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기후 위기 시대의 교육
탈성장으로 가는 길, 교육
- 기후 위기를 초래한 성장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교육의 필요성
남미자
sisi23581@gmail.com
경기도교육연구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가 인간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과 같은 전염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르스, 사스, 신종 플루 등의 감염병이 발생했지만 확진자 격리, 치료, 백신 개발의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종식되었다.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신종 감염병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전의 바이러스와는 분명히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봉쇄 조치를 시행했고, 서둘러 백신을 개발해 전 세계의 50%, 한국에서는 80%를 상회하는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완료했지만 여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유행은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가장 작은 생명체인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과학 기술과 경제의 성장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믿음에 대해서 재고가 필요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성장이 초래한 문제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영국의 교양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미개하고 야만적인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다섯째 벤이 태어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문명은 야만에 언제나 앞서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소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왔던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이, 개별 존재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지우는 행위일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요즘 여러 영역에서 근대 문명의 종식을 이야기하며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 시점에 소설 《다섯째 아이》에 주목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까지 ‘문명’과 ‘비문명’으로 구별 지어지고 문명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과 소설 속 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문명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소위 정상으로 규정지어진 사회와 삶을 모두의 목표로 삼아 왔다. 개발은 빈곤 퇴치,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제 성장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었다. 국내총생산의 증가는 전 세계 국가들의 중요한 목표였고 생산성의 증가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다른 것들은 무시되거나 외면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산성의 증가를 위해서 특정 존재들의 노동과 자연은 착취되었다. 그래도 되었다.
근대화의 시작으로 불리는 산업 혁명 이후 전 세계의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국내총생산도 계속 증가해 왔지만 모두의 삶이 그만큼 나아졌는가? 오히려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빈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되었고 지구 곳곳의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그러한 결과에 의한 피해는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들의 몫이 되었다.
그것은 경제 성장 자체를 목표로 삼아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심을 덜 두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세계의 경제는 자연과 인간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토대로 성장해 왔다. 세계 곳곳에 매장된 석유와 석탄 등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했고, 아마존과 같은 숲들은 개발을 목적으로 파괴되었다. 자연 착취에 더해 제3세계 사람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것은 제1세계 나라들뿐이다. 착취 대상이었던 제3세계 나라들은 여전한 빈곤의 문제와 기후 위기로 인한 자연재해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장’을 선善이라고 생각해 왔다. 특히 경제 성장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겨졌다. 개인적 성장과 발전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으로, 이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능력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고통이라는 것이 삶을 비집고 들어오더라도, 성장은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므로 성장을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견디도록 ‘노오오오오력’을 강요한다. ‘왜 꼭 성장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문이 쉽게 발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은 성장의 굴레에 갇힌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무한히 성장하지는 않는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결국에는 땅으로 돌아간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태어나 몸이 커지고 어떤 능력들을 갖게 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몸의 능력이 퇴화되고 결국은 죽는다. 그리고 땅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다. 그 어떤 존재도 무한히 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무한히 성장하고 발전하는 세상을 상상하게 된 것일까?
