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선 교육감 4기, 교육감 선거와 ‘진보 교육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송원재
norusong@gmail.com
전교조 해직 교사,
전교조 서울지부 교권상담실장
교육감 직선제가 도입된 지 어느새 8년, 곧 민선 교육감 4기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2기 선거에서 6명의 진보 교육감이 등장한 뒤, 3기 선거에서는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무려 13곳에서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어 이른바 ‘진보 교육감 시대’가 열렸다. 그 뒤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에도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교육감은 광역 자치구 안에서 교육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교직원의 인사와 복무, 교원의 임용과 상·벌, 초·중·고 교육의 장학과 평가, 공립 학교의 설립과 폐쇄, 자사고·특목고·혁신학교의 지정과 취소, 병설 유치원의 설립과 운영, 교육 관련 조례의 발의, 공·사립 학교의 지도·감독, 교육 예산의 편성과 배분, 학원의 인·허가, 사립 학교 임원의 승인, 학교 비정규직의 채용과 처우 등 교육감이 가지고 있는 권한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방대하고 크다. 서울시 교육감이 한 해에 주무르는 예산만 9조 원을 넘는다. 교육감을 ‘교육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교육감이 손댈 수 없는 것도 있다. 유·초·중·고 교원의 양성, 교원의 정원 책정, 교육과정 편성, 교과서 편찬, 특별 교부금, 대학 입시는 중앙 정부의 권한이다. 그러나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 합의하여 건의하는 의견은 교육부도 무시하기 어렵다. 최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교육부에 대학 입시 개혁 방안을 건의한 것이 그 예다. 교육감들은 중앙 정부의 교육 정책 결정 과정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육감의 교육적 철학과 소신에 따라 유·초·중·고 교육이 크게 좌우된다. 경쟁과 선발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사람이 교육감에 당선되면 일제 고사가 부활하고 자사고·특목고가 늘어난다. 학생인권과 교사·학부모의 참여를 강조하는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혁신학교가 늘고 무상급식이 확대되고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다. 학교교육에 한 발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육감 선거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진보 교육감이 남긴 것, 성과와 과제
진보 교육감 시대는 진보 진영이 주장해 온 교육 개혁 담론이 처음으로 시험대에 오른 시기였다. 진보 진영은 오래전부터 입시 위주 경쟁 교육에 반대하며 ‘소통과 성장의 협력 교육’을 주장했고, 부유층의 교육 기회 독점을 비판하며 ‘교육의 기회 균등’과 ‘교육 복지 확대’를 요구했다. 또 국가 주도의 관료 행정에 대항하며 ‘교육 행정의 민주화’를 주장했고, 교육계의 치외 법권 지역으로 치부되던 사립 학교에 ‘공적 통제의 도입’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는 단지 ‘담론’ 수준에만 머물렀을 뿐, 실제로 정책으로 실현되어 현실 적합성을 검증받을 기회를 전혀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 출현과 동시에 개혁적 교육 담론은 이론의 세계를 떠나 현실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국민들은 막연하나마 교육의 근본적 변화를 갈구했고, 진보 교육감들은 ‘혁신 교육’이라는 지도 한 장을 손에 쥐고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다.
혁신학교운동
진보 교육감의 트레이드마크인 혁신학교는 관료적 교육 행정 체제의 말단 기구에 불과했던 학교를 ‘교육하는 곳’으로 바꿔 놓았다. 상명하복식 학교 문화가 수평적 공동체 의식으로 바뀌었고, 교원이 교육과 무관한 행정 업무로부터 벗어나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교사는 수업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았고, 학부모는 학교의 의사 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하며 교육의 협력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진보 교육감들은 이 같은 변화를 일구기 위해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원의 행정 업무 경감을 위해 지원 인력을 늘리고, 특색 사업의 추진을 위해 추가 재정을 투입했다. 학교 구성원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학교장의 민주적 리더십을 강조했고, 교직원 회의에서는 토론과 대화가 일상적 의사 결정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정책적 지원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혁신학교는 신종 특권 학교”라는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은 혁신학교의 실험을 적극 환영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대부분의 혁신학교가 교사들의 자발적 의지를 주동력으로 삼다 보니 ‘그렇지 않은 교사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으로 인식되거나, 심지어 “혁신학교는 업무 폭탄”이라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장기간의 헌신적 노력에 따르는 교사들의 ‘혁신 피로 증후군’도 치유해야 한다. 혁신 마인드 없이 트렌드만 좇는 ‘무늬만 혁신학교’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양적 확대보다는 질적 안정이 더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또 교육감의 정책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다 보니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어지는 순간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어떤 정책들은 혁신학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어서 특별한 행·재정적 지원이 없는 일반 학교에 적용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혁신학교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실험이지만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교육감의 정책 의지와 행·재정적 지원 등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지속화하고, 혁신학교의 성과를 일반 학교에도 적용할 방안을 찾아야만 비로소 현실 적합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혁신학교운동이 실험 단계를 넘어 제도로서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상당 기간 필요하고, 그것을 보장할 진보 교육감은 빼놓을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경쟁 교육의 완화, 균등한 교육 기회의 보장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기대는 교육의 본래 의미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인류 역사가 축적해 온 보편적 지식과 가치관을 전수하기보다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집단의 이념을 주입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에 잠재된 가능성을 발견하여 성장점을 자극하고 발달시키기보다는 고등교육 기회를 선점하여 더 나은 노동 조건과 미래의 수입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여긴다. 교육 기회에 접근할 기회는 치열한 경쟁을 동반하고, 초·중·고 교육은 그것을 준비하는 예비 단계라는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충분한 가용 자산을 확보한 계층은 경쟁을 지속적으로 심화시켜 탈락자를 양산하고, 자산이 빈약한 계층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질을 깎아 내리는 사회적 자해 행위를 반복한다. 그래서 교육에서의 지나친 경쟁은 그 자체로 사회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비교육적이다. 공교육에서 경쟁을 강요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육 기회를 분배하는 ‘공정한 제도’의 뒤에는 이런 계급적 음모가 숨어 있다.
