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호[연재] 동맹의 교실, 해방의 교육학 마지막 회 | 까무라치는 시 | 서한영교

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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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동맹의 교실, 해방의 교육학 마지막 회


까무라치는 시

[ref]굵은 글씨로 진하게 표시된 모든 구절은 시, 의 작품에서 따왔다. 본 원고는 주석과 함께 교차하며 읽을 것을 권한다.[/ref]


서한영교

poetrypunx@gmail.com

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화요일 저녁. 야학에서 〈시〉 수업을 마치고 시, 는 자신이 쓴 시를 보여 줘도 되겠냐며 이메일함을 열었다. 보관된 메일함에 ‘시집.hwp’ 파일이 여러 개 있었다. 행여나 사라질까 봐, 여러 번에 걸쳐 메일함에 넣어 둔 것이었다. 수천 편의 시가, 쌓여 있었다.[ref]“작품은 존재한다. 작품이 말하는 것, 그것은 절대적으로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 작품은 고독하다. 이것은 작품이 전달할 수 없는 것으로 남고 그것을 읽을 독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 자는 작품의 고독을 긍정하게 된다. 작품을 쓰는 자가 그러한 고독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처럼.”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2010), 《문학의 공간》, 그린비, 15~16쪽.[/ref] 많게는 하루에도 몇 편씩, 적게는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는 거예요? 나 읽어 봐도 돼요? 기꺼이 시, 는 내게 그의 시와 이야기를 꺼내 주었다. 



1

그때는 죽고 싶어서[ref]“시는 이름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우리가 그것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겪는 경험이라는 원석을 깎고 다듬어 나온 우리의 시는,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저 까마득히 보이는 지평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놓아 준다. (……) 우리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들, 우리가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 우리의 두려움, 희망, 공포를 표현해 줄 수 있다.” 오드리 로드, 주해연·박미선 옮김(2018),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41~44쪽.[/ref] [ref]“We all have the right to poetry!”(모두에게 시를 할 권리가 있다). Case, N.(2007), My flaming hamster wheel of panic about publicly discussing poetry in this respected forum, POETRY, 191(2), pp. 141-142.[/ref] 시를 시작했어. 

이유는 없어. 

일기처럼 썼어. 

엄마가 보고 “시 같네” 하니까 

시를 쓰는 거구나 알았지.

슬프다…… 죽고 싶다…… 에서 시가 시작되었어. 

드문드문 쓰다가 생각날 때마다 쓰기 시작했지. 

중학교 다닐 때부터니까……

첫 간질 발작[ref]간질(癎疾)은 ‘뇌에 전기가 온다’라는 의미를 지닌 뇌전증(腦電症)으로 2014년 정식 법령 용어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속칭 ‘지랄병’, ‘미친병’, ‘간지럼병’으로 통용되었다. 예전에는 전간(電癎)이라고도 불렸다. 일본식 발음으로는 ‘덴칸(てんかん)’인데, 한국어 ‘땡깡’의 기원이 되기도 했다. 본문에서 간질과 뇌전증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시, 가 받아들이고 있는 낱말에 대한 기억과 질감에 따른 것이다.[/ref]으로 까무라친 다음부터니까……


아휴, 오래되었어.[ref]“쓴다는 것, 그것은 말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의 메아리가 되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2010), 앞의 책, 23쪽.[/ref]


시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19

나 귀신을 봤어. 

열 살 때 동생들이 귀신 놀이 하고 있었어.

엄마 소복까지 꺼내 입고 까르르거렸지. 

난 화장실에 있었어.

화장실 위쪽으로 언니, 하고 부르는 거야. 

동생인 줄 알고 봤더니, 하얀 소복 입고 입에 칼을 물고 있는 귀신[ref]“유령, 이것은 말하자면 내세의 작은 조각과 파편들이고, 그것은 그들의 시작이다. 물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보일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건강한 사람은 가장 현세적인 사람이므로 완전과 질서를 위해 반드시 지상에서의 현세적인 삶만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병이 나서, 유기체 속의 정상적인 지상의 질서가 조금이라도 파괴되면,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홍대화 옮김(2009), 《죄와 벌》, 열린책들, 422쪽.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20대 중반 발작 증세를 보인 이후로 죽기 전까지 중증의 뇌전증장애와 함께 글을 썼다. “갑작스러운 날씨의 변화는, 늘 그런 것처럼 남편의 신경을 자극하여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두 번이나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최호정 옮김(2019),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엑스북스, 235쪽.

