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저자
지난 4월 18일 홍세화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교육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진보 정당 활동가이자 시민사회 운동가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족적을 남긴 선생은 교육공동체 벗과도 인연이 적진 않았다. 2011년 교육공동체 벗 창립 당시 터잡기 조합원으로 참여한 후오랜 시간 조합원으로, 단행본 저자로, 《오늘의 교육》 필자로 많은 역할을 해 주었다.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는 3편의 글을 싣는다. 평생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선생이 우리 사회에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그 가치와 실천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모색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편집부
‘홍세화답다’는 것
그날 아침, 검은 옷을 입다가 망설였다. 사흘 전, 이번에는 아무래도 어려우실 것 같아요, 전화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홍세화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던 시간. 병이 위중한 것은 알았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며칠간 집을 떠나 있어야 하는 일정으로 짐을 싸다가, 혹시 길에서 부고를 듣게 될지 몰라 부지불식간에 검은 옷을 찾아 입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곧 다른 마음이 덮쳐 온다. ‘아직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이래.’ 나는 검은 옷을 벗어 버리고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며칠 동안 두 마음이 복잡하게 싸우고 있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음, 이제 편히 보내 드려야 한다는 마음.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하면 그를 고통 속에 붙잡아 더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편히 떠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 그는 아직 병마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먼저 놓아 버리는 건 아닌가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 시간 홍세화는 온 힘을 다해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도 인사를 전하며 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걸 하려고 그는 마지막까지 진통제를 거부하며 고통을 견디면서도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끝까지 ‘홍세화다운’ 선택이라고 했다. 그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병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고 일상 활동을 이어 나갔다. 강의도 하고, 여행도 하고, 프랑스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소박한 자유인’과 가까이 지내던 주변의 벗들과 상의하면서, 아픈 몸으로 앞으로의 삶을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결정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또 말하길 ‘홍세화답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학벌없는사회의 옛 동료들을 만나 함께 오랜 추억 속에 남아 있는 홍세화의 모습을 꺼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홍세화도 사람들이 말하는 홍세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우편물 발송 작업을 하고 있으면 말없이 앉아서 종이를 접고 봉투에 풀 붙이는 일을 거들던 사람. 어느 총회 날에는 일찍 와서 준비하는 일을 같이 하고 나서 집 김장 날이라 막상 총회는 참석 못 하고 가기도 했다. 그래서 일찍 와서 사전 준비를 같이 도왔던 것이다. 대표였지만 내가 단체를 이끌고 책임진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고, 대표라는 걸 맡았으니 누가 되지 않게 잘 해야겠다는 자세였다. 그중에 하나가 학벌없는사회 회원 가입 신청서를 들고 다니며 회원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영업 사원’이라 자처하면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신이 활동하는 단체를 소개하고 참여를 권했다. 신입 회원 가입 동기 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도 그의 이름(‘홍세화 선생님의 추천으로’)이었다. 덕분에 학벌없는사회는 회원이 꽤 늘었다. 학벌없는사회만이 아니다. 어디서나 그는 그랬고, 그 또한 ‘홍세화다운’ 일화로 남아 있다.
홍세화다운 것은 어떤 것일까?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홍세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모습은 우리가 아는 홍세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홍세화다움’을 개인의 고결한 인품으로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보적 사회운동 속에서 일관되게 취해 왔던 좌파의 위치야말로, 누락되어선 안 될 ‘홍세화다움’이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 똘레랑스, 아나키스트, 아웃사이더, 저널리스트 등 자신의 대표적 상징이 된 이름들로 호명되는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자 홍세화’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사회주의자 홍세화를 빼고 홍세화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낮은 자리, 가장자리에 있고자 했던 사람인 동시에 그것을 위해 가장 왼쪽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홍세화다움의 좌표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동지, 홍세화
홍세화는 교육운동, 특히 학벌없는사회 운동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홍세화를 학벌없는사회를 통해 처음 만났다. 어느 날 당시 해직 교수이자 학벌없는사회 대표였던 김상봉 교수가 ‘여러분, 누가 왔는지 보세요’라며 홍세화의 손을 끌고 모임에 나타났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도 유명한 사람답지 않게 등장한 그는 이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이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시작했고, 2002년에는 학벌없는사회 공동 대표가 되었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한국에 돌아와 그가 처음 시작했던 사회운동이었고, 차별과 불평등에 누구보다 저항했던 그가 가장 앞장서서 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다.
그가 돌아와 학벌없는사회 운동에 참여하던 시기의 한국은 청소년들이 꽃처럼 떨어져 죽는 나라였다. 수능 시험 날이면 유서를 쓰고, 성적이 떨어지면 옥상에서 떨어지는 나라. 대학의 서열이 사람의 서열이 되고, 학벌이 신분이 되는 나라였다. 학력과 학벌이 낮은 사람은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차별당했고, 홍세화는 한국에서 학벌주의는 인종주의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것을 간파했다.
