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청소년의 시좌에서 – 교육복지 현장의 이야기④
이해의 영역이 아닌 연대의 영역
- 지금도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발랑(신선웅)
woong_51@hanmail.net
관악교육복지센터 센터장
연재 순서
① 들리지 않는 목소리,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 – 교실 밖으로 밀려나는 학생들
②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 – 가정에서 안녕하지 않은 학생들
③ 청소년, 듣고 싶은 그들의 이야기 – 상담실 아닌 곳을 찾는 학생들
④ 이해의 영역이 아닌 연대의 영역 – 지금도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⑤ 잊고 지내는 당연한 것의 부재 - 지금을 살아가는 부모님들께
⑥ 우리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 – 구조적 변화와 모두의 연대
교육복지라서 죄송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1월 1일보다는 새 학년 새 학기를 여는 날을 1년을 시작하는 날로 느낄 것이다. 교사도 학생도 아니지만 학교를 지원하는 일을 하다 보니 첫 등교일이 1년을 시작하는 날 같아졌다. 해마다 2월의 마지막 날까지는 온 세상이 조용한 것 같고,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삼일절은 뒤숭숭하게 보내기 마련이고,
3월 2일 즈음 출근길에 등교하는 청소년 무리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쉽게도 한껏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의 일로 학교, 가정, 기관 등의 전화를 받으면서 설렘은 금세 사그라진다. 이렇게 시작되는 새 학기 초반은 긴장의 연속이다. 청소년을 만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사와의 새 학기 소통 부분도 만만치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교육복지 전문 인력이 배치되지 않은 일반학교❶에서는 교육복지가 교사의 여러 업무 중 하나로 들어간다. 교무분장에 따라 교무부, 연구부, 학생부 등의 조직 체계가 설정되는데 교육복지가 한 영역으로 들어간다.❷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육복지는 교사들이 기피하는 업무로 꼽힌다. 해마다 3월은 교사와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는 시기다. 4~5월이 되면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 일반학교 현장으로 학교 방문을 나선다. 이때 우리 센터에는 내부적으로 학교를 구분하는 한 가지 주요한 기준이 있다.❸ 해당 학교의 교육복지 부장 또는 담당 교사가 작년과 변동이 있는지 여부이다. 한 학교에서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가 2년 이상 변동 없이 유지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3년 이상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는 더욱 소수이다. 2024년 올해, 우리 관내의 일반학교는 38개교인데 그중 26개교에서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변경되었다. 부장 교사는 21개교에서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업무를 실행하는 담당 교사는 8개교에서만 유지된 정도이다. 더구나 4개교는 담당 교사 없이 부장 교사만 배치되었다.❹
올해만 보더라도 관내 78퍼센트의 학교에서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변경되었는데, 해마다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는 상당수 그해에 처음 이 업무를 맡게 된다는 의미이다. 교육복지는 학교 안으로 사회복지의 개념이 결합되면서 시작된 형태이기 때문에 사회복지의 언어와 시스템이 사용된다. 교사가 처음 교육복지 사업을 담당하면 생소한 사회복지 용어부터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교육복지가 필요한 대상자를 찾고, 지원의 영역과 방법을 찾거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 이렇다 보니 교사에게 교육복지는 다른 업무에 비해 꽤 낯설고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된다. 더구나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교육복지 사업의 행정 처리 시스템이 학교 안에서 이뤄지는 다른 사업에 비해 번거롭다는 평도 있다. 예산 사용에 대한 행정 문서를 1년에 한 번만 작성하고 진행해도 되는 사업이 있는 반면, 교육복지는 매번 예산을 사용할 때마다 건건이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상 차이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교사 입장에서는 행정이 간소화되어 있는 사업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교육복지는 해마다 학교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영역이 되어 있다. 일반학교 교사와 교육복지 관련 회의를 하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진행할 때, 어쩔 수 없이 담당을 맡게 되었다는 교사들의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 여과 없이 느껴진다. 실제로 휴직 후 돌아온 교사, 그해에 처음 부임한 신입 교사, 심지어는 계약직 교사가 교육복지 담당 교사로 배치되는 학교를 여럿 보았다. 다른 교사들이 다른 업무를 먼저 선점하여 선택권 없이 교육복지를 떠맡게 된 분들이다. 아주 소규모 학교의 경우, 교육복지 업무를 맡을 교사가 없어서 교감 선생님이 담당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매년 학기 초마다 반복되며, 그때마다 우리는 교사들에게 교육복지를 맡아 주셔서 감사하고, ‘교육복지라서 죄송하다’라는 말로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교육복지가 교사들에게 기피 영역이기는 하지만, 교사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진행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우선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교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며 첫 시작을 열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과 교사를 돕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학교 안에서 교육복지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출구가 절실한 오늘의 학교
학교에서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만 힘들다는 호소를 하는 건 아니다.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들의 이야기는 더욱 마음이 아프다. 문제 상황이 일어난 교실 안에서 교사는 고통스럽다. 집중하지 못하고, 떠들고, 폭언을 하고, 분위기를 흩트리는 청소년들 때문에 학급 분위기가 저해되고 수업 진행이 어려워진다. 학창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상위 그룹에만 속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잘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꿈에 그리던 것과 지금 마주하는 교실 상황은 너무나 다르다는 어느 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상당수의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 대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하며 학교 가는 것이 두렵다고도 한다. 그리고 학급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만 사라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원 치료 또는 대안학교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 데에도 이러한 맥락이 연결된다. 도저히 학급 안에 담아지지 않는다고 하여 지능 검사를 하고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하여 특수학급으로 분리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시도도 목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상황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지속될 때는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담임 교사는 병가 또는 휴직을 내고, 임시 담임이 배정된 상태에서 학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청소년과 교사, 양육자 모두 학교가 어렵고 힘든 상태라고 보인다. 우선 여러 가지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는 청소년의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소위 말해 문제가 있는 청소년은 다른 영역에서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그 누구도 교실 밖으로 밀려날 수는 없다. 청소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교실 안에 있을 권리가 있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양육자의 상황은 어떠한가? 학부모의 입장에서 학교를 대하는 태도는 양극단의 모습을 보인다. 혹시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잘못 평가될 것이 두려워서 위축되고, 몹시 조심스러워서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는 양육자들이 있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일에도 민원성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교사를 괴롭게 만드는 양육자들도 있다. 학교라는 체계를 구성하는 이들을 살펴볼 때, 오늘날의 학교가 희망적이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교사도 청소년도 양육자도 학교가 어렵다. 모두가 저마다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내가 교육복지 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때에는 학교가 너무 어렵다는 상황을 직면하면서, 문제가 되는 일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될수록 문제 자체를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여도 어려움이 나타나는 양상이 달라질 뿐, 사라지기보다는 확장되고 오히려 새로운 현상들이 추가된다. 그렇다면 가장 큰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하는 지금,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다시 명확히 해야 한다.