기후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는 탄소 배출량의 증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탄소 배출량 증가는 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18세기 중반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석탄 채굴이 본격화되었던 산업 혁명을 시작으로 탄소 배출량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경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효율적으로, 적은 자본으로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세르주 라투슈는 생산력 지상주의가 생태계의 자기 조절 능력을 넘어서 생태계의 복원 불가능한 파멸이라는 대재앙을 야기했다고 비판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신속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공멸이라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린다고 주장한다.❶
생산량 확대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원리이다. 제이슨 히켈은 《적을수록 풍요롭다》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성장에 의해서 구동되는 구조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성장률이라는 것이다. 그는 머레이 북친의 “인간에게 호흡을 멈추라고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에게 성장을 제한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다”라는 말을 인용한다.❷ 생산량의 증가는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곧 경제 성장이다.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그 자체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많이 생산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소비의 증가가 필요하다.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으면 생산량의 증가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순간,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소비의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이런 방식의 경제 구조는 결과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소비와 소유의 욕망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를 “가난한 중독자”로 만든다. 가난한 중독자들에 의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의한 경제 구조가 유지된다. 이는 대량 폐기의 문제로 연결된다. 쉽게 사용하고 쉽게 버려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사용이 확대된 맥락도 유사하다. 저렴하고 쉽게 만들수 있는 플라스틱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에 너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플라스틱이 개발되었을 때 사람들은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에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기업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회용품이 청결하고 위생적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마케팅 전략을 썼다.❸ 끊임 없이 생산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은 썩지 않은 채 지구 곳곳에 쌓여 있으며, 해양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자본의 창조, 즉 경제 성장에서 자본의 쓸모는 계속 증가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생산과 소비의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본이 증가하는 것, 곧 경제 성장은 계속해서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 역시 자본의 쓸모에 봉사하면서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끝없는 경제 성장의 추구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소진시키고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우리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서, 막연하게 성장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신념을 붙잡고 현재를 혹사시킨다. 세르주 라투슈의 말처럼 경제 성장이 가져온 결과는 자원의 고갈과 폐기물의 증가이며, 우리의 눈앞에는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❹
성장 이데올로기 속의 교육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성장이 정상이며 필연적이고 끝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경제 시스템”❺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경제 성장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 전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사실 교육은 그 성장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교육은 “경제 성장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고 진보에 대한 믿음을 주입”❻했으며, “소외된 생산자이자 소비자”❼인 문명화된 노예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초·중등 사회와 과학 교과서에는 경제 성장을 삶의 필연적 요소로 설명하고 있으며,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연을 도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❽
경제의 관점으로 보자면 인간 역시 경제 성장을 위한 자원이다.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용어를 썼던 것도 교육을 통해 유용한 자원으로서 인간을 길러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경제적 접근이다. 교육은 국가적 수준에서는 경제 성장을 위한, 개인적 수준에서는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작동해 왔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은 다름 아닌 자본의 축적이다. 즉, 성공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다. 성공한 소비자는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해 교육은 수단화되었다. 교육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들어 낸다.
결국 교육의 장은 ‘루저’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공간으로 전락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의 본질적 질문은 거추장스럽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이 방향을 잃고 경쟁의 공정성에 천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육, 특히 공교육은 ‘모두의 좋은 삶’을 지향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실천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김종철 선생은 “좋은 삶이란 무엇이 좋은 삶인지 생각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좋은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좋은 삶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교육의 내용이자 방법이어야 한다.
좋은 삶을 다시 묻는 탈성장의 철학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좋은 삶을 이루고자 한 노력이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고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경제) 성장이 모두의 좋은 삶과 무관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무한한 경제 성장이 만든 결과를 똑바로 마주한다면 더 이상 경제 성장 중심의 경제를 추구할 수는 없다. 적절한 수준의 성장이 아니라 공유하고 재생하고 순환하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만 모두의 좋은 삶이 가능하다. 그것이 ‘탈성장’이다.
탈성장의 핵심은 생산, 곧 경제 성장을 위한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쓰레기란 단지 물적 재화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생산량 증가를 위한 필요로 존재의 의미가 규정되지 않고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예컨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더불어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남성으로 대표되는 인간Man이 아닌 사람들, 원주민, 흑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되지 않고 모두의 좋은 삶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의 탈식민화 과정이자,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모든 존재들의 고유성이 조화롭게 꽃피우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 그것이 탈성장이다. 그러므로 탈성장은 단지 경제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좋은 삶이 만들어질 것이란 믿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의주의 소비자로만 존재하던 우리가 생산자로 전환하는 과정이며, 계속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개인들이 서로 연결된 존재로 스스로를 새롭게 정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탈성장은 과정적이고 실천적이다.
탈성장의 길은 이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추구하고 경쟁을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들이 초래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의 몫이다. 교육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은, 교육이 과거로 대변되는 사회 질서와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고 그 대안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실천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수많은 관계로 얽힌 관계망 속에서 어떤 존재의 좋은 삶이 위협받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에 응답하는 과정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교육의 과정이다. 우리 모두는 취약하고 의존적이다. 김종철 선생은 생태 문명의 원리로 공희供犧를 제시했다.