입시 경쟁이야 과거부터 있었지만 이 시기 경쟁 질서를 제도적으로 도입하고 인위적으로 강화한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기획이었다. 학교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실험하고 수행하는 기구였다. 학벌은 사회 계급의 대물림 수단이었지만 외형적으로는 ‘취득할 수 있는 신분’이었고 다른 자본과의 호환성이 높은 상징 자본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학벌 경쟁은 전 사회적 경쟁으로 심화되었다.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과 사회 붕괴를 경험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 특히 중산층은 주식, 부동산 등 자산 취득과 함께 학벌 취득에 몰입했고, 학벌은 계급 재생산과 자산 증식, 자기 자본화의 수단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교육은 경쟁을 교육의 수단이자 목표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이, 청소년 학생들이 경쟁의 맷돌에 갈려 나갔다.
홍세화는 이러한 사태의 본질을 빠르게 이해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독재정권하의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망명객이 되었던 그는 20년 만에 민주 정부가 수립된 나라로 돌아왔다. 떠났던 나라는 통행 금지, 장발 단속의 나라였는데, 돌아온 나라는 여행 자유화, 취향 존중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 자유의 분위기에서 그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공기는 “청년 시절 고문당할 공포를 일상적으로 느끼게 했던 그 무겁고 어두웠던 사회 분위기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지만, 카드 회사가 만든 “부자 되세요”가 첫인사를 건네는 고국은 한없이 낯설었다. 그건 그가 바랐던 자유의 공기가 아니었다. 군부의 독재가 자본의 독재로 변화했을 뿐임을 그는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복종시키는 교육’은 ‘경쟁시키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다만 그때 우리는 청소년들이 죽고 병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경쟁 교육이 만들어 낸 참상에 대해서는 분노하였지만, 그런 일들을 신자유주의화라는 정세와 사회 변동의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당시 학벌없는사회의 윗세대 운동가들은 학벌을 타파해야 할 ‘구습’이자 ‘전근대성’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학벌끼리의 집단주의, 족벌주의는 비판하지만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는 옹호하고, 그것이 사회의 합리화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훗날 함께 공저자로 참여한 책, 《능력주의와 불평등》이 나오고 나서, 홍세화는 저자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한계와 오류에 대해 반성했다. “나는 그 무렵 강연을 할 때면 ‘벌’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재벌, 족벌(조중동) 언론과 학벌이었다. ‘벌’에 천착했다는 것은 능력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늘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계급 투쟁’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운동의 이념에 가장 철두철미했던 사람이 홍세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피지배 계급에게) 교육은 사회 안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젠 정말이지 ‘하면 된다’라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교육자라면 적어도 지배 세력의 상징 폭력을 일생에 걸쳐 당하도록 놔둬선 안 되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했다.
2011년 학교 밖 청소년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학벌 체제에서 밀려 나온 청소년과 적극적인 대학 거부자들을 중심으로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명서, 토론회, 연구, 저서와 같은 담론 투쟁의 형태를 넘어, 보다 현장성 있는 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려 했을 때, 홍세화는 그런 도전을 지지하며 힘을 보태 줬다.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부탁했는데, 당시 유명 작가였던 홍세화가 강사로 온다는 말에 인근의 다른 학교밖배움터 교사들도 그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그런데 교사들은 눈이 반짝반짝한 반면, 청소년들의 눈은 자꾸만 감겼다. 홍세화가 누구인지 모르고, 당연히 그의 책도 읽어 본 적 없는 청소년들은 지루함과 따분함을 온몸으로 표했다. 강의를 마치고 놀리면서, ‘안 되겠다, 좀 더 재밌어지셔라’고 주문을 하자, “제가 원래 재미가 없는 사람인데요” 해서, 재밌게 할 때까지 시킬 거라고 하자, “아이구 이거 큰일났네” 하고 수줍게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 자리를 어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던 사람. 그날 그 자리를 “외면하는 청중 앞에서 강의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고 말해 준 덕분에, 나도 외면당하는 자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 같다.