교실이 유난히 어려워진 이유
학교의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면서 근본적 원인을 찾다 보니 청소년이라는 존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결말로 귀결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청소년을 만난 시절을 곱씹게 되고, 교육복지센터에 몸담기 전에 했던 과거의 다른 활동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학교 밖·가정 밖 여자 청소년들과 대안학교에서 진로교육을 담당하던 강사로 시작하여 실무 교사로 활동했던 9년의 시간과 교육복지센터에서 지낸 6년의 시간을 연결해 보니 15년 동안 내가 만난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만난 청소년들은 나에게 선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❺ 청소년 지원에서 대상을 이해하고 방법을 찾을 때, 가장 주요한 것은 청소년의 언어와 특성을 알아 가는 것이었다. 교육학 또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된 것보다는 청소년을 직접 만나면서 당사자들이 알려준 내용들이 나에게는 철저하게 배움이 되었다.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 지금 내가 찾는, 우리가 고민하게 되는 내용의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다시 주제로 돌아가 지금 우리가, 사회가, 학교가 겪는 어려움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더 핵심적으로 교실이 유난히도 어려워진 이유를 찾아보자.
첫째, 교실 안에 저마다 다른 상황에 놓인 청소년이 존재한다. 경제적, 문화적, 정서적으로 편차가 크고 다종다양한 환경에서 청소년들은 살아간다. 가정별 소득 수준의 편차가 커지면서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환경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어졌다. 이주배경 청소년의 비율이 높아지고, 질병이 있는 가족을 돌보는 영케어러(young carer)가 늘고 있으며, 청소년 1인 가구의 형태도 종종 발견된다.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등을 넘어서 양육자가 수감된 상황이나 가정폭력으로 긴급하게 가정 밖으로 탈출한 상황을 겪는 이들도 있다. 청소년이 마주하는 이슈 역시 그렇다. 과거에 전형적으로 청소년 시기에 겪는 문제의 영역이었던 학업, 건강, 또래 관계,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ADHD(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 소아 우울증, 자해 등의 심리 정서 부분에 대한 진단적 용어가 흔해졌다. 또한 도박, 마약, 사기, 피싱 등 사회적 문제들도 청소년에게까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그렇다 보니 이들이 겪는 상황도 문제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다변한다. 학교 세팅으로 돌아가 보면, 점차 다양해지는 청소년이라는 인류가 한 교실에 모인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떠할까? 우리는 여기에서 두 번째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교사가 되는 길은 획일화되어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교사 양성 과정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청소년 시기에 학업으로 상위권 성적을 받는 이들이 교육대학에 진학하거나 교직을 이수한다. 우리 사회의 공교육 체계가 대학 입시 위주이기 때문에 소위 말해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그래야만 성공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덕분에 사교육 시장이 큰 발전을 이뤄 왔고,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사라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교육으로 단련된 청소년들이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며, 좋은 직장으로 간다. 많은 교사들도 비슷한 결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고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며 그렇게 교사가 된다. 그렇다 보니 이모저모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경험하기 어렵고, 폭넓은 환경적 스펙트럼 안에서도 일부의 영역만 알고 성장한 교사가 대부분이다. 수없이 다양한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을 교실 안에서 제자로 만났을 때 이해할 수 없음이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교사가 청소년의 환경을 알아 갈 때 현실보다 왜곡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있다.
태풍중학교에서 청소년 비바람을 의뢰 요청한 교사는 우리에게 가정 방문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교사는 우리에게 ‘비바람 집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쓰레기와 짐이 너무 많이 쌓여서 청소년의 생활이 염려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막상 가정 방문을 해 보니 대부분의 교육복지 대상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집은 전체적으로 좁고 어두웠다. 가구라고 할 것이 특별히 없어서 옷가지나 식료품 등이 잘 정돈되지 않은 정도였다. 빨래와 청소 등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부 개선의 필요는 있었지만, 교사가 생각한 것처럼 동주민센터 등에 요청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동주민센터에서도 저장 강박 등으로 심각한 상황에만 교사가 원하는 서비스를 실시한다고 안내하였다.