“자립은 연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장애학 연구 활동가 김도현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다른 존재에 응답하는 능력은 인간이라는 우월적 지위에서 나오는 책임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서 서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속적인 자기 제작의 과정이다.❾ 수많은 ‘너’ 들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임을 깨달을 때 수많은 ‘너’들의 안녕을 위한 연대가 가능해진다.
성장주의적 자본주의가 독립된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대상화해 왔다면, 탈성장은 단절된 관계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얽혀 있는, 분리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모두의 좋은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실천해 가는 과정으로서 탈성장은 우리 모두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함께-되기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❿ 공교육이 서로-함께-되기의 경험과 실천의 장이 될 때, 탈성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교육이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❶ 세르주 라투슈, 양상모 옮김(2014), 《탈성장사회》, 오래된 생각, 52쪽.
❷ 제이슨 히켈, 김현우·민정희 옮김(2021), 《적을수록 풍요롭다 -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창비.
❸ 수전 스트레서, 김승진 옮김(2010), 《낭비와 욕망 -쓰레기의 사회사》, 이후.
❹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21쪽.
❺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67쪽.
❻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55쪽.
❼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54쪽.
❽ 남미자·박복선(2021), 〈탈성장주의 교육의 의미와 가능성〉, 경기도교육연구원.
❾ 남미자 외(2021), 〈생태문명으로의 전환과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 경기도교육연구원.
❿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93쪽.
특집 / 기후 위기 시대의 교육
탈성장으로 가는 길, 교육
- 기후 위기를 초래한 성장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교육의 필요성
남미자
sisi23581@gmail.com
경기도교육연구원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가 인간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과 같은 전염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르스, 사스, 신종 플루 등의 감염병이 발생했지만 확진자 격리, 치료, 백신 개발의 과정을 거쳐 어느 정도 종식되었다. 과학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신종 감염병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전의 바이러스와는 분명히 다르다. 전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봉쇄 조치를 시행했고, 서둘러 백신을 개발해 전 세계의 50%, 한국에서는 80%를 상회하는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완료했지만 여전히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유행은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가장 작은 생명체인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서 과학 기술과 경제의 성장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믿음에 대해서 재고가 필요하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성장이 초래한 문제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영국의 교양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미개하고 야만적인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다섯째 벤이 태어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문명은 야만에 언제나 앞서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소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왔던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이, 개별 존재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지우는 행위일 수도 있음을 보여 준다. 요즘 여러 영역에서 근대 문명의 종식을 이야기하며 생태 문명으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 시점에 소설 《다섯째 아이》에 주목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까지 ‘문명’과 ‘비문명’으로 구별 지어지고 문명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존재들과 소설 속 벤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문명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소위 정상으로 규정지어진 사회와 삶을 모두의 목표로 삼아 왔다. 개발은 빈곤 퇴치,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제 성장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었다. 국내총생산의 증가는 전 세계 국가들의 중요한 목표였고 생산성의 증가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다른 것들은 무시되거나 외면되었다. 그 과정에서 생산성의 증가를 위해서 특정 존재들의 노동과 자연은 착취되었다. 그래도 되었다.
근대화의 시작으로 불리는 산업 혁명 이후 전 세계의 경제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고 국내총생산도 계속 증가해 왔지만 모두의 삶이 그만큼 나아졌는가? 오히려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빈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는 가속화되었고 지구 곳곳의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그러한 결과에 의한 피해는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들의 몫이 되었다.
