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호[기획] 긴장하고 갈등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고결함’ | 김민하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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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긴장하고 갈등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고결함’

- 지식인이자 정치인으로서 홍세화

 


김민하

acidkiss@gmail.com

시사평론가,

전 미디어스 편집장


지난 4월 18일 홍세화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교육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진보 정당 활동가이자 시민사회 운동가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족적을 남긴 선생은 교육공동체 벗과도 인연이 적진 않았다. 2011년 교육공동체 벗 창립 당시 터잡기 조합원으로 참여한 후오랜 시간 조합원으로, 단행본 저자로, 《오늘의 교육》 필자로 많은 역할을 해 주었다. 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는 3편의 글을 싣는다. 평생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선생이 우리 사회에 남긴 자취를 돌아보고, 그 가치와 실천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모색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편집부


 

나는 2011년 말부터 2012년 10월경까지, 당료와 대표의 관계로 홍세화 선생과 함께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 선생을 생각하면 ’고결함’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겸손함’은 그분의 고상한 성품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고, ‘숭고함’은 낮은 곳에서 약자들과 함께하며 가장자리에 머물려고 한 삶의 태도를 오히려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결함’이야말로 선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고결함’이라는 단어가 갖는 비세속적인 뉘앙스를 의아해하는 이도 있을 듯하다. 오히려 선생을 추억하는 이들 중 일부는 ‘모순’을 말하기도 한다. 가령 진보신당에서 공동 대표를 함께 맡았던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의 추모사를 보면 그렇다. 〈한겨레〉에 실린 이 글에 안효상 이사장은 이렇게 썼다. “기본소득에 대해 강의나 토론을 해 달라고 요청하면, 언제나 공부가 부족하니 다음에 하자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강의에 들어가면 그렇게 단호할 수가 없다”, “카드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벗들과 놀이를 하는 게 너무 즐겁다.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 하지만 꼭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이 발동한다. 지면 화가 난다”, “선생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것을 후회했다. 그 책을 쓰지 않았다면 노스탤지어를 느끼지만 센 강변에서 안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 책으로 얻은 명성을 세상에 바쳤다”……[ref]안효상, “홍세화 선생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늘 되물었다”, 〈한겨레〉, 2024년 4월 21일.[/ref] 이런 면을 보면 고결하다기보다는 ‘인간적’이라고 하는 게 알맞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선생의 행로가 그려 온 궤적과 가치관, 주장을 한데 묶어서 보면 바로 그러한 인간적 면모야말로 선생을 고결한 인물로 평가하게 만드는 중요한 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생이 고결한 인물인 이유는 완전한 상태로 태어나 무오류의 결정만을 내려 왔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는 한계 속에 있으면서도 회의하고 변화하면서 타자의 존엄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갔기 때문에, 또 그러한 자신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지켰기 때문에 선생은 고결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보신당 대표 시절의 긴장감과 갈등

 

홍세화 선생이 갑작스레 진보정당 소속의 정치인으로 현실 정치에 뛰어든 것 역시 따지고 보면 그런 거였다. 2011년 말의 진보신당은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주요 정치인 및 당원들이 통합진보당 창당에 함께하기 위해 떠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진보신당에 남은 우리는 통합진보당이 이질적 세력 간 결합으로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고 봤고, 그럼에도 의석수 확보에만 집중해 통합 및 창당을 강행하는 것은 진보 정치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었다. 당장 2012년 총선을 치를 수 있을지, 치른다면 어떻게 치러야 할지 아무도 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폐허나 다름이 없는 상태, 우리 모두는 얼어 죽을 것을 각오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홍세화 선생이 나섰다. 선생은 2002년부터 민주노동당의 당원이었으나 2008년 진보신당이 떨어져 나올 때 행동을 함께했다. 당시 진보신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 출마 권유가 있었으나 한겨레에 소속돼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 걸로 알려져 있다. 선생은 한국 현실 정치의 맥락과 늘 불화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면서도, 직업 정치인이 되는 것은 거부하며 지식인의 자리를 끝내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선생이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오르겠다며 진보신당의 대표를 맡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우리는 놀라고 감격했다. 당을 대표했던 주요 정치인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실·절망·좌절감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누구를 대변하며 누구와 싸울 것인가를 다시 분명히 하자는, 진보 정치의 원론을 다시 말하는 선생은 남은 사람들의 존재적 정당성을 확인하게 해 줬다.

