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4차 산업 혁명, 그것이 교육의 미래여야 하는가
4차 산업 혁명론과 미래 없는 미래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
measophia@naver.com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고 강사이며,《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이다
다보스의 마술
스위스의 산악 지대인 그라우뷘덴 주에는 다보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라인 강 상류의 지류인 다보스 계곡은 여름에는 서늘한 기후로 피서하기 좋고, 겨울에는 기온이 낮고 눈이 많아 겨울 스포츠 장소로 각광받는 곳이다. 인구는 1만 3천 명이고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1260∼1282년경까지 독일의 식민지였고 1477∼164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가 1803년에 그라우뷘덴 주가 스위스 연방에 포함되면서 스위스 땅이 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접경지대에 있는 이 얼음산에는 매년 1월이면 세계 각지에서 정·관계,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든다. ‘다보스 포럼’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보스에서 열린다고 다보스 포럼이라고 불리는 이 국제 행사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이 주최하는 연례행사다. 마치 다보스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국제회의처럼 들리지만 실은 일주일 동안 먹고 마시며 회의도 하고 사교도 하면서 돈독한 우애를 다지는 국제 상류 사회 친교의 장이다. 나는 이 유명한 휴양지에 모인 이들이 벌이는 파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모욕감을 느낀다. 그들이 그곳에서 결정한 일들이 우리가 사는 이곳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탓이다. 내가 도대체 ‘다보스’가 어떤 곳인지 찾아본 이유는, 바로 그곳이 ‘4차 산업 혁명론’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에 있는 다보스는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인제와 비슷한 지형과 경관과 역사를 가졌다. 강원도의 산악 지대도 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는 눈과 얼음의 나라가 된다. 그런데 스위스 다보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변방의 산골 마을에도 ‘4차 산업 혁명’에 맞춰 삶을 바꾸라는 요구가 주문서처럼 들이닥치고 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진로체험교육센터로 수신되는 교육청의 각종 공문은 물론이고, 얼마 전에 참석했던 인제군의 군정 개발 용역을 하고 있는 강원연구원의 주민 설명회 자리에서도 세계적 추세인 4차 산업 혁명에 맞춰 인제군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들 한다. 대체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이 숲과 계곡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여기가 이럴 정도니 다른 곳은 어떨까. 그만큼 4차 산업 혁명이란 용어가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 진원지로부터 온 진동이 이 산골짜기까지 도달해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 포럼에 참가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이 포럼에 참가하려면 최소 7만 1천 달러가 든다고 한다. 그야말로 돈 잔치다. 그것도 그나마 초청을 받은 인사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 주최 측인 WEF는 공식 행사에 초청된 인사들에게만 경비와 숙소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행사 기간 동안 낮의 공식 행사와 밤의 비공식 국제 살롱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의 상류 사회 인사들이 다보스를 찾는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국제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된다. ‘부자들의 정치’를 상징하는 다보스 포럼은 오늘날 G20 같은 정상 회담과 더불어 세계적 과두 정치의 표상이 되었다.
다보스에 모인 세계 시민들, 그들은 누구인가. 과연 나와 나의 친구, 이웃들은 이 국제 사회의 시민에 포함되는가. ‘세계경제포럼’이라고는 하나 그 ‘경제인’의 범주에 노동자의 대표는 없다. 마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재벌 총수들이 주도하는 전국 사장단 모임이듯이,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대학 총장단으로 구성된 회원 단체이듯이, 세계경제포럼이란 단체는 유력 ‘경제인(자본가)’들을 회원으로 하는 비영리 재단이며 교섭 단체다. 전경련과 대교협이 일개 교섭 단체나 이익 단체의 지위를 벗어나 한국의 경제와 한국의 고등교육을 대변하고 대표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마찬가지로 국제적 지배층들의 고급 사교 클럽에 불과한 단체가 어떤 대표나 대의의 정당성도 갖지 않았음에도 세계 경제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인류의 대표도, 국가의 대표도 아니다. 대통령이라 해도 그는 이 포럼에 그저 세계적 유력인사 중 한 명, 사적 개인으로 초대받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많은 이들의 삶이 그들의 파티와 살롱에서 나온 이야기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1월에는 반(反)다보스 시위 역시 격렬해진다. 1999년부터 스위스의 주요 도시들과 세계 곳곳에서는 해마다 반다보스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귀족들이 꿈꾸는 미래가 모든 이들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외친다. 2012년 반다보스 시위대는 이 국제 사교 클럽의 파티를 ‘깡패들의 잔치(gangster′s party)’라고 부르며 저항했다. 2017년에도 1월 17일 포럼 개막을 앞두고 베른에서 반다보스 시위가 열렸다. 그런데 다보스 포럼의 이런 이면을 전하는 국내 언론은 거의 없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이를 국제 민간단체 비영리 기구라고 소개하면서 마치 국제적 시민 사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공신력을 부여한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가설적 용어도 마찬가지다. 다보스는 이 마술 같은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때는 IT 혁명, 지금은 4차 산업 혁명
처음에 그것은 하나의 보고서였을 뿐이다. 2016년 1월에 열린 다보스 포럼의 의제는 ‘4차 산업 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였고 언제나 그렇듯이 다보스 리포트는 세계 경제의 저성장 기조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여기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4차 산업 혁명을 위기를 헤쳐 나갈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슈밥은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런 경제로 가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그 방향으로 가자는 일종의 제안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 이 가설이 기정사실화되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면서 마치 동종 교배로 자가 증식하는 괴물처럼 ‘4차 산업 혁명론’은 대세로 번져 나간 것이다. 다보스 리포트는 삼성경제연구소(SERI) 리포트, 현대경제연구소 리포트, KDI 리포트 등을 통해 재생산되었고, 언론 보도를 통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서로가 서로의 확성기가 되어 준 정·재계, 학계와 언론계의 보고서들 덕분에 하나의 보고서에서 나온 하나의 가설은 갑자기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마치 우리가 그 미래를 확정해 놓은 것처럼 경제 분야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전 분야에서 4차 산업 혁명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4차 산업 혁명 붐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홍기빈 글로벌정치연구소 소장은 “이익 집단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 담론 역시 “재벌 기업과 사익 집단이 기술 입국론을 앞세워 결과물을 나눠 가지는 걸로 귀결될 것이다. 이는 1960년대 때부터 반복돼 온 것”이다.➊
➊ 문화연대 주최 ‘4차 산업 혁명 어디로? 기술 사회의 비판적 상상력’ 토론회 발표 내용. “‘4차 산업 혁명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 〈미디어오늘〉, 2017년 6월 29일.
어쩌면 지금이 ‘마술 같은 기적’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그런 것을 보여 줄 지표가 거의 없는 시기에, 변화에 대한 정치적 요구는 이미 촛불이라는 저항의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촛불 시위와 정권 교체의 결과로 탄생한 정권이니 뭐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급박한 정치적 일정 속에서 탄생한 정부이고 박근혜 정부에서나 촛불 국면에서나 가장 무능한 단위였던 제도권 내 보수 야당이 집권 여당이 된다고 갑자기 국가에 대한 청사진이 생길 리는 없다. 그러니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받아들이고 주창했던 이 담론을 새 정부의 국정 추진 동력으로 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민 사회가 이에 대해 방조 내지 동조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사태가 너무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계와 언론계의 부채질 덕분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뭔가 꺼림칙하면서도 나서서 말하지는 못하고, 4차 산업 혁명이 대세가 되어 갈수록 불안만 증폭된다.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소동 역시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나는 이 ‘4차 산업 혁명론’을 둘러싼 사회적 조증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낀다. 바로 20년 전에 불었던 3차 산업 혁명, 즉 ‘IT 혁명’의 열풍이다. “지금 우리는 200년 전에 시작된 산업 혁명 시기와 유사한 대대적인 경제적·기술적·사회적 변동의 한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1997년 노동당의 집권으로 영국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가 했던 말이다. “미국은 인공 지능으로 4차 산업 혁명의 선두에 서려고 합니다. 이미 시가 총액 1위에서 5위까지가 디지털 혁신 기업입니다. 2020년까지 전기 차 비율을 16%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합니다. 야심차게 국가 전략 기술로 전기 차 정책을 추진합니다. 중국은 연간 700만 명이 대학을 졸업하는데, 그 중 300만 명이 창업에 뛰어듭니다. 하루 평균 1만 2천 개 이상 새로운 회사가 생깁니다. 시진핑 주석은 ‘사이버 강국’을 국가 목표로 삼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뛰어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시작한 4차 산업 혁명, 우리가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미래의 먹거리, 신 성장 동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전인 2017년 2월에 발표한 〈미래를 위한 담대한 도전, 4차 산업 혁명〉이란 제목의 연설문에서 했던 말이다. 이 연설문에는 4차 산업 혁명론의 역작용에 대한 우려나 대비 내용은 하나도 없다.