그의 작품에는 뇌전증이 있는 인물들인 돌고루끼(《미성년》), 끼릴로프, 레뱌드끼나(《악령》), 스메르쨔꼬프(《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벨차니노프(《영원한 남편》), 이반(《상처받은 사람들》), 디노프, 라스꼴리니꼬프(《죄와 벌》)가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뇌전증 증상이 투영된 묘사와 표현들이 작품 세계 곳곳에 스며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시, 의 이야기 속 행간으로 끌어들일 작정이다.[/ref]이야. 

너무 놀라 까무라쳤어. 

화장실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ref]“나는 병이 악화하고 발작이 몇 번쯤 되풀이되면서 멍한 상태가 되어 기억력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 그럴 때 내 마음은 참을 수 없이 우울합니다. 울고 싶어질 정도이니까요. 나는 줄곧 놀라고 불안해했어요. 〈낯설었던〉 그 모든 게 나에게 무섭게 작용했던 거였어요. 난 그걸 깨달았지요. 낯설다는 것이 나를 죽도록 압박했어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김근식 옮김(2009), 《백치》, 열린책들, 90쪽.[/ref] 

그때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어. 날마다 정신이 멍했어. 

그중에서 제일 힘든 건 밤에 잠이 안 와. 


밤이 하얘. 하얀 밤이 계속돼.[ref]“밤, 밤의 본질은 우리를 잠들게 버려 두지 않는다.” 모리스 블랑쇼(2010), 앞의 책, 390쪽.[/ref]


잠이 안 와서 방에 있던 장롱을 들고 여기 놓았다가 저기 놓았다가 했어. 

엄마가 “너 기운도 좋다” 했어. 

하얀 밤이 되면 기운이 좋아진다는 것을 알았지. 

열다섯, 간질 발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23

목소리 속에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39

혼자 이야기하고, 

혼자서 웃다가,

혼자서 울기도 하니까  

미친년 취급했지.[ref]“당신네들은 저를 미치광이 취급을 하시는군요, 그렇지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박종소 옮김(2010), 《아저씨의 꿈》, 열린책들, 220쪽.[/ref]


44

문득 더러운 냄새가 나. 

시궁창 냄새. 

혼자 킁킁거려. 

이게 환후라는 걸 늦게 알았어. 

문득 차가운 물방울이 손에 떨어져. 

손이 붓고 또 부어. 

혼자 손을 자꾸 만져. 

이게 환촉이라는 걸 늦게 알았어. 

그럴 때면 시간이 잠깐 멈춰.[ref]“나에겐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이 시간으로부터 오직 하나의 감정, 하나의 감각만이 내 안에 영원히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순간만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나의 삶 전체가 정지해 버린 것처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외 옮김(2010), 〈백야〉, 《백야 외》, 열린책들, 285쪽.[/ref] 


59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신경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신경 안 써. 신경 쓰이지만 안 써. 신경 쓰기 싫은데 신경 써. 

몰라. 이게 뭔지 모르겠어.

간질 발작의 이유를 정확히 모른대.[ref]특발성(idiopathic).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학계에서 뇌전증의 원인으로 꼽는다. 특이하게 발병했다는 의미로 원인을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ref] 

 

65

추운 겨울에 태어났지. 탯줄이 다 삭은 채.  

그때 감기와 수막염이 같이 왔다대. 

병원을 수없이 다녔다고 해. 

찬바람이 깊이 들었나 봐. 


학창 시절 때는 간질 발작 때문에 찬바람.[ref]“체면은 깎이고 명예는 짓밟히고 제삼자가 있는 자리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치욕을 당하고, 바로 어제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지독한 욕설을 듣고, 남들 앞에서 씻을 수 없는 모욕까지 당하는, 어떤 의미에서 그는 끝장이 나 버린 것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옮김(2010), 《분신》, 열린책들, 124쪽.[/ref]

가족과도 찬바람, 친척끼리도 찬바람.[ref]“어지러운 손짓, 공중에다 정신없이 중얼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이 모든 것은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말았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2010), 《분신》, 199쪽.[/ref]

난 어쩔 수 없이 친구 없는 찬바람이야.