골짜기중학교의 청소년 실바람을 의뢰 요청한 교육청 관계자는 우리에게 학부모의 양육 의지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청소년 실바람은 등교하지 않는 날이 많고 교실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교육청에 청소년을 의뢰한 교사가 있었는데, 교사는 ‘양육자가 책임과 의지를 가지고 청소년을 등교시켜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원 요청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알고 보니 청소년 실바람은 우리 센터가 지원하던 어느 청소년의 동생이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던 가정이라서 매우 의아했다. 한부모 가정이기도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가족 구성원이 같이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이었다. 혹시나 우리와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정방문을 해 보았지만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청소년 실바람이 지적 기능과 적응행동 등에 어려움이 있어서 장애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골짜기중학교는 특수학급이 없는 상황이라 학교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양육자와의 면담을 통해 확인했다. 양육자가 자차를 소유하지 않으며 생업에 따른 생활 패턴 때문에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청소년 비바람과 실바람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사가 상상하는 정도나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큰 온도 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취약 계층의 가구가 살아가는 환경과 삶의 패턴에 대해 교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된다. 이는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그들을 탓해서도 안 된다. 사회적 구조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만들었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예전에도 교사 양성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더욱 어려움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그것은 세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셋째,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코로나19의 여파가 이 정도로 클 줄 몰랐다. 감염병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들이 현재를 만들어 냈다. 영아·유아·청소년 시기의 이들에게 강렬하게 지나간 3년의 코로나19는 상당한 결핍을 자아냈다. 등교 거부 또는 교실 거부 현상, 일상생활 관리 능력이나 언어 발달에 대한 지연, 사회성 발달의 지연으로 또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 알 수 없는 무기력과 우울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가장 난해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예전과 다른 생각이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타인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귀찮다, 대화하거나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더라도 대수롭지 않고 혼자라도 잘 지내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을 꽤 많이 만났다. 이들이 비단 청소년만은 아니며 비청소년 중에서도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강력한 단절의 시대를 겪은 이들이 후유증처럼 보이는 이 현상 앞에서 학교 시스템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교사와 학생이, 교사와 교사가, 학생과 학생이, 교사와 학부모가, 학부모와 학부모가, 학부모와 학생이 서로 돌보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는다. 나와 상관이 없으면 신경 쓰고 싶지 않고, 나에게 피해를 준다면 내 삶의 반경에서 그 대상이 사라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 때문에 학교생활이 괴롭고, 청소년은 교사와 양육자 때문에 삶이 힘들고, 학부모는 자녀와 교사 때문에 수많은 시간이 녹록지 않다. 누구 한쪽이 원인 제공을 하여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더 어려운 쪽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청소년과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일어나며, 그럴수록 학생, 교사, 학부모는 서로 회피하고 숨기고 관심을 끊고 싶게 된다고 사료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피해자이며 모두가 가해자가 된 것 같은 시대 안에 살고 있다.
이제 남은 한 가지 질문
학교 현장이 유난히도 어려워진 이유를 찾다 보면 더욱 막연해진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이 없을 것만 같은 까마득한 질문을 여러 날 되뇌었다. 교사가 사명감을 가지고 청소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공교육의 지향점이나 학교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따위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여기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현실적으로 무너진 학교 현장을 일으켜 세울 아주 실질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싶다. 그 지점에서 다시 한번 물음을 가져와 보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아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돕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제안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지금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말하고 싶다.
첫째, 우리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넓혀야 한다. 요즘은 누구나 마음이 좁아져 있다. 우리가 겪어 온 시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허용의 범주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허용의 범주를 넓혀서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을 교사들에게 청한다. 자칫 이 말로 인해 무력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대상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지도 않기를 바란다. 청소년을 마주할 때, 교사 본인이 살아온 환경이나 조건을 넘어서서 존재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우리가 성장해 온 배경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겪어 내고 있다. 또한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은 그들 때문에 또는 그들로부터 기인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가 자라 온 환경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청소년들이 겪어 내고 있다. 청소년에게 오늘날의 세상은 두렵고 험난하고 난해하다. 원가정이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으며, 삶의 방식 역시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의 성장기 때의 그것과 차원이 다른 영역들이 많아졌다.❻
둘째, 청소년 개개인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 사회 안에서 청소년이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은 시절은 없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전제가 그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그건 너무 당연하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은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시기이며, 자기의 한계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성취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주변 사람의 지지와 응원을 통해 본인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탐색하는 시절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에게는 주변 사람이 없다. 학업 외에 다른 것을 탐색하거나 도전해 보기 어렵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면 그건 공부를 충분히 한 다음에 해도 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다. 모든 청소년이 그럴 수 없고, 심지어 요즘 청소년기를 겪는 이들은 결코 우리 세대와 같지 않다. 사실 인간을 어느 영역으로 구분지어 놓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나 역할을 기대하는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결혼 후에는 출산을 해야 한다거나, 여성이 가사 일을 전담해야 한다거나, 남성이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며 노동을 해야 한다는 등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지금 시대는 인간을 한 개인으로 존중하며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때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본인이 그런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면 이 프레임은 청소년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셋째, 한 사람의 역할이 주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청소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할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 어느 학교에서 교육복지 부장 교사가 했던 질문이 있다. 외부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자해의 위험성이 있으며, 학교를 오지 않는 한 청소년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말이었다.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아요. 학교에는 오지도 않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심으로 청소년의 생사와 안전을 걱정하는 교사의 눈빛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교사에게 건넨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선생님 같은 한 분이 계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변함없이 꾸준히 연락해 주세요, 응답이 오지 않아도 전화와 메시지를 꾸준히 시도해 주세요, 등교 문제나 자해 이슈 등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화제를 전환하면서 안부를 물어 주세요, ‘오늘 아침에는 부쩍 날이 쌀쌀하더라.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니?’ 등으로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로 관심을 표현해 주세요 등의 말들을 이어 붙였다. 선생님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래도 제가 잘하고 있었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특성화고등학교의 교사였는데, 그분이 학교에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난히 교육복지 지원이 필요한 청소년이 많은 학교였는데, 그 교사가 있어서 안심이 되고 앞으로도 같이 무언가를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청소년들 역시 직관적으로 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진심인지 아닌지,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다가가도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나의 속마음을 말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다.
넷째, 관계 맺기가 모든 것의 시작이다. 한 번이라도 마음이 통하고 관계가 맺어지면 성공이다. 청소년이든 양육자든 마찬가지이다. 교사가 진심으로 그를 대하고 위로하며 지지한다면 그다음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과 가정을 지원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만 제시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정신과적 진단과 약물 치료, 심리 상담 등의 치료적 접근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또한 공교육이 맞지 않아 대안교육 시설이 더욱 적합한 청소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케이스라고 하더라도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되는 내용들은 거부감을 자아낸다. 가정에서 학교의 심리 정서 치료에 대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확인해 보면, 청소년을 문제 있다고 지적하거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로 취급하는 태도에 대한 불만이다.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 청소년과 가정을 지원할 때에도 관계 맺기가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거나 지속되지 않을 때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다. 결국 한 사람의 성장이 자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간다고 할 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립’한다. 이 전제를 잊지 않을 때 청소년에게 곁을 내주는 교사가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역시 교사에게 곁을 내줄 것이다.