1996년에서 2004년 사이쯤, IT 혁명이라고 불린 기술 기반 경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장밋빛으로 왔다. 그렇게 ‘신 경제(New Economy)’로 불리며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지나고 보니 단지 버블이었다. IMF 구조 조정 시기에 김대중 정부는 다음 세대가 지식 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고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정보 대국’, ‘IT 강국’이 김대중 정부의 목표였다. 그를 위해 교육은 ‘신 지식인’을 양성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IT 벤처 기업 육성과 그 기업들에 투자할 금융 시장 조성에 쏟아부었다. IT 산업과 금융 산업은 짝을 이루어 상호 촉진제 역할을 하며 시장을 키워 나갔다. 당시 IT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기술력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식 시장에서 주가 상승으로 몸집을 불려 가는 방식이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당시 IT 기대주로 주목받던 회사가 있다. ‘골드뱅크’라는 회사다. 이 회사는 “컴퓨터에 접속하여 온라인 광고를 보면 현금을 리펀드 해 준다”는 아이디어로 1990년대 후반 벤처 기업의 대표 주자로 각광받았다. 이 회사는 1998년 10월 13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는데 첫 거래일 시초 가격이 8백 원이던 주식은 다음 해인 1999년 5월 액면가(5백 원)의 60배가 넘는 3만 7백 원까지 치솟았다. 영업 이익보다는 투자 유치로 성장하는 이런 패턴은 지식 경제, 기술 정보 산업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신기술이 개발되면 그것이 상품화되어 이익을 내기도 전에 주가 상승으로 자산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골드뱅크는 실제 사업에서는 실적을 내지 못했고, 금융, 문화(스포츠) 사업으로의 확장을 꾀하다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이 회사 주식의 마지막 종가는 25원이었다. 정보 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 성장과 IT 혁명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다.
당시 나는 광고판을 클릭만 하면 은행 계좌로 돈이 들어온다는 이 발상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IMF 이후 막 ‘투자 기법’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클릭으로 돈을 벌기 위해 골드뱅크의 회원이 되었고, 그 회원 수가 곧 회사의 초기 자산이 되었다. 지금이야 조회 수 클릭 수가 돈이 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이디어 하나로 일확천금을 쥐었던 청년 창업가의 꿈은 거기서 멈췄다. 나는 당시의 신 경제와 신 지식인의 사례가 지금 창조 경제와 창의 인재, 기업가 정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그 신 경제론, 신지식인론을 검토하고 반성하고 넘어가고 있는가.
과거의 미래인 오늘을 보라
20년 전에도 그랬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시장에 가지 않아도 클릭 한 번으로 물건이 집 앞으로 배송되고,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이메일이나 가상 공간에서의 원격 회의로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그만큼 우리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늘어난 여가만큼 삶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장밋빛 환상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때 예상했던 장밋빛 미래는 어떤 현실로 우리에게 도래했는가. 오히려 전 국민이 ‘타임 푸어(time poor)’가 되지 않았는가. IT 강국에 사는 국민들의 삶의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세계 최고의 초고속 인터넷망을 자랑하는 정보 통신 강국이라고 하지만 그 인터넷 콘텐츠의 대부분이 ‘상품’이다. 대한민국은 더 쉽게 더 빠르게 쇼핑할 수 있는 나라다. 대형 유통 업체를 보유한 재벌들이 온라인 마켓도 장악하고 있으니 이 광케이블은 지역의 돈이 중앙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 부자들의 주머니로 재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다.
문서 정보화로 인한 스트레스는 또 어떤가. 수강 신청부터 강의 평가, 심지어 요즘은 출석까지 ‘정보화 시스템’으로 처리한다. 어디서나 쇼핑하고 어디서나 뱅킹할 수 있는 나라, 클릭 한 번으로 대출이 되는 나라, 사무실에서 세금 업무를 보고, 동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증명 서류를 뗄 수 있는 나라. 그러나 편리함은 적고 정보화의 그늘은 깊고 어둡다. 현장 접수라면 충분히 받아졌을 서류인데 1분이 늦어 시스템이 차단되는 바람에 대학원 시험 원서 접수를 못 했던 후배가 생각이 난다. 정보화 시스템은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무 실무 환경도 더 좋아졌다 할 수 없다. 액티브-X와 각종 실행(.exe)파일, e나라도움 시스템은 만병의 근원이다. 연구자들의 경우 연구 결과물 등록도 학교 산학협력처와 한국연구재단 연구 등록 관리 시스템을 통해서 하도록 되어 있다. 내가 백 개의 논문을 쓰고 백 권의 책을 썼어도 이 시스템에 등록하지 않으면 나는 연구 결과물이 ‘0’인 연구자이고, 연구 지원 신청을 할 때 자격 미달이 된다. 이 수많은 셀프 업로드 시스템은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빼앗고 우리를 얼마나 많은 정보화 시스템의 노예로 만드는가. 기계가 인간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일부로 수렴되는 것은 결국 포드 체제나 정보 기술 사회나 마찬가지다. 공인 인증서와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온라인 제국에서 심지어 자기가 자신임을 인증할 수도 없다. 게다가 정보 과잉 사회가 되면 될수록 개인들이 이런 정보 처리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진다.
이런 정보화 산업을 통해 새로 생겨난, ‘미래 일자리’ IT 산업 종사자들은 누구인가. 텔레마케터와 배송 기사들이다. 우리는 IT 혁명이 청년들의 미래에 실리콘 밸리의 IT 업체 같은 직장을 선사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컴퓨터의 보조자로 있는 것이다.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아도 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의 감시와 통제 명령을 받으며 기계의 업무 처리 역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자,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슬픔도 기쁨도 느끼는 ‘인간의 몸’을 가진 노동자로 말이다. 자본 중심으로 기술 체제가 구현될 때 결국 인간이 결여의 존재가 되고, 그가 가진 인간성이 자신을 ‘하자-불량품’으로 만든다. 2017년 1월 특성화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전주 LG 유플러스 협력 회사 콜센터의 한 현장 실습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2014년 10월에는 LG 유플러스 전주 센터 ‘해지 방어 팀’에서 근무하던 노동자가 가혹한 업무량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죽는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것이 과연 쉴 새 없이 콜을 연결하고 업무량을 체크했던 ‘컴퓨터’였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로봇이 인간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하지만, 과연 노동자의 적이 기계일까.
4차 산업 혁명이 가져올 ‘노동 없는 미래’는 다를까?
이동 통신 기술은 IT 혁명의 핵심 기술 중의 하나였다. 휴대전화에 구현된 이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낫게 변화시켰는가.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2014 한국의 사회 지표’에 따르면 휴대전화 가입자가 5,720만 명으로 총 인구수를 넘어섰다. 2017년 5월 기준 무선 이동 통신 서비스 가입자는 약 6,248만 명이다. 무선 이동 통신 기술은 6천 2백만 대가 넘는 휴대전화와 관련 파생 상품들을 창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정보화 시대에 누가 돈을 벌고 누가 노예가 되었는가. 아프리카가 자원 식민지가 되고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 간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과연 이 기술 혁신은 우리에게 여가를 주었는가, 아니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겼는가. 돈은 누가 벌고 병은 누가 얻었는가.
기업이 보유한 정보 통신 기술은 곧 정보 독점 기술이기도 하다. 주민등록 전자 지문 제도나, CCTV 상용화 당시에는 ‘인권 침해’에 대한 반대 여론이라도 있었는데 그보다 더 정교하게 나의 모든 정보를 빼 가는 빅 데이터와 사물 인터넷 기술에 대해서는 왜 반대하지 않는가. 그들은 나의 취향과 소비 성향과 구매력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비자 맞춤형 상품’은 있어도 ‘기업 맞춤형 구매’는 없다. 기업들의 납세 탈세 등의 조세 정보, 상품 개발 정보, 상품 원가와 성분, 내부 경영 정보, 내부 노동 환경, 폐기물 관리 등의 정보, 비리 사실이나 범죄 이력을 빅 데이터는 우리에게 추적하여 보고해 주는가? 기술은 결코 평평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정보는 쌍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권력이 기울어진 만큼 정보도 한쪽에서 한쪽으로 흘러가고 집중되며 독점된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정보 기술도 물론 있다. 하지만 자본이 독점하고 사유화하는 것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며 그 정보들이 많아질수록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정보 과잉, 연결 과잉이 언젠가 우리의 삶을 파탄 낼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폴더가 점점 많아지더니 언젠가부터 예전의 문서를 찾을 땐 폴더를 통해서가 아닌 검색어 입력으로 파일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수없이 늘어난 카테고리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했다. 컴퓨터의 처리 용량은 그런 폴더를 수천 개 더 만들어도 될 만큼 여유가 있었지만, 채 소화되거나 정리되지 못한 채 저장된 데이터는 나의 처리 용량을 초과해 버린 것이다. 어느 날 컴퓨터를 잃어버리거나 커피를 쏟아서 파일이 완전히 손상된 후에 가장 중요한 백업 파일들만을 건지고 나서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리도 못할 쓰레기 같은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허덕이며 사는 삶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지금 우리는 그런 삶을 돌아보고 다시 제대로 살기 위해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반성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멈춰 서야 할 지점에서 다시 돌진 명령이 내려진 느낌이다. 우리가 덜 사고 덜 쓰고 덜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시장의 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장은 다시 새로운 상품을, 소비를, 기술을, 창조를, 혁신을 부르짖고, 그것을 사회의 도덕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의 기회란 언제나 생태주의적 위기와 맞물려 있다. 정보화도 마찬가지다. 정보 사회는 전기 사회다. 6천 2백 만 대의 휴대전화는 6천 2백만 개의 충전기와 전기 콘센트를 필요로 한다. 기술 혁신을 말하면서 에너지의 집적과 집중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생태적 전환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과 같다. 4차 산업 혁명론에서 말하고 있는 미래 신기술 모두 마찬가지다. 인공 지능, 빅 데이터, 사물 인터넷, 바이오, 생명, 신재생 에너지, 모두 자본의 집중, 에너지의 집중, 국가 차원의 공적 지원의 집중이 없이는 기술 개발과 상용화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융합은 복잡화의 다른 말이다. 학문 융합, 기술 융합보다 훨씬 더 큰 융합 기술은 기술과 자본과 권력의 융합이다.
