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호[특집] 학교는 어떻게 시장이 되는가 (채효정)

특집/  “교육을 팝니다”


학교는 어떻게 시장이 되는가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

measophia@naver.com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고 강사이며,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이다.



“학교는 변해야 한다”

〈근대 학교 제도를 재판합니다〉라는 유튜브 동영상이 있다.제목 그대로 이 동영상은 근대 학교를 고발한다. 학교를 재판정에 세우는 사람은 한 혁신가이다. 비장한 배경 음악이 근대식 학교의 종말을 알리는 조곡처럼 울려 퍼진다. 배심원단 앞에 선 그의 목소리는 열정과 확신에 가득 차 있다. 그의 기소 요지는 다음과 같다.


➊ www.youtube.com/watch?v=515TnRSD4DI



배심원단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근대 학교 제도를 재판합니다. 학교는 물고기를 나무를 타고 오르도록 만들 뿐 아니라 나무를 타고 내려오게도 만들고 단축 마라톤도 달리게 만듭니다. 그게 자랑스럽습니까? 수백만의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들어 놓고 그게 재미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물고기 같은지 아십니까? 교실을 거슬러 헤엄쳐 가며 자신의 재능은 발견하지도 못한 채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쓸모없다고 여기게 됩니다. 저는 학교를 법정에 세워 기소합니다. 창의성을 죽이고 개성을 죽였으며 지적으로 학대해 왔습니다. 학교는 오래전 세워진 기관이며 이제 시대에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현대의 전화기와 150년 전의 전화기, 현대의 자동차와 150년 전의 자동차를 차례로 비교하며 보여 준 후에, 현대의 교실과 150년 전의 교실을 보여 준다. 배심원석에서는 충격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벨의 나무통 전화기가 스마트폰으로 발전할 동안 우리의 교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학교는 미래를 준비하는 곳인가요, 과거를 준비하는 곳인가요?” 그가 소리친다. 세상은 계속 바뀌고 있는데도 교육은 그대로다. 우리는 동영상의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래, 이제 바뀌어야 한다. 창의적으로, 혁신적으로.”


학교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처방은 무엇일까. 동영상 속의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학생들을 똑같이 취급하는가. 의사가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약만 처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학교는 서로 다른 아이들에게 똑같은 것만 가르친다. 표준화 과정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의 처방은 이것이다. 개인별 맞춤형 교육. “의료도 자동차도 페이스북 페이지도 모두 개인에게 맞춰진다면 교육 역시 그렇게 개인에게 맞춰져야 한다!”


이 동영상은 하태욱 건신대 교수가 번역을 했다. 대안교육운동의 이념과 사례들을 소개하며 교육의 대안을 모색해 온 분이다. 아마 영상을 올린 주 동기도 근대 학교 제도에 대한 비판에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많은 교사, 학부모, 교육운동 주체들이 이 영상을 공유하고 공감을 표했다. 나 역시 이 영상을 처음 볼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런데 뒷부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여러 번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진단에는 공감하지만, 처방에는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걸. “교육은 ‘개인’에게 맞춰져야 한다”는 그 대안에 찬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획일화, 표준화 교육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안교육운동도 실은 거기서 시작되었던 것 아닌가.


그러나 지난 20년을 돌이켜 볼 때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진보운동 진영에서만 나오지는 않았다.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혁 또한 역시 획일화와 표준화를 비판하고 수월성과 다양성을 내세웠다. 그건 영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민영화와 시장화의 논리는 공교육 체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며 자율화와 자유화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교육이 사교육을 따라잡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냈다. 우리는 처음 학교를 침범했던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개인의 자유’를 내세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양한 학생들이 다양한 학교를 선택할 자유를 인정하라는 그 요구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학교에 가고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학교에 다니도록 해 달라는 반민주주의적 요구를 ‘선택의 자유’로 왜곡한 것이었고, 그들이 말한 ‘학생 선택권’이란 시장에서의 선택의 자유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자유의 물결이 처음 밀려왔을 때는 많은 진보적 교육운동 단체들은 함께 연대해서 싸우지 않았던가. ‘고교 평준화’를 해체하는 ‘고교 자율화’에 맞서 싸웠고, ‘교원 평가제’ 도입에 맞서 싸웠다. 그런데 다시 그 신자유주의의 이념은 ‘교육 혁신’이란 이름으로 돌아왔다. 교원 평가제는 성과급제로 더욱 악화되었고, 교사(teacher)의 역할은 코치(coach)로 축소되고 학교 선택권은 더욱 정교한 개인별 선택권으로 진화하여 개인 맞춤형 교육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학습자 중심, 수요자 중심의 교육으로 가야 한다는 이 주장에 대해선 그때처럼 비판하거나 저항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시장주의적 혁신론인데, 지금 나오는 각종 교육 혁신론은 대안교육이나 진보적 교육 이념과 분명히 구분이 되지 않거나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는 저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학교는 변했다. 한 사람의 교사를 향해 학생들이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들고 발표하는 똑같은 모습의 교실을 보여 주었지만, 지금의 교실에는 150년 전의 교사처럼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명령하는 교실의 통치자는 없다. 그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스마트카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교사의 말보다 SNS를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가 더 많다. 학생도 교사도 학부모도 모두 변했다. 교육 방법도 변했다. 외형적인 모습만 보여 주며 “학교가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위기감과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면 ‘변화’가 곧 최선이 된다. 더 늦기 전에 변해야 하는 이유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변해야 한다는 것은 혁신의 요구다. 그러나 ‘변해야 한다’가 당위가 될 때, 모든 혁신의 전략은 정당화되고, 그 전략 속에는 자본 주도의 혁신도 함께 있다. 거기에는 학교를 시장 체제로 포섭하는 것도, 공교육이라는 공공 부문을 시장에 개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변해야 한다’에 매몰되지 말고,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를 다시 물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누가 왜 학교의 변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가


경제 체제와 교육 체제는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작용한다. 근대 학교교육은 공장식 대량 생산 체제라는 근대 산업 체제에 대응한 교육 체제다. 회사든 공장이든 고용 노동자들은 함께 모여 일하며 시간의 통제도 함께 받는 것이 근대식 시스템이다. 9시 출근, 12시 점심, 6시 퇴근이라는 시간표나 50분의 노동과 10분의 휴식 같은 동일한 일과 리듬은 생산의 리듬, 노동의 리듬이며 이 공장의 시간은 정확히 학교의 시간에 새겨져 있다. 똑같은 공정은 대다수 시민들의 비슷한 일상을 만들어 내고, 미래에 노동자가 될 학생들 역시 비슷한 교육과정 안에서 산업 사회의 신체 리듬을 집단적 사회화의 감각으로 몸에 새겨야 했다. 