누가 역할을 할 것인가
이 글을 ‘교육복지라서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말로만 죄송하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한다. 교육복지를 누가 할 것인가?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을 누가 만나고 지원할 것인가?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들은 더없이 무게감을 느낀다. 학교라는 시스템 안으로 사회복지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현재 교육복지의 형태가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돕는 데에 핵심이 있다. 학교 안에 사회복지 전담 인력이 배치되면 이상적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 가능한 방법인지 찾는 중이다.
“교사는 사회복지사가 아니에요. 우리는 가르치는 일을 하지 다른 일을 하기는 어려워요.”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갖는 부담감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교사가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성을 모두 갖추고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청소년의 존재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 역시 할 수 없다. 엄연히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한 사람이 떠맡거나 담당할 수 있는 역할 또한 아니다. 교육복지를 넘어서 학교가 당면해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대의 영역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의 교육》에서 연재를 시작하면서 담임 교사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학교에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가 있다 하더라도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을 발견하고 상담하고 지원할 방향을 찾는 데에는 담임 교사들이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교실에서 청소년을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담임 교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담임 교사들이 청소년의 상황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인 학교에서 교육복지 사업 역시 순조롭게 진행된다.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신규라 할지라도 담임 교사들이 마음을 모으는 학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반면, 담임 교사들은 관심이 없고 협조가 되지 않는다면 담당 교사가 아무리 적극적이어도 해당 학교 청소년들의 어려움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연대를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교사가, 교사들 서로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관점을 넓히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 청소년 한 사람의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갖고 대화해야 한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교실에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반복적으로 자해를 하는, 언제나 불안한, 도벽이 있는, 생활이 규칙적이지 않은, 급식을 먹지 않는, 옷과 신체가 깨끗하지 않은, 또래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등의 청소년들을 지원하면서 찾은 방법이다. 청소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재 자체로 인정하며 안부를 묻고 관심사에 대해 알고 소통을 시작할 때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과정으로 들어선다. 청소년들은 생각보다 교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지받고 싶어 하며, 인정받았을 때 큰 힘을 얻는다. 대화를 할 때에도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청소년을 응원하거나 위로하거나 챙기는 내용이 오고 갈 때 마음의 문이 열린다. 청소년이 교사에게 먼저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절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본다. 어려운 상황이 있다는 것을 공유하면 지원할 방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는 이미 변화를 시도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의 일을 학교만이 떠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사회적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온전히 교사들의 몫으로만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학교를 도울 수 있을지 오늘도 고민한다. 외부적으로는 교육청이, 자치구가, 지역 기관과 단체가, 마을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가정에서 양육을 담당하는 사람의 협력이 가장 필요하다. 같이 겪고 있는 어려운 과정을 함께 해결해 가야 한다. 지금 청소년과 교사와 학교가 당면한 상황들을 해결하는 것은 결코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마음을 모아 시작할 때 해낼 수 있는 일이다.
❶
서울형 교육복지사업에서 학교는 ‘거점학교’와 ‘일반학교’로 나뉜다. 교육복지 전문 인력 배치 여부가 핵심인데 ‘거점학교’에는 학교 안에 ‘지역사회교육전문가’라는 이름의 교육복지 전문 인력이 배치되고, ‘일반학교’는 그렇지 않다. 지역교육복지센터는 서울시의 해당 자치구에 있는 일반학교를 중점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청소년의 시좌에서 – 연재 첫 글 참조)
❷
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부서의 명칭이나 조직 체계에는 차이가 있다. 교육복지는 별도의 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의 업무에 포함되어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❸
필자가 운영하는 센터의 기준이며, 25개 자치구의 서울지역교육복지센터 전체에서 이와 같은 기준을 갖는 것은 아니다.
❹
이런 경우 부장 교사가 담당 교사의 역할까지 맡게 된다. 소규모 학교의 경우 교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담당 교사 배치가 더욱 어려워진다. 소규모 학교라고 하더라도 분담해야 하는 업무의 내용과 양은 줄어들지 않고 교사의 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담당할 인력이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❺
필자는 어린이책을 기획하고 집필하는 일을 하면서 진로와 관련된 동화책을 출간하여 진로 강사로 청소년 지원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재교육원, 보호관찰소, 일반 학교 등에서 강의 형태로 청소년을 만나다가 마포늘푸른자립학교(현 관악늘푸른교육센터)에서 만난 청소년들에게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❻
궁극적으로는 교사 선발과 양성 과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교사가 되고, 서로 다른 장점과 전문성이 발휘되는 구조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교사 개인의 마음가짐의 변화가 주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목적이 있으므로, 구조적 변화에 대한 부분은 연재의 후반부에서 다루고자 한다.
