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호[연중 기획] ‘구글리피케이션’ (채효정)

연중 기획 - ‘공(公)’을 다시 묻다


‘구글리피케이션’

 - 온라인 교육 시장이 공유지를 약탈하는 방법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뉴올리언즈의 학교는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었다. 비극이라 하겠다. (……) 그러나 한편으로 교육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꿀 기회이기도 하다.

- 나오미 클라인, 김소희 옮김(2008), 《쇼크 독트린》, 15쪽


신자유주의교의 충실한 사도였던 밀턴 프리드먼이 2005년 허리 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지역을 돌아보고 나서 했던 말이다. 프리드먼은 공립 학교 시스템을 복구하지 말고, 영리형 사립 학교에서 사용할수 있는 바우처를 재해민 가족에게 제공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이것이 일시적 조치가 아니라 영구적 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익 씽크 탱크는 이 저명한 경제학자의 제안을 수해 도시 복구 계획에 포함시켰다.


부시 정부는 이 ‘민간 의견’을 수용하여 뉴올리언스의 공립 학교를 차터 스쿨로 전환하는 데 수천만 달러의 비용을 책정하고 지원했다. 홍수로 무너진 제방을 수리하고 주택과 전기 시설을 복구하는 과정은 아주 느렸다. 정반대로 학교 시스템 개혁은 일사천리로 신속하게 진행되어 공립 학교 시스템 대부분이 민간이 운영하는 차터 스쿨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카트리나 이전에 123개였던 공립 학교는 4개로 줄었고 뉴올 리언스 지역의 막강한 교사 노조는 와해되었으며 노조원 4,700여 명이 해고되었다. 기존 교사들 중 ‘유능한’ 교사 ‘일부’는 더 높은 임금으로 차터 스쿨에 채용되었으나 대부분 더 열악한 조건으로 강등되거나, 실직했다. 이를 두고 당시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는 “루이지애나의 교육 개혁가들이 수년 동안 못 했던 것을 카트리나가 단 하루 만에 해냈다”라고 말했다.


나오미 클라인의 책, 《쇼크 독트린》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5년 전의 ‘재난 자본주의’가 팬데믹이 덮친 지금 여기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이 벌어진 후 자본이 공공 부문에 치밀한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것을 ‘재난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미국에선 2001년 9.11 테러 이후, 한국에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시민들이 충격에 휩싸여 있는 동안 공공 부문에 대한 자본의 약탈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임시적 조치라며 도입된 정책과 제도들은 재난 이후에도 영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쇼크 상태에서 수립된 정책doctrine을 ‘쇼크 독트린’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것은 쇼크 상태에서만 도입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9.11 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도입된 ‘애국자법’이나 한국에서 외환 위기 이후 도입된 노동 시장 유연화 정책 및 비정규직 제도는 대표적인 쇼크 독트린이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는 스탠퍼드 출신의 기획재정부 고위 관료가 “이번 기회에 싹 갈아엎어 버리고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낫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나 지금이나 관료의 책상 위에는 ‘갈아엎어지는’ 수많은 이들의 삶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지금은 ‘뉴 노멀’ 같은 단어가 그런 제로베이스를 상징한다. 온라인 교육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이 될까? 강제로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지금 상황은 교육 시스템을 갈아엎을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일까?