그것은 경제 성장 자체를 목표로 삼아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심을 덜 두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세계의 경제는 자연과 인간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토대로 성장해 왔다. 세계 곳곳에 매장된 석유와 석탄 등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했고, 아마존과 같은 숲들은 개발을 목적으로 파괴되었다. 자연 착취에 더해 제3세계 사람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성장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것은 제1세계 나라들뿐이다. 착취 대상이었던 제3세계 나라들은 여전한 빈곤의 문제와 기후 위기로 인한 자연재해 등의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장’을 선善이라고 생각해 왔다. 특히 경제 성장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여겨졌다. 개인적 성장과 발전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으로, 이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능력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고통이라는 것이 삶을 비집고 들어오더라도, 성장은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므로 성장을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견디도록 ‘노오오오오력’을 강요한다. ‘왜 꼭 성장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문이 쉽게 발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삶은 성장의 굴레에 갇힌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무한히 성장하지는 않는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결국에는 땅으로 돌아간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태어나 몸이 커지고 어떤 능력들을 갖게 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몸의 능력이 퇴화되고 결국은 죽는다. 그리고 땅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다. 그 어떤 존재도 무한히 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무한히 성장하고 발전하는 세상을 상상하게 된 것일까?
기후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는 탄소 배출량의 증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탄소 배출량 증가는 사회의 진보와 발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18세기 중반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석탄 채굴이 본격화되었던 산업 혁명을 시작으로 탄소 배출량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경제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효율적으로, 적은 자본으로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세르주 라투슈는 생산력 지상주의가 생태계의 자기 조절 능력을 넘어서 생태계의 복원 불가능한 파멸이라는 대재앙을 야기했다고 비판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신속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공멸이라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린다고 주장한다.❶
생산량 확대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원리이다. 제이슨 히켈은 《적을수록 풍요롭다》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성장에 의해서 구동되는 구조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성장률이라는 것이다. 그는 머레이 북친의 “인간에게 호흡을 멈추라고 설득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에게 성장을 제한하라고 설득할 수는 없다”라는 말을 인용한다.❷ 생산량의 증가는 자본의 축적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곧 경제 성장이다. 필요에 따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그 자체를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많이 생산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소비의 증가가 필요하다. 아무도 물건을 사지 않으면 생산량의 증가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순간, 더 많은 생산을 위해 소비의 욕망을 부추겨야 한다. 이런 방식의 경제 구조는 결과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소비와 소유의 욕망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를 “가난한 중독자”로 만든다. 가난한 중독자들에 의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의한 경제 구조가 유지된다. 이는 대량 폐기의 문제로 연결된다. 쉽게 사용하고 쉽게 버려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사용이 확대된 맥락도 유사하다. 저렴하고 쉽게 만들수 있는 플라스틱은 대량 생산, 대량 소비에 너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처음 플라스틱이 개발되었을 때 사람들은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에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기업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일회용품이 청결하고 위생적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마케팅 전략을 썼다.❸ 끊임 없이 생산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은 썩지 않은 채 지구 곳곳에 쌓여 있으며, 해양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자본의 창조, 즉 경제 성장에서 자본의 쓸모는 계속 증가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생산과 소비의 반복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본이 증가하는 것, 곧 경제 성장은 계속해서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 역시 자본의 쓸모에 봉사하면서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끝없는 경제 성장의 추구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소진시키고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우리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서, 막연하게 성장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신념을 붙잡고 현재를 혹사시킨다. 세르주 라투슈의 말처럼 경제 성장이 가져온 결과는 자원의 고갈과 폐기물의 증가이며, 우리의 눈앞에는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❹
성장 이데올로기 속의 교육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성장이 정상이며 필연적이고 끝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경제 시스템”❺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경제 성장에 대한 믿음은 우리 삶 전반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사실 교육은 그 성장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교육은 “경제 성장이라는 종교를 전파하고 진보에 대한 믿음을 주입”❻했으며, “소외된 생산자이자 소비자”❼인 문명화된 노예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초·중등 사회와 과학 교과서에는 경제 성장을 삶의 필연적 요소로 설명하고 있으며,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연을 도구적으로 묘사하고 있다.❽
경제의 관점으로 보자면 인간 역시 경제 성장을 위한 자원이다.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용어를 썼던 것도 교육을 통해 유용한 자원으로서 인간을 길러 내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경제적 접근이다. 교육은 국가적 수준에서는 경제 성장을 위한, 개인적 수준에서는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작동해 왔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성공은 다름 아닌 자본의 축적이다. 즉, 성공한 소비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다. 성공한 소비자는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할 수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해 교육은 수단화되었다. 교육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만들어 낸다.