진보 정당 운동의 동지, 홍세화
작년 겨울 병세가 악화되어 녹색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났다. 당시는 병원에서 통증 조절이 어느 정도 되어 컨디션이 조금 괜찮은 때여서 차분히 제법 긴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당시 추진 중이던 민주당발 위성 정당과 진보 정당들의 선거 연합 이야기가 나와 녹색당 걱정을 했더니 “채 선생이 있으니까 난 걱정 안 해”라고 하면서 찡긋하고 웃었다. 그 말에 함께 있던 사람들도, 세상 걱정도, 싸움도, 이제 우리가 할 테니 샘은 건강을 돌보는 일에만 힘쓰셔라, 그러고 웃었다. “그래요, 당분간 난 좀 봐줘요”라고 그는 답했다. 봄이 되면 다시 오겠다고 하고, 그때까지 우리 각자의 싸움을 열심히 합시다, 하고, 병실을 나오면서 ‘홍세화 화이팅’ 하고 주먹을 쥐고 인사했다. 그도 활짝 웃으면서 화이팅 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시민이 될 것인가, 고객이 될 것인가. 숨을 거두기 직전 〈한겨레〉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가 독자들에게 남긴 말은 정치와 교육에 대한 동시 질문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는 교육만 망가뜨린 게 아니었다. 교육이 상품화되는 동안 정치도 상품화되었다. 시민적 주체성은 소비자, 투자자 주체성으로 바뀌었고, 정당 투표는 신념 투표에서 선호 투표로, 계급 투표에서 이익 투표로 바뀌었다. ‘커지거나 꺼지거나’라는 성장의 표어가 농업에서 중소농을 몰아내며 자본주의적 기업형 농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상업에서도 골목 상권까지 죄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바꾸는 동안, 정치에서는 거대 양당의 독점 구도가 형성되어 진보 정당들을 하청화했다. 대기업 하청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어진 시장과 똑같이 정치 영역도 그렇게 변해 갔다. 시민은 기업화된 정당들의 ‘고객’이 되었고 선거는 정치 행위라기보다는 투자 유치나 모객 행위와 유사한 어떤 것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고 꿈꾸는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그런 나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은 독재하에서보다 더 빈곤해졌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은 진보 정당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진보 정당이라 하면서도 기꺼이 ‘대기업’ 정당의 ‘하청’ 정당이 되어 의석을 얻는 길을 택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시민이 고객이 되었다면 우리도 고객을 위한 정당이 되자는 식이었다. 자유주의 논객들은 시대가 변했고 대중이 변했으니 그에 맞게 정당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대중 추수주의’를 ‘정치 혁신론’인 양 미화시키고 정당화했다. 내가 속한 녹색당에서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위성 정당을 통해 국회로 갈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위기를 겪었다. 이번 총선에서도 국회 입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당의 중요한 가치와 지켜야 할 원칙들이 밀려나곤 했다. ‘강령은 이상이고 정치는 현실’이라는 말이 돌아올 때면, 2011년 홍세화가 느꼈던 심정, “당의 보루라 믿었던 원칙들이 하루아침에 버림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둑이 흔들리고 금이 가는 것”을 느꼈던 그 심정이 그대로 나의 심정이 되곤 했다.
총선이 끝나면, 그와 함께 진보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전화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괜히 걱정을 보태 치료에 전념하는 데 방해가 될까 하지 못했다. 총선이 끝나면 언제 한번 찾아가고 싶었는데, ‘언제 한번’은 다시 오지 않았다. 작년 봄에 그가 먼저 전화해서 “그곳에 훌쩍 한번 가도 되겠어요?”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렇게 통화를 하고 지내는 관계는 아니어서 갑작스런 전화가 이상할 만도 했는데, 반가웠지만 그냥 안부를 물으며 으레 하는 한번 보자는 말 이상으로 듣지 않았다. ‘훌쩍 오시지요’가 아니라 ‘언제 볼까요?’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된다. 그 후회 때문일까, 아니면 현재의 위기가 이전의 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일까. 그 이후로 요즘 나는 ‘다음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을 계획한다. 모든 일들이 미룰 수 없는 일이 됐다.
선배 홍세화
마지막 만남에서 오래 마음에 남는 대화가 있다. ‘선배가 되어 주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그날 함께 면회했던 분들이 옛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운동하는 후배가 쌀이 떨어지면 쌀독을 채워 주고, 돈이 없으면 돈을 모아 주고, 일자리가 필요하면 일을 찾아 주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그때 이야기를 들으니까 요즘 청년들은 정말 외로운 것 같아요. 주위에 선배도 없고 어른도 없고, 의논할 사람도, 기댈 사람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기든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해결하고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처절하게 외로운 세대, ‘옆에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 지금의 청년들 같아서,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요.”
물론 그런 선후배 관계가 다 좋기만 했던 건 아님을 잘 안다. 인간적인 정리 때문에 선배가 부탁하면 외면하지 못하고, 후배는 선배의 잘못을 비판하지 못하고, 선배는 따르는 후배를 챙겨 주면서 운동 내부의 정실주의가 생겨나고 그게 사회운동을 부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세대 간 지원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기도 하다. 어떤 청년들에겐 부모와 가족의 사적 네트워크가 그대로 자신의 관계 자본이 되지만 다른 청년들에겐 그 관계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 되고 억압이 된다.
