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선택권이라는 함정 - 고교 학점제, 체제를 강화할 것인가 변혁할 것인가
교육에서의 ‘선택’ 문제와 교육 공공성
교육 시장화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고교 학점제
글
천보선
2014peri@hanmail.net
진보교육연구소
교육 선택 논리의 등장과 주 내용
‘한국형 고교 학점제’❶의 핵심인 ‘교과 선택 전면화’의 연원은 1995년 5월 31일에 발표된 ‘신교육 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 개혁 방안’(5.31 교육 개혁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도 고교에 ‘교과 선택’이 있긴 했지만, 이것이 한국 교육에서 ‘필수 교과’와 대립, 충돌하는 일종의 ‘소비자 선택권’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교육 공급자인 학교 및 교원과 교육 행정 기관의 편의 중심 교육으로부터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한다. 교육 공급자 간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의 경쟁을 통해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 선택권을 확대한다.
- 5.31 교육 개혁안 중
5.31 교육 개혁안이 제기한 교육 선택권 개념에는 교육을 하나의 상품으로 규정하면서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관점이 등장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교육 시장화 논리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5.31 교육 개혁안은 ‘공급자 간 경쟁’과 ‘수요자의 선택’이라는 논리에 기반하여 다양하고 광범한 학교 시장화 정책들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대학 설립 준칙주의 및 국립대 법인화’, ‘학교 자율화 및 기업적 경영 도입’, ‘중등학교 다양화와 학교 선택권 부여’ ‘선택 중심 교육과정 도입’❷ , ‘교원 평가와 성과급제, 계약직 교원 제도 도입’, ‘학교 평가 및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❸ 등이 있었다. 고교 학점제 추진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도 5.31 교육 개혁안에서 제시된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교육 시장화 논리의 근저에는 교육이 마땅히 수요-공급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경제 활동이자 시장 영역이라는 관점과 철학이 있다.
교육도 역시 시민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 활동인 만큼 국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교육 활동의 자유를 –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용역을 자유롭게 생산해서 거래하는 일을 –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 김기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관하여〉, 《한국교육연구소식》, 1998년 3월호
교육 시장화론에서는 경쟁 원리 도입이 경쟁력, 즉 교육의 질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다양한 교육 상품을 더 값싸게 소비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교육 시장화론은 궁극적으로 시장 원리가 온전히 관철될 수 있도록 공적 규제와 간섭이 폐지되고, 사립 학교가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미 역사적으로 확립된 교육의 공적 성격을 탈각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한계가 내포된 이론이자 정책이었다.
교육 시장화론의 부침과 영향
교육 시장화 논리의 쇠퇴
매우 생경했던 ‘교육 서비스 상품’, ‘교육 공급자/소비자’ 따위의 개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교육의 본질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대세였던 시대적 조건 속에서 5.31 교육 개혁안의 주요 정책들은 대부분 현실화되었다. 다만, 의도한 대로 온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교육 시장화 정책들의 반교육적 성격, 교육 주체들의 저항, 비현실성 등의 요인들로 인해 부분적인 것에 머물거나, 단계적으로 진행되었고 또일부는 시행된 이후 후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표적인 정책들 다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 교육의 근간은 아직까지 5.31 교육 개혁안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31 교육 개혁안 이후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경쟁보다 협력’ 등의 표어를 내세워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시행된 정책들 대부분이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예컨대 ‘학교 다양화’ 정책은 ‘학교 서열화’라고,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는 ‘일제고사’라고 격한 비판을 받았고, ‘교원 평가 및 성과급제’도 교사들에게 널리 반감을 사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대세 속에서 적지 않은 나라들이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교육 시장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중등학교 자율 경영 및 학교 선택을 통한 경쟁 시스템 도입이 추진되었고 독일의 경우 무상이었던 대학에 등록금 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 나라들에서도 역시 비판이 확산되었다.
5.31 교육 개혁안 및 신자유주의 교육 시장화 정책은 실패했으며 그 관점과 방향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판명 났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교육적 왜곡과 문제점 양산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들 자신의 기준에서도 그러하다. 지난 20~30년에 걸친 정책적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교육 시장화’는 유의미하게 진척되지 못했다. 추진 과정에서 막히거나, 한국의 ‘중등학교 다양화’처럼 제법 나간 경우 에는 부정적 결과가 불거지고 거센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였다. 교육 시장화 정책은 별 진전 없이 경쟁과 불평등 심화라는 문제만을 확대시켜 왔을 뿐이다.