교육을 갈아엎을 자본의 절호의 기회


세계적인 대재난을 큰돈을 벌 기회로 삼는 기업도 있다.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아마존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6% 증가했고, 코로나19 국면 속에 아마존 주가가 30% 이상 오르면서 CEO인 제프 베조스의 자산도 249억 달러, 약 30조 원 증가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속에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상승세를 보이는 ‘언택트untact 수혜주’는 유통 업체만이 아니다. 온라인 교육 시장은 코로나19가 쓸어 버린 폐허의 교실을 접수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팬데믹으로 재택근무와 인터넷 강의가 확산되면서 온라인 회의 및 강의 환경을 제공하는 플랫폼인 ‘줌’은 이용자 수가 크게 늘었다. 줌 이용자는 작년 말 1천만 명에서 올해 3월엔 2억 명으로 무려 20배나 급증했다. 주가도 2배로 뛰었고 설립자인 에릭 위안의 재산도 팬데믹 이후 25억 8천만 달러, 약 3조 원 이상 늘어났다. 미국과 이탈리아를 석권한 구글 클래스룸도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이용 학생 수가 5천만 명에서 1억여 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국내에서도 교육과 기술을 융합한 ‘에듀테크’ 산업이 주식 시장에서 급반등했다. 관련 기업들은 쾌재를 불렀다. 재난 극복 프로젝트로 한국형 뉴딜 정책과 포스트 코로나 담론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원격 강의와 비대면 화상 수업이 임시 조치가 아니라 코로나19 이후의 미래형 교육 모델로 부상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5월 10일 내놓은 〈에듀테크 시장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에듀테크 시장 규모는 2018년 1천 530억 달러에서 2025년 3천 420억 달러로 2배 이상 확대될 것으로 예측한다. 가상 현실, 증강 현실, 인공 지능, 빅 데이터 등 정보 기술IT과 교육 서비스를 융합해서 새로운 학습 경험 상품을 공급하는 신산업 분야인 에듀테크 시장 규모는 2018년 이미 약 3조 8천억 원대였는데, 코로나 19 사태로 비대면 원격 강의 수요가 늘면서 5조 원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 에듀테크 관련 기업들은 교육을 산업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에 대응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미래를 위한 정부 투자’가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나온다. 교육을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도 기꺼이 맞장구를 친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는 약 4000억 달러인데 교육 산업의 시장 규모는 약 5조 9000억 달러라며, 바이오, 전기 자동차, IT만이 아니라 교육 산업도 차세대 성장 동력 산업으로 국가적 지원을 통해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교육 산업은 ‘4차 산업 혁명’의 주축인 문화 경제의 대표 산업이기도 하다. 에듀테크 산업계는 ‘한국형 에듀테크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 정부와 논의에 들어갔다. 구체적으로는 1학기 초·중·고 원격 수업에 활용한 〈EBS〉 온라인 클래스와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e학습터를 민간 통합 학습 플랫폼으로 대체하고, 플랫폼 사업자가 경쟁을 통해 학교에 납품 공급을 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국내 교육 기업들이 수년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코로나19가 단번에 해내고 있는 셈이다. 외환 위기 때는 기업과 은행이 글로벌 자본의 주요 침략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학교’가 자본이 노리는 최고의 약탈지다.


최근에 전에 일하던 대학으로부터, ‘코로나19가 어차피 해야 할 미래 교육을 빨리 준비해서 앞당기도록 일종의 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면서 우리 대학은 이미 예전부터 ‘온라인 수업 환경’을 착실히 준비해 왔다고 홍보하는 뉴스 메일을 받았다. 그 이메일은 대학 강의가 준비 없이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면서 수업의 질이 떨어지고 학교 시설도 사용할 수 없어 수업권과 학습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학생들의 항의와 ‘등록금 반환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마치 딴 나라의 이야기인 것처럼, 온라인 강의를 ‘미래 교육’으로 둔갑시키고 있었다.


대학에서 지난 몇 년 사이에 급속히 늘어난 온라인 강의 비율은 미래 교육을 위한 대학의 준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업화된 대학이 수익을 최대화하고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구조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대학들은 강사들의 대량 해고를 하면서, 그만큼 정규직 교수의 초과 강의 노동 시간을 늘리고, 대형 강의 수와 온라인 강의 수를 늘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교육을 경영으로 대체하는 이러한 구조 조정의 결과 수업의 질과 노동의 질은 동시에 하락되고 구성원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 갔다.