진보 교육감들은 이 같은 경쟁 교육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며 ‘경쟁 대신 협력’을 표방했고,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일제 고사의 표집 전환’, 자사고·특목고 등 ‘특권 학교의 축소·폐지’, ‘고교 평준화 확대’로 나타났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세례 뒤 우리 사회를 풍미한 경쟁 이데올로기의 교육 부문 적용을 일정 부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고, 과도한 교육 경쟁의 사회적 효용성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과도한 경쟁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중·하위 계층의 절망적 분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사회 정의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교육 정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성공한 게 아니다. 교육 기회는 여전히 불공정하고 특히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요구하는 고등교육 기회의 분배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교육 경쟁의 최후 관문인 대학 입시 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특권 학교의 존립을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도 흔들림 없이 건재하다. 진보 교육감이 한 일은 단지 초등 일제 고사를 표집으로 전환하고, 특권 학교의 신규 설립을 불허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래서 전국 시·도 교육감들이 대입 제도 개혁과 교육감의 권한 강화를 정부에 건의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대입 제도는 교육감 권한이 아니지만 초·중·고 교육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고, 교육감 권한을 제약함으로써 사실상 교육 자치를 부정하는 족쇄를 풀어 달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감들의 이런 움직임이 문재인 정부의 특권 학교 폐지 공약과 맞물리면, 고교 평준화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국의 특권 학교를 일거에 폐지하고, 적어도 초·중·고 단계에서는 교육 기회 균등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중앙 정부와 손발을 맞출 진보 교육감이 필요하다.
교육 행정 경험의 축적
교육감은 기본적으로 운동가가 아니라 행정 책임자다. 진보 교육감 역시 교육·시민운동 진영의 추대를 받아 당선됐다고 해도, 국가 기관인 교육청 행정 체제의 일부로서 국고로 충당되는 인적·물적 자산을 기반으로 법령에 근거하여 교육 행정을 펼쳐야 한다. 따라서 교육감의 행정 행위는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 공무원법과 온갖 시행령 및 행정 규칙이 규정한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만약 교육감의 의욕이 지나쳐 법령을 위배하는 행정을 펼칠 경우 소송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패소하여 행정 행위가 무효가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최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비리를 저지른 한 사립 학교의 임원 승인을 모두 취소하고 관선 이사를 파견했다가 법원으로부터 패소 판결을 받은 것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교육감의 역할은 유권자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육감의 행정 행위를 규정하는 법령과 규정은 깨알처럼 촘촘하고 이전 정부가 만들어 놓은 온갖 제약 장치들도 여전히 살아 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 것도 쉽지 않다. 진보 교육감을 뽑아 준 유권자와 지지 세력은 이제나저제나 변화의 물결을 고대하는데, 교육감은 법과 제도의 틀 안에 갇혀 있다.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교육 관료의 높은 벽이다. 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고 풍부한 현장 경험도 없이 필마단기로 교육청에 진입한 교육감을 기다리는 것은 기존 교육 관료들이다. 이들은 법령과 제도에 관한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이유 백 개’와 ‘안 되는 이유 백 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데리고 들어간 극소수의 보좌진 역시 교육 행정은커녕 공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과 현장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이 노회한 교육 관료들을 통제하고 지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교육감이 교육 관료들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무엇보다도 공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과 깊은 안목, 그것을 학교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뒷받침되어야만 교육 관료들을 논리로 제압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실효성 없는 탁상행정, 면피성 전시 행정이 난무하고,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다. 모처럼 좋은 시책을 내놓아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학교장들을 관리·감독하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육감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교육에 대한 안목과 전문 지식은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한다고 해도, 학교 현장을 깊이 이해하려면 교사·학생·학부모와의 소통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 혁신 마인드를 가진 교육 관료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걸림돌이 되는 관료들은 가차 없이 내쳐야 할 때도 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 손쉬운 게 없다.
진보 교육감 3기를 거치면서 교육 관료의 완고한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장 공모제 등을 통해 교육 관료 승진 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고, 혁신 마인드를 공유하는 새로운 관료들이 성장해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학교장의 리더십에도 뚜렷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진보 교육감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대다수 교육 관료들도 점차 교육 혁신 운동을 대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진보 교육감 4기에 들어서면 이 같은 변화는 더 큰 흐름으로 확대될 것이고, 이것은 진보 교육감의 교육 혁신 운동을 뒷받침하는 행정적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진보 교육감 3기에 걸쳐 행정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시행착오의 위험을 줄이고 혁신적 교육 행정을 더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진보 교육감이 계속 배출된 전북과 강원의 경우, 교육청이 다양한 정책들을 의욕적으로 제시하며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다양한 교육 주체들의 성장
교육감 선거가 주민 직선으로 치러지면서 특히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났다. 유권자인 학부모와 지역 사회, 그리고 교원단체와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 등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가 교육 정책에 직접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긴 하지만, 진보 교육감을 당선시킨 개혁적인 교육·시민 사회와 교육청 사이에 정책 협의회 등 다양한 소통 경로가 일상화되었고,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최초의 단체 교섭을 통해 차별 철폐와 고용 안정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지자체와 협력하는 지역별 혁신교육지구 등의 사업이 확대되면서 교육 행정과 지역 사회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지역 사회와 학교가 활발한 상호 침투 작용을 벌이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학교교육에 대한 지역 사회의 관심과 책임을 확대하고 학교의 공적 책무성을 강화하는 한편, 다양한 교육 주체들의 요구가 전면화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학교와 지역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각각의 권한과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역 사회의 과도한 요구는 학교교육을 위축시킬 위험성이 있지만, 지역 사회와의 긴밀한 소통은 학교교육의 다변화에 커다란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지역 사회가 공교육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학교가 공교육의 소임을 다하도록 측면에서 엄호하고 지원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계기로 학생은 수동적 피교육자가 아닌 적극적 학습자, 보편적 인권의 향유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변화의 물꼬는 이미 터졌고, 최근 불거진 학교 안 ‘미투Me Too’ 운동에서 보이듯이 학생들은 기존의 봉건적이고 불합리한 교육 관행에 대해, 두발·복장 등 신체의 자유 확대, 학교 운영 참여, 경쟁 교육의 철폐 등 전방위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청소년이 중심이 된 ‘선거권 연령 하향 운동’은 이런 요구가 머잖아 정치적 요구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분명한 사실은, 진보 교육감 4기에 접어들면 학교와 다양한 교육 주체 간의 관계는 한층 더 긴밀해질 것이고, 요구 또한 더 적극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교육 주체 간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더 공고하게 하고, 교육과 무관한 외부의 요구로부터 공교육의 본령을 지키는 역동적인 힘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진보 교육감은 반드시 필요하다.
