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특집] 코로나19가 호출한 노동과 몸, 그리고 교육 (이현애)

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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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코로나19 사태로 바라본 교육


코로나19가 호출한 노동과 몸, 그리고 교육


이현애

redyrabbit1968@gmail.com

경기 중등 교사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과 〈극한 직업〉을 종종 본다. 주 5일의 노동으로 시달린 몸이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신호를 보내는 주말에 텔레비전 앞에 몸을 늘어뜨리고 보곤 한다. TV에 방영된 내용을 가지고 수업에서 함께 이야기 나눠 보기도 한다. 경험에 의하면 이 프로그램들이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로 압축된다. ‘열심히 공부해서 저런 일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다짐이다. 전문가란 누구인가 질문을 던져 보고, 일상 속의 고단한 삶을 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고귀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감동을 나누고 싶었던 교사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결론이다. 나의 교사로서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전문성과 노동의 정의 그리고 우리의 삶과 현실을 규정하는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교육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코로나19의 시대. 코로나19로 우리의 삶과 교육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 또한 잘못된 질문이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들을 수면으로 떠오르게 했고,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변화의 원인은 과거 우리의 일상들 속에 촘촘히 자리 잡고 있었고, 변화의 과정은 이미 진행 중이 었다. 원인에 대한 잘못된 분석은 빗나간 예측과 해법으로 나아가게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나고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와 교육의 핵심 문제들은 무엇인가로 질문은 재정의 되어야 한다. 교육의 지식교육화와 전문성 신화, 교육의 재개념화 실패, 원격 교육 신화의 안착과 교육 공공성의 위협을 중심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할 고민의 단초들을 논의해 보려고 한다.



전문성의 신화와 지식교육의 공모


코로나19의 확산 이후 교육의 문제는 ‘등교 개학’이라는 사안이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학사 일정에 따른 법정 수업 일수가 가장 먼저 쟁점이 되었다. 비대면 원격 수업(온라인 수업)이라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후에는 고3, 중3을 중심으로 한 입시 일정으로 논의가 집중된 형국이다. 그 정점에는 우리나라 교육의 블랙홀, 대학 입시가 있다. 모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입시 일정과 심지어는 모의고사 일정이 정책 결정의 중요 고려 사항이 되었다. 좀 더 ‘합리적’인 일정 조정이 논쟁될 뿐, 고3의 개학을 우선적으로 앞당기는 계획에 자리 잡고 있는 인식 틀과 구조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쉽사리 드러날 수 없었다.


이 와중에 경북의 한 전문계 고등학교 학생의 자살 소식 이 전해졌다. 기능대회 준비를 위한 과정에서는, 코로나19 위기의 중심에 있었던 ‘대구·경북’이라는 지역의 특수성도 상관이 없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이 인문계 고등학교의 입시 일정에 쏠려 있는 동안, 전문계 고등학교는 배제와 생존을 위한 절박함 속에서 교육을 포기한 ‘기능대회’에의 집중이라는 모순과 싸우고 있었다. 뿌리 깊은 모순으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학생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하나의 사건으로 떠올랐다 사라졌을 뿐, 진전된 논의와 정책적 고민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코로나19 이전이나 이후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주된 쟁점이 되지 못하고 주변적 ‘사건’으로 처리되었을 뿐이다.


❶ 고등학교의 학교 구분은 ‘일반고, 특수목적고, 특성화고’이다. 일반고가 지시하는 정상성의 문제와 일반의 전제로서 지식교육과 대입이라는 문제도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현실에서 널리 쓰이는 인문 계와 전문계라는 용어로 이 글에서는 일단 서술하 고자 한다.

❷ [“경북 S공고 학생, 기능경기대회 준비 중 숨져”, 〈대경일보〉, 2020년 4월 21일] 및 [“어느 고3 학생의 죽음… 그는 기능공이 아니라 메달 따는 기계 였다”, 〈프레시안〉, 2020년 5월 1일].



이 치열한 현실 속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급변하는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는다’는 조언은 악의 없이 받아들여진다. 전문직, 전문가, 전문성은 노동과 노동자를 ‘대신하는’ 긍정적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전문가라는 용어가 품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다. 전문직의 전문은 고소득의 어떤 직업군들을 일컫고, 전문가의 전문은 노동 숙련도의 변형된 언어이며, 전문성의 전문은 노력의 또 다른 압박이다. 그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노동이지만, 우리는 이제 노동을 노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문이라는 이름 속에서 노동을 서열화하고,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구조의 폭력을 숨기고 있다. 노동은 버리고 넘어야 할 것으로 저물고 있고, 전문은 우리가 획득해야 할 그 무엇이 되었다. 노동이라는 용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여전히 노동에 있다.


