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호[특집]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실천, 학교에서 어떻게 이야기할까 (서부원)

202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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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기후 위기 시대의 교육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실천, 학교에서 어떻게 이야기할까

- 채식 교육과 쓰레기 줄이기 교육, 도전과 실패의 기록



서부원 ernesto55@hanmail.net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교사. 5.18민주화운동 당시 들불야학의 교사들은 자신을 ‘강학’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스스로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이라는 나의 다짐도 그들의 신념에 가 닿는다.




학교 급식소를 마다하고 도시락을 챙겨 출근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일주일에 한 번 점심시간 학생들 지도를 위해 급식소에 가는 길이 조금은 낯설다. 주방에서 일하시는 조리사 선생님들이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하는 모습에 적이 데면데면하면서도 어색하다.


이젠 내가 매일 도시락을 챙겨 온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학교에 없다. 학생들조차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교무실에 들러 후식을 선물처럼 건네곤 한다. 그때마다 도시락을 힐끗 보면서 그렇게 먹고 어떻게 견디느냐며 한마디씩 던지는 그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이골이 났다.


바나나와 사과 하나, 백설기와 삶은 계란 하나, 그리고 견과류 한 봉지. 사과 대신 이따금 귤이나 파프리카, 콜라비 등을, 떡 대신 치아바타 같은 소 없는 빵을 챙겨 오기도 하는데, 나머지 메뉴는 1년 내내 똑같다. 식사 후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잔도 빼놓을 순 없겠다.


나름 영양소를 골고루 갖춘 근사한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한창 클 나이인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사들조차 한 줌 간식거리밖에 안 된다며 안쓰러워하는 눈치다. 외려 나이가 들수록 끼니마다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며 건강을 걱정해 주는 선배 교사들도 적지 않다.



급식 대신 도시락을 챙기는 이유가 있다?


그러잖아도 바쁜 아침 시간 굳이 도시락을 챙기는 이유가 있다. 우선 급식소에 가면 먹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서다. 끼니마다 밥과 국을 제외하고 네 가지 이상의 반찬이 나오는 식단이지만, 기껏해야 밥과 반찬 두어 가지가 내가 먹을 수 있는 전부다. 맨밥에 김만 싸서 먹은 날도 많다.


이쯤에서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난 생선만 먹고 육류를 먹지 않는 페스코pesco다. 결혼과 함께 육류를 끊었으니 올해로 21년째다. 묻기 전엔 남들 앞에서 굳이 ‘커밍아웃’ 하지는 않는데,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를 불편해하는 건 채식을 시작한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차라리 완전 채식주의자, 비건vegan이나 프루테리언fruitarian이라면 덜할 텐데, 어쭙잖게(?) 채식을 하다 보니 언뜻 조롱 같은 질문에 일일이 대꾸하는 게 적잖이 부담스럽다. 다짜고짜 채식주의자라면서 우유와 달걀은 왜 먹느냐고 물으면, 그 자리에서 채식의 단계를 설명할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다. 지금껏 비슷한 질문을 족히 천 번도 더 받은 것 같다.


채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채식주의자마다 대개 비슷할 테지만, 공장식 축산의 폐해에 대해 깨닫고서다. 당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엔 육류 과잉 소비를 질타하는 글이 실렸고, 사회 교과서에선 공장식 축산과 삼림 훼손 등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소가 배출하는 메탄 가스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다짐이 흔들릴 때 채식에 관련된 여러 영화가 개봉되어 큰 도움을 받았다. 〈채식주의자〉와 〈잡식 가족의 딜레마〉, 〈옥자〉 등 200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작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다. 내친김에 채식이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독일과 네덜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채식 전문 식당을 답사하기도 했다.


어느덧 채식이 시나브로 자연스러워지고 채식이 가진 수많은 장점을 깨닫게 되면서 학교에서도 채식과 관련된 교육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강제할 수는 없는 법. 일상 속에서 채식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곧장 아침 방송을 통한 정기적인 훈화, 채식 홍보 안내판 부착 등 캠페인 활동, 수업 시간을 활용한 계기 교육 등을 이어 갔다.