광범한 저항과 비판이 확산되면서 2000년대 이후 교육 시장화론은 세계적 차원에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대세가 결정적으로 꺾였으며 이후 교육 담론의 흐름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헤게모니를 잃으면서 교육 시장화 정책들도 하나둘씩 후퇴하는 모습들도 나타났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부 주에 도입된 대학 등록금이 다시 무상으로 전환되기도 했고 한국도 ‘학교 서열화’라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학교 다양화’ 정책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무엇보다 최근에는 다시금 교육 공공성과 보편 교육 강화를 지향하는 쪽으로 교육 패러다임 전환이 세계적 차원에서 일고 있다. OECD의 방향 전환이 대표적이다. OECD는 2000년대만 해도 ‘dececo’를 통해 ‘자본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강조했었으나 2018년에 발표한 ‘OECD 교육 2030’에서는 생태, 양극화 극복을 제기하면서 교육 공공성과 보편 교육 강화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이전의 ‘경쟁에서의 승리’, ‘성공’에서 ‘웰빙’으로의 교육 목표 변화는 기존의 경제 중심적/경쟁주의적 교육관/인간관에서 전인적/관계적(인간-세계, 인간-인간) 교육관/인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 손지희(2021), 〈OECD 교육 2030의 내용과 이론적, 실천적 의의〉, 《진보교육》, 80호
시대를 역행하는 고교 학점제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 전면화’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횡행하던 시절 형성된 기존의 관성이 상당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❹ 5.31 교육 개혁안에서 제시된 정보 사회론, 교육 경쟁력 담론이 2021년 국가교육위원회와 교육부의 고교 학점제 담론에서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5.31 교육 개혁안 이래 추진된 시장화 정책들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고교 학점제를 빌미로 교육 시장화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교과 선택 전면화’를 추진하는 것은 상당히 생뚱맞다. 관성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교육 시장화 정책을 극단적인 형태로 강화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너무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선택론과 고교 학점제의 ‘교과 선택 전면화’ 문제
교육 시장화의 주요 대상과 ‘소비자 선택’ 문제
교육 시장화 차원에서 소비자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는 ‘학교’, ‘교사’ 그리고 ‘교과’가 있다. ‘학교 선택’은 교육 기회의 시장화, ‘교사 선택’은 교육 방식의 시장화, ‘교과 선택’은 교육 내용의 시장화를 야기할 수 있다.
이제까지 교육의 주공급자는 국가였으며 (……) 즉, 국가 또는 학교가 공급자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학습자는 그것에 따를 뿐이었다. 교육은 일종의 배급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요자가 나서서 교육 기회, 교육 내용, 교육 방식을 선택하고 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 김신일, 〈소비자 중심의 교육 시대로 들어선다〉, 《교육개발》, 1995년 5월호
5.31 개혁안에는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한 ‘선택권 확대’가 담겨 있었다. ‘학교 선택’은 ‘중등학교 다양화와 특성화 및 학교 선택권 부여’의 형태로, ‘교사 선택’은 ‘학급(담임) 선택제’❺로, ‘교과 선택’은 ‘선택 중심 교육과정’으로 제시되었다. 이 중 ‘학급(담임) 선택’은 지나치게 비교육적이라는 거센 비판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지는 실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학교 선택’은 특목고, 자사고 등 ‘다양한 학교’를 만들면서 소비자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선택’ 정책의 진행 과정 및 그 폐해에 대해선 그동안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상세한 언급은 생략해도 될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정책의 문제가 명백해 보이지만 추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추진 당시 반대한 곳은 일부 교육단체들에 불과하였고 기득권 세력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교육 주체들도 명분으로 내세웠던 ‘교육 다양성’ 및 ‘선택권 확대’를 옹호하였다. 다수의 폐지 여론이 형성된 것은 그 폐해들이 심각한 현실로 드러난 이후이다. ‘다양한 학교’ 정책의 전개 과정은, 교육 시장화 정책은 ‘교육 다양성 확대’ ‘선택이라는 권리 부여’의 외양을 띠기 때문에 금방 그 본질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리고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나도 한번 정착된 정책을 다시 바꾸는 것은 매우 지난하다는 점도 보여 준다. ‘다양한 학교’ 정책 폐지는 사회적 공유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구조에서 이득을 보는 세력의 온갖 저항으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교과 선택’ 문제의 성격과 ‘교과 선택 전면화’로서의 고교 학점제