사적 관계에서 지원이 부족한 청년들에겐 공적 지원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선배 한 사람, 기댈 수 있는 어른 한 사람과 같은 존재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지금 진보 운동에서는 권력에 투항하지 않고, 자본의 승리를 쉽게 수용하지 않고, 세상은 끝났다고 냉소하고 좌절하지 않으며, 변함없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싸우는 선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 주는 믿음직한 선배인 동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젊은 날의 나에겐 홍세화가 그런 사람이었다. 학벌없는사회에서는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는데, 회의나 토론을 할 때, 저쪽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오늘 잘 들었어요’ 하고 찡긋 웃어 주고 가면, 작은 동의의 표현이 큰 자신감과 용기가 되곤 했다. 첨예한 정치 사회적 논쟁이 벌어질 때도 그랬다. 같은 목소리를 내는 홍세화의 글은 든든한 선배가 한쪽에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거꾸로 많은 후배 활동가 동지들에게서도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데, 나도 그에게 가끔은 그런 후배였기를 바란다. 훌륭한 선배고 존경하는 어른이지만 결코 벗과 동지는 될 수 없는 관계가 있는데, 홍세화는 그렇지 않았다. 선배 홍세화는 친구 홍세화이기도 했고, 동지 홍세화이기도 했다. 그는 선생으로 불렸지만 늘 학생의 자세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프랑스에서 막 돌아왔을 땐 이곳에 없던 공백기에 여기 있었던 젊은 우리들에게 자신에게 없는 경험과 기억을 열심히 묻고 들었다. 우리가 프랑스 이야기를 들은 건 많지 않았고, 대신 그에게 한국 이야기는 많이 들려줬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아직도 듣는 말보다 하는 말이 더 많은 나를 반성하게 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도 이 위기의 시대를 같이 의지하며 건너갈 수 있는 선배나 어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가 떠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 주는 홍세화에 대한 이야기에도 ‘선배가 되어 준 홍세화’, ‘어른 같았던 홍세화’를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 대한 불편함도 드러났다. 나도 그의 죽음을 ‘시대의 어른’을 상실한 것으로 말하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의 어른’ 같은 표현은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던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호명일 것이다. 하지만 어른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우리는 어른일까를 묻고, 자신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어른이 되기를 부정하거나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러면서도 기댈 수 있는 어른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분명 사회학과 교육학적 해석이 필요한 장면이었다. 이후로 선배를 찾고 어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러내는 시대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선배가 된다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홍세화의 부탁
그날 내가 ‘선배 없는 청년들’에 대해 안타까워했을 때,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었다. “채 선생이 있잖아요.” 그런 역할을 해 주고 있지 않느냐고 북돋워 주는 말이었겠지만, 또 한편으로 내가 듣기로는 ‘그게 안타깝거든 네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라’는 말이었다. 왜 그런지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진보 정당을 걱정하는 나에게 “채 선생이 있으니까 난 걱정 안 해”라고 했던 것은 나한테만 하는 말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말은 ‘당신들이 있으니까, 난 걱정 안 할게요’라고,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앞 주자의 부탁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홍세화와 함께 시대가 끝났느니 막을 내렸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자. 그의 삶에 본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 그런 사람은 없구나’가 아니라, 그런 삶을 닮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어딜 가든 기회가 닿는 대로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가입과 《오늘의 교육》 구독을 권유하고, 기후정의동맹 후원을 부탁하고, 녹색당 당원 가입을 권하고, 체제전환운동을 소개한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조직가가 되자’고 동지들과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홍세화로부터 배운 것을 ‘그 사람은 그랬다’로 끝내지 않고 나도 그래 보겠다고 실천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나에게는 홍세화의 수많은 물음이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 주는 선배로 계속 있어 주면 좋겠다.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고 말하던 동지로 계속 희망과 용기를 주면 좋겠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고 말하던 벗으로 계속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면 좋겠다.
부고를 들었을 땐 어쩐지 이렇게 보내선 안 될 사람을 억울하게 뺏긴 것 같고, 서럽고 분한 것이 차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졌는데, 막상 장례식장에서 입관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꼭 아기 같은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룬 ‘세화의 평화’를 보고 나니 눈물이 가시고 웃음이 지어졌다. “와, 홍샘 좀 봐 너무 이뻐.” 함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람들도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누군가 “아듀, 무슈 옹그(안녕, 홍샘)!” 하고 인사했다. 예전에 우리가 장난스럽게 부르곤 하던 호칭. 언젠가부터 편하게 웃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우리도, 스르르 함께 웃어 버렸다.
장례식장에는 유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제대로 검은 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작업복 차림, 일상복 차림으로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오는 가장자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나도 운동화, 청바지에 배낭 진 차림 그대로 달려갔다. 추도식과 발인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녹색당에서 진보 정치를 고민하는 동지들과 워크숍을 위해 대전 가는 기차를 탔다. 이제 더 씩씩해져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걱정도 싸움도 우리가 할 테니까, 수많은 홍세화들이 있을 거니까, 편히 가세요. 선생님.
