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기획] 홍세화는 다시없는 언론인이었다 | 안영춘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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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홍세화는 다시없는 언론인이었다

- 언론인으로서 홍세화

 


안영춘

jona@hani.co.kr

《한겨레21》 기자


지난 4월 18일 홍세화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교육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진보 정당 활동가이자 시민사회 운동가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족적을 남긴 선생은 교육공동체 벗과도 인연이 적진 않았다. 2011년 교육공동체 벗 창립 당시 터잡기 조합원으로 참여한 후오랜 시간 조합원으로, 단행본 저자로, 《오늘의 교육》 필자로 많은 역할을 해 주었다.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는 3편의 글을 싣는다. 평생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선생이 우리 사회에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그 가치와 실천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모색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편집부



홍세화의 생애사를 연표로 정리하면 ‘언론인’은 ‘정치적 난민’ 바로 다음에 배치된다. 짧은 무역회사 재직 기간을 빼면 직장 생활도 한겨레신문사가 유일하다. 그러나 홍세화는 ‘언론인’이라는 직함을 무거워했다.

언론인으로서의 버거움을 감당하는 힘은 기꺼움에서 나왔다. “아나키스트 아버지가 남겨 준 이름, 그것은 나에게 버거우면서 기꺼운 짐이었다”라고 한 칼럼[ref]“내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 〈한겨레〉, 2020년 9월 18일.[/ref]

에서 술회했던 그는, 세계 평화(세화)라는 이름의 무게에 언론인으로서 공적 글쓰기의 무게까지 얹어 등짐을 졌다. 힘겨워하면서도 가만하게 반겼다. 그렇기에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언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갈 수 있었다.

홍세화의 기꺼움은 니체의 위버멘슈(초인)를 떠오르게 한다. 느낌보다는 의지였고, 의지로 기꺼웠기에 스스로 삼엄할 수 있었다. 그는 앞의 칼럼 첫 단락에서 제 이름에 얽힌 가족사를 풀었다. 청년 정신이 신자유주의에 침식되어 가는 세태를 짚기 위한 도입 장치임을 어렵잖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내 독자에게 사과부터 했다. “서두에 사적인 이야기를 펼친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지나친 공손함으로 읽는다면 오독이다. 언론인은 사사로운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삼엄한 직업 윤리가 없었다면 떠올리기 어려운 전개다.

홍세화가 생의 막바지에 행한 〈한겨레〉와의 인터뷰도 그의 직업 윤리를 상기시킨다. 그는 4월 14일 병상에 누워 2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몸속에서 길어 낸 마지막 힘을 후배 기자들의 물음을 집중해 듣고 가지런히 답하는 데 오롯이 소진했다. 그는 제 삶을 돌이킬 때조차 한국 사회와 떼어 말하는 법이 없었다. 2002년 1월 영구 귀국할 때 ‘나를 위한 글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회고는 언론인으로서 소명과 윤리에 관한 최후 진술로 남게 됐다. 더는 남겨 둔 힘이 없던 그는 나흘 뒤인 4월 18일, 영원히 눈을 감았다.

 


논쟁적인 언론인, 홍세화

 

홍세화는 그토록 하릴없는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이 번연한 명제에 여전히 토를 다는 이가 없지 않을 터이다. 생전에 그를 언론인의 범주에서 배제한 이가 적지 않았듯이. 홍세화가 현장 중심의 정치·사회적 실천에서 발을 빼지 않은 것이 그들 보기에는 결정적인 결격 사유였다. 그의 언론관과 언론인으로서의 실천은 진보 언론 안에서조차 자주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다분히 한국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개중 빼놓을 수 없고, 또 널리 알려진 일화가 민주노동당 당적 사건이다. 사건은 그가 영구 귀국해 <한겨레>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2002년 12월에 일어났다.