‘교과 선택’은 5.31 교육 개혁안에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교과 선택’은 ‘교육 시장화’ 차원에서는 ‘학교 선택’에 비해 다소 부차적이다. ‘교과’는 아직 ‘학교’만큼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과들의 집중, 소외, 배제 과정을 통한 ‘교육 내용의 시장적 조절’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사설 학원처럼 교과를 직접 상품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교육 시장화의 우선적 초점은 ‘학교 시장화’에 있었다. 신자유주의 교육을 입안한 나라들에서 정책 초점이 ‘학교 선택’에 맞추어지고 ‘교과 선택’은 주변화되거나 거의 시도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는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게 추진한 이례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을 가장 심하게 추진한 나라이다. 다만 ‘교과 선택’은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단계적이고 장기적으로 추진되었다.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1997년 제7차 교육과정에서 공식화되었고 이후 20여 년에 걸쳐 선택 비중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그 결과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고교에서 선택 교과 비중이 43%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높은 것이다.❻ 이번 고교 학점제는 그동안 단계적으로 확대해 오던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극단적으로 전면화하려는 것이라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교 학점제의 ‘교과 선택 전면화’는 보편 교육 강화가 강조되는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육 현장으로부터의 강력한 내부 동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한국형 고교 학점제의 ‘전면적 교과 선택’과 같은 형태는 세계적으로도 전혀 유례가 없는 방식이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일부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소수의 나라가 있긴 하지만 말이 ‘선택’이지 실제로는 대학이 요구하는 4~6개정도의 예비 전공 과목을 필수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이다. 선택의 조건과 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그런데, 한국형 고교 학점제는 수십 개의 과목❼을 선택하는 매우 과도하고 방만한 형태를 지닌다.
이렇게 유례없는 형태의 ‘교과 선택 전면화’를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추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다음의 몇가지 요소들이 얽혀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현 정부의 정치적 알리바이이다. 현 정부는 대학 서열 해소라는 근본적 개혁을 회피하면서 거의 유일한 교육 개혁 구호로 ‘고교 학점제’를 제시해 왔다. 그들로서는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잔존 시장주의자들의 이념적 ‘아집’도 한몫한다고 생각된다. 신자유주의 헤게 모니는 쇠퇴했지만 시장주의적 관료들과 학자들은 지금도 상당한 정책 개입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소비자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고교 학점제를 통해 ‘교과 선택 전면화’를 완성하려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과 ‘선택’에 대한 낭만적 태도이다. 이들은 수십 년 전의 교육관으로 오늘의 교육을 바라보면서 ‘선택’을 ‘억압’의 반대, ‘자유’의 확대로 본다. 이들은 ‘선택’ 그 자체에 환호한다.
이들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고교 학점제라는 생뚱맞은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담론적, 현실적 토대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고교 학점제를 통한 ‘전면적 교과 선택’은 도입되지 못하거나❽, 설사 도입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유례없는 제도의 현실성도 문제이거니와 대학 서열 체제와의 충돌, 입시 몰입 교육의 극단화로 인한 모순과 부작용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교과 선택’의 두 방식과 교육적 재정립
‘교과 선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교과 선택’에는 두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공공성에 대립하는 시장주의적 원리로서 ‘선택’이 있을 수 있고, 개개인의 발달을 지원하는 교육적 ‘선택’이 있을 수 있다. 그 형태와 맥락에 따라 ‘시장주의적 선택’이 될 수도 있고, ‘교육적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고교 학점제의 ‘교과 선택 전면화’는 말로는 ‘개개인의 적성과 희망’을 내세우지만 교육 공공성을 해치는 시장주의적 소비자 선택이다. 정책 추진 자체가 교육 시장화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고 ‘필수’를 ‘선택’과 대립시키면서 배제하려 한다. 선택을 ‘선’으로, 필수는 시장 원리를 가로막는 ‘악’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평등과 공공성보다 ‘시장 원리’, ‘소비자 선택’을 더 우위의 원리와 가치로 여긴다. 교과 선택 전면화가 입시 몰입 교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함에도 강행하려 하는 것은 ‘선택 원리’를 더 우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 선택’이 시장적 관점의 ‘소비자 선택’이 아니라 ‘자유의 확대’로서 교육적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입시 교육으로부터의 구조적 탈피이다. 입시 경쟁이 해소되어야 교과 선택이 개개인의 특기와 관심을 북돋을 수 있는 실제적 기제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필수 교과와의 적절한 결합이다. 반드시 배워야 할 교양은 ‘필수 교과’로, 개개인의 특기와 관심을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선택 교과로 구성되는 것이 타당하다. 보편 교육 강화는 더 넓은 시야와 계기들을 부여함으로써 개개인의 특기, 관심을 살리는 토대가 된다. 즉 ‘필수’와 ‘선택’ 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다. 따라서 필수와 선택 문제는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교육적 결합, 비중의 문제가 된다.