기획 |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채효정
measophia@naver.com
본지 편집위원장,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 강사,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먼지의 말》 저자
지난 4월 18일 홍세화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교육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진보 정당 활동가이자 시민사회 운동가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족적을 남긴 선생은 교육공동체 벗과도 인연이 적진 않았다. 2011년 교육공동체 벗 창립 당시 터잡기 조합원으로 참여한 후오랜 시간 조합원으로, 단행본 저자로, 《오늘의 교육》 필자로 많은 역할을 해 주었다.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는 3편의 글을 싣는다. 평생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선생이 우리 사회에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그 가치와 실천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모색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편집부
‘홍세화답다’는 것
그날 아침, 검은 옷을 입다가 망설였다. 사흘 전, 이번에는 아무래도 어려우실 것 같아요, 전화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홍세화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던 시간. 병이 위중한 것은 알았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며칠간 집을 떠나 있어야 하는 일정으로 짐을 싸다가, 혹시 길에서 부고를 듣게 될지 몰라 부지불식간에 검은 옷을 찾아 입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곧 다른 마음이 덮쳐 온다. ‘아직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왜 이래.’ 나는 검은 옷을 벗어 버리고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며칠 동안 두 마음이 복잡하게 싸우고 있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마음, 이제 편히 보내 드려야 한다는 마음.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하면 그를 고통 속에 붙잡아 더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고, 편히 떠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 그는 아직 병마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먼저 놓아 버리는 건 아닌가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보니 그 시간 홍세화는 온 힘을 다해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도 인사를 전하며 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걸 하려고 그는 마지막까지 진통제를 거부하며 고통을 견디면서도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끝까지 ‘홍세화다운’ 선택이라고 했다. 그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병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고 일상 활동을 이어 나갔다. 강의도 하고, 여행도 하고, 프랑스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소박한 자유인’과 가까이 지내던 주변의 벗들과 상의하면서, 아픈 몸으로 앞으로의 삶을 어떤 식으로 살아갈지 결정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또 말하길 ‘홍세화답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학벌없는사회의 옛 동료들을 만나 함께 오랜 추억 속에 남아 있는 홍세화의 모습을 꺼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홍세화도 사람들이 말하는 홍세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우편물 발송 작업을 하고 있으면 말없이 앉아서 종이를 접고 봉투에 풀 붙이는 일을 거들던 사람. 어느 총회 날에는 일찍 와서 준비하는 일을 같이 하고 나서 집 김장 날이라 막상 총회는 참석 못 하고 가기도 했다. 그래서 일찍 와서 사전 준비를 같이 도왔던 것이다. 대표였지만 내가 단체를 이끌고 책임진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고, 대표라는 걸 맡았으니 누가 되지 않게 잘 해야겠다는 자세였다. 그중에 하나가 학벌없는사회 회원 가입 신청서를 들고 다니며 회원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영업 사원’이라 자처하면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신이 활동하는 단체를 소개하고 참여를 권했다. 신입 회원 가입 동기 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도 그의 이름(‘홍세화 선생님의 추천으로’)이었다. 덕분에 학벌없는사회는 회원이 꽤 늘었다. 학벌없는사회만이 아니다. 어디서나 그는 그랬고, 그 또한 ‘홍세화다운’ 일화로 남아 있다.
홍세화다운 것은 어떤 것일까?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홍세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모습은 우리가 아는 홍세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홍세화다움’을 개인의 고결한 인품으로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보적 사회운동 속에서 일관되게 취해 왔던 좌파의 위치야말로, 누락되어선 안 될 ‘홍세화다움’이다. 파리의 택시 운전사, 똘레랑스, 아나키스트, 아웃사이더, 저널리스트 등 자신의 대표적 상징이 된 이름들로 호명되는 가운데서도 ‘사회주의자 홍세화’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 사회주의자 홍세화를 빼고 홍세화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낮은 자리, 가장자리에 있고자 했던 사람인 동시에 그것을 위해 가장 왼쪽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홍세화다움의 좌표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동지, 홍세화
홍세화는 교육운동, 특히 학벌없는사회 운동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홍세화를 학벌없는사회를 통해 처음 만났다. 어느 날 당시 해직 교수이자 학벌없는사회 대표였던 김상봉 교수가 ‘여러분, 누가 왔는지 보세요’라며 홍세화의 손을 끌고 모임에 나타났다.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도 유명한 사람답지 않게 등장한 그는 이후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이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시작했고, 2002년에는 학벌없는사회 공동 대표가 되었다.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한국에 돌아와 그가 처음 시작했던 사회운동이었고, 차별과 불평등에 누구보다 저항했던 그가 가장 앞장서서 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다.
그가 돌아와 학벌없는사회 운동에 참여하던 시기의 한국은 청소년들이 꽃처럼 떨어져 죽는 나라였다. 수능 시험 날이면 유서를 쓰고, 성적이 떨어지면 옥상에서 떨어지는 나라. 대학의 서열이 사람의 서열이 되고, 학벌이 신분이 되는 나라였다. 학력과 학벌이 낮은 사람은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차별당했고, 홍세화는 한국에서 학벌주의는 인종주의와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것을 간파했다.