진보 교육감 4기, 미리 살펴야 할 문제들
3기에 걸친 진보 교육감들의 괄목할 성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4기 선거가 코앞에 닥쳐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논의를 건너뛸 수는 없다.
“진보 교육감 만들어 놨더니 이런 것 하나 해결 못 하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진보 교육감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교사들은 관료주의적 교육 행정이 여전히 학교 현장을 옥죄며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교육과 무관한 잡무 때문에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학생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졌지만 체벌과 인권 유린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사립 학교의 고질적 비리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교육청의 제재는 번번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발 벗고 뛰어 진보 교육감 만들어 놨더니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하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진보 성향 교육·시민단체들이 벌이는 후보 단일화 예비 경선이 최근 내부 갈등에 휩싸이며 난항을 거듭하는 이유도 이런 인식과 관련이 있다. 교육감만 바뀌었을 뿐 학교 현장에서는 피부에 와닿는 변화가 적다 보니 진보 교육감에 대한 기대가 실망과 분노로 바뀐다. 이런 정서가 선거 국면을 맞아 대항마를 물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기회를 엿보던 잠룡들이 우후죽순으로 출사표를 던진다. 이런 조건에서는 단일화 경선이 아름다운 경선으로 매끄럽게 진행될 리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교육감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교육 관료가 되어 교육청에 들어간 일부 인사는 ‘혁신교육 전도사’가 되기는커녕 ‘혁신팔이 관료’로 변신하여 “구관이 명관”을 외치기도 한다. 교육을 바꾸라고 쥐어 준 권력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는 꼴이다. 이러다가는 진보 교육감도 ‘무늬만 진보 교육감’과 ‘참 진짜 진보 교육감’으로 나눠야 할 판이다.
충족되지 못한 기대감, 관료주의의 견고한 벽, 학교 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교육 혁신의 바람, 일부 인사의 굴절된 입신주의가 한데 뒤엉겨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기고 교육감 선거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이런 가운데 교육감 선거가 치러지다 보니 걱정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류인가, 한계인가?
진보 교육감에 대한 실망감이 큰 곳일수록 교육감 선거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교복 업체, 수학여행·체험 학습 업체, 학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당사자들은 발 벗고 선거에 뛰어드는데, 정작 교육의 주체라고 할 교사와 학부모, 개혁적 시민 사회는 한 발만 담근 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교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어 놓은 선거법도 여기 한몫 거든다. 진보 교육감에 대한 실망이 거듭되면서 변화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정치 공학적 타산이 앞선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진보 교육감 개인에 대한 평가와 진보 교육감을 탄생시킨 교육 자치 선거의 의미에 대한 판단은 범주를 달리하는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둘을 구분하여 접근하지 않으면 올바른 해법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 지역 진보 교육감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교육감 선거 자체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타당한 접근법이 아니다.
진보 교육감이 출현함으로써 해방 후 70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교육계의 완고한 관료주의의 벽에 균열이 일어났고, 그 틈새를 비집고 교육 혁신의 싹이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진보 교육감의 역할은 그 틈새를 더 벌리는 것이고, 교육 주체와 시민 사회의 역할은 그 틈새가 다시 닫히지 않게 버팀목을 고이고 더 많은 싹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이라는 ‘교육 권력’은 여전히 관료주의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있고, 교육 주체의 역량도 매우 제한적이어서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하고 있다. 또 공교육의 바람직한 변화 방향에 대한 진보 진영 내 합의도 대단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조건에서 진보 교육감한 사람에게 멍에를 짊어지게 하고 실패의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진보 교육감이 맞닥뜨리는 한계는, 지방 교육 권력을 제약하는 현 단계 교육 자치 제도의 한계로부터 기인하는 측면이 크고, 진보 교육감의 시행착오는 교육 주체와 시민 사회의 교육 담론의 척박한 수준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진보 교육감의 부진이 능력과 의지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인지, 법과 제도의 한계에 가로막힌 것인지, 관료 조직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 탓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계와 오류는 명확히 구분해야 하고, 제도적 한계를 교육감의 의지 부족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능력과 의지 부족을 법과 제도 탓으로 호도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문제는 선거를 계기로 진보 교육감들의 오류를 정확히 짚어 내고, 한계를 넘어설 실천적 방도를 찾는 것이다. 단지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시민 사회가 교육 권력과 거리를 두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선거 공약을 논의하는 좁은 의미의 정책 토론회도 필요하겠지만, 지역별로 진보 교육감의 오류와 한계를 짚어 보고 오류는 비판하되 객관적 한계를 극복할 제도적 보완책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후보자 간의 무책임한 선명성 경쟁으로 치달아 교육 자치 선거의 실천적 의미가 퇴색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지역의 선거가 경선을 둘러싼 인물 대결로 치닫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진보 교육감도 사용자”?