이 문제와 관련된 논의가 고교 학점제를 비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교과 선택’도 시장주의의 ‘소비자 선택’ 관점에서 확대되어 온 것이며 그 결과 이미 현재의 고교교육은 보편 교육의 원리가 크게 훼손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OECD 교육 2030’에서 강조하듯 새로운 시대는 보편 교육의 질적 강화를 요청하고 있다. 고교 교육과정을 올바로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정립의 기본 형태는 튼튼한 보편교육의 토대 위에 ‘입시’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관심과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진정한 ‘교과 선택’이 적절한 비중으로 결합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장주의적 관점, ‘소비자 선택’ 따위의 잘못된 관점에서 벗어나 올바른 교육적 원리에서 ‘교과 선택’ 문제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❶ 학점제는 이수한 교과의 학점 누적을 학력 부여의 기준으로 삼는 제도이다. ‘학년제’, ‘단위제’ 등과 구분되는 ‘학점제’라는 제도의 핵심 요건은 교과 ‘이수-미이수’ 제도이며 교과 선택 전면화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 예컨대 학점제를 시행하는 핀란드의 경우 필수 교과 비중이 2/3, 중국은 3/4에 이른다.그런데 한국의 교육부는 ‘학점제’라는 명칭을 쓰면서 ‘이수-미이수’ 제도는 실제적 시행을 유보하면서, 원래 학점제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전면적 교과 선택’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❷ 5.31 교육 개혁안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개혁 방안 발표로 진행되었는데, 고교 학점제의 핵심 내용인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2차 교육 개혁 방안 발표에 담겨 있다.
❸ 일명 ‘일제고사’라 칭해진 평가 정책. 교육 시장화론에서 ‘전국적 평가’는 중요한 정책 중 하나이다. 교육을 상품으로 볼 때, 상품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 일제고사는 학생을 일제식으로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교 간 우열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
❹ 5.31 교육 개혁안의 ‘정보 사회론’은 ‘4차 산업 혁명론’으로, ‘무한 경쟁 시대 신지식인 양성’은 ‘미래 사회 대비 인재양성’으로 표현만 살짝 바뀌었을 뿐, 기본 개념은 똑같다. 새로운 시대의 대립항도 ‘소품종 대량 생산 체제’ 극복이다. 고교 학점제 추진의 배경이 되는 시대 인식과 관점은 30년 전의 것 거의 그대로다.
❺ 1997년 6월 김영삼 정부 제4차 교육 개혁안에서 제시된 내용.
❻ 핀란드는 선택 비중이 1/3 정도이고 미국, 유럽의 대다수 국가는 1/4~1/5 정도이다.
❼ 기존의 교육과정 및 교과들을 참고할 때 고 2, 3학년을 전면적 교과 선택으로 운영할 경우 학생들은 30여 개가 넘는 과목을 선택하게 된다.
❽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수 교과 비중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이 추진 세력 내부에서도 거세다고 한다. 만약 ‘교과 선택 전면화’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내용적으로 고교 학점제는 사실상 좌절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점제’라는 제도의 원래 핵심 요건인 ‘이수-미이수’ 제도 실행을 이미 유보한 상황에서 실제 목적인 ‘교과 선택 전면화’도 무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고교 학점제는 ‘학점제’라는 껍데기 명칭과 무자격 교사 문제, 온라인 및 학교 연합 공동 교육과정 운영 문제, 교실 및 학급 운영 문제 등 온갖 파생적 문제들만 남게 되는 ‘정체불명의 누더기 제도’가 되고 만다.
특집 / 선택권이라는 함정 - 고교 학점제, 체제를 강화할 것인가 변혁할 것인가
교육에서의 ‘선택’ 문제와 교육 공공성
교육 시장화 논리의 연장선에 있는 고교 학점제
글
천보선
2014peri@hanmail.net
진보교육연구소
교육 선택 논리의 등장과 주 내용
‘한국형 고교 학점제’❶의 핵심인 ‘교과 선택 전면화’의 연원은 1995년 5월 31일에 발표된 ‘신교육 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 개혁 방안’(5.31 교육 개혁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도 고교에 ‘교과 선택’이 있긴 했지만, 이것이 한국 교육에서 ‘필수 교과’와 대립, 충돌하는 일종의 ‘소비자 선택권’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교육 공급자인 학교 및 교원과 교육 행정 기관의 편의 중심 교육으로부터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한다. 교육 공급자 간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의 경쟁을 통해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 선택권을 확대한다.