최근에는 더 이상 교수의 노동 시간도, 강의 수도 압박할 수없을 만큼 포화될 대로 포화된 상태에 이르렀다. 대학이 수익을 계속 늘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온라인 강의 확대’뿐이다. 하지만 방송통신대와 사이버대학 같은 원격 통신 대학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반 대학이 온라인 강의 수를 일정 비율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은 학내외 여론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포스트 코로나 담론이 시작되고 비상 조치로 도입되었던 비대면 원격 강의가 ‘포스트 교육’ 모델로 제시되면서 그동안의 진입 장벽이 조금씩 무력화되는 추세다. 하지만 이런 논의 속에 학생과 교수들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다. 또한 지금까지 온라인 수업의 양적 확대와 달리, ‘에듀테크 기업’과의 공동 교과 개발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질적 변화를 수반할 것이다.


나는 지금 대학이 선도적으로 도입하려고 하는 플랫폼 대학 모델과 시장 융합형 교육 거버넌스가 초·중·고 현장에 도입되는 것이 시간 문제라고 생각한다. 몇 해 전 유행했던 〈근대 학교 제도를 재판합니다〉라는 동영상에서, 미국의 시장주의 교육 개혁론자들이 담았던 마지막 메시지, ‘학교가 하기 어렵다면 이제 스타트업이 해도 되지 않을까요?’라는 그 은밀한 유혹이 이제 노골적인 압박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때부터 시도되었던 “대학은 미네르바 스쿨처럼, 초·중등교육은 알트 스쿨처럼” 가자는 플랫폼 학교로의 전환 기획은 포스트 코로나 담론 속에서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에듀테크 기업들은 교사들을 ‘동반 파트너’로 추켜 세우며 교사학습공동체와 프로그램 개발자의 협업을 강조하고, 교사의 디지털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을 정부에 요청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교사를 걱정하고, 교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우대하는 듯이 보이는 이 유혹 전략 속에 숨은 의도는, 실은 학생 교육뿐만 아니라 교사 교육까지도 영리기업이 담당하겠다는 뜻이다. 교사를 지원하라는 건, 그들을 교육하는 기업을 지원하라는 말이다.



구글은 어떻게 학교를 점령했는가


플랫폼 기업이 어떻게 학교를 점령하는지 구글을 모델로 살펴보기로 하자. 기존 교육과정에 보완적 요소로 도입된 스마트 교육 기기가 원래의 오프라인 교육 시스템을 무력화하면서 온라인 체제를 현실에서도 연장하고 지배하는 것을 젠트리피케이션에 빗대 “구글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른다. 기술이 현실의 연장이 아니라 현실이 기술의 연장이 되는 것, 결국 구글 속에서 모든 학습이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사용할 때 그것이 강의의 보조적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PPT에서 시작해서 PPT로 끝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마크 저커버그의 투자로 유명한 알트 스쿨은 ‘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글의 엔지니어 출신 막스 벤틸라가 개발한 프로그램이자 동시에 그 프로그램을 활용한 ‘사업장’이다. 


벤틸라는 원래 알트 스쿨을 공립 학교와 사립 학교에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실험용 플랫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알트 스쿨 네트워크를 프랜차이즈로 만들어 운영하려던 것이 원래 그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익률이 떨어지자 벤틸라는 2016년 직접 학교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프랜차이즈로 보급하는 모델을 폐기하고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개발해 ‘파트너 학교’에 판매 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벤틸라는 맞춤형 학습 프로그램이 정착되면 소비자인 학교와 정부는 기꺼이 높은 가격을 지불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교육 벤처 사업가는 프로그램의 개선을 위해서는 데이터의 축적과 피드백이 필요한데 학교 현장에서 수집되는 데이터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플랫폼의 성능은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그는 알트 스쿨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축된 소프트웨어를 1인당 수백 달러를 받고 파트너 학교에 판매했다. 


미네르바 스쿨도 이런 방식의 기술 창업과 투자 수익 모델에 기초한 영리 학교다. 이런 학교인데도, 박근혜 정부 시절 〈EBS〉와 〈KBS〉 등을 통해 소개된 알트 스쿨이나 미네르바 스쿨은 이상적인 미래 학교의 전형처럼 묘사되었다. 왜 기업은 학교를 이런 식으로 혁신하려고 하는 것일까? 