마술사의 언어들
이런 현실을 감추고 우리의 눈을 속이는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용어를 나는 마술사의 언어라고 부른다. 그 언어의 효과가 착시와 환상을 통해 환영을 현실로 믿게 만드는 마술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래학’은 학문 분야에 새롭게 등장한 마술학이다. 미래란 말의 의미는 ‘아직 있지 않은 것’이란 뜻이다. 미래를 뜻하는 future는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be 동사 ‘숨(sum : I am)’의 미래형으로, 원래 뜻은 ‘있을 것’이 아니라 ‘있지 않다’, 즉 ‘지금 없음’이다. 그것은 미래의 어떤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지 않음, 즉 부재 상태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미래라는 것은 예측하거나 예언할 수 있지만 분석하거나 학습하는 대상은 될 수 없다. 마치 일기 예보처럼 말이다. 지금 미래학의 기원 또한 일기 예측에서 온 것이다. 일기 예측 기술은 2차 대전 당시 전쟁 기술로 고안되어 발전한 것이다. 예측술이란 하나의 기술일 뿐 학문과는 범주가 다른데, 그럼에도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 되고 과학이 될 수 있는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학은 각광받는 분야가 되었고, 각종 매체에 미래학자라는 이름의 미래담론가(futurist)들이 미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교육은 원래 과거에서 배우는 것이다. 과거를 답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를 해석하고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원래 교육의 이념이 아닌가. 과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미래라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과거라는 시간 자체가 거대한 교실이고 배움의 장이다. 그런데 지금 미래 담론은 과거에서 시간성의 의미를 완전히 축소하고 양화시켜서 축적된 데이터 정도로 만들어 버리고 미래를 배움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미래를 배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도대체 왜 미래를 그토록 예측하려고 하는가.
대체 이 ‘미래 담론’은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 역사적 연원과 현실의 맥락을 묻지 않고 그냥 ‘미래 사회’와 ‘미래 교육’을 지금처럼 논해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미래 담론에서 미래라 하는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고 현재다. 인류의 어떤 역사를 보아도 불과 10~20년 후를 ‘미래’라고 부른 적은 없다. 1970년대 수립된 경제 개발 계획들은 모두 5년, 10년, 20년을 염두에 둔 장기 연차 계획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그것을 모두 ‘현대’라는 시대에 포함시켰다.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라고 한다. 아이의 아이의 아이가 태어나 마침내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지금 현재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후가 미래, 곧 인간의 삶에 토대한 시간성을 벗어난 시간, 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신에게 속해 있고, 그래서 상상하거나 예상해 보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사람이 그 미래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거나 대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곱 번째 아이는커녕 첫 번째 아이가 오기도 전에 우리의 ‘미래’는 도래한다.
그런 초단기 미래는 실은 ‘투자의 시간’이다. 시장에 투자되어 이익으로 회수되어야 할 자금은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투자 회수의 주기는 짧을수록 좋다. 돈은 굴려야 불어나기 때문이다. 그냥 묵혀 두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미래 투자 증권’이란 이름이 상징하듯이 ‘미래’라는 것은 금융업계에 어울리는 브랜드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용어가 연구소, 싱크 탱크, 교육 기관, 학원들이 선호하는 용어가 되었다. 미래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창조 경제나 혁신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지식이 돈이 되는 지식 경제 시대에 와서 나타난 현상이다. ‘미래 담론’의 본질은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도망쳐서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성’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새로움’으로서의 미래다. 혁신(innovation)의 정신은 새 것을 추구(into-novus)하는 것이며 시장에서 이것은 ‘신상(新商)’으로 구현된다.
혁신과 미래는 ‘진보’의 이념이 가졌던 미래에 대한 관념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지금 미래 담론에서는 우리가 가 닿아야 할 ‘좋은 사회’에 대한 공동의 가치를 함께 수립해 가는 과정이 없다. 진보 담론과 달리 탈이념적이며 탈정치적인 미래 담론은 미래를 데이터에 의해 예측 가능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상태로 설정한다. 이로써 언제나 진보주의자의 시간이었던 미래는 보수와 우파에 의해 선점된다. ‘과거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하자.’ 오늘날 ‘미래를 위해서’라는 것은 어디서나 우파의 이데올로기다.
원래 혁신이란 진보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화적 과정이다. 혁신이란 새로워지는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처럼 말이다. 날마다 변화가 쌓이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질적 도약이 생기고 그 순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그것을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혁신’이란 개념은 ‘혁신을 시켜라’, ‘혁신을 해라’ 등 타동사적 의미로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혁신하다’가 자동사에서 타동사로 된 것, 그것은 아마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어라’고 했던 삼성의 혁신 경영 선언 이후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계속 새롭게 만들라는 요구이며 기술이든 인간이든 양이 질로 전환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그저 다른 것, 참신한 것, 새 것만을 내놓으라는 닦달이다. 그 새로움의 전환 주기가 곧 상품의 주기고, 투자의 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적 혁신에서는 오늘도 당장 낡은 것이 되고, 과거는 그 자체로서 혁신의 대상이 된다. 낡은 것은 무가치해지고, 쌓인 것은 모두 적폐가 된다. 자본이 전유한 미래는 곧 미래 시장과 다름없다.
자본이 ‘진보 교육’이란 말에는 경기를 일으키면서도 미래 교육과 혁신교육이란 용어는 선호하는 것은 교육 시장이 미래의 노다지라 보기 때문이다. 시장이 바라는 교육 혁신은 미래를 위해 지금 쓰는 것을 버리고 다 새 것으로 바꾸라고 한다. 컴퓨터는 1인용 태블릿 PC로, 코딩 교구로, 아이스크림(i-scream) 같은 소프트웨어도, 마침내는 교과과정 자체도 계속 바뀌는 것이 좋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래서 미래 교육과 혁신 교육이란 용어를 공유하고 있는 교육 현장은 반드시 이 미래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시장 정신을 비판하고 구별해 내야 한다. 미래도, 혁신도, 모두 절대적 선이거나 당위인 것이 아니다. 진보 교육감이 추진하는 정책이라고 덮어놓고 옹호하다가는, 진보 언론이 설파한다고 그냥 좋은 것인가 보다 하고 믿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 현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들이 교육의 상품화, 시장화를 뒷받침하는 담론으로 악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기업가 정신’이 반교육적인 까닭
자본이 지식과 기술을 경제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것은 그 자체가 비물질적 자산이기 때문에 무한히 개발 가능하고 무한히 상품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품화를 통해 지식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착취나 자연에 대한 수탈, 정당하지 못한 이익의 취득과 부도덕한 소비 생활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도덕적·윤리적 저항을 무력화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 역시 언어의 마술이며, 그 기술 또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테면 최근 유행하고 있는 ‘기업가 정신’과 같은 용어가 그런 사례다. 이 말 역시 1990년대 말에 한국에 수입되어 초창기에는 그냥 ‘앙트레프레너십(entrepreneurship)’이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기업가 정신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었다. 그냥 기업가 정신이라고 하면 사장님 정신, 자본가 정신처럼 들리니까 처음에는 꼭 ‘모험적’이나 ‘진취적’ 같은 수식어를 달았다. 어느 정도 유통되어 긍정적 의미가 더 커진 요즘은 수식어를 떼고 그냥 ‘기업가 정신’이라고만 해도 그 자체로 진취성, 도전 정신, 모험가 정신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뜩해진다. 지금은 ‘기업가 정신을 가져라’,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라’ 등이 교육의 이념처럼 수립되어 있으며, 진취성을 ‘선의’로 발현하는 것은 나쁘지 않고 미래의 환경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경련과 자유경제원 같은 우익 경제 단체에서 얼마나 공들여 이 말을 탁마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과거에는 어린이·청소년들이 읽는 위인전의 목록에 ‘부자’는 거의 없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 공동체를 위해 기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종종 애국이나 충성 같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옛 위인들의 공통점은 ‘멸사봉공’이나 ‘홍익인간’을 실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이·청소년들이 동경하는 위대한 인물에 ‘부자’들의 이름이 포함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청소년 추천 도서 ‘인물’ 분야를 검색하면 재력가와 기업가들의 이름이 열거된다. 정주영, 이건희가 롤 모델인 시대가 된 것이다. 옛날의 부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문학적 부를 쌓을 수 있게 된 시대가 되면서다. 오지 탐험이나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칭송받던 극기의 미덕이 부의 소유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조 원대의 재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오직 ‘화폐’라는 자산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고래로 빈부의 차이는 항시 있었지만 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범주를 그 정도로 벗어난 부의 소유라는 것은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될 일이지 칭송받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비난받을 만한 일을 성취해 낸 사람들을 미화시키는 용어가 ‘기업가 정신’인 것이다. 그도 모자라 이제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기업가 정신’을 익히도록 해서 학생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앙트레프레너란 말의 어원은 해상 무역단이다. 해적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는 해적에 속한 배를 일컬었다. 현대어에서도 영국과 미국의 함선을 엔터프라이즈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기원 때문이다. 이 배들은 근해에서 어업하는 어부들의 배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것이다. 고대의 해상 무역은 평화로운 교역이 아니라 항상 전쟁과 약탈을 동반한 것이었다. 상선과 전함은 구분이 없거나 늘 함께 움직였다. 인도를 찾아 나선 콜럼버스의 선단도 투자자와 후원자들에게서 투자를 받아서 진행하는 기획 사업단이었다. ‘빈 배를 가득 채워 돌아오라’가 이 바다 위의 도적들, 앙트레프레너의 정신이다. 그러나 배 위에선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라이즈(prise)’는 취득물이란 뜻이다. 즉 배에 가득 채워 돌아온 것은 약탈물이며 이 앙트레프레너의 정신은 곧 약탈 경제의 상징인 것이다. ‘블루오션’이 괜히 해양으로 시장을 비유한 것이 아니다. 창업가 정신은 새로운 영토와 시장을 개척하는 식민지 개척과 약탈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자기의 삶터에서 살림을 꾸려 가는 살림 경제가 아니라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 최대한의 수익을 올린 후 철수하는 ‘먹튀’의 경제, 약탈의 경제가 앙트레프레너의 본질이다. 그래서 앙트레프레너라는 말은 청부업자, 대행업자란 의미도 갖고 있다. 콜럼버스라는 앙트레프레너는 스페인 여왕과 귀족들이 투자한 기획 약탈 사업의 청부업자였던 것이다.