겨울의 안은 따뜻하고 밖은 추워 


모든 집들은 창문을 꼭꼭 닫아 두네 


찬바람이 되기 싫어 


찬바람이 되면서 살아온 나

언제쯤이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것일까?


나도 따뜻한 봄바람이 되고 싶어

(차가운 바람이 칼날이 되어)

나도 그들과 섞여 가면서 살고 싶어

(내 살을 베어 간다)


나만의 죄책감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해

그들과 섞이려고……

다시 태어나면 

누구나 좋아하는 바람 

하늬바람 되고 싶어


77

과학 시간에 노래하라고 선생이 시켰는데, 

노래하다가 기절했어. 무슨 노래인지 기억은 안 나. 

첫 입원 했어. 

의사가 물었어. 

잠은 얼마나 잤냐, 하루에 간질을 몇 번 했냐, 몇 분 동안 했냐……. 

그것만 물어봤어. 

의사가 묻고 엄마가 대답했어.[ref]“정신장애를 체험한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이러저러한 차별이나 편견, 사회적인 서비스 부족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가장 불행한 것은 역시 ‘고생에 직면할 수 없었다’라는 점입니다. 보살핌을 받고 보고되고 지켜지고, 많은 사람이 대리자가 되었어요. 대리자가 되어 ‘이 사람은 스트레스를 주면 발병하는 사람입니다, 병에 걸리는 사람입니다’ 하고 지켜 주고 있지요. 그 덕분에 ‘함께 생활한다’라는 그 냉엄한 현실에 직면하는 데서 멀어졌습니다.” 사이토 미치오, 송태욱 옮김(2006),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삼인, 175쪽.[/ref] 나한테 안 물어보니까. 

만약 나한테 물어봤다면, 죽고 싶어요, 먼저 말했을 거야. 

너 요즘 어떠니? 잘 지내니? 괜찮아? 

이런 질문 받아 본 적 없어. 


같이 입원한 여자애가 있었어. 

공부를 엄청 잘한 그 애. 

시험 치는 날만 되면 입원했어. 

시험 치는 날에 스트레스가 많았나 봐. 

발작을 계속하니까, 걔는 침대에 끈으로 사지를 묶어 두었어. 

‘이 병원 존나 싫다’ 생각했어. 


80

조용히 불던 바람이 점점 사납게 

집을 삼키듯이 무섭게 


나를 따라와

언제부턴가 계속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은

빠른 걸음으로

가슴은 쾅쾅 숨은 헐떡헐떡

뒤돌아보기도 두려운

터지는 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ref]“천둥을 동반한 소나기가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듯 (……) 창백해지고, 무릎은 후들거렸고, 파래진 입술에는 흐릿하고 불안한 미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2009), 《백치》, 349쪽.[/ref]


무리들이 쳐들어와

누구도 들어오라고 않았는데도

무례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쳐들어와


번개는 빛을 내며 번쩍 

우르릉 쾅쾅[ref]“간질병 증후 중에는 거의 발작 직전에 오는 어떤 단계가 있었다. (……) 정신적 암흑과 억압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그의 뇌는 불꽃을 튀기고 모든 활력은 폭발적으로 긴장한다. 삶의 감각과 자의식은 번개처럼 이어지는 매 순간 거의 10배로 증가되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2009), 《백치》, 350쪽.[/ref] 

기억이 안 나 

바람이 차


92

저승사자를 봤어. 한번은 버스를 탔는데. 나도 몰라, 까무라쳤나 봐. 하얀 양복을 입고 있던 할아버지. 저쪽, 먼 쪽에서 기다리더라고. 꿈속은 아닌데, 꿈속이다 싶은 곳이었어. 온통 까만 세상에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은 그 할아버지 따라 하얀빛이 들어오는 조그만 문 들어갈 뻔했다가 발작에서 깼어. 저승으로 향하는 길이었어. 그때 들어갔어야 했는데. 언제쯤이면 내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108

고등학교 들어가서 간질 발작 횟수가 많아졌어. 

날마다 까무라쳤어. 

오전과 오후. 두 번씩 날마다. 

처음에는 교장 선생님, 이사장님 차를 타고 병원까지 다녀왔어. 

병원 다녀오고 나면 놀림감이 되어 있었어.