근대 산업 사회에서의 사회화란, 집단적 생활, 호봉제로 대표되는 근무 기간에 따른 숙련의 인정과 권위 부여, 한 장소에서 같이 모여서 일하는 것, 동료 의식, 회사 식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유사 가족적 공동체로서의 직원 소속감 같은 자본주의적 공동체 의식과 감성을 개인들의 내면과 일상에 내재화하는 과정이었다. 학교는 그런 감각을 체질화하는 교육과정이기도 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노동자들을 같이 모아 놓고 일을 하도록 하는 방식이 비용 면에서나 통제 관리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효율적이고 편리한 점이 많았다. 그러니 틀에 가두어 놓고 틀에 갇힌 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으로 길러 낸 것이다. ‘국가 교육’은 ‘국민’을 양성하는 교육이었고, 이 국민이란 존재에 대한 일차적 요구는 ‘산업 역군’이었다. 그 과정은 막스 베버가 면밀하게 고찰했듯이 근대 이전의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재편하고 향토에 뿌리박은 풀뿌리 민중을 캐내어 도시의 질서 속에 ‘폭력적으로’ 이식시키는 과정이었다.


이제 자본의 혁신가들은 그렇게 사회 집단으로 구성되었던 노동자, 민중, 국민, 국가 같은 개념과 실체들을 다시 해체하라고 한다. ‘포스트 모던’이란 이름으로 시작된 그 기획은 이제 ‘미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적응할 새로운 사회 주체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혁신하는 자본주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간을 내놓을 것을,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창조를 학교에 명령한다. 그게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미래 교육’이고, ‘미래 교육’이 찍어 내야 할 미래의 인간은 혁신적 인간이며 창의적 인간이다. 근대 학교교육은 혁신을 요구받는다. 학생들을 똑같은 모습이 아니라 각자 다른 모습으로, ‘오직 개인’으로 사회에 내놓으라고. 물론 인간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지금 창의 교육, 미래 교육은 인간의 유일무이함과 존재의 고유함이란 ‘전제’를 ‘달라야 한다’는 목표이자 과제로 만든다는 것이 문제다. 자본은 왜 그토록 ‘다른 인간’을 요구하는가?


자본주의 체제에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전후의 짧은 서구 산업 사회의 호황기가 끝난 후 소위 ‘굴뚝 산업’이라 불리는 대규모 공장 생산 체제에 기반한 경제로는 더 이상 성장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고 자본은 다른 출구를 찾아야 했다. 서구 사회는 1970년대 이후에 해외의 저임금 국가로 공장 생산 기지를 이전하고 세계적 자유 무역 체제를 구축하면서 위기를 봉합하거나 유보시켜 왔다. 후발 산업 국가들에게 제조업 경쟁력에서 점점 추월당하기 시작하자 1990년대 이후에는 지식, 정보, 문화, 금융 산업에서 고부가 가치 상품 시장을 개척하고 선점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이 공장 없는 산업이라 불리는 비물질 자본주의 경제의 파생 상품 말고는 이윤을 뽑아 낼 곳이 없어졌다.


가치의 부당한 책정이 이루어진 것은 이 시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조립했다고 적힌 아이폰의 가치가 생산 과정보다 ‘디자인’에서 더 많이 나온다고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예전에 표시된 ‘메이드 인’은, 그 물건의 생산 과정에서 제작과 노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누가 디자인했는가를 명시한다는 것, 그리고 제조라는 용어가 조립이란 용어로 대체된 것은 반대로 그 상품의 가치의 원천이 고안자(designer), 즉 아이디어의 소유자에게 있고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가치에서 더 큰 비중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치의 원천은 (육체적) 노동에서 (정신적) 창조로 이동하고, 후자에게 더 큰 몫이 주어진다. 실물 기반이 없으면 어떤 창의성도 구현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당한 가치 책정은 문화과학과 사회과학의 여러 이론적 뒷받침을 통해서 합리화되고 받아들여졌다. 존재하는 것의 가치가 창조적 생각에서 나오는 시대, 그리고 그 창조하는 존재(ens creatus)가 인간이 된 시대, 즉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시대가 되었다. ‘태초에 말씀(생각)이 있었다(en archē, ēn o logos)’의 주어가 이제 신(deus)에서 인간(homo)으로 바뀐 것이다.


➋ 아이폰의 뒷면에는 캘리포니아 애플에서 디자인하고 중국에서 조립된(Designed by Apple California, Assembled in China) 상품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다시 거꾸로 찬미되기 시작했다. 창조하는 정신과 함께 정주보다 이주, 정착보다 이동, 단단한 관계보다 유연하고 느슨한 관계를 찬미하는 시대가 도래했고, 노마디즘, 해체, 유동성, 융복합 같은 개념들이 새로운 시대정신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정신적 구조의 변화는 물질적 구조의 변화와 상호적으로 작용했다. 노동의 성격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노동은 해체되고, 분절되고, 파편화되고, 유연화되었으며, 융복합되었다. ‘노동’은 가치의 원천에서 가치의 마이너스 비용으로 바뀌었다. 이런 관점과 해석의 변화를 우리는 후기 근대 사회의 혁신이라고 불렀다. 혁신의 선구자는 누구였을까? 자본이었다. 자본은 ‘기업 혁신’, ‘경영 혁신’이란 이름으로, 안정이 아니라 모험을, 경영이 아니라 창업을, 생산이 아니라 투자를 추구하며 공격적 자본주의의 새판을 짜 나가기 시작했다. 혁신은 사회 도처로 전파되었지만 모두 동일한 혁신은 아니었다. 이 시기 자본은 혁신을 했고, 노동과 사회는 혁신을 당했다.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던 그 시대에, 우파와 좌파 정권이 함께 공유한 ‘혁신’의 신(新)이란 신자유주의의 신(新)과 내용적으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정치와 경제가 함께 공유하며 통용된 ‘혁신’이란 단어는 곧 ‘혁신 자본주의’라 불러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학교를 혁신하라는 시장의 요구는 이런 배경에서 등장했다. 시장주의적 혁신은 플랫폼 경제에 대응하는 플랫폼 학교를, 노동 유연화에 대응하는 유연한 노동자를 공급해 줄 학교를 요구한다. 미래의 산업과 노동 시장은 과거와 같이 조직이나 집단으로 함께 일하는 형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개인’ 단위로 파편화되고 고립되는 시장이다. ‘노동 유연화’나 ‘자유 노동자’라는 말이 얼마나 기만적인 용어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시장 유연성에 대응하는 유연한 학교와 자유 노동에 대응하는 자유 교육의 이념이 지금 학교와 교육을 시장의 혁신에 맞춰 재구조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지금 미래 학교의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학교들은 공통적으로 유연성과 유동성, 그리고 개인 맞춤형을 특징으로 한다. 유연한 학사 제도, 캠퍼스 없는 대학, 교실 없는 학교, 칠판 없는 교실, 심지어 교사 없는 수업까지. 개인들은 어디든 되고 아무 곳도 아닐 수 있는 공간에 모였다 흩어진다.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 ‘기술 혁신’이다. 이 지역성도 장소성도 역사성도 없는 교육이 ‘노마디즘’으로 찬양된다. 마을의 구심이자 삶터와 일체화되었던 학교는 점점 더 지역과 역사로부터 박리되어 이제 각자 자기의 볼일만 보고 가는 마트와 같은 곳이 되어 간다.