일부에서는 학교 관련 노동 문제를 들어 “진보 교육감도 사용자일뿐”이라며 진보 교육감에 대한 기대치를 하향 조정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교육감은 국가 교육 행정의 실무 책임자로서 교사와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사용자의 지위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학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에 대해 그동안 진보 교육감들이 보여 준 소극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나름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만 머물 경우, 교육감을 ‘사용자-노동자’라는 관계에 고착시킴으로써 진보 교육감이 담보할 공교육의 변화 가능성을 지치게 협소하게 볼 위험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학교교육에 관련을 맺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 간의 복합적인 관계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학생의 정신적·신체적 성장을 돕는 교육 노동의 독특한 성격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실패할 수 있다.
또 이 구분법을 적용할 경우 교육의 중요한 당사자이면서 교육감과 고용 관계에 놓이지 않은 학생·학부모·시민 사회가 위치할 공간이 사라지게 되고, 이것은 공교육의 발전을 위한 시민 사회의 광범위한 연대를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나아가 시민 사회가 중앙 권력에 맞서 지방 권력의 분점을 위해 고군분투해 온 지방 자치 운동의 의미를 축소하고, 보수·수구 세력이 독점해 온 교육 권력의 일부를 진보·개혁적 시민 사회가 진보 교육감을 통해 ‘탈취’하는 데 성공한 운동적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만약 이 주장의 실천적 귀결이 ‘교육감 선거 무용론’이나 ‘진보 교육감 활용론’으로 흐른다면, 이것은 결국 교육감 선거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을 부추겨 교육 개혁의 동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노동자가 선거에 참여하는 이유가 단지 ‘덜 나쁜 사용자’를 뽑아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면, 노동자가 선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어 온 그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최초로 단체 교섭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보 교육감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공무원 총 정원제의 제약에 막혀 완전한 정규직화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지만, 차별 철폐와 고용 안정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육감을 사용자로 바라보는 시각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감을 적어도 ‘모범적인 사용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진보 교육감은 여전히 필요하다.
교육 주체 간의 새로운 관계 맺기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후보 예비 경선 과정에서 교육 주체의 다양한 요구가 두드러지고 있는 점이다. 최근 공교육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면서 다양한 주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와 결합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공교육의 중요한 협력자임에도 합당한 처우와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혁신교육지구 등 지역 사회와 협력해야 하는 사업이 크게 늘면서 지역 사회의 요구도 강화되고 있다. 또, 이는 지난 3기 선거 등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시행했던 바이지만,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에게도 교육감 예비 경선 선거인단 자격을 부여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이런 변화는 교육감 선거를 준비하는 시민 사회 내부에 미세한 인식의 편차를 낳으며 경선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가 선거 공약으로 등장한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자칫 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근간을 흔들 경우 공교육의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영어 원어민 교사, 영어 회화 전문 강사, 방과 후 돌봄 강사, 기간제 교사 등 사안 하나하나가 인화성 강한 주제들이다.
그동안 교육청과 학교를 단선적으로 연결하는 폐쇄 회로와도 같았던 공교육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교육감은 이런 변화에 적극 부응해야 할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지금부터라도 학교와 교육청, 지자체와 시민 사회가 각각의 역할과 권한, 책임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를 위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관료 행정의 벽 허물기
교육 자치는 교육 행정의 지방 분권을 통하여 주민의 참여 의식을 높이고 지방의 실정에 맞는 적합한 교육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 자치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중앙 권력은 물론 일반 행정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이 필수적이다. 또 학교 자치로 이어져 단위 학교 교육 주체들의 자율적 통제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교육 자치의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의 획일적인 지시와 통제를 지양하고, 지방의 실정과 특수성을 감안한 교육 정책을 수립해야 하고, 교육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깊이 이해하고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민주적 교육 행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 학부모나 지역 사회 대표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지역 교육 정책의 심의·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함께 교육 활동의 중요한 담당자인 교사에게는 교육과정의 자율적 편성과 평가 권한,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폭넓은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이 일으킨 혁신의 바람은 아직 교문 앞에서 멈추어 있다. 중앙 정부의 획일적 지시는 많이 줄었지만 교육청의 잡다한 지시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고, 교육 행정은 학교의 교육 활동을 돕기는커녕 기존의 편의주의·보신주의의 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학교의 자율성은 여전히 취약하고 교육 주체의 의사 결정 참여는 형식에 머물러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교는 여전히 교장이 다스리는 봉건 왕국이고 “학교 자치는 교장 자치”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끊이지 않는다.
교육 자치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학교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청-지역 지원청-학교’로 이어지는 상명하복 관료 체제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학교는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현재 학교장이 장악하고 있는 강력한 권한을 과감하게 분산시켜 학교장의 역할을 재조정하는 수밖에 없다. 교육 주체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분배하고 학교 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장 승진 제도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장벽이다. 기존의 승진 제도가 충분히 무력화될 때까지 다양한 형태의 공모제·선출제 등 실험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마치며
진보 교육감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교육 혁신 운동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의 속도와 폭은 제각각 달라도 변화의 물꼬는 이미 터졌고, 교육의 변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진보 교육감들은 그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 이번 교육 자치 선거는 그 흐름을 계속 이어 가는 여정의 중간 다리다. 교육에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육감 선거에 관심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이유다.