학교는 이 전문성의 신화에 대항하고 대안을 고민하기보다는 적극적 공모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고 있다. 교과교육 이외의 것들은 추가되어야 할 주제교육의 ‘목록’으로 존재할 뿐이다. 본령은 지식교육이고 정점은 입시이다. ‘민주, 안전, 인권, 자치, 성평등, 통일’ 등은 수업 진도표 속에 넣어야 할 법적 의무 교육 항목일 뿐이다.



교육의 재개념화 실패


법정 수업 일수 문제가 비대면 원격 수업이라는 형태로 형식적 부분에서 정리된 후 다른 한편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 건 ‘돌봄’의 문제였다. 재택 근무 등이 보장된 직업을 가진 보호자의 경우에는 가정에서 돌봄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호소하였고,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출근을 해야만 하는 노동 환경을 가진 보호자의 경우에는 돌봄 없이 방치되는 자녀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가정 혹은 머무르는 공간에서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조건에 있던 아동·청소년에 대한 문제가 위기의 상황에서 가시화된 것이다.


정부는 ‘긴급 돌봄’을 대책으로 제시하였고, 학교 현장으로 논쟁이 옮겨 갔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문제가 심각했는데, 법적으로 교육의 영역이 아닌 ‘돌봄’은 법적 근거 없이 이미 학교로 들어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에게 부과된, 법적 근거 없는 과도한 노동이라는 문제와 돌봄 전담사의 고용 불안정성이라는 문제가 맞물리면서 여러 논쟁들이 일어났다. 표면적으로 노동자 대 노동자의 갈등으로 드러났고,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급식 문제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형태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돌봄’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제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다면, ‘급식’은 단체 급식이라는 형태가 코로나19 확산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는 결국 학교 급식을 책임지고 있는 급식 조리사들의 개학 후 임금 지급 여부의 문제로 구체화되었다. 이 와중에 서울시 교육감이 “학교에는 ‘일 안 해도 월급 받는 그룹’과 ‘일 안 하면 월급 받지 못하는 그룹’이 있는데 후자에 대해선 개학이 추가로 연기된다면 비상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발언했다. 이에 교사들이 반발하고, 또다시 노동자 대 노동자의 갈등, 구성원들의 감정의 문제로 논쟁이 옮겨 가면서 핵심적 논의는 봉합되었다.


돌봄이든 급식이든 문제의 핵심은, 학교 내에 다양한 사회적 역할들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이 역할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 학교의 역할인 수업과 상담을 전담하고 있는 교사들은 과다한 학급당 학생 수, 다양하고 과다한 행정 업무 수행 등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과도한 노동에 내몰려 있다. 이 와중에 급식, 돌봄, 방과 후 수업 등이 물리적인 학교의 내부로 들어왔다. 현실에서 이 역할들을 담당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무기 계약직, 단기 계약직 등의 불안정 노동의 형태로 학교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역할들이 교육인지 아닌지의 문제와 이 역할들이 교사가 할 일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혼동되고 섞여 학교 내 갈등을 빚고 있다.


물리적 학교 내부로 들어와 있는 새로운 역할들이 ‘교육이 아니라면 왜 학교에 들어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교사들은 공포를 느낀다. ‘교육이라면 그 일들까지 교사가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 공포를 교사 집단의 이기심으로 몰아가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리적 학교 내부로 들어와 있는 새로운 역할들이 교육임을 인정하고 학교 내에 교사 이외의 다양한 교육자들이 교육 노동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교사는 학교 내 다양한 ‘교육자들’ 중 하나의 직군이고 다양한 교육 노동 중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집단으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학교 내 전통적 직군 중의 하나인 교육 행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접근이 필요하다. 교사가 교육 행정을 거부하는 이유는 행정의 일이 교육 노동자 중 교사가 할 일이 아니고, 수업과 상담을 주된 노동으로 하는 교사가 감당하기에 과도한 업무 부담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 행정은 학교 내 교육자 중 교육 행정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이 적절하게 해내야 할 교육 노동 중 하나인 것이다. 사실 이것은 특별한 내용이 아니다. 당연하고 원칙적인 이야기다. 문제는 이 당위가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러한 현실을 폭발적으로 드러내었고, 이는 노동자대 노동자의 갈등으로만 조명되고 봉합되었다.