입시 경쟁이야 과거부터 있었지만 이 시기 경쟁 질서를 제도적으로 도입하고 인위적으로 강화한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기획이었다. 학교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새로운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실험하고 수행하는 기구였다. 학벌은 사회 계급의 대물림 수단이었지만 외형적으로는 ‘취득할 수 있는 신분’이었고 다른 자본과의 호환성이 높은 상징 자본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학벌 경쟁은 전 사회적 경쟁으로 심화되었다. 국가 부도의 위기 상황과 사회 붕괴를 경험한 한국 사회 구성원들, 특히 중산층은 주식, 부동산 등 자산 취득과 함께 학벌 취득에 몰입했고, 학벌은 계급 재생산과 자산 증식, 자기 자본화의 수단이 되었다. 신자유주의 교육은 경쟁을 교육의 수단이자 목표로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어린이, 청소년 학생들이 경쟁의 맷돌에 갈려 나갔다.
홍세화는 이러한 사태의 본질을 빠르게 이해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독재정권하의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망명객이 되었던 그는 20년 만에 민주 정부가 수립된 나라로 돌아왔다. 떠났던 나라는 통행 금지, 장발 단속의 나라였는데, 돌아온 나라는 여행 자유화, 취향 존중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 자유의 분위기에서 그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공기는 “청년 시절 고문당할 공포를 일상적으로 느끼게 했던 그 무겁고 어두웠던 사회 분위기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지만, 카드 회사가 만든 “부자 되세요”가 첫인사를 건네는 고국은 한없이 낯설었다. 그건 그가 바랐던 자유의 공기가 아니었다. 군부의 독재가 자본의 독재로 변화했을 뿐임을 그는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복종시키는 교육’은 ‘경쟁시키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다만 그때 우리는 청소년들이 죽고 병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경쟁 교육이 만들어 낸 참상에 대해서는 분노하였지만, 그런 일들을 신자유주의화라는 정세와 사회 변동의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당시 학벌없는사회의 윗세대 운동가들은 학벌을 타파해야 할 ‘구습’이자 ‘전근대성’으로 바라보았다. 같은 학벌끼리의 집단주의, 족벌주의는 비판하지만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는 옹호하고, 그것이 사회의 합리화라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훗날 함께 공저자로 참여한 책, 《능력주의와 불평등》이 나오고 나서, 홍세화는 저자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학벌없는사회 운동의 한계와 오류에 대해 반성했다. “나는 그 무렵 강연을 할 때면 ‘벌’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재벌, 족벌(조중동) 언론과 학벌이었다. ‘벌’에 천착했다는 것은 능력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늘 ‘학벌없는사회 운동은 계급 투쟁’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그 운동의 이념에 가장 철두철미했던 사람이 홍세화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피지배 계급에게) 교육은 사회 안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젠 정말이지 ‘하면 된다’라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교육자라면 적어도 지배 세력의 상징 폭력을 일생에 걸쳐 당하도록 놔둬선 안 되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했다.
2011년 학교 밖 청소년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학벌 체제에서 밀려 나온 청소년과 적극적인 대학 거부자들을 중심으로 학벌없는사회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명서, 토론회, 연구, 저서와 같은 담론 투쟁의 형태를 넘어, 보다 현장성 있는 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하려 했을 때, 홍세화는 그런 도전을 지지하며 힘을 보태 줬다. 학교 밖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부탁했는데, 당시 유명 작가였던 홍세화가 강사로 온다는 말에 인근의 다른 학교밖배움터 교사들도 그의 강의를 들으러 왔다. 그런데 교사들은 눈이 반짝반짝한 반면, 청소년들의 눈은 자꾸만 감겼다. 홍세화가 누구인지 모르고, 당연히 그의 책도 읽어 본 적 없는 청소년들은 지루함과 따분함을 온몸으로 표했다. 강의를 마치고 놀리면서, ‘안 되겠다, 좀 더 재밌어지셔라’고 주문을 하자, “제가 원래 재미가 없는 사람인데요” 해서, 재밌게 할 때까지 시킬 거라고 하자, “아이구 이거 큰일났네” 하고 수줍게 웃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런 자리를 어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던 사람. 그날 그 자리를 “외면하는 청중 앞에서 강의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고 말해 준 덕분에, 나도 외면당하는 자리를 무서워하지 않고 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 같다.