홍세화가 민주노동당 당원 명의로 지상파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할 거라는 소식이 다른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한겨레 윤리강령은 기자의 당적 보유를 금하고 있었다. 편집국장이 그의 기획위원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는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하는 폭력이자 차이에 대한 앵똘레랑스(불용인)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당적 보유 사실은 이미 그의 글에 공연히 적시된 터였다. 금시초문이라는 듯, 신문사 안팎에서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시 노동조합 상근 간부였던 나는 홍세화의 입장을 지지하는 소식지를 냈다. 외부 언론학자들까지 초대해 토론회도 열었다. 다른 언론사들이 취재를 올 만큼 관심이 컸다. 언론학자들은 의견이 갈렸다. 인용하는 외국 사례들도 양분돼 있었다. 영미식에 가까울수록 정당 가입의 벽이 높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윤리강령의 해당 조항이 사원 투표에 부쳐졌다. ‘현상 유지’가 과반으로 나왔다. 윤리위원회는 그에게 탈당을 권고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되 권고는 따르겠다’는 입장을 내시라고 간청했다. 그는 “미안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사내의 민주적 절차를 거친 결과마저 따르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인권과 윤리는 다수결이 아니다’라는 그의 논리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권고는 철회되지 않았다. 윤리강령도 여태 그대로다. 그러나 평행선으로 보이는 두 선을 연장하다 보면 사이가 좁혀질 때도 있는 법이다. 홍세화는 적어도 언론인에 관한 한국 사회의 굳건한 교리를 논쟁 영역으로 옮겨다 놓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공개적인 당적 보유로 논란이 된 언론인이 홍세화 말고 없는 것은 기이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자연 현상처럼 받아들이는 집단적 태도도 매한가지다. 오전에 편집 회의에 참석했다가 오후에 기자 회견을 하고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언론인이 한둘이 아님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폴리널리스트’[ref]정치(politics)와 언론인(journalist)을 결합한 신조어.[/ref]가 보통명사나 다름없게 됐는데도, 그들 가운데 언론사 재직 중 공개적으로 당적을 보유한 이가 한 명도 없는 거야말로 지독한 역설이다. 홍세화는 다름을 넘어, 그들과 정확히 대칭점에 선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의 당적 보유는 외려 언론 윤리의 적극적 실천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 언론은 중립을 표방하는 데 있어 보수와 진보가 대동소이하다. 양쪽 모두 영미식 저널리즘을 사숙(私淑)했다는 방증이다. 언론사가 소속 언론인의 당적 보유를 금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폴리널리스트가 만연한 세태는 중립주의가 한갓 위장된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폴리널리스트들이 하나같이 언론 윤리의 버거움과 기꺼움, 삼엄함에서 벗어나 솜털보다 가볍게 처신하는 행태 또한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이런 환경에서 지금도 다수의 현역 언론인은 미래의 폴리널리스트로 배양되고 있다.

언론인만의 일이 아니다. 그들이 몸담은 언론사부터가 영미식 저널리즘을 교리로 떠받들고 있다. 영미식 저널리즘은 중립의 포지션으로 ‘사실(팩트)’을 신화화해 독자를 확보하는 전략을 취해 왔다. 그런 영미 언론들조차 선거 때면 사설에서 지지 정당을 공개한다. 한국 언론들은 이마저 철저히 금한다. 적어도 형식만큼은 영미식 저널리즘 교리를 초과한 셈이다. 그러나 금자탑의 이면은 어둡고 쿰쿰하다. 이들은 사사로운 정치적·경제적 이해 앞에서 철저히 뻔뻔하다. 절대적 중립주의와 객관주의의 포즈는 이를 은폐하는 복화술이다.