훈화나 홍보를 통한 교육은 잘해야 ‘콩나물시루에 물 주기’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채식에 대한 효능감을 심어 주는 게 중요했다. 채식하면 건강해진다는 뻔한 말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차라리 육류를 먹지 않고도 ‘몸짱’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백배 낫다. 채식 교육을 시작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은 이유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손수 챙기는 것도, 짬을 내 헬스클럽에 다니는 것도, 실효성 있는 채식 교육을 위한 몸부림이다. 학생들의 시선을 돌리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이지만, 언젠가 채식이 별스러운 취향이 아닐뿐더러 지구를 살리는 숭고한 실천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는다. 채식주의자 대신 육식주의자가 ‘커밍아웃’ 하는 시대는 반드시 온다.



입안의 행복은 가깝고, 기후 위기는 멀다?


최대의 장애물은 십수 년 동안 길들어진 학생들의 입맛과 그걸 충족시켜 줄 수밖에 없는 학교 급식의 현실이다. 둘 중 어느 게 더 문제인지를 따지는 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겨루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의 획일적인 입맛이 급식의 메뉴를 결정하고, 급식은 다시 그들의 입맛을 강화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게 더 중요하다.


학생들의 입맛을 충족시켜 줄 학교 급식소의 메인 메뉴는 당연히 육류다. 1년 365일 단 하루도 고기반찬이 나오지 않는 날은 없다. 밥에조차 햄이나 고기가 들어 있어 나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때도 있다. 예컨대, 여름철 세 번의 복날에는 전국의 모든 학교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삼계탕을 낸다. 내게 복날은 금식을 실천하는 날이다.


일부 교육청들에서 매주 한 차례씩 ‘채식의 날’을 지정해 실천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일선 학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강제 조항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학교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학생들은 채식에 ‘급식 거부’로 맞서고 있다. ‘채식의 날’마다 학교 매점이 북새통을 이루는 이유다.


학생들만 반대하는 건 아니다. 학부모들도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며 아이들을 거드는 형국이다. 심지어 채소든 생선이든 학생들의 입맛에 맞게 요리하면 해결될 일이라며 짐짓 급식소의 ‘무능’을 꾸짖는 이들도 있다. 자녀의 육류 위주의 식습관이 애초 가정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에 눈감은 채 애꿎은 학교에 책임을 돌리고 있는 모양새다.


학년 말 급식 만족도 조사는 해 보나 마나다. 만족도는 고기반찬의 빈도와 양, 맛에 정확히 비례한다. 건의 사항에는 온통 나물 대신 고기반찬을 늘려 달라는 목소리뿐이다. 언젠가 학생회 주도로 선호하는 반찬 순위를 매긴 적이 있는데, 치킨, 찜닭, 스테이크, 돈가스 등 1위부터 10위까지 죄다 고기반찬이었다. 그 비싸다는 전복이나 소라조차 순위에 들지 못했다.


영양 관리를 위해 채소와 생선 등이 꾸준히 제공되지만, 아예 배식을 거부하거나 젓가락 한 번 닿지 않은 채 잔반통에 버려지기 일쑤다. 그나마 위에 뿌려진 다디단 소스 덕에 생선 튀김엔 손이 몇 번 가도, 초록빛 도는 나물이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요컨대, 요즘 아이들의 식판 위엔 밥과 고기반찬, 두 가지가 전부다.


급식소 벽에는 잔반을 남기지 말라거나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 곳곳에 걸려 있다. 또, 알레르기 유발 음식에 관한 정보도 있고, 영양소별 열량을 자세히 소개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육류 소비를 줄여야 함을 강조하는 통계, 공장식 축산의 폐해와 기후 위기를 연결 지어 설명하는 최신 자료들도 눈에 띈다.