마트가 전통 시장보다 편리하고 좋듯이, 이런 플랫폼형의 미래 학교도 전통 학교보다 더 편리하고 효율적이고 좋아 보일지도 모른다. 마크 저커버그 등 실리콘 밸리의 부자들이 투자를 해서 화제가 되었고 국내 언론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던 ‘알트 스쿨’이라든지 ‘미네르바 대학’과 같은 소위 ‘미래형 학교’들을 소개하는 방송과 기사가 여럿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학교들의 좋은 점만 부각시켜 보여 주는 프로그램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절대 말해 주지 않는다. 그 학교들이 투자를 받아 수익을 돌려주는 ‘영리형 학교’라는 것, 즉 학교의 외피를 입은 영리 기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알트 스쿨이나 미네르바 대학의 소개 영상을 보면 노골적으로 “학교가 그것을 할 수 없다면, 스타트업(start-up)이 시작해도 되지 않을까요?”라며 시민들의 모험가적 실험 정신과 투자 정신을 촉구한다. 공교육을 사기업으로 대체하자는 놀라운 주장이지만 ‘스타트업’이란 단어는 뭔가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참신한 혁신가나 사회적 기업 같은 느낌을 준다. 박근혜 정부 당시 KBS와 EBS는 앞장서서 대대적 물량 공세로 영리형 학교를 미래형 학교로 선전하는 프로그램들을 쏟아 냈다. 다른 언론사들도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서 썼다. 문제점은 말하지 않고 좋은 점만 소개하는 영상을 통해 시민들은 그걸 미래의 학교라고 받아들였다. 이는 한국의 학교들이 다른 나라의 학교들에 비해 뒤처져 있고, 이대로 가면 우리는 국제 경쟁력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애초에 왜 미국의 ‘성공한’ 일부 영리형 학교와 공교육을 비교하는가. 게다가 그 몇 개의 성공 사례를 가지고 그 시스템을 전체 공교육에 도입해야 할 것처럼 말하는가. 결국 지금 교육의 새판 짜기는 시장의 새판 짜기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 학교의 변화를 가장 강력히 요구하고 추동해 내고 있는 것은 시민 사회도 노동 사회도 아닌 ‘자본주의의 혁신가’들이다.


“남들과 달라라”
 

작년 가을, 코엑스에서 열린 교육부 주관 자유학기제 진로교육 박람회에 다녀왔다. 박람회장 한가운데는 청소년 창업가 부스가 있었고 학생들이 다가와 명함을 주었다. 명함에는 회사 이름과 함께 ‘CEO 아무개’라고 적혀 있었다. 학생들은 창업 아이템을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전망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투자 의향이 있으면 명함을 투표함에 넣어 달라고 했다. 투표는 일종의 투자 행위였고, 관람객들은 투자자를 대신했다. 각기 다른 학교에서 온 고등학교 창업 동아리들이었는데 투자를 많이 받은 동아리가 나중에 상을 받게 된다고 했다. 동아리 활동과 수상 실적 모두 대학 입시에 필요한 스펙이 될 터였다. 그날 현장에서 교육부에서 개발한 《청소년 기업가정신》이라는 진로 교과 교재를 받아 왔다. 사실상의 자본주의 경제 교과서였다.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집필진으로 참여한 국정 역사 교과서나 자유경제원에서 만든 우파의 대안 사회 교과서에 대해서 진보교육 진영에서는 그런 교재들이 학교 현장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기업가정신’이 진로교육 교재로 쓰이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저항하지 않는다. 진로 수업이 단지 성적 열외인 비교과 영역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것은 진로 교 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4차 산업 혁명’과 ‘미래 교육’이란 이름으로 사실상 교육 정책 전반에 기업가정신은 밀려와 있다.


통상 기업가정신이라고 번역되는 앙트레프레너십(entrepreneurship)의 앙트레프레너는 도전적 창업가, 모험가를 뜻한다. 창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사업에도 안정적으로 경영하는 모델이 있고 창업 투자형 모델이 있는데 기업가정신은 창업 투자형이다. 임시·단기·기획형 사업으로 수익을 보고 수익률이 떨어지면 바로 폐업하고 다른 아이템으로 갈아타는, 선점과 약탈, 독점과 먹튀의 정신이다. 이 기업가정신은 ‘혁신’과 한패, 한 짝이 되어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 잘못된 가치관과 경제 관념을 심어 주고 있다. 입시 교육이 성적순의 위계를 만들고 노력의 성공 신화를 통해 덧씌워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에게 복종하는 차별의 문화를 양산해 왔다면, 지금 청소년들은 청년 창업가들의 성공 사례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성공 신화와 출세주의를 받아들이고 익히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옹호하고 노동하는 삶을 지지하는 교육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미래의 사회 변동과 그에 대응하는 진로교육에 대해서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동의하며 입장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다들 4차 산업 혁명에 대비하고, 다들 미래 먹거리 키우고, 다들 쓸모 있는 미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니 말이다.