다른 건 무시할 수 있었는데……

애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무시하지 못했어. 

깨어날 때쯤 들리는 말이 있어.


“물 흐른다.”


오줌 흐른다는 말이야.[ref]“깨어나 눈을 뜨면 느닷없이 천 길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듯 막막하고 낯선 분위기 속에서 설명되지 않는 공허감이 찾아온다. 물수건으로 깨끗이 지워 버린 듯 사라져 버린 순간순간들의 기억들. 입가에는 침과 피가 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찢긴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흘러나온 침을 삼키면서 입을 다실 때 부러진 이빨이 씹히고, 속옷은 배설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고개를 들어보니 혐오스럽고 흉측한 동물을 쳐다보는 듯한 주변의 냉담하면서도 적대적인 시선! 이보다 더 수치스럽고 불쾌한 아픔이 있을까? (……) 지상의 정상적인 육체를 거부하는 몸에 쏟아지는 주변의 모멸과 멸시, 학대와 차별 때문에 생긴 아픔이며, 그렇기 때문에 열등감과 수치심이 뒤섞여 있어 쉽게 공감하기 어려운 아픔이다. 게다가 이 아픔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찌든 아픔이다.” 김진국(2017), 《어리석음의 미학 - 도스또예프스끼의 간질병과 예술혼》, 시간여행, 36쪽.[/ref] 알지? 

그 뒤로는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받으면 까무라쳤어. 


111

누가 나를 보는 게 흘겨보는 것 같고 

누가 내 이야기 하는 것 같고 

귀신이 나를 쫓아오는 것 같고 


128

그럴 때면 수학을 풀었어. 매일 수학을 풀었지. 잠이 안 오면 수학을 풀었어. 안 풀리는 게 풀리면 좋았지. 답안지마저도 틀린 것을 잡아냈을 때, 좋았어. 내가 풀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수학은 풀리잖아. 수학만 좋았어.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어서 좋았어. 확실하잖아. 

나중에는 내가 문제를 내고 풀었어. 그래서, 수학 문제 물어보려고 수학 선생님을 날마다 찾아갔어. 계속 찾아가서 수학을 물었어. 수학 선생님 옆자리에 남자 과학 선생님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자주 오니까…… 일어나서 내 멱살을 잡았어. “왜 자꾸 귀찮게 해.” 그 후 기억이 안 나. 


전교 꼴찌 2등으로 졸업했어. 수학 점수 덕에 꼴찌를 면했어.


136

친구가 없었어. 아무도 나랑 친구 하려고 하지 않아. 난 어쩔 수 없이 친구 없는 찬바람. 졸업하고 아빠 회사에 들어가 10년을 경리로 일했어. 나를 왕따 시켜. 사장 딸이라고. 찬바람. 그림자처럼 외로움을 달고 살아. 찬바람. 괴로움과 외로움. 이 단어는 왜 닮았지? 나를 원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ref]“내가 입에 거품을 물 때, 나에게 위안이 될 인형을 가져온다거나 설탕을 탄 차라도 한잔 준다면, 나는 아마도 진정될 것이다. 심지어 평안한 영혼을 소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그다음 스스로에게 이를 갈고 수치심 때문에 몇 달 동안 불면증으로 고통은 받겠지만, 이게 내 습관이니 어떡하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계동준 옮김(2010), 《지하로부터의 수기》, 열린책들, 11쪽.[/ref] 


145

뇌 수술 하자고 했어. 엄마가 의사한테 이야기를 들었나 봐.[ref]“현대인은 이제 광인과 교류하지 않는다. 즉 한편에서는 이성적인 사람이 존재하고 광기에는 의사를 파견하며, 병이라는 추상적인 보편성을 통해서만 관계를 인정한다. 다른 한편에는 광기의 사람이 존재하고 역시 똑같이 추상적인 이성, 즉 질서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구속, 집단에 의한 무명의 압력, 순응성의 요구인 이성을 매개로 해서만 이성적인 사람과 교류한다. 양자 사이에 공통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미셸 푸코, 김부용 옮김(1999), 《광기의 역사》, 인간사랑, 13쪽.[/ref] 처음에는 의사가 뇌 수술 하면 50 대 50이라고……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처음 수술하는 거라…… 무료로 수술해 준다고…… 엄마가 하고 싶어 했어. 간질 발작을 고치는 수술을 한 거지.