 


교본에서 벗어난 교본

 

홍세화의 글은 주장성이 강해 저널리즘의 교본에서 벗어난다는 평가도 존재했다. 영미식 교리의 연장이자 또 다른 판본이다. 그의 글에 대한 이런 유의 비판은 한겨레 안에서도 없지 않았다. 20년 전쯤이다. 홍세화의 칼럼이 통째로 빠진 일이 있었다. 원고를 본 편집 간부 축에서 팩트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던가 보다. 그는 편집기 앞을 몇 차례 오가며 문장을 수정하더니, 마침내 격노해서 글을 통째로 빼겠다고 했다. 그 장면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나는 서둘러 원고를 찾아 읽었다. 삼성을 비판하는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4월 14일의 마지막 인터뷰 때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천장을 오래 응시했으나, 끝내 기억의 조합을 맞추지 못했다. 나도 내용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신문사로 돌아와 그즈음의 지면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져 봤다. 3주 간격으로 실리던 그의 칼럼이 한 번은 조악한 틀니처럼 외부 기고 글로 대체돼 있었다. 그때 빠진 글을 찾을 방법은 지금 없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추정하기도 불가능하다. 다만 그가 원고를 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역치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미시적인 팩트를 빌미로 맥락까지 훼손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을 터이다.

진실은 사실이라는 껍데기 속에 들어 있지만, 모든 사실이 진실을 품고 있지는 않다. 물론 사실의 껍데기를 굴착하지 않으면 진실을 검증할 수도 없다. 그러나 팩트의 물신화는 전혀 다른 문제다. 팩트만을 신성시하는 ‘팩트주의’는 나뭇잎을 숲으로 둔갑하는 마술을 자주 부린다. 이때 언론인은 몇 개 팩트의 편린으로도 그럴싸한 픽션을 연출하는 영화감독과 다르지 않다. 숲을 온전히 묘사하려면 나뭇잎에 대한 과몰입이 아니라 전체 지형에 대한 조망이 관건이다. 홍세화의 그 글과 글을 통째로 들어낸 결단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자명하지 않은가.

한국 언론(인)들이 중립주의, 객관주의, 팩트주의 등을 유별나게 섬기는 이유를 영미식 저널리즘으로만 환원해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칭점들 하나하나에 홍세화를 세워 놓는 건 가능하다. 논쟁적인 언론인 홍세화가 정작 저널리즘의 보편성을 확보한 언론인은 아니었을까. 가령 한국 언론인들의 완고한 직능주의도 홍세화라는 보통명사와 정면으로 마주 서 있다. 직능이란 직업이나 직무에 따른 고유한 기능이나 역할을 뜻한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표어가 직능의 쓰임을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언론인은 다르다. 교수는 직능이지만, 학자와 교육자(스승)는 직능이 아니듯이.

언론인이라 하면 대개 기자, 피디, 아나운서를 떠올린다. 그것들이 바로 직능이다. 기자협회, 피디연합회, 아나운서연합회라는 직능단체가 있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직능의 요건은 기능적 특화다. 컴퓨터의 모듈과 키트처럼 어디에 배치하더라도 기능적 일관성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직능의 윤리다. 언론인이 직능이라면 오전 언론사와 오후 정치권 양쪽 모두에서 정상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안을 보도하고 논평할 때도 자기 존재와 관계를 개입하지 않는 무중력의 중계자 위치에 머문다. 참사 현장에서도 카메라가 꺼지면 곧바로 동료와 웃으며 저녁에 먹을 메뉴를 얘기할 수 있다.[ref]2014년 4월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참사 현장 보도를 하던 어느 방송사의 기자가 카메라가 꺼진 걸로 착각하고 웃으며 농담하는 장면이 생중계된 일이 있었다. 당시 KBS 보도국장 김시곤은 편집 회의에서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하기도 했다.[/ref]오늘의 한국을 넘어서 역사와 세계로 눈길을 돌려 보면, 언론인이 직능 너머의 존재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에밀 졸라, 조지 오웰, 장 폴 사르트르, 앙드레 고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 빛나는 이름들이 그 생생한 사례다. 이들의 공통 분모는 바로 ‘언론인’이다. 행동하는 실천가로서 언론인이다.[ref]졸라는 〈로로르(L’Aurore)〉(여명)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썼다.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위건 부두 가는 길》은 르포르타주의 고전이다. 사르트르는 〈리베라시옹(Libération)〉(해방)과 《레탕모데른(Les Temps Modernes)》(현대)을 창간하고 발행했다. 그가 ‘유럽에서 가장 빛나는 지성’이라고 상찬한 고르는 〈렉스프레스(L'Express)〉(표현) 등 세 개의 매체에서 일했다. ‘목소리 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알렉시예비치가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인터뷰집이다.[/ref] 본디 언론부터가 지금처럼 분과적인 영역이 아니었다. 과학, 철학, 수필, 역사학, 경제학까지 아우르던 17세기 이전 ‘문학’의 범주 안에 있었고, 과학자, 철학자, 수필가, 역사학자, 경제학자는 동시에 언론인이기도 했다. 홍세화는 어느 쪽인가. 그를 예외적 언론인으로 간주하는 거야말로 예외적이지 않은가.

