 인구-되기를 거부하는 ‘인구로부터의 이탈자’도 끊임 없이 출현한다. 인구로 포함되어 얻을 수 있는 보호나 법적 권리보다 강제 노역이나 징발 등 수탈에 의한 피해와 고통이 더 클 때 민중은 인구 장부로부터 도망친다. 제임스 C. 스콧이 《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이상국 옮김(2015), 삼천리〕에서 보여 주었던 조미아들의 이야기는 인구로 셈해지지 않으려는 민중의 적극적 탈출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그 말 자체가 ‘산사람’을 뜻하는 조미아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산악 지대에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유럽 도처에서도 비옥한 토지를 떠나 농사짓기 어려운 곳, 자원이 없는 곳, 인간이 살기 힘든 곳으로 향하는 도망 행렬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 외부로의 탈주 역시 인구로부터 탈출하는 인민의 행렬이라고 할 수 있다. 산적과 해적은 도망자들의 공동체다.
인구 조사와 인구 대장은 이를 막기 위한 중요한 장치다. 통치자에게 ‘장부’는 자신이 가진 인구와 재산을 한눈에 보이도록 해 주는 ‘가시화’의 수단이다. 가시화는 위치와 숫자를 파악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래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회계 담당자는 사람의 숫자는 물론 그들이 바쳐야 할 감자 1알, 계란 1알까지 빠짐없이 기록했던 것이다. ‘어디에 있는가’와 ‘얼마나 있는가’가 장부에 정확하게 기재되어야 한다. 특히 이것은 부자에게 필요한 기술이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 알기 힘들 만큼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겐 재산 관리인이 필요하며 ‘관리자에 대한 관리’도 중요한 경영술이다. 크세노폰의 《경영론》은 그것을 잘 보여 준다. 책은 고대의 한 부유한 귀족 가문의 가장과 소크라테스가 경영술에 대해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테네에서 경영술의 귀재로 알려진 이스코마코스는 경영의 기초는 무엇보다 집안에 있는 재물의 위치와 수량,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확하게 세고 있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자기도 모르게 재물이 술술 새어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집안에서 잘 감시하고 관리해야 할 재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물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다. 너무 많이 가진 이들에겐 노예를 관리하는 노예도 필요하고, 이들을 총괄하여 관리하는 집사가 필요하다. 인적 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위치를 위계화하여 상명하달의 복종 체계를 만드는 것이고, 그들이 노예임에도 마치 주인의 분신인 양 주인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주인처럼 생각하는 노예를 만드는 것이 노예 교육의 목표이듯이, 통치의 관점에서 좋은 교육은 국민을 국가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이고, 노동자를 사장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이다. 고대 가정에서 노예와 그들의 생산물을 남김없이 셈하고 관리하는 이 방식은 제국의 신민과 중세 영지의 농노, 근대 국가의 국민과 공장의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적용되었다.
그러니까 인구란 단지 숫자가 아니다. ‘인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머릿수가 아니라 그것을 세는 것에 있다고 답해야 할 것이다. 인구의 본질은 ‘셈하기’다. 세지 않는다면, 그것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있는 사람을 세는 것이 정치적 행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는 자와 세어지는 자 사이에는 분명한 권력관계가 있고, 누가 세느냐, 왜 세느냐, 어떻게 세느냐, 셈의 결과로 무엇을 하느냐 하는 모든 층위마다 정치적 의도와 목표가 개입한다. 호패를 버리고 산으로 가는 동남아시아 산악 지역의 조미아 지대 공동체로부터 주민 등록과 지문 날인을 거부하는 시민운동까지, 그 셈하기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저항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적 행위다.
인구와 정치, 인구 만들기와 인구로부터의 탈주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인구 만들기와 탈주하기 사이의 긴장은 지배와 저항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한쪽에는 적극적인 ‘인구-만들기’의 지배 권력이 작동하고, 다른 한쪽에는 그만큼 적극적인 ‘인구-되지 않기’의 대항력이 작동한다. 스콧은 이 긴장을 구심력과 원심력의 긴장으로 비유한다. 인민을 세금, 군역, 노동력으로서 할당, 배치, 관리하고자 하는 국가적 통치의 구심력과 그 의무와 복종, 착취와 수탈의 구심력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탈주하는 힘으로서의 원심력은 지금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보건 당국이 ‘저출산’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사태 또한 인구로 환원되고 동원되는 것에 대한 명백한 거부의 원심력일 것이다. 그것은 도망갈 수 있는 광대한 변경도 사라지고, 도피할 산도 없어져 공간적 탈주가 불가능해진 사람들이 선택한 시간적 탈주의 행렬인지도 모른다. 미래의 채권에 현재를 담보 잡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으로, 인구의 생산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저출산의 기저에도 자본의 착취 재료가 될 것이 뻔한 존재를 재생산하는 기계가 되지 않겠다는 암묵적 거부와 저항이 존재한다.