그러나 당 대표는 그러한 기분으로만 잘해 나가기 어려운 자리다. 당 대표에게는 여러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내외의 세력들을 설득할 정치적 능력이 꼭 필요하다. 비판적 지식인의 정체성을 고집해 온 선생이 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었다. 민주노동당 때부터 당 활동을 주요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해 온 인사들은 오히려 선생의 지식인다운 면모를 못미더워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런 거리감은 선생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기 때문에 당 핵심부에는 미묘한 긴장감 같은 게 늘 있었다. 이런 맥락을 포함한 이런저런 이유로 2012년 총선 직전까지 사회당과의 통합이나 총선 전략 등을 두고 당내에 논란이 많았다.

당료의 입장에서 가장 난감했던 것은 2012년 총선 당시, 선생이 이번에도 비례대표 출마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점이었다. 당 입장에서는 인지도가 있는 선생을 비례대표 후보 앞 순번에 배치해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술을 주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설득 시도가 거듭되었는데, 선생은 출마를 결심한 이후에도 후순번을 고수했다. 당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리는 ‘배제된 이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뒤에서 득표를 독려하겠다는 취지로 생각됐다.

하지만 국회의원 1명을 배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상황에서 선생의 생각은 지식인의 염치일 수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유효한 전략은 아니라는 게 당료들의 생각이었다. 기왕 현실 정치의 무대에 오르기로 했으면 그에 맞는 최대한의 결심을 해 주셨으면 하는, 염치가 없는 바람도 있었다.

전방위적인 설득을 시도한 끝에, 배제된 노동을 상징하는 청소 노동자 출신 김순자 후보와 함께 남민전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이력을 가진, 즉 배제된 사상을 상징하는 선생이 손을 잡고 함께 국회로 진출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선생의 고집을 꺾었다. 선생은 그렇게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2번 후보가 되었다. 4% 가까이 득표해야 국회 진출이 가능한 자리였지만, 진보신당은 1.13%의 저조한 득표로 법에 의해 해산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이다.

재창당과 대선 대응 과정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반복되었다. 이상과 현실, 지식인의 고집과 당료의 계산 사이의 대립이다. 결국 대선을 어떻게 치를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던 와중에 선생은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당을 함께하는 ‘동지’임에도, 비판적 지식인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선생의 모습을 보는 마음은 복잡했다.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과 남들을 향한 원망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선생의 마음도 그때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건 충돌과 갈등을 각오하는 것

 

그러나 이제사 돌아보면 당시의 우리는 선생의 진면목을 눈 앞에서 본 거나 다름이 없었다. 선생은 왜 굳이 지식인의 자리를 떠나 당 대표를 하러 와서, 왜 굳이 자신의 생각을 계속 고집해 우리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는가? 그렇게 서로 크고 작은 상처를 주었으면 학을 떼고 떠날 만도 한데, 어떻게 선생은 마지막까지 당원으로, 고문으로, 동지로 우리와 함께할 수 있었는가? 그러니까 선생은 어떻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자기 책임을 다하기 위해 분투하면서,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을 피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떻게 주요 정치인처럼 이른바 ‘정치 논리’에 빠지지 않고 본래 자기 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는가? 다름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로서의 우리를 인정했고, 또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 해야 이해가 되는 일이다.

선생은 ‘똘레랑스(tolerance)’를 한국에 소개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똘레랑스’라고 하면 이제 다들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쉽지 않다.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충돌을 각오한다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지켜야 하는 일이다. 선생은 현실 정치의 영역으로 건너온 다음에도 자신이 주장한 개념을 계속해서 실천한 것이다.

지난 4월 26일 자 〈조선일보〉에 홍세화 선생에 대한 칼럼이 실렸다. 1년 전 일면식도 없는 기자가 무턱대고 문자를 보냈는데, 선생이 인터뷰는 거부하면서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소중합니다”라며 약속 장소에 나왔더라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기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선생을 추모했는데,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는 거부하면서도 기자와의 만남은 거부하지 못한 이 일에서 그의 ‘고결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감사하고 존경한다

 

진보정당 운동이 갈 길을 잃고, 원내 유일의 진보정당은 이제 원외 세력이 된다. 선생의 마지막 정치적 실천은 자신이 소속된 정당을 향한 투표였다고 한다. ‘과연 선생은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우리를 긴장하게 하시는구나’ 했다. 최근 사석에서 홍세화 선생을 회고하면서 말했다. “우리도 선생님 때문에 힘들었고 선생님도 우리 때문에 힘드셨지만, 그렇기에 너무나도 감사했고 지금 존경하는 마음 역시 그대로다”라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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