약탈 경제, 투자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그런 식으로 큰돈을 번 부자들을 미화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쓰는 것은 위험하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형이 교육적 목표가 되어서는 더더구나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창의적 인재’란 이 앙트레프레너와 같은 인간에 다름 아니다. 미래의 인재라 하는 것은 알고 보면 블루오션의 개척자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즉 빈 배를 가득 채워 돌아올 수 있는 역량과 야심을 가진 인간이다. 물론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성공의 수단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자본을 만들어 주는 것은 교육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항시 공동체교육을 그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공교육의 이념을 상실하는 순간 그것은 교육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투자와 교육에 구분이 없다. 공교육을 와해하고 교육의 시장화, 그리고 지식의 자원화와 상품화를 촉진시키는 것은 이런 개념들이 무분별하게 통용될 때다. 지금 이런 개념의 생산지는 대학이나 연구 기관의 이름을 가진 기업의 지식 하청 업체들이다.
노동 없는 미래, 교육 없는 미래
대다수 미래의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자 정신’은 가르치지 않고,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동자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과 법과 제도,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방법, 그런 것은 왜 교육 현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가. 노동에 대한 혐오나 멸시를 조장하는 교육은 제도권 교육뿐만 아니라 혁신이나 미래 교육이란 이름 아래, 또는 대안교육 현장에서도 은연중에 유포되고 있다. ‘노동을 거부하는 삶’을 옹호하는 분위기 말이다. 하지만 노동을 거부하는 삶,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찬미되면 찬미될수록, 현실에서는 노동하는 인간인 노동자의 존재가 부정되고, 노동이 갖는 사회적 가치가 하락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노동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인간답게 노동하는 삶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를 비판하는 이유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 노동의 주권, 즉 결정권과 자율성을 빼앗기기 때문이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장시간 노동과 인격적 모욕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개념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기업가로, 경영가로, 개념 세탁을 하도록 하는 과정에서도 언어의 마술은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긱 경제(gig economy)’나 ‘자유노동자(free worker)’ 같은 개념들이 그런 것들이다.
긱 경제는 다수의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노동의 미래’다. 긱이란 1920년대 미국 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그날그날 필요에 따라 연주자를 섭외해 공연하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긱이란 물고기를 찍는 작살을 뜻하는데 말하자면 긱 경제는 ‘찍히는 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우버택시나 에어비앤비가 긱 경제의 모델로 유명한 사례임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런 식으로 ‘긱 경제’란 용어를 들으면 문화·예술 분야나 서비스 분야의 자유 업종 종사자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런 형태의 대표적 노동은 병원 간 병인이나 가사 도우미, 대리 운전 기사나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불안정 노동을 긱 워크라고 부르면 뭐가 달라지는가. 물론 긱 워크는 특히 스마트 기기를 기반으로 한 공유 경제, OO 서비스 등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한 단기 노동을 가리키는 데 쓰이지만, 결국은 직업소개소나 인력 하청 업체 같은 중간 경로를 없애고 프리랜서 사이트인 업워크(Upwork)처럼 온라인에서 노동 상품이 구매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단기 알바’다. 간병인도 대리 운전 기사도, 건설 현장에 나가려고 대기 중인 노동자들도 지금 다들 스마트 폰을 들고서 긱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시간 강사였던 나도 학기 말이 되면 수시로 폰을 들여다보는 ‘긱 워커’였다.
사회 전체를 인력 하청 공장으로 만들고 인간을 완전히 상품화하는 모델인데도 이런 용역 상품으로 소모되는 인간을,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설정하고 ‘자유노동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이런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이제 사회에는 실업자는 없고 프리랜서만 있고, 구직자는 없고 긱 워커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마술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유롭게 된 노동자들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미래는 이런 완전 자유노동을 실현하게 될 것이고 하나의 직업만을 갖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니 미래학자들은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열 개의 직업’을 준비하라는 그들의 주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업이 금방금방 사라지고 기업도 창업과 폐업을 무시로 하는 세상이 올 것이니 투자 위험을 분산시키라는 뜻 아닌가. 이 말은 따져 보면 열 개의 일을 해야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생활비가 나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열 개의 직업을 가지면 취업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 같지만, 다른 이들 모두 그렇게 열 배수의 직업 분야에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구직 경쟁률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된다. 대신 고용하는 측에서 보면 대기 중인 예비 인력이 열 배, 아니 그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이고, 임금 결정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긱 경제는 지금 이 사회 체제가 자기 고용, 자기 계발, 자기 착취의 돌려 막기로 겨우 굴러갈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평생교육’이란 것은 어떤 주문인가. 지금 기업과 대학이 추진하고 있는 평생교육의 이념은 ‘인간의 배움에는 끝이 없고 일생의 배움을 통해 인간이 되어 간다’라고 하는 배움의 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화여대가 평생교육 단과대 설립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과정에서 보았듯이 방송통신대나 지역의 평생학습관이 가졌던 평생시민교육, 교육 공공성의 이념과는 정반대되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현재 기업과 대학의 평생교육 사업이다. 각자도생의 경제와 각자도생의 교육은 짝을 이루고 있다. 평생교육이란 개념은 이 긱 경제와 같은 불안정 노동의 보편화에 기반을 둔 교육 설계다. 평생 배우란 것은 평생 능력 개발을 하라는 것이고, 이는 모든 사람을 평생 동안 다기능 미숙련 초심자 초보자로 만드는 반교육의 이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나이 들어 취미로 배우고 익히는 삶이 얼마나 좋은가. 거기에 배운 것이 부업이 되어 퇴직 후에도 돈벌이 수단이 된다면 금상첨화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취미·실용·취업·창업 들에 집중된 평생교육 프로그램들이 말해 주듯이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재투자해서 돈을 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경쟁하라는 것이다.
이 평생교육 시장에서 각종 자격증 장사, 시험 장사, 강사 인력 시장, 교구 시장, 프로그램 상품 등으로 돈을 버는 것은 누구이며 평생 돈을 갖다 바쳐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삼성이 인력 개발 부서를 ‘멀티 캠퍼스’란 교육 사업체로 독립시켜 상장하고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한 것은 교육 시장이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블루오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한히 소비 가능하고 무한히 팔 수 있는 상품이 바로 지식 상품, 문화 상품이다. 창조 경제는 농업·어업 같은 1차 산업이나 필수품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이 아니라, 기술, 정보, 문화, 스포츠 분야를 국가의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설계였다. 정권의 권력자들은 그 의미를 잘 몰랐을지도 모르나, 자본은 그 투자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벌들의 싱크 탱크와 친자본적 지식인들,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동원해 이를 전 국가적 의제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자본과 시장이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영역, 그래서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영역은 정말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식이야말로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멸종되지 않는 자원이니까. 그래서 숙련성과 전문성이 아니라 패스트 패션처럼 지식도 트렌드에 따라 적절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되어야 한다. ‘알쓸신잡’➋, ‘지대넓얕➌ ’처럼 말이다.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유행과 패션이 중요하다. 지금의 )코딩교육처럼. 코칭 지도자 자격증처럼.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교육을 재정의해야 한다. 어쩌면 언어의 마술사들은 ‘교육’의 이념에 대한 재정의도 이미 마쳐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➋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사전>, tvN에서 2017년 6월부터 방영한 프로그램의 이름.
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팟캐스트 방송 이름이자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육은 이런 미래 사회에 부합하는 인간을 길러 내기 위해 혁신의 틀을 짜고 있다. ‘문·이과 통합을 통한 융합형 인재 양성’이란 것이 정말로 순수하게 교육적 차원의 고려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문송(문과라 죄송합니다)’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현실은 저성장 경제 불황 속의 청년 실업이다. 문제가 경제에 있는데 왜 해결을 교육에서 찾는가. 경제 불황과 함께 열악한 노동 환경, 시장에서 압도적인 자본의 우위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통합형, 융합형, 문제 해결형 인재를 키워 내도 우리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경제적 실패의 책임을 교육 현장으로 돌리고 교육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육은 교육의 길을 가야 한다. 미래 산업에 필요한 인력 양성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미래의 시민, 비판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는 미래의 시민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시민적 삶의 조건을 무너뜨리는 원인들을 해결해 줄 대안을 미래에서 구하기보다 지금 개입해서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냥 미래가 이렇게 올 것이니 준비하자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오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함께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온다. 일곱 번째 아이가 온다
특집/ 4차 산업 혁명, 그것이 교육의 미래여야 하는가
4차 산업 혁명론과 미래 없는 미래
채효정
본지 편집위원
measophia@naver.com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고 강사이며,《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이다
다보스의 마술
스위스의 산악 지대인 그라우뷘덴 주에는 다보스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라인 강 상류의 지류인 다보스 계곡은 여름에는 서늘한 기후로 피서하기 좋고, 겨울에는 기온이 낮고 눈이 많아 겨울 스포츠 장소로 각광받는 곳이다. 인구는 1만 3천 명이고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1260∼1282년경까지 독일의 식민지였고 1477∼164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가 1803년에 그라우뷘덴 주가 스위스 연방에 포함되면서 스위스 땅이 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접경지대에 있는 이 얼음산에는 매년 1월이면 세계 각지에서 정·관계,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든다. ‘다보스 포럼’이 열리기 때문이다. 다보스에서 열린다고 다보스 포럼이라고 불리는 이 국제 행사는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이 주최하는 연례행사다. 마치 다보스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국제회의처럼 들리지만 실은 일주일 동안 먹고 마시며 회의도 하고 사교도 하면서 돈독한 우애를 다지는 국제 상류 사회 친교의 장이다. 나는 이 유명한 휴양지에 모인 이들이 벌이는 파티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모욕감을 느낀다. 그들이 그곳에서 결정한 일들이 우리가 사는 이곳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탓이다. 내가 도대체 ‘다보스’가 어떤 곳인지 찾아본 이유는, 바로 그곳이 ‘4차 산업 혁명론’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스위스에 있는 다보스는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인제와 비슷한 지형과 경관과 역사를 가졌다. 강원도의 산악 지대도 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는 눈과 얼음의 나라가 된다. 그런데 스위스 다보스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변방의 산골 마을에도 ‘4차 산업 혁명’에 맞춰 삶을 바꾸라는 요구가 주문서처럼 들이닥치고 있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진로체험교육센터로 수신되는 교육청의 각종 공문은 물론이고, 얼마 전에 참석했던 인제군의 군정 개발 용역을 하고 있는 강원연구원의 주민 설명회 자리에서도 세계적 추세인 4차 산업 혁명에 맞춰 인제군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들 한다. 대체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이 숲과 계곡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여기가 이럴 정도니 다른 곳은 어떨까. 그만큼 4차 산업 혁명이란 용어가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 진원지로부터 온 진동이 이 산골짜기까지 도달해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 자신은 그 포럼에 참가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이 포럼에 참가하려면 최소 7만 1천 달러가 든다고 한다. 그야말로 돈 잔치다. 그것도 그나마 초청을 받은 인사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 주최 측인 WEF는 공식 행사에 초청된 인사들에게만 경비와 숙소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행사 기간 동안 낮의 공식 행사와 밤의 비공식 국제 살롱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의 상류 사회 인사들이 다보스를 찾는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국제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된다. ‘부자들의 정치’를 상징하는 다보스 포럼은 오늘날 G20 같은 정상 회담과 더불어 세계적 과두 정치의 표상이 되었다.