원격 교육 신화의 안착과 지워진 몸과 목소리


원격 교육은 코로나19 이후 미래 교육의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교육과 기술의 연합 과정에서 변화에 대한 대응 ‘속도’와 ‘효율’이라는 키워 드가 담론을 잠식하고 있다. 교사들의 빠른 적응은 능력 혹은 전문성과 동의어가 되었고, ‘구글’이니 ‘줌’이니 하는 초국적 자본의 이름이 거부감 없이 방법론의 핵심으로 스며들고 있다. 구글 클래스룸의 ‘효율적’이고 편리한 시스템은 감탄을 자아냈고, 줌의 선도적 기술은 실시간 화상 수업을 현실로 만드는 ‘멋진’ 도구로 회자되며 도입되고 있다. 이미 그 위력은 위기의 시기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시 처방으로 논의되는 것을 넘어선 수준이다. 정부는 원격 교육을 산업으로 육성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표명한 실정이다.


기술과 속도에 대한 논의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다만 ‘공교육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속에서 기술과 속도에 접근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방식으로 기술과 속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기술과 자본은 학교를 잠식할 것이고 대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술로 포장된 자본에 의한 원격 교육이 학교교육을 장악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콜센터화된 학교와 교사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에서도 지식교육이 학교교육의 전부라고 한다면, 원격 교육을 중심으로 한 미래 교육의 모습은, 일부의 ‘권위 있는 유명 지식 전달 전문가’와 ‘콜센터화된 학교와 교사’로 정리될 것이라고 본다. 둘이 맺는 관계는 수평적이기 힘들 것이다.


개별 교사의 지식 전달의 효율이 ‘유명 지식 전달 전문가’가 만들어 내는 콘텐츠를 넘어설 가능성은 있는가. 〈EBS〉 유명 강사의 모습만 떠올려 보아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정적이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EBS〉 유명 강사의 강의 혹은 콘텐츠 뒤에는 수많은 비가시적 노동과 자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 전달의 교육 속에서 교사는 위계 구조 속 하위 체제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지식 전달만을 교육이라 고집할 때 학교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교육 노동의 위계화는 가속화될 것이다. 교사는 변화된 현실 속에서 하위 노동을 점하는 ‘의도치 않은’ 현실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상 급식의 실현은 우리 교육의 획기적 변화 중 하나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당시의 핵심적 주장,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정치적 싸움을 해 나갈 수 있었던 힘은 ‘급식도 교육이다’라는 언어였다. 그러나 그 싸움을 이겨 낸 이후, 급식은 교육이 되어 왔는지 솔직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무상 급식은 여전히 무상 ‘급식’일 뿐 교육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밥이라도 먹으러 오는 것’은 급식이 교육이 되기 위한 출발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출발 지점에만 서 있다. 무상 급식이 학교에 자리 잡게 하기 위해 ‘교육’을 호출했지만, 진짜 교육으로는 자리 잡지 못했다. 급식은 급식으로 교육에서 자꾸 밀려나고 있다. 무상 급식의 정치적 승리 이후 무상 급식은 교육적 전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시대에 표면으로 떠오른 돌봄과 지식교육의 경계는, 비록 무상 급식을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오게는 했으나 교육으로 인정하지 못한 혹은 안 한 지식교육으로의 후퇴를 다른 측면에서 보여 준다.


지식 중심의 교육만을 전제한다면 장기적으로 원격 교육에서 학교와 교사는 콜센터화될 것이고, 교사의 몸이 놓이는 노동 환경은 사회 전체 노동자의 노동 환경에 종속될 것이다. 이번 집단 감염으로 드러난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 곧 교사의 노동 환경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과도한가?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전문가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특수 고용직화가 아닐까. 지식교육을 넘어서는 교육의 재개념화와 교육 공공성의 문제는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사의 ‘노동’의 조건, 위계와도 직접 연결된 문제이다.


공간과 몸을 지운 교육

원격 교육의 화두에서 우리가 반드시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공간과 몸이다. 현재 학교 공간이 가진 근대 규율 체제적 특성은 오랜 세월 지적되었다. 굳이 푸코를 호출하지 않더라도 학교는 공간을 구획하고 시간을 분절하여 우리의 몸을 규율하고 감시한다.


