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호[리뷰]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 (김혜림)

리뷰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


 양지혜 외, 《걸 페미니즘 - 청소년인권×여성주의》, 2018, 교육공동체 벗



김혜림
중등 교사
erinchan@naver.com
딸만 셋인 집안의 큰딸로 태어나 부모님이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으로 자라났고 고등학생 때 페미니스트 선생님을 만나 페미니즘을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 왔지만 페미니즘으로 내 삶을 구석구석 비춰 보고 있는 건 최근인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여학생들과 만나는 요즘이 참 행복한 한편, 스스로에 대해서도 많이 반성을 하게 됩니다.



‘소녀’로 산다는 것


한국에서 ‘어린/젊은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경험일까? 문득 나의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억 하나. 중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무릎까지 오는 치마 교복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치마를 입기 위해 스타킹을 신고 또 그 위에는 우리 동네에선 ‘시치브’라고 불렀던 일종의 속바지를 입어야 했다. 이걸 입었던 이유는 팬티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여름에도 시치브를 입는 게 당연했었으니까. 또한 팬티가 보이지 않게 속바지를 입지만 속바지가 보이는 건 또 안 되는 그런 분위기였다. 여름에는 교복 안에 입은 브래지어의 모양이 보이지 않게 꼭 캐미솔이나 러닝셔츠를 입게 했다. 하지만 더운 여름에 두 벌을 겹쳐 입기 싫어서 브래지어 위에 하복 셔츠만 입었던 친구들은 종종 복장 검사 때 걸려서 등짝을 맞곤 했다. 교복 치마와 스타킹, 속바지를 처음 입었던 순간의 그 답답하고 불편한 느낌이 기억난다. 세상이 내 몸을 대하는 방식이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걸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기억 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생활 지도를 담당하는 중년 남성이었던 학생부장 교사가 여학생들에게 하굣길 핫도그 금지령을 내려서 많은 여학생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했다. 여학생들이 하굣길에 핫도그를 먹는 게 대체 왜 문제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불만을 토로했더니 친구 한 명이 그건 구강 성교를 연상하게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말하여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한 적이 있다. 핫도그 금지령을 내린 연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그 어처구니없음은 지금도 생각난다.


기억 셋. 남고에서 근무하다 새로 전근해 온 남자 교사가 자기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섹드립’이라고 불릴 만한 성적인 농담을 잘 한다며 당시 나는 이해하지 못한, ‘아줌마’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뉘앙스가 담긴 농담을 했었다. 분위기를 풀어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지만 여학생들 ― 내가 다니던 학교는 여학생 반과 남학생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의 반응이 미진하자 머쓱해하며 말을 바꿨다. 그런 농담을 몇 번 시도하고 나서 반응이 좋지 않자 몇 달 뒤에야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을 관두었다.


그 교사는 왜 그런 말을 즐거워하며 했을까. 심지어 여학생들도 재밌어하며 들을 거라고 확신하며 했을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은 최근이다. 남자들은 여성을 평가하거나 대상으로 삼는 여성혐오적 발화를 통해 공모하며 연대를 다진다는 것을. 그 선생님은 남고에서 그런 방식으로 ‘남자끼리의’ 연대감을 얻고 학생들과 친근감을 쌓아 와서 그게 어디서나 통할 방법이라고 생각했었겠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의 일부였지만 당시에는,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런 기억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름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지만 ‘여중생’, ‘여고생’, ‘여학생’, ‘소녀’로 불리던 시절 일어났던 저런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의 의미를 찾게 된 건 근래 뜨겁게 달아오른 페미니즘의 열기 속에서 많은 여성들과 함께 모든 것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새롭게 검토하게 된 이후였다. 내 또래 여성들이 겪었던 경험들을 중심으로 십 대 시절 한국 사회가 나를 어떤 식으로 길들이고 삶을 제한해 왔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실감과 분노는 지금 현재 여성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지금 현재 여성 청소년의 삶

《걸 페미니즘》은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현재 ‘여성 청소년’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고,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사자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드문 책이다. 교육공동체 벗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청소년 인권 문제를 이야기하며 당사자인 청소년들과 청소년 운동가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바 있다. 《걸 페미니즘》 역시 그 연장선상 에 있는 책으로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억압당하며 자신의 삶에서 주체 가 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집중한다. 성소수자인 청소년이 가정과 학교에서 겪는 문제, 한국에서는 ‘정상적’ 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억압적인 가족 관계 속에서 겪는 고통, 권위 적이고 소통 불능인 학교에 대한 비판은 이전의 책들에서도 제시된 바 있다.