[연재] 청소년의 시좌에서 – 교육복지 현장의 이야기④
이해의 영역이 아닌 연대의 영역
- 지금도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발랑(신선웅)
woong_51@hanmail.net
관악교육복지센터 센터장
연재 순서
① 들리지 않는 목소리,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 – 교실 밖으로 밀려나는 학생들
② 전혀 다른 목소리, 학부모와 청소년 – 가정에서 안녕하지 않은 학생들
③ 청소년, 듣고 싶은 그들의 이야기 – 상담실 아닌 곳을 찾는 학생들
④ 이해의 영역이 아닌 연대의 영역 – 지금도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⑤ 잊고 지내는 당연한 것의 부재 - 지금을 살아가는 부모님들께
⑥ 우리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 – 구조적 변화와 모두의 연대
교육복지라서 죄송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1월 1일보다는 새 학년 새 학기를 여는 날을 1년을 시작하는 날로 느낄 것이다. 교사도 학생도 아니지만 학교를 지원하는 일을 하다 보니 첫 등교일이 1년을 시작하는 날 같아졌다. 해마다 2월의 마지막 날까지는 온 세상이 조용한 것 같고,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삼일절은 뒤숭숭하게 보내기 마련이고,
3월 2일 즈음 출근길에 등교하는 청소년 무리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쉽게도 한껏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의 일로 학교, 가정, 기관 등의 전화를 받으면서 설렘은 금세 사그라진다. 이렇게 시작되는 새 학기 초반은 긴장의 연속이다. 청소년을 만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사와의 새 학기 소통 부분도 만만치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교육복지 전문 인력이 배치되지 않은 일반학교❶에서는 교육복지가 교사의 여러 업무 중 하나로 들어간다. 교무분장에 따라 교무부, 연구부, 학생부 등의 조직 체계가 설정되는데 교육복지가 한 영역으로 들어간다.❷ 그런데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육복지는 교사들이 기피하는 업무로 꼽힌다. 해마다 3월은 교사와 학생이 학교에 적응하는 시기다. 4~5월이 되면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 일반학교 현장으로 학교 방문을 나선다. 이때 우리 센터에는 내부적으로 학교를 구분하는 한 가지 주요한 기준이 있다.❸ 해당 학교의 교육복지 부장 또는 담당 교사가 작년과 변동이 있는지 여부이다. 한 학교에서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가 2년 이상 변동 없이 유지되는 경우는 적은 편이다. 3년 이상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는 더욱 소수이다. 2024년 올해, 우리 관내의 일반학교는 38개교인데 그중 26개교에서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변경되었다. 부장 교사는 21개교에서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업무를 실행하는 담당 교사는 8개교에서만 유지된 정도이다. 더구나 4개교는 담당 교사 없이 부장 교사만 배치되었다.❹
올해만 보더라도 관내 78퍼센트의 학교에서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변경되었는데, 해마다 큰 차이가 있지는 않다.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는 상당수 그해에 처음 이 업무를 맡게 된다는 의미이다. 교육복지는 학교 안으로 사회복지의 개념이 결합되면서 시작된 형태이기 때문에 사회복지의 언어와 시스템이 사용된다. 교사가 처음 교육복지 사업을 담당하면 생소한 사회복지 용어부터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교육복지가 필요한 대상자를 찾고, 지원의 영역과 방법을 찾거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들이 이뤄져야 한다. 이렇다 보니 교사에게 교육복지는 다른 업무에 비해 꽤 낯설고 부담스러운 존재로 인식된다. 더구나 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교육복지 사업의 행정 처리 시스템이 학교 안에서 이뤄지는 다른 사업에 비해 번거롭다는 평도 있다. 예산 사용에 대한 행정 문서를 1년에 한 번만 작성하고 진행해도 되는 사업이 있는 반면, 교육복지는 매번 예산을 사용할 때마다 건건이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상 차이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교사 입장에서는 행정이 간소화되어 있는 사업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교육복지는 해마다 학교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영역이 되어 있다. 일반학교 교사와 교육복지 관련 회의를 하거나 그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진행할 때, 어쩔 수 없이 담당을 맡게 되었다는 교사들의 무겁고 어두운 표정이 여과 없이 느껴진다. 실제로 휴직 후 돌아온 교사, 그해에 처음 부임한 신입 교사, 심지어는 계약직 교사가 교육복지 담당 교사로 배치되는 학교를 여럿 보았다. 다른 교사들이 다른 업무를 먼저 선점하여 선택권 없이 교육복지를 떠맡게 된 분들이다. 아주 소규모 학교의 경우, 교육복지 업무를 맡을 교사가 없어서 교감 선생님이 담당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매년 학기 초마다 반복되며, 그때마다 우리는 교사들에게 교육복지를 맡아 주셔서 감사하고, ‘교육복지라서 죄송하다’라는 말로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 교육복지가 교사들에게 기피 영역이기는 하지만, 교사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진행되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우선은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교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며 첫 시작을 열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과 교사를 돕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학교 안에서 교육복지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출구가 절실한 오늘의 학교
학교에서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만 힘들다는 호소를 하는 건 아니다.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들의 이야기는 더욱 마음이 아프다. 문제 상황이 일어난 교실 안에서 교사는 고통스럽다. 집중하지 못하고, 떠들고, 폭언을 하고, 분위기를 흩트리는 청소년들 때문에 학급 분위기가 저해되고 수업 진행이 어려워진다. 학창 시절부터 열심히 공부하고 상위 그룹에만 속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고 잘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꿈에 그리던 것과 지금 마주하는 교실 상황은 너무나 다르다는 어느 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상당수의 교사들이 학교 현장에 대해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고 하며 학교 가는 것이 두렵다고도 한다. 그리고 학급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만 사라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원 치료 또는 대안학교를 알아봐 달라고 하는 데에도 이러한 맥락이 연결된다. 도저히 학급 안에 담아지지 않는다고 하여 지능 검사를 하고 특수교육대상자로 선정하여 특수학급으로 분리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시도도 목격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 상황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지속될 때는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담임 교사는 병가 또는 휴직을 내고, 임시 담임이 배정된 상태에서 학기가 진행되기도 한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청소년과 교사, 양육자 모두 학교가 어렵고 힘든 상태라고 보인다. 우선 여러 가지 이유로 학업을 중단하는 청소년의 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소위 말해 문제가 있는 청소년은 다른 영역에서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청소년이라면 그 누구도 교실 밖으로 밀려날 수는 없다. 청소년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교실 안에 있을 권리가 있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양육자의 상황은 어떠한가? 학부모의 입장에서 학교를 대하는 태도는 양극단의 모습을 보인다. 혹시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잘못 평가될 것이 두려워서 위축되고, 몹시 조심스러워서 해야 할 말도 하지 못하는 양육자들이 있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일에도 민원성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교사를 괴롭게 만드는 양육자들도 있다. 학교라는 체계를 구성하는 이들을 살펴볼 때, 오늘날의 학교가 희망적이지는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교사도 청소년도 양육자도 학교가 어렵다. 모두가 저마다의 입장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내가 교육복지 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때에는 학교가 너무 어렵다는 상황을 직면하면서, 문제가 되는 일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될수록 문제 자체를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여도 어려움이 나타나는 양상이 달라질 뿐, 사라지기보다는 확장되고 오히려 새로운 현상들이 추가된다. 그렇다면 가장 큰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하는 지금,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다시 명확히 해야 한다.