대학은 어떤가. 문학 동아리, 사회과학 동아리가 사라지고 1990년대 후반부터 여가, 취미, 실용, 봉사 동아리가 그 자리를 대체하더니 지금은 ‘창업 동아리’가 성행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어떻게 하든 사회적 가치를 부여해서 청년 창업 지원에 응모해서 돈을 받아 볼까 궁리하는 것도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지원 사업들은 ‘청년 창업가’, ‘사회적 기업가’, ‘청년 기업가정신’을 추켜세우고 선전한다. 그래 봤자 얼마나 성공할 것이며, 대부분이 온라인 쇼핑몰, 아니면 푸드 트럭 같은 소자본 영세 자영업이고, 지원도 소액이다. 지난해 나는 부산의 국제시장, 속초의 중앙시장에서 청년 창업 실태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다들 망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서나 창업 아이템은 비슷비슷했다. 청년 바리스타, 수제 맥주, 수제 쿠키, 수제 잼, 손바느질 소품들, 손 그림, 사진 가게, 엽서 가게들, 그리고 먹거리 창업 시장은 푸드 트럭으로 이전되고 있는 중이었다. 똑같은 상품에 차별화시켜 시장가보다 좀 더 비싼 값을 (혹은 제값을) 받으려니 다들 자신이 파는 물건들에 자기의 인생을 얹어 스토리텔링이 되는 상품으로 개발하고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대학 가려고 자소서 쓸 때도 그랬는데, 뭣도 없는 인생 엄청 포장해서 꾸며야 간신히 대학이라도 갈 것 같아서 비참했거든요. 근데 이제 대학 마치고 사회에 나가려고 하니 또 내 인생을 끼워 팔아야 하네요.” 누구나 알고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승부하라’같은 창업 카운슬러들이 하는 말들이 실은 모두 ‘너를 팔아라’ 와 다름없다는 것을. 그렇게 커피에 맥주에 비누에 인생을 끼워팔기 할 때 내면의 자존감이 얼마나 무너지고, 가게에 물건과 함께 진열된 인생 스토리가 차별화된 감동을 주기 위해 자기의 인생이 얼마나 초라해져야 하는지.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청년들은 ‘자본의 관점’을 자기도 모르게 착실히 내면화한다. 내가 잘못해서 실패한 것이라고, 나의 개성과 창의성과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개인들의 활로를 사회 전체의 노동을 개선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발굴되지 않은 역량 속에서 찾으라고 하는 끊임없이 주입된 교육의 결과다.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자원의 채굴자, 개발자, 종국에는 착취자가 되라고 하는 것, 그게 개인 맞춤형 교육, 창의 인재 교육, 자기만의 직업을 창조하라는 진로교육의 내적 메시지 아닌가. 대학 서열화와 입시 교육의 가장 큰 반교육적 폐해는 1등만 빼고 모두를 낙오자요 패배자로 만드는 교육이란 것이었다. 그 1등조차도 정말 탁월한 인간이 아니라 잘못된 우월감에 도취된 괴물이 되기 십상인 교육이 성적순 서열화 교육이었다. 교육운동은 그에 맞서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교육을 하자고 말해 왔다. 대안교육운동도 혁신학교운동도 모두 그런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획일화와 서열화에 반대하는 교육운동으로서. 그러나 우리는 개성, 창의성, 다양성을 위한 교육이 시장적 매커니즘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자본이 그걸 어떻게 시장화할지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시민 사회의 운동보다 자본의 운동이 더 큰 목소리로 개성과 창의성과 다양성을 옹호하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누구나 이미 가졌다고 생각하는 개성과 창의성을 학교교육을 통해서 만들어 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학교’는 이런 모습이라고 홍보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알트 스쿨을 보자. 알트 스쿨에서는 나이 중심의 교육과정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개인 발달 중심으로 맞춤형 교과를 편성한다. 학생들은 저마다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고, 자기의 강점을 특화하거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음악을 좋아하고 잘하는 학생은 음악을 중심으로 교과를 확장해 간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은 수학을 중심으로 교과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음악적 재능이 있는 학생이 수학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당연히 시험도 없다. 각자 어느 분야에서 얼마나 성취를 이루었는지가 기록될 뿐이다. 성취도란 과거의 자기에 대해 현재의 자기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일 뿐이다. 얼마나 좋은가. 그걸 일종의 대안교육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 학교가 영리 학교이며, 투자를 받아 수익을 내는 모델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교실 안만 보면 영락없는 대안학교의 실험장 같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알트 스쿨은 2017년 학생 수 감소로 재정 위기를 겪고 소비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함으로써 7개 중 2개교가 문을 닫아 사실상 실패한 실험으로 결론 난 상태다. 그런데 이 알트 스쿨의 교사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들과 경쟁할 필요 없다고. 너의 경쟁 상대는 너 자신일 뿐이라고. “옆은 볼 필요 없어. 즐겁게 공부하다 보면 앞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우리 학교의 ‘좋은 선생님’들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런데 과연 이런 ‘자기와의 경쟁’은 타인과의 경쟁보다 좋기만 한 것이며, 학생들도 이 메시지를 경쟁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수도권 지역 교대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특강에서 한 학생이 나에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강의를 듣고 비로소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난 것 같다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 감옥이 뭐였냐고. “나다운 나”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날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너다운 너, 너만의 너, 너 자신의 너가 되어라’라는 주문에 포획되어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건 또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되어라’는 주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1등이 되어라’보다 더 무서운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성적 중심 교육일 때는 성적만 신경 쓰면 되지만 ‘나다운 나’란 것은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나만의 1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학종’과 ‘자소서’에 채워 넣어야 할 나만의 스토리는 결국 남과 비교 불가능한 자기만의 1등 인생을 강요한다. 스토리가 없는 이들은 성적이 낮은 이들만큼이나 낙오자요 패배자가 되어 학교를 나온다. 그 스토리는 학교교육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만의 멋진 인생을 사는 청년들의 성공 스토리가 대부분 그들의 배경 속에 있는 경제력과 문화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대안교육도 마찬가지고 혁신교육도 그렇지 않은가. 대안학교도 혁신학교도 대학 입시에서의 성공 가능성이 없다면, 대안적 모델도 성공한 정책도 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대안학교와 혁신학교들이 학생들의 진로 결과를 통해 대안교육과 혁신교육의 우위와 강점을 보여 주려고 한다.



진로 시장과 유스 마케팅


그동안 진로교육의 실패는 실패한 학교교육을 입증하는 중요한 논거였다. 학교가 진로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해 지금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 진로를 찾지 못하고 초·중·고에 대학까지 합하면 16년 동안 배우고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사회로 나온다는 것이다. 자본은 계속 학교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공격해 왔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시장의 실패가 우리의 모든 배움을 지속적으로 무용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시장은 학교에 계속 주문한다. ‘개인들’이 각자에게 맞는 진로를 찾도록 교육하라고. 이 또한 원인과 결과를 전혀 엉뚱하게 맞춘 처방이다. 현재의 청년 실업은 학교교육의 실패가 아니라 경제의 실패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30년 전의 학교교육이 지금보다 덜 획일적이고 덜 억압적이었다고 할 수 있나? 20년 전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내가 경험했던 학교교육이 교육 환경이나 수업의 질이나 학생 인권이나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그런 교육을 받고도 대부분 어려움 없이 직장을 구하고 제 몫을 차지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여 지금 문제는 노동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의 미스 매치에 있다고 말한다. 산업 수요가 원하는 인력을 학교교육이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학교교육, 특히 공교육의 근거와 목표에 대한 심각한 왜곡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자체가 반교육적인 철학을 담고 있다. 우리는 기업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며, 공교육의 목표는 정치공동체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사람으로서의, 시민으로서의 근본을 갖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의 미래는 사회 전체의 과제로 설정하면서 왜 노동의 미래는 노동자 각자가 알아서 개척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지금의 진로교육은 다음 사회의 진로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진로’를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만 모색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개인’의 적성을 미래 산업 수요에 매칭시켜 그에 맞는 직업적 역량을 개발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이런 진로교육은, 아무리 개인 맞춤형이라고 부른다 해도 실제로는 각자도생의 교육이다. ‘모두가 천재다’는 말은 ‘각자 천재가 되어라’는 말과 다름이 없고, 실은 그게 ‘창의 인재’란 말 속에 들어 있는 이념 아닌가. 창의적인 사람만이 세상에 없던 직업도 창조(=창직(創職))해 내며 자기만의 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누구나 창의 인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경쟁 교육에 대해선 그렇게 비판하면서도 이 창의성 교육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물고기에게 나무 타기 경쟁을 시키는 획일주의 경쟁은 나쁜 것이지만 각자 잘하는 걸 개발하라는 다양성 경쟁은 괜찮은 것일까. 우리들 대부분은 천재가 아니다. 대부분은 비슷비슷하고 평범한 재능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다. 공교육의 이념은 이렇게 비슷한 사람들의 공통성에 기반하여 시민공동체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제대로 된 논의 과정도 없이 교육과정 안으로 도입된 진로교육은, 공동체 교육으로서의 공교육의 이념을 해체하고 ‘남들과 달라라’는 ‘각자를 위한 교육’의 이념을 학교 안으로 도입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진로교육의 도입 배경을 보면 ‘진로’가 어떻게 교육의 목표가 되었는지 보다 명확해진다.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는 〈초·중등 진로교육 시행 계획〉을 통해 ‘진로교육 종합 대책’이란 것을 수립했다. 그 배경은 ‘진로교육과 상담 및 진로 관련 정보 수요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교 다양화 및 입학사정관제의 활성화’에 따라 진로교육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당시 진로교육에 활용 가능한 키자니아와 잡월드 등 공공 및 민간 체험 시설은 이미 설립되었거나 설립 중에 있었기에 시설 설립을 위해 필요한 법은 아니었다. 2012년 이명박 정부는 ‘진로교육진흥법’을 입법 예고했고, 2013년에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 발의로 〈진로교육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제1조에서 학생이 “변화하는 직업 세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스스로 진로를 개척하고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진로교육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건 ‘교육법’이 아니라, ‘개발법’이다. 진로교육은 정책적으로 고교 다양화 및 자유학기제와 맞물려 추진되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이 엄청난 진로교육 시장이 열렸다.