뇌 수술 하기 전에 내가 정신장애가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뇌 수술을 시키지 않는 거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 의사도 물어보지 않았고, 나도 말 안 했어. 결국 했어. 수술하기 전에 마취 주사를 놓았는데도, 깨어 있는 거야. 양쪽에 의사가 2열로 나열해 있고, 나는 나체로 있는 상태에서. 그걸 보고 까무라쳤어. 그래서 처음엔 수술 못 했어. 다음번에 마취를 단단히 시키고 했어. 


흰 독수리를 그렸어. 어찌나 잘 그렸던지. 그 그림에 푹 빠졌지. 찬바람을 가르는 흰 독수리를 오래도록.


154

수술 끝나고

나아진 게 없었어.

수술 전에는 까무라칠 때 기억이 전혀 안 났는데……

수술하고 나니까, 까무라치는 게 기억이 나.

기억되니까 발작이 더 심해졌어.

내가 왜 짓을 하고 있지…… 생각해.

슬펐어.[ref]“우울증은 광기, 그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광기’.” 미셸 푸코(1999), 앞의 책, 170쪽.[/ref] 

기억 안 나던 게…… 이제 기억이 나……[ref]“요즘 밤마다 매우 자주 찾아오는, 내가 불가사의한 공포라 부르는 정신 상태에 빠져든다. 이것은 아주 괴롭고 견디기 힘든 공포이다. 그것은 나 자신이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엇, 불가해하고 사물의 질서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틀림없이 다음 순간, 모든 이성적 근거를 비웃으며 거역할 수 없고 무시무시하며 잔인하고 가차 없는 사실로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윤우섭 옮김(2010), 《상처받은 사람들》, 94쪽.[/ref] 

차라리 기억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어.


162

난 살기 싫은 세상에 오랫동안 사는 것 같아. 

바람이 차.


172

우울증이 심해져 갔어. 병원에서 죽으려고 했어. 병원 옥상 계단 위로 올라갔지. 엄마가 경찰에 신고해서, 끌어내려 왔어. 손목도 긋고. 그제야 정신과에서 처음 우울증 진단 받았어. 정신병동에 6개월 입원했어. 병원에서 퇴원하고 집에만 있었어.

방에만 처박혀서.

나를 어떻게 죽일까.

그것만 연구했어.


그 무렵, 가수 장덕이 죽었을 때, 수면제를 3일 치를 먹었다는 소식을 듣고 준비를 마쳤어. 10년 동안 아빠 회사에서 일하면서 모아 둔 돈 전부를 가족에게 줬어. 조용히 주고 나서, 모아 둔 약 전부를 털어 넣었어. 


암흑세계와 교차하는 순간 

영혼은 바람을 타고 떠돌아다닌다. 


일어나 보니까 병원이야. 위세척했대. 눈떠서 한 첫 생각이 이거야.

또 살아났네.


189

내가 목성, 수성, 화성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아.[ref]“정신장애인이란 누구보다도 정밀도가 높은 센서를 가진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사이토 미치오(2006), 앞의 책, 265쪽.[/ref] 

바람 한 점 없는 집에 갇혀 있었어.[ref]“프랑스에서 최초로 광인 수용소가 만들어졌을 때 스페인 사람들이 했던 풍자가 생각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현명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나라의 모든 바보들을 특별한 건물에 가두어 놓았다.” 그렇다. 다른 사람을 광인 수용소에 가둔다고 해서 자신의 현명함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K가 미쳐 버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현명하다.” 천만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표도르 도스토옙프스키, 박현섭 옮김(2010), 〈보보끄〉, 《영원한 남편 외》, 235~236쪽.[/ref] 

다들 쉬쉬해. 장애인이라는 걸 숨길 수 없는데. 

그 뒤로 계속 입원실. 병원. 집. 반복. 입원실. 병원. 집. 반복. 입원실. 입원실. 입원실. 병원. 집. 입원실. 입원실. 입원실. 입원실. 입원실. 병원.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입원실. 병원.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집, 이 아차산 근처야. 