결국 교육의 장은 ‘루저’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시공간으로 전락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의 본질적 질문은 거추장스럽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이 방향을 잃고 경쟁의 공정성에 천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교육, 특히 공교육은 ‘모두의 좋은 삶’을 지향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실천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김종철 선생은 “좋은 삶이란 무엇이 좋은 삶인지 생각하는 삶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좋은 삶을 어떻게 만들어 갈지, 좋은 삶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교육의 내용이자 방법이어야 한다.
좋은 삶을 다시 묻는 탈성장의 철학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좋은 삶을 이루고자 한 노력이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고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경제) 성장이 모두의 좋은 삶과 무관하다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무한한 경제 성장이 만든 결과를 똑바로 마주한다면 더 이상 경제 성장 중심의 경제를 추구할 수는 없다. 적절한 수준의 성장이 아니라 공유하고 재생하고 순환하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만 모두의 좋은 삶이 가능하다. 그것이 ‘탈성장’이다.
탈성장의 핵심은 생산, 곧 경제 성장을 위한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쓰레기란 단지 물적 재화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생산량 증가를 위한 필요로 존재의 의미가 규정되지 않고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예컨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는 것이다. 더불어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남성으로 대표되는 인간Man이 아닌 사람들, 원주민, 흑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되지 않고 모두의 좋은 삶이 어떻게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의 탈식민화 과정이자,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모든 존재들의 고유성이 조화롭게 꽃피우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 그것이 탈성장이다. 그러므로 탈성장은 단지 경제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좋은 삶이 만들어질 것이란 믿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의주의 소비자로만 존재하던 우리가 생산자로 전환하는 과정이며, 계속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 사회에서 끊임없이 파편화되고 분절화된 개인들이 서로 연결된 존재로 스스로를 새롭게 정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탈성장은 과정적이고 실천적이다.
탈성장의 길은 이제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추구하고 경쟁을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들이 초래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질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교육의 몫이다. 교육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은, 교육이 과거로 대변되는 사회 질서와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그 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고 그 대안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실천하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수많은 관계로 얽힌 관계망 속에서 어떤 존재의 좋은 삶이 위협받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에 응답하는 과정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교육의 과정이다. 우리 모두는 취약하고 의존적이다. 김종철 선생은 생태 문명의 원리로 공희供犧를 제시했다.
“자립은 연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장애학 연구 활동가 김도현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다른 존재에 응답하는 능력은 인간이라는 우월적 지위에서 나오는 책임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서 서로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지속적인 자기 제작의 과정이다.❾ 수많은 ‘너’ 들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임을 깨달을 때 수많은 ‘너’들의 안녕을 위한 연대가 가능해진다.
성장주의적 자본주의가 독립된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대상화해 왔다면, 탈성장은 단절된 관계들을 복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얽혀 있는, 분리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모두의 좋은 삶”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실천해 가는 과정으로서 탈성장은 우리 모두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함께-되기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❿ 공교육이 서로-함께-되기의 경험과 실천의 장이 될 때, 탈성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교육이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❶ 세르주 라투슈, 양상모 옮김(2014), 《탈성장사회》, 오래된 생각, 52쪽.
❷ 제이슨 히켈, 김현우·민정희 옮김(2021), 《적을수록 풍요롭다 - 지구를 구하는 탈성장》, 창비.
❸ 수전 스트레서, 김승진 옮김(2010), 《낭비와 욕망 -쓰레기의 사회사》, 이후.
❹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21쪽.
❺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67쪽.
❻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55쪽.
❼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54쪽.
❽ 남미자·박복선(2021), 〈탈성장주의 교육의 의미와 가능성〉, 경기도교육연구원.
❾ 남미자 외(2021), 〈생태문명으로의 전환과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 경기도교육연구원.
❿ 세르주 라투슈(2014), 앞의 책,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