진로 적성 검사부터 진로 체험 센터에 진로 컨설팅까지, 대체 지금 진로교육, 미래 교육과 관련한 시장 규모는 얼마나 될까. 지난해 연말 겨울 방학을 앞두고 페이스북에 ‘연세대학교 창의 캠프’라는 광고가 계속 떴다. 업체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대상 진로 캠프였는데 장소가 연세대학교 송도 캠퍼스였다. 가격은 상당히 비싸서 85만 원에서 275만 원까지 이르렀다. 고려대는 ‘KU 캠프 사업단’이란 이름으로 초·중등 대상 진로교육 사업에 아예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맞춰 실시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창의공학캠프 프로그램은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으로 지난 여름 방학 조기에 마감되었습니다. 이번 겨울 방학에도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골적인 호객 행위는 사교육 업체인지 대학인지 분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지어 진로 적성 캠프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는 여성가족부 장관 명의의 ‘인증 수련 활동 기록 확인서’를 발급해 주니 “개인의 포트폴리오 관리를 직접 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노골적인 입시 장사요 진로 장사다. 고려대 사업단은 이 프로그램으로 방학 동안 9억 원의 매출을 올린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프 사업부도 진로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외대 글로벌 캠퍼스에서 진행되는 이 청소년 방학 캠프는 21일간 참가비가 294만 원이다.


대학들이 이 정도인데 일반 기업체들이 이 시장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업체는 ‘기업가정신 보드 게임’ 등 진로 찾기 교구용 보드 게임을 개발하고 학교 현장으로 특강도 나가고 교원 연수도 운영한다. 진로 캠프 상품만 특화한 업체도 있었다. 한 곳에 전화 문의를 해 보니 진로 인성 캠프 비용은 1주일간 98만 원이라고 한다. 여행 업체도 진로교육에 뛰어들고 있다. 자유학기제가 실시되면서 여행과 결합한 진로 체험 상품들이 대거 개발되었다. 유럽 인문 답사 여행이나 미국 아이비리그 투어 같은 청소년 진로 여행 상품들이 대표적이다. 금융 업체들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로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유수 대기업들이 협력·후원 단체로 참가하며 금융, 경제, 기업가정신, 기업 경영, 기업 윤리, 직업 및 진로교육 등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 직접 만든 교육 기관도 있다. 2011년 개원한, 시장경제교육을 실시하는 ‘자유와창의 교육원’이다. 잠깐 검색해서 일별해 본 것인데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대부분 업체와 기관들이 학벌 조장, 스펙 조장, 입시 경쟁 조장을 노골적으로 하는 반사회적 선전 문구를 대놓고 홍보하고 있었다. 이미 진로교육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여 자본이 눈독을 들이는 투자 수익성 좋은 시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진로교육 시장을 좀 들여다본 후에 나는 여기가 교육 시장의 새로운 광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업 컨설턴트들은 스타트업 유망 분야로 교육 시장에 주목하라고 빠짐없이 조언한다. 특히 진로교육 시장은 그 어떤 분야보다 장래 투자 가치가 높은 유망 시장이라고 소개한다. 시장의 언어는 그것을 ‘유스 마케팅(youth marketing)’이라고 부른다. “유스 마케팅의 핵심은 ‘교육’ ”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말한다. “시장이 학교가 되어라.” 기업이 교육적 가치를 생산하고, 실제로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라는 것이다.


유스 세대의 진로 지도는 가정과 학교의 가장 큰 화두이다. 직업 선택에 대한 이해와 정보가 부족하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미래 직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입시 전쟁에 시달리는 중고등학생들은 자신의 진로 문제 앞에서 더없이 진지하고 신중하다. 대학생들에게 진로와 직업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 과제이다. 그들은 취업을 목표로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런 유스 세대의 현실 속에서 유스 마케팅이 지향할 방향을 찾을 수 있다.

- 엄서영(2014), 《유스 마케팅》, 21세기북스, 403쪽


결국 ‘진로’라는 유스 마케팅은 또 다른 형태의 불안 마케팅이고, 진로교육이란 그 불안에 대응하는 자기 개발 교육이다.


《유스 마케팅》은 기업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청년들에게) 코칭과 멘토링을 해 주어라.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직업 멘토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멘토링은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친근하게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 진로교육에서 기업이 기대할 수 있는 미래 수익 창출 가능성과 기대 효과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자본과 시장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는 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기관 홍보의 효과가 있으며 제품에 대한 친근감을 높일 수 있음. 학생들이 직접 사업장(공장)·기관을 체험함으로써 기업의 제품 및 기업·기관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있음. 체험 후 설문 조사를 통해 체험에 대한 반응도와 기업에 대한 선호도 등을 알아볼 수 있음. 장기적으로는 기업·기관 활동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지역 사회에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음.”➌ 놀랍게도 이것은 교육부가 운영하는 진로 정보망 커리어넷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➌  www.career.go.kr/cnet/front/web/courseEdugs/courseEdugs07_view08.do




끝없는 유예와 재투자의 미래


결국 진로교육은 학교와 시장을, 교육과 기업을 잇는 접점이 된다. 이런 진로교육은 결국 자기 개발 교육이고, 자기 개발 상품이다. 입시에 대한 불안과 경쟁 심리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입시 사교육 시장이라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경쟁을 부추겨 교육이란 자기 개발 상품을 사도록 하는 것이 지금의 진로교육 시장이다. 자기 역량 개발에 대한 투자로서의 진로교육은 학령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100세 시대, 인생 이모작 삼모작 시대, 한 사람이 10개의 직업을 갖는 시대라는 이 끔찍한 미래는 우리를 끝없는 자기 개발의 재투자로 몰아넣는다. 끝없는 진로교육은 끝없는 평생교육을 낳고 끝없는 평생교육은 끝없는 교육 시장으로 팽창한다. 2017년에는 드디어 초등학생부터 은퇴자까지 생애주기별 진로교육을 담당할 국가 차원 진로교육 기관인 국가진로교육센터가 설립되었다.