민선 교육감 4기, 교육감 선거와 ‘진보 교육감’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송원재
norusong@gmail.com
전교조 해직 교사,
전교조 서울지부 교권상담실장
교육감 직선제가 도입된 지 어느새 8년, 곧 민선 교육감 4기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다. 2기 선거에서 6명의 진보 교육감이 등장한 뒤, 3기 선거에서는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무려 13곳에서 진보 교육감이 당선되어 이른바 ‘진보 교육감 시대’가 열렸다. 그 뒤에 치러지는 이번 선거에도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
교육감은 광역 자치구 안에서 교육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교직원의 인사와 복무, 교원의 임용과 상·벌, 초·중·고 교육의 장학과 평가, 공립 학교의 설립과 폐쇄, 자사고·특목고·혁신학교의 지정과 취소, 병설 유치원의 설립과 운영, 교육 관련 조례의 발의, 공·사립 학교의 지도·감독, 교육 예산의 편성과 배분, 학원의 인·허가, 사립 학교 임원의 승인, 학교 비정규직의 채용과 처우 등 교육감이 가지고 있는 권한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방대하고 크다. 서울시 교육감이 한 해에 주무르는 예산만 9조 원을 넘는다. 교육감을 ‘교육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교육감이 손댈 수 없는 것도 있다. 유·초·중·고 교원의 양성, 교원의 정원 책정, 교육과정 편성, 교과서 편찬, 특별 교부금, 대학 입시는 중앙 정부의 권한이다. 그러나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에서 합의하여 건의하는 의견은 교육부도 무시하기 어렵다. 최근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교육부에 대학 입시 개혁 방안을 건의한 것이 그 예다. 교육감들은 중앙 정부의 교육 정책 결정 과정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교육감의 교육적 철학과 소신에 따라 유·초·중·고 교육이 크게 좌우된다. 경쟁과 선발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사람이 교육감에 당선되면 일제 고사가 부활하고 자사고·특목고가 늘어난다. 학생인권과 교사·학부모의 참여를 강조하는 진보 교육감이 등장하면 혁신학교가 늘고 무상급식이 확대되고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다. 학교교육에 한 발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육감 선거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
진보 교육감이 남긴 것, 성과와 과제
진보 교육감 시대는 진보 진영이 주장해 온 교육 개혁 담론이 처음으로 시험대에 오른 시기였다. 진보 진영은 오래전부터 입시 위주 경쟁 교육에 반대하며 ‘소통과 성장의 협력 교육’을 주장했고, 부유층의 교육 기회 독점을 비판하며 ‘교육의 기회 균등’과 ‘교육 복지 확대’를 요구했다. 또 국가 주도의 관료 행정에 대항하며 ‘교육 행정의 민주화’를 주장했고, 교육계의 치외 법권 지역으로 치부되던 사립 학교에 ‘공적 통제의 도입’을 요구했다.
이 같은 요구는 단지 ‘담론’ 수준에만 머물렀을 뿐, 실제로 정책으로 실현되어 현실 적합성을 검증받을 기회를 전혀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 출현과 동시에 개혁적 교육 담론은 이론의 세계를 떠나 현실의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국민들은 막연하나마 교육의 근본적 변화를 갈구했고, 진보 교육감들은 ‘혁신 교육’이라는 지도 한 장을 손에 쥐고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렸다.
혁신학교운동
진보 교육감의 트레이드마크인 혁신학교는 관료적 교육 행정 체제의 말단 기구에 불과했던 학교를 ‘교육하는 곳’으로 바꿔 놓았다. 상명하복식 학교 문화가 수평적 공동체 의식으로 바뀌었고, 교원이 교육과 무관한 행정 업무로부터 벗어나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교사는 수업을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열정을 쏟았고, 학부모는 학교의 의사 결정 과정에 적극 참여하며 교육의 협력자로서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진보 교육감들은 이 같은 변화를 일구기 위해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원의 행정 업무 경감을 위해 지원 인력을 늘리고, 특색 사업의 추진을 위해 추가 재정을 투입했다. 학교 구성원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학교장의 민주적 리더십을 강조했고, 교직원 회의에서는 토론과 대화가 일상적 의사 결정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정책적 지원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혁신학교는 신종 특권 학교”라는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대다수 학부모와 학생은 혁신학교의 실험을 적극 환영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대부분의 혁신학교가 교사들의 자발적 의지를 주동력으로 삼다 보니 ‘그렇지 않은 교사들’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으로 인식되거나, 심지어 “혁신학교는 업무 폭탄”이라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장기간의 헌신적 노력에 따르는 교사들의 ‘혁신 피로 증후군’도 치유해야 한다. 혁신 마인드 없이 트렌드만 좇는 ‘무늬만 혁신학교’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다. 양적 확대보다는 질적 안정이 더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또 교육감의 정책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다 보니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어지는 순간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는 경향도 보인다. 어떤 정책들은 혁신학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어서 특별한 행·재정적 지원이 없는 일반 학교에 적용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혁신학교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실험이지만 지금까지는 비교적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교육감의 정책 의지와 행·재정적 지원 등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지속화하고, 혁신학교의 성과를 일반 학교에도 적용할 방안을 찾아야만 비로소 현실 적합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혁신학교운동이 실험 단계를 넘어 제도로서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상당 기간 필요하고, 그것을 보장할 진보 교육감은 빼놓을 수 없는 필요조건이다.
경쟁 교육의 완화, 균등한 교육 기회의 보장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과 기대는 교육의 본래 의미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인류 역사가 축적해 온 보편적 지식과 가치관을 전수하기보다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집단의 이념을 주입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에 잠재된 가능성을 발견하여 성장점을 자극하고 발달시키기보다는 고등교육 기회를 선점하여 더 나은 노동 조건과 미래의 수입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여긴다. 교육 기회에 접근할 기회는 치열한 경쟁을 동반하고, 초·중·고 교육은 그것을 준비하는 예비 단계라는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충분한 가용 자산을 확보한 계층은 경쟁을 지속적으로 심화시켜 탈락자를 양산하고, 자산이 빈약한 계층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질을 깎아 내리는 사회적 자해 행위를 반복한다. 그래서 교육에서의 지나친 경쟁은 그 자체로 사회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비교육적이다. 공교육에서 경쟁을 강요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육 기회를 분배하는 ‘공정한 제도’의 뒤에는 이런 계급적 음모가 숨어 있다.