교실이 유난히 어려워진 이유
학교의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면서 근본적 원인을 찾다 보니 청소년이라는 존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결말로 귀결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청소년을 만난 시절을 곱씹게 되고, 교육복지센터에 몸담기 전에 했던 과거의 다른 활동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학교 밖·가정 밖 여자 청소년들과 대안학교에서 진로교육을 담당하던 강사로 시작하여 실무 교사로 활동했던 9년의 시간과 교육복지센터에서 지낸 6년의 시간을 연결해 보니 15년 동안 내가 만난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만난 청소년들은 나에게 선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❺ 청소년 지원에서 대상을 이해하고 방법을 찾을 때, 가장 주요한 것은 청소년의 언어와 특성을 알아 가는 것이었다. 교육학 또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된 것보다는 청소년을 직접 만나면서 당사자들이 알려준 내용들이 나에게는 철저하게 배움이 되었다.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 지금 내가 찾는, 우리가 고민하게 되는 내용의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다시 주제로 돌아가 지금 우리가, 사회가, 학교가 겪는 어려움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 더 핵심적으로 교실이 유난히도 어려워진 이유를 찾아보자.
첫째, 교실 안에 저마다 다른 상황에 놓인 청소년이 존재한다. 경제적, 문화적, 정서적으로 편차가 크고 다종다양한 환경에서 청소년들은 살아간다. 가정별 소득 수준의 편차가 커지면서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환경의 스펙트럼은 아주 넓어졌다. 이주배경 청소년의 비율이 높아지고, 질병이 있는 가족을 돌보는 영케어러(young carer)가 늘고 있으며, 청소년 1인 가구의 형태도 종종 발견된다.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등을 넘어서 양육자가 수감된 상황이나 가정폭력으로 긴급하게 가정 밖으로 탈출한 상황을 겪는 이들도 있다. 청소년이 마주하는 이슈 역시 그렇다. 과거에 전형적으로 청소년 시기에 겪는 문제의 영역이었던 학업, 건강, 또래 관계, 경제적 상황을 넘어서 ADHD(주의력 결핍 과다행동 장애), 소아 우울증, 자해 등의 심리 정서 부분에 대한 진단적 용어가 흔해졌다. 또한 도박, 마약, 사기, 피싱 등 사회적 문제들도 청소년에게까지 밀접하게 닿아 있다. 그렇다 보니 이들이 겪는 상황도 문제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롭고 다변한다. 학교 세팅으로 돌아가 보면, 점차 다양해지는 청소년이라는 인류가 한 교실에 모인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떠할까? 우리는 여기에서 두 번째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둘째, 교사가 되는 길은 획일화되어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교사 양성 과정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다. 청소년 시기에 학업으로 상위권 성적을 받는 이들이 교육대학에 진학하거나 교직을 이수한다. 우리 사회의 공교육 체계가 대학 입시 위주이기 때문에 소위 말해 공부를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가고, 그래야만 성공한다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 덕분에 사교육 시장이 큰 발전을 이뤄 왔고,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사라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사교육으로 단련된 청소년들이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며, 좋은 직장으로 간다. 많은 교사들도 비슷한 결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가정 환경에서 자라고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며 그렇게 교사가 된다. 그렇다 보니 이모저모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경험하기 어렵고, 폭넓은 환경적 스펙트럼 안에서도 일부의 영역만 알고 성장한 교사가 대부분이다. 수없이 다양한 상황에 놓인 청소년들을 교실 안에서 제자로 만났을 때 이해할 수 없음이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교사가 청소년의 환경을 알아 갈 때 현실보다 왜곡하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있다.
태풍중학교에서 청소년 비바람을 의뢰 요청한 교사는 우리에게 가정 방문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교사는 우리에게 ‘비바람 집에 가서 보면 알겠지만, 쓰레기와 짐이 너무 많이 쌓여서 청소년의 생활이 염려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막상 가정 방문을 해 보니 대부분의 교육복지 대상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집은 전체적으로 좁고 어두웠다. 가구라고 할 것이 특별히 없어서 옷가지나 식료품 등이 잘 정돈되지 않은 정도였다. 빨래와 청소 등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부 개선의 필요는 있었지만, 교사가 생각한 것처럼 동주민센터 등에 요청해서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동주민센터에서도 저장 강박 등으로 심각한 상황에만 교사가 원하는 서비스를 실시한다고 안내하였다.