- 5.31 교육 개혁안 중
5.31 교육 개혁안이 제기한 교육 선택권 개념에는 교육을 하나의 상품으로 규정하면서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하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런 관점이 등장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교육 시장화 논리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5.31 교육 개혁안은 ‘공급자 간 경쟁’과 ‘수요자의 선택’이라는 논리에 기반하여 다양하고 광범한 학교 시장화 정책들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대학 설립 준칙주의 및 국립대 법인화’, ‘학교 자율화 및 기업적 경영 도입’, ‘중등학교 다양화와 학교 선택권 부여’ ‘선택 중심 교육과정 도입’❷ , ‘교원 평가와 성과급제, 계약직 교원 제도 도입’, ‘학교 평가 및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❸ 등이 있었다. 고교 학점제 추진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도 5.31 교육 개혁안에서 제시된 주요 정책 중 하나였다. 교육 시장화 논리의 근저에는 교육이 마땅히 수요-공급 원리가 적용되어야 할 경제 활동이자 시장 영역이라는 관점과 철학이 있다.
교육도 역시 시민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제 활동인 만큼 국가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고 교육 활동의 자유를 –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용역을 자유롭게 생산해서 거래하는 일을 –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 김기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관하여〉, 《한국교육연구소식》, 1998년 3월호
교육 시장화론에서는 경쟁 원리 도입이 경쟁력, 즉 교육의 질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소비자들은 다양한 교육 상품을 더 값싸게 소비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교육 시장화론은 궁극적으로 시장 원리가 온전히 관철될 수 있도록 공적 규제와 간섭이 폐지되고, 사립 학교가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미 역사적으로 확립된 교육의 공적 성격을 탈각시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한계가 내포된 이론이자 정책이었다.
교육 시장화론의 부침과 영향
교육 시장화 논리의 쇠퇴
매우 생경했던 ‘교육 서비스 상품’, ‘교육 공급자/소비자’ 따위의 개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교육의 본질에 어긋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정서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대세였던 시대적 조건 속에서 5.31 교육 개혁안의 주요 정책들은 대부분 현실화되었다. 다만, 의도한 대로 온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교육 시장화 정책들의 반교육적 성격, 교육 주체들의 저항, 비현실성 등의 요인들로 인해 부분적인 것에 머물거나, 단계적으로 진행되었고 또일부는 시행된 이후 후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표적인 정책들 다수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 교육의 근간은 아직까지 5.31 교육 개혁안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5.31 교육 개혁안 이후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경쟁보다 협력’ 등의 표어를 내세워 많은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또한 시행된 정책들 대부분이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예컨대 ‘학교 다양화’ 정책은 ‘학교 서열화’라고, ‘국가 수준 학업 성취도 평가’는 ‘일제고사’라고 격한 비판을 받았고, ‘교원 평가 및 성과급제’도 교사들에게 널리 반감을 사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대세 속에서 적지 않은 나라들이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교육 시장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중등학교 자율 경영 및 학교 선택을 통한 경쟁 시스템 도입이 추진되었고 독일의 경우 무상이었던 대학에 등록금 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이 나라들에서도 역시 비판이 확산되었다.
5.31 교육 개혁안 및 신자유주의 교육 시장화 정책은 실패했으며 그 관점과 방향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판명 났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교육적 왜곡과 문제점 양산이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들 자신의 기준에서도 그러하다. 지난 20~30년에 걸친 정책적 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교육 시장화’는 유의미하게 진척되지 못했다. 추진 과정에서 막히거나, 한국의 ‘중등학교 다양화’처럼 제법 나간 경우 에는 부정적 결과가 불거지고 거센 반발과 저항에 직면하였다. 교육 시장화 정책은 별 진전 없이 경쟁과 불평등 심화라는 문제만을 확대시켜 왔을 뿐이다.