로마의 노예 경제의 근간이 되었던 귀족들의 대토지, 라티푼디움은 제국의 지배를 상징하는 로마 군대의 ‘위대한 길’에 인접해 있다. 곡물과 노예를 실어 나르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농공동체의 소규모 경작지는 군대의 이동 경로에서 될수록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난다. 군대가 접근하기 힘든 지형이 가난한 민중에겐 더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민중파의 근거지도 ‘산’이었고, 아테네의 3정파 중 민중파가 ‘산악파’로 불렸던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전사 계급은 평원파, 해상 무역으로 돈을 벌었던 상인들은 항구를 근거지로 하여 ‘해안파’ 라 불렸다. 아테네 민중이 민주정을 수립하고 민회에서 다수 결정제를 채택했을 때, 인구는 정치적 힘으로 전환됐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원과 산지, 해안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구의 다수’였기 때문이다. ‘데모스’의 의미도 여기저기 촌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촌락민에서 귀족 세력과 힘을 겨루는 계급적 정치 세력의 의미로 전환됐다. 직접 민주주의하의 1인 1표제는 인구에서 시민으로의 극적인 전환 장치였다. ‘무리, 떼’로 불리던 다수가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각자 시민으로 셈해지고 정치적으로 가시화되었을 때, 지배 기득권층은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이렇게 인구가 시민으로 정치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정치 세력을 인구 집단으로 탈정치화할 수도 있다. 시민도, 민중도, 노동 계급도 개인으로 파편화되어 인구라는 숫자의 집합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고, 그래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지점도 정치적 주체들의 세력화를 가로막는 ‘탈정치화’로서의 인구화다. 근대 부르주아는 고대로부터 공화주의나 민주주의를 가져와 왕정과 귀족정을 무너뜨리는 사상적 기반으로 사용하면서도 현실 정치에서 민중이 숫자의 우위를 통해 정치적 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민주주의의 제도적 변형을 통해 다수의 민중이 소수의 엘리트들로 대의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민중의 참정권은 투표권으로 축소되었고, 대의와 대표를 가질 때만 민중은 온전한 시민권을 행사하고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근대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가 엘리트를 통한 정치적 대표성을 추구했다면, 오늘날 인구론은 대의와 대표의 원리를 해체하여 개인화함으로써 정치적 대표성을 인구 대표성으로 전환한다.
최근 정부 산하 탄소중립위원회에서 구성한 ‘탄소중립시민의회’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친정부·친기업적인 위원회의 대표성과 편향성도 문제지만 ‘공론화 방법을 도입한 여론 조사’를 ‘숙의 민주주의’로 가장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시민의회’ 혹은 ‘시민대표단’이란 이름은 정치적 대표체인 의회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것처럼 혼동하게 만들지만, 실은 여론 조사 기법에 따라 조사 대상으로 추출된 표본 집단에 불과하며, 사회를 지역, 성별, 나이 등 인구 구성에 비례하게 축소하여 재구성한 집합일 뿐이다.
이렇게 인구 대표성으로 정치 대표성을 대체하는 것은 ‘대체’, ‘왜곡’을 넘어 정치 대표성을 해체하고 와해시키는 것이다. 표집된 개인들이 인구 구성을 대표하며 진보 정치,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은 이런 인구 대표성 속에 무차별적으로 용해된다. 그러나 ‘인구’는 매우 객관적인 실체로 여겨지기 때문에, 독재 정권의 ‘체육관 투표’를 반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비판했던 사람들도 시민을 인구로 동원하는 정책 결정 과정을 반민주주의라고 여기지 않으며, 때로는 ‘민주적인 방법’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어디에도 데모스의 크라토스, 즉 민중의 정치 세력화는 없다. 인구로 환원된 민중은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며, 민중도 시민도 국민도 아닌 인구는 어떤 경우에도 민주적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시민을 인구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매우 위험한 반정치적 시도이며, 무력과 공포에 의한 파괴의 양식을 갖지 않고도 민주주의처럼 보이는 극장 정치를 통해 효과적으로 민주주의를 분쇄하는 신자유주의적 파시즘의 대표적 양상이다.