줄지어 배식을 기다리는 시간에 고개 들어 찬찬히 읽어 보면 좋으련만, 눈길을 주는 학생 하나가 없다. 밥상머리 교육 자료로서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번은 점심시간 급식 지도를 하며 육류의 과잉 소비로 지구가 병든다고 했더니, 되레 아이들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고기 맛을 포기할 순 없다고 키득거렸다.


멋쩍게 따라 웃지만, 뒷맛이 개운찮다. 아이들에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행복은 가깝고, 아마존에 한파가 찾아오고 알래스카의 겨울 기온이 영상 20℃에 육박하는 기후 위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지구 온난화로 시베리아의 동토층이 녹아내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던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측조차 판타지 소설쯤으로 치부하는 모습이다.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마다 채식 관련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고 비건 문화를 확산시키겠다는 내용부터 공공 기관을 대상으로 월 4회 이상 채식 식단을 의무화하겠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딱히 새로울 게 없는 내용이지만, 정치권이 채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나름 고무적이다. 다만, 채식이 기후 위기에 맞선 실천적 대안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그저 소수의 채식주의자를 배려한 시혜적인 공약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직면한 기후 위기에 맞서 채식 문화를 확산시키고자 한다면, 공약이 지향해야 할 최종 목표는 채식주의자의 편의가 아니라 육식주의자의 성찰과 육식의 자제이다.



쓰레기 줄이기가 부딪힌 ‘귀차니즘’의 벽


오랫동안 길들어진 입맛도 그렇지만, 아이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함부로 버리고 분리배출에 서툰 것도 몸에 밴 관성 탓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실천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학교 내 쓰레기 처리 문제는 마치 본능처럼 작동하는 ‘귀차니즘’과 우리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다.


감염병의 확산으로 학교에서도 일회용품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쓰레기가 크게 늘어 대안을 서둘러 모색해야 했다. 과목별로 환경 교육을 강화하고, 교내에 환경 동아리를 꾸렸다. 플라스틱이 자연 분해되는 데는 500년 이상이 걸리고, 태평양에 우리나라 7배 넓이의 플라스틱 섬이 떠다니고 있다는 사실 등을 각인시키기 위해 출근길 교문 앞에서 1인 시위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교내에 발생하는 쓰레기 대부분이 과자 봉지나 페트병 등 플라스틱과 종이, 음료수 캔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재활용이 가능한 그것들이 한곳에 마구 뒤섞여 있는 게 문제라는 판단에 분리수거함을 곳곳에 설치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여겼다. 재활용을 위한 분리배출 요령을 담은 책도 일부러 여러 권 구매해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돌려 읽도록 했다.


그런데 일의 우선순위가 틀렸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쓰레기를 적소에 잘 버리고 규정에 맞도록 분리배출하는 건 지엽 말단적이라며, 애초 쓰레기 발생량을 줄이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하루 이틀 만에 50L짜리 교실 쓰레기통을 가득 채우는 상황에서 분리배출의 중요성 운운하는 건 한가하다는 의견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교사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교실마다 비치된 쓰레기통을 치우고 학년 복도에 큼지막한 분리수거함 하나를 설치하기로 했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불편하게 만들자는 취지다. 설마 종일 머물러 생활하는 교실 바닥에 마구 버리지는 않을 터, 버리려면 교실을 나가 한참 떨어진 분리수거함까지 가야만 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내심 학교 구성원들이 자신이 발생시킨 쓰레기를 가방에 담아 되가져 갈 수 있기를 바랐다. 국립 공원 등산로와 대피소 어느 곳도 쓰레기통은커녕 분리수거함조차 설치돼 있지 않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배낭에 자신의 쓰레기를 담아 되가져 오는 것을 문제 삼는 등산객이 없듯, 학교에서도 인식이 정착된다면 시나브로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게 될 거라고 봤다.


그러나 학생들의 ‘귀차니즘’은 쓰레기 줄이기 캠페인의 취지와 계획을 순식간에 무력화시켰다. 자신의 쓰레기를 가방에 넣어 되가져 가기는커녕 버리려고 복도의 분리수거함까지 걸어 나오는 것조차 귀찮게 여겼다. 분리배출이 제대로 안 되는 거야 그렇다 쳐도, 기존의 버려지는 쓰레기 양을 고려하면 매일 분리수거함을 비워야 정상일 텐데, 예상만큼 양이 많지 않은 게 이상했다.