골짜기중학교의 청소년 실바람을 의뢰 요청한 교육청 관계자는 우리에게 학부모의 양육 의지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청소년 실바람은 등교하지 않는 날이 많고 교실에서도 잘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교육청에 청소년을 의뢰한 교사가 있었는데, 교사는 ‘양육자가 책임과 의지를 가지고 청소년을 등교시켜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원 요청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알고 보니 청소년 실바람은 우리 센터가 지원하던 어느 청소년의 동생이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던 가정이라서 매우 의아했다. 한부모 가정이기도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가족 구성원이 같이 노력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이었다. 혹시나 우리와 연락이 닿지 않는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정방문을 해 보았지만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청소년 실바람이 지적 기능과 적응행동 등에 어려움이 있어서 장애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골짜기중학교는 특수학급이 없는 상황이라 학교 적응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양육자와의 면담을 통해 확인했다. 양육자가 자차를 소유하지 않으며 생업에 따른 생활 패턴 때문에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청소년 비바람과 실바람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사가 상상하는 정도나 해결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큰 온도 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양한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취약 계층의 가구가 살아가는 환경과 삶의 패턴에 대해 교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된다. 이는 교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그들을 탓해서도 안 된다. 사회적 구조가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를 만들었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예전에도 교사 양성 과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더욱 어려움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다시 한번 ‘왜’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그것은 세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셋째,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코로나19의 여파가 이 정도로 클 줄 몰랐다. 감염병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들이 현재를 만들어 냈다. 영아·유아·청소년 시기의 이들에게 강렬하게 지나간 3년의 코로나19는 상당한 결핍을 자아냈다. 등교 거부 또는 교실 거부 현상, 일상생활 관리 능력이나 언어 발달에 대한 지연, 사회성 발달의 지연으로 또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 알 수 없는 무기력과 우울감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가장 난해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예전과 다른 생각이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타인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귀찮다, 대화하거나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더라도 대수롭지 않고 혼자라도 잘 지내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을 꽤 많이 만났다. 이들이 비단 청소년만은 아니며 비청소년 중에서도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강력한 단절의 시대를 겪은 이들이 후유증처럼 보이는 이 현상 앞에서 학교 시스템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교사와 학생이, 교사와 교사가, 학생과 학생이, 교사와 학부모가, 학부모와 학부모가, 학부모와 학생이 서로 돌보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는다. 나와 상관이 없으면 신경 쓰고 싶지 않고, 나에게 피해를 준다면 내 삶의 반경에서 그 대상이 사라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 때문에 학교생활이 괴롭고, 청소년은 교사와 양육자 때문에 삶이 힘들고, 학부모는 자녀와 교사 때문에 수많은 시간이 녹록지 않다. 누구 한쪽이 원인 제공을 하여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더 어려운 쪽으로 몰아간다. 그래서 청소년과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일어나며, 그럴수록 학생, 교사, 학부모는 서로 회피하고 숨기고 관심을 끊고 싶게 된다고 사료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피해자이며 모두가 가해자가 된 것 같은 시대 안에 살고 있다.
이제 남은 한 가지 질문
학교 현장이 유난히도 어려워진 이유를 찾다 보면 더욱 막연해진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이 없을 것만 같은 까마득한 질문을 여러 날 되뇌었다. 교사가 사명감을 가지고 청소년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나, 공교육의 지향점이나 학교의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따위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까지는 여기에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현실적으로 무너진 학교 현장을 일으켜 세울 아주 실질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싶다. 그 지점에서 다시 한번 물음을 가져와 보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아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을 돕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제안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지금 교실을 지켜 내는 교사분들께 말하고 싶다.
첫째, 우리는 의도적으로 마음을 넓혀야 한다. 요즘은 누구나 마음이 좁아져 있다. 우리가 겪어 온 시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마음이란 허용의 범주를 말한다. 타인에 대한 허용의 범주를 넓혀서 ‘그럴 수 있지’ 하는 마음을 교사들에게 청한다. 자칫 이 말로 인해 무력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대상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해석되지도 않기를 바란다. 청소년을 마주할 때, 교사 본인이 살아온 환경이나 조건을 넘어서서 존재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우리가 성장해 온 배경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겪어 내고 있다. 또한 청소년이 겪는 어려움은 그들 때문에 또는 그들로부터 기인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교사가 자라 온 환경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청소년들이 겪어 내고 있다. 청소년에게 오늘날의 세상은 두렵고 험난하고 난해하다. 원가정이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으며, 삶의 방식 역시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다. 그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우리의 성장기 때의 그것과 차원이 다른 영역들이 많아졌다.❻
둘째, 청소년 개개인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 사회 안에서 청소년이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은 시절은 없었다. 예를 들어, 청소년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전제가 그런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그건 너무 당연하잖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은 공부만 열심히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시기이며, 자기의 한계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성취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주변 사람의 지지와 응원을 통해 본인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탐색하는 시절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에게는 주변 사람이 없다. 학업 외에 다른 것을 탐색하거나 도전해 보기 어렵다.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면 그건 공부를 충분히 한 다음에 해도 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많다. 모든 청소년이 그럴 수 없고, 심지어 요즘 청소년기를 겪는 이들은 결코 우리 세대와 같지 않다. 사실 인간을 어느 영역으로 구분지어 놓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나 역할을 기대하는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거나, 결혼 후에는 출산을 해야 한다거나, 여성이 가사 일을 전담해야 한다거나, 남성이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며 노동을 해야 한다는 등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지금 시대는 인간을 한 개인으로 존중하며 삶의 방식을 인정하는 때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본인이 그런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면 이 프레임은 청소년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셋째, 한 사람의 역할이 주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청소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라고 할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는 방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최근 어느 학교에서 교육복지 부장 교사가 했던 질문이 있다. 외부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자해의 위험성이 있으며, 학교를 오지 않는 한 청소년에 대해 자문을 구하는 말이었다.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아요. 학교에는 오지도 않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진심으로 청소년의 생사와 안전을 걱정하는 교사의 눈빛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교사에게 건넨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선생님 같은 한 분이 계시면 됩니다.”
지금처럼 변함없이 꾸준히 연락해 주세요, 응답이 오지 않아도 전화와 메시지를 꾸준히 시도해 주세요, 등교 문제나 자해 이슈 등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화제를 전환하면서 안부를 물어 주세요, ‘오늘 아침에는 부쩍 날이 쌀쌀하더라.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니?’ 등으로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로 관심을 표현해 주세요 등의 말들을 이어 붙였다. 선생님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면서 말했다.
“가장 어려운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래도 제가 잘하고 있었네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특성화고등학교의 교사였는데, 그분이 학교에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난히 교육복지 지원이 필요한 청소년이 많은 학교였는데, 그 교사가 있어서 안심이 되고 앞으로도 같이 무언가를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청소년들 역시 직관적으로 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진심인지 아닌지,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다가가도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나의 속마음을 말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말이다.