공간과의 연합을 떨쳐 낸 원격 교육은 과연 이 규율적 성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원격 교육이 몸에 ‘자유’를 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너무나 문제적이다. 학교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몸은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학교에서 그 몸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없다. 학교 공간에서 사라지고 비가시화된 몸은 어디에 놓이게 될 것인가? 학교 공간의 규율 체제적 문제를 드러내고 몸의 자율과 공존을 경험하게 될 대안을 민주적으로 논의하지 않고, 삭제해 버린다면 이는 교육의 공공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상황에서 급박하게 비대면 원격 교육을 도입하면서, 당장 제기되었던 차별의 문제는 인터넷 접속과 관련된 기술 접근성이다. 정부는 제한적 수준에서 인터넷 접속 비용을 지원하고 접속을 위한 기기들을 제공하는 것으로 경제적 수준에 따른 교육 격차의 문제를 보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기와 기술을 사용하는 몸 그 자체는 고민되지 않았다. 학생들의 몸이 놓여 있는 공간이 어떠한 곳인지에 대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 학생들의 몸은 삭제되었고, 투명해져서 논의에서 사라졌다.


교육이 몸을 투명하게 내버려 두었을 때, 학교에서 몸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 몸은 어디에 놓이게 될 것인가를 가장 극명하게, 충격적이고 비참하게 보여 준 사례가 있다. 바로 ‘N번방 사건’이다. 우리 교육이 성평등 담론과 페미니즘 교육을 수용하지 못하면서, 가장 약자의 위치에 있는 몸들은 ‘N번방 사건’의 피해자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몸’이 놓이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교육적 책임과 더불어 ‘몸’과 관련된 담론을 둘러싼 교육적 책임을 동시적으로 제기하고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몸을 안전하게 둘 공간도, 몸을 평등하게 이해할 담론도 우리 교육이 제공해 주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가상 현실’이라는 말장난을 넘어서지 못하고, 현실의 일부로서 기술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했을 때, ‘N번방 사건’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비대면 원격 교육이 기술과 속도로 이야기되기 훨씬 이전부터 가상의 공간은 우리 안에 들어와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공간과 몸에 대해서 고민해야만 하는 현실이 닥쳐오기 전에, 갈 곳을 잃은 몸과 몸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학생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에 대한 교육적 책임을 공공적 차원에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 곳을 잃은 몸과 몸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N번방’으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차별과 혐오, 폭력과 위계의 공간으로.


학생의 목소리를 지운 자치

원격 교육을 속도와 기술의 신화로서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과 몸의 의미를 품은 공공의 영역’으로 사고하기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 출발은 분명히 학생들의 목소리이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 상황과 관련된 정책 결정의 과정에서 학생들의 목소리는 철저하게 지워져 있다. 학생들의 욕구와 고민은 ‘학부모’와 ‘교사’에 의해서 ‘대변’되었다고 교육부의 수장이 공식적으로 언명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학생들이 어떠한 실질적 의사 결정권도 갖지 못하는 법과 규정을 교육부는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학교 자치는 ‘연습’과 ‘모의’일 뿐이다. 실제 학교의 운영에서는 어떠한 권한도 경험할 수 없는 학생들의 진짜 위치를 교육부는 애써 보려 하지 않는다.


원격 교육을 도입하며 교육부와 언론들이 앞다투어 조명하던 실시간 수업에 대해 학생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느끼는지 직접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교사들의 목소리도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목소리는 반영되어야 하는 대상 자체로도 인식되지 못했다. ‘N번방 사건’이 전 사회적 이슈로 들끓고 있는 와중에도 ‘왜 여성들은 화상 강의에서 카메라를 끄는가’라는 질문은 학생들의 살아 있는 언어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학생들은 실시간 온라인 수업이 결정되면 어떤 두려움과 문제를 느끼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코로나19 상황과 관련된 긴급한 의사 결정의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은 수렴되지 못했고, 학교 밖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삭제되었다. 이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목소리는 지워져 있다.


집합적 학교교육의 문제점과 학교 공간의 규율성에 대한 해법이, ‘공간 없는 교육’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 원격 교육의 신화로 이 문제를 지울 수 없다. 교육의 공공성은 여전히 공간의 문제를 끌어안고 가야 하고, 학생들의 몸이 민주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 출발은 원격 교육의 신화에 가려진 학생들의 몸과, 몸에 대한 이야기를 살려 내는 것이다. 학생들의 생생한 언어를 경청하고, 그들에게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에서 행사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서 변화는 시작되어야 한다.


먀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며 매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원격 교육의 담론에서 미디어가 주는 메시지를 듣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교육과 미디어가 만났을 때 우리는 이 유명한 문장을 다시 사고해야 한다. 미디어는 메시지이지만 메시지는 미디어일 수 없다. 교육적 메시지는 미디어를 품는 것이어야 한다. 미디어 그 이상이어야 한다. 기술 그 이상이어야 한다. 미디어에, 기술에 교육이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현실 속 교육과 교사의 역할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낯선 용어가 어느 순간 우리의 일상을 당연하게 규정하는 코로나19 시대의 삶. 사회의 ‘거리 두기’를 가능하게 하지만 스스로는 ‘거리 두기’를 할 수 없는 노동과 노동자들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쿠팡맨의 죽음과 해고·실직의 최우선 순위가 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은 많은 10대들의 현재이고 가능성 높은 미래이다.