‘언론고시’라는 말이 있다. 은어인데도, 국립국어원의 개방형 한국어 사전 ‘우리말샘’에 등재될 만큼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말샘의 뜻풀이는 이렇다. “대학가에서, 언론사의 입사 시험을 이르는 말. 취업 희망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많은 대학이 ‘언론고시반’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는 재학생들을 지원한다. 나는 이 표현이 직능주의를 비롯해 언론인에 관한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언론인 입문 단계부터 순혈주의적 특권 의식을 갖도록 조장한다고 생각해 도무지 마뜩잖다. 저 졸라와 오웰 등등은 언론고시를 봤다는 말인가.

그런데 홍세화는 여느 사안과 달리 ‘언론고시’에 대해서만큼은 어딘가 예외적인 ‘결’을 드러낸 적이 있다. “아직도 ‘언론고시’를 통해 입사한 후배이면서 선배인 구성원들과 오늘도 고시 패스를 위해 열심인 한겨레 지망생들 보기가 좀 뭐하다. (……) 식구 중 누군가의 도움을 필수로 하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를 위해 열심인 이들에 대한 미안함도 깃들어 내 안주머니에는 언제나 구독 신청서가 들어 있다.”[ref]한겨레 노동조합 소식지 〈한소리〉, 2005년 4월 29일. 《결 - 거에 대하여》(한겨레출판, 2020) 서문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다.[/ref] 뜻밖이지 않은가. 대번에 경을 쳤어야 할 홍세화가 자신이 후배들과 똑같은 경로를 거치지 않은 것에 미안함과 부채감을 안고 있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내게는 다른 게 읽힌다. 그가 한국 언론사들의 고루하고 편협한 기자 채용 방식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하는 소리를 들어서만은 아니다. 당위는 당위대로 흔들림 없이 지키되 당위가 도그마로 넘어가는 것을 애써 경계하는 성찰적인 똘레랑스, 진보 언론의 소임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후배 동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려 깊음이 행간에 배어 있다.

 


홍세화와 한겨레, 그리고 진보 언론

 

홍세화가 19년 전 〈한소리〉에 쓴 글은 당시 노조위원장의 권유를 마다치 못하고 ‘홍세화가 만난 사람’이라는 인터뷰 글을 연재할 때 쓴 첫 회였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을 인터뷰했는데, 그답지 않은 살가운 표현을 써 가며 한겨레와 한겨레 구성원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까지도 사춘기 소년처럼 쑥스러운 듯 내비쳤다. 가령 이런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꿈꾸던 시절 나에겐 두 가지 소박한 소망이 있었다. 하나는 이 땅을 마냥 걷고 싶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출퇴근이었다. (……) 귀국한들 50대 중반 나이인데 도대체 어디로 출퇴근할 수 있다는 것이지? (……) 김칫국 마셔 대며 호사를 부려 보았는데 출퇴근하는 내 모습이 떠올려지는 곳은 단 한 군데, 한겨레뿐이었다. 왜 그랬는지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랬고 마침내 소망 하나를 성취할 수 있었다. (……) 내게 한겨레는 ‘특혜’를 누리는 ‘뻔뻔함’을 기꺼이 감수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출퇴근처다.”