첫 번째 대답은 플랫폼 학교는 플랫폼 자본주의를, 디지털 교육은 디지털 자본주의를 위한 맞춤형 재생산 기관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학교가 공장 시스템에 적합한 공장 노동자를 생산하는 장소였듯이,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학교는 플랫폼 산업에 적합한 개별 맞춤형 자유 노동자free worker를 생산하는 데 최적화된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교육학자들은 이런 사회 경제적 변동을 제대로 고려하여 교육 모델을 설계하지 않는 것 같다. 미래학자들이 그리는 미래 교실의 모습은 그야말로 기술 유토피아적 이상으로 채색된 꿈 같은 이야기로 가득하다. 교육에 열의가 넘치는 교사들일수록 ‘어떻게 재밌게 가르칠까?’를 고민하고 효과적인 교육 방법을 찾고자 노력한다. 선의와 열의에서 나온 시도라 해도, 자신이 사용하는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무서운 기술 통제와 연결되어 있고 정교한 감시 체제를 구축하는 데 쓰이는지를 함께 통찰하지 못한다면, 그 의도와 무관하게 반교육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으며, 교실 밖의 사회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과 연결되고 그 속에 놓여진다. 시장은 교실 안으로 생각보다 깊숙이 침투해 있다.


구글은 어떻게 교실을 점령할 수 있었을까. 내가 대학에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교직원 메일 시스템이 구글의 지메일Gmail 로 변경되었다. 새로 구글 계정을 만들어서 데이터 이전 신청을 해야 했다. 오래된 메일은 개인적으로 백업을 받아야 했다. 학교 홈페이지도 크롬 기반으로 재구축했다. 대학 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도 완전히 바뀌었다. 꽤 번거로운 과정이었고, 새로운 체제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다. 멀쩡한 걸 왜 바꾸는 걸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다른 기사를 읽다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학교에 대한 구글의 공격적 마케팅 전략을 알고 나서다.


2017년 5월 13일 자 〈뉴욕 타임즈〉에는 “구글은 어떻게 교실을 점령할 수 있었을까?”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구글은 교실에 구글 제품을 투입하기 위해 수년에 걸쳐 각고의 노력을 해 왔다. 주요 마케팅 기법은 교사와 학교 관리자들이 구글 제품을 먼저 사용하도록 만들어 활용 모델, 비용 절감, 관리 생산성 향상 등 성공 사례를 만든 후에, 그 성과를 다른 학교에 소개하고 확산시키는 방식이었다. 학교로 들어오는 사기업에 대한 정부 관료나 학부모들의 경계심과 저항을 우회하기 위해 교사들이 먼저 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아래로부터 교육 당국에 혁신 제품 도입을 요구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를 위해 구글은 먼저 교사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교수-학습 모형을 개발했다. 나아가 ‘구글 교육자 그룹’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개설하고, 여기서 사용자들이 서로 교육적 활용 아이디어를 교환할 수 있게 했다. 교사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인증서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구글은 학교라는 안정적 시장을 개척했고, 미국 내 과반수 이상의 초·중등 학생들이, 특히 3천만 명의 초등학생들이 지메일, 구글 문서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이 작업이 처음부터 초·중·고를 대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은 대학에서였다. 2006년 구글은 아리조나 주립대학을 시작으로 대학의 메일 서비스를 지메일과 문서 도구 패키지로 교체하도록 설득했고 그 결과 학기당 65,000명의 대학생들이 구글 서비스를 활용하게 되었다. 대학 비즈니스가 성공하자, 구글은 이 마케팅을 초·중등 공립 학교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구글이 교육 영역에서 기대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당연히 교육적 가치를 우선하는 것은 아니다. 구글 클래스룸은 무료 LMSLearning Management System이다. 단, 이 무료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구글 계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구글 운영 체제를 사용하게 만드는 것은 미래의 잠재적 고객 유치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다. 하지만 영원히 무료일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아니 정말 무료이기는 할까? 


2012년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시카고 교육구는 공립 학교들에서 구글 플랫폼을 채택하기로 결정한다. 2012년 1% 미만의 점유율로 시작한 크롬북은 2016년에는 미국 초·중등 학교 모바일 디바이스의 58%를 점유하고, 디바이스당 30달러의 유지 보수 비용을 받고 있다. 시카고 공립 학교는 134,000개의 크롬북을 유지 보수하기 위해 매년 33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지출한다.