진보 정당 운동의 동지, 홍세화
작년 겨울 병세가 악화되어 녹색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났다. 당시는 병원에서 통증 조절이 어느 정도 되어 컨디션이 조금 괜찮은 때여서 차분히 제법 긴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당시 추진 중이던 민주당발 위성 정당과 진보 정당들의 선거 연합 이야기가 나와 녹색당 걱정을 했더니 “채 선생이 있으니까 난 걱정 안 해”라고 하면서 찡긋하고 웃었다. 그 말에 함께 있던 사람들도, 세상 걱정도, 싸움도, 이제 우리가 할 테니 샘은 건강을 돌보는 일에만 힘쓰셔라, 그러고 웃었다. “그래요, 당분간 난 좀 봐줘요”라고 그는 답했다. 봄이 되면 다시 오겠다고 하고, 그때까지 우리 각자의 싸움을 열심히 합시다, 하고, 병실을 나오면서 ‘홍세화 화이팅’ 하고 주먹을 쥐고 인사했다. 그도 활짝 웃으면서 화이팅 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시민이 될 것인가, 고객이 될 것인가. 숨을 거두기 직전 〈한겨레〉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가 독자들에게 남긴 말은 정치와 교육에 대한 동시 질문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는 교육만 망가뜨린 게 아니었다. 교육이 상품화되는 동안 정치도 상품화되었다. 시민적 주체성은 소비자, 투자자 주체성으로 바뀌었고, 정당 투표는 신념 투표에서 선호 투표로, 계급 투표에서 이익 투표로 바뀌었다. ‘커지거나 꺼지거나’라는 성장의 표어가 농업에서 중소농을 몰아내며 자본주의적 기업형 농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상업에서도 골목 상권까지 죄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로 바꾸는 동안, 정치에서는 거대 양당의 독점 구도가 형성되어 진보 정당들을 하청화했다. 대기업 하청 시스템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어진 시장과 똑같이 정치 영역도 그렇게 변해 갔다. 시민은 기업화된 정당들의 ‘고객’이 되었고 선거는 정치 행위라기보다는 투자 유치나 모객 행위와 유사한 어떤 것이 되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고 꿈꾸는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그런 나라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은 독재하에서보다 더 빈곤해졌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은 진보 정당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진보 정당이라 하면서도 기꺼이 ‘대기업’ 정당의 ‘하청’ 정당이 되어 의석을 얻는 길을 택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시민이 고객이 되었다면 우리도 고객을 위한 정당이 되자는 식이었다. 자유주의 논객들은 시대가 변했고 대중이 변했으니 그에 맞게 정당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대중 추수주의’를 ‘정치 혁신론’인 양 미화시키고 정당화했다. 내가 속한 녹색당에서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위성 정당을 통해 국회로 갈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위기를 겪었다. 이번 총선에서도 국회 입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정당의 중요한 가치와 지켜야 할 원칙들이 밀려나곤 했다. ‘강령은 이상이고 정치는 현실’이라는 말이 돌아올 때면, 2011년 홍세화가 느꼈던 심정, “당의 보루라 믿었던 원칙들이 하루아침에 버림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둑이 흔들리고 금이 가는 것”을 느꼈던 그 심정이 그대로 나의 심정이 되곤 했다.
총선이 끝나면, 그와 함께 진보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전화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괜히 걱정을 보태 치료에 전념하는 데 방해가 될까 하지 못했다. 총선이 끝나면 언제 한번 찾아가고 싶었는데, ‘언제 한번’은 다시 오지 않았다. 작년 봄에 그가 먼저 전화해서 “그곳에 훌쩍 한번 가도 되겠어요?”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렇게 통화를 하고 지내는 관계는 아니어서 갑작스런 전화가 이상할 만도 했는데, 반가웠지만 그냥 안부를 물으며 으레 하는 한번 보자는 말 이상으로 듣지 않았다. ‘훌쩍 오시지요’가 아니라 ‘언제 볼까요?’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된다. 그 후회 때문일까, 아니면 현재의 위기가 이전의 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일까. 그 이후로 요즘 나는 ‘다음 시간’이 없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을 계획한다. 모든 일들이 미룰 수 없는 일이 됐다.
선배 홍세화
마지막 만남에서 오래 마음에 남는 대화가 있다. ‘선배가 되어 주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그날 함께 면회했던 분들이 옛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운동하는 후배가 쌀이 떨어지면 쌀독을 채워 주고, 돈이 없으면 돈을 모아 주고, 일자리가 필요하면 일을 찾아 주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그때 이야기를 들으니까 요즘 청년들은 정말 외로운 것 같아요. 주위에 선배도 없고 어른도 없고, 의논할 사람도, 기댈 사람도 없고, 무슨 일이 생기든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해결하고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처절하게 외로운 세대, ‘옆에 아무도 없는 사람들’이 지금의 청년들 같아서,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요.”
물론 그런 선후배 관계가 다 좋기만 했던 건 아님을 잘 안다. 인간적인 정리 때문에 선배가 부탁하면 외면하지 못하고, 후배는 선배의 잘못을 비판하지 못하고, 선배는 따르는 후배를 챙겨 주면서 운동 내부의 정실주의가 생겨나고 그게 사회운동을 부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세대 간 지원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기도 하다. 어떤 청년들에겐 부모와 가족의 사적 네트워크가 그대로 자신의 관계 자본이 되지만 다른 청년들에겐 그 관계가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이 되고 억압이 된다.