그러나 홍세화는 언론고시를 통과한 후배 동료들을 향한 따끔한 경계의 말을 잊지 않았다.

“길고 어려운 싸움은 지금부터다. 모두 자본 앞에 머리 조아리는 땅에서 서로에게 희망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의식은, 그리고 가치관은 선택이라는 실천을 통해 그 본질이 확인되고 증명된다. 한겨레는 일터이지만, 동시에 ‘소유’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늠름한 ‘존재’로서의 가치관이 소통되고 확인되는 장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겨레에 대한 비판은 홍세화의 본업이 되기도 했다. 초대 시민편집인(옴부즈맨)이 되면서다. 사내 인사가 자신의 매체를 같은 매체의 지면을 통해 비판하는 일은 칼날 위를 걷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국내에는 전례가 없기도 했다. 그는 그 외롭고 가슴 조이는 책임을 버거워하면서도 기껍게 짊어졌다. 그의 한겨레에 대한 비판은 즉자적이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한겨레는 기대만큼 품 넓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듯하다. 그는 자주, 깊게 상처받았다. 많이 아파했다.

홍세화는 한겨레와 만난 뒤 세 차례 이별했다. 처음 이별은 2011년 위기에 빠진 진보신당을 지키기 위해 당 대표로 나설 때였다. 존재를 거는 언론인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두 번째 이별은 2023년
1월 13일 <한겨레>에 마지막 칼럼 “마지막 당부 :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를 쓴 것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는 당부에 치중했고, 한겨레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몸속을 파고든 병마를 눈치챈 이는 많지 않았다. 〈한겨레〉 신문 창간 이후 구성원의 가장 참혹한 일탈이 들춰진 직후이기도 했다.

한겨레 구성원들이 극도의 열패감과 무력감, 깊은 침묵에 빠져 있을 때, 홍세화는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한겨레 본사 앞에서 병든 몸으로 칼바람을 맞으며 하루 1시간 30분씩 일주일 가까이 1인 시위를 했다. 한겨레에 대한 마지막이자 가장 강렬한 비판이었다. 다시 하기 어려운 사랑 고백이었다. 한겨레 역사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구독 신청을 많이 받은 그에게 구성원 다수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몇 날 며칠 글 한 편을 써서 홍세화에게 보냈다. 글을 읽은 홍세화는 그 사건이 일회성이 아닌 ‘한겨레가 긴 시간 비탈면을 타고 맥없이 흘러내리다 마침내 벼랑 아래로 추락한 사태’라고 짚은 부분에 가장 크게 공감했다. 애초 그 글은 한겨레 안에서 공표할 생각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라고 독려했다. 끝내 그러지 못했다. 김수영 시인의 말마따나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가 눈을 감으면 나의 용렬함이 천금 같은 부끄러움과 부채감으로 돌아올 줄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홍세화의 세 번째 이별은 그가 눈을 감기 나흘 전에 했던 <한겨레>와의 인터뷰였다. 돌이켜보면, 그는 그렇게 세 차례나 이별하면서도 한순간도 한겨레와 연결된 끈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는 그 몸으로 <한겨레>에 인터뷰를 자청했다. 버겁고도 기꺼운 언론인으로서 최후의 소임을, 자신에게 자주 상처와 고통을 안긴 <한겨레>를 통해 마침내 수행했다. 온전히 그의 뜻이었다. 진보 언론을 향한 그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애초 꺾을 수 있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홍세화는 한국 사회에 다시없는 언론인이었다. 하루하루 그의 빈자리가, 남은 자들이 넘겨받아야 할 짐이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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