광범한 저항과 비판이 확산되면서 2000년대 이후 교육 시장화론은 세계적 차원에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대세가 결정적으로 꺾였으며 이후 교육 담론의 흐름도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헤게모니를 잃으면서 교육 시장화 정책들도 하나둘씩 후퇴하는 모습들도 나타났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부 주에 도입된 대학 등록금이 다시 무상으로 전환되기도 했고 한국도 ‘학교 서열화’라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학교 다양화’ 정책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무엇보다 최근에는 다시금 교육 공공성과 보편 교육 강화를 지향하는 쪽으로 교육 패러다임 전환이 세계적 차원에서 일고 있다. OECD의 방향 전환이 대표적이다. OECD는 2000년대만 해도 ‘dececo’를 통해 ‘자본이 필요로 하는 역량’을 강조했었으나 2018년에 발표한 ‘OECD 교육 2030’에서는 생태, 양극화 극복을 제기하면서 교육 공공성과 보편 교육 강화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이전의 ‘경쟁에서의 승리’, ‘성공’에서 ‘웰빙’으로의 교육 목표 변화는 기존의 경제 중심적/경쟁주의적 교육관/인간관에서 전인적/관계적(인간-세계, 인간-인간) 교육관/인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 손지희(2021), 〈OECD 교육 2030의 내용과 이론적, 실천적 의의〉, 《진보교육》, 80호
시대를 역행하는 고교 학점제의 ‘선택 중심 교육과정 전면화’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아직까지도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횡행하던 시절 형성된 기존의 관성이 상당히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❹ 5.31 교육 개혁안에서 제시된 정보 사회론, 교육 경쟁력 담론이 2021년 국가교육위원회와 교육부의 고교 학점제 담론에서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으며 5.31 교육 개혁안 이래 추진된 시장화 정책들도 대부분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에서 고교 학점제를 빌미로 교육 시장화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교과 선택 전면화’를 추진하는 것은 상당히 생뚱맞다. 관성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교육 시장화 정책을 극단적인 형태로 강화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너무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비자 선택론과 고교 학점제의 ‘교과 선택 전면화’ 문제
교육 시장화의 주요 대상과 ‘소비자 선택’ 문제
교육 시장화 차원에서 소비자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에는 ‘학교’, ‘교사’ 그리고 ‘교과’가 있다. ‘학교 선택’은 교육 기회의 시장화, ‘교사 선택’은 교육 방식의 시장화, ‘교과 선택’은 교육 내용의 시장화를 야기할 수 있다.
이제까지 교육의 주공급자는 국가였으며 (……) 즉, 국가 또는 학교가 공급자로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학습자는 그것에 따를 뿐이었다. 교육은 일종의 배급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수요자가 나서서 교육 기회, 교육 내용, 교육 방식을 선택하고 결정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 김신일, 〈소비자 중심의 교육 시대로 들어선다〉, 《교육개발》, 1995년 5월호
5.31 개혁안에는 이 세 가지 모두에 대한 ‘선택권 확대’가 담겨 있었다. ‘학교 선택’은 ‘중등학교 다양화와 특성화 및 학교 선택권 부여’의 형태로, ‘교사 선택’은 ‘학급(담임) 선택제’❺로, ‘교과 선택’은 ‘선택 중심 교육과정’으로 제시되었다. 이 중 ‘학급(담임) 선택’은 지나치게 비교육적이라는 거센 비판으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지는 실제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학교 선택’은 특목고, 자사고 등 ‘다양한 학교’를 만들면서 소비자 선택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선택’ 정책의 진행 과정 및 그 폐해에 대해선 그동안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상세한 언급은 생략해도 될 듯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정책의 문제가 명백해 보이지만 추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추진 당시 반대한 곳은 일부 교육단체들에 불과하였고 기득권 세력만이 아니라 적지 않은 교육 주체들도 명분으로 내세웠던 ‘교육 다양성’ 및 ‘선택권 확대’를 옹호하였다. 다수의 폐지 여론이 형성된 것은 그 폐해들이 심각한 현실로 드러난 이후이다. ‘다양한 학교’ 정책의 전개 과정은, 교육 시장화 정책은 ‘교육 다양성 확대’ ‘선택이라는 권리 부여’의 외양을 띠기 때문에 금방 그 본질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리고 문제점이 분명히 드러나도 한번 정착된 정책을 다시 바꾸는 것은 매우 지난하다는 점도 보여 준다. ‘다양한 학교’ 정책 폐지는 사회적 공유에도 불구하고 이미 형성된 구조에서 이득을 보는 세력의 온갖 저항으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다.