다보스에 모인 세계 시민들, 그들은 누구인가. 과연 나와 나의 친구, 이웃들은 이 국제 사회의 시민에 포함되는가. ‘세계경제포럼’이라고는 하나 그 ‘경제인’의 범주에 노동자의 대표는 없다. 마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재벌 총수들이 주도하는 전국 사장단 모임이듯이, ‘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대학 총장단으로 구성된 회원 단체이듯이, 세계경제포럼이란 단체는 유력 ‘경제인(자본가)’들을 회원으로 하는 비영리 재단이며 교섭 단체다. 전경련과 대교협이 일개 교섭 단체나 이익 단체의 지위를 벗어나 한국의 경제와 한국의 고등교육을 대변하고 대표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마찬가지로 국제적 지배층들의 고급 사교 클럽에 불과한 단체가 어떤 대표나 대의의 정당성도 갖지 않았음에도 세계 경제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인류의 대표도, 국가의 대표도 아니다. 대통령이라 해도 그는 이 포럼에 그저 세계적 유력인사 중 한 명, 사적 개인으로 초대받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많은 이들의 삶이 그들의 파티와 살롱에서 나온 이야기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1월에는 반(反)다보스 시위 역시 격렬해진다. 1999년부터 스위스의 주요 도시들과 세계 곳곳에서는 해마다 반다보스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자본주의 사회의 귀족들이 꿈꾸는 미래가 모든 이들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외친다. 2012년 반다보스 시위대는 이 국제 사교 클럽의 파티를 ‘깡패들의 잔치(gangster′s party)’라고 부르며 저항했다. 2017년에도 1월 17일 포럼 개막을 앞두고 베른에서 반다보스 시위가 열렸다. 그런데 다보스 포럼의 이런 이면을 전하는 국내 언론은 거의 없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이를 국제 민간단체 비영리 기구라고 소개하면서 마치 국제적 시민 사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공신력을 부여한다. ‘4차 산업 혁명’이라는 가설적 용어도 마찬가지다. 다보스는 이 마술 같은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때는 IT 혁명, 지금은 4차 산업 혁명
처음에 그것은 하나의 보고서였을 뿐이다. 2016년 1월에 열린 다보스 포럼의 의제는 ‘4차 산업 혁명의 이해(Mastering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였고 언제나 그렇듯이 다보스 리포트는 세계 경제의 저성장 기조를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여기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4차 산업 혁명을 위기를 헤쳐 나갈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했다. 슈밥은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런 경제로 가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그 방향으로 가자는 일종의 제안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 이 가설이 기정사실화되는 과정은 무척 흥미롭다. 인용에 인용을 거듭하면서 마치 동종 교배로 자가 증식하는 괴물처럼 ‘4차 산업 혁명론’은 대세로 번져 나간 것이다. 다보스 리포트는 삼성경제연구소(SERI) 리포트, 현대경제연구소 리포트, KDI 리포트 등을 통해 재생산되었고, 언론 보도를 통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서로가 서로의 확성기가 되어 준 정·재계, 학계와 언론계의 보고서들 덕분에 하나의 보고서에서 나온 하나의 가설은 갑자기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점점 더, 마치 우리가 그 미래를 확정해 놓은 것처럼 경제 분야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교육, 문화 전 분야에서 4차 산업 혁명을 기정사실로 만들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4차 산업 혁명 붐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홍기빈 글로벌정치연구소 소장은 “이익 집단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이 담론 역시 “재벌 기업과 사익 집단이 기술 입국론을 앞세워 결과물을 나눠 가지는 걸로 귀결될 것이다. 이는 1960년대 때부터 반복돼 온 것”이다.➊
➊ 문화연대 주최 ‘4차 산업 혁명 어디로? 기술 사회의 비판적 상상력’ 토론회 발표 내용. “‘4차 산업 혁명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 〈미디어오늘〉, 2017년 6월 29일.
어쩌면 지금이 ‘마술 같은 기적’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그런 것을 보여 줄 지표가 거의 없는 시기에, 변화에 대한 정치적 요구는 이미 촛불이라는 저항의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촛불 시위와 정권 교체의 결과로 탄생한 정권이니 뭐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급박한 정치적 일정 속에서 탄생한 정부이고 박근혜 정부에서나 촛불 국면에서나 가장 무능한 단위였던 제도권 내 보수 야당이 집권 여당이 된다고 갑자기 국가에 대한 청사진이 생길 리는 없다. 그러니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받아들이고 주창했던 이 담론을 새 정부의 국정 추진 동력으로 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시민 사회가 이에 대해 방조 내지 동조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사태가 너무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계와 언론계의 부채질 덕분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뭔가 꺼림칙하면서도 나서서 말하지는 못하고, 4차 산업 혁명이 대세가 되어 갈수록 불안만 증폭된다.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소동 역시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 않은가. 나는 이 ‘4차 산업 혁명론’을 둘러싼 사회적 조증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낀다. 바로 20년 전에 불었던 3차 산업 혁명, 즉 ‘IT 혁명’의 열풍이다. “지금 우리는 200년 전에 시작된 산업 혁명 시기와 유사한 대대적인 경제적·기술적·사회적 변동의 한가운데 있다고 말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1997년 노동당의 집권으로 영국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가 했던 말이다. “미국은 인공 지능으로 4차 산업 혁명의 선두에 서려고 합니다. 이미 시가 총액 1위에서 5위까지가 디지털 혁신 기업입니다. 2020년까지 전기 차 비율을 16%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합니다. 야심차게 국가 전략 기술로 전기 차 정책을 추진합니다. 중국은 연간 700만 명이 대학을 졸업하는데, 그 중 300만 명이 창업에 뛰어듭니다. 하루 평균 1만 2천 개 이상 새로운 회사가 생깁니다. 시진핑 주석은 ‘사이버 강국’을 국가 목표로 삼았습니다. 대한민국은 다시 뛰어야 합니다. 다시 일어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시작한 4차 산업 혁명, 우리가 뒤처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미래의 먹거리, 신 성장 동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전인 2017년 2월에 발표한 〈미래를 위한 담대한 도전, 4차 산업 혁명〉이란 제목의 연설문에서 했던 말이다. 이 연설문에는 4차 산업 혁명론의 역작용에 대한 우려나 대비 내용은 하나도 없다.
1996년에서 2004년 사이쯤, IT 혁명이라고 불린 기술 기반 경제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장밋빛으로 왔다. 그렇게 ‘신 경제(New Economy)’로 불리며 위기를 타개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지나고 보니 단지 버블이었다. IMF 구조 조정 시기에 김대중 정부는 다음 세대가 지식 정보 사회의 주역이 되고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정보 대국’, ‘IT 강국’이 김대중 정부의 목표였다. 그를 위해 교육은 ‘신 지식인’을 양성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막대한 공적 자금을 IT 벤처 기업 육성과 그 기업들에 투자할 금융 시장 조성에 쏟아부었다. IT 산업과 금융 산업은 짝을 이루어 상호 촉진제 역할을 하며 시장을 키워 나갔다. 당시 IT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기술력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주식 시장에서 주가 상승으로 몸집을 불려 가는 방식이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당시 IT 기대주로 주목받던 회사가 있다. ‘골드뱅크’라는 회사다. 이 회사는 “컴퓨터에 접속하여 온라인 광고를 보면 현금을 리펀드 해 준다”는 아이디어로 1990년대 후반 벤처 기업의 대표 주자로 각광받았다. 이 회사는 1998년 10월 13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는데 첫 거래일 시초 가격이 8백 원이던 주식은 다음 해인 1999년 5월 액면가(5백 원)의 60배가 넘는 3만 7백 원까지 치솟았다. 영업 이익보다는 투자 유치로 성장하는 이런 패턴은 지식 경제, 기술 정보 산업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다. 신기술이 개발되면 그것이 상품화되어 이익을 내기도 전에 주가 상승으로 자산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골드뱅크는 실제 사업에서는 실적을 내지 못했고, 금융, 문화(스포츠) 사업으로의 확장을 꾀하다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이 회사 주식의 마지막 종가는 25원이었다. 정보 기술 발전을 통한 경제 성장과 IT 혁명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다.