한편 인구-되기를 거부하는 탈주는 시간적 탈주와 함께 공간적 이동의 양상으로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방향이 과거와 달라졌다. 사람들이 중심에서 변방으로가 아니라 변방에서 중심으로 낙오하거나 이탈하고 있는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남구에서 북구로 이동하는 이주 경로는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이촌향도’와 비슷한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거꾸로 작동하고 있다.
마크 데이비스는 《슬럼, 지구를 뒤덮다》〔김정아 옮김 (2007), 돌베개〕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저개발 국가의 대도시 주변으로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한 슬럼은 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서구적 도시화와는 정반대의 양상이라고 설명한다. 산업 도시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인위적인 도시 유입 정책을 펼쳤던 결과로 나타난 ‘이촌향도’와 달리, 지금은 도시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밀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 농촌, 지역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변방에서조차 밀려나 중심부로 흘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도시 주변의 슬럼은 진입 장벽이 높아진 중심부의 삶으로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도시 상류층의 삶을 뒤치다꺼리하는 노동을 담당하며 그들의 사치와 낭비의 부산물에 기대 살아가는 곳이 되었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야기한 양극화 속에서, 소수의 특권적 삶과 그 삶을 떠받치는 잉여화된 다수, 도시 젠트리피케이션과 농촌 공동화, 수도권 과밀과 지방 소멸은 동시 진행 중이다. 한쪽에는 감당할수 없을 만큼 돈과 인구가 몰리고, 다른 한쪽은 텅텅 비어 가고 있다. 현재의 인구 절벽론과 지방 소멸론 같은 인구 담론이 만들어 내는 관점은 이런 인구 잉여화와 이동성에 대한 정치 사회적 해석을 가로막고, 유출과 유입, 감소와 증대 간의 숫자로 치환된 양적 문제로 접근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적 인구 통치의 이중성과 최적화의 신화
그런데 그간 인구 문제도 시장주의적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 이동의 자유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은 신자유주의 논리였다.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기만 하면 이곳의 부족한 인구가 저곳의 넘치는 인구로 상쇄될 수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래서 신자유주의는 늘 ‘이동성’을 찬미했다. 셈하기 위해서는 가시화가 필요 하고, 그래서 과거에는 행정이 인구를 관리하기 쉽도록 정주定住를 중심으로 주민 등록과 인구 정책을 설계했다면, 자본, 자원, 인간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이동성이 요구되면서부터는 국가의 인구 정책도 이주를 촉진하는 정책으로 변화했다. 어디에 있든 이동 추적이 가능하도록 관리 테크놀로지가 발달한 것도 한몫했다.
사회를 시장 원리로 재구성하는 수요 공급론과 적정 유지를 목표로 한 덧셈과 뺄셈의 상쇄 논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농업처럼 경쟁력이 떨어지는 산업은 도태시키고, 경쟁력 있는 자동차·반도체 산업을 키우자, 축소된 농업 생산분은 저렴한 외국 농산물 수입을 확대하여 상쇄하면 된다, 교육도 시장이 더 필요로 하는 인재(인력)를 더 많이 공급해서 노동 시장의 수요-공급을 맞추도록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셈법은 인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인구도 부족하면 수입하면 된다는 발상은 부족한 여성과 부족한 일손과 부족한 인력을 수입으로 메우는 인력 수급 정책의 기조를 이뤘다. 정부는 닭값이 오르면 닭을 수입하고 달걀 값이 오르면 달걀을 수입해서 시장 가격을 안정화하듯이 노동 시장의 가격도 똑같은 방식으로 조절했다.
노동 비용이 비싸지면 ‘저가’의 외국인 노동자를 수입해서 해결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들어온 여성들로 국내의 여성들이 탈출한 지역과 산업과 계급의 빈자리를 채우면 됐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본이 요구한 ‘자유로운 이주 보장’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노동 시장의 공급 사슬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말처럼 이동은 모두에게 자유롭지는 않았다. 인구 이동은 항상 선별적으로 통제됐다. 유럽의 농업 경쟁력을 위해 계절 노동자들은 탄력적으로 상시 유입 가능하도록 규제가 완화됐지만 난민의 이동에는 감시와 봉쇄가 강화됐다.