 이 책은 여기에 ‘여성’이자 ‘청소년’인 이들이 겪는 문제에 집중하고 ‘여성 청소년’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없게 하는 한계와 제약을 생생한 체험의 언어로 들려준다.


생각해 보니 나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멈추고, 힘을 주고, 힘을 풀어 봤던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나의 몸과 외모는 나 자신과 분명히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떼어 내고 싶기도 하다. 또 남들 마음대로 평가되기도 하고, 나로부터 부정당하기도 한다.

- 유예, 〈나의 모습 나의 옷으로 자유롭게〉, 본문 45쪽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신체에 대한 위화감과 제약은 여성 청소년들에게는 한층 심각한 문제이다. 여성 청소년의 몸은 ‘미성년자’이기에 더욱 그 결정권을 존중받지 못한다. 건강과 안전을 위해 생리컵 사용을 원해도 성관계를 해 보지 않았다며, 임신을 해 보지 않았다며, ‘처녀막’이 손상되면 어떻게 하냐며 저지당한 경험을 쓴 이기의 글 〈감추고 부끄러워할수록 안전할 수 없다〉는 이를 잘 보여 준다.


또한 여성 청소년의 몸은 미완의 몸이라는 이유로 성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 동시에, 어리다는 이유로 순결 이데올로기와 소녀 판타지 사이에서 소비된다. 그리고 걸그룹과 같은 여성 아이돌로 대표되는 소녀 판타지 문화 속에서 많은 ‘소녀’들은 억압과 자괴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➊ 양지혜, 〈나의 몸은 나의 것〉, 본문 25쪽.



소녀다움이라는 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를 옭아매는 억압의 굴레였다. 현실의 나는 소녀라고 생각하는데, 왠지 남들에게 내가 소녀라고 말하기엔 부끄럽고 자신이 없었다. 그 부끄러움은 ‘소녀다움’의 이미지가 이미 매우 비현실적으로 정해져 있고, 그 특정한 이미지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세뇌되어서가 아닐까.

- 아고, 〈소녀 착취 산업, 걸 그룹〉, 본문 265쪽


이러한 성적 대상화와 제약은 여성 청소년의 자아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범죄의 대상으로도 만든다. 봄바람이 불 때마다 학교 앞에 출몰하는 일명 ‘바바리맨’, 지하철 성추행, 신체의 일부를 몰래 촬영하는 일명 ‘몰카’라고 불리는 불법 촬영. 모두 내가 여중과 여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목격한 일이다.


여성 청소년들은 아르바이트를 해도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여자애’로 취급당하며 성희롱, 성추행에 시달리면서 심지어 훈계를 받기도 한다.


많은 일터에서 나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다른 여성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기대’받았다. 일터 속에서 나의 위치는 대개 ‘젊은 혈기에 말이 많고, 사회 경험이 적어 자신이 알려 줄 것이 많은, 귀여운 여성 청소년’ 정도였다.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약자성은 나를 대상화하기 쉽게 만들었고 나를 함부로 대하기 쉬운 이유도 되었다. 온갖 부당한 대우(성희롱, 일방 통보 식 해고 등)들을 마음껏 저지르며 사장들은 당당했다.

- 피아, 〈여성 청소년이 알바를 하면〉, 본문 183쪽


이처럼 여성 청소년의 생각과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육체는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된다. 여성들이 ‘아기를 낳을 몸’이라며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화가 치미는지! 이에 더해 청소년들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유예당한 상태로 상정된다. ‘여성 청소년’의 목소리인 척 나오는 것은 대부분 성인/남성의 판타지인 ‘소녀’이다. 영화 〈은교〉 속 등장인물인 ‘은교’를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저런 여고생이 어딨어” 하고 코웃음을 쳤던 게 떠오른다.


《걸 페미니즘》을 읽기 전, 대상화된 ‘소녀’들이 아닌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함께 내가 너무 나이를 먹은 ‘꼰대’가 되어 이들의 급진적인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발심을 느끼면 어떡하지 하고 살짝 긴장도 되었다. 그러나 읽으면서는 내가 청소년이었을 때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모습에 슬퍼졌다.



학교에 페미니즘을

특히 학교와 관련하여 분석한 2부 ‘학교는 차별을 가르치는가’에 실린 아홉 편의 글은 학교의 억압과 폭력이 어떠한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생생하게 깨닫게 했다. 학교의 생활지도, 일상적인 대화나 교류 속에 깃든 성차별적 언행이나 행동을 보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던 문제들을 강렬하게 느꼈다.