학교에 프로그램으로 공급하기 때문에 개인이 각자 돈을 내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세금을 경유해서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부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사용자의 ‘정보 가치’다. 구글은 처음 마케팅을 시작할 때 교육용 앱을 활용하여 대학 관리자들이 학생들의 진학·진로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에 주력했다. 구글은 사용자들이 서비스를 활용하면서 남긴 기록 데이터를 통해서 광고 정확도를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이를 통해 온라인 광고로부터 수익을 창출한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용자의 축적된 데이터다.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타겟 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구글이 학교에서 수집한 학생들의 온라인 활동 기록을 영리적 목적의 데이터로 가공하거나 사용하지 않을까? 시민사회단체들은 무엇을 수집하고 왜 수집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구글에 의구심을 제기하지만 구글은 공개하지 않는다. 구글이 취득한 데이터는 구글의 사유 재산으로 시민적 통제권의 영역 밖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보들은 해킹이나 도용의 위험으로부터 전혀 안전하지 않다.


2018년에는 페이스북 해킹으로 5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계정 정보가 유출되었다. 최근 원격 수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화상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인 줌도 보안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커들은 원격 수업에 잠입하여 음란물을 틀거나 이용자의 데이터를 빼내기도 한다. 미국 국토안보부는 정부 기관들에 보낸 메시지에서 줌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뉴욕주도 온라인 학습에서 줌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줌이 아니면 다른 플랫폼은 괜찮을까? 경쟁사들도 상황은 마찬 가지다.



평등한가, 민주적인가, 공공적인가


온라인 개학 초기 디지털 격차가 이슈로 대두되었다. 온라인 수업을 들으려면 컴퓨터나 태블릿 PC, 스마트폰 같은 온라인 기기가 필요한데, 모든 학생들이 그런 기기를 다 갖추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이는 교육 불평등을 초래할 요인으로 지적되었고 교육부는 스마트 기기 33만 대를 확보하여 기기가 없는 학생들에게 대여 또는 지급했다. 기기 부족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과연 교육 불평등은 해소되었을까? 똑같은 노트 북을 가졌다고 해서 똑같은 교육 환경을 가지는 건 아니다. 똑같은 노트북이 다른 공간과 환경 속에 놓이기 때문이다.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개중에는 집보다 학교가 더 편하고 안전한 학생도 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학교라는 공간이 봉쇄되었을 때 다른 대체 공간이 없는 경우를, 노트북 공급보다 먼저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국에서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가면서도 학교는 부분 개방을 했다고 한다. 부모가 코로나19 방역에 필수적인 노동자인 경우, 재택근무나 자가 격리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경우에 자식들에 대한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교사도 필수 노동자로 분류되기 때문에 교사 자식도 여기에 포함된다. 초기 감염 방역에는 실패했지만 아이들에겐 ‘대피소’로서의 학교도 필요하다는 점은 놓치지 않았던 셈이다. 


한편으로는 영국에선 IT 강국 한국처럼 기기를 무상으로 제공하면서까지 전국적으로 온라인 수업 대체 같은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도 전국적 온라인 수업이라는 선택지가 없었으면 어땠을까? 다른 상상력이 생길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마 이렇게 획일적인 온라인 수업이 아니라, 지역마다, 학교마다, 교사와 학생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대체 수업 모델이 나오지 않았을까?