당시 나는 광고판을 클릭만 하면 은행 계좌로 돈이 들어온다는 이 발상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IMF 이후 막 ‘투자 기법’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은 클릭으로 돈을 벌기 위해 골드뱅크의 회원이 되었고, 그 회원 수가 곧 회사의 초기 자산이 되었다. 지금이야 조회 수 클릭 수가 돈이 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창의적 발상이었다. 하지만 아이디어 하나로 일확천금을 쥐었던 청년 창업가의 꿈은 거기서 멈췄다. 나는 당시의 신 경제와 신 지식인의 사례가 지금 창조 경제와 창의 인재, 기업가 정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그 신 경제론, 신지식인론을 검토하고 반성하고 넘어가고 있는가.
과거의 미래인 오늘을 보라
20년 전에도 그랬다. 기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시장에 가지 않아도 클릭 한 번으로 물건이 집 앞으로 배송되고,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이메일이나 가상 공간에서의 원격 회의로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그만큼 우리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늘어난 여가만큼 삶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장밋빛 환상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때 예상했던 장밋빛 미래는 어떤 현실로 우리에게 도래했는가. 오히려 전 국민이 ‘타임 푸어(time poor)’가 되지 않았는가. IT 강국에 사는 국민들의 삶의 현실은 처참하기만 하다.
세계 최고의 초고속 인터넷망을 자랑하는 정보 통신 강국이라고 하지만 그 인터넷 콘텐츠의 대부분이 ‘상품’이다. 대한민국은 더 쉽게 더 빠르게 쇼핑할 수 있는 나라다. 대형 유통 업체를 보유한 재벌들이 온라인 마켓도 장악하고 있으니 이 광케이블은 지역의 돈이 중앙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 부자들의 주머니로 재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다.
문서 정보화로 인한 스트레스는 또 어떤가. 수강 신청부터 강의 평가, 심지어 요즘은 출석까지 ‘정보화 시스템’으로 처리한다. 어디서나 쇼핑하고 어디서나 뱅킹할 수 있는 나라, 클릭 한 번으로 대출이 되는 나라, 사무실에서 세금 업무를 보고, 동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증명 서류를 뗄 수 있는 나라. 그러나 편리함은 적고 정보화의 그늘은 깊고 어둡다. 현장 접수라면 충분히 받아졌을 서류인데 1분이 늦어 시스템이 차단되는 바람에 대학원 시험 원서 접수를 못 했던 후배가 생각이 난다. 정보화 시스템은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사무 실무 환경도 더 좋아졌다 할 수 없다. 액티브-X와 각종 실행(.exe)파일, e나라도움 시스템은 만병의 근원이다. 연구자들의 경우 연구 결과물 등록도 학교 산학협력처와 한국연구재단 연구 등록 관리 시스템을 통해서 하도록 되어 있다. 내가 백 개의 논문을 쓰고 백 권의 책을 썼어도 이 시스템에 등록하지 않으면 나는 연구 결과물이 ‘0’인 연구자이고, 연구 지원 신청을 할 때 자격 미달이 된다. 이 수많은 셀프 업로드 시스템은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빼앗고 우리를 얼마나 많은 정보화 시스템의 노예로 만드는가. 기계가 인간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일부로 수렴되는 것은 결국 포드 체제나 정보 기술 사회나 마찬가지다. 공인 인증서와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은 온라인 제국에서 심지어 자기가 자신임을 인증할 수도 없다. 게다가 정보 과잉 사회가 되면 될수록 개인들이 이런 정보 처리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은 실로 어마어마해진다.
이런 정보화 산업을 통해 새로 생겨난, ‘미래 일자리’ IT 산업 종사자들은 누구인가. 텔레마케터와 배송 기사들이다. 우리는 IT 혁명이 청년들의 미래에 실리콘 밸리의 IT 업체 같은 직장을 선사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아니었다. 물론 그들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컴퓨터의 보조자로 있는 것이다.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아도 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의 감시와 통제 명령을 받으며 기계의 업무 처리 역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노동자, 물도 마시고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슬픔도 기쁨도 느끼는 ‘인간의 몸’을 가진 노동자로 말이다. 자본 중심으로 기술 체제가 구현될 때 결국 인간이 결여의 존재가 되고, 그가 가진 인간성이 자신을 ‘하자-불량품’으로 만든다. 2017년 1월 특성화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전주 LG 유플러스 협력 회사 콜센터의 한 현장 실습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2014년 10월에는 LG 유플러스 전주 센터 ‘해지 방어 팀’에서 근무하던 노동자가 가혹한 업무량과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고통을 당하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죽는다. 하지만 그들을 죽인 것이 과연 쉴 새 없이 콜을 연결하고 업무량을 체크했던 ‘컴퓨터’였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다. 로봇이 인간의 미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고 하지만, 과연 노동자의 적이 기계일까.
4차 산업 혁명이 가져올 ‘노동 없는 미래’는 다를까?
이동 통신 기술은 IT 혁명의 핵심 기술 중의 하나였다. 휴대전화에 구현된 이 기술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낫게 변화시켰는가. 2015년 통계청이 발표한 ‘2014 한국의 사회 지표’에 따르면 휴대전화 가입자가 5,720만 명으로 총 인구수를 넘어섰다. 2017년 5월 기준 무선 이동 통신 서비스 가입자는 약 6,248만 명이다. 무선 이동 통신 기술은 6천 2백만 대가 넘는 휴대전화와 관련 파생 상품들을 창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정보화 시대에 누가 돈을 벌고 누가 노예가 되었는가. 아프리카가 자원 식민지가 되고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 간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과연 이 기술 혁신은 우리에게 여가를 주었는가, 아니면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빼앗겼는가. 돈은 누가 벌고 병은 누가 얻었는가.
기업이 보유한 정보 통신 기술은 곧 정보 독점 기술이기도 하다. 주민등록 전자 지문 제도나, CCTV 상용화 당시에는 ‘인권 침해’에 대한 반대 여론이라도 있었는데 그보다 더 정교하게 나의 모든 정보를 빼 가는 빅 데이터와 사물 인터넷 기술에 대해서는 왜 반대하지 않는가. 그들은 나의 취향과 소비 성향과 구매력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비자 맞춤형 상품’은 있어도 ‘기업 맞춤형 구매’는 없다. 기업들의 납세 탈세 등의 조세 정보, 상품 개발 정보, 상품 원가와 성분, 내부 경영 정보, 내부 노동 환경, 폐기물 관리 등의 정보, 비리 사실이나 범죄 이력을 빅 데이터는 우리에게 추적하여 보고해 주는가? 기술은 결코 평평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정보는 쌍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권력이 기울어진 만큼 정보도 한쪽에서 한쪽으로 흘러가고 집중되며 독점된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정보 기술도 물론 있다. 하지만 자본이 독점하고 사유화하는 것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며 그 정보들이 많아질수록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정보 과잉, 연결 과잉이 언젠가 우리의 삶을 파탄 낼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폴더가 점점 많아지더니 언젠가부터 예전의 문서를 찾을 땐 폴더를 통해서가 아닌 검색어 입력으로 파일을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수없이 늘어난 카테고리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했다. 컴퓨터의 처리 용량은 그런 폴더를 수천 개 더 만들어도 될 만큼 여유가 있었지만, 채 소화되거나 정리되지 못한 채 저장된 데이터는 나의 처리 용량을 초과해 버린 것이다. 어느 날 컴퓨터를 잃어버리거나 커피를 쏟아서 파일이 완전히 손상된 후에 가장 중요한 백업 파일들만을 건지고 나서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리도 못할 쓰레기 같은 짐들을 잔뜩 짊어지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허덕이며 사는 삶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지금 우리는 그런 삶을 돌아보고 다시 제대로 살기 위해 무엇이 사라져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반성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런데 멈춰 서야 할 지점에서 다시 돌진 명령이 내려진 느낌이다. 우리가 덜 사고 덜 쓰고 덜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시장의 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장은 다시 새로운 상품을, 소비를, 기술을, 창조를, 혁신을 부르짖고, 그것을 사회의 도덕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의 기회란 언제나 생태주의적 위기와 맞물려 있다. 정보화도 마찬가지다. 정보 사회는 전기 사회다. 6천 2백 만 대의 휴대전화는 6천 2백만 개의 충전기와 전기 콘센트를 필요로 한다. 기술 혁신을 말하면서 에너지의 집적과 집중을 말하지 않는 것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한 생태적 전환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과 같다. 4차 산업 혁명론에서 말하고 있는 미래 신기술 모두 마찬가지다. 인공 지능, 빅 데이터, 사물 인터넷, 바이오, 생명, 신재생 에너지, 모두 자본의 집중, 에너지의 집중, 국가 차원의 공적 지원의 집중이 없이는 기술 개발과 상용화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융합은 복잡화의 다른 말이다. 학문 융합, 기술 융합보다 훨씬 더 큰 융합 기술은 기술과 자본과 권력의 융합이다.