우리는 중년 진로, 장년 진로, 실버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에 도달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인간으로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 왜인가? 평생 동안 실업과 재취업, 전업과 창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청년기에 필요했던 진로 찾기 교육이 평생에 걸쳐 요구된다는 것은 사실상 안정적인 생의 설계와 진로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애주기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삶은 과연 축복인가, 재앙인가. 지금과 같은 평생교육은 평생의 자기 개발을 교육이란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이 하나의 직업을 갖는 시대는 끝났고 두 번째 세 번째 직업을 가지라고 한다. 한 사람의 인생만을 놓고 보면 그럴듯한 말이지만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전체 노동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그때마다 노동 인력이 과잉 공급됨을 의미한다. 노동자들끼리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자본이 노동을 싼 값에 사용하기에는 더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는 우버 택시 같은 ‘공유 경제’ 모델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플랫폼에 진입한 ‘자유 드라이버’들은 기존의 택시 운전 노동자들의 영역을 잠식하며 제 살 깎아 먹기 식으로 시장을 ‘공유’했다. 이 ‘공유 경제’는 한 가지 비밀은 발설하지 않는다. 노동을 공유하고 시장을 공유하지만 자본은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노동과 시장이 공유되면 될수록 토지, 화폐, 자본은 점점 더 집중된다. 공유될수록 노동자는 분리되고 서로 경쟁해야 한다.


40대에 퇴직하고 창업을 준비하라 하고, 60대에도 노동 재교육을 받으라고 한다. 그들 각자에겐 새로운 분야의 초심자로서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이제 새로 사회에 나오는 20대들이 같은 일자리를 두고 중년·노년과 경쟁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평생 자기 역량을 개발하기 위한 재생산 교육에 써야 하는 투자 비용은 또 어떤가. 실업 급여를 신청하고 자료가 고용노동청에 남게 된 이후로 나에겐 직업 훈련 안내 메일이 종종 온다. 장래 유망 직종과 재취업 안내 메일이다. 최근에 많이 온 것은 코딩교육 지도사이다. 정리 수납사 자격증 안내도 받았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교육비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 살펴보면 대부분 장기적 전망이 없고 숙련도가 낮기 때문에 순식간에 노동력 공급이 과잉될 수 있는 일들이다. 평생교육의 이념은 좋아 보이지만, 정말로 독일식의 시민대학(Volkshochschule) 같은 평생교육 기관을 가지려면 노동과 시민 사회의 힘이 자본과 시장의 힘보다 강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상태에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평생교육은 시장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평생 학령기란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나는 좋은 교육이란 평생 배워도 끝이 없는 교육이 아니라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배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그 배운 것으로 평생 살 수 있는 교육이 좋은 교육이고 그게 정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10년, 5년 주기로 자신을 재창조해야 하고 생애주기별로 삶을 리셋하라는 사회, 평생 배우고 평생 초심자로 남는 이런 교육이 어떻게 평생교육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예전에는 초등학교가 기초 학교였는데, 어느새 아동기를 1318이라며 청소년기로 연장시키더니, 이제 대학 졸업까지가 사실상의 ‘유예 청소년기’로 연장되었다. 교육과정을 끝마친 후에도 살아갈 수 없는 청년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청년이란 말도 ‘성인’이란 의미보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평생 학령기라는 것은 그 유예가 어쩌면 평생이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 시장화의 세 가지 방향


나는 지금 학교 시장화가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혁신을 통해 학교(공교육)를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것, 둘째, 기술과 교육을 융합하는 것, 셋째, 공교육을 공공 부문 시장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첫 번째인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란 개념은 알다시피, 케인즈의 반대편에 서 있던 경제학자이자 혁신 경제 개념을 정립한 슘페터(J. Schumpeter)의 것이다. 혁신을 위해서는 파괴가 불가피하나 혁신은 ‘파괴적 파괴’가 아닌 ‘창조적 파괴’라고 혁신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래서 종종 혁신의 이념은 진보의 이념과 협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뒤집어 ‘파괴적 혁신’이란 개념으로 다시 혁신 담론을 비판한 뤼크 페리는 혁신의 가장 큰 문제는 ‘혁신을 위한 혁신’에 있다고 말한다. “아이폰4를 물속에 빠트린다고 해서 아이폰5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아이폰5가 만들어져야 아이폰4가 구식이 되는 것 아닌가.” 상품들이 끊임없이 구식이 되어야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구식이 되는 것은 사용 가치가 아니라 디자인이다. 제한된 욕구(need)가 아니라 끝없는 욕망(desire)이다. 이것은 끝없는 혁신의 경쟁으로 사회를 몰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경제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본주의의 근본 원칙이 현대 사회의 전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우리가 살펴본 것은 그것이 교육 분야에 퍼져 나가고 있는 양상이었다. 인간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신상’이 되라고 하는 주문. 그러나 그 주문을 이행하는 과정은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이 계속 부정되고 파괴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창조적 파괴의 과정에서 파괴되는 가장 대표적 존재는 노동 계급이다. 자본이 정리 해고제나 파견 근로제 같은 대담한 혁신을 추진할 때마다 파괴되는 것은 노동자의 삶이었다.