194

집 근처 전봇대에서 전단지를 봤어.[ref]“미지의 모든 것을 간직한 미래를 ― 비록 그것이 폭풍과 뇌우를 동반한 것이라 하더라도 삶이 있기만 한다면 ― 불러내는 것 같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박재만 옮김(2010),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열린책들, 215쪽.[/ref] 


“노들장애인야간학교 교사학생 구함”


여기로 오세요 여기로 오세요 

바람 타고 나를 부르는 소리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두리번두리번거리며

바람 따라간 곳



200

예전에 야학이 아차산에 있었거든. 학생을 하려고 갔어. 친구가 없으니까, 친구를 사귀러 갔어. 몇몇 교사들은 나를 학생으로 보지 않았어. 다른 신체장애가 있는 학생들하고 비교해 보면 내 장애는 보이지 않으니까.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난 야학에서 정말 공부만 했어.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이 그냥 집으로 가지 않았더라고……. 나중에 알았어. 수업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포장마차에 맨날 있더라고.


나만 빼고.


나한테는 아무도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지 않았어. 잘 지냈던 선생님도 없었어. 욕을 하면서도 다녔어. 처음에는 야학이 아무것도 재미없었어. 그런데, 다른 데 갈 곳이 없었어. 


219

야학 다니면서 장애 등록 했어. 밤엔 야학에 가고, 낮에 일을 시작했어. 주유소에서 세차하고, 편의점에서도 일하고, 배스킨라빈스, 채혈실, 엠케이직물…… 비닐을 자르는 일. 그러다 장애인보호작업장에서 일했어. 말이 보호작업장이지 비장애인하고 일은 똑같이 시키고 월급은 

9만 원을 줬어. 그런데 식대를 한 달에 5만 원씩 줘야 해.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어린아이에게 말하듯 말하는 것. 그건 들어도 들어도 못 참겠어. 나 욕 잘해. 알지?


223   

발달장애인들이 야학에 들어오면서부터 재미있어졌어.[ref]“뇌 기능(정신 기능)의 변화는 그 해당 개인의 삶의 사회적 환경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정신 질환은 근본적으로 ‘관계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은(2014), 〈정신 장애와 민주 사회〉, 《기억과 전망》, 30, 57쪽.[/ref] 그들은 편견이 없으니까. 말 꺼내기 편했어. 그들은 이야기도 노래도 터트리듯이 해. 그게 그렇게 재미있더라고. 편했어. 까딱하면 울긴 하지만. 또 잘 달래 주고. 나한테 질문도 많이 해 줘.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말할 때 긴장하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끼리’는 괜찮으니까. 가끔 나도 발달장애인이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어. 결혼한다면 발달장애인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아빠한테 물어봤어. 나, 발달장애인하고 결혼하는 거 어때? 

“미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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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는 거? 나의 한 부분으로 함께 살고 있어. 사실 다들 조금씩 미쳤잖아. 병원만 안 가는 거지. 미쳤다, 는 그 기준이 어디서부터인가에 따라서 다른 거지.

근데, 뉴스에서 꼭 짚어서 정신장애 때문에…… 살인했다는 뉴스.[ref][양옥경 외(2019), 〈정신장애인 국가보고서 이행 상황 점검을 위한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92쪽]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원인 1위가 “대중매체에서 영향을 받았다”이다. “국내 기사에 등장하는 정신장애인의 이미지는 치료받아야 할 대상, 또는 범죄 가능성이 높은 집단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높고, 그로 인해 정신장애인을 언론에서 주로 접하게 될 대중에게도 정신장애인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고착화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2021), 《정신장애인 인권보고서》, 43쪽.[/ref] 우리는 연애도, 취직[ref][보건복지부(2021), 〈2020년 장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고용률은 5.3%에 지나지 않는다. 고용되는 게 고시에 합격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ref]도 까마득해. 사람들도 그래. 정신장애인이라고 하면 피해. 자리를 피하는 게 느껴져. 나같이 오랫동안 당해 본 사람은 귀신같이 느낄 수 있어. 귀신도 보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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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어.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인데, 전에는 실수를 두려워했는데, 요즘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ref]“많은 사람들이 평생 이 병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병을 고치라, 정상인이 되라, 이런 말을 계속해서 듣는 것은 그 사람이 평생 “지금의 당신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계속 듣는 일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병이 있든 없든 “그대로도 괜찮다”는 생활 방식도 있지 않을까?” 사이토 미치오(2006), 앞의 책, 80쪽.[/ref] 받아들이고 있어. 어쩔 수 없어.[ref]“매드운동은 당사자에 대한 억압 및 낙인, 부당한 대우라는 공유된 경험에서 출발하며, 생의료적 언어를 거부하고 ‘매드’라는 언어를 되찾아 오고, 종국에는 광기를 긍정적인 것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매드 정체성’으로 나아간다.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송승연·유기훈 옮김(2023),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오월의봄, 68쪽.[/ref] 바꿀 수 없는 거야. 극복할 수 없는 거야. 이겨 낼 수 없는 거야. 장애와 그저 함께 사는 거야.[ref]매드 프라이드 운동(Mad pride activism)은 ‘미친’, ‘정신 나간’ 등의 의미가 있는 ‘매드(mad)’를 전유하여 이름 붙였다. ‘기괴한’이라는 의미가 있는 퀴어(queer)를 전유하듯, ‘장애’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는 불구(crip)를 전유하듯. 정신장애 생존자(억압적인 정신건강 체계에서 살아남았음을 강조하는 정체성으로, 정신의료 시스템의 다양한 차별과 학대에서 생존한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용어)로서, ‘매드’라는 용어를 정치적으로 되찾고자 한다. 이들은 정신장애 차별주의(mentalism)라는 개념을 만들어 정신의료 시스템뿐만 아니라 사회적 고정 관념에 맞서 저항하고자 했다.[/ref]