진보 교육감들은 이 같은 경쟁 교육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며 ‘경쟁 대신 협력’을 표방했고, 구체적인 정책으로는 ‘일제 고사의 표집 전환’, 자사고·특목고 등 ‘특권 학교의 축소·폐지’, ‘고교 평준화 확대’로 나타났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세례 뒤 우리 사회를 풍미한 경쟁 이데올로기의 교육 부문 적용을 일정 부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었고, 과도한 교육 경쟁의 사회적 효용성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과도한 경쟁 비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중·하위 계층의 절망적 분노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사회 정의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교육 정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성공한 게 아니다. 교육 기회는 여전히 불공정하고 특히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요구하는 고등교육 기회의 분배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교육 경쟁의 최후 관문인 대학 입시 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특권 학교의 존립을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도 흔들림 없이 건재하다. 진보 교육감이 한 일은 단지 초등 일제 고사를 표집으로 전환하고, 특권 학교의 신규 설립을 불허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래서 전국 시·도 교육감들이 대입 제도 개혁과 교육감의 권한 강화를 정부에 건의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대입 제도는 교육감 권한이 아니지만 초·중·고 교육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고, 교육감 권한을 제약함으로써 사실상 교육 자치를 부정하는 족쇄를 풀어 달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감들의 이런 움직임이 문재인 정부의 특권 학교 폐지 공약과 맞물리면, 고교 평준화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전국의 특권 학교를 일거에 폐지하고, 적어도 초·중·고 단계에서는 교육 기회 균등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중앙 정부와 손발을 맞출 진보 교육감이 필요하다.
교육 행정 경험의 축적
교육감은 기본적으로 운동가가 아니라 행정 책임자다. 진보 교육감 역시 교육·시민운동 진영의 추대를 받아 당선됐다고 해도, 국가 기관인 교육청 행정 체제의 일부로서 국고로 충당되는 인적·물적 자산을 기반으로 법령에 근거하여 교육 행정을 펼쳐야 한다. 따라서 교육감의 행정 행위는 〈교육기본법〉과 〈초·중등교육법〉, 공무원법과 온갖 시행령 및 행정 규칙이 규정한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 만약 교육감의 의욕이 지나쳐 법령을 위배하는 행정을 펼칠 경우 소송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패소하여 행정 행위가 무효가 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최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비리를 저지른 한 사립 학교의 임원 승인을 모두 취소하고 관선 이사를 파견했다가 법원으로부터 패소 판결을 받은 것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교육감의 역할은 유권자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육감의 행정 행위를 규정하는 법령과 규정은 깨알처럼 촘촘하고 이전 정부가 만들어 놓은 온갖 제약 장치들도 여전히 살아 있다. 어떤 것은 아직도 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딱 부러지게 선을 긋는 것도 쉽지 않다. 진보 교육감을 뽑아 준 유권자와 지지 세력은 이제나저제나 변화의 물결을 고대하는데, 교육감은 법과 제도의 틀 안에 갇혀 있다.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교육 관료의 높은 벽이다. 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고 풍부한 현장 경험도 없이 필마단기로 교육청에 진입한 교육감을 기다리는 것은 기존 교육 관료들이다. 이들은 법령과 제도에 관한 전문 지식으로 무장하고 마음만 먹으면 ‘되는 이유 백 개’와 ‘안 되는 이유 백 개’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데리고 들어간 극소수의 보좌진 역시 교육 행정은커녕 공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과 현장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이 노회한 교육 관료들을 통제하고 지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교육감이 교육 관료들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무엇보다도 공교육에 대한 전문 지식과 깊은 안목, 그것을 학교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이 필수적이다. 그것이 뒷받침되어야만 교육 관료들을 논리로 제압하고 스스로 움직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실효성 없는 탁상행정, 면피성 전시 행정이 난무하고,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는’ 황당한 상황이 연출된다. 모처럼 좋은 시책을 내놓아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학교장들을 관리·감독하는 일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육감 혼자 노력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교육에 대한 안목과 전문 지식은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한다고 해도, 학교 현장을 깊이 이해하려면 교사·학생·학부모와의 소통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 혁신 마인드를 가진 교육 관료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걸림돌이 되는 관료들은 가차 없이 내쳐야 할 때도 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 손쉬운 게 없다.
진보 교육감 3기를 거치면서 교육 관료의 완고한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교장 공모제 등을 통해 교육 관료 승진 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고, 혁신 마인드를 공유하는 새로운 관료들이 성장해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학교장의 리더십에도 뚜렷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진보 교육감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그동안 사태를 관망하던 대다수 교육 관료들도 점차 교육 혁신 운동을 대세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진보 교육감 4기에 들어서면 이 같은 변화는 더 큰 흐름으로 확대될 것이고, 이것은 진보 교육감의 교육 혁신 운동을 뒷받침하는 행정적 기반으로 작동할 수 있다.