마술사의 언어들
이런 현실을 감추고 우리의 눈을 속이는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용어를 나는 마술사의 언어라고 부른다. 그 언어의 효과가 착시와 환상을 통해 환영을 현실로 믿게 만드는 마술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미래학’은 학문 분야에 새롭게 등장한 마술학이다. 미래란 말의 의미는 ‘아직 있지 않은 것’이란 뜻이다. 미래를 뜻하는 future는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be 동사 ‘숨(sum : I am)’의 미래형으로, 원래 뜻은 ‘있을 것’이 아니라 ‘있지 않다’, 즉 ‘지금 없음’이다. 그것은 미래의 어떤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지 않음, 즉 부재 상태를 지시한다. 그러므로 미래라는 것은 예측하거나 예언할 수 있지만 분석하거나 학습하는 대상은 될 수 없다. 마치 일기 예보처럼 말이다. 지금 미래학의 기원 또한 일기 예측에서 온 것이다. 일기 예측 기술은 2차 대전 당시 전쟁 기술로 고안되어 발전한 것이다. 예측술이란 하나의 기술일 뿐 학문과는 범주가 다른데, 그럼에도 그것이 어떻게 학문이 되고 과학이 될 수 있는지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학은 각광받는 분야가 되었고, 각종 매체에 미래학자라는 이름의 미래담론가(futurist)들이 미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교육은 원래 과거에서 배우는 것이다. 과거를 답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를 해석하고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원래 교육의 이념이 아닌가. 과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래서 미래라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과거라는 시간 자체가 거대한 교실이고 배움의 장이다. 그런데 지금 미래 담론은 과거에서 시간성의 의미를 완전히 축소하고 양화시켜서 축적된 데이터 정도로 만들어 버리고 미래를 배움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미래를 배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도대체 왜 미래를 그토록 예측하려고 하는가.
대체 이 ‘미래 담론’은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 역사적 연원과 현실의 맥락을 묻지 않고 그냥 ‘미래 사회’와 ‘미래 교육’을 지금처럼 논해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미래 담론에서 미래라 하는 것은 사실 미래가 아니고 현재다. 인류의 어떤 역사를 보아도 불과 10~20년 후를 ‘미래’라고 부른 적은 없다. 1970년대 수립된 경제 개발 계획들은 모두 5년, 10년, 20년을 염두에 둔 장기 연차 계획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그것을 모두 ‘현대’라는 시대에 포함시켰다. 인디언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라고 한다. 아이의 아이의 아이가 태어나 마침내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의 시간, 그 시간을 지금 현재의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후가 미래, 곧 인간의 삶에 토대한 시간성을 벗어난 시간, 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신에게 속해 있고, 그래서 상상하거나 예상해 보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사람이 그 미래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거나 대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곱 번째 아이는커녕 첫 번째 아이가 오기도 전에 우리의 ‘미래’는 도래한다.
그런 초단기 미래는 실은 ‘투자의 시간’이다. 시장에 투자되어 이익으로 회수되어야 할 자금은 일곱 번째 아이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다. 투자 회수의 주기는 짧을수록 좋다. 돈은 굴려야 불어나기 때문이다. 그냥 묵혀 두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미래 투자 증권’이란 이름이 상징하듯이 ‘미래’라는 것은 금융업계에 어울리는 브랜드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용어가 연구소, 싱크 탱크, 교육 기관, 학원들이 선호하는 용어가 되었다. 미래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창조 경제나 혁신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지식이 돈이 되는 지식 경제 시대에 와서 나타난 현상이다. ‘미래 담론’의 본질은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도망쳐서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성’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새로움’으로서의 미래다. 혁신(innovation)의 정신은 새 것을 추구(into-novus)하는 것이며 시장에서 이것은 ‘신상(新商)’으로 구현된다.
혁신과 미래는 ‘진보’의 이념이 가졌던 미래에 대한 관념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지금 미래 담론에서는 우리가 가 닿아야 할 ‘좋은 사회’에 대한 공동의 가치를 함께 수립해 가는 과정이 없다. 진보 담론과 달리 탈이념적이며 탈정치적인 미래 담론은 미래를 데이터에 의해 예측 가능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상태로 설정한다. 이로써 언제나 진보주의자의 시간이었던 미래는 보수와 우파에 의해 선점된다. ‘과거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하자.’ 오늘날 ‘미래를 위해서’라는 것은 어디서나 우파의 이데올로기다.
원래 혁신이란 진보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진화적 과정이다. 혁신이란 새로워지는 것이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처럼 말이다. 날마다 변화가 쌓이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질적 도약이 생기고 그 순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그것을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혁신’이란 개념은 ‘혁신을 시켜라’, ‘혁신을 해라’ 등 타동사적 의미로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혁신하다’가 자동사에서 타동사로 된 것, 그것은 아마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어라’고 했던 삼성의 혁신 경영 선언 이후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계속 새롭게 만들라는 요구이며 기술이든 인간이든 양이 질로 전환될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고 그저 다른 것, 참신한 것, 새 것만을 내놓으라는 닦달이다. 그 새로움의 전환 주기가 곧 상품의 주기고, 투자의 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적 혁신에서는 오늘도 당장 낡은 것이 되고, 과거는 그 자체로서 혁신의 대상이 된다. 낡은 것은 무가치해지고, 쌓인 것은 모두 적폐가 된다. 자본이 전유한 미래는 곧 미래 시장과 다름없다.
자본이 ‘진보 교육’이란 말에는 경기를 일으키면서도 미래 교육과 혁신교육이란 용어는 선호하는 것은 교육 시장이 미래의 노다지라 보기 때문이다. 시장이 바라는 교육 혁신은 미래를 위해 지금 쓰는 것을 버리고 다 새 것으로 바꾸라고 한다. 컴퓨터는 1인용 태블릿 PC로, 코딩 교구로, 아이스크림(i-scream) 같은 소프트웨어도, 마침내는 교과과정 자체도 계속 바뀌는 것이 좋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래서 미래 교육과 혁신 교육이란 용어를 공유하고 있는 교육 현장은 반드시 이 미래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시장 정신을 비판하고 구별해 내야 한다. 미래도, 혁신도, 모두 절대적 선이거나 당위인 것이 아니다. 진보 교육감이 추진하는 정책이라고 덮어놓고 옹호하다가는, 진보 언론이 설파한다고 그냥 좋은 것인가 보다 하고 믿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 현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들이 교육의 상품화, 시장화를 뒷받침하는 담론으로 악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기업가 정신’이 반교육적인 까닭
자본이 지식과 기술을 경제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것은 그 자체가 비물질적 자산이기 때문에 무한히 개발 가능하고 무한히 상품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품화를 통해 지식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질서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착취나 자연에 대한 수탈, 정당하지 못한 이익의 취득과 부도덕한 소비 생활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도덕적·윤리적 저항을 무력화하고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것 역시 언어의 마술이며, 그 기술 또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를테면 최근 유행하고 있는 ‘기업가 정신’과 같은 용어가 그런 사례다. 이 말 역시 1990년대 말에 한국에 수입되어 초창기에는 그냥 ‘앙트레프레너십(entrepreneurship)’이라고 불리다가 나중에 기업가 정신이라는 번역어로 통용되었다. 그냥 기업가 정신이라고 하면 사장님 정신, 자본가 정신처럼 들리니까 처음에는 꼭 ‘모험적’이나 ‘진취적’ 같은 수식어를 달았다. 어느 정도 유통되어 긍정적 의미가 더 커진 요즘은 수식어를 떼고 그냥 ‘기업가 정신’이라고만 해도 그 자체로 진취성, 도전 정신, 모험가 정신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뜩해진다. 지금은 ‘기업가 정신을 가져라’, ‘기업가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키워라’ 등이 교육의 이념처럼 수립되어 있으며, 진취성을 ‘선의’로 발현하는 것은 나쁘지 않고 미래의 환경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경련과 자유경제원 같은 우익 경제 단체에서 얼마나 공들여 이 말을 탁마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과거에는 어린이·청소년들이 읽는 위인전의 목록에 ‘부자’는 거의 없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 공동체를 위해 기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종종 애국이나 충성 같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개입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옛 위인들의 공통점은 ‘멸사봉공’이나 ‘홍익인간’을 실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어린이·청소년들이 동경하는 위대한 인물에 ‘부자’들의 이름이 포함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청소년 추천 도서 ‘인물’ 분야를 검색하면 재력가와 기업가들의 이름이 열거된다. 정주영, 이건희가 롤 모델인 시대가 된 것이다. 옛날의 부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문학적 부를 쌓을 수 있게 된 시대가 되면서다. 오지 탐험이나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칭송받던 극기의 미덕이 부의 소유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조 원대의 재산이라는 것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연적인 상태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오직 ‘화폐’라는 자산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고래로 빈부의 차이는 항시 있었지만 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범주를 그 정도로 벗어난 부의 소유라는 것은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될 일이지 칭송받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비난받을 만한 일을 성취해 낸 사람들을 미화시키는 용어가 ‘기업가 정신’인 것이다. 그도 모자라 이제 우리는 교육과정에서 ‘기업가 정신’을 익히도록 해서 학생들에게 그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앙트레프레너란 말의 어원은 해상 무역단이다. 해적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는 해적에 속한 배를 일컬었다. 현대어에서도 영국과 미국의 함선을 엔터프라이즈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기원 때문이다. 이 배들은 근해에서 어업하는 어부들의 배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것이다. 고대의 해상 무역은 평화로운 교역이 아니라 항상 전쟁과 약탈을 동반한 것이었다. 상선과 전함은 구분이 없거나 늘 함께 움직였다. 인도를 찾아 나선 콜럼버스의 선단도 투자자와 후원자들에게서 투자를 받아서 진행하는 기획 사업단이었다. ‘빈 배를 가득 채워 돌아오라’가 이 바다 위의 도적들, 앙트레프레너의 정신이다. 그러나 배 위에선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프라이즈(prise)’는 취득물이란 뜻이다. 즉 배에 가득 채워 돌아온 것은 약탈물이며 이 앙트레프레너의 정신은 곧 약탈 경제의 상징인 것이다. ‘블루오션’이 괜히 해양으로 시장을 비유한 것이 아니다. 창업가 정신은 새로운 영토와 시장을 개척하는 식민지 개척과 약탈의 정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자기의 삶터에서 살림을 꾸려 가는 살림 경제가 아니라 바다 건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 최대한의 수익을 올린 후 철수하는 ‘먹튀’의 경제, 약탈의 경제가 앙트레프레너의 본질이다. 그래서 앙트레프레너라는 말은 청부업자, 대행업자란 의미도 갖고 있다. 콜럼버스라는 앙트레프레너는 스페인 여왕과 귀족들이 투자한 기획 약탈 사업의 청부업자였던 것이다.