258

야학에서 총학생회 활동으로 총무도 하고, 부학생회장도 했어. 몰라. 그냥 했어. 야학에서 뭘 배웠냐고? 착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자. 낙서해도 괜찮다. 나도 쓸모가 있다. 친구가 없어도 괜찮다. 장애인도 교장이 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무슨 질문을 해도 괜찮다는 거야. 여기서는 흉보지 않으니까. 깔보지 않으니까. 트집 잡지 않으니까. 다 아는 척하지 않으니까. 무시하지 않으니까.


269

사람을 만나는 거 

그거면 됐어.[ref]“위대한 사상이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단정적으로 규정짓지 않는 상태로 있는 추상적인 관념인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항상 실생활의 원천이었다는 것뿐입니다. 즉 그것은 정신적인, 머리에서 생각해 낸 생활이 아니라, 일상의 구체적인 생활과 관계 있는 것입니다. (……) 지독히 단순하고 가장 평범한 것으로 일상에서 시나브로 눈에 띄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단순하기 때문에, 그렇게 단순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아무래도 믿을 수 없어 자연히 몇천 년 동안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알지도 못하고, 우리는 그 옆을 지나치고 있는 것입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이상룡 옮김(2010), 《미성년》, 386~387쪽.[/ref]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거 

그거면 됐어.[ref]“춤추기 같은 새로운 활동이나 인간관계, 생활 환경을 바꾸는 방식으로 우리의 뇌는 신경학적으로 개선될 수 있다.” 박정수(2020), 《‘장판’에서 푸코 읽기 - 장애의 교차로에서 푸코를 만나다》, 오월의봄, 115쪽.[/ref] 

에라이 모르겠다.


277

일을 해야 해. 그게 정신건강서비스고 정신건강복지야. 일하는 게 약이야. 함께 사는 게 약이야.[ref]“그는 대답했다. 우리 모두는 사실 미친 사람과 거의 비슷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다만 아주 작은 차이로 환자들이 우리보다는 약간 더 미친 거지요. 어쨌든 선을 그어야만 하니까요. 어떻게 보면 조화로운 인간이란 전혀 없다고도 볼 수 있지요. 이건 사실입니다. 수만 명 아니 수백만 명 중 한 사람 꼴로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것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은 본보기에 불과하지만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2009), 《죄와 벌》, 329쪽.[/ref] 일하면서 돈도 벌고 관계를 맺어 가는 거, 그게 약이야.[ref]정신병원이 없는 이탈리아. 1960년대부터 시작된 정신보건 개혁을 통해 1978년 바실리아 법 제정으로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보건 체계를 수립하였다. “정신병원을 넘어서 지역 사회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도시에 사는 ‘온전한’ 사람들과 정신 질환자들의 접촉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백재중(2018), 《자유가 치료다 - 바살리아와 이탈리아 정신보건 혁명》, 건강미디어협동조합, 51쪽.[/ref] 일하면서 사람들 만나는 건 좀 어렵긴 하지만 우리는 천둥과 번개를 맡는 거야.