‘교과 선택’ 문제의 성격과 ‘교과 선택 전면화’로서의 고교 학점제
‘교과 선택’은 5.31 교육 개혁안에서 ‘선택 중심 교육과정’이라는 형태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교과 선택’은 ‘교육 시장화’ 차원에서는 ‘학교 선택’에 비해 다소 부차적이다. ‘교과’는 아직 ‘학교’만큼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과들의 집중, 소외, 배제 과정을 통한 ‘교육 내용의 시장적 조절’을 기대할 수는 있겠지만 사설 학원처럼 교과를 직접 상품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교육 시장화의 우선적 초점은 ‘학교 시장화’에 있었다. 신자유주의 교육을 입안한 나라들에서 정책 초점이 ‘학교 선택’에 맞추어지고 ‘교과 선택’은 주변화되거나 거의 시도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는 두 가지 모두 중요하게 추진한 이례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국은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을 가장 심하게 추진한 나라이다. 다만 ‘교과 선택’은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단계적이고 장기적으로 추진되었다.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1997년 제7차 교육과정에서 공식화되었고 이후 20여 년에 걸쳐 선택 비중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그 결과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고교에서 선택 교과 비중이 43%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매우 높은 것이다.❻ 이번 고교 학점제는 그동안 단계적으로 확대해 오던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극단적으로 전면화하려는 것이라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교 학점제의 ‘교과 선택 전면화’는 보편 교육 강화가 강조되는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육 현장으로부터의 강력한 내부 동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한국형 고교 학점제의 ‘전면적 교과 선택’과 같은 형태는 세계적으로도 전혀 유례가 없는 방식이다.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 일부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소수의 나라가 있긴 하지만 말이 ‘선택’이지 실제로는 대학이 요구하는 4~6개정도의 예비 전공 과목을 필수적으로 공부하는 방식이다. 선택의 조건과 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그런데, 한국형 고교 학점제는 수십 개의 과목❼을 선택하는 매우 과도하고 방만한 형태를 지닌다.
이렇게 유례없는 형태의 ‘교과 선택 전면화’를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추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다음의 몇가지 요소들이 얽혀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현 정부의 정치적 알리바이이다. 현 정부는 대학 서열 해소라는 근본적 개혁을 회피하면서 거의 유일한 교육 개혁 구호로 ‘고교 학점제’를 제시해 왔다. 그들로서는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잔존 시장주의자들의 이념적 ‘아집’도 한몫한다고 생각된다. 신자유주의 헤게 모니는 쇠퇴했지만 시장주의적 관료들과 학자들은 지금도 상당한 정책 개입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소비자 선택’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고교 학점제를 통해 ‘교과 선택 전면화’를 완성하려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과 ‘선택’에 대한 낭만적 태도이다. 이들은 수십 년 전의 교육관으로 오늘의 교육을 바라보면서 ‘선택’을 ‘억압’의 반대, ‘자유’의 확대로 본다. 이들은 ‘선택’ 그 자체에 환호한다.
이들 요소들이 결합되면서 고교 학점제라는 생뚱맞은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담론적, 현실적 토대가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고교 학점제를 통한 ‘전면적 교과 선택’은 도입되지 못하거나❽, 설사 도입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유례없는 제도의 현실성도 문제이거니와 대학 서열 체제와의 충돌, 입시 몰입 교육의 극단화로 인한 모순과 부작용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교과 선택’의 두 방식과 교육적 재정립
‘교과 선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교과 선택’에는 두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공공성에 대립하는 시장주의적 원리로서 ‘선택’이 있을 수 있고, 개개인의 발달을 지원하는 교육적 ‘선택’이 있을 수 있다. 그 형태와 맥락에 따라 ‘시장주의적 선택’이 될 수도 있고, ‘교육적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고교 학점제의 ‘교과 선택 전면화’는 말로는 ‘개개인의 적성과 희망’을 내세우지만 교육 공공성을 해치는 시장주의적 소비자 선택이다. 정책 추진 자체가 교육 시장화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고 ‘필수’를 ‘선택’과 대립시키면서 배제하려 한다. 선택을 ‘선’으로, 필수는 시장 원리를 가로막는 ‘악’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평등과 공공성보다 ‘시장 원리’, ‘소비자 선택’을 더 우위의 원리와 가치로 여긴다. 교과 선택 전면화가 입시 몰입 교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이 분명함에도 강행하려 하는 것은 ‘선택 원리’를 더 우위에 놓고 있기 때문이다.