사적 관계에서 지원이 부족한 청년들에겐 공적 지원 시스템도 필요하지만, 사회적 관계 속에서 믿을 수 있는 선배 한 사람, 기댈 수 있는 어른 한 사람과 같은 존재도 필요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지금 진보 운동에서는 권력에 투항하지 않고, 자본의 승리를 쉽게 수용하지 않고, 세상은 끝났다고 냉소하고 좌절하지 않으며, 변함없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에서 싸우는 선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 주는 믿음직한 선배인 동지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젊은 날의 나에겐 홍세화가 그런 사람이었다. 학벌없는사회에서는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는데, 회의나 토론을 할 때, 저쪽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오늘 잘 들었어요’ 하고 찡긋 웃어 주고 가면, 작은 동의의 표현이 큰 자신감과 용기가 되곤 했다. 첨예한 정치 사회적 논쟁이 벌어질 때도 그랬다. 같은 목소리를 내는 홍세화의 글은 든든한 선배가 한쪽에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거꾸로 많은 후배 활동가 동지들에게서도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데, 나도 그에게 가끔은 그런 후배였기를 바란다. 훌륭한 선배고 존경하는 어른이지만 결코 벗과 동지는 될 수 없는 관계가 있는데, 홍세화는 그렇지 않았다. 선배 홍세화는 친구 홍세화이기도 했고, 동지 홍세화이기도 했다. 그는 선생으로 불렸지만 늘 학생의 자세로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특히 프랑스에서 막 돌아왔을 땐 이곳에 없던 공백기에 여기 있었던 젊은 우리들에게 자신에게 없는 경험과 기억을 열심히 묻고 들었다. 우리가 프랑스 이야기를 들은 건 많지 않았고, 대신 그에게 한국 이야기는 많이 들려줬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아직도 듣는 말보다 하는 말이 더 많은 나를 반성하게 된다.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도 이 위기의 시대를 같이 의지하며 건너갈 수 있는 선배나 어른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가 떠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 주는 홍세화에 대한 이야기에도 ‘선배가 되어 준 홍세화’, ‘어른 같았던 홍세화’를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에 대한 불편함도 드러났다. 나도 그의 죽음을 ‘시대의 어른’을 상실한 것으로 말하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시대의 어른’ 같은 표현은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던 사람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호명일 것이다. 하지만 어른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우리는 어른일까를 묻고, 자신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하며, 어른이 되기를 부정하거나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그러면서도 기댈 수 있는 어른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분명 사회학과 교육학적 해석이 필요한 장면이었다. 이후로 선배를 찾고 어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드러내는 시대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선배가 된다는 것과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홍세화의 부탁
그날 내가 ‘선배 없는 청년들’에 대해 안타까워했을 때,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었다. “채 선생이 있잖아요.” 그런 역할을 해 주고 있지 않느냐고 북돋워 주는 말이었겠지만, 또 한편으로 내가 듣기로는 ‘그게 안타깝거든 네가 그런 사람이 되어 주라’는 말이었다. 왜 그런지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진보 정당을 걱정하는 나에게 “채 선생이 있으니까 난 걱정 안 해”라고 했던 것은 나한테만 하는 말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말은 ‘당신들이 있으니까, 난 걱정 안 할게요’라고,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앞 주자의 부탁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홍세화와 함께 시대가 끝났느니 막을 내렸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자. 그의 삶에 본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제 그런 사람은 없구나’가 아니라, 그런 삶을 닮으려 노력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어딜 가든 기회가 닿는 대로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가입과 《오늘의 교육》 구독을 권유하고, 기후정의동맹 후원을 부탁하고, 녹색당 당원 가입을 권하고, 체제전환운동을 소개한다. 체제전환운동 정치대회에서 ‘조직가가 되자’고 동지들과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홍세화로부터 배운 것을 ‘그 사람은 그랬다’로 끝내지 않고 나도 그래 보겠다고 실천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나에게는 홍세화의 수많은 물음이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어 주는 선배로 계속 있어 주면 좋겠다.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자’고 말하던 동지로 계속 희망과 용기를 주면 좋겠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기에 우리가 가야 한다’고 말하던 벗으로 계속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면 좋겠다.
부고를 들었을 땐 어쩐지 이렇게 보내선 안 될 사람을 억울하게 뺏긴 것 같고, 서럽고 분한 것이 차올라 눈물이 펑펑 쏟아졌는데, 막상 장례식장에서 입관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꼭 아기 같은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룬 ‘세화의 평화’를 보고 나니 눈물이 가시고 웃음이 지어졌다. “와, 홍샘 좀 봐 너무 이뻐.” 함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람들도 서로 얼굴을 보며 웃었다. 누군가 “아듀, 무슈 옹그(안녕, 홍샘)!” 하고 인사했다. 예전에 우리가 장난스럽게 부르곤 하던 호칭. 언젠가부터 편하게 웃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린 우리도, 스르르 함께 웃어 버렸다.
장례식장에는 유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제대로 검은 옷도 챙겨 입지 못하고 작업복 차림, 일상복 차림으로 선생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오는 가장자리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나도 운동화, 청바지에 배낭 진 차림 그대로 달려갔다. 추도식과 발인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녹색당에서 진보 정치를 고민하는 동지들과 워크숍을 위해 대전 가는 기차를 탔다. 이제 더 씩씩해져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걱정도 싸움도 우리가 할 테니까, 수많은 홍세화들이 있을 거니까, 편히 가세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