이유는 교실 안에 있었다. 놀랍게도 아이들의 책상 서랍이 쓰레기통 역할을 대신했다. 교실마다 서랍에 쓰레기가 넣어져 있지 않은 책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담임 교사가 낡은 레코드판처럼 떠들어 대지만 학생들은 귓등으로 들을 뿐 책상 속 쓰레기는 쌓여만 갔다. 더는 욱여넣을 수 없으면 그때 가서야 쓰레기통을 찾게 될까 싶었다.


학생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한꺼번에 모아 버릴 생각이었다며 둘러댔다. 뒤집어 말하면, 그냥 귀찮다는 뜻일 테다. 귀찮으면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수행 평가조차 포기하는 마당에, 쓰레기 하나 버리자고 분리수거함을 찾는 번거로움을 누가 감내하겠느냐고 반문하는 아이도 있었다. 쓰레기를 줄여 기후 위기에 맞서자는 목소리는 집단적 ‘귀차니즘’ 앞에서 한없이 작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


‘귀차니즘’만 탓할 것도 아니다. 분리배출의 실효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몇몇 학생들의 경험적 주장에 나름 정교하게 제작한 분리 수거함이 데면데면한 모양새가 됐다. 꼼꼼하게 분리배출을 해도 막상 업체가 수거해 갈 때는 마구 섞어 버린다는 증언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수거 차량이 재활용품 더미를 어떻게 다루는지 두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다.


애써 씻고 말린 우유 팩을 폐지 더미와 뒤섞는가 하면, 뚜껑까지 떼어 낸 투명한 플라스틱 병과 다른 플라스틱 더미를 같은 자루에 담아 가져갔다고 말했다. 종이 라벨을 벗겨 낸 깨끗한 유리병도 금속 뚜껑까지 그대로 있는 병과 구분 없이 실어 갔다고도 했다. 일부러 씻고, 말리고, 헹구고, 뜯고, 물에 불려 떼어 낸 착실한 이들만 바보가 된 꼴 아니냐며 분개했다.


‘못 볼 걸 봐 버린’ 학생들에게 분리배출을 생활화하는 교육은 설득력을 갖기는커녕 조롱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고 수거 업체를 탓하기도 뭣하다. 시간과 품만 더 들어갈 뿐 아무런 경제적 이득이 없으니 분리수거를 철저히 할 이유가 없다. 이게 어디 쓰레기 처리만의 문제일까마는 교육과 현실이 따로국밥인 상황에서 사회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은 켜켜이 쌓여만 간다.


일각에서 폐기물의 수거와 운반, 재활용 과정을 공영화하자고 제안하는 등 쓰레기 처리 문제에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곤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되레 석탄 화력과 원자력 발전소 폐쇄 문제나 재생 에너지 사업 등과 같은 굵직한 정책에 집중하는 게 낫다며, 분리배출과 재활용 따위의 사소한 문제에 연연하는 걸 마뜩잖게 여기는 아이들도 있다. 언 발에 오줌 누는 격이라는 거다.


섣부른 데다 자칫 비관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기후 위기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과 태도는 이러하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모르지 않지만, 나 혼자 애쓴다고 달라질 건 없다는 것. 기후 위기를 멀게 느끼고, 재앙을 막기 위한 실천을 귀찮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지금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다. 지금껏 채식을 권하고 쓰레기를 줄이자는 캠페인을 벌여 오면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그들이 실천을 통해 효능감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과 함께, 우리 사회에 대한 아이들의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공교육도, 기후 위기 대응도 결국은 신뢰의 문제다.




❶ 비건은 육류, 어패류, 달걀, 우유, 꿀 등 동물성 식품을 모두 먹지 않는 것을 가리키고, 프루테리언은 식물도 죽이지 않기를 지향하여 과일, 씨앗 종류만 먹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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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