최근 ‘학교에 페미니즘을’, ‘우리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 초·중·고 페미니즘교육 의무화 국민 청원 등 학교에서 페미니즘교육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구조의 학교라면 페미니즘교육도 형식화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 이유로는 우선 학교는 지극히 배타적으로 성별 이분법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교복이라는 옷을 입는 데서부터 여/남 중 하나의 성별만 강요당한다. 또한 성별 이분법은 성차별과도 연계되어 있다. 남학생이 여학생의 앞에 위치하는 출석 번호, 여학생은 부반장, 남학생은 반장을 하게 했던 관행 등은 이런 성차별의 위계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구조의 피해자로 우선 성소수자를 들 수 있다. 《걸 페미니즘》에 실린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꼬께와 트랜스젠더퀴어로 정체화한 이제의 글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틀에 맞지 않는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을 잘 보여 준다. 강력한 성별 이분법적 공간인 학교에서 그에 맞출 수 없는 성소수자 청소년은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위험도 느낀다.


또한 성차별의 위계에서 바닥에 있는 여학생들은 이중적인 메시지에 시달린다. 용모와 복장을 강도 높게 규제당하는 한편, 아름다운 외모와 몸에 대한 메시지도 함께 받는다. 이러한 이중성을 정면으로 보여 주는 글이 특성화고에서 취업을 준비하며 겪은 외모 억압과 성차별을 이야기한 담의 글이다. 여학생이니 단정한 용모를 해야 한다며 화장을 금지했다가 취업을 앞두고 체중 관리와 화장법을 언급하며 외모에 신경 쓰기를 강요하는 특성화고의 모습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이러한 이중 메시지 속에서 여학생들의 외모 꾸미기는 분열적인 성격을 띤다. 용모와 복장을 규제하는 학교에 대한 저항이자 외모 지상주의를 사회에 대한 순응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로서 여성 청소년의 외모 꾸미기에 대해 어떠한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체벌이 학교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차별화되어 있는지를 분석한 난다·한낱의 〈여성으로서 학교 체벌을 거부한다〉는 학교가 성차별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교사들은 종종 남학교와 여학교 중 어디를 선호하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남학교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로 여학생과 달리 막 패도(?) 토라지거나 앙심을 품지 않고 넘겨서 편하다는 점을 들곤 한다. 하지만 강도 높은 물리적 폭력을 당하는 남학생과 달리 일견 덜 맞는 것처럼 보이는 여학생들은 다른 형태의 압박과 폭력으로 통제를 당한다.


여학생들의 경우 체벌을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폭력이 존재한다. 거칠고 강하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남자애들과 달리 착하고 부드럽게 자라기를 요구받는 여자애들을 팰 순 없으니, 처신을 잘하고 얌전히 굴라는 무언의 압박이 끊임없이 존재한다. 여학생들에게는 더욱 ‘수치심’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벌’을 주는 경우까지 있다. ‘체벌 대신 성추행을 당한다’, ‘생활과 몸에 대한 더 많은 통제를 당한다’라고 하면 너무 비약일까.

- 난다·한낱, 〈여성으로서 학교 체벌을 거부한다〉, 본문 96쪽



이런 체제 속에서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는다는 인식으로 여성혐오 정서에 빠지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육체적 능력에 우월감을 느끼며 여학생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성차별적 편견을 강화하게 된다.


2017년 대전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여교사의 수업 시간에 집단으로 자위를 한 사건이 보여 주듯이 남학생과 여교사 사이에도 이러한 성별 권력이 작동하여 많은 남학생들은 여교사를 교사 이전에 ‘여자’로 보고 쉽게 대상화한다. 나이가 젊은 여교사일수록 그런 일은 더욱 흔하다. 여교사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식 중 하나가 체벌이다. 물론 체벌이라는 전략은 모든 교사가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여교사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고 해도 결코 남교사와 같은 대접은 받을 수 없다. 많은 여교사들은 폭력으로 학생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페미니즘교육의 단초는 성차별에 바탕을 둔 이 폭력의 연쇄 고리를 끊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를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가? “페미니즘으로 학교를 변화시키는 것은 직접적인 성차별이나 편견을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폭력과 차별에 의해서 학교가 작동하고 운영되는 원리 자체를 바꿔야 한다.”(본문 101쪽)


지금 현재 한국을 휩쓸고 있는 미투 운동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구조 자체가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전제로 깔고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구조가 발생시키는 성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또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에서 여성은 소외당해 왔다는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페미니즘은 필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학교 역시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변화해 왔다. 특히 인권의 가치는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력,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관행, 권위와 싸우는 원동력이었다. 이제 여기에 페미니즘이 더해져야 할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여성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자. ‘여자애’라서, ‘어려서’, ‘뭘 몰라서’라며 지나쳐 버린 목소리들을.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의 목소리들이 상식이 되는 그날이, 페미니즘교육이 진정으로 실현되는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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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