281

그러다 보니 야학에 다닌 지 27년째야.

야학에서 뭘 배웠냐고? 잘 모르겠어.

떳떳하게 살고 싶어

구걸하며 살고 싶지 않아.[ref]“시적인 유물주의적 태도는 인간 편에 서서 긍지, 분명 기괴한 긍지를 전제하는 것이지, 어떤 새롭고 더 완전한 권리 박탈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앙드레 브르통, 황현산 옮김(2012), 《초현실주의 선언》, 미메시스, 65쪽.[/ref]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생각하고 또 다짐하며 살고 있어.


291

나 요즘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학 공부하잖아. 시험 치고 나면 성적표를 안 봐. 시험 문제 중에 못 푼 것이 많아. 걱정돼서 아예 안 봐. 한평생 풀리지 않던 차별 대우보다 더 어려워. 외국 인물 이름은 하나도 모르겠어. 가끔 같은 학과 사람들도 만나. 모임에서 나는 가만히 있어. 탄로가 나면 안 되니까. 말하면 들통나니까. 교수들은 내가 똑똑한 줄 알아. 정신장애인이라는 게 티 나면,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어. 한평생 느껴 왔어. 알면 큰일 나. 따돌림당해. 왕따가 진짜 싫어. 이게 진짜 어려운 시험 문제야. 그래도,

아무 말 없이 있어도 학과 모임에 꾸준히 나가. 나도 끼어야지. 그냥 그렇게 느껴. 나도 나름 노력하는 거야.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는 안 하는데, 학생분들 중에 농인분하고는 가끔 이야기해. 나보고 통역해 달래. 내가 수어는 좀 하니까.


300

눈만 봐도 알 수 있어 

멀리하는 눈 

찌푸리는 눈 

싫다는 눈 

점점 많이 내리는 눈

뭐야, 하는 눈  

은근히 밀어내는 눈 

애기 대하듯이 하는 눈

눈을 감고 보고 있으면  

반가운 눈 

트집 잡지 않는 눈

친한 척이라도 하는 눈 

그 눈을 오늘도 기다리고 있어


빈자리를 보는 




연재를 마치며


제주 바다에서 나비를 보았다. 나비는 바다를 향해 날았다. 어쩌려고. 저 나비는 자꾸만 수평선 쪽으로 향했다. 어쩌자고, 저 나비는 편히 앉을 자리 하나 없는 바다로 나가는 걸까. 그러니까, 나비. 연약한 나비. 찢어지기 쉬운 나비. 바다를 건너기에는 무모해 보이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저 나비가 아득해질 때까지 막막하게 나비를 바라보았다. 

숙소로 돌아와 가방에서 아껴 읽고 있는 《출근길 지하철》(박경석, 위즈덤하우스, 2024)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비’ 이야기가 나왔다. 높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짓밟고 짓밟히며 만들어진 애벌레 기둥(기준)에서 해방되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나비가 된 애벌레 서사를 담은 동화책 《꽃들에게 희망을》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저는 진보적 장애인운동이 나비처럼 사는 길을 열어 주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라고 했다. 나비처럼 사는 길, 그 길. 

그러니까, 무모해 보이는 길. 막막해 보이는 길. 아슬아슬해 보이던 바다 길. 바다를 건너려는 나비가 다르게 떠올랐다. 마침내, 바다를 건너는 나비. 끝끝내, 바다를 횡단하는 나비. 당당하고, 굳센 나비. 나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이런 나비들을 숱하게 보았다. 자본주의 효율성의 기준을 건너는 나비. 정상-인간의 정의를 횡단하는 나비. 견고한 감각과 관계를 이동시켜 나가며 비장애중심의 사회를 돌파해 나가는 나비. 

“함께 나비가 되어 그 길에 함께해 주지 않으실래요?”(《출근길 지하철》, 341쪽) 제안에 ‘해방’이 깃들어 있음을 연재 원고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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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공개합니다.

《오늘의 교육》에 실린 글 중 이 게시판에 공개하지 않는 글들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발행일로부터 약 2개월 후 홈페이지 '오늘의 교육' 게시판을 통해 PDF 형태로 공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