약탈 경제, 투자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그런 식으로 큰돈을 번 부자들을 미화하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쓰는 것은 위험하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형이 교육적 목표가 되어서는 더더구나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창의적 인재’란 이 앙트레프레너와 같은 인간에 다름 아니다. 미래의 인재라 하는 것은 알고 보면 블루오션의 개척자이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즉 빈 배를 가득 채워 돌아올 수 있는 역량과 야심을 가진 인간이다. 물론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성공의 수단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나는 개인의 성공을 위한 자본을 만들어 주는 것은 교육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항시 공동체교육을 그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공교육의 이념을 상실하는 순간 그것은 교육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투자와 교육에 구분이 없다. 공교육을 와해하고 교육의 시장화, 그리고 지식의 자원화와 상품화를 촉진시키는 것은 이런 개념들이 무분별하게 통용될 때다. 지금 이런 개념의 생산지는 대학이나 연구 기관의 이름을 가진 기업의 지식 하청 업체들이다.
노동 없는 미래, 교육 없는 미래
대다수 미래의 노동자가 될 학생들에게 ‘노동자 정신’은 가르치지 않고, ‘기업가 정신’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동자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길과 법과 제도,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방법, 그런 것은 왜 교육 현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가. 노동에 대한 혐오나 멸시를 조장하는 교육은 제도권 교육뿐만 아니라 혁신이나 미래 교육이란 이름 아래, 또는 대안교육 현장에서도 은연중에 유포되고 있다. ‘노동을 거부하는 삶’을 옹호하는 분위기 말이다. 하지만 노동을 거부하는 삶,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찬미되면 찬미될수록, 현실에서는 노동하는 인간인 노동자의 존재가 부정되고, 노동이 갖는 사회적 가치가 하락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노동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인간답게 노동하는 삶이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를 비판하는 이유는 노동하는 사람들이 노동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 노동의 주권, 즉 결정권과 자율성을 빼앗기기 때문이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장시간 노동과 인격적 모욕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개념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기업가로, 경영가로, 개념 세탁을 하도록 하는 과정에서도 언어의 마술은 탁월한 힘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긱 경제(gig economy)’나 ‘자유노동자(free worker)’ 같은 개념들이 그런 것들이다.
긱 경제는 다수의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노동의 미래’다. 긱이란 1920년대 미국 재즈 공연장 주변에서 그날그날 필요에 따라 연주자를 섭외해 공연하던 것을 일컫는 말이다. 긱이란 물고기를 찍는 작살을 뜻하는데 말하자면 긱 경제는 ‘찍히는 만큼’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우버택시나 에어비앤비가 긱 경제의 모델로 유명한 사례임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그런 식으로 ‘긱 경제’란 용어를 들으면 문화·예술 분야나 서비스 분야의 자유 업종 종사자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런 형태의 대표적 노동은 병원 간 병인이나 가사 도우미, 대리 운전 기사나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불안정 노동을 긱 워크라고 부르면 뭐가 달라지는가. 물론 긱 워크는 특히 스마트 기기를 기반으로 한 공유 경제, OO 서비스 등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한 단기 노동을 가리키는 데 쓰이지만, 결국은 직업소개소나 인력 하청 업체 같은 중간 경로를 없애고 프리랜서 사이트인 업워크(Upwork)처럼 온라인에서 노동 상품이 구매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단기 알바’다. 간병인도 대리 운전 기사도, 건설 현장에 나가려고 대기 중인 노동자들도 지금 다들 스마트 폰을 들고서 긱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시간 강사였던 나도 학기 말이 되면 수시로 폰을 들여다보는 ‘긱 워커’였다.
사회 전체를 인력 하청 공장으로 만들고 인간을 완전히 상품화하는 모델인데도 이런 용역 상품으로 소모되는 인간을,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설정하고 ‘자유노동자’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이런 언어를 창조함으로써 이제 사회에는 실업자는 없고 프리랜서만 있고, 구직자는 없고 긱 워커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마술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유롭게 된 노동자들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미래는 이런 완전 자유노동을 실현하게 될 것이고 하나의 직업만을 갖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니 미래학자들은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열 개의 직업’을 준비하라는 그들의 주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직업이 금방금방 사라지고 기업도 창업과 폐업을 무시로 하는 세상이 올 것이니 투자 위험을 분산시키라는 뜻 아닌가. 이 말은 따져 보면 열 개의 일을 해야 한 사람 혹은 한 가족의 생활비가 나온다는 것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열 개의 직업을 가지면 취업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 같지만, 다른 이들 모두 그렇게 열 배수의 직업 분야에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결과적으로는 구직 경쟁률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된다. 대신 고용하는 측에서 보면 대기 중인 예비 인력이 열 배, 아니 그 이상으로 늘어나는 것이고, 임금 결정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긱 경제는 지금 이 사회 체제가 자기 고용, 자기 계발, 자기 착취의 돌려 막기로 겨우 굴러갈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평생교육’이란 것은 어떤 주문인가. 지금 기업과 대학이 추진하고 있는 평생교육의 이념은 ‘인간의 배움에는 끝이 없고 일생의 배움을 통해 인간이 되어 간다’라고 하는 배움의 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화여대가 평생교육 단과대 설립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과정에서 보았듯이 방송통신대나 지역의 평생학습관이 가졌던 평생시민교육, 교육 공공성의 이념과는 정반대되는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현재 기업과 대학의 평생교육 사업이다. 각자도생의 경제와 각자도생의 교육은 짝을 이루고 있다. 평생교육이란 개념은 이 긱 경제와 같은 불안정 노동의 보편화에 기반을 둔 교육 설계다. 평생 배우란 것은 평생 능력 개발을 하라는 것이고, 이는 모든 사람을 평생 동안 다기능 미숙련 초심자 초보자로 만드는 반교육의 이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나이 들어 취미로 배우고 익히는 삶이 얼마나 좋은가. 거기에 배운 것이 부업이 되어 퇴직 후에도 돈벌이 수단이 된다면 금상첨화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취미·실용·취업·창업 들에 집중된 평생교육 프로그램들이 말해 주듯이 죽을 때까지 자기에게 재투자해서 돈을 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경쟁하라는 것이다.
이 평생교육 시장에서 각종 자격증 장사, 시험 장사, 강사 인력 시장, 교구 시장, 프로그램 상품 등으로 돈을 버는 것은 누구이며 평생 돈을 갖다 바쳐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삼성이 인력 개발 부서를 ‘멀티 캠퍼스’란 교육 사업체로 독립시켜 상장하고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한 것은 교육 시장이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블루오션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한히 소비 가능하고 무한히 팔 수 있는 상품이 바로 지식 상품, 문화 상품이다. 창조 경제는 농업·어업 같은 1차 산업이나 필수품을 만들어 내는 제조업이 아니라, 기술, 정보, 문화, 스포츠 분야를 국가의 주력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설계였다. 정권의 권력자들은 그 의미를 잘 몰랐을지도 모르나, 자본은 그 투자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벌들의 싱크 탱크와 친자본적 지식인들,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동원해 이를 전 국가적 의제로 만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자본과 시장이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영역, 그래서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영역은 정말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지식이야말로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멸종되지 않는 자원이니까. 그래서 숙련성과 전문성이 아니라 패스트 패션처럼 지식도 트렌드에 따라 적절히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되어야 한다. ‘알쓸신잡’➋, ‘지대넓얕➌ ’처럼 말이다.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유행과 패션이 중요하다. 지금의 )코딩교육처럼. 코칭 지도자 자격증처럼. 이것을 ‘교육’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교육을 재정의해야 한다. 어쩌면 언어의 마술사들은 ‘교육’의 이념에 대한 재정의도 이미 마쳐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➋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사전>, tvN에서 2017년 6월부터 방영한 프로그램의 이름.
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팟캐스트 방송 이름이자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육은 이런 미래 사회에 부합하는 인간을 길러 내기 위해 혁신의 틀을 짜고 있다. ‘문·이과 통합을 통한 융합형 인재 양성’이란 것이 정말로 순수하게 교육적 차원의 고려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문송(문과라 죄송합니다)’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현실은 저성장 경제 불황 속의 청년 실업이다. 문제가 경제에 있는데 왜 해결을 교육에서 찾는가. 경제 불황과 함께 열악한 노동 환경, 시장에서 압도적인 자본의 우위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통합형, 융합형, 문제 해결형 인재를 키워 내도 우리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경제적 실패의 책임을 교육 현장으로 돌리고 교육을 통해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교육은 교육의 길을 가야 한다. 미래 산업에 필요한 인력 양성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갈 미래의 시민, 비판할 수 있고 저항할 수 있는 미래의 시민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시민적 삶의 조건을 무너뜨리는 원인들을 해결해 줄 대안을 미래에서 구하기보다 지금 개입해서 해결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냥 미래가 이렇게 올 것이니 준비하자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오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함께 결정해야 한다. 함께 고민하고 결정할 시간을 요구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가 온다. 일곱 번째 아이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