넷째, 관계 맺기가 모든 것의 시작이다. 한 번이라도 마음이 통하고 관계가 맺어지면 성공이다. 청소년이든 양육자든 마찬가지이다. 교사가 진심으로 그를 대하고 위로하며 지지한다면 그다음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과 가정을 지원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관계가 맺어지기 전에 해결하고자 하는 방법만 제시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정신과적 진단과 약물 치료, 심리 상담 등의 치료적 접근이 필요한 이들이 있다. 또한 공교육이 맞지 않아 대안교육 시설이 더욱 적합한 청소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케이스라고 하더라도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안되는 내용들은 거부감을 자아낸다. 가정에서 학교의 심리 정서 치료에 대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확인해 보면, 청소년을 문제 있다고 지적하거나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로 취급하는 태도에 대한 불만이다. 지역교육복지센터에서 청소년과 가정을 지원할 때에도 관계 맺기가 적절하게 이뤄지지 않거나 지속되지 않을 때 지원에 어려움이 생긴다. 결국 한 사람의 성장이 자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간다고 할 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관계 안에서 자립’한다. 이 전제를 잊지 않을 때 청소년에게 곁을 내주는 교사가 많아질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역시 교사에게 곁을 내줄 것이다.
누가 역할을 할 것인가
이 글을 ‘교육복지라서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런데 말로만 죄송하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 대안을 마련하고 실천한다. 교육복지를 누가 할 것인가?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을 누가 만나고 지원할 것인가? 혼자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들은 더없이 무게감을 느낀다. 학교라는 시스템 안으로 사회복지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현재 교육복지의 형태가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을 돕는 데에 핵심이 있다. 학교 안에 사회복지 전담 인력이 배치되면 이상적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이 가능한 방법인지 찾는 중이다.
“교사는 사회복지사가 아니에요. 우리는 가르치는 일을 하지 다른 일을 하기는 어려워요.”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갖는 부담감이 어떠한지 느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교사가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성을 모두 갖추고 역할을 감당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청소년의 존재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 달라는 요청 역시 할 수 없다. 엄연히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한 사람이 떠맡거나 담당할 수 있는 역할 또한 아니다. 교육복지를 넘어서 학교가 당면해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대의 영역으로 접근해야 한다.
《오늘의 교육》에서 연재를 시작하면서 담임 교사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학교에 교육복지를 담당하는 교사가 있다 하더라도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을 발견하고 상담하고 지원할 방향을 찾는 데에는 담임 교사들이 역할을 해 주어야 한다. 교실에서 청소년을 직접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담임 교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담임 교사들이 청소년의 상황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인 학교에서 교육복지 사업 역시 순조롭게 진행된다. 교육복지 담당 교사가 신규라 할지라도 담임 교사들이 마음을 모으는 학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반면, 담임 교사들은 관심이 없고 협조가 되지 않는다면 담당 교사가 아무리 적극적이어도 해당 학교 청소년들의 어려움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연대를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교사가, 교사들 서로가 마음을 모아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관점을 넓히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한다. 청소년 한 사람의 안부를 묻고 관심을 갖고 대화해야 한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교실에서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는, 반복적으로 자해를 하는, 언제나 불안한, 도벽이 있는, 생활이 규칙적이지 않은, 급식을 먹지 않는, 옷과 신체가 깨끗하지 않은, 또래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등의 청소년들을 지원하면서 찾은 방법이다. 청소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재 자체로 인정하며 안부를 묻고 관심사에 대해 알고 소통을 시작할 때 문제가 해결되어 가는 과정으로 들어선다. 청소년들은 생각보다 교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지지받고 싶어 하며, 인정받았을 때 큰 힘을 얻는다. 대화를 할 때에도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청소년을 응원하거나 위로하거나 챙기는 내용이 오고 갈 때 마음의 문이 열린다. 청소년이 교사에게 먼저 자기 고민을 이야기하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절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본다. 어려운 상황이 있다는 것을 공유하면 지원할 방법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또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는 이미 변화를 시도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의 일을 학교만이 떠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사회적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온전히 교사들의 몫으로만 남길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학교를 도울 수 있을지 오늘도 고민한다. 외부적으로는 교육청이, 자치구가, 지역 기관과 단체가, 마을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가정에서 양육을 담당하는 사람의 협력이 가장 필요하다. 같이 겪고 있는 어려운 과정을 함께 해결해 가야 한다. 지금 청소년과 교사와 학교가 당면한 상황들을 해결하는 것은 결코 한 사람이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마음을 모아 시작할 때 해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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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형 교육복지사업에서 학교는 ‘거점학교’와 ‘일반학교’로 나뉜다. 교육복지 전문 인력 배치 여부가 핵심인데 ‘거점학교’에는 학교 안에 ‘지역사회교육전문가’라는 이름의 교육복지 전문 인력이 배치되고, ‘일반학교’는 그렇지 않다. 지역교육복지센터는 서울시의 해당 자치구에 있는 일반학교를 중점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청소년의 시좌에서 – 연재 첫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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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나 학교에 따라 부서의 명칭이나 조직 체계에는 차이가 있다. 교육복지는 별도의 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의 업무에 포함되어 담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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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운영하는 센터의 기준이며, 25개 자치구의 서울지역교육복지센터 전체에서 이와 같은 기준을 갖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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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 부장 교사가 담당 교사의 역할까지 맡게 된다. 소규모 학교의 경우 교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담당 교사 배치가 더욱 어려워진다. 소규모 학교라고 하더라도 분담해야 하는 업무의 내용과 양은 줄어들지 않고 교사의 수가 적어지기 때문에 담당할 인력이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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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린이책을 기획하고 집필하는 일을 하면서 진로와 관련된 동화책을 출간하여 진로 강사로 청소년 지원 활동을 시작하였다. 영재교육원, 보호관찰소, 일반 학교 등에서 강의 형태로 청소년을 만나다가 마포늘푸른자립학교(현 관악늘푸른교육센터)에서 만난 청소년들에게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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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는 교사 선발과 양성 과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교사가 되고, 서로 다른 장점과 전문성이 발휘되는 구조를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교사 개인의 마음가짐의 변화가 주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목적이 있으므로, 구조적 변화에 대한 부분은 연재의 후반부에서 다루고자 한다.