➍ 뤼크 페리, 김보희 옮김(2016), 《파괴적 혁신》, 글항아리. 뤼크 페리는 현대 프랑스의 지식인으로 공화주의자이며 유럽연합주의자이다. 이 책에서도 드러나지만 그의 입장은 반자본 반체제적 입장에 서 있다고는 볼 수 없고, 프랑스의 지적 지형에서 보면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가 이루어 온 사회적 전통을 지켜 가려는 보수주의자에 가깝지만, 근래 프랑스 사회에 불어 닥쳐 온 이 혁신이라는 파괴적 물결 앞에서 그 원인과 결과, 양상을 고뇌하며 고찰하고 있다. ‘혁신주의’라는 맥락은 자본의 세계사적 운동이라는 맥락을 보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 오늘날 혁신교육이나 사회 혁신가, 국가 혁신 등이 그냥 대체로 좋은 의미로, 역사적 맥락에 대한 통찰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한국적 상황은 개념에 대한 사회철학적 사유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현실에서 참고해 볼 만한 책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해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교육의 불가능성 테제는 주장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혁신하자고 하면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혁신이 아니라 혁신의 혁신을 해도 부족하다 여길 것이다. 그런데 함께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어떤 방향으로 혁신해 나갈지, 혁신의 방향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합의다. 혁신은 추상적 교육 체제를 혁신하지 않는다. 수업을 혁신한다는 것은 교사를 혁신한다는 뜻이고 학생을 혁신한다는 뜻이다. 그 혁신을 누가 하는가? 교사가? 학생이? 아니다. 지금 ‘혁신하다’의 주어는 교사와 학생이 아니다. 시민도 아니다. 혁신의 주어는 시장과 자본이다. 이런 혁신의 방향 속에서 교사도 혁신당해야 할 존재고 학생도 혁신당해야 할 존재다. 얼마 전 강의를 하다가 교원 평가제와 교사 혁신론 및 수업 혁신론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자는 아이 깨우고, 엎드린 아이 일으켜 세우는 교사가 좋은 교사인가요? 수업 시간 내내 웃음 빵빵 터지게 해 주면 좋은 교사인가요? 수업에 집중시키고 성적 올려 주면 좋은 교사인가요? 언제부터 ‘수업 잘하는 교사’가 ‘좋은 교사’가 되었어요? 아니잖아요. 제가 아는 좋은 교사의 첫째는 결코 수업 잘하는 똑똑한 교사가 아니에요. 제 경험을 돌이켜봐도 그래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제가 만났던 좋은 선생님들을 한 명씩 꼽아 보면, 그 중에 ‘수업을 잘했다’고 할 만한 선생님들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참가자들은 대체로 공감했으나, 강의를 마치고 나서 그중 한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말씀에 다 동의가 되는데 교사가 수업 못해도 된다는 말씀은 동의가 안 되네요. 저는 어찌 되었건 교사의 첫 번째 조건은 일단 수업을 잘하고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을 눕혀 놓고 어떻게 좋은 이야기를 해요? 나머지는 그 다음이고요.” 교사가 수업을 잘하게 하려면 평가를 해야 하고 혁신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조금 서글퍼져서 대답했다. “학생들이 시험 본다고 더 나아지나요? 교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평가를 한다고 역량이 뛰어난 교사가 될 수 있을까요? 학생 사회나 교사 사회나 서로 경쟁시켜 줄 세우는 건 협동과 연대의 정신을 파괴하는 거지 개인들의 역량을 키워 주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평가는 관리자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교원 평가제와 학교 평가제(등급제)는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란 이름으로 영국에서 처음 도입되었던 것이다. 사용자나 관리자를 정치의 언어로 옮기면 지배자이고, 이 모델은 결국 지배자의 수월한 통치를 위한 것일 뿐이다. 지금 평가의 기준과 방식은 기업에 적용하는 시장적 모델 그대로이다. 이렇게 혁신하는 학교의 지배자는 누구인가?


두 번째로, 학교 시장화의 또 다른 중요한 양상은 기술과 교육의 융합이다. 오늘날 교육 혁신은 대부분 기술 혁신의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기술과 교육의 융합은 미래 학교 모델에서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앞서 살펴본 알트 스쿨, 미네르바 대학 같은 모델은 모두 기술적 기반 없이 가능하지 않다. 교실 없는 학교도, 칠판 없는 교실도, 교사 없는 수업도, 블렌디드 학습도 모두 기술 융합형 교육이다. ‘네가 있는 곳 어디서나 배움의 현장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태블릿 PC와 거기 깔린 프로그램이다. 이렇게 교육과 기술을 융합해서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교육학의 분과를 ‘교육공학’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육학을 시장과 결합시키는 주력 분야가 바로 이 교육공학이다.


 ‘거꾸로 수업’을 보자.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하며, 학습자들이 미리 스스로 공부를 해 오게 하라고 한다. 교사는 그것을 토대로 보조적 할만을 하면 된다고 한다. ‘티칭에서 코칭으로’는 바로 자기 주도적 학생과 수동적이며 보조적 역할의 교사를 강조하는 교육 모델이다. 그런데 대체 학생들은 교사 없이 무엇을 가지고 자기 주도형 사전 학습을 할 수 있는가? 결국은 사전에 주어진 자료를 가지고서다. 그 자료는 어디서 나오는가? 알트 스쿨에서 ‘창의적으로’ 학습하는 아이들이 태블릿 PC와 구글링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실리콘 밸리의 부모들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용 소프트웨어와 교육 콘텐츠를 교사가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 에듀케이션(education)의 어원인 ‘에두카레(educare)’는 ‘기르다’, ‘보살피다’, ‘교육하다’, ‘에두케레(educere)’는 ‘끄집어내다’, ‘이끌다’, ‘이끌어 내다’, ‘일으켜 올리다’라는 뜻이다. 한 사람은 이끌고 한 사람은 이끌려 가는 것을 연상시키는 교육-피교육 모델은 일방적이며 위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에서의 이끌어 냄은 일방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생이 좋은 선생이도록 하는 것은 학생이다. 서로의 배움을 이끌어 내는 것이 가능한 것은 관계의 상호성과 인간이 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 서로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다른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 그 변화 가능성은 인간이란 존재에게서 일어나는 가장 경이로운 기적 중에 하나이다. 나는 늘 이것을 교육학적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 기술과 교육의 융합에는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관계의 상호성이 없다. 기술이 매개된 순간, 상호 개입을 통해 서로 배우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모델이 된다. 그런데 상호성을 배제한 이런 모델들이 자기 주도형 학습 모델, 개인 맞춤형 수업 모델이라고 불린다.


블렌디드 학습이 이루어지는 교실에서 실제 주인은 ‘기술’이다. 교사는 개인들의 프로그램화된 학습을 위한 관리자 모델로 규정된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수업 선택권을 준다는 고교 학점제는 다들 솔깃해하지만 그걸 실현 가능하게 할 현실적 방법 역시 기술적 수단밖에 없다. 다양한 수업을 개설할 수 있는 방식은 온라인 수업과 교사 외주화밖에 없다. 하나의 학교에서 필요한 모든 개설 학점을 포괄할 수 있는 수업을 자체적으로 다 열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은 학교들은 지금도 다양한 과목을 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제 학교 규모는 더 축소될 것이다. 다양한 개설 강좌를 강의할 그 교사들은 어떻게 수급할 것인가. 대안은 플랫폼형 학교뿐이다. 아마도 ‘학생들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도입될 이 기술과 교육의 융합은 결국 교사 인력의 시장적 공유, 학교 인프라의 시장적 공유를 새로운 공교육 인프라로 만들어 낼 것이다.


혁신의 주어가 자본이었듯이 기술과 교육을 융합하는 융합의 주어도 자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교육용 소프트웨어 시장에 진출,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게임 마인크래프트의 개발사를 인수하여 ‘마인크래프트 에듀케이션 에디션’을 출시했다. 게임을 교육에 융합시킨 것이다. 최근에는 국내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에듀케이션 코리아라는 대행업체가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교육 혁신’으로 홍보하고 판매하고 있다. “프레젠테이션 도구 ‘◯◯◯’를 사용해 보세요. 손쉽게 수업과 업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혁신 교사와 함께 ‘◯◯◯’를 사용해 효율적으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 보세요.” 이 회사는 “학생들에게 21세기 미래 핵심 역량인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과 ‘협업 능력’을 키워 주는 프로젝트 기반 교육을 수업에 도입”하고 “학생들이 앞으로 갖춰야 할 21세기 학습자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선생님들이 변화하는 교육에 가장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도와드리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교육용 소프트웨어의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학교 현장이 점점 이런 교육용 소프트웨어에 의존하고, 기술 융합형 교육으로 바뀌어 나갈 때 무슨 문제가 생길까?