적정 유지가 사회의 목표가 된다고 해서 그 ‘최적정’에 어떤 객관적이고 절대적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인구’와 ‘너무 적은 인구’는 언제나 동시적으로 생산된다. 너무 많은 것과 너무 적은 것을 가르는 기준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며 차별적인 잣대에 따른다.
우리가 보통 ‘너무 많은 인구’에서 떠올리는 국가와 민족, 인종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출산율은 높지만 유아 사망률도 그만큼 높으며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빨리 죽고, 그래서 가장 기대 수명이 낮은 나라들도 모두 아프리카에 있다. 그런데도 흔히들 그곳엔 먹을 것도 없는데 인구는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북구의 잘사는 나라들에선 인구의 과밀도 저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세계적으로 인구 밀도가 높은 편에 속하지만 그 국민들은 ‘너무 많은 인간’으로 표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꽉 찼다’라는 말은 극우 정치인들이 이민자를 배척할 때만 쓰는 말이다.
부자들에게 ‘너무 많은 아이’란 없다. 너무 많이 낳는 것은 키울 능력도 안 되는 이들에게만 문제가 될 뿐이다. 너무 적게 낳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유한 기업가는 이미 많은 아이들(국민들,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있으므로. 프롤레타리아란 말은 돈도 능력도 없고, 국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자식을 낳는 것밖에는 다른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그것도 안 하는 이들은 쓸모없는 인간 중에서도 쓸모없는 자들로 취급되는 것이다.
결국 불필요한 인간은 ‘너무 많고’, 필요한 인간은 ‘너무 적다’. 이 사이에 적정을 유지하는 것이 오늘날 국가와 자본이 공유하는 인적 자원론과 인간 개발론의 관점이다. 그러나 잉여화되는 99%와 특권화되는 1% 사이에 ‘최적’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99%가 박탈당한 것으로부터 1%가 취득한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적 인구, 정상 인구는 최적화된 정상 사회라는 목표를 전제로 하지만 과연 어느 정도 인구가 최적인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인구수는 어느 정도이고, 그 구성 비율은 어느 정도가 가장 적당한가? 인구의 적정 기준을 설정하고 전체 사회를 그에 맞춰 정책을 통해 조절한다는 것 자체가 전체주의적이며 폭력적인 발상이다.
슈미트부터 아렌트와 아감벤까지 20세기 서구 정치철학에는 이 적정을 추구하는 사회 조절론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회를 정치적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들의 뭉쳐진 덩어리, 인간들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거부다. 이런 관점은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치공동체와 사익을 추구하는 이익공동체 간의 차이를 없애고 집합의 집합으로 더 큰 집합이 되고, 사회의 사회를 통해 더 큰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이합집산적 사회확장론에 반대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에는 이 ‘전체 사회로서의 전체 국가’라는 이념이 있다. 정치가 소멸된 시장-사회, 기업-국가야말로 전체 국가의 대표적 모델이다.
일정 비율의 잉여 인구는 국가의 전체주의적 관리에서는 유용하며, 쓸모없는 인구도 자본에겐 쓸모가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입장에서, 실업자 같은 경쟁 탈락자들은 거대한 산업예비군을 형성하여 노동 계급 내부의 경쟁을 심화시키고, 이를 통해 자본이 아니라 서로를 적대하도록 분열시켜 통치할 수 있으며, ‘아직’ 일자리를 잃지 않은 노동자들도 미래의 해고와 실업에 대한 공포로 인해 투쟁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에 대한 노동의 협상력과 단결력을 약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무가치화와 잉여화는 의도된 전략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업은 실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제 가능한 선에서 최적의 실업 인구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완전 고용은 시민적 삶을 위한 정치적 요구지만 최소 고용은 기업의 이익을 위한 사적인 요구다. 공적 요구와 사적 요구 사이의 차이를 양적으로 전환하면 ‘이해관계 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숫자의 협치는 권력관계를 이해관계로, 공공선에 대한 합의를 공공재의 분배와 할당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이다.
알랭 쉬피오가 《숫자에 의한 협치》〔박제성 옮김(2019), 한울 아카데미〕에서 매우 잘 보여 준 것처럼, 실업률을 얼마로 유지하고, 사망률을 얼마로 유지하고, 성장률을 얼마로 목표로 하는 것과 같은 숫자에 대한 합의에는 공모된 착오와 착시 및 은폐가 항시 개입한다.