진보 교육감 3기에 걸쳐 행정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시행착오의 위험을 줄이고 혁신적 교육 행정을 더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성과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진보 교육감이 계속 배출된 전북과 강원의 경우, 교육청이 다양한 정책들을 의욕적으로 제시하며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다양한 교육 주체들의 성장
교육감 선거가 주민 직선으로 치러지면서 특히 두드러진 변화가 나타났다. 유권자인 학부모와 지역 사회, 그리고 교원단체와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 등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가 교육 정책에 직접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은 미흡한 수준이긴 하지만, 진보 교육감을 당선시킨 개혁적인 교육·시민 사회와 교육청 사이에 정책 협의회 등 다양한 소통 경로가 일상화되었고, 학교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최초의 단체 교섭을 통해 차별 철폐와 고용 안정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지자체와 협력하는 지역별 혁신교육지구 등의 사업이 확대되면서 교육 행정과 지역 사회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지역 사회와 학교가 활발한 상호 침투 작용을 벌이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학교교육에 대한 지역 사회의 관심과 책임을 확대하고 학교의 공적 책무성을 강화하는 한편, 다양한 교육 주체들의 요구가 전면화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 학교와 지역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각각의 권한과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지역 사회의 과도한 요구는 학교교육을 위축시킬 위험성이 있지만, 지역 사회와의 긴밀한 소통은 학교교육의 다변화에 커다란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지역 사회가 공교육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학교가 공교육의 소임을 다하도록 측면에서 엄호하고 지원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계기로 학생은 수동적 피교육자가 아닌 적극적 학습자, 보편적 인권의 향유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변화의 물꼬는 이미 터졌고, 최근 불거진 학교 안 ‘미투Me Too’ 운동에서 보이듯이 학생들은 기존의 봉건적이고 불합리한 교육 관행에 대해, 두발·복장 등 신체의 자유 확대, 학교 운영 참여, 경쟁 교육의 철폐 등 전방위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청소년이 중심이 된 ‘선거권 연령 하향 운동’은 이런 요구가 머잖아 정치적 요구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분명한 사실은, 진보 교육감 4기에 접어들면 학교와 다양한 교육 주체 간의 관계는 한층 더 긴밀해질 것이고, 요구 또한 더 적극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교육 주체 간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더 공고하게 하고, 교육과 무관한 외부의 요구로부터 공교육의 본령을 지키는 역동적인 힘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진보 교육감은 반드시 필요하다.
진보 교육감 4기, 미리 살펴야 할 문제들
3기에 걸친 진보 교육감들의 괄목할 성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4기 선거가 코앞에 닥쳐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논의를 건너뛸 수는 없다.
“진보 교육감 만들어 놨더니 이런 것 하나 해결 못 하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진보 교육감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교사들은 관료주의적 교육 행정이 여전히 학교 현장을 옥죄며 단위 학교의 자율성을 제약하고, 교육과 무관한 잡무 때문에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학생들은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졌지만 체벌과 인권 유린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사립 학교의 고질적 비리도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교육청의 제재는 번번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 “발 벗고 뛰어 진보 교육감 만들어 놨더니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하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진보 성향 교육·시민단체들이 벌이는 후보 단일화 예비 경선이 최근 내부 갈등에 휩싸이며 난항을 거듭하는 이유도 이런 인식과 관련이 있다. 교육감만 바뀌었을 뿐 학교 현장에서는 피부에 와닿는 변화가 적다 보니 진보 교육감에 대한 기대가 실망과 분노로 바뀐다. 이런 정서가 선거 국면을 맞아 대항마를 물색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기회를 엿보던 잠룡들이 우후죽순으로 출사표를 던진다. 이런 조건에서는 단일화 경선이 아름다운 경선으로 매끄럽게 진행될 리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교육감을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교육 관료가 되어 교육청에 들어간 일부 인사는 ‘혁신교육 전도사’가 되기는커녕 ‘혁신팔이 관료’로 변신하여 “구관이 명관”을 외치기도 한다. 교육을 바꾸라고 쥐어 준 권력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는 꼴이다. 이러다가는 진보 교육감도 ‘무늬만 진보 교육감’과 ‘참 진짜 진보 교육감’으로 나눠야 할 판이다.
충족되지 못한 기대감, 관료주의의 견고한 벽, 학교 현장에 도달하지 못하는 교육 혁신의 바람, 일부 인사의 굴절된 입신주의가 한데 뒤엉겨 정치적 무관심을 부추기고 교육감 선거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이런 가운데 교육감 선거가 치러지다 보니 걱정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류인가, 한계인가?
진보 교육감에 대한 실망감이 큰 곳일수록 교육감 선거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교복 업체, 수학여행·체험 학습 업체, 학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당사자들은 발 벗고 선거에 뛰어드는데, 정작 교육의 주체라고 할 교사와 학부모, 개혁적 시민 사회는 한 발만 담근 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교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묶어 놓은 선거법도 여기 한몫 거든다. 진보 교육감에 대한 실망이 거듭되면서 변화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정책적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정치 공학적 타산이 앞선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진보 교육감 개인에 대한 평가와 진보 교육감을 탄생시킨 교육 자치 선거의 의미에 대한 판단은 범주를 달리하는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둘을 구분하여 접근하지 않으면 올바른 해법에 도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 지역 진보 교육감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교육감 선거 자체의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타당한 접근법이 아니다.
진보 교육감이 출현함으로써 해방 후 70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교육계의 완고한 관료주의의 벽에 균열이 일어났고, 그 틈새를 비집고 교육 혁신의 싹이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진보 교육감의 역할은 그 틈새를 더 벌리는 것이고, 교육 주체와 시민 사회의 역할은 그 틈새가 다시 닫히지 않게 버팀목을 고이고 더 많은 싹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이라는 ‘교육 권력’은 여전히 관료주의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있고, 교육 주체의 역량도 매우 제한적이어서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지 못하고 있다. 또 공교육의 바람직한 변화 방향에 대한 진보 진영 내 합의도 대단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런 조건에서 진보 교육감한 사람에게 멍에를 짊어지게 하고 실패의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진보 교육감이 맞닥뜨리는 한계는, 지방 교육 권력을 제약하는 현 단계 교육 자치 제도의 한계로부터 기인하는 측면이 크고, 진보 교육감의 시행착오는 교육 주체와 시민 사회의 교육 담론의 척박한 수준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진보 교육감의 부진이 능력과 의지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인지, 법과 제도의 한계에 가로막힌 것인지, 관료 조직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 탓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계와 오류는 명확히 구분해야 하고, 제도적 한계를 교육감의 의지 부족으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능력과 의지 부족을 법과 제도 탓으로 호도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문제는 선거를 계기로 진보 교육감들의 오류를 정확히 짚어 내고, 한계를 넘어설 실천적 방도를 찾는 것이다. 단지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시민 사회가 교육 권력과 거리를 두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선거 공약을 논의하는 좁은 의미의 정책 토론회도 필요하겠지만, 지역별로 진보 교육감의 오류와 한계를 짚어 보고 오류는 비판하되 객관적 한계를 극복할 제도적 보완책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칫 후보자 간의 무책임한 선명성 경쟁으로 치달아 교육 자치 선거의 실천적 의미가 퇴색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지역의 선거가 경선을 둘러싼 인물 대결로 치닫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진보 교육감도 사용자”?