그것이 바로 세 번째 학교 시장화의 흐름, 공교육을 자본에 대해 공공 부문 시장으로 개방하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에듀케이션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학교 수업 현장에서 활용하는 소프트웨어로 채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교육청에서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는 것 이상으로 미래의 교육 시장을 ‘공공 부문’에서 창출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마크 저크버그를 비롯한 실리콘 밸리의 부자들이 알트 스쿨에 큰돈을 투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수업료를 비싸게 받는다고 해도 학교에서 나올 수 있는 수익이란 한정되어 있는데 왜 거기에 투자를 할까. 정말 교육과 미래를 위한 자선적 투자인가.


그 의문은 최근 니콜 에쇼프의 책 《자본의 선지자들》을 통해 해소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마크 저커버그는 뉴어크 공립 학교의 실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1억 달러를 기부했는데, 그 기금을 관리하는 ‘스타트업: 에듀케이션’의 핵심 목표는 뉴어크 교사들에 대한 성과급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담당 학생들의 표준 시험 성적이 높은 대단히 유능한 교사들에게는 보너스로 보상을 하지만, 학생들의 성적이 나쁘게 나온 교사들에 대해서는 징계 조치를 하거나 해고 절차를 밟도록 했다.” 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육 현장에 설계하여 보급한 사람은 페이스북의 최고 경영 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였다. 이 프로그램의 장기적인 목표는 공립 학교에서 정규직 교사의 수를 줄이고, 살아남은 교사들을 채찍질하며, 전국의 공립 학교에 강사를 파견하는 업체를 통해 단기직 교사들을 채용하는 것이다. 지금 미국의 공립 학교들에서 공무원들과 학교 혁신가들은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개발, 보급하고 있다. 실리콘 밸리의 투자자들이 알트 스쿨에 투자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알트 스쿨을 만든 데이터 과학자이자 구글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맥스 벤틸라는 알트 스쿨은 점진적으로 폐교하되 앞으로는 시스템 공급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미네르바 스쿨을 개발한 스탠포드 교육공학 팀은 아프리카에 대한 교육 개발 원조 사업으로 자신들이 개발한 시스템을 공적 차원에서 지원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시장 논리를 공교육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다. ‘하향식 정부 독점 공급자’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경쟁을 늘리면 공교육이 크게 개선되리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주장이다. 게이츠 재단은 미국의 다른 일부 교육 개혁가들과 달리 미국 교육 시스템의 완전한 사유화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들은 공립 학교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공립 학교들이 다른 학교들과 경쟁하면서 시험 점수 향상을 통해 그 가치를 입증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폐쇄하거나 사립 차터 스쿨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MS사는 공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상품을 개발 보급한다.


➎ 니콜 애쇼프 씀, 황성원 옮김(2017), 《자본의 새로운 선지자들》, 펜타그램, 60~61쪽.

➏ 니콜 애쇼프(2017), 위의 책. 193쪽.



지금 한국 사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교육 혁신의 모델은 모두 이런 식의 미국형 교육 개혁 모델을 쫓아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의 사유화는 사회적 저항을 불러오지만 자본과 기술의 융합된 힘으로 공립 학교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에 대해선 공교육의 강화라며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실상은 공공 교육 부문의 시장 개방이다. 기술이 학교를 장악한다는 것은 자본이 학교를 장악한다는 뜻이다. 이는 학교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심각한 위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기술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평가 회사에서 개발한 교원 평가 프로그램을 교사가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을까? 현장에서 기술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그 기술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기술은 중립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다. 기술은 언제나 기술 개발자와 관리자의 이익에 복무한다. 핵발전 기술을 민중이 통제할 수 없듯이, 오늘날 교육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 혁신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교육을 융합하는 주체는 자본이다. 국가가 국민을 양성하는 국민 교육 시대가 막을 내렸다면 이제 자본이 사회를 교육하는 자본 교육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혁신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학교가 자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그러니 진보교육, 인간교육을 정말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이라면 ‘시장이 학교가 되어라’는 이 명령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미래, 혁신, 창조라는 이름으로 쇄도하고 있는 이 자본의 물결에 ‘조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서는’ 파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시장의 요구, 자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학교 혁신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놓고 노동의 요구, 시민적 요구를 재정립하면서 다가오는 미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교육적 고민과 저항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느니 어떻게 맞출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지,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과 응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 자신이 혁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자본과 시장을 그리고 교육의 미래를 변화시켜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사회적 화두가 된, 그리고 교육적 화두로 들어온 ‘미래, 혁신, 창조’라는 수사의 실체를 정확히 직시하고 폭로하고 거부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요즘 우리 동네 청소년들과 진로 수업을 할 때 완전히 다른 식의 관점으로 진로를 생각하도록 관점 전환 수업을 하고 있다. 지난 진로 강의에서는 ‘가야 할 길’이 아니라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미래학이나 자본주의 싱크탱크와 연구소들에서 나온 미래 보고서 류의 책들 대신 SF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서, 좋은 나라, 나쁜 나라, 좋은 사회, 나쁜 사회에 대해 토론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와 닮았는지, 이러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는지, 나는 저 영화 속의 미래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디서 살 것 같은지 등의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SF 영화도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보여 주지만, 그 속에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좋은 삶과 나쁜 삶을 분별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수록 과거를 돌이켜 보라고 말한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다고. 우리가 함께 역사책과 인문 고전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엘리트적 교양 시민이 아니라 저항하는 시민, 비판할 줄 아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져 온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갖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쌓여 온 시간에는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많은 길들이 누적되어 있지만, 미래로부터 온 시간에는 아무것도 없다. 미래를 위해 돈과 시간을 내놓으라는 닦달만이 있을 뿐이다. 미래는 지금이라는 시간을 훔쳐가는 도둑의 시간이다. 그러니 맨땅과 같은 미래에 먼저 도달해서 유리한 곳을 선점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그 시간에 차라리 앞서간 많은 사람들이 긴 시간 동안 갈고 닦아 놓은 길을 놓치지 말고 그 길의 끝에 서서 다음 한 발을 내딛어 가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운동은 반외세 민족교육운동이었고, 근대 산업화 시기의 교육운동이 반독재 민주화 교육운동이었다면, 오늘의 교육운동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반(反)자본 인간화 교육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으로 사람이 변하고, 그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그렇게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교육운동의 근본 이념 아니었던가. 우리가 꿈꾸었던 ‘좋은 교육’이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 근본 이념은 기술적 방법론적 교육 혁신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 기술과 자본을 융합하는 저 구호, ‘미래, 혁신, 창조’는 우리 교육운동의 깃발에 쓰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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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