아르바이트라는 이름으로 10대들이 수행하고 있는 플랫폼 노동의 위험성과 소규모 영업 현장의 불안. 불안정한 노동은 늘어 가고 있는데 노동자는 소멸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 현실에서 보듯이 기술 발전의 장밋빛 전망과 혁신의 달콤한 언어들 속에 현실은 숨겨져 있다. 코로나19는 기술과 혁신에 근본적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배민’과 ‘타다’의 문제는 소상공인과 배달 노동자, 타다 기사와 택시 노동자의 갈등으로 드러났지만 본질은 사회 정책적 보완 없는 ‘혁신’이 가진 허구성이었다. 원격 교육의 기술적 발전 그리고 이에 학교가 빨리 적응하라고 부추기는 것에 휘말리고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적 접근을 하지 못한다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예민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교육적 관점에서의 실천과 현장에서의 대안이 절실하다.


성공적 방역의 최전선에는 의료가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한 의료진들의 열악한 현실은 ‘덕분에’와 ‘전문성’, ‘희생’과 ‘사명’으로 포장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은 예전에도 ‘태움’ 등의 문제로 조금씩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는 가려지고 있을 뿐이다. 등교 개학이 논의되면서 학교가 방역의 또 다른 핵심 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교사들은 방역의 ‘전문가’로 호명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열악한 노동은 어떤 이름으로 포장될 것인가? 교사의 안전한 노동 환경을 확보하고, 교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코로나19 상황에서의 우리의 책임일 것이다.


의료라는 애매한 용어 속에 의사의 의료와 간호사의 노동과 돌봄의 위계화는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도 교육과 돌봄은 위계화되어 있다. 무상 급식 이후 교육의 전환과 재개념화의 실패 혹은 답보는 지식 교육 이외의 영역을 비교육의 영역에 머물게 했다. 이 과정은 노동의 성별 이분법, 가정 내 역할의 성별 구분이 투사된 것이다. 보육과 교육은 어디에서 구별되는가 하는 질문에는 아직 답이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 옆에 와 있는 급식, 돌봄의 문제를 포함한 교육의 재개념화는 우리가 반드시 답해야 할 문제이다. 지식만으로 우리는 살 수 없고,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감수하고 희생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더 이상 주장해서는 안 된다. 구체적 일상과 생활을 돌보고 조직하고 책임지는 것을 포괄하여 교육은 재조직되어야 한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그 2년의 경험은 ‘나는 공교육의 실행자가 아니라 대학의 브로커이구나’라는 자괴감으로 귀결되었다. 졸업 후에 그래도 선생이라고 찾아와 주는 졸업생들에게서 듣게 되는 대학의 현실은 참담할 때가 많다. 여전히 얼차려와 물리적 폭력이 난무하고, 성차별과 성희롱이 일상화되어 있고, 취업을 무기로 학생들을 부당한 권력관계 속으로 밀어 넣는 이야기들을 들으면 죄책감이 밀려든다. 아르바이트, 학자금 대출 상환, 학점의 압박을 모두 감당하느라 무너진 마음과 몸들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하나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에 학급과 학교, 자신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반짝이던 시간들을 함께 이야기하며 서로 용기를 돋운다. 학교에서 민주적 의사 결정의 주체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 보고, 실제 자신의 삶과 현재를 바꾸어 본 경험. 그것을 자양분 삼아 우리가 함께 세상을 살아갈 방향을 고민하는것. 거기에서 부끄럽지 않게 졸업생들을 만나고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눈을 맞출 수 있는 작은 자신감을 조금씩 찾아 간다.


교사로서의 나의 노동이 사회 구조와 교육의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교육의 현실을 직시하고 교육 노동자로서 주체가 되도록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 그 노력이 불러올 미래,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어느 영화에서 보여 주는 것과 같이 ‘액체 속에 누워 있는 다수 대중의 몸’을 에너지원으로 하는 공간 속에서 일부 전문가의 몸만 무한 자유를 구가하는 사회는 아닐 것이다. 공교육이 할 일은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지난함을 이해하는 시간을 주는 것이고, 역할의 차이가 권력의 차이를 생성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도록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 경험을 할 공간과 기회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 그것이 교사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있다. 배움은 계속된다.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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