일부에서는 학교 관련 노동 문제를 들어 “진보 교육감도 사용자일뿐”이라며 진보 교육감에 대한 기대치를 하향 조정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교육감은 국가 교육 행정의 실무 책임자로서 교사와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사용자의 지위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이는 학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에 대해 그동안 진보 교육감들이 보여 준 소극적인 태도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나름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만 머물 경우, 교육감을 ‘사용자-노동자’라는 관계에 고착시킴으로써 진보 교육감이 담보할 공교육의 변화 가능성을 지치게 협소하게 볼 위험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학교교육에 관련을 맺고 있는 다양한 주체들 간의 복합적인 관계를 과소평가하게 되고, 학생의 정신적·신체적 성장을 돕는 교육 노동의 독특한 성격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는 데에 실패할 수 있다.
또 이 구분법을 적용할 경우 교육의 중요한 당사자이면서 교육감과 고용 관계에 놓이지 않은 학생·학부모·시민 사회가 위치할 공간이 사라지게 되고, 이것은 공교육의 발전을 위한 시민 사회의 광범위한 연대를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나아가 시민 사회가 중앙 권력에 맞서 지방 권력의 분점을 위해 고군분투해 온 지방 자치 운동의 의미를 축소하고, 보수·수구 세력이 독점해 온 교육 권력의 일부를 진보·개혁적 시민 사회가 진보 교육감을 통해 ‘탈취’하는 데 성공한 운동적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만약 이 주장의 실천적 귀결이 ‘교육감 선거 무용론’이나 ‘진보 교육감 활용론’으로 흐른다면, 이것은 결국 교육감 선거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을 부추겨 교육 개혁의 동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있다. 노동자가 선거에 참여하는 이유가 단지 ‘덜 나쁜 사용자’를 뽑아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면, 노동자가 선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어 온 그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최초로 단체 교섭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진보 교육감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공무원 총 정원제의 제약에 막혀 완전한 정규직화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지만, 차별 철폐와 고용 안정 측면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육감을 사용자로 바라보는 시각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육감을 적어도 ‘모범적인 사용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진보 교육감은 여전히 필요하다.
교육 주체 간의 새로운 관계 맺기
이번 교육감 선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후보 예비 경선 과정에서 교육 주체의 다양한 요구가 두드러지고 있는 점이다. 최근 공교육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면서 다양한 주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와 결합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공교육의 중요한 협력자임에도 합당한 처우와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혁신교육지구 등 지역 사회와 협력해야 하는 사업이 크게 늘면서 지역 사회의 요구도 강화되고 있다. 또, 이는 지난 3기 선거 등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시행했던 바이지만, 선거권이 없는 청소년에게도 교육감 예비 경선 선거인단 자격을 부여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이런 변화는 교육감 선거를 준비하는 시민 사회 내부에 미세한 인식의 편차를 낳으며 경선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가 선거 공약으로 등장한 것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자칫 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근간을 흔들 경우 공교육의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영어 원어민 교사, 영어 회화 전문 강사, 방과 후 돌봄 강사, 기간제 교사 등 사안 하나하나가 인화성 강한 주제들이다.
그동안 교육청과 학교를 단선적으로 연결하는 폐쇄 회로와도 같았던 공교육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교육감은 이런 변화에 적극 부응해야 할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지금부터라도 학교와 교육청, 지자체와 시민 사회가 각각의 역할과 권한, 책임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를 위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관료 행정의 벽 허물기
교육 자치는 교육 행정의 지방 분권을 통하여 주민의 참여 의식을 높이고 지방의 실정에 맞는 적합한 교육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 자치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중앙 권력은 물론 일반 행정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이 필수적이다. 또 학교 자치로 이어져 단위 학교 교육 주체들의 자율적 통제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교육 자치의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 정부의 획일적인 지시와 통제를 지양하고, 지방의 실정과 특수성을 감안한 교육 정책을 수립해야 하고, 교육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깊이 이해하고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민주적 교육 행정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 학부모나 지역 사회 대표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지역 교육 정책의 심의·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함께 교육 활동의 중요한 담당자인 교사에게는 교육과정의 자율적 편성과 평가 권한,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폭넓은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 교육감이 일으킨 혁신의 바람은 아직 교문 앞에서 멈추어 있다. 중앙 정부의 획일적 지시는 많이 줄었지만 교육청의 잡다한 지시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고, 교육 행정은 학교의 교육 활동을 돕기는커녕 기존의 편의주의·보신주의의 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학교의 자율성은 여전히 취약하고 교육 주체의 의사 결정 참여는 형식에 머물러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교는 여전히 교장이 다스리는 봉건 왕국이고 “학교 자치는 교장 자치”라는 자조 섞인 푸념이 끊이지 않는다.
교육 자치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학교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청-지역 지원청-학교’로 이어지는 상명하복 관료 체제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학교는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현재 학교장이 장악하고 있는 강력한 권한을 과감하게 분산시켜 학교장의 역할을 재조정하는 수밖에 없다. 교육 주체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분배하고 학교 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장 승진 제도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장벽이다. 기존의 승진 제도가 충분히 무력화될 때까지 다양한 형태의 공모제·선출제 등 실험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마치며
진보 교육감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교육 혁신 운동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의 속도와 폭은 제각각 달라도 변화의 물꼬는 이미 터졌고, 교육의 변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진보 교육감들은 그 대열의 선두에 서 있다. 이번 교육 자치 선거는 그 흐름을 계속 이어 가는 여정의 중간 다리다. 교육에 조금이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육감 선거에 관심의 끈을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