코로나19 휴업 기간 동안 학교에 가지 않는 우리 집 청소년과 나는 집에서 함께 지냈다. 청소년은 컴퓨터 앞에서 인강을 듣다가 또는 숙제로 내 준 문제를 풀다가 종종 옆에 있는 나에게 툭툭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영어 단어나 어려운 한국어 낱말 뜻에서부터 인물이나 책에 대한 것까지 수시로 질문을 했다. 무심결에 “그건 그거지” 하고 답을 해 주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말했다. “너, 너무 엄마 찬스 쓴다.” 이런 답이 돌아온다. “그럼 어떡해. 학교면 선생님한테 물어볼 텐데, 여긴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 엄마밖에.” 그 말도 맞다. 그런데 누구나 대답해 줄 엄마가 집에 있는 건 아니다. 학교에선 어떨까. 모른다고 다 손 들고 묻진 않는다고 했다. “대신 뭔가 애들이 뚱한 표정으로 멍 때리면 샘이 알아서 다시 한 번 설명해 주거나 확인을 하지.” 그때 나는 교사들도 바로 그런 점이 답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체의 현존’은 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한 조건일까. 타자의 신체에 우리는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것일까. 미래의 스마트 교육에는 그런 고민이 쉽게 누락된다.


몸과 몸의 대면과 접촉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신체의 언어가 생산되지 않으며, 신체적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인터넷 강의나 온라인 수업이 낯설어 처음에는 흥미를 보이던 아이들은 며칠 못 가 금방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고3 등교 결정이 내려졌을 때, 부모들은 반대하며 걱정한 반면 의외로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 교사 한 분이 “다시 돌려보내더라도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봤을 때, 학교라는 공간에는 내가 논리적으로 판단하는 것 이상의 다른 공공성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공공성이란 학교 교육과정의 공식성이나 공통의 교육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했던 ‘감각적 공통성’에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 감각의 공통 형식이라면,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이라는 조건은 기억과 경험의 공통 감각의 조건이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을 함께 체험한다는 것은 감각적 공유의 기초 아닌가? 감각의 공유지가 없이 커먼즈와 커머닝을 홀로 어디서 어떻게 배울 수 있단 말인가. 물론 학교는 공통성commons을 억압한다. 평등하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감각의 분할은 분할을 드러내고 지각하는 감각이기도 하다. 그것은 공간의 불평등함까지도 현시하며 드러내고, 새로운 분할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교사들과 교육 전문가들은 대자본에 의해 식민지화되는 교실 안에서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만 여전히 갇혀 있다. 거꾸로교실, 자기 주도 학습, 코칭 교육, 피어 러닝 등 온라인 학습과 연동된 학습 모형을 교육학적 방법론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을 포스트 코로나 담론과 연결하여 미래 교육 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교사 자신에게도 통제 시스템이 될 ‘빅 브라더 스쿨’의 도래를 자기 손으로 앞당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알트 스쿨이나 미네르바 스쿨의 교수자들처럼 교사는 기술적 통제 속에서 점점 데이터 입력자, 프로그램 관리자로 변해 가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미래 교육이라고 하면 응당 이런 스마트 기기를 사용한 온라인 교육이라고 상상하는 것일까? 미래가 비대면 사회가 되고 플랫폼이 뉴 노멀이 되면 교육도 그에 맞춰 가는 플랫폼 학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반대로 사회가 그렇게 갈수록 교육은 더 관계 중심의 연결과 접촉에 집중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교실의 구글화googlification of the classroom’는 칠판과 책상과 두꺼운 교과서와 노트로 이루어진 교실을 1세기 전과 똑같은 모습의 교실이라고 비난하며, 시대가 바뀌었으니 교실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교육 혁신주의자들이 실제로 바꾸고 싶었던 목표일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어쩌면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그 변화를 더 촉진하고 가속화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정신 차리고 재난 속에 속전속결로 추진되는 교육 개악을 막아야겠다. 하지만 “교육 시스템을 바꿀 절호의 기회”는 자본의 것이기도 하지만, 민중의 것이기도 하다. 이 절호의 기회를 우리가 잡아 볼 수는 없을까? 코로나19로 인해 지금까지 사회 곳곳의 모순이 드러났듯이, 교육의 모순도 폭로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의 대전환을 위한 기회이고, 교육 혁명의 기회이기도 하다. 속수무책으로 ‘구글리피케이션’ 당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의 약탈로부터 학교라는 공유지를 지켜 내고, 억압의 장소를 해방의 장소로 전환하는 교육적 실천으로 ‘다른 경로’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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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