숫자에 대한 합의와 비율의 속임수는 수없이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교육부가 대학에 전임 교수 비율을 높이라고 요구하며 전체 교원 중 전임 교수 비율을 평가 지표에 넣겠다고 했을 때, 대학들은 교수 숫자를 늘리는 대신 비전임 교원인 강사를 잘라서 비율을 높였다. 숫자를 맞추는 건 계산의 기교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탄소 중립 개념에서도, 배출량을 늘려도 흡수량으로 상쇄하면 탄소 중립, 넷제로Net-zero는 달성된다. 기업들은 탄소 경제를 벗어나기 위한 근본적 전환이 아니라 기술적·산술적 방법을 개발하는 데 매진한다.
지표와 척도는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제시되기도 한다. 일본의 지방 소멸 예상 지역을 분류했던 마스다 보고서에서 소멸의 기준이 된 지표는 ‘가임 여성 대 노령 인구 비율’이었다. 이 비율이 0.5 이하가 되면 위험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런 척도가 국가 정책 개발에서 객관적 지표처럼 사용되고, 중요한 기준이 된다. 출생자와 사망자가 1:1이면 사회가 안정화될 것처럼.
교육은 인구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교육은 인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만성화된 청년 실업에 대응하여 취업·진로교육을 도입하고 산업 전환에 대응하여 좌초 산업 직군의 재교육을 강조하는 것처럼, 현상을 결과론적으로 수용하면서 개별화된 개인주의적 대안에서 해결책을 찾는 접근 방식은 ‘인구교육’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나타난다.
지금 정부에서 운영하고 있는 인구교육 사이트나 교재를 들여다보면, 개인이 어떤 가족을 만들고, 어떤 노후를 준비하며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응할 것인가 하는 ‘각자도생의 생애 주기 계획’을 수립하고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인구 관점은 인구 문제, 저출산 문제를 다루는 학교교육 과정 전반에 녹아 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같은 표어 만들기나 포스터 대회를 열던 시절부터 학교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구교육의 장이었지만, 지금 인구교육은 1970년대식 국가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장이 요구하는 각자도생의 세계관을 주입한다.
진로교육과 취업교육의 실제 효과가 학생들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취업을 목표로 촘촘하게 진로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성공이든 실패든 그 모든 책임을 자기의 계획과 준비 탓으로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듯, 인구교육도 마찬가지다. 인구교육은 개인들에게 생애 주기별로 필요한 학업 계획, 진로 계획, 건강, 부동산 계획, 자녀 교육, 노후 자금 등 투자와 자산에 관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세대별 학습 동영상은 중상층 부르주아의 생애 주기별 관심사를 중심으로 서사를 구성하며 특정 계급의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다양한 가족 형태를 제시하고 개인들의 선택권과 정체성을 옹호하며 대안 가족을 인정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근대적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이 다양성이 종국에는 각자의 선택, 각자의 책임, 각자의 인생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생애 주기별 과제를 제대로 완수하는 것이 인구화된 개인의 사회적 의무이자 새로운 정상성의 기준이 된다.
인구는 거의 모든 정책에서 중요한 객관적 기준으로 등장하여 학령 인구 감소는 초·중등교육과정에선 교사 감원의 근거가 되고 고등교육에서는 대학 퇴출의 근거로 설명되고 있다. 진로교육이 실업률 증가의 원인을 묻지 않고 기술 발달의 결과라는 식으로 사회 변화를 마치 자연적 변화처럼 설명하듯이, 인구교육 역시 ‘저출산 고령화’의 원인에 대해 묻지 않고 수용과 적응을 요구한다.
지방 대학의 위기를 학령 인구 감소 탓으로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 망한다’며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지만 IMF 경제 위기 이후 출생율이 급속히 떨어지며 20년 후 학령 인구 감소가 예상되던 시점에 대학들이 급속히 늘어난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대학 자유화는 당시 광범위하게 진행된 구조 조정 기간 동안 예비 실업자들의 사회 진출을 일정 기간 대학 안으로 유보시켰다. 가난한 사람들도 불안한 미래를 위해 자기 개발에 투자하고 더 높은 학력·학벌 자본을 취득하도록 부추겼으며, 저소득층의 고등교육 접근을 막았던 비용의 장벽을 학자금 대출과 카드 대출로 낮춰 주었다는 사회적 원인에 대한 분석은 ‘학령 인구수 대비 대학 수’의 계산에 가려진다. 소위 학령 인구에 맞는 적정한 숫자로 대학이 추려지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교육 당국은 경쟁력 없는 대학을 퇴출시킨다. 마치 기업 시장에서 투자사들이 신용 평가를 통해 기업을 퇴출시키는 것처럼.