‘교과 선택’이 시장적 관점의 ‘소비자 선택’이 아니라 ‘자유의 확대’로서 교육적 선택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첫째, 입시 교육으로부터의 구조적 탈피이다. 입시 경쟁이 해소되어야 교과 선택이 개개인의 특기와 관심을 북돋을 수 있는 실제적 기제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필수 교과와의 적절한 결합이다. 반드시 배워야 할 교양은 ‘필수 교과’로, 개개인의 특기와 관심을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선택 교과로 구성되는 것이 타당하다. 보편 교육 강화는 더 넓은 시야와 계기들을 부여함으로써 개개인의 특기, 관심을 살리는 토대가 된다. 즉 ‘필수’와 ‘선택’ 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다. 따라서 필수와 선택 문제는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교육적 결합, 비중의 문제가 된다.
이 문제와 관련된 논의가 고교 학점제를 비판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의 ‘교과 선택’도 시장주의의 ‘소비자 선택’ 관점에서 확대되어 온 것이며 그 결과 이미 현재의 고교교육은 보편 교육의 원리가 크게 훼손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OECD 교육 2030’에서 강조하듯 새로운 시대는 보편 교육의 질적 강화를 요청하고 있다. 고교 교육과정을 올바로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정립의 기본 형태는 튼튼한 보편교육의 토대 위에 ‘입시’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관심과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진정한 ‘교과 선택’이 적절한 비중으로 결합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장주의적 관점, ‘소비자 선택’ 따위의 잘못된 관점에서 벗어나 올바른 교육적 원리에서 ‘교과 선택’ 문제를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❶ 학점제는 이수한 교과의 학점 누적을 학력 부여의 기준으로 삼는 제도이다. ‘학년제’, ‘단위제’ 등과 구분되는 ‘학점제’라는 제도의 핵심 요건은 교과 ‘이수-미이수’ 제도이며 교과 선택 전면화 여부와는 관련이 없다. 예컨대 학점제를 시행하는 핀란드의 경우 필수 교과 비중이 2/3, 중국은 3/4에 이른다.그런데 한국의 교육부는 ‘학점제’라는 명칭을 쓰면서 ‘이수-미이수’ 제도는 실제적 시행을 유보하면서, 원래 학점제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전면적 교과 선택’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❷ 5.31 교육 개혁안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네 차례에 걸친 개혁 방안 발표로 진행되었는데, 고교 학점제의 핵심 내용인 ‘선택 중심 교육과정’은 2차 교육 개혁 방안 발표에 담겨 있다.
❸ 일명 ‘일제고사’라 칭해진 평가 정책. 교육 시장화론에서 ‘전국적 평가’는 중요한 정책 중 하나이다. 교육을 상품으로 볼 때, 상품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 일제고사는 학생을 일제식으로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학교 간 우열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 의미가 있다.
❹ 5.31 교육 개혁안의 ‘정보 사회론’은 ‘4차 산업 혁명론’으로, ‘무한 경쟁 시대 신지식인 양성’은 ‘미래 사회 대비 인재양성’으로 표현만 살짝 바뀌었을 뿐, 기본 개념은 똑같다. 새로운 시대의 대립항도 ‘소품종 대량 생산 체제’ 극복이다. 고교 학점제 추진의 배경이 되는 시대 인식과 관점은 30년 전의 것 거의 그대로다.
❺ 1997년 6월 김영삼 정부 제4차 교육 개혁안에서 제시된 내용.
❻ 핀란드는 선택 비중이 1/3 정도이고 미국, 유럽의 대다수 국가는 1/4~1/5 정도이다.
❼ 기존의 교육과정 및 교과들을 참고할 때 고 2, 3학년을 전면적 교과 선택으로 운영할 경우 학생들은 30여 개가 넘는 과목을 선택하게 된다.
❽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필수 교과 비중을 줄이는 것에 대한 반발이 추진 세력 내부에서도 거세다고 한다. 만약 ‘교과 선택 전면화’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내용적으로 고교 학점제는 사실상 좌절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점제’라는 제도의 원래 핵심 요건인 ‘이수-미이수’ 제도 실행을 이미 유보한 상황에서 실제 목적인 ‘교과 선택 전면화’도 무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고교 학점제는 ‘학점제’라는 껍데기 명칭과 무자격 교사 문제, 온라인 및 학교 연합 공동 교육과정 운영 문제, 교실 및 학급 운영 문제 등 온갖 파생적 문제들만 남게 되는 ‘정체불명의 누더기 제도’가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