경제 위기의 진실을 은폐하며 인구 위기론이 재난 담론과 위기 서사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2000년대 들어 인구론은 ‘소멸’이라는 파국론 서사와 본격적으로 결합했다. 2014년 일본 창성회의에서 나온 ‘마스다 보고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마스다 히로야는 이 보고서를 통해 현재의 인구 감소 추세대로라면 2040년까지 일본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절반이 사라진다는 말은 지방자치단체 절반이 존립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인구 감소는 세수 감소로 이어지고, 세수 감소는 재정의 위기로 이어지며 이는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연결돼 인구 유출이 심화되는 악순환을 낳게 되어 결국 소멸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지방 소멸론’은 한국에 서도 마강래의 《지방도시 살생부》(2017, 개마고원) 같은 책을 통해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멸’이라는 상징이 가져온 충격은 컸다. ‘소멸 예정지’의 사람들에게 그 예측은 공포와 무력감을 안겨 주었다. 소멸 예정지는 인구는 줄고 있는데 세금은 계속 투입되어 혈세를 낭비하는 곳이 되었고, 주민들은 세금에 기생하는 잉여 인구가 되었으며, 다른 곳의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가 되었다. 에너지 전환에 따른 좌초 산업 분야의 노동자들처럼, 소멸 예정 지역의 주민들도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구제 대상으로 전락했다.
전문가들은 경제 위기를 기후 위기나 인구 문제로 치환하면서, 국가를 기업처럼 운영하라는 신자유주의적 요구 속에서 채택된 긴축 재정과 민영화, 공공 부문 축소가 지역을 퇴락하게 만든 과정에 대해선 묻지 않고, ‘소멸’이란 용어를 통해 인구가 사라지는 것이 마치 바위가 시간 속에 풍화하는 것 같은 자연 현상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기후 위기’가 자연 현상을 통해 표현되지만 실은 정치적 결과이듯이, 인구 문제도 그렇다.
이런 서사의 구조는 기후 위기 담론에서 나타나는 파국론과 지구 소멸론에서도 공히 나타난다. 파국론은 위기의 엄중함을 지적하는 데 효과가 있지만 동시에 무력감과 냉소주의를 퍼뜨린다. 물론 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 심각성도 부정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과학자들의 경고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 극복 대안이 사회가 개인들에게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교육’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장주의적이고 기술주의적 수급론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이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경로를 찾을 때만 개인적 실천도 연대의 힘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파국론적 경고와 두려움은 우리의 실천 의지를 자기만족과 허무의 양극을 오가는 무한 진동 속에 가둘 뿐이다. 그런 점에서 강의실에서 수행하는 기후교육이 아니라 거리의 기후 행동이, 인구 문제의 심각성을 알려 주는 인구교육이 아니라 인구에서 시민으로 정치화하는 길을 만드는 사회운동이, 지금 가장 필요한 시민교육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 시민교육은 국민교육에 대한 대항 관계를 통해, 민중교육은 시민교육에 대한 비판적 긴장 관계를 통해 대안적 교육 이념을 형성해 왔다면, 인구교육은 어떤 교육 이념을 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시민교육이 국민을 찍어 내는 국민 조형 과정으로서의 ‘국민 교육’에 반대하며 ‘시민-되기’를 목표로 삼고, 민중교육이 부르주아적 시민 교양에 맞서 ‘민중-되기’의 교육을 모색하며, 대안교육은 제도교육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다른 교육의 길을 모색해 왔던 것과 달리, 인구교육에서는 ‘저출산 고령화’가 일종의 공리처럼 받아들여지고 교육 정책에서도 기본값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진보든 보수든, 인구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시민교육, 민중교육, 민주교육, 평등교육이 진보 교육의 철학이라면, 기본적으로 시민을 인구로 해체하고 노동자 민중을 탈계급화하여 인구로 동원하는 이 ‘인구의 관점’과 싸워야 하지 않을까? 국민도, 시민도, 인민도 아닌 이 이상한 ‘인구-되기’의 인구화 정치와 교육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